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282
시하가 정정했다. 네 사람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5일 전?”
“그때부터 없었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그날은 분명…….”
“아, 아냐. 은하 님은 우리 만나고 바로 돌아갔어. 기분 전환으로 나온 거라고 했단 말이야.”
“돌아갔다고?”
“그리고 다음 날 다시 왔고.”
“그러고 보니…….”
시하가 턱을 손으로 쓸며 생각에 잠겼다.
“은하가, 일본에 무슨 일이 생길 거라고 했어.”
……확실히 딱 한 번 그런 말을 했었다. 심장이 차갑게 굳었다. 예슬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건 일본이 위험하니까 오래 있지 않는 게 좋다는 소리였잖아.”
“아니, 지금 생각해 보면 뭔가 확실한 정보를 잡은 것 같은 말투였어. 실제로 며칠 지나지 않아 일본이 이 꼴이 됐잖아.”
“하지만 일본의 데랜서만 움직인 게 아니랬잖아. 전 세계의 데랜서가 동시에 움직였다며.”
“맞아. 그 틈을 타 여기저기에서 소동이 일어났지.”
“흠…….”
이야기의 방향이 핵심에서 조금 벗어난 듯했을 때 고민에 잠겨 있던 인성이가 입을 열었다.
“이상하네. 나는 그런 정보는 못 봤는데.”
“그런 정보라니?”
“일본이 위험해질 것 같다는 뉘앙스의 정보. 실제로 일본은 최근 꽤 평화로웠고, 나는 그 평화가 한동안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어. 시하야, 일본이 위험하다는 말, 은하가 어떤 식으로 말했었어?”
“그러니까…….”
“…….”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빨리 일본을 떠나는 게 좋아. 조만간 무슨 일이 일어날 거야.’라고 했던가?”
“맞아. 그래서 나 처음엔 당황했잖아. 며칠 안에 무슨 사건이 터지려는 건가 싶어서. 하지만 그다음에 제대로 일본이 위험해서 그런 거라고 말해 줬어.”
“위험해서 떠나라고 했다고? 그걸 자신한테도 적용해 주면 좋으련만.”
위험하다. 인성이가 무언가를 확신했다. 그의 눈동자가 성진과 비등할 정도로 차가워졌다. 가슴이 죄책감에 짓눌리며 고통을 호소한다.
“그…….”
“인성이가 얻지 못한 정보를 독자적으로 얻었다 하면 꿈을 통해서 얻은 거겠군.”
“……!”
무엇이라도 말하려고 했지만 성진은 내가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심지어 그 말은 핵심에 바짝 다가서 있었다.
“하지만 꿈을 통해 얻은 정보라면 우리에게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어.”
“…….”
“아니, 사실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전혀 모르겠어. 그런데 이건 알겠다.”
“…….”
“전부터 너는 가끔 혼자서 이상한 행동을 하곤 했어. 특히 독자적으로 행동을 하면 큰일이 벌어졌지.”
“…….”
“물론 항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상하게 그런 큰일에서만 눈치가 빨랐고, 단서가 부족한데도 답을 찾아내기도 했지.”
고동 소리가 온몸을 지배하는 것처럼 시끄럽다. 나는 몸의 떨림을 애써 억눌렀다.
“예를 들어 유클라프 데임을 만났을 때나, 갑자기 자료를 찾겠다며 영국에 갔을 때. 도서관에 가서 책에 집중하기는커녕 계속 다른 장소를 신경 썼었지. 그리고 그 장소에서 사건이 터졌고.”
성진은 무서울 정도로 날카롭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동료들을 떼어 두고 혼자 갔던 거였다. 그는 이미 이전에 내 행동에서 수상함을 느꼈다.
“그걸 미리 알고 있었다고 한다면.”
“…….”
“너, 미래를 보는 거지?”
성진이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을 재촉했다. 소름이 끼쳤다. 성진은 적은 정보에서 마치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것처럼 정확한 해답을 이끌어 냈다. 동료들이 분위기가 소란스러워졌다.
“미래를 본다고? 너처럼?”
“내가 언제 미래를 본대?”
“시간을 본다며.”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야.”
전혀 못 보는 건 아니지만. 성진이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꿈’은 다르지.”
“달라? 뭐가?”
“하여튼……. 그런데 너, 그거 때문에 우리를 떼어 놓고 미래의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 여기 달려온 거라면, 그거야말로 어리석은 짓이다.”
“뭐, 뭐?”
“머저리 같은 짓이라고.”
“……!”
나는 이를 악물며 성진을 노려보았다. 내가 무슨 심정으로 이러는 건지도 모르면서! 내가, 왜, 어떤 기분으로, 꿈을 기피했던 건지도 모르면서. 성진은 차가운 눈으로 조소했다.
“미래를 본다는 건 인정하는가 보지?”
분노에 이를 악물고 있던 나는 흠칫했다. 저 녀석의 페이스에 휘말리면 안 된다. 하지만, 내가 미래를 본다는 걸 숨긴 건, 그걸 말하고 싶지 않았던 건…….
‘어차피.’
나는 꽉 쥔 주먹에 힘을 줬다.
‘바꾸지도 못하는데…….’
“네가 무슨 생각으로 미래를 엿본다는 걸 숨겼는지는 모르겠고, 틀림없이 쓸데없는 걸로 땅을 파고 있는 거리라 보지만.”
“윽…….”
원래부터 말 하나하나가 사람의 가슴을 찌르는 편이었지만 이렇게 제대로 악의를 느끼기는 오랜만이다. ……그래, 나한테 화가 난 거였지. 알아, 안다고.
필사적이었다고 했다. 일부러 보여 주듯이 피를 얼굴에 맞았다. 지금도 다 닦지 않은 피가 뺨에 눌어붙어 있다. 불안한, 분노한, 혹은 광기마저 느껴지는 필사적인 눈으로 나를 붙잡았다. 그것이 떠오르자 이번엔 여러 가지가 슬퍼졌다.
“예언가는 원래 자신이 본 미래는 바꿀 수 없어. 그러니까 너는 무슨 이유를 붙여서든 우리를 데리고 와야 했어.”
“……!”
“만약 그랬더라면 나도 이렇게 일부러 캐묻지 않았을 거다.”
“……뭐?”
성진이 이를 으드득 갈았지만 그 모습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야가 하얗게 바랬다. 심장이 멈추고, 머릿속이 일순 새하얘졌다.
“무슨 방법으로 어떤 정보를 알아냈든지, 네가 인하든 누구든 한 명이라도 데리고 갔으면 이렇게 억지로 캐내지도 않았을 거라고! 죽고 싶어서 미련하게 위험한 곳에 혼자서 머릴 들이밀고 있어!”
나는 결국 마지막이라 정한 기회에서도 미래를 바꾸지 못했다. 입술이 말을 자아내지 못하고 뻐끔거린다. 완전히 들킨 건가? 예언가는 자신이 본 미래를 바꿀 수 없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물어봐야 할까? 하지만 지금까지 숨겨 왔는데. 괴로워서, 어차피 막을 수 없었음을 알면서도 그것까지 합해서 복수를 하는 힘에 싣겠다고 계속 결심했었는데…….
작전에 필요하다면 나는 결국 이 능력을 털어놓았을까? 어차피 바꿀 수 없다면. 하지만 그렇더라도…….
“예언가……라니.”
“네 능력은 꿈이니까 예지도 꿈으로 하겠지. 예지몽을 꾼 거, 아닌가? 미래를 본다는 건 네가 예언가란 거고.”
“아니…….”
“아니야? 지금 와서 아니라고? 씨발, 내가 지금까지 해 온 게 우습냐? 네 표정도 못 읽을 것 같아? 몇 년을 봐 왔는데, 몇 번을 살폈는데.”
“…….”
“미련하게, 혼자 힘으로는 못 바꾼다는 것도 모르고.”
“…….”
나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숙였다. 성진이 인상을 일그러뜨린 채 중얼거렸다.
“우리에게 도움을 구했다면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르는데.”
“……!”
나는 다시금 눈을 크게 떴다. 바꿀 수……있었다고?
“무슨……!”
“예언가는 자신이 본 미래를 바꿀 수 없어. 예언가 본인이 바꿀 수 있다면 그걸 ‘미래를 보았다’라고는 말할 수 없잖아. 있었을지도 모르는 미래의 시간 선 하나를 본 것뿐이지. 지금 있는 장소에서 반드시 실현될 미래, 그걸 보는 사람을 예언가라고 하지.”
“…….”
“지닌 힘이 강할수록 그 예지는 절대적이다.”
힘이 강할수록? 그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건가. 능력인가, 마력인가.
“적어도 내가 만난 예언가는 다들 그랬어. 미래를 보는 ‘대가’겠지.”
대가, 마법 혹은 능력에는 대가가 있다. 강한 마법을 쓰려면 그에 걸맞은 경험과 지식과 재능과 마력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상처의 시간을 돌리면 그만큼의 고통이 뒤따른다. 문자마법을 사용하려면 문자를 써야 한다. 강한 힘일수록 대가는 커진다. 마력과 경험과 재능으로 보충하지 못한다면 대신 무언가를 등가 교환 해야 한다. 그게 대가, 혹은 제약이다.
벨라 트리저의 주살마법이 절대적인 이유는 끔찍하게도 그 대가 때문이다. 그녀는 천재이며 강력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녀가 지금처럼 무시무시하게 강해질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마법에 대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벨라 트리저가 가진 사신의 낫은 사람의 피와 영혼을 흡수한다. 피를, 영혼을 흡수할수록 강해진다. 낫에는 언제나 그녀가 죽인 자의 영혼과 의지가 스며들어 있다. 미영 할머니는 벨라가 그렇게까지 미치고 광기에 넘치게 된 건 망자에게 얽매인 탓도 있을 거라 했다.
“그러니 예언가는 미래를 바꿀 수 없어. 하지만 그 주변 사람은 다르지. 어쩌면 바꿀 수 있었을지도 몰라.”
‘말했으면, 처음부터 같이 갔으면 바꿀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떨리는 눈으로 지면을 응시했다. 미래를 보았다. 처음 꿈을 통해 본 그 장면이 난 미래의 광경이란 것조차 알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모든 것을 잃었다.
지난 일은 어쩔 수 없음을 안다. 죽은 자는 되살아나지 않는다. 그건……알고 있다.
그것을 대신하는 것처럼 미래를 막으려 했다. 막을 수 없어서 꿈이 두려워졌다. 막을 수 없었던 미래를 말하고 싶지 않아서 입을 다물고 혼자 뛰쳐나왔다. 미래를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나 혼자의 힘으로?
‘뭐야, 나. 진짜 머저리잖아.’
보이지 않았던 주박이 벗겨진 느낌이었다. 각자 다짐하고 함께 가기로 한 길임에도 나는 성진의 마음이 우리와는 다르다며 그를 이해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사실 가장 문제인 건 나였구나. 동료라고 하면서 함께 싸울 뿐 믿지 않았고, 나 혼자 바보같이 고립됐다. 처음부터 말했다면 무언가 바꿀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혼자서 모든 걸 자초하고.’
오래전과 똑같다. 사람을 바라보며 속내를 억누르고 만다. 다만 그때 화를 냈던 것과 달리 인하는 묵묵히 옆에서 나를 기다려 주고 있었다.
아니야. 믿지 않았던 게 아니야. 하지만 믿지 않는 것과 똑같은 짓을 했다. 알고 있었지만, 더 깊이 실감했다.
뭐 어때. 해 보고 싶었어. 바꿔 보고 싶었다고. 그래도…….
“아……진짜 어이없다…….”
“지랄. 진짜 어이없는 게 누군데.”
“하…….”
나는 고개를 들었다. 걱정이 서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동료들과 한 명 한 명 눈을 맞췄다. 나는 팔로 눈가를 슥슥 닦았다.
“미안.”
“은하야…….”
인하가 매달리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아까와 달리 의지를 곧추세웠다.
“이성진, 네 예상은 정답이야. 그래, 난 미래를 봤어.”
예슬이도, 시하도, 동료들도, 생각보다 다들 침착한 얼굴로 내 새로운 능력을 받아들였다. 동요 하나 없어서 오히려 우스울 지경이었다.
나는 곧 예슬이와 시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돌아가서 할게. 그 녀석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어. ─죽일 이유도 생겼고.”
“죽일 이유?”
“너희 얼굴을 봤잖아.”
“아…내가 그것도 생각 못 했을까 봐?”
“……?”
이성진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움직였다.
“폭주해서 무기의 힘을 망가뜨린 건 미안하지만, 대비는 했어. 저주를 걸어서 눈치채지 못하게 만들었지. 우리 ‘이름’도 기억에 남지 않을걸?”
“…….”
나는 찡그린 눈으로 성진을 응시했다. 정말이지 빈정 상하도록 철저한 놈이다. 성진이 곧 혀를 차며 덧붙였다.
“……설마 감염에 네 정화마법이 통하지 않을 줄은 몰랐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지. 정말이지 무사해서 다행이다.
“그것 외에도 이유는 많아.”
“어떤 이유.”
“눈앞에서 봐 버렸으니까.”
나는 속으로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시야에 흘러넘쳤던 죽음들.
“일본은 괴멸했어. 나는 결국 이번에도 막지 못했어.”
“일본이 괴멸하는 장면을 꿈에서 봤던 건가요? 그래서 저희한테 돌아가라고 한 거고요?”
그 말대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꿈에서 보는 건 보통 어느 시점의 ‘장면’이야. 꿈속의 나는 좀비와 싸우고 있었어. 내 뒤에 누군가 서 있었어. 그 사람들과 함께 도쿄 타워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았지. 궤멸한 일본을.”
“그건……!”
예슬이와 시하가 놀라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 장면’이 어느 시점인지 눈치챈 모양이다.
“그걸 막고 싶었어. 어차피 나라 궤멸을 꾸미는 건 트라베리아뿐일 테니까. 그 자식들이 마음대로 하게 두고 싶지 않았어. 결국 아무도 지키지 못했지만.”
“이상한 생각 하지 마.”
“…….”
“죽이는 것보다 지키는 게 배는 어려워. 죽이는 건 몇 번이나 기회를 노리면 되지만, 지키는 건 단 한 번 늦어도 기회가 사라진다.”
“…….”
순간 심장이 죄였다. 그래, 그래서 너는 우리에게 필사적이었나.
“그러니까 마무리는 우리에게 맡겨 줘.”
“‘그러니까’?”
“‘우리’?”
성진이와 인성이가 내 말을 되뇌었다. 예슬이가 양 주먹을 꽉 쥐며 앞으로 나섰다.
“우리는 이번에 일본에서 일어난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봤어. 그러니까 마무리는 우리가 하고 싶어.”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지키지 못했어. 이대로 당하기만 하고 물러날 순 없어. 적어도 끝은 우리가 맺을 거야.”
“은하 님에게 이대로 물러날 수 없다고, 쓰러뜨리자고 말한 것도 우리야. 부탁할게. 우리에게 맡겨 줘.”
“그 녀석은 분명 강하지만…….”
나는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이젠 나를 못 이겨. 그 녀석의 마법은 다 파악했거든.”
불만스럽거나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던 네 사람이 이어진 예슬이와 시하의 말에 조금씩 인상을 폈다.
“그러고 보니…….”
인하가 예슬이와 시하를 향해 얼핏 웃었다.
“상황이 이래서 인사도 못 했네. 오랜만이야, 둘 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야.”
예슬이가 씩 웃었다.
“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세계를 떠돌아다니고 있어. 걱정 마. 잘 지내고 있으니까. 이제 보니 너희는 잘 지내고 있었는지 잘 모르겠네.”
“아하하.”
소영이가 어색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인성이가 고민에 가득 찬 얼굴로 나란히 서 있는 우리 세 사람을 훑었다.
“…좋아. 은하는 확신이 있지 않은 한 단언하지 않으니까, 장군 시리즈를 쓰러뜨리는 건 너희에게 맡길게.”
“……!”
예슬이와 시하의 표정이 환해졌다. 다른 동료들도 잠시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우리를 보긴 했지만 곧 수긍했다. 가장 걱정되던 성진도 보랏빛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공기 감염에 대한 방책은 있어? 장군 시리즈를 쓰러뜨리는 건 좋지만 이 바이러스가 바깥으로 퍼지면 큰일이야. 일본을 감싸고 있는 저 영역이 언제 사라질지 몰라.”
그렇구나. 친구들은 모르겠구나.
“저걸 친 건 그 장군 시리즈야. 그 녀석이 없어지면 저것도 사라질 가능성이 커. 그러니 임시 방책은 준비해 뒀어.”
나는 어느새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는 작은 분홍색 꽃들을 가리켰다.
“저 꽃은 좀비 바이러스를 먹고 자라. 금방 씨를 퍼트리며 퍼지지. 그리고 좀비 바이러스가 사라지면 알아서 증식을 멈춰.”
“와. 어느새 주위가 꽃으로 가득 찼네요!”
마법으로 인해 초토화되었던 들판 위에 어느새 분홍 꽃이 만발해 있었다. 예슬이가 감탄했다.
「마스터, 변이된 바이러스도 해석 완료했습니다. 꽃씨를 생성하시겠습니까?」
“그래.”
허공에 주먹만 한 보라색 마정석이 생성됐다. 나는 그것을 인하에게 내밀었다.
“이걸 산산조각 내서 뿌려 줘.”
“알았어. 그리고 돌아가면……자세히 말해 주겠다고 했지만.”
인하가 양 허리에 손을 올렸다.
“난 성진이랑 다르거든. 네가 싫으면 말 안 해도 돼. 그래도 이번 일은 많이 화났으니까 그만큼 혼날 줄 알아.”
“응, 미안해.”
우리는 손을 흔들고 헤어졌다. 이제 일본 땅덩어리에서 성진의 저주를 벗어던진 장군 좀비를 찾아내야 하는데, 곧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성진이 나에게 장군 좀비가 향한 장소를 알려 줬기 때문이다.
우리가 있던 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후지산 기슭, 장군 좀비가 마지막 묘비로 선택한 장소는 바로 그곳이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장군 좀비의 옆에는 제법 강한 힘을 지닌 좀비가 하나 서 있었다. 그 앞에는 세 개의 봉분이 솟아 있었고, 봉분 위는 분홍색 꽃으로 뒤덮여 있었다.
“미치겠네…….”
한 팔을 잃은 장군 좀비가 헛웃음을 지었다.
“넷을 만들 생각이었는데, 이게 뭐야. 제대로 태어난 건 이 녀석뿐? 제대로 성장하지도 못했어. 마력도 생각보다 작아. 이 꽃은 대체 뭐야. 아까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제가 퍼트린 겁니다.”
“아앙?”
“당신이 뿌린 바이러스를 전부 잡아먹기 위해서요.”
손에 작은 보라색 조각이 잡혔다. 그것을 바닥에 뚝 떨어뜨렸다. 보라색 꽃은 분홍색 꽃을 보강해서 만든 것이니만큼 퍼지는 속도가 훨씬 빨라서, 바닥에 자리 잡자마자 싹을 틔웠다. 좀비 바이러스가 꽃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기민하게 그것을 눈치챈 장군 좀비가 흠칫했다.
“그만큼의 사람을 희생시켜 놓고서 그럼 당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나요?”
“그래! 희생시켰으니까!”
“당신이 한 일을 용서하지 못하고 벼르고 있는 자가 일본에 얼마나 많을까.”
“그 정도로 남아 있을 것 같아?”
장군 좀비가 킥킥 웃었다. 예슬이가 내 옆에 서며 이를 갈았다.
“재수 없는 놈! 목숨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걸 이 시대에 논하는 건가?”
비아냥거림에 가까운 말투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강한 마법사의 앞에서 목숨이라는 건 바람만 휙 불면 사라지는 촛불이지. 너희들도 잘 알 텐데? 강한 마법사인 너희라면.”
“알 게 뭐야! 우리는 사람 목숨을 가볍게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어!”
“죽이는 건 쉬워도 다시 돌이킬 수는 없잖아? 웃고 떠들고 함께했던 순간이 안개처럼 사라지지. 그런 시대라도, 그래서 소중해. 잃어버리면 다시는 만날 수 없으니까.”
예슬이에 이어 시하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솔직히 놀랐다. 두 사람의 생각은 나와 꼭 닮아 있었다. 같은 일을 겪었기 때문일까.
“나는 모르겠군. 나는 이미 죽어 있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우리는 새삼스럽게 견해 차이를 확인하며 대립했다.
시하가 우리를 향해 미적거리는 걸음으로 점점 다가오던 좀비를 향해 빠르게 달려들었다. 함께 싸우겠다고 했지만 시하와 예슬이는 자신의 실력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다. 아무리 팔이 잘리고 힘이 약해졌다 한들 초월자는 그들의 상대가 아니다. 그들의 상대는 장군 좀비가 만들어 낸 마지막 병기이며, 장군 좀비의 상대는 바로 나다.
장군 좀비의 주위에서 검은 입자가 솟아오르며 검이나 창의 형태로 변했다. 새롭게 진화한 정화마법은 내게 너무 부담이 간다. 그리고 마법을 파악한 것과 별개로 그의 마법은 나와 상성이 안 맞는다. 나는 인하의 빛을 응용해 입자를 연소시켰다.
“그냥 싸우는 건 재미없으니까 조금 이야기를 해 볼까.”
처음엔 기술을 겨루는 것처럼 서로의 마법에 마법을 부딪쳐 상쇄했다. 정화마법이 버겁다는 건, 정화 영역을 만들기도 버겁다는 뜻. 그렇다면 정화와 관계없는 영역을 불러오자.
『책 속의 세계』
책이 펼쳐지며 영역이 소환됐다. 어둠의 불꽃 영역. 적의 마법을 태워 공격력과 방어력을 낮춘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내 마법은 두 개야. 상태변화마법과 저주의 검은 번개.”
나는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하늘에서 어둠의 창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떨어져 내린다. 어둠을 먹을 때마다 불꽃의 힘이 더해진다. 환각마법으로 인해 몇 개의 창이 모습을 감췄다. 내 영역 안에 있는 장군 좀비는 환각을 눈치채지 못하고 어둠에 몇 대 얻어맞았다. 그와 동시에 내뻗어진 검은 번개가 내 몸 안에서 고통이란 감각을 일깨웠다. 그러나 아까보다는 고통스럽지 않다. 정화마법이 진화했기 때문일까?
“큭! 하아……둘 다 유능한 마법이라고 생각해. 생각은 해. 근데 난 욕심이 많거든. 하고 싶은 일은 태산 같은데 이 두 마법만으론 원하는 걸 전부 할 수 없어. 어이, 뭐라 반응 좀 해 봐.”
“……그럼 마법을 새로 만들면 되잖아요.”
퉁명스럽게 입을 열자 장군 좀비가 킥킥 웃었다.
“그래. 너희 마법사들은 그렇게 대답하겠지. 하지만 알다시피 우리는……마법사가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