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300
“당신은 강해.”
최인성은 바닥에 피를 퉷 뱉으며 똑바로 실프를 노려봤다.
“나보다 강한 사람을 쓰러뜨리기 위해선 갖은 수를 써야지 않겠어? 미련하게 싸우다 죽으면 누가 보상이라도 해 주나?”
“─그래도, 나는 마법사니까.”
최인성의 이죽거림이 한순간 멈췄다. 실프의 눈동자는 기이하리만치 깨끗했다.
“마법사답게, 기사라는 이름답게 싸우고 싶은 거야.”
최인성은 조금 놀랐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곧 어둡게 가라앉았다.
“뒤로는 온갖 더러운 일을 다 당하고, 그걸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돌려준 주제에, 싸울 때만 정정당당하면 다야?”
“내가 착하지 않다는 건 내가 제일 잘 알아.”
“엄마를 죽인 알카무라라도 기사라는 이름이 명예롭다고?”
“그러게……하지만.”
실프의 눈동자가 번뜩 빛났다.
“왜 내가 너 같은 놈한테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데?”
목소리와 함께 실프의 주위로 바람이 폭발했다. 날카로운 바람이 최인성이 만든 악의를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최인성은 그 힘을 채 피하지 못하고 휘말렸다.
“너같이 싸우는 놈 참 많이 봤어! 치사하게 싸우는 놈은 다른 곳에서도 치사하더라고! 그런 놈한테! 나랑 똑같은 놈한테! 설교 들을 이유는 없어!!!”
“커헉!”
폭풍에 휘말린 최인성은 충격에 의해 뒤로 날아가다가 복도 끝 벽에 부딪혀서야 겨우 멈췄다. 뺨이며 손목이 난도질당하며 피가 튀었다. 많이 얻어맞긴 했나 보다. 강력한 방어마법이 걸린 옷도 뜯기기 시작했다.
“재수 없는 새끼!”
몸을 가누는 최인성에게 바람으로 가속한 실프의 발차기가 날아왔다. 최인성은 가까스로 공격을 피한 대신 바닥에서 몇 바퀴 굴러야 했다. 드디어 벽에 금이 갔다. 금이 간 벽에서 하얀 금속이 후드득 떨어졌다.
최인성은 한동안 실프를 피해 도망 다녔다. 강력한 공격이 근처에 있는 꽃병도, 환풍구도, 전부 날려 버렸다.
‘역시 특수 기술만으론 이길 수 없구나. 좀 더 큰 힘이……힘이 필요해.’
최인성은 그림자에 녹아들며 힘껏 이동했다. 실프가 빠른 속도로 그 뒤를 따른다. 그림자 통로를 이용해 색 번개를 뿌렸으나, 실프는 끊임없는 공격으로 그 힘을 전부 자르며 뿌리쳤다.
‘이제 번개도 잘 통하지 않는군.’
최인성은 이를 악물었다.
다들 이기기 위한 기술을 익혀 간다. 이성진은 누구보다 빠르게 S랭크에 진입했고, 유은하도 그 뒤를 따라 S랭크에 진입했다. 하기야 두 사람의 마법 레벨은 그들이 A랭크였을 무렵부터 이미 S랭크였다. 그들은 그렇게 S랭크에 오르고서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고, 웬만한 장군 좀비와 싸워 이길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얻었다.
이성진과 유은하는 정말 천재다. 정점에 서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밖에 표현하지 못할 정도다. 뒤를 따르는 세 사람은 안타깝게도 두 사람만큼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소영이 가장 먼저 S랭크에 올랐고, 강인하는 마력만으론 S랭크 초반 마법사보다 강하다.
최인성 역시 최근에 S랭크 마법사에 올랐다. 전체적인 마법 순도도 올랐지만, 새로운 기술도 몸에 익혔다.
최인성은 항상 그림자를 좇으며 자라 왔다. 아버지의 그림자를 좇아 그림자마법을 만들었고, 자신보다 강한 이성진의 뒤를 계속 쫓아 강해졌다.
자신보다 앞서가는 사람은 이성진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던 시기는 지나갔다. 그사이에 여러 사람이 끼어들었다.
처음엔 분했다. 그래도 소중해졌다. 앞서가는 존재들. 그러나 그들은 최인성에게 등을 보이지 않았다. 손을 잡고, 이끌어 줬다. 그랬기에, 그토록 소중했기에, 그중 몇 명이 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을 때는 얼마나 지독한 심정이었는가.
화르륵!
그림자가 최인성의 몸을 거칠게 뒤덮었다. 방금까지와는 한층 다른 불길한 기운에 실프는 최인성의 뒤를 쫓다 말고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뭐지? 이 오싹한 마력은…….’
안 그래도 최인성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대부분 새카맣다. 그랬던 것이 아까보다 더 짙은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검게 물든 최인성의 형상이 변했다. 키가 몇 센티 더 커졌고, 눈동자가 보라색으로 물들었으며, 얼굴도 다르게 변했다. 인 외로 느껴질 정도로 조각같이 아름다운 얼굴이다.
그 손에는 새까만 검이 들려 있었다. 평소라면 조각 같은 외모에 홀렸을지도 모르나 그 모습에서 느껴지는 말로는 표현 못 할 위협적인 기운에 실프는 몸을 벌벌 떨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기운은 몸이 떨릴 정도로 위협적인데 그 모습은 잔영처럼 흐릿하고 창백하다.
‘잔영? 설마 저게 그림자? 저 무시무시한 게?’
이성진의 그림자를 뒤집어쓴 최인성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최인성은 어릴 적부터 계속 이성진의 마법을 지켜봤다. 그런 만큼 이성진의 마법은 그 누구보다 자신이 제일 잘 안다고 자신할 수 있다. 최인성은 검을 꽉 쥐고, 휘둘렀다.
“꺄아악!!!”
가볍게 휘두른 것만으로 웬만한 공격엔 꿈쩍도 안 했던 건물이 소리 없이 베어졌다.
날카로운 물길이 바람을 가르며 바람을 녹인다. 최인성은 벌써부터 숨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공격 속도를 더 올렸다. 넘실대는 검은 파도가 실프를 덮쳤다.
“우읍……!”
S랭크가 되면서 최인성은 새로운 기술을 쓸 수 있게 됐다. 그건 기억 속의 그림자를 재현하는 기술이다.
이 기술의 대단한 점은 자신보다 강한 마법사의 기술조차 ‘재현’한다는 것이다.
유은하처럼 완전히 똑같이 복사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현상을 그나마 비슷하게 재현할 수 있다.
지금의 그로선 사용할 수 없는 힘을 불러오는 기술인 만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짧다. 그러나 그렇게 짧은 시간이나마 좀 더 강해질 수 있다면…….
언젠가는 동료들을 뛰어넘고 싶다. 그들을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아버지를 위해서도. 하지만 동료들의 힘은 하나같이 뛰어나다. 분명 쉽지 않은 여정이 되겠지.
다른 동료의 그림자를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이성진의 검을 몇 번 휘두른 것만으로도 실프는 비명을 지르며 아래로 추락했다. 그림자가 이성진의 특수능력 ‘종말’을 모방하며 실프의 목숨을 갉아먹었다.
“윽, 쿨럭! 그 기술은 대체……. 제대로 싸울 수……있잖아……!”
최인성은 마법이 풀린 순간 힘이 풀려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켁, 쿨럭!”
역시 이성진의 기술을 모방하는 건 몸에 부담이 너무 많이 간다. 최인성은 몇 번 더 기침하다가 겨우겨우 후들거리는 팔다리를 지탱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은하는 적을 죽이는 대신 마력의 근원을 먹는다. 근원이 먹힌 사람은 마력을 잃는다. 전부 먹히면 마법을 쓰지 못하는 비마법사가 되고, 반만 먹히면 반만 남는다. 회복은 되지 않고, 이전의 마력을 되찾으려면 ‘성장’해야 한다.
최인성도 비슷하게 그림자를 먹는다. 그림자에도 근원이 있다. 그 근원을 먹으면 존재감이 흐릿해지며 힘을 잃는다. 사람에게 쉽게 잊혀지고, 눈에도 잘 보이지 않고, 감정이 약해지고, 스스로도 자신의 존재를 잘 인지하지 못한다. 그래도 그림자이니 본체가 있는 이상 언젠가는 회복된다. 그래도 회복하는 데 많이 시간이 걸리고, 힘의 한계나 재능도 낮아진다.
그리고 최인성은 그림자의 근원에서 본체의 핵을 뜯어낼 수 있다. 그림자를 흡수해 상대를 죽일 수 있다는 거다.
유은하는 트라베리아처럼 무분별하게 죽이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강인하와 이소영도 비슷한 입장이었다. 싸움 속에서 결국 적을 죽이게 된다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일부러 죽이고 싶지는 않다.
최인성도 물론 죽이는 건 내키지 않는다. 하지만 유은하와는 달리 그는 적의 목숨에 자비를 보일 생각이 없다. 상대는 트라베리아 휘하 조직이다. 살려 두면 언젠가는 또다시 적으로 만나겠지. 이번 목표는 기사 5명을 쓰러뜨리는 것.
평소라면 죽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최인성이 망설였던 건, 실프가 나름대로 알카무라의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엄마…….’
“젠장.”
그 모습이 자신의 모습과 겹쳤던 건지도 모르겠다. 피해자라고 해 봐야 그녀는 많은 사람을 죽였을 건데. 마찬가지로 자신도 죽이려고 했는데.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콰득
최인성은 그림자 괴물로 실프를 통째로 삼켰다. 괴물은 그림자의 반과 함께 마력을 뜯어 먹고 남은 것은 뱉어 냈다.
“윽…….”
최인성은 흡수한 그림자를 정신을 통하지 않고 그림자 안에 쌓아 두었다. 실프의 생명은 이 순간 완전히 끊어졌다.
“하아…….”
최인성은 숨을 고르며 몸을 돌렸다. 몸이 욱신거린다. 한동안 제대로 마법을 쓸 수 없을 것 같다. 기사가 없어도 여기에는 강한 로봇과 마법사가 많이 있다. 몸을 피해야…….
아니, 전투를 돕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 강인하와 이소영의 싸움을. 아프다고 쉬고 있을 새는 없다.
전투가 끝난 걸 알았는지 공간이 알림 창을 띄웠다. 최인성은 알림 창을 확인했다.
정예리를 공간의 중심에 보호했다. 그나마 좋은 소식이다. 강인하와 이소영이 합류, 전투 중. 김미영이 행방불명? 그럼 스카이는 어떻게 되는 거지? 유은하가 만든 미로로 견제 중이라고? 아니, 스카이는 이미 빠져나가 어느 장소에 도달했다.
스카이가 온 힘을 다해도 이 영역을 부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미 영역 ‘안’에 있기 때문이다. 유은하가 어떻게 마력을 쏟아부었는데. 물론 특수한 기술을 사용하면 또 다르겠지만, 어쨌거나 웬만해서는 쉽게 부서지지 않는다. 김미영의 힘으로도 쉽게 부서지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영역 자체는 부수지 못해도 소품은 아니다. 부술 수 있다. 일부라면 마법으로 어지럽힐 수 있다. 유은하는 전투 중, 스카이를 오래 잡아 둘 수는 없었겠지.
그런데 스카이를 견제할 수 있는 이성진과 유은하는 둘 다 전투 중이다. 유은하가 루카를 상대하고 있다고? 그럼 이성진의 상대는 누구지?
‘제3기사 루더……뭐? 김형일 씨?’
당황하며 통신기를 켜던 최인성은 곧 통신기에 메시지가 남아 있음을 확인했다. 발신인은 유은하와 이성진.
최인성은 메시지를 차례로 확인했다.
[정예리를 공간의 중심에 보호 완료. 제2기사 루카와 교전 시작.] [적을 쓰러뜨리면 이곳으로 올 것. 해킹해야 될 놈이 생겼어. 최대한 빨리 와라.]첫 번째는 유은하의 메시지고, 두 번째는 이성진의 메시지이다. 무슨 소리지? 최인성은 조금 당황하며 이성진에게 통신을 보냈다. 이성진은 싸우고 있다는 것치고는 생각보다 빨리 통신을 받았다.
“무슨 일이야?”
[별거……아니진 않네. 귀찮은 일이 생겼으니까 좀 와 봐.] […빠! 오빠! 정신 차려!]“뭐야? 여자 목소리? 혹시 정예리야?”
공간의 중심에는 공주의 기사(유은하 팀)와 연락을 나눌 수 있는 기능이 있다. 예상대로 이성진은 긍정했다. 이성진은 곧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김형일의 마법을 제거한 것까진 좋은데 팔에 이상한 명령이 심어져 있었나 봐. 김형일은 지금 거기에 조종당하고 있어.]“조종당하고 있다고? 나한테 그걸 풀어 달라는 거야?”
[팔을 부쉈다간 도움이 안 될 거 아냐.]통신기 너머에서 심상찮은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최인성은 조금 고민했다. 예상보다 일이 꼬였다. 스카이는 상대할 사람 없이 풀려났고 김미영은 블랙 박스에 진입했다. 김형일은 폭주 중이며 강인하와 이소영은 어려운 상대와 싸우는 중이다. 싸움을 끝낸다면 바로 강인하와 이소영을 도우러 갈 셈이었는데.
“……그래, 알았어. 갈게.”
최인성은 고민하다가 우선 김형일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그의 일을 해결하면 전력이 는다. 도움이 될 것이다. 정예리에게도 협력을 구해야겠다. 최인성도 많이 다쳤다. 치료를 받을 수 있으면 앞으로의 싸움이 편해진다.
그렇게 해서 김형일의 일이 해결되면 스카이는 이성진이 대신 맡으면 된다. 최인성은 바로 강인하와 이소영을 도우러 갈 것이다.
최인성이 생각을 정리하며 눈을 빛냈을 때였다.
「경고! 김미영 님의 옆에 있던 제 분신이 당했습니다. 죽은 분신의 기억은 본체로 전이됩니다. 김미영 님은 블랙 박스 안에 봉인되어 있던 김형일 님의 도플갱어 안드로이드와 전투 중입니다!」
“뭐? 그건 또 뭐야.”
갑자기 성 전체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위이이이잉──
[전 부대에 알린다. 적이 침입했다. 다시 알린다. 적이 침입했다.]‘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사는 성’ 효과로 인해 잠자고 있던 방범 시스템이 깨어났다. 마찬가지로 영역 효과에 의해 깊게 잠들어 있던 다른 적도 깨어날 것이다. 단, 이 상황은 여전히 외부로는 전해지지 않겠지만. 영역이 깨지지 않는 한 적의 세력은 변함없다.
“빨리도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군.”
최인성이 쳇 혀를 찼다. 그러나 진로를 바꾸지는 않았다. 김미영이 예정치 못했던 상대와 싸우든 말든 김형일을 먼저 해결하는 게 급하다. ──최인성의 힘으로는 스카이를 상대할 수 없으니까.
“공간 이동. 이성진의 곁으로.”
상황은 시급하다. 최인성은 지체하지 않고 이성진의 곁으로 이동했다.
김미영은 아주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스카이를 놓친 게 그 시초다. 김미영은 다른 동료와 달리 시야 공유가 익숙하지 않았다. 일행에 합류한 지는 1년이 지났지만 싸울 일은 별로 없었다. 함께 싸우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해도 좋았다.
김미영은 결국 스카이를 완전히 놓쳤다.
당황하던 김미영은 조금이라도 빛이 강한 마력을 찾으면 문을 열어 확인했고, 그 과정에서 쓸데없는 전투를 하게 되었다. 기실 전투라고 하기에도 무엇했다. 김미영이라는 일방적인 빙하기가 그들의 숨결을 얼렸을 뿐이니.
“으음, 성이 넓으니 어디부터 찾아야 할지 막막하군. 아, 그래, 곤란할 경우엔 문이를 부르면 된다고 했지.”
김미영은 쓸데없이 다섯 개의 방을 얼린 후에야 문이를 떠올렸다. 김미영은 다섯 번째로 얼린 방에 있던 로봇을 무심결에 손등으로 툭 두드리며 문이를 불렀다.
“문……이?!”
쾅! 쿵!
눈앞에 갑자기 철창이 내려오더니 바닥이 휙 열렸다. 한순간 감옥 안에 마법 무효화 공간이 열렸다. 웬만한 S랭크 마법사는 마법을 전혀 못 쓸 정도로 강력했다. 김미영은 바닥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2m쯤 추락하다가 멈췄다. 그러나 천장은 이미 닫혀 있었다. 김미영은 천장을 향해 얼음마법을 쏘았다. 그러나 천장은 얼기만 했을 뿐 부서지지 않았다. 김미영은 깜짝 놀랐다.
“대체…….”
「스카디 님, 여기는 블랙 박스 안입니다. 설마 스카디 님의 마법조차 안 통할 줄은 마스터도 저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음? 문이인가?”
「네. 스카디 님이 골치 아픈 장소에 떨어지기 전에 본체가 보낸 작은 의지가 저입니다.」
“저 천장이 내 마법을 막을 정도라면……나로도 공간 이동이 힘들겠군.”
김미영은 한숨을 내쉬다 일단 아래로 내려가 보기로 했다. 추락하며 눈을 깜빡였다. 왠지 아까보다 마력이 잘 안 보인다. 의아해하며 바닥에 착지한 김미영은 주위를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
주위는 빼곡히 로봇투성이였다. 대충 200기는 되어 보였다. 기본 기계병부터 기계 무기까지, 종류가 매우 다양했다.
“로봇 창고인가 보군.”
김미영은 혀를 찼다. 그러나 긴장하지는 않았다. 오랜 시간을 살아왔고, 그 시간 동안 경험을 쌓았다. 마법은 요 200년간 급속하게 발달했다. 그러나 지난 400년간의 경험은 결코 헛되지 않다.
그녀가 위험해질 일은 웬만해선 일어나지 않으리라. 그건 자만이 아니라 확신이며 진실이었다.
그녀는 현재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다. 지난 몇백 년간 있었던 위협과 비교해 봐도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이 가장 위험하다. 상대는 커븐 로드. 싸우면 99% 확률로 죽겠지.
그러나 김미영은 본디 랭킹 50위 이내에 드는 마법사이며, 무엇보다 고대의 얼음마법을 계승했다. 웬만한 괴물이 아니고서야 김미영은 쓰러뜨릴 수 없다.
지난 몇 년 사이 몇십 명의 초월자가 죽고 그보다 적은 초월자가 탄생했다. 그 초월자 사이에서도 강하다고 이름이 꼽히는 사람이 바로 그녀다.
김미영은 자신의 실력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여기 알카무라에서 그녀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는 마법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위험하게 싸우고 있을 손녀가 걱정되어 초조했다. 스카이는 무작위로 이동되자마자 어디로 달려갔을까. 스카이는 알카무라의 마스터를 철저히 따르는 충성심 높은 로봇이다. 알카무라의 마스터에게 갔을지도 모른다.
“스카이랑 싸우기도 전에 전력으로 마법을 써야겠군.”
아까 전 김미영이 가볍게 사용한 마법으로는 벽에 금도 가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에는 힘껏 마력을 퍼부을 수밖에.
“일단은 저 로봇부터 처리하고.”
유은하의 시야로 보지 않아도 안다. 저 로봇들은 생각보다 강하다. 움직이기 시작하면 곤란하리라. 이번 작전에 대단히 방해가 될 거다.
“미안하다. 괜히 지체되는군. 아이들에게 그렇게 전해 주렴.”
「여기는 바깥과 통신이 연결되지 않습니다.」
“이런.”
「스카디 님, 이대로 스카이를 견제하지 못하면 곤란합니다. 다음부터는 헤매기 시작한 시점에 바로 저를 불러 주세요.」
“할 말이 없군. 미안하다.”
김미영이 한숨을 내쉬며 손안에 마력을 모았다. ‘김선아 님도 은근히 덜렁대던데 그 성격이 어디서 나왔나 했더니.’ 김미영은 문이가 그렇게 생각하는 줄도 모르고 냉기가 잔뜩 압축된 마력을 바닥에 날렸다.
마력이 폭발하며 팽창했다. 로봇의 눈에 한순간 불빛이 켜지는가 했으나 그 직후 순식간에 얼어 버렸다.
김미영은 조금 고민하다가 공간마법을 사용해 봤다. 김미영은 공간마법과 상성이 좋기는 하나 유은하처럼 전문적이지는 않다. 게다가 주위 파장도 불완전했다. 공간을 얼리며 마법을 사용하려 하자 문이가 만류했다.
「안 됩니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공간 이동을 하면 마스터의 영역에 금이 갑니다!」
“금이 간다고?”
「블랙 박스 구역은 영역으로 전부 통제할 수 없다는 걸 알고 ‘격리’했잖습니까. 이 안의 모든 것은 영역 안에 전달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격리 구역. 그냥 내버려 두면 바깥으로 통신이 흘러갈 테니까요.」
“그랬지. 그 격리가 뚫리면…….”
「아주 많이 곤란합니다. 바깥 성에 침입이 알려지면 기사가 몰려올 테니까요. 스카이의 힘을 막을 정도로 설정했지만 과연 모든 기사의 공격을 막을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스카이가 전력으로 이 공간을 무너뜨리려 하면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벽을 부수는 것도 안 되니?”
「출구가 있다면 출구를 찾는 게 더 좋습니다. 저도 함께 블랙 박스를 수색하겠습니다.」
“그래.”
김미영은 앞에 있는 문을 부수고 로봇으로 꽉 차 있던 방에서 재빨리 나갔다. 구태여 부순 이유는 잠금장치가 걸려 있기 때문이었다. 블랙 박스의 외벽은 단단하지만, 내부의 방을 연결한 문은 쉽게 부서지나 보다.
블랙 박스 안은 바깥과는 분위기가 딴판이었다. 아까 김미영이 있던 복도는 하얀 패턴 벽지였는데, 지금은 검회색 패턴 벽지였다.
문이가 앞에 맵을 펼쳤다. 김미영이 본성 내부 어느 위치쯤에 있는지만 표시하는 맵이다. 반쯤 얼음으로 변한 김미영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며 출구를 찾았다. 블랙 박스 안은 방이 연속해 연결되어 있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군요. 어쩌면 물리적인 출구는 없을 수도 있겠습니다.」
“출구 없이 이동 진으로 다닐 가능성도 있긴 하지. 숨길 게 있어서 만든 곳이라면 그편이 적에겐 유리하고.”
쾅! 다음 문을 열었다. 넓은 철제 방에 유독 딱 하나 있는 원통 유리 관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런 것에 신경 쓸 틈이 없었기 때문에 바로 맞은편 벽에 마법을 날렸다. 아무래도 다음 방이 블랙 박스의 경계선 같다.
그런데 마력을 적당히 넣었다고는 하나 벽이 부서지지 않았다. 블랙 박스의 외벽도 아닌데 말이다.
“…쯧.”
김미영은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날아갔다. 벽이 아니라 문을 부수는 게 빠를 것 같다. 그때 소란스러운 소리가 김미영의 정신을 어지럽혔다.
위잉─ 위잉─ 위잉─!
[개폐 실험 감옥 7번, 실험체 번호 EXX1536, 실험을 시작합니다.] [실험 개체 TK-K0024. 실험 번호 0168. 상대는 한 명.] [측정 이상. 측정 이상. 상대의 마력치가 예상을 뛰어넘고 있습니다.]소란스러운 사이렌과 붉은 경고 등. 김미영은 혀를 찼다.
“쳇.”
「괜찮습니다. 이 소동도 바깥에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팬텀이 정말 신경 썼나 보군.”
벽에 마법을 썼기 때문인가? 아까 문을 부쉈을 때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는데? 이어서 김미영은 의문을 느꼈다.
“실험이란 건 뭐지? 실험 번호 0168?”
문이 역시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허공에 물음표만 띄웠다. 김미영이 문을 향해 얼음마법을 날렸다. 그러나 상당히 힘을 부었음에도 문은 미동도 없었다.
“이건?”
「마력 해석……완료. 문을 비롯해 이곳의 외벽은 블랙 박스 외벽과 같은 소재로 되어 있습니다.」
“쯧. 돌아 나가는 게 나으려나.”
막 몸을 돌린 순간 들린 어떤 작은 소리가 김미영의 신경을 사로잡았다.
뽈칵
플라스틱 뚜껑이 열릴 때 들릴 법한 가벼운 소리였다. 그 너머에서 느껴지는 음산한 마력에 김미영은 흠칫 몸을 돌렸다. 반쯤 얼음 조각으로 흩어졌던 김미영의 모습이 형체를 드러냈다. 신경 쓰였던 유리 관의 문이 열렸다.
“저건….”
「……?! 강합니다. 저 유리방은 봉인하는 용도였나 봅니다. 분신인 이 몸으로는 기척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강하다고? 얼마나?”
「상대의 마력이 불안정해 확실하지 않습니다.」
확실히 눈에 보이는 마력 색이 커졌다 줄어들었다 점멸하고 있다.
철그럭, 기분 나쁜 쇳소리와 함께 안에서 사슬에 꽁꽁 묶인 남자가 나왔다. 남자가 유리통 바깥으로 벗어난 직후 남자의 몸을 묶고 있던 사슬이 바닥으로 절그럭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남자의 갇혀 있던 마력이 폭발적으로 주위에 방출됐다. 김미영은 얼음으로 흩어졌던 몸을 완전히 모으며 주먹을 쥐었다.
“저 얼굴은…….”
그보다 신경 쓰인 것은 남자의 얼굴이었다. 몇 년 전과는 다른 암녹색 머리카락, 진한 녹색 눈동자, 틀림없이 김형일이었다.
“적은 배제, 배제한다…….”
그러나 행동은 다르다. 눈동자의 빛은 인간이 아니라 기계의 것이고 행동과 말투도 사람과는 달리 딱딱하고 기계적이다.
기계 눈에 섬뜩한 빛이 어렸다. 벽이 아까보다 더 튼튼한 마력으로 덧씌워졌다. 손에 생긴 것은 새카맣고 커다란 검은 화살. 불타오르는 검은 불꽃이 활시위에 메겨졌다.
쿠아아아!
검은 불꽃이 길을 그리며 날아온다. 김미영은 불꽃을 손으로 잡아 얼려 버렸다.
“안드로이드인가?”
「틀림없습니다.」
“김형일은 인질을 잡혀 억지로 알카무라에 협력하는 상태. 말하자면 근시일 내 자신을 찌를지도 모르는 검을 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대타를 준비해 두고 있었다는 건가.”
「제 의견도 같습니다.」
쯧, 김미영은 혀를 찼다. 다음 공격이 날아왔다. 색색의 진동을 뿌리며 여러 방향으로 흩어진다. 그러나 김미영은 이번에도 그 마법을 얼려 버렸다. 얼릴 뿐만 아니라 얼음으로 변한 마법을 제 몸에 흡수했다.
「다만 저 안드로이드의 마력은 지금의 김형일 님보다 강합니다.」
“강하다라…….”
검은 활이 갈색으로 변했다. 시위에 메겨진 화살 색깔은 은색이다.
“짐승 시리즈, 은랑.”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 커다란 은색 늑대 머리로 변했다. 김미영은 늑대의 공격을 피하며 손을 옆으로 뻗었다. 마법 꽁지가 서리와 함께 얼어붙었다. 김미영은 어느새 김형일의 앞에 떠 있었다.
“아는 사람과 똑같은 얼굴로 날뛰고 있는 모습을 보니 빈정 상하는군.”
쩌저저저정!
일대가 가볍게 얼었다. 안드로이드는 어렵사리 냉기를 피했다. 이미 몸의 일부가 얼어 있었다. 안 그래도 로봇에게 냉기는 적이다. 동력의 흐름을 멈추게 하는 적.
어느새 김미영의 주위를 은색 늑대가 둘러쌌다. 앞으로 뻗은 김미영의 손을 김형일이 활대로 튕겨 냈다. 그러나 김미영에게 닿는 순간 활대가 꽁꽁 얼었다. 바닥에 떨어진 활대가 산산이 부서졌다.
“마법 동결. 내 손에 얼어붙어 깨진 마법은 하루 동안 쓰지 못한다. 네가 약하다면 평생 쓰지 못했을 수도 있다만.”
주위에 천천히 냉기 안개가 퍼져 갔다. 바닥과 천장이 얼어붙으며 고드름이 자라났다.
“적, 강하군. 강해, 강, 강하……으으으윽…….”
“음?”
그때 중얼거리던 안드로이드의 마력이 갑자기 팽창했다. 활을 쥔 김형일의 옆으로 수십 개의 검은 화살이 생겨났다. 아까 사용했던 검은 불꽃이 아니라 날카롭고 형체가 명확했다.
「폭주 상태에 빠진 듯합니다. 저 안드로이드가 미완성인 이유는 혹시 아직 정신이 불안정하기 때문이 아닐지요. 혹은 기체와 마력이 완전히 맞물리지 않은 걸지도 모릅니다.」
“그렇군.”
아까보다 마력이 증폭됐다. 생각보다 강하다. 힘껏 마법을 꽂아 넣어도 어쩌면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상대가 회피에 주력한다면. 김형일의 회피마법, 거울마법은 까다롭기 그지없다. 만약 저 로봇이 여기에서 나간다면? 폭주한 상태니 충분히 여기를 뚫고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김미영이 저 안드로이드를 무시하고 이곳에서 나간다면, 안드로이드는…….
「스카디 님의 예상에 동의합니다. 필시 쫓아올 겁니다. 저 안드로이드는 여기에서 쓰러뜨려야 합니다.」
“스카이가 문제로군.”
「마스터의 현 상황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마스터라면 그것에 대처하기 위해 나섰을 겁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여기에서 물러나겠습니다.」
“물러난다고?”
「분신인 제 힘은 미력해 여기에서 통신을 할 수는 없지만 사라진다면 분신인 제 기억은 본체로 전이됩니다. 그러므로,」
새까만 화살이 퓩 사라졌다.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한순간 김미영조차 놓칠 만큼 빠른 속도로 날아온 검은 화살은 땅에 박히며 독성을 피웠다. 평소처럼 가볍게 마법을 쓰려던 김미영은 그 마법이 만만치 않음을 눈치챘다. 힘을 불어넣어 바람을 일으킨다. 손짓을 따라 얼음길이 생겨났다. 화살은 대부분 얼어붙어 바닥에 떨어졌으나, 몇 개의 화살이 가까스로 김미영의 마력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