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305
나는 어둠마법을 유기적으로 활용하며 루카에게 사용할 만한 기술을 고민했다. 그러나 내 손에 책이 펼쳐진 순간 루카가 소환한 고래가 내 책을 먹어 치우기 위해 달려왔다. 이번 고래는 아까 것과는 많이 달랐다. 검은색도 흰색도 아닌 회색. 게다가 날쌔고 가늘다.
나는 일말의 익숙함과 그 이상의 섬뜩함과 불길함에 재빨리 책을 없앴다. 그와 동시에 회색 고래가 내 손을 깨물었다.
“악……!”
물어뜯기는 순간 깨달았다.
이 마법의 정체가 무엇인지.
존재하는 것을 무로 돌리는 것에는 아주 다양한 종류가 있다. 이것도 그 다양한 종류 중 하나.
카득
「마스터!」
나는 고래의 위에 마법을 실체화했다. 마법이 새롭게 재조합되며 ‘회색 별의 고래’로 변했다.
“뭐야!”
손목 아래로 느껴지는 고통과 그 고통을 좀먹는 특이한 마력에 구역질을 느끼면서도 나는 회색 고래를 루카에게 되돌려 보냈다.
루카의 저 마법은 말 그대로 ‘소멸’시키는 마법이었다. 만약 책을 먹혔다면 나는 그 안에 기록되어 있던 마법을 영영 못 쓰게 되었을 것이다. 아니, 내 특수성이라면, 혹은 고위 마법사의 특수한 마법이나 회복마법이라면 되살릴 수 있을지 모르지. 그러나 그것은 내가 누군가의 마력의 핵을 먹는 것과 똑같은 행위.
나는 욱신거리는 손을 부여잡았다. 하지만 마력이라면 모를까, 내 ‘몸’은 이따위 걸로는 쉽게 없앨 수 없다.
나는 뜯어 먹힌 손에 남은 마력을 정화하며 상처에 환각마법을 덮어씌웠다. 다시 루카를 노려보는 순간, 루카가 도리어 자신에게 달려드는 회색 고래를 산산이 없애 버렸다.
내가 공격할 준비를 마친 순간 바로 옆에서 섬찟한 것이 느껴졌다. 검은……비? 아니, 검은 구슬이다. 어느새 주위에 나타난 잿빛 구슬이 무섭게 크기를 불려 간다. 그게 죄다 검은 고래로 변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정화의 사슬!』
사슬이 지그재그로 고래의 몸을 엮었다. 온몸이 한순간 아릿하게 아파 왔다.
“검은 거성.”
검은 허무 덩어리가 수십 개나 생겨났다. 검은 고래 사이에서 검은 별이 크기를 불려 간다. 고래가 허공을 헤엄치며 나를 삼키려 든다.
내가 그 순간 생각한 것은 참 어이없게도 역시 ‘닮았다’는 것이었다. 고래, 마법을 없애는 힘, 거기에 ‘별’까지. 다르다면 참 많이 다르지만 역시 닮았다. 나는 챙겨 온 마력석에서 마력을 흡수하며 외쳤다.
“『유성우!』”
마력이 빠듯하다. 주위로 남색 혹은 은색 빛 덩어리가 은하수처럼 펼쳐졌다. 별빛이 허공을 가르며 주위로 쏟아진다.
그러는 사이에도 허무는 합쳐지며 힘을 키웠다. 나는 마력이 빠듯한 것을 느끼면서도 결국 ‘성물’을 불렀다.
『란스의 성배』
성배의 힘에 의해 증폭된 유성우가 더 강대한 빛을 품고 허무를 향해 쏟아졌다. 별에 얻어맞은 허무는 분해되어 사라진다. 하지만 루카도 그에 못지않은 속도로 마법을 늘리고 있다. 그중 몇 개는 별을 분쇄하고 나에게 다가온다.
「마스터! 위를!」
“……!”
허무와 허무를 뒤덮은 마력에 가려 한순간 착각했다. 희미하게 만들어졌던 마법이 순식간에 짙어지며 모습을 드러냈다.
“……!”
나는 남은 성수를 허공에 뿌렸다. 성배가 활로 변한다. 시위를 당기지 않아도 화살이 멋대로 날아간다. 다가온 허무를 성배의 활이 날카롭게 갈랐다.
「옆에서 옵니다!」
문이가 옅게 실체화해 루카의 검을 막았다. 그러나 다급히 한 방어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물처럼 녹아 사라졌다. 나는 다가오는 칼을 성배로 만든 활대로 막았다.
그러나 우리 아래에서 다가온 고래까지는 미처 막을 수 없었다. 검은 고래의 입이 우리를 머금은 채 닫혀 갔지만 루카의 공격을 막느라 도망갈 수도 없다. 주위에 깔린 허무가 공간을 옮기는 걸 방해했다.
“어서 와, 내 세계에.”
루카가 입술을 끌어 올리며 웃었다. 그래, 그는 한순간 방심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 안에서 영역을 펼쳤다.
“너야말로 어서 와, 내 세계에.”
“……!”
“짧은 시간이나마 내 세계를 보여 줄게.”
우리는 두 개의 세계에 갇혔다.
루카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루카…? 그래, 그의 이름은 루카다.
“루카! 빨리 일어나! 오늘도 산에 가야지!”
“잠깐만 누나, 기다려! 나 일어났어!”
루카는 딱딱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삐걱거리는 침대를 보자 왠지 위화감이 들었다. 낡은 나무로 된 침대다. 그것뿐이다. 그런데 내 침대가 이랬던가?
방 풍경도 왠지 낯설다. 낡은 나무 벽과 바닥으로 이루어진 방이 오늘따라 이상하게 좁게 느껴졌다.
“루카?”
“미안, 누나! 지금 갈게.”
하지만 그 생각은 금세 머릿속에서 뿌옇게 흐려졌다. 루카는 옆에 개어 두었던 일상복으로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루카네 일가는 아침부터 바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른 아침부터 밭을 매러 갔다. 어린 루카와 누나는 함께 산나물을 캐거나 장작을 주우러 간다.
어려서 장작 줍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루카와 달리 누나는 재주가 많다. 요리도 잘하고, 뜨개질이나 바느질도 곧잘 한다. 그걸 팔면 돈이 꽤 들어온다.
“오늘도 힘차게 하자!”
누나가 주근깨 가득한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루카도 그것을 따라 밝게 웃었다.
산길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장작을 줍고 산나물을 캤다. 가던 길 중간에 마찬가지로 산나물을 캐던 누나의 친구를 만났다. 재잘재잘 떠드는 두 사람을 뒤따라 계속해서 산길을 올랐다.
평화롭다. 평화로운 일상인데……루카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지? 어째서 이렇게 무언가가 잘못된 듯한 기분이 들지?
“크르릉…….”
이래서였나 보다. 들꽃이 무성한 들판에서 산나물을 찾고 있던 세 사람은 굳었다. 나무를 헤치고 나타난 것은 사마귀 같은 손과 날카로운 발톱, 송곳니를 가진 ‘마수’였다.
“어째서 이런 곳에 마수가!”
“루카! 도망쳐!”
“──엘바 누나!”
엘바? 그래, 누나의 이름은 엘바다. 루카의 머릿속에 어렴풋한 기억이 스쳤다 사라졌다. 엘바는 루카의 손을 잡고 힘껏 달렸다.
“꺄아악!”
그러나 친구의 목소리에 다급히 멈춰 섰다.
“루카! 먼저 도망가렴!”
“누나!”
엘바의 친구는 힘이 풀렸는지 차마 도망가지도 못한 채 바닥에 주저앉아 부들부들 떨며 마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엘바가 나물이 든 바구니를 마수에게 던졌다. 마수의 손톱이 엘바를 향해 달려든다…….
‘안 돼! 마법을…!’
루카는 멈칫했다. 손을 뻗으면 무언가가 나올 것 같았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어라? 마법? 마법……이 뭐지?’
머릿속에 또 한 덩이 어둠이 내려앉는다. 루카는 엘바를 구하기 위해 힘껏 달렸다.
“헉……흑……윽…….”
『유성우』에 『란스의 성배』, 『책 속의 세계』 최대 기술까지. 마력이 텅텅 비었다. 나는 숨을 헐떡였다. 주인이 무력화된 걸 느꼈는지 나를 삼켰던 검은 고래와 그 주위를 둘러쌌던 허무의 마력이 허물어진다. 나는 숨을 고르며 한껏 마력을 불러 모았다.
나는 내가 만든 세계(책)를 힘껏 끌어안았다. 루카가 갇혀 있는 책. 그가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환상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영영 책 속의 등장인물로 살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힘들겠지.
나는 다 허물어지지 않은 허무를 천천히 씹어 먹었다. 마력이 고갈됐기 때문인지 먹는 동안 목이며 배가 조금 따가웠다. 나는 무속성 마력을 고스란히 내 마력으로 삼았다.
‘원래 그의 마력이랑 내 마력은 두 배 가까이 차이 나니까.’
끌어안고 있던 책이 결국 깨졌다. 더 보강할 힘이 없다. 나는 책을 바닥에 내버려 두고 바로 숨었다. 마력을 회복할 때까지는 꼼짝없이 도망쳐야 한다.
“이년이 진짜! 감히 우리 누나를 이용해? 죽여 버리겠어! 어디야?”
허무의 마력이 날카롭게 주위를 갈랐다. 나는 환각마법으로 꼼꼼하게 나를 감췄다. 혹시라도 허무의 마력에 부딪치지 않도록, 부딪치더라도 위화감이 루카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조심했다.
귀걸이에 넣어 두었던 마정석을 꺼내 꼭꼭 씹어 먹으며 반대쪽 복도에 기척을 만들었다. 아주 희미하게 느껴진 기척에 루카가 열을 내며 그 방향으로 달려갔다.
문이로부터 경악스러운 이야기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긴급 경고! 레이 님이 빈사의 부상을 입었습니다!」
“……뭐?”
나는 눈앞에 떠오른 경고 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구? 누가 부상을 입었다고?
빈사의 부상? 우리는 지금까지 싸우면서 여러 번 다쳤다. 그러나 아직까지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심한 부상을 입었던 적은 없다. 그도 그럴 게, 여태까지 이성진이…….
‘그래, 그 녀석이…….’
나는 입술을 악물었다. 인하가 다쳤다. 싸움에 부상은 따르는 법이다. 게다가 인하의 상대는 톨겟이다. 내 아이템을 쓰더라도 쉬운 상대는 아니지. 전력으로 힘을 끌어올려야만 겨우 상대해 볼 만한 상대였다.
하지만 빈사의 부상이라고? 아니, 괜찮을 거야. 그래도 인하는 무사할 거다. 인하는 정말이지 누구보다 주인공 같은 사람이니까! 함께 복수하기로 맹세했으니까!
─그러나 문이의 말은 그런 내 무의식적인 믿음을 차갑게 관통했다.
「불꽃이 가슴을 관통했습니다! ……!」
나는 숨을 들이켜며 다급히 경고 창을 붙잡았다.
“문이!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가슴을 관통당하다니, 그런…!”
나는 입술을 깨물며 통신을 연결했다. 그러나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이 허무 때문이구나!’
“문이!”
「괜찮습니다, 마스터! 레이 님은 죽지 않았습니다. 다만 위험한 상태입니다!」
“당연하지! 레이가 죽을 리 없어!”
어릴 적부터 기나긴 시간을 나와 공유한 친구다. 나와 그녀는 똑같이 잃었다. 복수의 중심은 우리였다. 복수를 이루기까지 절대 죽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절대!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걱정됐다. 두려워서 한순간 숨이 멈췄다.
그러나 나는 바로 움직일 수 없었다. 루카가 눈에 불을 켜고 나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싸움을 끝낸 동료가 있을 거다. 도우러 가게 하자. 그보다 빨리 치료해야 한다. 정예리, 그녀에게, 부탁을…! 문이를 통해 본성 안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을 정예리에게 통신을 연결했다. 동료들이 이미 사태를 파악하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레이가 위험하다던데!”
다급하게 말이 오갔다. 위급한 상황인가 보다. 인하가 위험에 처한 이상 적을 쓰러뜨리는 것만 생각하고 있을 수는 없다.
「괜찮아요! 제가 치료할게요! 상대는 루카죠? 싸움에 집중해 주세요!」
나는 흠칫했다.
“레이는 지금 대체 어떤…….”
「집중하세요! …위험해!」
“위험하다니 무슨…!”
인하가 위험하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곧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닐까? 맞을까? 다만 정예리의 말과 동시에 루카의 단검이 내 결계를 꿰뚫었다.
“찾았다…….”
청은색 머리카락이 어느새 음울한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감히 우리 누나를 이용했다 이거지. …곱겐 안 죽인다.”
“그건…….”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검은색이었던 머리카락이 아래에서부터 하얗게 물들어 간다. 완전히 은백색으로는 변하지 않고 은백색을 띤 흑발에서 멈춘다. 몸에 부담이 심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아끼고 있을 생각은 없다.
“제가 할 말이에요!”
결국 통신이 끊겼다. 나는 이를 악물며 마법을 썼다. 검푸른 그림자를 가진 은백색 마력이 파도처럼 휘몰아쳤다.
이 마법은 사람에게는 상해를 입히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마법은 철저하게 분해할 것이다.
만일을 위해 달아 두었던 정화마법 공명 및 증폭 팔찌가 하얀 빛을 내뿜었다. 은푸른색 마력이 흔적도 없이 씻겨 갔다.
“이게!”
어둠과 게이트를 융합, 내게도 ‘허무’라는 이름이 붙는 마법이 있다. 내 마법은 마법사의 마력을 먹어 치운다. 정신세계를 먹어 치운다. 관념을 먹어 치운다.
재빨리 날아간 어둠이 루카의 어깨를 통과해 지나쳤다. 어깨의 ‘감각’이 먹혔다.
“으윽…! 팔이!”
하얀 빛이 사그라듦과 동시에 왼쪽 머리칼이 어두운 남색으로 물들었다. 내 어둠마법이 이번엔 흐려지지 않고 루카의 몸 위에 꽂혔다.
“헉…!”
날아간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생성됐다. 관통된 것도 아니다. 그저 몸 위에 꽂혀 있을 뿐.
“어, 째서…….”
그의 특수능력은 마법 무효화. 몸에 닿은 마력은 사라진다. 혹은 흐려진다. 적어도 그의 몸에 전조 없이 마법이 꽂히는 건 그가 경험해 본 적 없는 미지의 일일 것이다.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해 그는 경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그냥 마법이 아니다. 환각이다.
환각마법도 그에게 닿으면 흐려진다. 그래서 정신력과 마력을 꽤나 쏟아부었다.
나는 어둠을 통해 그의 마력을 흡수하려고 했다. 하지만 반대로 그 또한 내 마력을 흡수하려고 했다.
우위는 루카였다. 마법이 흡수되어 간다. 그러나 나는 환각을 계속해서 새겼다. 적어도 눈과 감각으로는 그게 아닌 것처럼 느끼게 했다.
“제 마법을 흡수해 봤자 몸 안부터 정화당할 뿐이에요.”
오른손이 다시 하얀 빛으로 물들었다. 루카의 주위로 화살, 검, 도끼 등 다양한 무기 형상 마법이 생성됐다.
“이제 당신의 마법은 통하지 않아요.”
어둠과 빛이 동시에 루카의 몸에 꽂혔다. 루카는 마법을 흐리게 만들었다. 분명 마법은 흐려졌다. 다만 그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의 정신세계 너머로 손을 뻗었다. 힘을 기르기 위한 싸움이기에, 정신세계를 조작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 이것도 나의 ‘힘’이다.
내 위에 그가 생각하는 누나의 이미지를 덧씌우자. 그는 자신을 보호하다 죽은 누나를 잊지 못하고 있다.
적에게 자비를 두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원하는 건 다만 내가 그 빌어먹을 놈들과 똑같이 되지는 않는 거다. 죽이기 위해서만 살아가는 괴물은 되지 않겠어.
그러니 나는 똑바로 목표만 노릴 거다.
그의 정신세계에 있는 물건을 하나 가져왔다. 적당한 때에 부수면 그의 정신을 보기 좋게 흔들 수 있다.
그때, 그가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뭐? 정화?”
“…….”
“말이 돼? 특수속성 마법사인 건 대충 감 잡았어. 그런데 정화? 정화마법으로 내 마법을 정화했다고? 어이없는 소리 하지 마!”
“뭐가 어이없죠?”
“그렇잖아.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내 마법은 무속성마법이야! 모든 것을 허무로 돌리거나, 허무로 돌아간 세상을 만드는 마법이지. 야, ‘아무것도 없는데’ 뭘 정화한다는 거야! 내 마법은 정화마법으로 없앨 수 있는 마법이 아냐!”
“……!”
순간 나는 말을 잃었다. 그건 분명 그랬다. 무(無)라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뜻. 무속성 마법사는 마법을 무로 되돌린다. 그건 정화할 수 있는 더러움이 아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나는 얼마 전에도 정화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정화했다. 루카가 이공간을 열더니 그 안에서 어떠한 마법을 꺼내 내게 던졌다.
온몸이 오싹하고 섬뜩한 느낌에 나는 반사적으로 정화마법을 썼다. 한순간 숨이 막혔다. 검은 무언가는 내게 닿기 전에 새하얗게 변해 사라졌다.
“진짜로 정화마법이야?”
하, 루카가 헛웃음을 흘렸다.
“무속성마법은 분명 아니었어. 마법으로 상쇄한 것도 아니고. 하……미치겠네. 내 마법을 더럽다고 부정하는 놈이 세상에 있다니…….”
정화의 대상이라 해서 무조건 더러운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인성이의 그림자도 더러운 것이 되지 않나. 어쨌든 나는 동요하고 있던 루카의 정신을 지체하지 않고 부쉈다. 루카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악!!!”
그의 정신에 무슨 일이 생겼을까. 어떠한 기억이 뿌옇게 흐려지거나, 아니면 강렬한 트라우마가 플래시백되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몸에서 그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괴물의 모습으로 빠져나왔다. 내가 아직 다듬고 있는 기술, 『허무의 괴물』이다.
괴물이 루카를 향해 달려간다. 루카가 비명을 지르며 마법을 쐈다. 여전히 그는 오른쪽 어깨를 쓸 수 없다.
나는 괴물 안에 쏙 들어갔다. 괴물의 시선으로 루카를 보았다. 무속성마법이 부풀어 오른다. 유성우로 무속성마법을 어느 정도 분해한 뒤 환각마법을 사용해 그 마법을 그림으로 박제했다. 박제한 마법을 괴물 밑에서 솟아난 작은 괴물이 맛있게 먹었다.
입 안에 모든 것을 먹어 치우고 없애는 집속 포가 생겨났다. 마력이 더 팽창했다. 괴물이 집속 포를 쏘았다.
쿠과과과과!
거대한 마력이 루카를 덮쳤다. 그토록 단단했던 블랙 박스에 금이 갔다. 복도 너머까지 마력이 채워졌다.
“헉……흐읍…….”
루카는 어찌 되었든 나보다 한 단계 높은 마법사였다. 정신마법을 사용해 이겼다. 정신이 흐트러졌기에 그 엄청난 마법을 환각으로 조종할 수 있었다.
나보다 강한 마법에 환각을 집어넣는 건 A랭크이던 시절부터 가능했다. 그러나 그냥 부수는 데 그치지 않고 환각의 구조를 바꾸는 것은 그보다 훨씬 힘이 든다. 실체를 환상으로 바꾸는 것과 마찬가지이니까.
‘아직……힘이 많이 드네…….’
“아윽…!”
손끝에서부터 온몸이 찌릿찌릿 마비되며 아파 왔다. 정화마법 때문이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무사히 전투가 끝났다. 상처도 별로 없다. 상성이 잘 맞았던 거겠지.
나는 루카를 향해 다가갔다. 루카는 바닥에서 쓰러진 채 기침하고 있었다.
“헉, 윽……그만둬…….”
나는 한순간 걸음을 멈췄다.
“소문은 들었어……. 죽이는 대신, 마력을, 먹는 놈이 있다지? 그거, 너지…? 그놈이 먹은 마력은 돌아오지 않아……. 돌아올 수도 있지만, 긴 시간이 걸리겠지…. 쿨럭!”
“…….”
“난! 내가 S랭크 마법사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 시간을 없앨 거라면 차라리 죽여! 죽이라고!”
“…….”
“그렇군. 패자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법이지…….”
나는 마력의 근원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이 가슴 안을 통과하며 파고들었다. 루카가 눈을 부릅떴다. 가슴 속에서 마력의 근원이 빠져나왔다. 커다란 마력이 응축된 은푸른색 구슬이 내 손바닥 위를 굴렀다.
“악……윽……!”
그래, 나는 죽이는 대신 마력의 근원을 먹는다. 이후에도 우리를 막아설 만한 적의 마력은 전부 먹어 치우고, 적당한 지위에 있는 적의 마력은 방해가 되지 않을 만큼만 남기고 먹는다.
이걸 먹힌 마법사가 평생 마력을 회복할 수 없는지는 아직 모른다.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살아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 아마, 뭐든지.
나는 그의 마력을 10분의 1만 남겨 두고 먹어 치웠다. 이렇게 먹어도 그는 여전히 S랭크 마법사다. 마법 역시 초월한 상태일 테니 앞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겠지.
나는 근원을 입 안에 넣어 꿀꺽 삼켰다. 이상하게 눈가가 시큰거렸다. 무속성마법의 근원, 민희가 생각났다. 민희의 마력도 먹어 보았으면 좋았을걸. 왜 그때는 마력을 먹을 수 있다는 걸 몰랐을까.
텅 비었던 그릇이 순식간에 채워졌다. 아니, 흘러넘친다. 나는 그 고양감을 꾹 눌러 참았다.
전투가 끝난 걸 확인했는지 눈앞이 알림 창이 떴다.
「알림! 레이 님과 제피 님이 톨겟을 쓰러뜨렸습니다.
경고! 레이 님과 제피 님이 스카이와 조우했습니다!
알림! 스카디 님이 구하러 갔습니다.
알림! 스카디 님이 스카이를 쓰러뜨렸습니다.
알림! 영역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총 20곳입니다.」
문이, 이런 위험한 걸 안 말했단 말이야? 정말이지…….
‘이겼구나. 다행이다.’
아니, 그보다……균열?
쿠구궁!
갑자기 어디선가 진동 소리가 들렸다. 땅이 흔들리는 게 아니다. 마법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 영역을 침략하고 있는 마법의 근원이 무엇인지 느꼈다. 기둥이 흔들리고 있다! 순식간에 영역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새까만 어둠을 뚫고 바깥에서 빛이 새어 들어왔다.
“큭……으흐흐!”
범인은 루카였다. 저 검은 공은 그의 허무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먹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
“좀 불안하긴 했는데, 발동돼서 다행이네…. 으윽…! 만신창이 상태로 과연……밖에 있는 다른 놈들을 이길 수 있을까……?”
나는 기침하는 루카를 두고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상관없다.
이미 목적은 이뤘으니까.
동료들은 이미 할 일을 마치고 모여 있었다. 나는 다급히 인하에게 달려갔다. 마력의 흐름이 지극히 불안정하다. 그러나 예전에 비하면 어쩐지 안정적인 면도 보였다. 특히 마력의 순도와 레벨이 무서울 정도로 올라갔다.
“괜찮아?”
“괜찮…아.”
“마력이 많이 불안정하네. 정리하는 거 도와줄까?”
“아니. 억누를 수……있어.”
인하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곧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인하의 손을 꽉 감싸 쥐었다.
“루카가 영역을 부쉈다며?”
“그래. 나한테 오기 전에 이미 영역을 부술 장치를 해 뒀던 것 같아.”
그러나 우리 중 곤란해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열심히 영역을 복구하고 있는 정예리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