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309
“지주…….”
“예를 들어 작전에서 중심이 되는 사람. 내가 말하는 건 작전을 짜는 게 아니라 실행할 때 중심이 되는 사람이다. 이때 은하의 서포트는 아주 중요하잖니? 적지에 가서 가장 먼저 적진을 확인하고, 영역을 만들어 상대의 진영을 어지럽히지. 나는 그게 너희가 위험한 싸움에서도 이긴 원동력이라 생각한다.”
소영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그렇죠. 은하의 특수능력이 없었으면 엄청 힘들었을 거예요.”
“하지만 동시에 그건 서포트의 역할이기도 하죠.”
‘리더’가 해야만 하는 역할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인성이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미영 할머니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 심지어 은하는 보고 있으면 참 불안불안해. 쓰러지지는 않을까 싶어 계속 지켜보게 되지. 하지만 그럼에도 은하는 이 팀의 정신적인 지주다.”
“…….”
“이 팀에서 누구보다도 복수를 이루려고 하는 게 은하와 인하라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어. 너희는 먼저 일어선 두 사람의 등을 보고 걷기 시작했지. 하지만 가장 먼저 앞에 선 건 누구였니. 은하도 물론 인하에게 의지하고 있지만, 나는 인하가 얼마나 은하의 뒤를 쫓고 있는지 알고 있단다. 마음으로도, 실력으로도.”
“…….”
나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인하는 드디어 대등한 실력까지 올라왔다. 스카이와 대결했을 때 인하는 심장 안에 있는 혈족마법을 빛으로 녹였다. 그녀의 빛은 고대 얼음마저 바꿀 수 있다.
“저도 은하가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인하가 고개를 들며 나를 봤다.
“은하는 분명 앞에 나서서 무언가를 정하는 것에는 맞지 않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
“하지만 제 중심은, 오래전부터 ‘우리’의 중심은 은하였어요.”
나는 순간 울컥했다.
중심이라.
인하는 여기에 있는 우리만을 가리켜 말한 게 아니다. 오래전에 계속 함께했던 한수와 민희, 현호, 세 친구도 포함하여 말한 것이다.
그래, 이상한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으나 참 행복했던 초등학교 시절, 그때 친구들의 중심은 분명 나였다.
나는 처음 친구들과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초등학교 1학년 수준별 수업, 우리가 처음으로 모여 눈을 맞췄던 그날.
어색해하며 우리를 향해 인사했던 유정 언니와 인호 오빠. 활발했던 민희와 현호는 서로와 금세 친해졌다. 인하와 한수는 첫 만남부터 으르렁거렸다. 자주 나를 사이에 집어넣으며 싸웠다.
네 사람은 아옹다옹하면서 빠르게 친해졌다. 나는 그 곁에서 그들이 친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린애답게 칠칠맞은 면이 많아 무심코 챙겨 주게 됐다. 그게 쌓이다 보니 어느새 나는 자연스럽게 모두를 챙기고 있었다. 어렸기 때문에 더더욱 모두를 알게 모르게 챙겼던 내가 중심이 되었다. 나는 어린 친구들 사이에서는 가장 아는 게 많았으며, 마법 실력이 뛰어났다.
인하를 바라보던 형일 아저씨가 씩 웃었다.
“결정됐네.”
“좋아, 리더는 은하다!”
“다들 찬성이지?”
“당연하지! 은하 님 말고 누가 리더를 맡는다는 거야!”
모두가 한마음으로 박수를 쳤다. 나는 새로운 마음으로 동료들을 한 명 한 명 훑었다.
부담스러운 역할을 전부 손에서 던지려 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모두 한마음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 눈빛의 의미가 손에 잡힐 정도로 선명히 전해져 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으로 죽어도 잊을 수 없는 나의 모든 것이 비친다. 모든 것이 사라지던 순간이. 나는 천천히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그럼 모두 잘 부탁해.”
목소리와 함께 주위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앞으로 몇 년.”
나는 주먹을 쥐고 맹세했다.
“복수를 이루는 순간까지.”
형일 아저씨는 리더를 정했으니 팀 이름도 정하자며 활짝 웃었지만, 그건 다음에 고민하기로 했다. 뭐어, 느긋하게 생각하다 보면 좋은 이름이 나오지 않을까.
그보다는 흑조가 먼저다. 흑조의 진화식에는 모든 동료가 참석했다. 다른 사람은 조금 떨어져 물러나고, 나와 인성이, 형일 아저씨, 흑조 넷이서 중심에 모였다.
나는 빛을 거의 잃은 흑조에게 진화석을 주었다.
진화석에 닿은 코어가 변화를 일으켰다. 내 상상과 똑같았다. 꼭 닫혀 있던 코어가 톱니 같은 입을 벌리며 진화석을 씹어 삼켰다.
“헉!”
오색으로 빛나던 진화석이 흑조의 몸속으로 전부 들어갔다. 흑조의 몸이 진화석을 따라 오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화악!
흑조를 중심으로 빛이 폭발했다. 모두가 긴장한 얼굴로 빛을 주시했다.
빛이 가라앉자 새로운 ‘생명’을 품은 흑조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운 흑색 마법석이 빛을 받을 때마다 에메랄드가 뿌려진 것처럼 녹색으로 빛났다.
“어이, 흑조. 너 괜찮냐?”
[문제없다. 힘은 전보다 훨씬 강해졌다.]“헤에에…….”
“형일 아저씨, 잠깐 옆으로 돌아 주세요.”
“응? 오케이.”
형일 아저씨가 몸을 살짝 틀자마자 손을 뻗었다. 뻗어진 손이 날카롭게 비늘이 선 기계 팔을 통과해 임시로 넣어 두었던 마법석을 붙잡았다.
“으악!”
당황하며 비명을 지르는 형일 아저씨의 몸을 인성이가 꽉 붙잡아 제압했다.
“가만히 계세요. 은하의 특수능력이니까. 몸에는 해가 없어요.”
“은하 아가씨 특수능력은 하나같이 특이하네…….”
나는 모든 것을 통과해 주위 마력을 보는 것처럼 모든 것을 통과해 주위 마력을 잡을 수 있다. 형일 아저씨가 갑주 속으로 들어간 내 손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임시 마법석을 빼낸 다음 흑조를 집어넣었다. 꼭 자리에 정확히 맞추지 않아도 된다. 넣기만 하면 흑조가 알아서 자리를 찾을 테니까.
두근!
기계에서 다시 손을 빼는 순간 귀를 딱 붙이지 않는 한 타인에게까지는 잘 전달되지 않는 맥박 소리가 공기를 타고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윽…!”
형일 아저씨가 신음하며 팔을 부여잡았다.
두근, 두근….
쿵……쿵…! 쿠궁!
“─으아아악!”
“형일 오빠!”
형일 아저씨가 기계 팔을 부여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팔 주위로 마력이 폭사됐다. 당황하며 달려가려는 예리를 나와 인성이가 말렸다.
“가지 마.”
“기다려, 괜찮아.”
“……!”
“으으윽…….”
예리가 흔들리는 눈으로 우리를 보다가 이를 악물고 다시 형일 아저씨를 돌아보았다. 형일 아저씨가 신음하며 자리에 털썩 무릎 꿇었다. 거세게 휘몰아치던 마력이 천천히 흑조 안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긴장한 채 그 모습을 주시했다.
잠시 후 마력이 완전히 가라앉았다. 전과는 사뭇 달라진 검은색 팔이 형일 아저씨를, 우리를 반겼다.
“하아…….”
형일 아저씨가 한숨을 내쉬며 기계로 된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러다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어라, 뭐지?”
“왜요?”
“아니, 뭐라고 해야 할까. 전에는 그냥 로봇 팔이란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진짜 팔처럼 자연스러워.”
“흐음, 제대로 된 것 같네요.”
나와 인성이는 바로 형일 아저씨 곁에 다가가 팔의 상태를 살폈다. 마력도 잘 자리 잡았고, 강도도 훨씬 강해졌다. 이 팔은 틀림없이 ‘진화’했다.
“으음……어딘가 달라진 건 틀림없는데 아직 정확히 모르겠네. 혹시 나랑 대련해 줄 사람.”
“아, 저요!”
“나도.”
돌격대답게 소영이와 인하가 바로 손을 들었다.
나와 인성이도 팔 상태를 확인할 겸 동행하기로 했다. 마찬가지로 동료들도 형일 아저씨의 팔에 호기심을 가지고 우리를 따랐다.
안타깝지만 지금의 소영이는 형일 아저씨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형일 아저씨를 S랭크 중위권으로 끌어올렸던 흑조가 이제 진화까지 했다. 지금의 형일 아저씨는 스카이급이다.
형일 아저씨는 마법을 쓰는 중간중간 위력이 감당되지 않는지 당황한 기색으로 움직임을 멈추곤 했다. 인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인하가 빠르게 빛을 새겼다. 인하도 성장통을 앓고 난 직후에는 제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벽에 부딪치고는 했다. 하지만 그 후 소영이나 성진, 미영 할머니와 대련하며 지금의 레벨에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인하의 지금 실력은 나보다 약간 못한 정도. 아직 진화한 마법을 100%로 활용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충분히 S랭크 중위권이다.
흑조의 상태는 무척 좋았다. 흑조가 신이 나서 날뛴다. 나는 안심했다.
“환각으로 실체화하면 아마 지금보다 훨씬 쉬웠겠지만…….”
“응?”
“내가 환각 마법사라 그런가. 환각은 결국 환각이란 말이야. 진화가 훨씬 낫지.”
인성이가 킥킥 웃었다. 최근에는 잘 보여 주지 않던 천진난만한 미소다.
“그러게.”
잠시 후 형일 아저씨가 어린아이처럼 들뜬 얼굴로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10. 안정과 붕괴
예상했던 대로 디트리가 미국에 있던 평화 도시 하나를 침범하기 시작했다. 평화 도시 로쉘은 디트리와 데랜서에 잠식되기 전에 구원 요청을 했다.
트라베리아는 가디언을 심어 둘 정도로 디트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칫하면 커븐 로드와 싸우게 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디트리 자체의 힘도 강하다. 때문에 수호 연맹에서도 굴지의 마법사가 나섰다.
SR 프로젝트의 샐레나 리카르트, 무기 연합 캐티아의 스테이 레기우스, 용병 부대 울비스 산하 조직인 쿠르카의 대장 카라하 마림, 이상 세 명이다.
그 외에도 전투를 구경하거나 도시를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S랭크 마법사가 여럿 따라나섰다. 참극으로 S랭크 마법사가 3분의 1은 죽었다. 그럼에도 이 극한 상황에서, 극한 상황이기 때문에야말로 계속 S랭크 마법사가 나타나고 있다. 개중에는 인위적인 마법사도 다수이나 지금은 어쨌거나 실력자가 필요하다.
우리도 상황을 살펴볼 심산으로 미국의 평화 도시이자 방어 도시 로쉘로 향했다.
로쉘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대피한 모양이다.
자리를 지키고 있는 마법사는 다들 여차할 때 도망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마법사들뿐이었다. 우리처럼 상황을 확인하러 왔거나, 혹은 만일의 경우 싸움에 끼어들려고 온 것이겠지.
디트리는 도시 동쪽, 로쉘과 꽤나 떨어진 곳에 있었으나 워낙 거대해서 로쉘 안에서도 모습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우뚝 솟은 마정석이 어찌나 기분 나쁘던지.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디트리의 뿌리였다.
일본이 멸망한 이후 직접 본 디트리는 그리 많지 않다. 동료들도 디트리를 중점적으로 사진을 찍었지 뿌리의 마력까지 전부 담지는 않았다. 그래서 ‘뿌리’는 생각 못 했다. 나무 모양이라고 해도 어차피 마정석, 그렇게만 생각했으니까. 더군다나 뿌리의 마력은 꽤나 은밀하고 땅의 마력과 닮아 있어, 얼핏 봤을 때는 그러려니 하고 지나칠 정도다.
여기 있는 것이 특별한 것인지, 아니면 모든 디트리가 다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길게 뻗은 뿌리가 평화 도시 가까이까지 도달해 있었다. 그 뿌리를 토대로 데랜서가 자란다. 그러니 저 데랜서와 디트리는 한 몸이나 다름없다.
‘저대로 놔두면 안 되겠는데…….’
심각한 표정으로 땅 아래의 마력을 살필 때쯤 디트리 위로 번쩍하고 검은 번개가 내리쳤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그 위력이 절실하게 전해져 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잠시 후 엄청난 폭풍이 우리와 도시를 휩쓸고 지나갔다.
“역시 상위는……차원이 다르군.”
우리는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일어나는 싸움을 이 눈으로 생생히 지켜봤다. 번개가 사라지자 나타난 것은 디트리의 화신인 가디언. 커븐 로드나 그 휘하가 아니었다. 구릿빛 피부의 카라하가 화신을 단번에 처치했다. 화신은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웬만한 장군 시리즈보다 강했으니까. 그래도 S랭크 상위 마법사한테 통할 정도는 아니다.
샐레나가 영역을 펼쳤다. 인공적인 붉은 마력은 금세 디트리와 그 주위를 집어삼켰다. 멀어서 잘 들리지 않을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선명하게 귀에 닿았다.
「개체명 디트리, 배제한다.」
규율마법의 탐지능력은 과연 훌륭하다. 영역 안에 있는 디트리를 확실히 파악해 뿌리까지 감쌌으니까. 문제는 마법 영역 외부에 있는 뿌리까지는 감싸지 못했다는 것일까.
샐레나가 뿌리의 길이를 인지했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다만 나는 그것과 동시에 일어난 현상에 눈을 부릅떴다. 디트리에 있던 에너지가 빠르게 뿌리로 옮겨 가더니 다른 데랜서를 향해 몰려든다. 그건 정말이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저래서야, 며칠 안에 더 많은 새로운 디트리가…….’
다행히 스테이가 이상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스테이의 관찰안은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상당히 날카롭다.
규율마법의 영역이 순식간에 평화 도시 코앞까지 확장되었다. 샐레나가 다시 한번 디트리를 배제했다. 악마의 마정석이 샐레나와 가까운 곳에서부터 빠르게 사라져 간다. 힘이 도망간다. 뿌리에서 뿌리, 데랜서에서 데랜서, 그 에너지는 이윽고 우리 코앞까지 왔다.
‘위험하다!’
도망치는 거리가 길어질수록 마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마치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 같다. 우리가 있는 평화 도시 코앞에 있는 저것이 마지막 데랜서다. 저기에서 새로운 가지가 뻗어 날 거다.
“……!”
나는 뭐라 소리치는 대신 도시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을 데리고 함께 도시의 서쪽 끝으로 이동했다. 도시 서쪽 끝을 제외하고는 전부 위험한 범위라고 판단했다. 내가 이동시키려 한 사람 중에는 대등한 실력자도 있었고, 나보다 강한 사람도 있었다. 기민하게 내 마법을 눈치채고 거부한 사람도 있었고, 눈치챘음에도 거부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거부한 사람까지 챙길 여력은 없었다.
내 감지능력은 옳았다. 도시 앞에서 무지막지한 폭발이 일어났다. 작은 데랜서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기둥이 순식간에 높이 자라나더니, 빠르게 가지를 뻗고 늘린다. 데랜서는 아까 저곳에 존재했던 디트리보다 훨씬 높고 굵게 진화했다. 그 주위로 순식간에 아까보다 더 큰 힘을 가진 데랜서가 생겨났다.
“방금 거, 아가씨야?”
“네.”
“헉! 저기 있었으면 즉사였겠는데요?”
“…….”
그래, 죽었다. 몇 사람은 새로 생겨난 디트리에 생명을 흡수당했고, 몇 사람은 저주를 받고 가까스로 자리에서 도망쳤다.
‘디트리라. 괜히 진화한 게 아니군.’
디트리는 아직 조사 중인 물건으로, 제대로 쓰러뜨리기 위해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애초에 진화한 디트리를 건드릴 수 있는 마법사가 많지 않다. 거기에 장군 시리즈 못지않은 실력을 지닌 가디언을 포함해 어쩌면 트라베리아 소속 마법사와 싸워야 될지도 모르는 위험 부담을 안고 디트리를 공격하려는 자는 우리를 포함해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우리가 있는 곳은 가까스로 디트리의 저주 범위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나 저것은 더 자랄 기세다. 우리는 가까이에 있는 산의 전망대로 텔레포트 했다. 다른 사람들도 디트리의 기세를 눈치채고 우리와 가까운 장소로 텔레포트 했다.
“안녕하세요, 미나 씨!”
밝게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에 몇 사람이 흠칫했다. 아직 환각 아이템에 익숙해지지 못한 멤버들이 괜히 뺨이나 귓가를 매만진다. 그에 비해 변장에 익숙해진 우리는 무심히 뒤를 돌아보았다.
“오랜만이에요, 레일리 씨.”
“거의 한 달 만이죠? 조금 전엔 구해 주셔서 고마워요.”
레일리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옆에 서 있는 로일도 눈인사를 해 왔다.
“레일리 씨는 제가 구할 필요도 없었을 테지만요.”
“그렇지도 않아요.”
그건 그렇고 레일리의 센서도 역시 대단하다. 웬만한 사람은 이동시킨 게 나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거다. 하지만 레일리는 바로 눈치채고 나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나.
역시 레일리에게는 우리가 가면 조직이라는 걸 오래 숨길 수 없을 듯하다. 이미 감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대화도 잠깐, 우리는 다시 디트리에 집중했다.
샐레나가 다급히 도시를 향해 가지를 펼친 디트리에 다가섰다. 그러나 그 앞을 가로막으며 한 마법사가 소환됐다. 소환된 마법사는 순식간에 주위를 가시나무밭으로 만들었다. 시하가 꿀꺽 침을 삼켰다.
“독화……캐밀 에드번.”
커븐 로드인 캐밀은 금발에 화려하게 생긴 남자다. 캐밀에게 닿은 디트리가 더 엄청난 기세로 자라났다. 나는 레일리에게 경고했다.
“여기도 위험할 것 같아요.”
“그래 보이네요. 여러분! 좀 더 물러나도록 해요!”
나는 동료들을 데리고 이동했다. 우리는 하늘 높은 곳에서 그 싸움을 바라보았다. 하늘에서는 천둥이 치고, 허공에는 멀리서도 선명한 굵은 장미꽃이 피어나며, 그 위로 금색 창이 내리꽂히고, 샐레나의 손에서는 불꽃이 피어올랐다.
마법을 죽이는 캐밀의 장미꽃과 그 힘을 규제하는 규율마법.
리카르트가의 규율마법은 내 문자마법과 닮았다. 하지만 문자마법보다 훨씬 고위 레벨의 마법이다.
영역을 펼치고 구축한 힘을 불러온다. 규율이란 언령 안에 상대를 가두고 제한한다. 사실 규율마법은 전투 전용 마법은 아니다.
꼬박 하루에 걸친 전투는 그럭저럭 이쪽의 승리로 끝났다. 그럴 수밖에. 캐밀은 커븐 로드 중에선 하위권으로, 샐레나보다는 한 수 아래의 실력자다.
엔간한 방법으로는 다른 개체로 도망가며 더 강한 나무로 자라나던 디트리를 샐레나가 뿌리째 뽑아 들어 올렸다. 그런 다음 어디로도 도망가지 못하게끔 방어 막으로 감싸며 불로 태워 버렸다.
그러나 나는 볼 수 있었다. 디트리가 이동하던 땅 아래, 뿌리가 사라지면서 텅 비게 된 굴 안에 자그마한 마력이 남아 있는 것을.
작은 뿌리? 아니, 씨앗이다. 작고 작은 씨앗.
그것은 겉으로는 평범한 씨앗의 껍질을 덮어쓰고 있다. 그 껍질이 내부의 힘을 봉인하고 땅에 동화되며 사람의 시선을 흐리고 있다. 웬만한 감지마법으로는 절대로 잡히지 않으리라. 내가 ‘생명’을 보지 못했다면 나조차 무심코 넘겼을지도 모른다.
리카르트의 규율마법은 범위의 힘을 확정하고 규제하는 마법. 스테이의 관찰안은 마법을 관찰하는 마법. 둘 다 나보다는 감지능력이 떨어질 것이다. 과연 저것을 눈치챌 수 있을까?
저 씨앗을 저대로 내버려 두면……. 오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쳤다. 저대로 두면 평화로워진 줄 알고 다시 마을로 돌아온 사람들이 몽땅 생명력을 흡수당해 죽음을 맞이하리라. 그리고 전보다 더욱 큰 디트리가 가지를 뻗게 된다.
“…….”
“미나야, 왜 그래? 표정이 심각한데.”
나는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는 동료들에게 이 사실을 소곤소곤 전했다. 뭐? 동료들이 기겁했다. 그사이 캐밀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돌아갔다. 얼핏 스쳐 지나간 감정으로 보건대 그는 틀림없이 저 씨앗에 대해 알고 있다.
“정화마법을 써야 할 것 같아. 어떻게 쓸지 고민 중이야.”
“서툴게 정화하면 순식간에 다시 자라날 테니까?”
“그래.”
고민하고 있던 와중 소영이가 생각났다는 얼굴로 제안했다.
“맞다! 그 방법을 쓰면 어때? 일본에서 좀비를 없앨 때 썼던 그 꽃! 그 꽃처럼 디트리의 힘을 양분으로 흡수해서…….”
“흡수라. 그러네. 지금 당장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니까. 주변에 있던 양분은 먼저 피어났던 디트리한테 몇 차례 빼앗겼고.”
“꽃?”
무슨 꽃인지 모르는 동료에게 꽃에 대해 설명하니 모두의 눈이 놀람으로 커졌다.
“아가씨의 능력은 정말 싸움보다는 평화를 지키는 데 써야 할 능력이네.”
나는 살짝 표정을 굳혔으나 굳이 반론하지 않았다. 맞는 말이니까.
우리는 씨앗이 양분을 더 흡수하기 전에 빠르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럼 저 위에 양분을 흡수해 정화하는 꽃씨를 떨어뜨릴까? 꽃씨? 아니, 디트리니까 이트리(E-tree)를 키우자. 저 씨앗을 양분으로 자라 디트리를 잡아먹는, 정화하는, 디트리와 상극인 마정석 나무를 만들어 내는 거다. 마정석 나무는 학생 시절 많이 만들었던 물건이니만큼, 쉽게 만들 수 있다.
“그런데 너희, 여기 귀가 좋은 사람이 많다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평온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던 우리에게 성진이 날카롭게 경고했다. 우리를 신경 쓰고 있던 사람은 우리의 이야기를 대강 들었으리라. 하지만 상관없다.
“괜찮아. 이 건은 연맹 담당이니까, 키워 내려면 최소한 레일리 씨랑은 상담해야 했을 테고.”
숨겨서 진행할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환각마법으로 가리고 메시지로 대화를 나눴을 것이다. 냉정한 어투로 읊조리자마자 레일리가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좀비 바이러스를 없앤 그 꽃, 미나 씨가 만든 거였군요!”
“…….”
“방금 말했던 나무, 저희에게 정기적으로 파세요! 디트리와 데랜서에 대항할 대책이 될 거예요!”
레일리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으며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 나는 크게 고민할 필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오늘 직접 뿌리를 보고 심각성을 깨달았다. 괜히 진화한 게 아니다. 디트리는 데랜서처럼 안이하게 대처해서는 안 된다. 저것들은 저대로 내버려 두면 언젠가 뿌리만으로 지구를 전부 덮을 거다. 나는 문이를 불렀다. 허공에 필요한 설정이 주르륵 적혔다.
『천사의 나무(이트리)
디트리와 데렌서의 힘을 양분 삼아 자라난다. (힘을 빨아들여 정화함)
주위 마력을 흡수하며 정화한다.
디트리와 데렌서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잘 자란다.
일정 이상 더러움이 모이면 꽃이 핀다.
열매를 심으면 새로운 이트리가 자라난다.
모든 성장*숙성 속도는 디트리와 데렌서의 마력 농도에 따라 다르다.』
설정이 압축되며 마정석 씨앗이 하나 생겨났다. 트라베리아가 만든 마정석이 어두운 색이었다면 내가 만든 마정석은 무척 밝고 화사하다. 내부는 투명한 백색이며 표면은 분홍빛을 띠고 있다.
“그럼 지금부터 땅 밑에 있는 씨앗을 정화하려 하는데, 괜찮죠?”
“물론이죠. 제 눈에는 보이지도 않아요. 아마 어머니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레일리가 조금 분한 눈으로 귓가를 매만졌다.
“어머니께는 제가 전해 둘게요. 무슨 일이 있으면 보조해 주실 거예요. 마음 놓고 쓰세요.”
그 힘은 너무 불길해서 포착하고 나니 멀리서도 선명히 보인다. 나는 더 늦기 전에 조치를 취했다.
조금 부담스럽지만 정화마법을 이끌어 냈다. 마법의 근원 안의 근원, 그 중심을 더 쥐어짜는 듯한 느낌에 한순간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정화마법에도 빨리 익숙해져야 할 텐데.
은백색 화살이 반짝이는 별빛을 뿌리며 이트리 씨앗을 삼켰다. 전과는 사뭇 다른 레벨 높은 마력에 레일리가 순간 침을 삼켰다.
손에 있던 화살이 이동했다. 먼 하늘에서 생겨난 은빛 빛줄기가 땅 아래를 직선으로 꿰뚫었다.
속도는 빛만큼 빠르고, 마력은 바닥을 통과해, 정확히 땅 밑에 숨어 있던 디트리의 씨앗을 꿰뚫는다. 정화의 힘이 순식간에 악마의 씨앗을 삼켰다. 동요하며 발버둥 치는 악마의 힘을 짓눌러 삼킨다.
이트리가 순식간에 싹을 틔우며 뿌리를 뻗었다. 뿌리가 남은 더러움을 흡수했다.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디트리가 있던 자리에 커다란 이트리가 생겨났다.
생각보다 양분이 많았던지 순식간에 꽃이 피었다. 흩날리는 꽃잎과 나뭇잎이 정화의 힘을 아름답게 펼쳤다.
열매에 날개가 생겨났다. 열매가 뽀르르 날아가더니 데랜서의 기운이 충만한 곳에 스며들었다. 거기에서 또 순식간에 싹이 자라났다.
“예쁜 나무네요.”
그사이 캐밀과의 전투를 끝낸 샐레나 일행이 우리 근처로 이동했다. 샐레나와 카라하, 스테이가 멀리서 자라난 이트리를 보고 감탄했다.
“난 전혀 눈치 못 챘는데. 정말 씨앗이 있었어?”
“미나 씨가 말하는 거니 틀림없어요.”
“그래, 저 정화마법이 뛰어난 건 알겠어.”
스테이가 미심쩍은 눈으로 이트리를 살폈다. 나는 레일리에게 이트리에 대해 몇 가지 더 설명했다.
“나무가 너무 많아서 방해되거들랑 비켜 달라고 하세요. 그러면 날아서 비켜 줄 거예요.”
“헉! 뭐예요? 그 환상적인 연출은! 귀여워라~.”
“그리고 이파리랑 열매는 먹을 수 있어요.”
“정말요? 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