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310
“기왕 만드는 김에 먹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더라고요.”
나만 해도 마력만 먹고도 사니까. 레일리의 뺨이 흥분으로 붉어졌다.
“정말 예뻐요! 저거 꼭 저한테 파세요! 씨앗 몇 개 정도 파실 수 있나요?”
“당장은 열 개네요.”
나는 씨앗 열 개가 든 주머니를 레일리에게 건넸다.
“이만 갑시다, 리더. 잘 끝났잖아요?”
“네…….”
형일 아저씨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보란 듯이 정중히 말을 거는 형일 아저씨를 보고 레일리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리더? 그러고 보니 오늘은 평소보다 인원이 많네요. 모르는 분들도 오셨고. 사실 저는 SR에 오시는 다섯 분이 팀원 전부인 줄 알았어요. 리더도 팀명도 없다고 했었잖아요.”
레일리는 처음 보는, 환각 아이템으로 변장하고 있는 새로운 다섯 명을 유심히 훑었다. 형일 아저씨, 예리, 예슬이, 시하, 미영 할머니. 레일리가 미영 할머니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
“아, 이분과는 디트리 진화 사건 때 잠시 만났던 것 같네요.”
“아, 네. 맞아요.”
“생각해 보면 저희는 미나 씨의 팀에 대해서는 별로 모르네요. 만나던 팀원도 알고 보니 일부였고.”
레일리가 섭섭해하는 태도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원래부터 공적인 협력 관계기는 하지만요. 리더가 되신 거 축하해요. 혹시 이제 팀명도 생겼나요?”
“네.”
“어떤 이름인가요?”
“새벽별무리(루시드)라고 해요.”
손으로 허공에 작게 글자를 적었다. 한글 옆에 새겨진 알파벳을 보고 레일리가 눈을 깜빡였다.
“방금 ‘루시드’라고 말하셨죠? 영어 이름은 루시드고, 한국 이름은 ‘새벽별무리’인 건가요? 근데 뜻은 ‘새벽별무리’라고 번역되네?”
번역마법은 서로의 말을 마음으로 알아들을 수 있게 하는 마법이다. 루시드는 ‘새벽별무리’라는 뜻을 담아 우리가 만든 단어니 그렇게 번역돼도 이상하지 않다.
“편한 대로 부르면 되나요?”
“네.”
“음, 하지만 새벽별무리와 루시드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 거죠? 처음엔 영어 루시드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건 아니겠죠? 루시드……아!”
레일리가 무엇을 떠올렸는지 탄성을 내질렀다.
“혹시 라틴어 ‘루키페르’에서 따온 건가요? 악마의 이름으로 유명하지만 본래 뜻은 샛별이잖아요.”
그 말대로, 팀명은 타락한 천사이자 지옥의 왕 루시퍼에서 따왔다.
루시퍼는 본래 라틴어로 발음은 통상 루키페르다. 루키페르의 뜻은 샛별, 빛을 전달하는 자, 타락한 천사. ‘샛별’을 뜻하는 단어는 달리 많지만 ‘타락한 천사’라는 게 참 지금의 우리와 딱 맞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성군(星群)을 뜻하는 시두스(sidus)를 섞어서 ‘루시드(Lucid)’다.
거기다 루시드는 내 힘인 ‘꿈’을 연상시키는 단어기도 하다. 어휘, 뜻, 해석, 전부 마음에 든다.
참고로 팀명을 지은 것은 예리다. 리더인 나를 상징으로 두고 며칠이나 고민하여 만든 이 이름은 이미 모두에게 받아들여졌다.
레일리가 나를 보며 킥킥 웃었다.
“하지만 미나 씨도 참, 하필이면 ‘루키페르’라니.”
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거짓을 입에 담았다.
“루키페르보다는 ‘루시드’란 단어가 마음에 든 거지만요.”
“그런 건가요?”
“네.”
“그렇군요. 알았어요.”
레일리가 밝게 웃었다.
우리는 하늘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별. 타락한 별은 이윽고 지금 세계의 신을 집어삼킬 것이다.
“그럼 다시 한번 잘 부탁드려요. 새벽별무리 여러분.”
레일리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그 손을 굳게 잡았다.
예리는 팀명을 만든 김에 신이 나서는 로고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쳐부수는 조직에 마크를 그려 두는 건 어떻냐고 하더라. 별과 알파벳을 변형한 마크는 멋지다기보다는 귀여웠다. 친선 모임이 아님에도 이런 것에 들뜨는 건 팀이 갖춰지자 복수에 더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음 목표는 토게인으로 할까 했으나 토게인과 알카무라가 병합된 걸 알고 그만뒀다. 대신 곳곳을 조사하는 데 집중했다.
그제야 나는 조사를 겸해서 저번에 사진을 봤을 때부터 마음에 걸렸던 유펠르시아가 있던 장소를 찾아가 볼 수 있었다.
나는 소영이, 인하와 함께 하늘을 둘러보다가 좀 더 높이 날아 바다를 살폈다. 그런데 문득 어느 곳에서 시선이 멈췄다.
아마 저기가 사진으로 봤던 순간부터 줄곧 마음에 걸렸던 부근이다. 분명 아무것도 없다. 이 눈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마력 흐름이 특이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시선을 뗄 수 없다. 저곳에 무언가 있을 거란 예감이 강렬하게 든다. 이건 마치, 그래, 누군가가 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은…….
‘설마…….’
“으응?”
“왜?”
타이밍을 맞춘 것처럼 소영이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인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아니, 왠지, 저기가 마음에 걸려서.”
소영이가 가리킨 곳은 바로 바다였다. 그 방향을 따라간 나는 깜짝 놀랐다. 정확히 내가 응시하고 있던 부근이었다.
소영이가 무언가를 음미하는 얼굴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소영이의 몸 테두리가 바람으로 흩어졌다.
“왜일까? 아무것도 없는데.”
소영이는 바람이 되면 무언가 알 것 같았다며 몸을 다시 되돌렸다.
그래, 무언가가 부르고 있다. 거기에 소영이도 반응한 걸지도 모른다. 인하가 의아한 얼굴로 바다 너머를 응시했다.
“그렇게 말하니까 나도 신경 쓰이잖아.”
“사실 나도 신경 쓰였어. 소영이가 말하기 전부터.”
“은하도?”
두 사람이 놀라며 나를 돌아보았다.
“응. 분명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데, 괜히 신경 쓰이는 그런 느낌이야.”
“아, 맞아. 나도 그랬어.”
소영이가 손뼉을 마주하며 맞장구쳤다. 우리 대화를 듣고 인상을 찡그리며 우리가 가리킨 방향을 노려보던 인하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난 잘 모르겠네. 그래서, 그거 유펠르시아와 관계된 거야?”
“그건 모르겠어.”
“한번 잠수해 보자.”
우리는 소영이의 의견이 수긍했다. 나는 우리의 몸 주위에 둥근 결계를 쳤다.
둥근 결계가 빠르게 하강했다. 첨벙, 우리는 바다 안으로 빠져들었다. 결계는 해수면을 넘어 바다 저 아래로, 더 아래로 내려갔다.
섬찟─.
가슴을 찌르는 격렬한 불길함에 나는 급하게 결계에 제동을 걸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숨이 가빠졌다. 이상하게, 섬뜩했다.
“하아, 하아…….”
“은하야, 왜 그래?”
나는 말없이 시야를 열었다. 눈을 부릅뜨고 ‘생명’까지 본다. 눈을 몇 번이나 깜빡여도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출렁, 출렁……물이 움직이는 소리가 가슴의 고동과 합쳐졌다.
쏴아아─.
바람이었다. 물속에서 알 수 없는 바람이 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갑자기 세계가 돌변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주위 풍경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희미하게 무엇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건……결계였다. 아주 흐릿한 결계. 청자색 빛이 희미하게 파도에 실려 넘실댔다.
화악─.
시야 저편에서 생명이 온화하게 빛을 발했다. 왜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던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고 무시무시한 빛이었다. 나는 숨을 삼켰다.
불길한 예감을 무시해서 잘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금도 봐라. 예감을 무시하고 계속 내려갔다가 큰일 날 뻔하지 않았나. 저것은…….
“정령이 있어…….”
“……!”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던 두 사람이 그 단어에 흠칫했다. 그래, ‘정령’.
하멜의 곁에서 보았던 그 나비와는 많이 다르다. 힘도 의지도 희미하고, 형체조차 없다. 바닷속을 떠도는 플랑크톤 같은 존재이며, 해류와 같은 존재다. ‘개체’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고 저곳에 다가간다면 저 정령은 파도가 되어 자연스럽게 우리를 다른 곳으로 밀어낼 것이다. 그래도 다가가려 한다면 그때는 하나의 존재가 되어 우리의 앞을 막아서리라.
‘설마, 리디언가의……트라베리아의 정령인가?’
분명 미력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는데 이상할 정도로 거대한 그릇을 겸비한 채 바다에 동화되어 있다.
“…어떻게 할 거야?”
“기다려 봐.”
정령의 눈을 피해 밑으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진짜 모습을 완전히 감춰야 한다.
‘과연 저 정령의 눈을 속일 수 있을까? 자연 그 자체라고 하는 정령의 눈을.’
인하와 소영이가 숨을 죽였다. 나는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정령의 눈이 닿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되, 내 눈에 정령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지 않도록 조심했다.
힘이 희미하다고는 해도 그릇이 저렇게 큰 정령의 기척을 일정 거리에 들어갈 때까지 눈치채지도 못했다. 나는 모르는 특수한 힘이 있는 거다.
아슬아슬한 범위에서 결계를 풀고 소영이와 인하의 손을 붙잡았다. 주위를 둘러보며 고민한 결과 해류보다는 물고기가 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주변은 이상하게 생명의 기척이 적다. 그러나 없는 것은 아니다. 해초류, 파도의 기운과 꼭 닮은 물고기 몇 마리가 해류를 따라 헤엄치고 있다. 생물인 이상 자연이 되는 것보다는 물고기가 되는 게 낫다.
마침 딱 좋은 물고기 무리가 지나가는 게 보였다. 그냥 물고기는 아니고 마력으로 존재감을 흐릴 줄 아는 물고기다.
나는 소영이, 인하와 함께 물고기로 변신했다. 그 위에 정밀하게 환각, 문자, 결계를 덧씌웠다. 말은 텔레파시가 연결되도록 미리 설정해 두었다.
변신은 생각보다 훨씬 완벽했다. 정령은 완벽하게 속았다. 우리가 환각으로 이끌어 온 다른 물고기 무리와 합류해 정령의 범위 안에 들어섰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겨우 결계를 지나 바다 밑바닥에 도착할 수 있었다.
‘…….’
정령이 문지기를 맡고 있었던 이상, 반드시 무언가 있다. 우리는 물고기 무리를 이끌고 바다 밑바닥을 샅샅이 훑었다.
「아…….」
찾는 게 무엇인지조차 모르면서 찾았다. 어디지? 어디에 있지? 이것은 소리는 아니다. 그러나 분명 나를 끌어당기고 있다. 부르고 있다.
그런데 가장 먼저 ‘그것’을 찾은 것은 소영이였다.
소영이가 어딘가를 보고 반응했다. 그와 동시에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다.」
우리는 순간 숨을 삼켰다. 곧 우리는 소영이의 뒤를 따랐다. 깊고 어두운 바다 위로 어렴풋이 금색이 반짝였다. 그 위로 금색 잔영이 스치듯 지나갔다.
「여기란다, 아이들아.」
금발에 녹색 눈동자, 나는 그를 기억하고 있다. 다급한 눈으로 누나의 안부를 물었던 남자를.
마법 세계에 현존하는 전설, 랭킹 18위, 라시아 페일린.
“저 사람은…?”
홀린 듯이 돌에 다가가던 소영이가 멈춰 섰다. 인하도 눈을 크게 떴다. 우리 몸이 해류를 타고 남자의 잔영을 향해 끌려갔다.
남자가 가리킨 그것은 ‘돌’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검은 돌 같다. 그러나 나는 어렴풋이 그 돌에서 봉인마법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
나는 다시금 시야를 생명까지 볼 수 있도록 전개(全開)했다. 주위의 모든 흐름에 눈 안에 들어왔다. 돌 안에서 어렴풋이 빛이 보였다. 금색 빛이다. 혹은 붉은 빛이다. 어렴풋이 풍경이 스쳐 지나간다. 계단식으로 지어진 상아색 집, 크고 높은 나무…….
“헉…!”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이게 유펠르시아? 봉인한 유펠르시아가 이렇게 작은 돌이 되어, 심지어 본래 있던 곳 바로 아래에 잠들어 있었다니.
나와 소영이는 무심코 봉인을 향해 바짝 다가갔다. 그러나 라시아가 우리를 막았다.
「그만두거라. 그걸 만지면 녀석들이 눈치챈다. 아무리 나와 너희가 ‘공명’하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
우리는 흠칫해서 멈춰 섰다.
「찾아와 줘서 고맙구나. 내 목소리가 닿는 자가 있을 줄이야. 인도가 있었다고는 하나 용케도 완벽하게 자연에 녹아들었구나. 하마터면 나도 놓칠 뻔했단다.」
「당신은?」
정령의 눈 때문에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이고, 눈앞의 라시아가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어 의지를 전하기 곤혹스러웠으나 라시아는 내 텔레파시를 용케 알아들었다.
「여기 있는 나는 우리가 완전히 봉인되기 전에 바깥에 남겨 둔 사념이란다.」
“…….”
「너희가 우리의 봉인을 풀 힘을 얻는 날까지 나는 계속 너희를 부르마. 몇 번이고, 계속해서.」
나는 봉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보다 보면 알 수 있다. 이것은 내가 풀 수 있을 만한 수준이 아니다. 봉인을 푸는 건 내가 아니라 성진의 특기, 조만간 그를 데리고 한 번 더 와야겠다.
「알겠어요. 꼭 다시 올게요.」
라시아의 사념은 오래 있지 못하고 해류에 흩어져 사라졌다. 어느새 바다의 정령이 우리의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우리는 물고기 무리와 함께 그 장소를 벗어났다. 유유히 헤엄쳐 마법을 풀고 바다 위로 올라섰다.
“와, 깜짝 놀랐어.”
소영이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속삭였다. 나와 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네.”
“정말.”
소영이가 이내 환하게 웃었다.
“시하랑 예슬이가 좋아하겠다.”
“응. 일찍 찾아서 다행이야.”
“접촉은 신중하게 하자. 정령에게 들키면 공격당하는 것도 문제지만 봉인의 위치가 옮겨지는 게 더 큰 문제야.”
“맞아. 저렇게 은밀한 봉인인걸. 솔직히 저렇게 작게 봉인했을지 몰랐어. 작게 봉인했더라도 커븐 로드가 가져갔을 줄 알았지.”
그 말대로다. 어째서 커븐 로드는 봉인을 이런 장소에 방치했을까. 사실 흔적을 찾겠다고는 했어도 우리는 봉인이 트라베리아의 곁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렇게 작게 바꾸어 놨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데다, 틀림없이 그들의 수중에 있으리라 생각했다. 덕분에 일은 편해지겠지만…….
성과를 얻고 바로 돌아온 우리와 달리 다른 동료들은 사흘에서 엿새 정도 지난 후에 돌아왔다. 봉인된 유펠르시아를 찾았다는 말을 듣고 다들 기뻐했다. 그러나 봉인을 풀기엔 힘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모두 안타까워했다.
트라베리아는 이번에도 찾지 못했다.
성진을 데리고 한번 봉인이 있는 곳에 가 보았다. 그의 죽음의 마력에 정령이 반응하지 않도록 꼼꼼하게 문자와 환각과 결계를 섞어 변신시켰다. 특히 사념이 절대 바깥으로 튀어 나가지 않도록 주의했다.
나는 다시 라시아의 사념과 얼굴을 마주했다. 성진이 봉인을 살피는 동안 나는 라시아에게 궁금했던 것을 질문했다. 바다의 정령은 라시아의 사념을 보지 못한다. 어렴풋이 라시아의 마력을 느낄 뿐이다. 그러니 정령과의 거리를 재면서 적당히 주의하면 된다.
「사람들은 무사한가요?」
「무사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모든 것을 짓밟는 악마가 되었나 싶으면서도, 결국 나는 죽일 수 없었나 보구나.」
「왜 그들은 봉인을 여기에 방치했나요? 누군가 찾아내서 풀어 버릴지도 모르잖아요.」
「봉인이라.」
라시아의 사념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봉인이라고는 해도 잔인한 봉인이지. 봉인이란 본디 모든 흐름에서 떨어뜨려 가두는 행위인데, 그들은 우리를 잠들게 하지 않았다. 봉인된 상태로 세계를 보라고 하더구나. 세계가 어떻게 멸망하는지. 그래서 이곳의 시간은 바깥과 똑같은 모양이더군. 사념인 나는 본체와 분리되어 이미 안에 갇힌 자들의 마음을 알지 못하나, 대충 예상은 간다. 괴로워하며 그저 세계의 참혹함을 지켜보고 있지.」
입술을 까득 깨물려 했으나 평소와는 다른 감촉에 멈칫했다. 그래, 지금 나는 물고기다.
「가장 큰 이유는 아마 우리가 여기에 남고자 했기 때문일 거다. 내 죄가 큰 것은 알지만, 우리는 그들과 다른 길을 걷고 있고, 결코 함께할 수는 없다.」
「…….」
「그래서 같이 가지 않겠다고 했더니, 이곳에 가라앉혀 두더구나.」
라시아의 사념은 이번에도 오래가지 않았다. 희미하게 반짝거리는 사념을 향해 나는 또 한 번 물었다.
「이 사념으로 한 번에 얼마나 대화를 나눌 수 있죠?」
「밤……보다는 낮……. 겨울보다는……여름……. 길어도 5분…….」
라시아의 모습이 다시 훅 사라졌다. 완전한 봉인이 아니라 가둘 뿐인 봉인이라 했나. 그래도 내가 보기에 엘리시아의 봉인은 완벽하다.
나는 성진을 데리고 바다에서 물러났다. 아마 매일 대화를 나누기는 힘들겠지. 아예 사념과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일도 생길 것이다. 정령의 힘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할 때도 있을 테고.
우리는 물고기에서 다시 사람이 되었다.
“어때?”
“지금의 힘으로는 풀 수 없어.”
“역시.”
엘리시아는 네크로맨서, 어느 정도 성진과 마력이 닮은 부분이 있으리라. 성진의 특수능력은 나보다 훨씬 더 특수하다. 그러나 저 봉인은 내부에서 깨어 있는 라시아가 풀지 못할 정도의 봉인이다. 지금 우리의 힘으로는 안 되겠지.
입술을 깨물며 방법을 고민하는데 성진이 내 머리에 툭 손을 올리더니 조금 거칠게 쓰다듬었다.
“……?”
“빨리 강해져라.”
이상하게 울 것처럼 눈가가 뜨거워졌다. 나는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가슴이 고양된다. 그래, 그래야지. 강해져야지. 강해질 수 있다.
입가가 한순간 허물어졌다. 웃지 않기로 했는데,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입가가 느슨해질 때가 있다.
어쨌거나 봉인을 찾은 것만으로 일의 반은 진행된 거다. 게다가 앞으로는 라시아의 사념으로부터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동료들과 함께 질문할 것을 미리 정해 둬야겠다.
“돌아가자. 예슬이와 시하한테 빨리 소식을 갖다 줘야 하니까.”
“그래.”
우리는 자리에서 텔레포트 했다.
모였던 사람들이 돌아간 후 이트리가 생긴 장소에 캐밀이 다시 나타났다고 한다. 바로 눈치채고 돌아오다니, 역시 그 자리에 남았던 씨앗을 노린 거였군.
기껏 만든 이트리는 하루도 못 가 무너져 버렸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 다시 디트리를 세우지는 못했다. 아무리 트라베리아라도 디트리를 만드는 일은 쉽지 않은가 보다. 쉬웠다면 하루아침에 전 세계에 세워졌겠지. 무엇보다 거기는 내 힘으로 정화된 장소라 디트리를 세우기에는 맞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다지 아쉬워하지 않았다. 이미 이트리의 씨앗이 퍼졌을 테니까. 우리는 틈틈이 데랜서와 디트리를 막을 만한 방법을 찾았다.
유펠르시아에 찾아가는 사람은 나와 소영이, 두 사람으로 고정됐다. 어째서인지 유펠르시아와 ‘공명’하는 우리가 아니면 트라베리아의 특별한 기술로 보호받고 있는 봉인이 있는 장소에는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라시아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은 보통 3분을 채 넘기지 못했다. 할 수 있는 질문도 기껏해야 일주일에 1개에서 2개가 한계였다. 공명도 라시아의 사념도 제법 불안정했던 탓에, 공명하지 못해 봉인이 있는 장소에 다다르지 못하고 돌아오는 일도 제법 빈번했다.
덕분에 지금까지 알아낸 거라고는 랭크 시험에 나오지 않았던 12번째 커븐 로드 베로니카 위즈덤에 대해서는 라시아도 잘 모른다는 것, 트라베리아도 라시아의 사념에 대해 알고 있어 가끔 라시아의 사념과 대화를 하러 온다는 것, 봉인당했을 당시의 상황, 봉인 주위를 지키고 있는 정령이 커븐 로드인 시카 리디언의 정령이라는 것, 이곳을 떠나지 않은 이유에 라시아 자신의 의지도 있지만 무엇보다 누이인 유펠라의 흔적이 떠나기 싫어했기 때문이라는 것……그게 전부였다. 그중 가장 섬뜩한 것은 역시 때때로 커븐 로드가 이 장소를 찾아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라시아와 이야기를 나누는 한편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다. 최근에는 아사하는 사람이 줄어들었다. 평화 기구가 마력 없이 손쉽게 키울 수 있는 ‘고기가 자라나는 나무’를 퍼트린 덕분이다. 처음엔 풀어놓은 나무를 독점해 사재기하는 사람이 나타나는 등 여러 고난이 따랐지만 겨우 자리를 잡기 시작했단다.
그러나 그것은 어쨌거나 식물이라 죽어 버린 땅에는 키울 수 없다. 당연히 데랜서나 디트리가 있는 곳에서도 키울 수 없다. 여전히 식량 부족은 해소되지 않는다. 트라베리아의 학살이 끝나지 않는 한 세계는 계속해서 죽음의 고통에서 허덕일 것이다.
식량 부족에 도움이 되는 것도 있고, 죽어 버린 땅을 되살리고 싶은 것도 있고, 데랜서나 디트리를 약하게 만들고 싶은 것도 있고, 복합적인 이유로 나는 동료들과 함께 곳곳에 돌아다니며 ‘꽃씨’를 뿌렸다. 저번에 만들었던 나무의 열화판이었다. 아무래도 나무보다는 꽃이 더 잘 퍼진다. 게다가 이번 꽃씨는 디트리 없이도 자라나 정화의 힘을 뿌린다.
조금이라도 디트리의 저주를 약하게 만들어야 한다. 디트리가 자라기 힘든 땅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이 꽃은 먹을 수 있다. 마력 증강에도 도움이 된다.
데랜서나 디트리가 있는 땅, 혹은 난민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는 곳에 주로 꽃씨를 뿌렸다.
디트리나 데랜서가 있는 곳을 다니다 보면 절로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우리는 재량껏 전투에 끼어들었다. 키메라를 쓰러뜨리고, 트라베리아의 명령에 따라 도시를 덮치는 뱀 무더기를 쓰러뜨렸다. 트라베리아의 이름을 믿고 설치는 놈들은 곤죽을 만들어 놨고, 어쩔 수 없이 싸우는 사람들은 적당히 쓰러뜨렸다.
어느 날은 인성이와 함께 꽃씨를 뿌리고 있는데 레일리가 로일을 데리고 화난 얼굴로 찾아왔다.
“역시 미나 씨였군요!”
“안녕하세요, 레일리 씨. 표정이 왜 그러세요?”
레일리는 부루퉁한 얼굴로 우리가 팔고 있는 화분과 꽃씨를 가리켰다.
“이 꽃!”
“네?”
“무상으로 뿌리다니 제정신이에요? 하나 먹으면 하루는 안 먹어도 된다는데! 게다가 심으면 금방 퍼지지!”
“봉사 차원이니까요.”
“저한텐 10그루밖에 안 줘 놓고! 거기에 돈을 받으러 오지도 않고!”
나는 무심히 눈을 깜빡였다.
“돈은 별로 부족하지 않으니까요. 꽃씨 만드는 것도 별로 어렵지 않고요.”
“어휴. 그래도 그렇지.”
툴툴거리던 레일리가 이내 어딘지 기쁜 기색으로 웃었다.
“그래도 부럽네요. 이런 일을 간단히 할 수 있다는 게. 역시 미나 씨네 팀도 정식으로 수호 연맹에 가입하지 않을래요? 가입하면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질 거예요.”
“사양할게요.”
“너무 빨리 거절하는 거 아니에요?”
부루퉁하게 양 뺨을 부풀리는 레일리를 향해 인성이가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용케 저희가 뿌리고 있다는 걸 알았네요.”
“모를 리가 없죠. 이트리랑 꼭 닮은 구성이잖아요. 마법을 좀 볼 줄 알고 그날 이트리를 본 사람이라면 전부 알아봤을걸요?”
레일리가 천진한 얼굴로 손가락을 꼽았다.
“저라든가, 어머니라든가, 스테이 씨라든가, 슐란 씨라든가.”
레일리가 꽃바구니에서 꽃을 한 송이 집었다.
“효과도 이트리랑 비슷하죠?”
레일리가 우리 귓가에 소곤거렸다.
“디트리의 힘을 정화할 수 있는 거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런 귀한 걸 정말 이렇게 마구 뿌려도 돼요?”
“네. 사실 만드는 데는 별 마력이 안 드는걸요.”
여러 사람이 꽃바구니에서 꽃을 한 송이씩 가져갔다. 소량의 돈을 받고 더 많이 내어 주기도 했다.
“여러분이 상냥한 건 알아요. 하지만 굳이 이렇게 해서 널리 퍼트리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날 무얼 봤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