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320
‘나는 1년 전보다 훨씬 강해졌어. 그래도 이곳의 마법을 파악하기엔 아직 내공이 부족하다는 건가?’
자신과 레벨이 너무 차이 나는 힘은 아예 느낄 수도 없다고 한다. 말 그대로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시야를 개방하며 좀 더 샅샅이 살폈다. 공기 중에도, 건물에도, 풀 한 송이에도 플로라의 마력이 스며들어 있다. 마력 속에 스며든 영혼과 정신, 생명을 발견했다. 마치 마력 자체가 살아 숨 쉬며 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것 같다.
‘이게 플로리아.’
나는 옛 기억을 되짚어 한소이의 집으로 향했다. 구태여 걸어서 가는 것은 플로리아를 관찰하기 위해서다. 시하는 가면 위에 변장을 했으므로, 보통 사람이 볼 때는 변장했을 때의 얼굴만 보이리라.
가던 도중에 인성이가 잠시 우리를 멈춰 세웠다. 한소이가 사는 곳은 플로리아의 주택 중에서도 크고 호화로우며 비교적 높은 장소에 있다. 인성이는 한동안 멈춰서 건물 사이로 한소이의 집을 관찰했다.
플로리아는 제법 큰 도시지만 플로리아에서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그보다 더 많다. 마을 외곽으로 갈수록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은 그 탓이겠지.
근처에 강한 마법사는 없다. 환각 아이템이 멀쩡히 사용 가능한 것을 보아 악의만 없으면 마법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나 보다.
대문 앞에 서는 순간 소리 없이 대문이 열렸다. 우리는 흠칫했다. 대문 앞에서 안을 살펴보니 현관문도 열려 있다. 현관 안으로 들어가자 대기하고 있던 고용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우리에게 인사했다. 우리는 고용인을 따라 건물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서 오세요.”
어느 방문 앞에서 한소이가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우리를 맞았다. 우리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테이블과 테이블을 두고 마주 보는 두 개의 긴 소파가 있었다. 한 소파는 비어 있고, 맞은편 소파에는 세 사람이 앉아 있다.
한소이는 웃으며 세 사람이 앉아 있는 소파의 끝자리에 앉았다.
소파에 앉아 있는 일행 중 세 명은 한소이 일가다. 처음 보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한소이의 옆에 앉아 있는 선명하고 화려한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여자다. A랭크? S랭크인가? S랭크라면 마력이 부족한 S랭크다.
우리는 맞은편 소파에 차례대로 앉았다. 한소이의 부모가 반가운 얼굴로 우리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은하 님.”
“그땐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니에요. 이미 지난 일인걸요.”
“저희가 온 걸 바로 눈치챈 모양이네요.”
인성이가 생긋 웃으며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일행을 차갑게 응시했다. 그 질문에 답한 것은 붉은 머리 여자였다.
“물론입니다. 플로리아에 들어온 순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은하 님과 형일 님은 한 번 저희 마을에 오신 적이 있으니까요.”
“당신은?”
“밀리 어젠드입니다.”
역시 그녀가 이 마을의 중심이자 관리인인 밀리 어젠드구나. 우리는 자질구레한 사담은 때려치우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플로리아에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는 건 진심인가요?”
“진심입니다.”
“수호 연맹으로부터도 숨겨 주겠다고요.”
“네.”
“이유가 있나요?”
“당신들이 무사한 게 더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꺾고 싶지 않은 고집이 있다면 당신들의 무사를 위해 고집을 지켜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입니다.”
아무래도 그녀의 생각은 수호 연맹과 비슷한가 보다. 우리는 트라베리아의 세력에 저항하는 자들에게 ‘전력’이 된다. 확실히 우리도 수호 연맹을 적대할 생각은 없다. 레일리에게는 호감도, 빚도 있다. 수호 연맹이 위험해지면 우리는 분명 도우러 갈 것이다. 곧이어 밀리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거기에 소이 씨의 부탁이니.”
조금 놀랐다. 혹시 밀리와 한소이는 친한 건가? 그 의문을 입에 담은 건 형일 아저씨였다.
“둘이 꽤나 친한가 봐?”
“네. 친한 친구입니다.”
“그럼 평소에는 ‘소이 씨’라고는 안 부르겠네.”
“그냥 이름으로 부르고 존대도 안 씁니다.”
“헤에.”
이야기가 샜지만 밀리는 즐거운 기색으로 답했다. 밀리한테 허락을 받아 냈다고 하더니, 친해서였나 보다.
우리는 다시 본제로 돌아갔다. 회의는 단조롭게 이어졌다. 회담을 이끄는 건 주로 인성이와 밀리였다. 상호 간에 제법 괜찮은 이야기가 오갔다. 이야기하는 동안 플로리아에 임시 거처를 만드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커졌다.
“하지만 한소이 씨의 집에서 지내는 건 별로 내키지 않네요.”
인성이가 고민하며 꺼낸 말에 한소이가 당황하며 우물쭈물했다.
“확실히 저희 집은 고용인도 많고 아이도 많아요. 다른 사람이랑 지내는 게 꺼려지시면 다른 데서 지낼 수 있도록…….”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랑 같이 지내는 건 좀 불편하지만 그건 저희가 조심하면 되는 문제니까요. 그게 아니라 소이 씨의 집은 눈에 띄잖아요.”
밀리가 이해한 얼굴로 수긍했다.
“그렇군요. 여러분은 숨어야 하는 입장이지요. 소이 씨도 소이 씨의 집도 이 플로리아에서는 유명합니다. 마법으로 숨을 수 있더라도 눈에 띄는 곳에 사는 건 별로 내키지 않겠군요.”
“아…….”
“그것도 그렇겠군요.”
그러자 한소이 일가가 난감해했다.
“게다가 저희 집은 PE나 연맹의 사람들이 자주 찾아오지요. 집이 넓으니 마주치지 않게 할 방법은 있지만……그래도 불안한 점이 많군요.”
“그러네요. 안전만 따지느라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으음…….”
고민하던 한소이가 밀리를 돌아보았다.
“밀리, 우리 집을 제외하고 눈에 잘 안 띄는, 그러면서 추적을 잘 막을 수 있을 정도로 플로리아 님의 힘이 잘 스며들어 있는 장소가 혹시 없을까?”
“눈에 잘 안 띈다는 조건만 제외하면 몇 군데 있어.”
“아니, 그게 제일 중요한 거잖아.”
“플로리아에서 200년간 한 집에서만 살진 않았거든. 할머니의 집은 할머니가 플로리아에서 살아 계시는 동안 네 번 정도 바뀌었어. 처음 살았던 집은 낡긴 했지만 중요 문화재 취급을 받고 있어.”
“아, 산기슭에 있는 그 오두막 맞지?”
“오두막이라고 할 정도로 작진 않지만.”
“아하하.”
한소이와 이야기를 마친 밀리가 다시 우리를 돌아보았다.
“마을에 플로리아란 이름이 생기고 할머니가 촌장이 되었을 때 촌장이 낡은 집에 살면 되겠냐면서 주민이 지어 준 집이 있습니다. 거기는 그래도 문화재 취급은 안 받으니까 살아도 될 것 같습니다. 여태까지 둘러대면서 비워 놨는데, 그러길 잘했던 것 같군요.”
주택이라. 나는 고민하다 물었다.
“주택 크기가 어느 정도 되나요? 저희 팀 멤버가 10명을 넘습니다.”
“웬만한 주택보단 큽니다. 20명 정도는 넉넉히 지낼 수 있어요. 할머니 일가가 다 같이 살았던 집인걸요. 저는 막내라서 거기 살았던 기억이 없습니다만.”
“근데 사실 거기도 상당히 눈에 띄죠?”
시하가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앞에 앉아 있던 네 사람은 조금 망설이다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밀리는 되도록 우리가 그 집을 임시 거처로 정했으면 하는 모양이다.
“웬만해선 여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트라베리아의 추적을 받지 않겠지만, 그들은 미지의 힘을 많이 숨기고 있습니다. 그러니 확실한 곳에 몸을 숨기는 게 좋을 거라고 봐요.”
그 말은 분명 옳다. 하지만 나로서는 조금 회의적이었다. 그건 인성이도 비슷한 심정이었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요. 당신이 그 집을 소중하게 여긴 건 수호 연맹 사람들도 알고 있지 않나요? 그런 집에 갑자기 사람이 살기 시작하면 다들 한 번은 관심을 가질걸요.”
“그건…….”
잠시 생각하던 밀리가 이내 수긍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하나의 방안이 사라지자 방 안에 잠시 침묵이 내려섰다. 그러나 밀리는 금방 다음 방책을 꺼냈다.
“그럼 이번 기회에 마을 결계를 한번 다시 정비하지요. 빈집이 있는 중심 주택가에 좀 더 수호의 힘을 많이 두고, 그 건물 안에 할머니와 부모님이 썼던 물건을 채우면……할머니네가 살던 집보다는 덜해도 충분히 트라베리아의 추적을 피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아무리 트라베리아라고 해도 쉽게 눈치챌 수 없을 테고, 설령 눈치채더라도 여기를 바로 공격할 수 없을 테니 꽤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이어진 말에 나는 조금 불편해졌다. 설마 이렇게까지 편의를 봐주려 할 줄은 몰랐다.
“정말로 그래도 괜찮나요?”
“물론입니다.”
그러나 나는 불편한 속내를 숨기고 정중히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신세를 지게 되네요.”
밀리는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천만에요.”
이런 시대이기에 사심 없는 호의가 아프다.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다시 인성이가 대화를 주도했다.
“기거한다고 해도 아마 거처에 있는 날이 그리 많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니 트라베리아가 바로 플로리아에 눈을 두지도 않을 테고요.”
그래. 게다가 다른 곳에 있더라도 트라베리아는 우리를 눈치채는 데 최소 이틀에서 최대 열흘이 걸렸다. 나는 인성이의 말을 받았다.
“혹시 모르니 나갈 때 플로리아의 기척은 다 지우고 나갈게요. 여기에는 피해가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희도 트라베리아와 싸우고 있는 입장이니 너무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거처가 밝혀지는 건 새벽별무리 여러분에게는 안 좋은 일이니 여러분이 바깥에 나갈 때는 힘이 떨어지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전쟁 지역을 돌아다닌다고 들었는데, PE 소속 마법사를 만나면 가끔 도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지금까지도 충분히 도움을 받았지만요.”
“물론입니다.”
대화는 원만하게 끝났다. 지금까지 본 것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다. 플로리아는 평화로운 도시다. 우리가 몸을 숨기기에도 참 좋다.
한소이도, 밀리도, 한소이네 가족들도, 단 한 번도 우리 앞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충만한 감정은 호의로 가득 차 있다. 틀림없이 믿어도 된다.
그 후로도 한동안 필요한 이야기가 오갔다. 우리는 가짜 신분으로 플로리아에 들어온다. 밀리와 한소이 일행은 거처를 마련해 줄 뿐, 우리는 그 이후 일체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는다. 우리가 머무는 동안 플로리아가 위험에 처한다면 당연히 도울 것이다.
“그럼 사흘 후 팀원을 전부 데리고 오겠습니다. 다시 한번 잘 부탁드려요.”
밀리와 한소이 일가가 다정하게 웃었다. 그것을 조금 부담스럽게 여기면서도 우리는 자리를 뒤로했다. 올 때와는 달리 텔레포트로 임시 거점으로 돌아갔다.
임시일지 정식일지는 정하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거점이 생긴 것을 동료들 모두 기뻐했다. 그들이 우리에게 해 주는 것은 저택 하나를 내주고 그곳이 다른 곳의 추적을 받지 않도록 한 번만 신경 써 주는 것. 그 외에는 전부 우리가 알아서 해야 한다. 여태까지 그러했듯이.
낡은 임시 거처를 버리고 플로리아로 향했다. 라라는 이제 낯선 곳에 이골이 났다. 도착하자마자 넓은 저택을 제집마냥 누볐다.
이번 거점도 내가 만들었던 이세계처럼 푹 쉴 수 있을 정도로 편하진 않을 것이다. 밖에서도, 혹은 집 안에서도 변장을 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니 편할 리가 있나. 특히 마법을 거의 쓰기 힘든 성진은 많이 불편할 것이다.
그래도 낯선 장소를 계속 전전하는 것보다는 낫다.
밀리가 제공한 주택은 상당히 크고 넓었다. 호화롭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고풍스럽고 우아했다. 집 곳곳에 플로라가 생전 사용했던 물건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놓였다. 붉은 마력으로 가득 찬 방은 제법 볼만했다.
훈련실도 있었다. 마침 잘됐다. 여러 장소를 전전하고 다닐 때는 제대로 된 훈련은 하지 못했다. 잘못해서 우리 힘이 새어 나갔다간 트라베리아에게 들킬 게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서도 전력으로 마법을 사용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훈련실이 있고, 훈련실 안에 차단하는 결계를 칠 수 있다.
우리는 방을 하나씩 차지하고 지내기 편하게 꾸몄다. 리더라는 이유로 내게 가장 먼저 방을 정할 권리가 주어졌다. 나는 맨 꼭대기 층을 골랐다. 내가 고른 방에는 커다란 창문과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이 있다.
나는 옆으로 난 창문 너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소이 일가나 밀라에게 인사한 후 내부를 살피고 마법을 설치하고 방을 정하고 정리하는 동안 어느새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노을이 진다. 주황색에서 짙은 보라색으로 물드는 하늘이 무척 사랑스럽다.
나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복수를 결심하고 움직이면서 나는 필요한 일만 하려 노력했다. 그 외의 것을 보는 건 나에게 죄악이나 다름없었다.
하루 종일 훈련에 매진했고, 마법을 훈련하기 위해서만 책을 읽었다.
내가 사랑했던 풍경과 물건에서 시선을 돌렸다. 내가 쓴 책과 내가 좋아했던 책, 시간을 들여 만든 액세서리, 순간순간마다 변해 가는 하늘의 풍경.
즐거움, 그리움, 사랑, 나를 웃게 하는 모든 감정을 죽여 왔다.
기억 속의 힘을 기술로 다듬었고, 그와 함께 솟아오르는 눈물과 사랑스러움은 가슴 안에 짓눌러 구겼다.
쉬지 않고 달려왔다. 조금 지친 걸까? 지치기엔 아직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겨우, 이제야 겨우 트라베리아의 마법사와 싸울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을 뿐이야.’
눈을 감는다. 꿈속의 풍경이 떠오른다. 눈을 뜬다. 석양이 아까보다 좀 더 짙어져 있다.
‘별이 보고 싶다…….’
멍하니 손을 뻗자 라라의 털이 닿는다. 나는 한동안 석양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라라를 쓰다듬으며 침묵했다. 라라가 내 손가락을 깨물었다. 놀고 싶은 모양이다. 나는 얼핏 웃으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움직이는 손가락을 라라가 손으로 잡아채거나 깨물었다. 그 몸짓이 사랑스러워 나는 라라를 꼭 끌어안았다.
밤이 적당히 깊어졌을 때 나는 환각 아이템을 귀에 걸고 방에 걸쳐 있는 사다리를 통해 지붕 바깥으로 나갔다. 비스듬히 기울어 있는 지붕에서 태연히 중심을 잡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생각보다는 잘 보이네.”
이 도시는 활기차고 밝다. 우리가 지내게 된 집은 마을에서도 높은 위치에 있는 곳이라, 마을의 불빛이 비교적 멀리까지 보였다.
도시의 불빛이 거슬리긴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하늘은 맑다. 초승달이라 달빛도 적다. 그래서 그런지 생각보다 별이 잘 보였다. 어쩌면 내 눈이 좋아서 그런 걸지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하늘에 빛나는 선이 그어졌다. 별똥별이다. 나는 지붕에 누워 하늘을 하염없이 올려다보았다. 운이 좋았는지 또 하나 별똥별이 떨어졌다.
그 후로도 별똥별은 두어 개 정도 더 떨어졌다. 멍하니 시간을 때우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또 하나 별똥별이 떨어졌다.
이번 별똥별은 속도가 조금 느렸다. 게다가 특이하게 마지막 순간 별이 조금 커졌다. 떨어져 내리던 별똥별이 어떠한 힘에 의해 폭발한 것처럼.
그 광경을 마지막으로 나는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시간이 늦은 것을 확인하고 라라의 옆에서 잠이 들었다.
…….
……꿈을 꾸었다.
“리더.”
낯선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 천천히 눈을 뜨자 바로 앞에 누군지 모를 남자의 가슴팍이 보였다. 남자의 어깨 옆으로 긴 보라색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다. 아니, 갈색인가? 예지몽치고는 꽤나 선명하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실감 나게 어둠이 찾아든다.
“무슨 일이죠?”
“아, 또 존댓말. 리더가 부하한테 존댓말 쓰는 거 아니라니까.”
“…….”
“네네, 그만 말하겠습니다. 저녁 먹으라고 부르러 왔어. 우리 리더는 너무 열심이라 곤란해. 그래서 이렇게 믿음직스러운 거지만.”
남자는 꽤나 키가 컸다. 어쩌면 성진보다 클지도 모르겠다. 천천히 고개를 들려는 순간 익숙한 팔이 나와 남자 사이를 갈랐다.
“은하한테 너무 다가가지 마. 나는 아직 당신을 믿을 수 없어.”
“으음……기분은 알겠지만 우리 이제 동료잖아?”
“거기다 말단 주제에 리더한테 가볍게 말 거는 거 아냐.”
“어……나 일단 부대장인데요.”
“흥.”
“하하. 톡톡 쏘는 게 귀엽네.”
“…….”
“너무 그러지 마. 거기다 너도 알고 있잖아? 내가 배신 못 한다는 거.”
남자가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한 줌 쥐더니 입에 가져갔다.
“……! 너!”
“나는 리더에게 충성을 맹세했어. 유은하, 네가 내 복수를 대신 이뤄 줄 때까지, 이 목숨은 전부 네 거야.”
“정말…….”
꿈속의 내가 혀를 찬다. 고개를 숙인 남자의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분명히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이다.
“쓸모없는 목숨이군요.”
“그러니까 쓸모없는 목숨을 부디 주워서 원하는 대로 써 줘.”
“그런 뜻이 아니란 거 알 텐데요?”
나는 남자의 손을 떼어 내고 앞으로 걸어갔다. 남자와 인하가 내 옆을 따랐다.
꿈속의 풍경이 점점 어두워지며 몽롱해진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내 정신은 점차 어둠으로 가라앉았다.
##13. 대한민국의 마법사들
우리가 한국에 가고자 하는 이유는 간단히 말해서 한국의 현 상황을 알고 싶기 때문이다. 커븐 로드 두 명이 지배하고 있는 한국. 출입이 통제되고 있으며 한국 내부에 관한 정보는 상당히 적다. 정보는 대부분 대현에서 나온 것이며, 그중에서도 중요한 정보는 손에 꼽힌다.
그렇게 단단히 폐쇄된 것치고 조금씩 흘러나오는 한국의 이야기는 꽤나 평화롭다.
한국은 들어가는 것보다 나가는 게 더 어렵다. 한국에는 무척 큰 디트리가 있다. 다른 곳과는 달리 전쟁으로 황폐해지는 일은 없다. 릴리와 래넌도 시비를 걸거나 덤비지 않는 한 구태여 죽이려 들지 않는다. 죽이지 않고 실험 재료로 쓰는 경우가 더 많다.
요는, 우리 실력이라면 들어가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다. 문제는 빠져나오는 것, 그리고 ‘변장’이다.
더군다나 한국은 이제 트라베리아의 거점이다. 호랑이 굴에 제 발로 걸어가는 셈이니, 아주 조금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신중을 기해 사전 조사를 갔다. 조사는 인성이와 성진이, 형일 아저씨가 중심이 됐다. 인성이는 마법에 남은 흔적을 그림자로 볼 수 있고, 성진은 나만큼이나 많은 걸 볼 수 있고, 형일 아저씨의 거울은 마법의 본질을 비춰 준다.
당연히 나도 조사하러 갔다. 내가 중심이 되어 조사하지 않은 건 아이템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주 정교한 변장 아이템을 만들어야 한다. 마력도, 모습도, 목소리도, 마법도, 전부 새로운 인물로 덮어씌울 것이다. 그걸 10명분이나 만들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만약의 경우 한국에서, 혹은 릴리에게서 도망갈 만한 방책도 필요하다. 꽉꽉 막힌 한국에서 단번에 빠져나올 방법, 우리를 발견한 클라인 남매를 잡아 둘 방법. 그러기 위해 사용할 아이템은 한국 주위의 결계를 면밀히 조사한 후 인성이, 성진이와 협력해서 만들 생각이다.
한국은 엄중한 관리에 놓여 있다. 국경에는 무수한 키메라가 돌아다니고 있으며 다양한 트랩이 설치되어 있다. 좀 더 안에 들어가면 랜덤으로 환경이 바뀐다. 환각을 보여 주는 안개, 지뢰 길, 미로, 마치 실력이나 운을 시험하는 것 같은 관문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것만 봐도 트라베리아의 의도가 조금은 보인다. 그들은 사람이 안으로 들어오는 걸 완벽하게 차단할 생각이 없다. 정말로 그 누구도 들어오지 않도록 할 생각이었다면 단단한 결계를 치면 되었다.
그러나 저렇게 해 두면 침입을 도전하는 사람이 생긴다. 가벼운 마음으로 침입한 사람은 함정에 목숨을 잃는다. 어쩌면 그게 목적일까.
그렇다고 해도 엄중하고 견고한 결계임에는 변함없다. 관문에 들어가면 일단 트라베리아에 인지된다고 봐야겠지.
결계 때문에 바깥에서는 한국을 조금도 엿볼 수 없다. 하늘 높이 날아도 보이는 것은 결계의 색뿐이다. 나도, 예리도, 성진도, 눈이 좋은 사람 중 그 누구도 결계를 꿰뚫어 볼 수 없었다.
시하는 우리가 지금까지 모은 정보 중에서 한국에 관한 정보만 모아 분류했다.
오고 간 무기, 한국에 있는 장군 시리즈, 키메라의 랭크, 희미하게 찍힌 한국 내부 사진, 알려진 트라던트의 개수. 그 외에도 다른 정보 사이트에 들어가 열심히 끌어모았다.
다른 곳에서 끌어모은 정보의 출처 역시 대부분 대현이었다. 클라인 남매는 서울 청와대에서 지내고 있으며, 측근의 숫자는 확실하지 않다. 장군 시리즈는 추정 3명 정도. 서울에만 거대한 디트리가 두 개나 있다. 또한 한국의 디트리는 그다지 불길하지 않고 안정되어 있다.
안정되어 있다고? 디트리가? 그 구역질 나는 것이? 마법으로 둘러싸인 디트리는 사진조차 제대로 찍히지 않아, 전해진 모습은 그려진 것뿐이다. 그 그림을 보아도 도무지 느낌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정글화된 도시가 많고, 숲에는 키메라가 돌아다니고 있다. 수도 근처는 예술 거리로 변해 있다. 이유는 클라인 남매가 예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인구수는 약 1000만 정도로 추정된다. 한국을 제외한 전 세계의 인구수가 5분의 1로 줄어든 시점이다. 특히 아시아의 인구수는 절망적인 숫자를 달린다. 한국에 사는 사람은 그 와중 제법 많이 살아남았다 할 수 있겠다.
클라인 남매는 본격적으로 반항할 의지를 보이지 않는 한 모든 사람을 내버려 두고 있다. 극단적으로 무기를 들고 담합해도 쓰러뜨리기만 한다. 죽이지는 않고 끌고 가 가두거나, 방치하거나, 실험체로 쓰거나.
대현이 반년에서 1년 간격으로 모아 온 정보치고는 중요한 내용이 별로 없었다. 자질구레한 정보라면 꽤 되었으나 핵심 정보가 모자랐다. 우리에게 있어 핵심 정보는 단연 클라인 남매의 행보다. 그런데 클라인 남매의 행보는 한 달에 한 번 연주회를 한다든가 하는 시답잖은 것뿐이었다.
이 정보가 가리키는 것을 종합해 보면, 놀랍게도 한국은 평화롭다. 그것도 전쟁 한번 제대로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평화롭다. 클라인 남매는 한국을 관리하며 놀고 즐기는 데에 시간을 들이고 있다. 솔직히 기분 더러웠다.
나는 인성이네 팀과는 별개로 인하와 함께 한국을 둘러싼 결계를 여러 번 살피러 갔다. 여러 번 반복해서 보며 파악하려 애썼다.
알려진 바로 릴리의 마법은 선율마법과 실마법, 악마소환마법이며, 래넌의 마법은 악보마법이다. 또한 두 사람은 서로의 마법을 교환할 수 있다고 한다. 설마 그게 특수능력은 아닐 테니 링크하는 종류의 마법도 있다고 생각해야겠지. 그 외에도 다른 마법이 있을 법하다.
최대한 들키지 않게 숨어서 결계를 살펴보며 느낀 점은 저 결계가 릴리나 래넌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릴리의 마력은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다. 분명 결계에서는 릴리의 마법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다른 자의 마법도 느껴진다. 대표적으로는 유클라프와 소니아다. 소니아의 꿈마법이 결계에 쫙 깔려 있다.
‘정신세계까지 완벽하게 덮어씌우지 않는 한, 저 결계는 넘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어.’
소니아라면 아주 잠깐의 반응에도 내 존재를 눈치챌 거다. 누가 뭐래도 직접 정신세계에서 부딪쳤던 적이 있으니까. 소니아의 함정만은 피해야 한다.
그것과는 별개로 결계에 소니아의 마법이 섞여 있다는 게 신경 쓰인다. 그건 즉 정신적인 조치가 이뤄질 수 있다는 거다. 단순히 정신마법을 차단하는 용도라면 유클라프의 힘으로도 충분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다.
또한 유클라프의 힘으로 공간이 절단되어 있다. 결계 경계선 사이에서는 텔레포트 할 수 없다. 즉 어떤 방법으로도 텔레포트 해서 한국의 한복판으로 들어갈 수 없고, 마찬가지로 나올 수도 없다.
나는 마력 패턴으로 관문을 몇 개 예측했다. 관측을 통해 만들 아이템이 변장 아이템을 제외하고도 두어 개 정해졌다. 아무래도 한국에 들어가기 전까지 뼈 빠지게 고생해야 할 모양이다.
열심히 마정석과 진화석을 만들고 있는 내 옆으로 라라가 다가왔다. 요즘 플로리아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오기 전에는 며칠만 한곳에 머물러도 성진의 ‘포착됐다’는 한마디에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플로리아에 온 이후부터는 전혀 그런 일이 없다.
변장 아이템은 진화석을 사용해 상황에 맞게 변화하도록 할 거다. 이번에는 특별히 손으로 직접 하나하나 옮겨 적을 생각이다. S랭크 마법사가 되어도 마법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여전히 손으로 쓰는 게 마음이 가장 많이 담긴다.
정해 둔 마력 설정대로 순도 높은 마정석을 만들기 위해 문이의 아이템 진 위에 마력을 쏟아붓고 있는데 뒤에서 다가온 사람이 갑자기 내 어깨에 턱 손을 짚었다. 누군가 했더니 예리였다. 반대쪽 손으로는 어색하게 웃고 있는 인성이를 붙잡고 있다.
“왜 그래?”
“닥터 스톱이에요!”
“뭐?”
“두 사람 다 너무 일만 해요! 이게 대체 며칠째예요? 잠은 제대로 잤어요?”
“어제 두 시간…….”
“어휴! 이 일벌레들!”
“음,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난 그래도 괜찮은 체질이라…….”
“체질이든 뭐든 괜찮지 않아요! 저번에도 말했죠? 무리하면 중요할 때 훅 온다고! 두 사람 다 잠이나 자요!”
“한동안 두 시간만 자서 그런지 잠이 안 와. 난 긴장하고 있을 땐 못 자는데…….”
“그, 아직 조사해야 할 게 있어서…….”
간단한 정보를 긁어모으는 건 시하에게 맡겼으나 여전히 정보 수색 책임자는 인성이다. 중요한 정보를 수색하고 정리하는 건 그가 하고 있다. 중간중간 해킹하러 나가는 데다 정보 정리에 결계 해석까지, 당연히 용량 오버다.
우리만큼 바빠야 할 사람이 또 한 명 있다면 그게 바로 성진인데, 성진이가 손을 댈 아이템은 두 개뿐이고, 거기엔 아직 손도 못 대고 있으니 당장은 바쁘지 않다. 덕분에 평소 예리의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있던 우리만 혼나게 생겼다.
“진짜! 두 사람 다 의사 말 좀 들으세요!”
“예리야, 예리야.”
난색을 표하는 우리에게 예리가 화를 냈다. 옆에서 소영이가 손짓하며 예리를 불렀다.
“그럴 땐 말로 해도 소용없어.”
“네?”
소영이는 생긋 웃더니 우리에게 옷가지와 외투를 던지고 우리 귀에 걸린 귀걸이를 만져 환각을 덮어씌운 다음 장바구니와 지갑을 억지로 쥐여 준 후 등을 밀어 현관 바깥으로 내쫓았다.
“장이나 보고 와! 비프스튜 할 테니까 고기랑 야채 많이 사 와! 한 시간 이내에 돌아오면 혼날 줄 알아!”
쾅! 문이 닫혔다. 현관문 너머에서 소영이와 예리가 킥킥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인성이는 나란히 어깨를 늘어뜨렸다.
“정말이지, 당해 낼 수가 없다니까.”
“그러게.”
우리는 마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곧 마법으로 옷을 갈아입고 위에 외투를 걸쳤다. 때마침 현관문이 한 번 더 열렸다. 나온 것은 어쩌다 보니 플로리아에선 미남 캐릭터로 변장하게 된 성진이었다. 참고로 평소에는 눈에 띈다는 이유로 평범한 외모를 선호했다.
“왜 너까지?”
“너희 둘만 두면 몰래 일할 것 같더라. 마침 바람을 쐬고 싶기도 했고.”
“다정이랑 유리(소영이랑 예리) 눈치가 얼마나 빠른데. 설마 그러겠어.”
“…….”
“하하…….”
본명을 쓰는 건 건물 내부에서만이다. 바깥에서는 가명을 쓴다. 쓰는 가명은 초기에 만든 가명과 새로 만든 가명들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모습은 초기 변장 모습과는 다르게 꾸몄다. 참고로 만일을 위해 한국에선 전혀 다른 가명과 모습을 쓸 거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우리의 정체가 우리가 무기 소재를 사던 거리, ‘브라이던’에는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긴, 소재를 부탁했을 뿐 옷도 가면도 다 내가 개조해서 새로 덮어씌우는데 누가 눈치채겠어? 설령 사진이 퍼졌더라도.
우리의 정보와 함께 사진도 퍼졌다. 물론 우리 가면에나 옷에는 촬영이 안 되게 하는 마법이 걸려 있기 때문에 염사다. 그러나 알카무라 마스터조차 우리를 선명하게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사진이 흐리다. 이유는 역시 가면에 걸린 환각마법 덕분이다.
인성이가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그래, 그럴 마음이 있기는 있었지. 성진이 한숨을 내쉬더니 우리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게다가 난 보디가드잖아.”
“아,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