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34
“그냥. 답답해서 기분 전환 하러 나왔지. 너희들은 여기 어쩐 일이야? 이 시합 나름 비밀인데.”
“아, 그게…….”
나는 대답하려다 일순 망설였다. 그러고 보니 은희 언니는 결국 성후 오빠랑 어떻게 된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쉽사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러나 전혀 사정을 모르는 인하는 아무렇지도 않게 제현 오빠의 이름을 꺼냈다.
“제현 오빠가 초대했어요.”
그러고 보니 인하는 제현 선배를 자연스럽게 ‘오빠’라고 부르고 있었구나. 하긴, 우리 또래 아이들에겐 그게 보통이겠지. 선배란 호칭을 기본적으로 떠올리는 내가 이상한 건가? 그래, 초등학생이니까…….
그 이름에 은희 언니의 표정이 한순간 굳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구나…….”
그것을 보고 알았다. 아, 역시 신경 쓰고 있는 거구나……. 하긴, 당연하겠지.
나는 그녀를 보며 입을 달싹이다가, 이내 마음을 들쑤시는 감정과는 전혀 별개로 지금까지 말하고 싶었던, 만나면 언젠가 말하려 했던 말을 꺼냈다.
“언니, B랭크로 올라갔다면서요? 축하드려요.”
“아, 축하드려요.”
내 말에 인하도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축하의 말을 했다. 우리를 보며 은희 언니가 맑게 웃었다.
“응. 아직 비공식이지만, 고마워.”
“이제 꿈을 이룰 수 있겠네요.”
“응.”
내 말에 은희 언니가 정말로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눈을 한껏 휘며 곱게 웃어 보였다.
“고마워.”
이어서 고개를 들던 은희 언니의 표정이 문득 굳었다. 뒤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나는 상황을 예감하며 몸을 돌렸다. 우리 뒤에는 어느새 친구들과 함께 제현 오빠가 서 있었다.
“……안녕.”
“안녕하세요, 선배.”
약간 망설이는 은희 언니와는 달리 제현 오빠의 표정은 평소와 똑같았다. 그는 은희 언니를 향해 정말로 다정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아. 나는 그것을 보고 한순간 숨이 멈추는 기분이 들었다. 심장이 덜컹 떨어지는 줄 알았다. 나는 멍한 눈으로 제현 오빠를 보았다.
그러고 보면 자주 만난 것처럼 느껴져도 나와 선배들의 사이는 데면데면한 편이라서, 은희 언니와 제현 오빠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걸 본 적은 별로 없었다. 애초에 선배들을 다 같이 만난 적조차 적었지. 저번에 초콜릿을 전하기 위해 한 번 만나긴 했지만, 그때는 다들 훈련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 그랬다.
내가 제현 오빠를 만난 기억은 손에 꼽는다. 행사 때문에 멀리서 얼굴을 본 적도 있긴 하지만 만난 걸로 따지자면, 기껏해야 이 학교에 견학 왔을 때랑, 운동회, 축제 때, 그리고 저번에 훈련할 때와 오늘 정도다. 아, 그래. 민희네 집에서도 한 번 만났던 적이 있기는 하다.
다섯 번을 겨우 넘기는 만남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제현 오빠는 민희와 있거나, 천호 선배와 있거나……그래, 성후 오빠와 있을 때도 있었지.
삼각관계라는 사이로 얽혀 있는 세 선배들이 같이 있는 모습을 한발 물러서서 객관적으로 바라본 적은 별로 없었다. 아니, 아예 없었다.
제현 오빠가 은희 언니를 바라볼 때 어떤 눈빛을 하고 있는지 보았더라면, 진작에 그의 마음을 눈치챘을 텐데. 이야기를 듣기 전에 금세 눈치챌 수 있었을 텐데.
내가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그 눈빛은 낯이 익었다. 그 이상으로 익숙했다. 예전, 그러니까 내가 전생에서 사랑하던 사람이, 그 녀석이 나를 보던 눈동자가 저러했다. 정말 낯부끄러울 정도로 세상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을 보는 다정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더랬다. 제현 선배의 눈동자는 그때 그 녀석의 눈빛과 너무나도 비슷했다.
정말……저 애틋할 정도로 다정한 눈빛을 늦게 봐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나는 그냥 제현 오빠가 약간 가엾어졌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기분 전환 좀 잠깐 하러 온 거야. 어린아이들 시합이기도 하고, 편하게 보기엔 딱 좋으니까.”
“흠, 그런가요.”
“그러는 너야말로 웬일이야? 아, 설마……또 감시를 학생 회장이 맡았어?”
“정답이에요.”
“진짜, 회장을 뭘로 보는 거야. 아무리 날고뛰어도 아직 학생이라고. 하여간…….”
은희 언니가 투덜거리는 모양새를 제현 오빠는 웃으며 바라보았다. 은희 언니는 제현 오빠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더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녀는 우리를 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그러고 보니 너희들 점심은 먹었니?”
“응. 먹었어! 오늘 급식 엄청 맛있더라. 은희 언니는?”
“나야 뭐 먹고 왔지. 구경은 어때? 재밌니?”
“네. 보람 있어서 괜찮아요.”
“으, 난 약간 지루한데~.”
현호의 말에 다른 아이들도 약간 동감했다.
“그래도 일단 다 보고 갈 거지?”
“네.”
“은하 이 녀석이 푹 빠졌으니까 뭐.”
“에헤헤.”
나는 실없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은희 언니는 우리를 다정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래? 그럼 이 언니가 음료수라도 사 줄까? 어떤 게 좋니?”
“와아!”
“앗싸!”
그러자 아이들이 엄청 신나 하며 자기가 좋아하는 음료수를 말했다. 민희는 콜라, 현호는 사이다, 인하는 포카리, 한수는 포도 맛 음료수가 있으면 그걸로 부탁한다고 했다. 나의 경우에는, 보리차나 옥수수차로 부탁했다.
“응, 응. 좋아, 알았어. 제현아, 가자.”
은희 언니가 제현 오빠를 불렀다. 제현 오빠가 놀란 표정으로 은희 언니를 바라보았다.
“네? 왜요?”
“왜긴. 나 혼자 어떻게 다 들고 와. 나 가방도 안 가지고 왔다고.”
“나 참, 마법 뒀다가 죽이라도 끓여 먹으려고요?”
제현 오빠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기쁜 기색이었다. 그는 당연하다는 것처럼 은희 언니의 옆에 나란히 서서 걸었다.
“오빠! 잘 갔다 와!”
“오냐.”
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가라앉은 표정으로 다시 체육관 쪽을 돌아보았다. 방금 그건 우리에게 음료수를 사 주고 싶었던 게 아니라, 제현 오빠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한 핑계였을 것이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이다. 아마……서로의 그 연애 사정 관련으로.
‘B랭크가 되면 고백한다 했던가. 이미 고백했나? 아니면 정식으로 랭크가 등록되면 할 건가?’
신나 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가만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저 가만히 입을 다문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
이은희는 자판기에 카드를 대고 묵묵히 음료수를 뽑았다. 사이다, 콜라, 포카리, 포도 맛 주스, 옥수수차…….
이은희가 버튼을 누를 때마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잠시 자판기를 바라보던 이은희가 주제현에게 물었다.
“넌 뭐 먹을래?”
“……그럼, 커피로.”
삑, 덜컹.
목소리와 동시에 버튼을 눌렀다. 이은희는 음료수가 떨어져 덜컹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카드를 다시 지갑에 집어넣었다.
“…….”
잠시 정적이 흘렀다. 주제현은 허리를 숙여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전부 꺼내 들었다. 그를 향해 이은희가 손을 뻗었다.
“왜요.”
“왜긴. 같이 들어야지.”
“별거 아닌데요, 뭐.”
“됐어. 같이 들어.”
두 사람은 음료수를 나눠 들고 잠시간 묵묵히 걸었다. 주제현이 앞서 걸어가는 이은희를 향해 뭐라 입을 달싹이는 순간, 이은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말을 꺼냈다.
“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주제현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아.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미 꽤 오래전부터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이 막혔다.
“알고 있었니?”
“……네.”
“알고 있었는데도 포기하지 않았던 거구나?”
“네…….”
이은희는 주제현을 보며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애써 감정을 담담하게 억누르고 있는, 그런 표정이었다.
“나 너한테 고마운 일이 너무 많아. 미안한 일도 너무 많고.”
“…….”
“처음 고백했을 때, 난 네가 농담하는 줄 알았어.”
이은희는 눈을 깜빡이며 그가 그녀에게 처음으로 고백했던 날을 떠올렸다. 중학교 3학년 축제 마지막 날 밤의 일이었다. 항상 투닥거리기만 했던 후배가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자신을 좋아한다 말했을 때, 농담이냐며 웃는 자신을 그가 까맣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자신이 대체 어떤 심정이었는지.
그때는 그 누구도 좋아하고 있지 않던 때였다. 첫 고백은, 당황해서 거절해 버렸다.
두 번째는……? 그 감정이 너무 진지한 걸 알아 버렸기 때문에 그냥 받아 줄까 생각했다. 게다가 사랑을 말하는 자신의 후배가 너무 멋있어서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거절했다. 그 마음이 너무 진지했기 때문에. 한쪽이 진심이 아니면 상처 입는 쪽이 누구일지는 뻔히 보인다. 티격태격하며 안 좋은 말을 해도 주제현은 결국 이은희에게 있어서 소중한 후배이자 동생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후, 이은희에게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지금은 알아. 네가 진심으로 나한테 고백했다는 거. 정말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난……이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주제현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숨을 몰아쉬었다.
“선배는…….”
“그러니까 이만 날 포기해. 미안해.”
이은희는 잔인할 정도로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그러나 주제현은, 이은희의 눈동자며 손가락이 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난 그 사람이 날 좋아하는지 어떤지도 몰라. 어쩌면 날 그냥 친구로만 생각할지도 모르고, 걔도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을지도 몰라. 워낙 감정을 알기 힘든 애라서……나도 고민 많이 했어. 그리고 걘 너무 잘난 놈이거든.”
‘알고 있어요.’
주제현은 그 말을 들으며 주먹을 쥐었다. 알고 있다. 그녀의 눈동자가 향하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알고……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이 이은희를 무척이나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역시 알고 있다. 그 눈동자가 그녀를 볼 때마다 어떤 감정을 담는지, 그 사실을 자신 외에도 몇 사람이나 눈치채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난……그 외에 하고 싶은 일도 있으니까. 그래서, 그러니까……B랭크가 되면 고백하기로 결심했어. 이제 진짜로 네 기분을 알 것 같아. 그래서……그래서…….”
이은희는 주제현을 돌아보며 쓰게 웃었다.
“나도 포기하지 않을 거야. 미안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이은희는 앞으로 걸어갔다. 애써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주제현은 그 자리에 선 채 고개를 숙였다.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아, 진짜로 끝이구나.’
포기할 수 있다면 진즉에 포기했을 감정이었다.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의 감정을 눈치챘을 때부터 그 끝이 정해져 있음을 깨달았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사람 마음은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어서, 결국 이 마음을 어쩌지 못한 채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포기하지……못할 거예요.”
설령 머리로는 납득했다 한들 감정이 쉽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앞으로도 한동안은 이 아픔을 안고 지내야 할 것이다. 어쩌면 굉장히 오랫동안…….
“…….”
새까맣게 가라앉은 눈동자에 작게 눈물이 맺혔다. 그는 천천히 이은희가 지나간 길을 따라 걸었다.
☆
은희 언니는 우리에게 음료수만 전해 준 채 돌아갔다. 나는 직감적으로 방금 전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음을 알았다. 제현 오빠도 은희 언니도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이미 무슨 일이 있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던 나로서는 두 사람 사이에 맴도는 미묘한 기류를 눈치챌 수 있었다. 게다가 두 사람은 마지막까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은희 언니는 돌아갈 때까지 제현 오빠를 절대 돌아보지 않았고, 제현 오빠는 떠나가는 은희 언니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까만 눈동자로 계속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며 묵묵히 시합을 보았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그래도 그가 민희의 앞에서는 평소처럼 웃어 주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보고 다행이라 생각했다.
우리는 친선 시합을 전부 다 본 후 집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순식간에 두 달이 지났다. 겨울 방학이 되고, 봄이 되기 전에 랭크 시험 정식 결과가 나왔다. 전해 듣기로 엄마와 선아 아줌마, 정민 아저씨, 준휘 선생님은 승급하지 못했고, 선배들은 대부분 한 단계씩은 승급했다. 정식으로 B랭크가 된 은희 언니 외에도, 천호 오빠도 CC+랭크에서 CCC로 두 단계 승급, 다른 선배들도 다들 한 단계 내지 두 단계 정도 올라갔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제현 선배가……B+랭크에서 BB랭크로 두 단계나 랭크 업을 했다고…….
“말도 안 돼! B랭크 이후로 승급하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은희 언니가 나에게 그렇게 하소연을 하러 왔을 정도였다. 나는 그 말에 그저 웃었다.
이후, 시간이 조금 더 지나 나는 학교 전용 가드복을 입고 자랑스러운 표정을 한 은희 언니에게서 사귀는 사람이 생겼다는 말을 들었다. 상대는 당연히, 성후 오빠였다.
##09. 일상과 변화
2학년이 된 나에게는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그중 가장 큰 변화는 역시 마법에 관한 것이다.
먼저, 텔레포트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원래 물건을 대상으로 한 텔레포트는 쓸 수 있었지만, 이제 나 자신이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아, 결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텔레포트마법만으로 말이다. 그래도 아직 다른 사람을 옮기는 것은 무리였다.
그리고 또 하나, 내 시공간마법 기술로 정했던 것 중 하나인 ‘통로’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게이트를 본보기로 삼았기 때문인지 내가 만든 통로는 평면 원이며 짙은 검은색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통로의 기본 원리는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것이다. 좀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이쪽에 통로를 만들고 저쪽에도 통로를 만든다. 그럼 이쪽 통로를 거쳐 저쪽 통로로 나올 수 있다. ‘문을 여니 다른 세상~.’이란 느낌이랄까?
다만 최근 겨우 만들 수 있게 된 통로는 매우 부실했다. 면적은 바늘구멍만 했고 연결할 수 있는 거리는 손가락 길이만큼 짧았다. 또한 작은 충격에도 쉽게 부서졌다. 그러나 마법에 성공했다는 것 자체에 의의가 있으니 상관없다. 내 마법은 순조롭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순조로운 일이 있으면 순조롭지 않은 일도 있는 법이다. 마법 전투용 무술을 배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에게는 무술 및 다른 육체능력에 관한 재능이 거의 없는 것으로 판별되었다. 기껏해야 보통보다 조금 떨어지는 정도? 그건 전투 마법사에게는 눈에 띄는 흠이었다. 아무래도 내게는 전투에 대한 재능이 별로 없나 보다.
처음 그 얘길 듣던 날, 나는 그 사실을 담담하게 납득했다. 당연한 거라는 생각마저 했다. 그야 그렇겠지. 난, 평범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친구들은 그 말을 듣고 처음엔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마법에서 언제나 뛰어난 모습만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뭐든지 잘할 거라고 착각했던 것 같다. 정말로 난 그런 사람이 아닌데.
나에게 전투에 대한 소질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 마법에 한한 재능이었다. 사고의 유연함, 응용능력, 대처능력, 반사 작용 등. 게다가 나는 최근 공감각능력을 키우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민 선생님이 제안한 건데, 환각마법을 공간 전체에 사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했다. 그와 관련된 가상 시스템도 소개받았다.
이처럼, 마법 소질만으로 따지면 나만큼 전투에 재능의 싹을 보이는 아이도 없다고 한다. 기술 응용도 제법 잘했고, 눈이 좋다 보니 인지나 파악이 빨랐다. 그런데 육체능력에 와서는 형편없는……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보통밖에는 되지 않는 것이다. 마법 운용은 완벽한데 육체가 그걸 따라 주지 않는다. 몇 달 늦게 무술 훈련을 시작한 친구들이 오히려 나보다 더 잘했다.
마지막으로 심리 검사를 한 결과, 나는 전체적으로 전투와는 잘 맞지 않는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전투에 참가해도 보조, 혹은 방어형이란다. 내 생각과 딱 일치하는 결과라 나는 크게 납득했다. 친구들도 모두 동의했다.
물론 내가 아직 어린아이인 만큼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소질에 대한 이야기이고, 나처럼 어릴 땐 소질을 발견하지 못할 경우도 많다. 선생님도 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노력을 포기하는 아까운 짓은 하지 않았다.
또한 2학년에 올라가면서 우리는 자연히 몇 사람과 헤어지게 되었다. 완전히 멀어진 것은 아니지만……일단 같은 I반의 일원이었던 유정 언니와 인호 오빠가 우리와는 다른 수준별 반에 들어갔다. 그리고 은희 언니와 성후 오빠를 비롯한 3학년 선배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성후 오빠는 전에 들었던 대로 교사를 노리는 모양인지 대학에 진학했고, 은희 언니는 우리 학교의 가드로 취임했다. 덕분에 다들 예전보다 훨씬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맞다, 은희 언니와 성후 오빠는 올봄부터 사귀고 있다. 약간 씁쓸하기도 하지만, 잘된 일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우리가 가장 충격받았던 일은 이것이다. 2학년에 올라가면서 우리는 반이 갈리게 되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그런데 조금 억울하게 갈렸다. 모두는 3반인데 나 혼자만 1반이었던 것이다. 뭐지, 이 불공평함은.
그래도 반이 갈리는 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보니 나는 곧 신경을 거뒀다. 신경을 쓰고 안절부절못하는 것은 나와 반이 갈린 다른 모두였다.
처음 반이 그렇게 갈라졌다는 걸 알게 된 날은 정말 난리도 아니었다. 민희가 울며불며 날 껴안는데……아니, 반이 갈린 것 정도로 뭐가 어떻다는 건지. 친구들은 그로부터 몇 달이나 지난 지금도 가끔 아쉬운 얼굴을 한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다녀오렴.”
그렇게, 우리는 2학년이 된 것이다.
☆
나는 인하와 교실 문 앞에서 헤어졌다. 아쉬워하는 인하를 옆 반으로 밀어 넣고 교실에 들어온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창문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 좋다. 나는 자리에 앉은 채 잠시 눈을 감고 바람을 느꼈다. 창가와 조금 먼 자리에 앉게 된 것이 새삼스레 아쉬웠다.
그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드르륵 소리를 내며 교실 앞문이 열렸다. 한순간 인하가 아쉬움을 못 이기고 놀러 왔나 싶었지만 구두 굽 소리 덕분에 그게 아님을 금세 알았다. 고개를 돌려 확인해 보니, 구두 굽 소리의 주인은 담임 선생님이었다.
“어? 은하야, 벌써 왔니?”
작년에 이어서 이번 담임 선생님도 여자였다. 나는 가방에서 책을 꺼내다 말고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혹시 매일 이 시간에 오니?”
“네.”
이어서 그녀는 반을 쭉 둘러보더니 물었다.
“매일 아침 창문을 열어 환기한 게 혹시 은하 너니?”
“네…….”
“그렇구나. 은하가 매일 아침 교실을 환기했던 거구나. 우리 은하가 착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성실하기까지 하네. 에구 착해라.”
선생님이 내게 다가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낯간지러운 느낌이 온몸을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모범생 축에 든다. 소심한 만큼 선생님의 말이나 교칙을 잘 지키는 편이니까. 모범생은 선생님의 신뢰나 예쁨을 잘 받는다.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칭찬을 들으니 많이 부끄러웠다.
“그럼 착한 은하한테 선생님이 선물을 줄게.”
선생님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내게 쥐여 주었다. 비닐로 포장한 사탕과 초콜릿이었다.
“은하한테만 주는 거니까, 쉿, 다른 친구들한테는 비밀이야?”
선생님은 어린애 다루듯이 나를 향해 조곤거렸다. 지극히 어린애 취급이라고는 하나 칭찬받는 건 언제나 기쁜 일이다. 나는 초콜릿과 사탕을 손에 쥐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래. 책도 열심히 읽어. 책을 많이 읽으면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단다. 올해 독서왕은 은하가 아닐까 싶네.”
“…….”
나는 쑥스러운 기분에 우물쭈물했다. 선생님은 웃으면서 반을 나섰다. 나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내 정신 연령만 몇 살인데. 하지만 아무래도 소심한 성격은 쉽게 고쳐지는 게 아니라서, 선생님과 일대일 대화를 하면 긴장하게 된다. 나는 복도 쪽을 흘끗 돌아보다가 꺼내 두었던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교실 안에 아이들이 가득 찼다. 반 아이들은 각기 자신의 친구들과 소란스럽게 떠들어 댔다. 내게 다가와 말을 거는 아이는 거의 없었다. 가끔 용건이 있으면 말을 걸어오는 정도였다.
이쯤 되면 아무리 어려도 다들 알게 된다. 서로의 타입이 어떤지, 누가 나와 맞을 것 같은지. 그리고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혼자 지내는 타입이었다. 소심하고, 익숙하지 않은 사람 앞에서는 지독하게시리 말이 없다. 덕분에 나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와 일부러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아이는 더더욱 없고.
하지만 나는 그게 정말로 편했다. 편하고 또 익숙했다.
친구들은 자기들이 없어서 내가 외롭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단 말씀이지. 물론 친구들과 전보다 자주 대화를 못 하게 된 건 아쉽고 외로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소란스러운 반 안에서 혼자라는 사실 자체가 외롭지는 않았다. 사람을 대하는 게 워낙 서툴다 보니, 오히려 아무도 말을 걸어 주지 않는 쪽이 편했다.
왜 혼자 있으면 무조건 외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걸까. 그건 사람마다 다른 건데.
예전에는 친구가 없다는 것에 가끔 외로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이젠 마음이 맞는 친구가 생겼다. 그러니 혼자 있는 게 전혀 외롭지도 신경 쓰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내가 타인의 시선으로 볼 때 재수 없는 유형임은 알고 있다. 항상 혼자 있고, 말도 없고, 남의 말에 대답만 해 줄 뿐 무뚝뚝하고, 가끔 눈동자가 날카로워서 노려보는 것 같고. 그래서 뒷담을 까는 아이들도 가끔 있는 게……곤란하단 말이지.
“아까부터 쟤 책만 읽어. 재미없게.”
“마법도 잘 못 쓰는 게 공부만 잘하면 다야?”
“솔직히 은하 쟤 음침하지 않아?”
“맞아. 음침해.”
저기, 다 들리는데.
나는 책을 읽으며 가슴이 찔리는 느낌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뒷담 하는 사람은 모르지만, 저런 데서 뒷담 까 봤자 다 들린단 말이다.
‘뭐, 어쩔 수 없지. 내 성격이 이런 탓이니까.’
나는 소심하지만 착실하니까 선생님 눈에는 모범생으로 보여 예쁨받아도,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는 말이 없고 음침하다며 기분 나쁘게 여겨지기 쉽다. 요즘엔 나를 뒷담 하는 목소리가 좀 커진 것도 같다. 그 이유도 알고 있다.
사람 중에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응원하는 사람도 있지만 개중에는 자기보다 못하거나 보통 이하인 사람을 보면 깔보는 사람도 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하긴, 성인이 되어도 철없는 사람은 결국 철없지만.’
나는 선생님이 날 좋게 생각할 만큼 제법 성실한 편이다. 수업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고, 특히 마법 수업 때는 졸지도 않고 필기도 열심히 한다. 책도 많이 읽는다. 모범생이라는 말을 들을 만하다.
결코 의도적인 행동은 아니다. 왜냐면 진짜로 공부가 즐거우니까. 수업 내용이 너무 흥미로워서 절대 졸음이 오지 않는다. 특히 2학년이 되어 새롭게 배우게 된 스펠마법이 흥미로웠다. 물론 나는 이 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어느 정도 스펠마법을 익혀 둔 상태였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마법을 사용하는 방법만이 아니라 그 마법의 시동어나 주문에 대한 해석도 가르쳐 준다.
스펠마법은 무척 다양하다. 스펠마법은 간단히 말해 글을 이용해 마력을 조종함으로써 시동하는 마법이라, 매우 다양한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기초마법인 ‘라이트’만 해도 한글로는 ‘빛’이라는 의미가 된다. 즉, 어떤 나라에서 만들었는지에 따라 사용된 언어가 라틴어, 영어, 한자 등 천차만별인 것이다. 심지어 영어와 라틴어, 한자를 전부 섞어서 주문으로 만든 마법도 있다.
스펠마법은 고위마법으로 갈수록 주문 해석이 난해해져 학문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마법이었다. 그래서 해석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이 단어가 마력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이 주문이 마력을 운용하는 이미지에 어떤 도움을 주고……그런 식으로.
물론 번역한 말로 외쳐도 마법을 발동할 수는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원어로 사용하는 편이 위력이 컸고 마법 상태도 완전했다.
스펠마법은 분명 고위마법일수록 학문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마법이지만, 한편으로는 마법사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쓰는 마법이다. 결국 마력을 움직이는 방법과 시동어, 주문만 알면 쓸 수 있으니까. 아이들이 처음 마법을 배울 때 가장 쉽게 익힐 수 있는 마법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기존마법 중에서 보유하고 있는 마법 숫자가 가장 많다. 마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많은 나로서는 매우 흥미가 돋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있음에도 나는 몇몇 아이들의 비웃음을 사고 있다. 이유는 간단했다.
“쟤 진짜 애쓴다.”
“야, 그냥 이해해 줘. 어쩌겠어? 대현에 다니는데, 마력 컨트롤이 꽝이라 아직 마법을 못 쓰잖아.”
“맞아. 스펠마법 배운 지 꽤 됐는데, 쟨 진짜 하나도 못 쓰잖아.”
음, 뭐, 그런 거다. 그러니까, 실력을 숨기기 위해서 일부러 서툰 척 마력을 운용하다 보니 낙오자란 낙인이 찍혔다고나 할까.
내 마력 컨트롤이 꽝이긴 개뿔! 딴 건 몰라도 내가 마력 컨트롤과 마력 감지는 상당히 자신 있다. 성인 마법사와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또래 중에서는 특별할 것이다. 하지만 실력을 숨기기 위해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학기 초에만 못 쓰는 척하다가 중간부터 적당히 마법을 쓰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그 생각은 처음 마법에 성공하고 뻐기는 아이를 본 순간 철회되었다. 아이들의 마법 실력이 생각보다 너무 낮았던 것이다. 아무래도 재능 있는 아이들 사이에서만 있다 보니 눈이 너무 높아졌던 모양이다.
분명 성공하긴 했는데, 빛도 약하고, 마법을 받쳐 주는 마력도 엉켜 있는 것처럼 엉성하고, 지속 시간도 짧고, 성공하기까지 시간이 너무 걸린다. 나는 아이들이 마법을 쓰는 모습을 내가 저번에 썼을 때와 세세하게 비교해 보았다. 나는 분명 이 아이들과 비교하면 훨씬 높은 경지에 있었다.
그때 나는 서툴게 마법을 시도하는 척하려던 계획을 포기했다. 내가 암만 느리게 마법을 발동한다고 해도, 마력 컨트롤이 또래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만큼 내 마법은 눈에 띄게 뛰어날 것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시험 때만 제대로 하기로 결심했다.
최소한 3학년이 되면 좀 더 제대로 하는 아이들이 나오겠지. 그럼 나는 재능을 뒤늦게 일깨웠다는 듯이 그 뒤를 따라갈 것이다. 그걸로 충분했다.
하지만 진짜 한숨만 나왔다.
소심한 성격 탓에 은따를 여러 번 당해 봐서, 이제 저렇게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에는 어느 정도 면역이 되어 있다. 그렇다고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그래도 나는 차라리 아이들이 아이들다워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어른스러웠어 봐라. 그 정도로 뒤처지는 아이가 대현에 입학할 수 없다는 걸 금방 눈치채고야 만다.
그래도 사실 서툴게 마법을 선보이는 걸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었다. 최근 나는 마력 컨트롤 연습에 아주 열을 올리고 있었다. 마력 컨트롤 실력을 높이고 높이고 더 높이다 보면……저 아이들만큼 실력이 서툰 척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사실 비웃음당하는 게 조금 분했던 것이다. 아~주 조금.
하지만 당분간은 도저히 무리다. 내가 암만 느리고 엉성하게 마법을 실행해도 아이들과는 확실히 차이가 난다. 아이들은 놓칠지 몰라도 선생님이라면 눈치챈다.
그래서 나는 평소 마법 실습 때는 마법을 완성 직전에 깨트리고 있다. 감지 마법사가 아닌 이상 그 자세한 일면은 보지 못할 테니까. 담임 선생님은 감지 마법사가 아니었다. 덕분에 모의 연습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거기, 수업 시간에 떠들면 안 되지.”
“네에. 죄송합니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호통에 의연히 대답했다. 나는 속으로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