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342
안타까운 한숨 너머로 격렬하게 지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도……흐아, 통할 것 같은 마법, 이것저것 소환해서 사용해 봤는데……. 하아, 하아…….]이소영이다. 최인성이 의아해하며 눈썹을 찌푸렸다.
“엄청 지친 것 같다?”
[그야 지치지! 성진이랑 은하 마법은 흉내 내기 엄청엄청 고되단 말이야!]“아하. 그래서 어때?”
[성진이랑 은하의 마법은, 역시 먹혀. 은하의 마법을 사용하면……주위 마력을 모아서 작은 슬라임으로 부활시킬 수도 있다? 문제는, 내 마력으론, 조정하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고, 확실하게 죽이려면 시간이 걸리고, 한 번에 기껏해야 다섯 번밖에 못 쓴다는 거야! 그래도 뺏기는 마력은 적어! 아이템 덕분이지! 아, 지쳤다!]통신기 너머로 이소영이 털썩 주저앉는 소리가 났다.
[일대를 완전히 얼려서 시야 공유를 하며 실험해 봤다만, 내 얼음은 이제 별로 효과가 없다. 전혀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완전히 파괴하기가 힘들고, 그러면서도 내 마력을 흡수하며 도망간다. 내성이 생긴 것도 있을 거다.]“이런.”
[이쯤 하면 본체가 반응을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김형일이 난감한 기색으로 투덜댔다. 최인성 역시 난감한 기색으로 말을 받았다.
“본체라, 본체가 있긴 한 걸까요?”
[그것도 의문이지. 본체도 없고 핵도 없는, 척수 반사만으로 존재하는 무생물이거나 혹은 무기일지도 모르잖아?]“지금까지 본 바로는 ‘본체’처럼 보이는 건 없어요.”
[에휴, 골치 아파라.]그들은 적당히 정보를 교환한 뒤 통신을 끊었다. 통신을 끊은 다음 정예리는 마력이 적당히 짙은 곳에서 멈춰 선 후, 샅샅이 슬라임의 상태를 살폈다.
“역시 큰 변화는 없어요. 그냥 서서히 힘을 늘려 가고 있을 뿐이에요. 자신의 일부가 당한 것도 눈치 못 챘을걸요?”
“그런 것도 알 수 있어?”
“알 수 있어요.”
“보는 능력자들은 정말 대단한걸. 그리고 그 희귀한 보는 능력자들이 우리 팀에만 수두룩하니.”
최인성도 조금 볼 수 있고, 사실은 강예슬도 조금 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을 계속 지켜보다 보면 그 위에 두리뭉실한 형상이 떠오른다나. 특히 물건 안에 심어진 마법은 잘 간파한다. 괜히 유은하의 보조를 하는 게 아니다.
“은하 언니에 비할 바는 아닌걸요.”
“예리 너 정도면 충분히 사기급이야. 그럼 이쯤에서 폭탄부터 한번 시험해 볼까?”
“네……앗.”
아래로 내려가려는데 문득 정예리가 먼 하늘을 돌아봤다. 고글을 쓰고 있던 최인성은 그 방향에서 사람의 기척을 확인하고 화면을 확대했다.
“…백한 씨랑 진남 씨네.”
“역시 대현이랑 유란은 친하네요.”
“그야 뭐.”
송진남은 유란의 A랭크 마법사다. 유란에서 초등학교 양호 선생을 했을 정도로 치료마법에 뛰어나다. 하지만 전문 치료 마법사는 아니다. 최인성 입장에서는 이백한보다도 낯선 사람이었다. 같은 유란이라고는 해도, 그와는 만날 일이 별로 없었다.
최인성은 한순간 고민했다. 그러나 결국 자리에 멈춰 섰다.
“합류하자.”
“괜찮나요?”
정예리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최인성을 올려다봤다. 최인성이 씩 웃었다.
“난 괜찮아. 힘든 건 은하랑 인하지. 게다가 이런 경우라면 은하랑 인하도 합류했을걸?”
“아…….”
“상대방 입장에선 우리도 그렇겠지만, 친한 사람은 죄다 위험한 곳을 자처해서 곤란해.”
“……그러게요.”
정예리가 무엇을 떠올렸는지 아련한 눈으로 쓰게 웃었다.
“왜 그래?”
“아니, 친구가 생각나서요. 축제 회장에서 같이 살아남은 친구가 있는데…….”
“아…….”
“그 이후로 소식을 들은 적이 없어서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조금 싸울 의지가 있는 마법사는 다들 그런 식이다. 위험을 자초하기도 하고, 복수를 하겠다고 뛰어나가 행방불명되기도 하고, 얼마 후에 시체만 발견되기도 한다.
그나마 유은하 일행과 친하던 사람은 참극 이후로는 죽지 않았다. 이백한도, 한성후도, 김주연도, 한국에 있는 다른 대현의 마법사도 대부분 살아 있다. 너무 잃었기에 잃을 사람이 없는 것도 같아 씁쓸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더 아는 사람이 위험을 자처하면 두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백한이 그렇듯이, 그들도.
최인성은 통신으로 동료에게 근처에 있던 이백한, 송진남과 합류하겠다고 말하고 그쪽으로 갔다. 언령으로 두 사람을 장막의 인지 안에 끌어 들이고 말을 걸었다.
“「승인」. 안녕하세요? 백한 씨, 진남 씨.”
“안녕하세요.”
“너희!”
이백한과 송진남이 다급히 돌아봤다. 이백한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안 도망가네?”
“어차피 이번에는 같이 일을 해야 하니까요.”
최인성은 웃으며 본심을 내뱉었다.
“트라베리아를 엿 먹이는 일이라면 대찬성이거든요.”
“…쯧.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그런 문제죠. 저희가 없어도 연맹이 힘을 합치면 어떻게든 없앨 수 있을 테니.”
“빨리 없애는 게 중요한 거잖아. 거기엔 너희의 힘이 반드시 필요해.”
“그런가요.”
하아. 이백한이 미소를 지우며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됐어. 그래서 어때? 실체를 불러내거나 타격을 입힐 방법, 찾았냐?”
“글쎄요, 아무래도 범위가 너무 넓고 상대하기 까다로워서 말이죠. 그래도 힘을 깎는 데는 지금 상태가 더 편할지도 모르겠어요. 움직이지 않으니까.”
“그건 우리도 그래. 덜 위험하고, 조금이나마 요소를 없앨 수 있으니까.”
정예리가 이백한과 송진남을 빤히 아래위로 훑었다. 안개화된 슬라임은 흡인력이 약하다. 덩어리진 슬라임은 A랭크 수준의 마력 따위 순식간에 흡수하지만, 분열한 슬라임은 이 두 사람의 마력도 조금씩, 천천히 흡수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백한 씨의 마법은…….”
“원소마법이지. 안타깝게도 슬라임 자식이 너무 강해서 자세히 분석하기는 힘들지만.”
“그런가요.”
“그래도 조금이라면 부술 수 있어. 안개화된 녀석은 순수하게 마력으로만 이루어진 생물이다. 슬라임의 마력 원소를 모아 부수거나 다른 마력으로 변질시키며 돌아다니고 있다.”
“저희도 비슷해요. 지금의 슬라임에겐 ‘그림자’가 생기지 않지만, 예리가 특수한 마법사라, 그걸로 조금씩 부수고 돌아다니고 있어요.”
“흐응.”
두 사람을 빤히 관찰하고 있던 정예리는 두 사람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세요, 정예리라고 해요! 새벽별무리의 전속 의사랍니다.”
“그래, 소문은 대충 들었다. 녀석들을 잘 부탁한다.”
“물론이죠. 갑작스럽지만 이거 받으세요.”
정예리는 주머니에서 정화 결계석을 꺼냈다. 조정하는 게 아닌 단순한 정화 결계석쯤이야 기지에 굴러다니는 수준이다.
“이걸로 결계를 펼치면 마력을 덜 흡수당할 거예요. 다만 일회용이라 오래가지 않으니까 주의하시고요.”
“어, 그래. 고맙다.”
이백한과 송진남이 결계석을 받았다. 이백한은 결계석을 바라보다 픽 웃었다. 유은하가 만든 물건이구나라는 생각에.
“다른 동료분들은 어디 있습니까?”
네 사람은 자연스럽게 동행했다.
“저희와는 다른 곳에서 마법을 시험해 보고 있죠. 지금은 다 같이 몰려다닐 정도로 위험하지도 않으니까요.”
송진남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란에서 무뚝뚝함의 대명사로 통했던 마법사답다.
“그럼 은하랑 성진이는?”
결계석을 사용해 결계 갑옷을 입은 이백한이 툭 던졌다. 나른한 표정이나 눈빛만은 날카롭다. 최인성은 태연히 거짓말을 했다.
“말했잖아요. 다른 일이 있다고.”
“그 다른 일이 뭔데?”
“비밀이에요.”
옆에서 정예리가 쏙 얼굴을 내밀었다. 이백한이 험악하게 표정을 굳히자 예리가 배시시 웃었다. 이것 봐라? 만만치 않은 꼬맹이일세. 이백한이 그런 생각을 하며 정예리를 계속 노려봤다. 최인성이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뭡니까? 왜 우리 동생을 노려봐요.”
“하, 동생이라.”
“불만 많은 말투네요.”
“별로. 오히려 반기고 있어. 너희 팀은 밸런스가 꽝이었잖아. 안 맞는 밸런스를 은하가 전부 커버하고 있었을 테고. 그런데 그 은하조차 치유능력은 부족했지.”
“밸런스,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요.”
최인성이 불퉁한 얼굴로 대꾸했다. 명백히 불만에 찬 목소리다.
“치료 마법사가 없는 것만으로 최악이야. 뻔하지. 옛날엔 너랑 은하한테 부담이 다 실렸지? 고작 5명이서 무모하게 구니까 그렇지.”
“…….”
“동료가 늘었다니 그나마 안심은……되긴 개뿔. 이렇게 속 썩여서 쓰겠냐? 쯧, 곧 죽어도 지들끼리 하겠다고.”
최인성이 멋쩍은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정예리가 옆에서 동감하며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안 들어왔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네 사람은 슬라임의 마력이 느껴지는 곳을 무작위로 돌아다니며 다양하게 시험했다. 마법 무효화 폭탄은 그럭저럭 먹혔다. 무효화 탄환보다는 덜 먹혔지만 충분히 도움이 되는 무기다. 마력을 녹이는 가루도 생각보다 먹혔다. 이 가루는 가진 마력은 별로 없지만 뿌린 순간 주변 마력을 삼키며 증식한다. 말하자면 슬라임과 비슷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슬라임의 흡수력이 더 높아 가루가 증식되는 범위는 반경 채 10m를 넘지 못했다.
차례차례 나오는 다양한 무기를 보며 이백한과 송진남은 별걸 다 가지고 있다고 감탄했다.
다음으로 최인성은 진화석을 먹인 포식용 유리 장식을 꺼냈다. 유리 장식은 한 사람당 하나씩 가지고 있다. 굳이 전부 시험해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정예리의 장식만 켰다.
정예리가 가지고 있는 포식 아이템은 식인 식물이 모델이었다. 둥근 열매에 이빨이 달린 식물이 허공에, 마력이 있는 방향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부딪쳐 씹었다. 처음엔 숨을 들이켜듯 마력을 들이켜려 한 모양이었으나, 저 모양이 돼도 의지는 살아 있다는 건지, 슬라임의 마력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흡수 범위에서 멀어지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이 상태일 때는 안 맞는 것 같아. 범위도 너무 넓고.”
“그러게요. 옛날에 만든 거라서 힘이 떨어지는 것도 있겠지만요. 진화석을 썼다곤 하지만 슬라임은 인하 언니의 마력을 먹을 정도로 강하잖아요.”
“차라리 실체가 있는 슬라임일 때 더 잘 먹을 것 같아.”
“저걸 보면 우리가 자기 힘을 깎는 걸 알고는 있는 것 같은데.”
“그것보단 광범위하게 마력을 흡수하는 게 먼저라는 건가?”
한편 이백한과 송진남은 흥미로운 눈으로 포식 아이템을 살폈다. 슬라임과 비슷한, 마력을 먹는 아이템이라.
중간중간 정예리의 마법을 몇 번 더 시험했다. 정예리가 안간힘을 써 모은 슬라임의 최대 크기는 기껏해야 성체 고양이 정도의 크기였다. 모은 다음, 지팡이로 찔러 산산이 분해한다. 이백한은 그 모습 역시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한편 정예리는 이백한이 부러웠다. 정예리가 마법을 시험할 때는 이백한도 옆에서 같이 자신의 마법을 시험했는데, 이백한은 모으지 않고도 슬라임을 부술 수 있었다. 다만 A랭크라는 힘의 한계가 있어 정예리에 비하자면 아주 적은 양에 불과했다.
마지막으로 시험한 게 유은하의 대규모정화마법 아이템이다. 정화마법이니 당연히 공격 아이템이 아니다. 겉모양이 위협적으로 생겼다 한들 일반 생물이나 물건에는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는다. 상극의 마력을 지녔다 한들 발사한 마력만 정화당할 뿐 아무런 해도 없다.
정화 아이템 시험은 최인성과 정예리가 하기로 이미 동료들과 입을 맞춰 놨다. 유은하와 이성진이 없을 때는 최인성과 정예리가 감지와 관찰을 담당하고 있다. 조정하는 고위 정화 마법석은 강인하에게 빌린 것 하나까지 더해 현재 아프리카에는 총 6개밖에 없으므로 시험용으로 쓴다는 건 어느 정도 모험이다.
‘예상으론 안개 상태일 때는 정화 아이템이 더 잘 먹힐 거야. 생각보다 잘 들면 좋겠는데.’
대규모 정화 아이템과 포식 아이템, 이 두 개가 그들의 예상으론 안개화된 슬라임에게 제일 잘 먹힐 법한 무기다. 최인성은 먼저 동료들에게 연락해 대규모 정화 아이템을 쓰겠다고 예고를 했다. 통신이 좀 불안정하지만 서로의 위치도 알고 있고 유은하의 정화마법은 눈에 띄니 관찰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다.
“이번엔 또 뭘 하려고?”
아까보다 훨씬 진지해진 분위기에 이백한과 송진남이 의아함을 표했다. 최인성이 씩 웃었다.
“제일 시험해 보고 싶었던 걸 시험하려는 거죠.”
최인성은 그렇게 말하며 팔찌의 아공간에서 정화 아이템을 꺼냈다. 웬만한 물건은 그림자(아공간)에 두지만, 정화 아이템은 넣어 두었다간 자신의 마법이 약해지고 만다.
게다가 이 아이템은 최인성의 몫으로 주어진 것도 아니었다. 강인하에게서 받아 왔다.
정화 아이템의 힘은 강한 사람이 가진 것일수록 약하고, 약한 사람이 가진 것일수록 강하다. 강인하의 아이템이 딱 시험하기 좋은 마력과 범위를 가지고 있다.
강인하가 가진 정화 아이템은 범위는 반경 1km, 위력은 S다. 정예리나 강예슬이 가지고 있는 아이템에 비해 약하다고 해도 이 정도 힘이면 땅속 깊이 퍼진 독까지 전부 정화할 수 있다. 어차피 레벨은 유은하의 실력을 그대로 따르니까.
“좋아.”
강인하가 가지고 있던 정화 아이템은 반지 모양이었다. 최인성은 꽃이 새겨진 새하얀 은백색 반지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퉁!
최인성은 고글을 쓴 채 눈을 부릅떴다. 반지가 무언가에 공명하듯 은은하게 빛을 뿌려 댔다. 그 직후, 하늘에서 새하얀 화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화아아악!
마법 시전까지 걸린 속도는 순식간, S랭크의 속도에 비하면 느리지만 어차피 공격마법이 아니니 충분하다.
새하얀 화살 비는 소리 없이 대지를 적시며 시든 초목에 생기를 부여했다. 최인성은 그중에서 슬라임의 마력에 집중했다. 정예리도 입을 다물고 마력 양상을 관찰했다.
“……!”
화살 비는 떨어지며 주위에 있던 슬라임의 마력을 ‘조정’했다. 역시, 예상대로다. 실체가 있다면 모를까, 살아 있는 생명체의 마력과 생명력을 먹는 안개가 ‘자연스러운 존재’일 리 없다.
‘그렇다곤 해도 생각보다 잘 먹히는데? 어쩌면 슬라임일 때도 생각보다 효과 있을지 모르겠어.’
녹색 마력이 흩어지며 검은색, 금색, 은푸른색 등 여러 가지 색깔로 분열됐다. 그중 검녹색 마력이 최인성의 몸에 빨려 들어왔다.
‘흡수된 우리 마력이구나!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에 돌아오는 거겠지.’
마력이 변이되는 횟수가 많아진다. 그 직후 변화가 일어났다.
이백한이나 정예리가, 혹은 최인성의 실험으로 조금조금씩 자신의 몸이 사라져도 잠깐잠깐 피할 뿐 딱히 아무런 행동을 보이지 않던 슬라임 안개가 처음으로 제대로 움직였다.
녹색 마력이 빠르게 물러났다. 정화마법이 닿지 않는 곳으로, 빠르게.
“윽!”
대규모마법의 지속 시간은 1분. 그것을 보고 아이템에 감응하며 마법 범위를 움직여 보았으나 안개는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흩어졌다.
‘저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었던 거야? 지금까지는 마력을 먹기 위해 그냥 맞았던 건가!’
그것에 그치지 않고 바닥에 떨어져 흩어지는 정화의 화살을 슬라임 안개가 일시적이나마 슬라임으로 돌아와 먹으러 왔다.
아득
사르륵….
일부는 사라지고 일부는 살아남아 씹어 삼킨다. 정예리가 그 모습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저대로는 은하 언니의 마법마저 안 통하게 될 거예요!”
아이템과 유은하가 쓰는 정화마법은 레벨이 다르다. 실력이 다르고, 거기에 담긴 의지의 힘도 다르다.
그래도 역시 내성이 생겨서는 곤란하다.
최인성은 정화마법을 멈춰 세우고 반지를 도로 가져왔다. 반지의 빛이 많이 작아졌다. 이제 3시간 정도는 쓸 수 없다. 정예리가 축복의 서를 펼치며 슬라임을 저격했다. 슬라임은 정예리의 마법을 맞고 둔해지면서도 정화마법을 먹으려고 했다. 그러나 대부분 소화하지 못하고 콜록콜록 토해 냈다.
“토해 냈어?”
“와, 역시 은하 언니의 마법이랄지.”
그러더니 이번에는 공격한다. 슬라임이 처음으로 마력을 공격으로 전환해 정화마법을 부수려 들었다. 부수어지는 정화마법을 보며 최인성과 정예리는 표정을 굳혔다.
정화마법은 ‘실체’가 없는 마법이다. 공격도 아니고, 방어도 아니고, 더러운 무언가를 정화하기 위한……공기보다 더 공기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하여간 그러한 것이라 손에 잡히지 않는 그림자처럼 보통 마법으로는 없앨 수 없다.
독으로 오염시키려 해도 정화의 상성이 좀 더 우위다. 지금까지 유은하의 정화와 동등하게 존재한 건 이성진의 특수능력밖에 없었다.
“예리야. 보긴 봤는데, 난 어떤 현상이 일어난 건지 잘 모르겠어.”
“뭐라고 해야 할까……마력을 흡수해서 자신의 마력으로 삼는 것과는 정반대였어요. 마법이 아니라 마력을 철저하게 파괴했다고나 할까? 끄응, 좀 설명하기 어렵네요. 하지만 저 슬라임은 정말 무서운 상대예요.”
“이건 진짜 위험하군.”
원소를 합성하고 분해하는 이백한도 비슷한 걸 느꼈는지 혀를 찼다.
“너희 조심해라.”
“네. 두 분도 너무 오래 있지 말고 돌아가세요.”
“말 안 해도 조금 이따 갈 거거든?”
웃고 있는 최인성과 이죽거리는 이백한 사이로 번개가 번쩍이는 듯했다. 송진남은 한숨을 내쉬었으며, 정예리는 몰래 히죽 웃었다.
마력을 분해하고 파괴한다고 해도 그 속도는 느렸다. 저 속도라면 아마 정화된 지역의 마력을 다 분해하는 데 세 시간은 걸릴 것이다. 충분한 효과라고 하면 충분한 효과지만…….
정예리는 슬라임이 마력을 먹거나 분해하도록 내버려 두는 대신 유은하의 정화마법을 책 속으로 불러들였다. 정화마력이 사라지자 안개를 구성하는 마력들이 다시 옅어지며 아까 상태로 돌아갔다.
“저 아이템은 몇 개 있냐?”
“아까 쓴 걸 빼면 지금 여기 있는 건 다섯 개예요.”
“저건 당장 써 봤자 슬라임을 자극하기만 할 것 같으니 안 쓰는 게 좋겠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마지막에 쓰는 게 좋겠어요! 슬라임이 계속 안개화해 있지는 않겠죠? 본격적으로 먹으러 나오고 본체의 힘을 어느 정도 깎아 냈을 때! 다 깎아 내도 지금 상태를 보면 허공에 떠다니는 적은 마력에서 부활할 가능성도 있으니까…….”
생명력을 보는 정예리는 가끔 최인성이나 이백한이 생각지도 못한 것에 시점을 둔다. 세 사람은 깨달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약해졌을 때 싸그리 정화시켜 버리자는 거구나. 그래, 예리 네 말대로 하는 게 좋겠어. 위험할 때 쓰더라도 강약을 조절하고….”
“본체를 쓰러뜨려도 적은 마력에서 부활……그렇군, 그걸 생각 못 했네. 정말 까다로운 타입이야.”
“으음.”
그 후로도 네 사람은 슬라임의 힘을 조금씩 깎으며 돌아다녔다. 슬라임은 여전히 변화가 없고, 마력만 계속해서 넓게 퍼지고 있다.
마지막에는 힘이 퍼진 테두리를 돌며 힘을 깎아 냈다. 폭탄이나 마법 약은 토벌할 때를 대비해 아껴 뒀다. 이 방법으로는 완전히 없앨 수 없을 테니까.
이백한은 어느 정도 데이터가 모이자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우리는 이만 가야겠다. 어차피 우리는 오래 있지 말라고 경고받았어. S랭크라도 위험한 곳이니까 확인만 하고 바로 돌아오라고.”
최인성이 안도하며 웃었다.
“그렇겠지요.”
“그래,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이백한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너희도 걱정 좀 그만 시키고.”
“…….”
최인성은 인사하고 정예리와 함께 물러났다. 배시시 웃는 정예리를 향해 이백한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송진남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네 사람은 두 시간 정도의 동행을 끝내고 갈라졌다.
정예리는 구태여 이백한과 송진남이 돌아갔는지 확인했다. 토벌에 나서기로 한 다섯 명은 팀 구성을, 위치를 지속적으로 바꾸며 점점 퍼지는 영역의 확산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다섯 명뿐만 아니라 연맹 사람들도 돌아다니며 우림의 생기가 사라지는 것을 막으려 애썼다. 웬만한 마법으론 오히려 흡수당할 뿐이니까 효과는 미미했지만.
이소영네 팀은 레일리와 만났다. 레일리도 혈족마법의 규율을 적용해 슬라임의 힘을 깎았다.
그렇게 깎는데도 힘에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정예리는 안개로 뒤덮인 숲을 노려보며 분함에 입술을 삐죽였다.
“이렇게 했는데도 힘이 더 늘다니!”
오후 두 시가 되었을 때 이변이 일었다.
그건 모르는 사람이 볼 때는 이변이 아니었다. 이변을 제일 먼저 느낀 건 레일리나 정예리 같은 마력을 정보로 보는 부류였다.
그렇게 힘을 깎았는데도 슬라임 개체 개개인의 힘이 강해졌다. 마력 요소요소가 빛나고 있다. 그 빛이 점점 강해진다.
“인성이 오빠! 대열을 짜야 해요!”
“부활하나?”
“네!”
정예리가 확신 어린 얼굴로 긍정했다. 그러나 최인성이 연락할 필요도 없이 레일리가 이미 사태를 파악하고 움직이고 있었다. 레일리는 최인성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최인성은 강인하에게 ‘시작됐다’는 메시지를 보낸 후에야 그 메시지와 통신을 연결했다. 최인성이 원거리에서 저격하겠다고 말을 꺼냈으나, 레일리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저희가 있으니까 괜찮거든요? 어머니도 저를 통해 보고 있을 테고, 괜찮아요!]“하지만 너무 가까우면 마력만 뺏겨요.”
[알아요. 일정 거리로 떨어진 다음, 규율을 펼칠 거예요!]“알았습니다. 그럼 바로 갈게요.”
[빨리 와요!]먼저 합류하는 건 선발대다. 선발대는 레일리 리카르트, 최인성, 정예리, 레베카 아이지스, 윌리엄 엔버린, 알반 랜드로, 아르피나 루시카, 로카 조웬까지 8명이다. 전원 이곳에서 공격 수단을 시험해 봤고, 통하거나 통하지 않았다. 진짜를 상대로는 또 모르지.
선발대로 뽑힌 새벽별무리 멤버는 장막을 풀고 선발대에 합류했다. 그들은 마력의 근원지에서 조금 떨어진 허공을 날며 점점 한곳으로 뭉치는 슬라임을 응시했다. 슬라임의 힘은 은밀하기에 누군가는 느끼고, 누군가는 느끼지 못했다. 레일리나 정예리, 슐란은 느끼고, 나머지 사람은 거의 느끼지 못했다.
슬라임의 힘을 볼 수 있는 레일리가 휘말리는 에너지를 줄여 볼 겸 규율마법을 사용했으나 느리면서도 거센 힘에 오히려 휘말려 마력을 뺏겼다. 레일리는 분해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사이 정예리는 축복의 서를 꺼내고 그 안에서 축복의 지팡이를 꺼냈다.
“……어라?”
“왜 그러세요?”
“으음, 아니…….”
그런데 정예리의 지팡이를 보고 레일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 지팡이, 어디에서 본 것 같아서요.”
“이거요?”
정예리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레일리가 손가락을 턱에 짚고 고민하는데, 로카 조웬이 안경을 추켜올리며 중얼거렸다.
“닮았어.”
“네? 닮았다니요?”
“하르펜 님의 지팡이랑….”
“……!”
정예리가 흠칫했다. 이어 경악했다. 누구의 지팡이와 닮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