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343
‘랭킹 2위, 전설 중의 전설, 하르펜 님이랑?!’
축복의 서는 원래 축복을 읊는 버프 주문과 치료마법 수식을 축약한 것들이 적혀 있었다. 축복의 서가 이렇게 변한 건 알카무라에 의해 마법석을 이식받고, 축복마법과 마법서가 합쳐진 이후다.
“맞아요! 닮았어요! 하르펜 님은 평소 무기를 잘 쓰지 않았지만, 진심일 때는 꼭 지팡이를 꺼냈죠. 어머니의 기억에서 본 하르펜 님의 지팡이와 많이 닮았네요!”
정예리는 당황하며 지팡이를 보았다. 지팡이는 아래로 갈수록 가늘고, 위로 갈수록 두껍다. 손에 쥐는 막대의 재질은 백금으로 금색 문양이 규칙적으로 둘러져 있다. 막대 꼭대기에는 주먹만 한 크리스털이 박혀 있고, 그 주위에 백금으로 된 작은 날개가 있다.
“하지만 닮았을 뿐….”
“맞아요. 하르펜 님 건 크리스털 주위에 금속 링이 있었고, 지팡이 중간중간에 둥근 수정이랑 에메랄드가 걸려 있었거든요. 문양도 달라요.”
“아, 그, 그렇군요. 처음 알았어요.”
“그럴 만하죠. 하르펜 님도 루키아 님도 대외적으로 활동하신 분은 아니니까요. 게다가 하르펜 님은 루키아 님과 싸울 때가 아니고서야 손가락 하나로 사람을 쓰러뜨렸고. 이름은 그렇게 유명한데 본인에 대해선 문헌 한 권 제대로 안 남아 있다니까요.”
“닮은 건 우연이에요!”
“알아요. 그리 드문 형태도 아닌걸요. 거기에 하르펜 님의 지팡이를 아는 사람은 루키아 님이나 하르펜 님과 꽤 아는, 그러니까 100살 200살은 더 먹은 할머니 할아버지뿐이니까요.”
레일리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정예리는 창백한 얼굴로 지팡이를 꽉 쥐었다. 설마.
‘설마…?’
정예리는 천천히 시선을 굴려 최인성을 보았다. 최인성의 표정도 굳어 있었다.
알카무라에서 나온 지 반년이 훨씬 지났다. 정예리의 실력은 빠르게 S랭크에 다가가고 있다. 설마.
‘이런 마력은……기껏해야 샐레나 씨 정도밖에 본 적 없어.’
‘네 가슴에 있는 그것, 혹시 혈족마법 아닐까?’
‘하지만 그렇다곤 해도 S랭크 10위권, 치료마법, 혹은 축복마법. 생각나는 건 기껏해야 두 사람밖에 없는걸. 1차 대전에 휘말려 죽은 폴리젠의 성녀와, 루키아 폴라리스의 파트너인 하르펜 라우드…….’
언젠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정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르펜 라우드는 죽지 않았다. 자신에겐 그의 기척이 느껴진다. 그렇게 말했던 건 랭킹 3위 로타였다. 하지만 로타가 병 때문에 잠든 지 이미 50년이 훌쩍 넘었다.
‘설마…정말로?’
혹은, 그저 하르펜이 만들어 낸 마법석일 수도 있지. 하르펜에게는 그 정도의 힘이 있다.
정예리가 무심코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줬다. 그 무렵 잔잔히 일어나던 바람이 폭풍이 되어 한 점으로 빨려 들어갔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주의를 놓지 않던 사람들이 바로 태세에 들어갔다. 조금 먼 곳에서 후발 주자도 이 양상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윽, 좀 더 떨어져야겠어요! 우리의 마력이 빠르게 흡수되고 있어요!”
레일리의 외침에 모두가 마력의 파도에서 벗어나 하늘 위로 올라갔다. 하늘 위로, 또 위로. 모두가 빠르게 시들어 가는 삼림의 모습에 숨을 삼켰다. 정예리와 레일리는 질린 표정으로 빨려 드는 마력의 모양새를 응시했다. 레일리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생각보다 힘이, 너무…….”
정예리가 이를 갈았다.
“죽으려면 곱게 죽을 것이지. 하멜 그 여자가 진짜!”
“그러게요. 정말 죽으려면 곱게 죽을 것이지.”
하멜이 슬라임을 만들었다는 것을 모르는 윌리엄, 알반, 아르피나는 깜짝 놀랐으며, 알고 있던 최인성과 로카는 조용했고, 레일리는 당연하다는 듯 응대했다. 참고로 로카는 하인리히의 언급으로, 레일리나 레베카는 규율마법을 통해 알았다.
레일리도 지팡이를 꺼냈다. 붉은 마법석이 달린 긴 검은 막대 지팡이, 샐레나와 레일리가 함께 사용하는 ‘규율의 지팡이’다.
“붉은 힘이 닿는 공간을 리카르트의 이름하에 영역으로 선포한다!”
우웅!
쿠아아아아아!
녹색 마력과는 전혀 다른 방향을 중심으로 붉은 물결이 생겨났다. 안으로 휘감겨 드는 슬라임의 마력, 밖으로 뻗어 나가는 붉은 마력, 레일리는 이를 악물었다.
레일리의 마력이 흡수당하고 있다. 그것을 보고 정예리가 움직였다.
“이자의 마력에 간섭을 금지한다! 축복을!”
지팡이에 있는 날개가 커지며 붉은 마력을 향해 새하얀 힘이 쏟아져 내렸다. 정예리는 이를 악물었다.
레일리는 깜짝 놀랐다. 본래 정예리의 힘과 레일리의 힘에는 태양계와 우주 정도의 차이가 있어야 한다. 정예리는 아직 A랭크 마법사고, 레일리는 S랭크 중상위 마법사다. 슬라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흡수당하는 마력이 확연히 줄었다. 더군다나 슬라임의 힘에 바로 흡수당하지 않고 버티고 있다. 오히려 분해하고 있다! S랭크 마법사와 대등하게 마법을 겨루고 있는 것이다.
한 번에 나오는 마력은 A랭크 수준인데 나오는 양에는 끝이 없다. 그 느낌은 숨이 막힐 정도로 경건하다.
‘이 사람, 정말 대체 뭐지?’
마력의 압력에 버티며 당황하던 레일리는 이내 유은하를 떠올리고는 피식 웃었다.
‘괴물의 곁에는 괴물이 모인다는 건가.’
레일리는 처음에 유은하를 보고 천재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보통 천재가 아닌 행성의 수명이 끝날 때까지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무시무시한 천재라고.
흥미로운 것은 당연했다. 무지막지한 천재인 건 유은하도 이성진도 똑같았으나, 레일리는 왠지 유은하에게 끌렸다. 유은하에게서 은은한 반짝임을 보았기 때문이다. 평범하고 조용하나 눈부시게 번뜩이는, 그 빛에 끌렸다.
참극이 일어나고 유은하를 다시 만났을 때, 레일리는 솔직히 소름이 끼쳤다.
예전의 어리숙했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노련한 전투 마법사의 기세가 흘러넘친다. 갈색이었던 머리카락은 은연중에 푸른빛이 도는 검은색으로 변했고, 옅은 갈색이던 눈동자도 좀 더 은색에 가까워졌다.
죽은 것처럼 암울한 표정, 있는 듯 없는 듯 가라앉은 존재감. 그 안에서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감정과 마력에 침을 삼켰다. 그렇게 암울하고, 어둡고, 짙고, 깊은데도, 분명 어둠 속인데도, 신비롭고 부드러운 광채를 발하고 있다.
고작 2년이었다. 고작 2년 사이에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강해질 수 있는가. 그녀는 싸움을 거듭할수록 더 무시무시해졌고, 문을 때려 부수고 계단을 날아오르는 것처럼 강해져 갔다.
물론 그녀의 동료들도 무시무시하게 강해져 있었다. 이성진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짙으며 두려웠고, 강인하의 빛은 미묘하게 흐려 잘 감지되지 않았지만 싸울 때마다 무시무시한 광채를 발했고, 이소영과 최인성은 유은하나 이성진에 비해서는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전진했다.
그 중심에 평화에 안주하고 전투를 기피하던 여자, 유은하가 있었다.
레일리는 문득 알게 되었다. 가까이 가면 빨려 드는 것 같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단시간에 강해질 수 있는가. 천재라고 해도 어떻게 저렇게 무시무시한 속도로 올라갈 수 있는가.
레일리는 이윽고 유은하를 ‘천재’라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녀는 그보다 훨씬 특별한 존재다.
주위의 흐름을 불러들이고, 그 중심에 서서 더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다.
마법사에게 마법은 살아 있는 사람만큼이나 소중하다. 그리고 실제로 마법은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생생하다.
언젠가 루키아 폴라리스가 말했다고 한다. 사람이나 동물만이 아니다. 세계도 살아 숨 쉬고 있다. 세계는 우연에 우연을 거듭하여 시련을 부여하고, 결코 멈추지 않는, 계속 변화하는 역사를 기록한다고. 그 안에서 생물은 싸우고, 이기고, 지고, 다시 나아가고, 결국에는 빛난다.
그 말대로가 아닐까? 트라베리아가 우연에 우연을 거듭해 내려진 시련이거나, 혹은 세계나 생물의 적이라면, 유은하는 마치 그것을 막아서기 위해 태어난 존재 같았다.
운명이 낳은 천재, 혹은 괴물.
그래서 레일리는 불합리한 존재임에도 유은하가 좋았다.
많은 것을 손에 쥐고 태어나,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다시 빛을 끌어모으는 유은하가.
레일리의 지팡이에서 나오는 빛이 점점 강해졌다. 정예리의 마력이 일정하고 촘촘하게 레일리의 마력을 지켰다.
그때 이변이 일었다. 한 방향으로 흐르던 기류가 폭발했다.
“꺄악!”
“윽!”
아르피나가 양손을 펼쳤다. 황금색과 붉은색이 섞인 반투명한 방패가 일행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르피나가 쓰는 방패의 효과는 ‘마법 배제’, 슬라임의 마법이 닿기도 전에 흩어졌다.
‘아니, 그렇다기보다, 이곳을 노리고 있지 않군요!’
아르피나가 소리쳤다.
“모두 조심하세요! 슬라임이 무언가를 하려고 합니다!”
“압니다.”
윌리엄이 양손에 검은 총을 소환했다. 총신은 둥글고 길게 뻗어 있고, 탄창은 두꺼웠다. 총신에서 암흑이 쏟아지며 마력의 중심을 노렸다. 그러나 닿기 전에 대부분 흡수됐다.
“젠장.”
윌리엄이 표정을 일그러뜨리자 두 총이 합쳐지며 모습이 변했다. 커다란 총의 총대를 어깨로 받치고, 쏜다. 새까만 덩어리는 주위의 마력을 흡수하며 무시무시하게 커졌다.
“마법 강화, 마법 보호, 마법 증폭!”
“이 공간의 지배자, 리카르트의 이름으로 저 마력을 적대한다!”
정예리가 외칠 때마다 하얀 빛이 터졌다. 레일리가 외치자 붉은 회로 같은 것이 퍼지며 영역이 점점 모양을 갖춰 갔다. 선발 부대 7명의 주위로 하얀 마력과 붉은 마력이 스며들며 번갈아 그들의 힘을 강화했다.
윌리엄의 마법이 비로소 슬라임에게 위해를 끼쳤다. 그러나 슬라임의 변화는 이미 끝났다.
마력이 가라앉았다. 가슴을 꿰뚫는 섬뜩함에 레일리와 정예리가 숨을 삼켰다.
레일리의 영역은 반경 수십 킬로미터. 하지만 슬라임의 마력 일부는 그 영역을 벗어났다. 저 앞에 우뚝 서 있는 성만 한 크기의 슬라임. 그리고 네 곳으로 흩어진, 이 슬라임의 분신. 정예리와 레일리에게는 그 모습이 전부 보였다. 아니, 다른 사람에게도 보였다. 레일리의 영역이 실체화되자 그 모습이 영상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지지직거리며 흐린 것이 명백히 슬라임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런!”
“후발대! 들리나요?”
레일리가 다급히 통신을 연결했다. 하지만 슬라임의 마력이 너무 강력해 통신이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다. 최인성이 통신을 켰다.
“소영아, 들려?”
[들…치직, 려……. 방금 마력이……곳으로……무슨……어…?]소리가 지지직거렸다. 최인성이 통신기에 마력을 좀 더 불어넣었다. 대충 무슨 말을 했는지는 추리할 수 있다.
“후발 주자한테 알려! 슬라임이 다섯 개로 갈라졌어! 하나하나 무시무시한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만으론 무리야!”
[알…어!]“본질을 비추는 거울!”
정예리가 책에서 거울을 소환했다. 거울이 분열한 슬라임의 모습을 번갈아 가며 비춘다. 모습을 갖추자마자 무시무시한 속도로 삼림을 먹는 슬라임. 최인성도 머릿속으로 마법을 썼다.
‘그림자 연결!’
다섯 개로 갈라졌지만 원래 모습은 하나. 최인성의 시야 안에 슬라임의 위치가 나타났다. 그 모습이 자꾸 흐릿해지는 이유는 슬라임이 마력을 계속해서 흡수하기 때문이겠지. 마법 상성 탓에 최인성은 정예리처럼 정화 결계를 쓸 수도 없다. 유은하가 만든 전투복이 슬라임의 마력에 저항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제길.’
최인성은 이를 갈며 아공간에서 마법석을 하나 꺼냈다. 진화 보조석을 입 안에 넣고 깨물어 씹는다. 평소에는 그림자에게 주지만, 눈 안에 비치는 광경이 중요하니 이번에는 직접 먹었다.
“……?”
다른 이들이 의아한 눈으로 마법석을 보았다. 유은하가 만든 진화 보조석은 마법이 성장하는 데도 도움을 주지만, 일시적으로 마법을 증폭하거나, 현 상황에 맞춰 마법을 변질시키는 데도 도움을 준다. 최인성은 결국 마법석을 하나 더 꺼내 그림자에 던졌다.
와득, 와드득
슬라임이 있는 장소가 선명해졌다.
“다섯 조로 나눠야겠군요.”
15명을 다섯 조로 나누면 한 쪽에 세 명밖에 갈 수 없다.
중심이 되는 건 슬라임에게 유효 타격을 줄 수 있는 다섯 명.
레일리는 조 편성을 규율마법에 맡겼다.
『1. 레일리 리카르트, 로일 리트너, 레베카 아이지스
2. 아르피나 루시카, 윌리엄 엔버린, 슐란
3. 최인성, 스테이 레기우스, 로카 조웬
4. 정예리, 김미영, 알반 랜드로
5. 이소영, 김형일, 시몬』
중심이 되는 건 각 조의 첫 번째 인물. 아르피나 루시카는 방어에는 절대적이나 공격력이 부족하고, 마법에 붙은 특수능력도 슬라임의 힘을 뿌리치기에는 애매하다. 그러니 특수한 능력자인 슐란과 무시무시한 공격력을 가진 윌리엄이 붙는다. 최인성은 보는 눈이 부족하므로 스테이 레기우스의 특별한 눈이 필요하다. 정예리는 힘이 부족하니 공격력과 방어력이 강한 팀원을, 이소영과 김형일은 혼자서는 특수성이 부족하니 합쳐서 힘을 낼 수 있도록.
최인성은 빠르게 조 편성이 타당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레일리가 지팡이를 쥔 채 동료인 로일과 레베카를 돌아보았다.
“여긴 이미 제 영역으로 삼았으니 저희가 맡을게요. 로일, 레베카, 빨리 끝내고 도우러 가자.”
“알겠습니다.”
“물론이죠!”
“저흰 후발대와 합류한 후 출발하겠습니다.”
“후발대는 저쪽입니다.”
최인성이 한 장소를 가리켰다. 그들은 빠르게 하늘을 날았다. 곧 마찬가지로 그들을 향해 날아오던 후발대 일행과 만날 수 있었다.
두 일행은 빠르게 상황을 확인하고 레일리가 나눈 팀대로 흩어졌다.
최인성의 팀원은 어색한 상대로만 구성되었다. 캐티아에서 한 번 스쳐 지나갔던 스테이 레기우스와, 얼굴을 마주한 적 없는 로카 조웬이니까.
그러나 그런 것은 지금부터 상대할 적에 비하면 시답잖은 일이다.
가면까지 머리에 쓴 최인성이 무시무시하게 삼림을 먹어 치우는 슬라임의 그림자를 향해 그림자 창을 던졌다.
어제의 슬라임, 혹은 안개 형태일 때를 생각하고 대수롭잖게 던진 공격이었으나, 곧이어 세 사람은 경악했다. 그림자에 던진 창이 그대로 흡수된 것이다.
“이런!”
로카가 눈을 가늘게 뜨며 추론했다.
“흡수한 마법을……자기 것으로 만든 건가?”
관찰하던 스테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건 아닌 것 같아. 그보다는……내성이 생긴 거 아냐?”
“내성이라고?”
“그림자에 힘이 깎이는 게 싫으니까……그림자에 공격받아도 통하지 않도록.”
“그런가. 어느 쪽이든 귀찮게 됐네.”
“하지만 저 반응, 시간이 지나면 정말로 자기 걸로 만들지도 모르겠네요.”
“가능성은, 있나?”
로카가 심각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최인성이 옆구리에 매고 있던 권총을 꺼내 슬라임을 겨눴다.
전기를 둘러 속도와 파괴력이 가속하는 마법 증폭용 마탄 총, 블래스터. 최인성이 자주 쓰는 권총이다. 이 권총에도 최근 진화석을 먹였다. 쏘다 보면 슬라임의 마력에도 적응할 터였다.
‘잘 부탁한다.’
최인성은 권총에 마력을 잔뜩 응축해 방아쇠를 당겼다. 마법이 무시무시한 스피드로 쏘아져 나갔다. 그치지 않고 색번개마법을 사용했다. 활기의 주황으로 자신의 마법 속도를 가속. 혼란의 보라, 노쇠의 갈색으로 상대의 힘을 제한한다. 마력량에 적당히 제동을 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안 그랬다간 힘을 깎기는커녕 먹이를 주는 꼴이 되고 만다.
“그래, 우선은 공격해 봐야겠지.”
스테이가 황금 창을 소환해 던졌다.
“─꿰뚫어라.”
눈부시게 빛나는 창이 최인성의 마법보다 빠르게 슬라임 안에 꽂혔다.
그 뒤를 이어 최인성의 마법이 슬라임의 그림자에 흡수됐다. 꿀렁꿀렁 움직이던 슬라임의 그림자 색이 변했다. 스테이가 꿰뚫은 부분이 퍽 하고 터졌다.
“아!”
“내 마법은 무조건 ‘적중’하거든. 그것도 가~장 아픈 곳에.”
스테이가 씩 웃었다. 스테이의 진짜 실력을 본 것은 실상 이번이 처음이다. 최인성은 조금 감탄했다.
‘확실히 미영 할머니가 신경 쓸 만한 실력인걸.’
게다가 강인하와 같은 빛마법이다. 다만 빛의 순수한 레벨은 강인하가 좀 더 위인 것 같다.
저번의 싸움으로 슬라임은 최인성의 기술에 ‘내성’이 생겼다. 그렇다고 한들 모든 것에 내성이 생긴 것은 아니다. 그림자를 향한 직접 공격은 아직 충분히 효과가 있다. 색번개마법도 마찬가지다. 색번개마법도 이제는 슬라임 몸에 직접 쓰는 건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림자를 통해서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한순간 슬라임의 모든 힘이 느려지고 약해졌다. 로카가 손가락을 튕겼다.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내렸다. 비, 라고 생각했는데 빛나는 별사탕이었다. 먹을 수는 없고, 손에 닿으면 사라졌다.
“마법 보정.”
로카가 무기질적인 눈으로 앞을 향해 손을 뻗었다.
“기억 소환. 정예리의 지팡이.”
기억마법으로 기억 속의 물건을 구현하려던 로카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키이잉─.
이상한 소리가 들리며 부자연스럽게, 혹은 불완전한 형태로 정예리의 지팡이가 소환됐다.
“리카르트의 지팡이보단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네.”
“아, 그거 보기보다 레벨이 높더라고. 나도 아까 복사하려고 해 봤는데, 한두 번 보는 정도로는 안 되겠더라. 그나마 ‘현상 복사’는 가능하려나.”
“흐음.”
그러고 보니 이 조는 방법은 달라도 타인의 마법을 복사할 수 있는 마법사들만 모여 있다. 최인성도 이번에는 강약을 조절하며 그림자를 덮어쓸 것이다. 최인성은 묘한 우연에 어깨를 으쓱했다. 정예리의 마법은 최인성 역시 그림자를 덮어쓰기 힘들다. 정예리의 그림자를 직접 덮어쓴다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정예리의 힘은 빛, 최인성과는 상성이 좋지 않다.
“그래도 이거면 충분해.”
로카가 반대 손에 새로운 기억을 소환했다. 로카는 새까만 불꽃이 이는 흑옥을 기억 소환한 지팡이의 크리스털 안에 박아 넣었다.
“기억 조합, 섬멸.”
현재 슬라임은 스테이의 빛마법에 의해 빛속성으로 바뀌어 있고, 최인성의 색번개마법에 의해 마력을 흡수하는 힘이나 움직이는 속도가 약해져 있다.
검은 불꽃이 날개를 펼치며 슬라임에게 날아갔다. 어둠이 빛속성을 좀먹는다. 빨려 들어간다.
“간섭…금지!”
로카의 메인마법, 기억마법은 기억을 소환한다기보다는 구현해서 ‘실현’하는 마법에 가깝다. 로카의 구현력과 상상력이 슬라임의 힘을 좀먹어 갔다. 슬라임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대로만 하면 곧…….”
“아니, 아니아니.”
검게 줄어들며 부글부글 끓는 슬라임을 보며 스테이가 식은땀을 흘렸다.
“아무래도 그렇게……간단히 끝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부글부글 끓던 슬라임이 퍽 터졌다. 슬라임의 몸체가 작고 큰 구슬로 변해 세 사람의 주위로 흩어졌다.
“이런.”
“우리를 적으로 인식했다 그건가? 본격적으로 마력을 흡수하겠다는 심산이로군!”
최인성은 문이 어플을 켜 상황을 확인했다. 슬라임이 분열을 반복한다. 그럴수록 흡수당하는 마력이 많아진다. 흡수당하는 마력은 당연히 그들의 마력이다.
휙!
최인성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 사이로 젤리가 스쳐 지나갔다.
젤리가 빠르게 움직였다. 처음 두 개는 피했으나 작은 젤리 여러 개가 최인성의 몸에 들러붙었다.
‘큭!’
쉬이이익….
꼼짝없이 젤리에 마력이 흡수될 줄 알았던 최인성은 곧 일어난 현상에 눈을 크게 떴다. 옷이 젤리를 튕겨 냈다.
‘허무의 마력.’
최인성이 입고 있는 전투복 역시 유은하가 만들었다. 빛속성을 배제하고 완연한 어둠속성으로 물들어 있으며, 그녀 고유의 정화 마력 따윈 조금도 들어 있지 않다.
최인성과 유은하는 기본적으로 상성이 맞지 않다. 그녀의 힘은 상극이다 못해 최인성의 힘을 전부 짓눌러 감싸 안아 버린다. 그럼에도 조금이나마 맞는 부분이 있는 것은 유은하가 모든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유은하의 공간계마법이 주로 가지고 있는 힘, 허무의 마력은 최인성과 아주 상성이 좋았다. 그것을 토대로 끌어내는 무속성마법 역시.
“일단 거리를 둬야겠어!”
최인성이 가지고 있는 무기는 최인성의 힘과 상황에 따라 적응하고 성장하며 아주 드물게는 진화한다. 최인성은 전투복의 마력을 조금씩 활용하여 다가오는 슬라임의 마력을 효율적으로 떨어뜨렸다. 적어도 마력이 빠져나가는 속도는 많이 줄어들었다.
“선열의 방패.”
로카의 읊조림과 함께 세 사람의 앞에 아까 아르피나가 펼쳤던 방패가 펼쳐졌다.
팅, 쾅!
──아득.
섬뜩한 소리에 그들은 흠칫했다. ‘슬라임’이라 이름 붙인 개체는 젤리처럼 말랑말랑하다. 기본은 초록색이고, 먹은 마법에 물들면 가끔 다른 색으로도 변한다.
어쨌거나 기본은 젤리 덩어리다. 눈도 없고, 코도 없고, 입도 없다. 그런데 지금 그 젤리가 입을 크게 쩍 벌리고 날카로운 이빨로 방패를 아득아득 깨물어 먹고 있다.
최인성은 다급히 마법을 해석했다. 유은하의 정화마법을 없앴을 때와 같다. 소멸시키고 있다. 하지만 유은하 때와는 달리 그와 동시에 먹고 있다. 안전한 마력으로 바꾸어 씹어 먹는다.
저게 입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괴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최인성은 문이 어플을 확인하고 흠칫했다. 방패 주위의 무효화 마력은 분해하고, 방패 본체는 씹어 삼킨다.
“정말이지!”
스테이가 최인성의 앞으로 다가온 녹색 슬라임을 금색 창으로 힘껏 튕겨 냈다. 그런데 금색 창은 이미 반절이 사라져 있고, 녹색 슬라임은 계속 무언가를 씹고 있다.
“진짜냐고…….”
산전수전 다 겪은 스테이마저 식은땀이 흐를 정도였다.
로카의 기억마법도 죄다 먹혀 버렸다. 심지어는 정예리의 것을 흉내 낸 지팡이마저 조금 먹혀 버리고 말았다. 세 사람은 사이좋게 어깨나 다리 등에 마법을 얻어맞았다.
“윽!”
“큭!”
그나마 마력을 덜 빼앗긴 건 최인성이었다. 전부 가면과 의복이 슬라임의 힘에 제 마력을 이용해 적응한 결과다.
최인성은 날아가다 말고 뒤로 물러나며 들고 있던 총을 변화시켰다. 들러붙은 슬라임은 전투복이 떨쳐 냈다. 무기에 삽입한 컴퓨터가 반응하며 최인성의 의지에 따라 변한다. 두꺼운 총에서 길고 날카로운 검신이 솟아올랐다.
블래스터를 휘두르자 튀어나온 그림자가 총이 지니고 있는 허무의 마력과 함께 슬라임의 그림자를 공격했다. 그림자에 둘러진 전기가 파직거리며 마력을 분해한다. 최인성의 전기는 물건과 물건, 힘과 힘을 연결하거나 혹은 분해한다.
최인성은 검신에 고통을 상징하는 검은 색 번개를 넣고 또 한 번 휘둘렀다. 최인성이 쓰는 검술은 이성진을 통해 배운 것, 베고, 베고, 또 벤다!
허무의 그림자 중 몇 개가 괴물로 변해 슬라임을 덮쳤다. 작은 슬라임이 그림자에게 당해 조각났다. 조각나며 빠르게 주위의 마력을 흡수해 회복하려 든다. 노련한 마법사인 로카와 스테이는 슬라임에게 마력을 뺏기는 와중에도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꺼져!”
“기억 복원.”
하늘에서 빛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로카가 지팡이를 수복했다. 금색 빛 위를 새하얀 마력이 덧칠했다. 슬라임이 빠르게 뒤로 물러난다. 공격을 회피하는 속도가 무척 빨랐다. 최인성은 커다란 슬라임의 그림자 몇 개를 포착했다.
“그림자 동조, 노쇠의 갈색!”
유은하가 보는 꿈속 세계가 서로 연결되어 있듯, 그림자 세계도 연결되어 있다. 그림자 세계를 통해 직접 색 번개를 뿌린다. 그러자 최인성이 포착한 슬라임의 그림자에서 색 번개가 뻗어 나가며 슬라임의 힘을 제한했다. 그사이 로카가 재현한 정예리의 힘과 스테이의 적중하는 힘이 슬라임에게 꽂혔다.
공격에 성공했음에도 최인성은 속으로 혀를 찼다. 슬라임은 본래 같은 개체다. 그러니 원래라면 모든 슬라임의 그림자에서 색 번개가 튀어나왔어야만 했다. 그러나 정작 번개는 아주 일부에서만 튀어나왔다. 아마 슬라임의 특성 때문이겠지만, 대체 어떤 특성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텅! 텅!
공격을 계속하며 슬라임을 노려보고 있던 최인성은 그 소리를 듣고 인상을 썼다. 슬라임 하나가 쭉 늘어나더니 방벽이 되었다. 젤리 같은 몸이 세 사람의 마법을 일부 받아들이고 튕겨 낸다. 설령 그 마법을 통과하더라도 힘이 줄어들어 있어 나머지는 슬라임의 먹이가 되어 버린다.
“진짜 만만치 않네.”
사각
──그때 최인성은 소름이 돋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다가온 작은 녹색 슬라임이 최인성의 ‘그림자를 뜯어 먹고 있었다’.
으득.
최인성의 그림자뿐만이 아니다. 로카와 스테이의 그림자도 모르는 새에 뜯어 먹고 있다. ‘내성’을 가졌다고? 이걸 그런 말로 표현하고 끝낼 일인가?
미세하게 갈라졌던 슬라임이 한꺼번에 쏟아진 마력을 애써 분색하고 씹어 먹으며 다시금 힘을 불린다. 최인성은 재빨리 슬라임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이미 그림자의 반절이 먹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