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350
덜컹, 그때 방 주위로 기계음이 커졌다. 덜컹, 덜컹. 문이 닫히고 방이 위로 올라간다. 일행이 경계했으나, 의사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때쯤엔 이미 의사와도 통성명을 했다. 그의 이름은 레비였다.
“괜찮아요. 이야기를 할 만한 장소로 방을 옮기는 것뿐입니다.”
“흐음.”
유용한 치료 마법사가 그들의 곁에, 인질로 잡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데 일을 저지르지는 않겠지. 그렇게 대부분은 적당히 경계를 풀었다.
방의 움직임이 멈추고 정면 벽이 열렸다. 벽 너머에 7명의 사람이 나란히 서 있다. 스테이가 상대를 향해 빈정댔다.
“치료해 준 건 고마운데 좀 정신 건강에 좋은 의사를 소개해 주면 어디 덧나나?”
노래를 듣지 못한 김형일과 김미영, 아직도 정신을 잃은 채인 정예리를 제외하고 모두가 마음 깊이 공감했다.
“네? 제가 뭘요? 완벽하게 치료했잖아요?”
“확실히 완벽했지만…….”
일행 중 가운데에 서 있던 앳된 얼굴의 남자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군. 하지만 그놈은 그래 봬도 우리 함선에서 가장 뛰어난 의사다. 근원을 치료할 수 있는 의사는 그 녀석밖에 없어.”
남자가 손을 뻗자 긴 의자 두 개가 마주 본 채 생겨났다.
“앉아서 이야기하지.”
두 일행은 서로를 향해 대치하며 앉았다. 의사는 당연히 캘리 측 의자로 갔다. 의자의 거리는 한쪽이 적의를 가질 경우 대처할 수 있을 정도였다.
자리에 앉으며 마력을 볼 줄 아는 레일리나 스테이, 최인성은 문득 의아함을 느꼈다. 캘리는 A랭크 조직이다. 가장 강한 단장조차 A랭크 오버의 실력자였다. 그런데 그 단장은 없고, 저 앞에 서 있는 사람 중 5명이 S랭크 마법사다. 나머지도 A랭크 오버로 S랭크에 가깝다.
그중 가장 강한 건 아마 앳된 얼굴의 남자 옆에 나란히 서 있는 뻗친 갈색 머리 남자다. 어쩌면 S랭크 상위권일지도.
어째서 갑자기 저렇게 실력이 뛰어오른 거지? 확실히 캘리는 드러내 놓고 활동하는 집단이 아니고, 그 탓에 밝혀진 마법사도 적은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상할 정도로 수준이 높다.
그러나 그 의구심은 일단 삼켰다. 이번에도 가운데에 앉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남자의 머리 색은 꽤나 신기했다. 뿌리는 검정색인데 아래로 갈수록 하얗게 세었다. 검은색이라고 했지만 머리 색이 전체적으로 푸른빛을 띠고 있다. 정보에 밝은 자는 금방 상대의 이름을 알아보았다. 우주 해적 캘리의 부단장, 에이온 다우즈.
캘리는 정규 조직도 아니고 드러내 놓고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라 단원의 이름이 전부 알려져 있지는 않다. 여기에서 알려진 얼굴이라고 해 봐야 부단장인 에이온 다우즈, 전투 부대 대장인 비앙카 루반, 다른 전투 부대의 대장인 프랜 노이르 정도다.
“소개부터 하면 될까? 전부 소개할 필요는 없을 테니 나만 소개하지. 천적 포레이아 캘리번의 단장 에이온 다우즈다.”
“단장? 당신이 단장이라고요?”
“나를 알고 있나 보군. 선대 단장은 죽었다. 그러니 지금은 내가 단장이지.”
“…….”
토벌대 일행은 침묵했다.
“용건은 너희를 안내한 자가 말했던 대로다. 이 숲은 위험하다. 하지만 우리 힘으로는 탈출하기 어렵다. 마력을 무력하게 빼앗기지 않을 장소를 제공할 테니 마음껏 날뛰어 주기를 바란다. 필요하다면 가세하지. 특히 이 녀석은 그 슬라임과 싸울 정도의 힘이 있다.”
에이온이 자신의 옆에 앉은 갈색 머리 남자를 가리켰다. 강인하가 무심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혹시 아까 윌리엄 팀에 엄호 사격을 한 것도 당신들인가요?”
“그래. 지면 곤란해지겠다 싶더군. 결과적으로 필요 없었지만.”
“흐음.”
강인하는 에이온을 응시하며 눈을 깜빡였다.
강인하는 에이온을 기억하고 있다. 꿈속에서 본 것이라 그런지 인상은 조금 흐려졌지만 특징만은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러데이션된 신기한 머리 색이나 앳된 얼굴, 구름을 뿌리던 마법. 친구를 납치하려고 했던 남자다. 어린 기억 속에서 두려움으로 남았던 상대.
부아가 치밀어 올랐지만 눌러 참았다. 이 캄캄한 숲에서 탈출하는 게 먼저다.
“그를 위해 숲에 대해 알아낸 것을 공유하지.”
“뭔가 알아낸 게 있나요?”
“조금이지만.”
에이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숲의 성질은 다들 대충 알 테고……숲 전체가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는 것도 알 테지.”
“네, 물론.”
“확인한바 숲은 다섯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모양은 대충 이런 식이다.”
허공에 영상이 떠올랐다. 숲은 다섯 구역. 가운데에 검은 숲이 있고, 나머지 구역이 가운데를 둘러싸며 네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숲의 특징은 나무의 색이다. 갈색, 초록색, 하얀색, 보라색.
“그렇다고 직선으로 간다고 저 중심부나 숲 외부로 나갈 수 있는 건 아닌 듯하다. 숲이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는 데다, 공간은 일그러져 있고, 웬만한 마법으로는 방향도 잡을 수 없다. 힘으로 파괴하기는 더 어렵지.”
“드라이어드를 찾아야 해요.”
레일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실비아는 저희를 드라이어드가 성장하기 위한 ‘제물’로 삼을 거라고 말했어요. 그렇다면 숲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거예요.”
“우리는 이 주변이 숲이 되기 전부터 여기에 있었고, 캘리번의 탐색 시스템을 통해 하미아의 행동도 보았다. 하미아는 숲과 동화되었다. 적어도 우리가 봤을 때는 그랬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숲 바깥으로 나갔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가장 의심스러운 건 중앙의 검은 숲이려나?”
“그렇지. 중앙이니까.”
레일리가 팔짱을 꼈다.
“숲을 없애고 나가든, 나가서 숲을 없애든, 어쨌거나 숲은 없애야 해요. 마법사의 근원까지 먹어 치우는 숲이라니,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고 생각하면 끔찍해요.”
“전 레일리와 레베카가 쓰러진 것만도 충분히 끔찍했습니다.”
로일이 빠드득 이를 갈았다. 그건 다들 비슷했다. 동료가, 지인이 옆에서 맥없이 쓰러지는데 누군들 기분이 좋았을까. 일행이 불쾌한 기색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이어 에이온은 숲에 깃든 힘을 설명했다. 최인성과 이소영, 정예리가 있던 녹색 숲은 정령의 숲이다. 나무, 바위, 대지가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인다. 또한 유사 정령이 돌아다닌다.
최인성 일행이 잠시 발을 디뎠으며 시몬과 슐란이 헤맸던 갈색 숲은 골렘의 숲이다. 다양한 무기를 지닌 경비병이 돌아다닌다. 나무처럼 보이는 저것은 진짜 나무라기보다는 나무 모양을 한 바위에 가깝다. 중력이나 공간을 일그러뜨릴 수 있다.
강인하 일행과 아르피나, 알반이 있던 하얀 숲은 안개로 이루어진 숲이다. 이곳은 허상으로 가득해 실체와 가짜의 구분이 힘들다. 겉으로는 나무, 바위, 땅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은 그냥 안개거나, 호수일 수도 있다.
윌리엄, 스테이, 로카가 있던 보라색 숲은 현혹의 숲이다. 사람의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맛있는 냄새, 혹은 환상으로 사람을 현혹한다. 혹은 사람의 음심을 자극한다.
마지막으로 SR 일행이 있던 검은색 숲은 죽음의 숲이다. 발을 디딘 순간 모든 마력이 대책 없이 흡수된다. 물론 모든 장소가 마력을 흡수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근원까지 흡수하려 들지만, 그중 검은 숲이 제일 악독하다.
“당신들은 숲을 태연하게 돌아다녔지요. 그 힘, 저희에게도 빌려줄 수 있나요?”
레일리의 물음에 에이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시적이라면. 하지만 너희 개인이 그 가호를 받는 건 시간이 걸린다. 가장 쉬운 방법은 우리 동료와 동행하는 거다.”
“그렇군요.”
레일리는 대답하며 허공에 반투명한 창을 띄웠다. 반투명했던 창은 이내 종이가 되어 두 세력 사이에 내려섰다.
“계약을 하지요.”
“계약이라.”
“그게 서로 깔끔하잖아요?”
“그렇긴 하지.”
에이온이 동의하자 종이에 문장이 새겨졌다. 갑과 을이 따로 없는 서로에게 동등한 계약이었다.
『1. 포레이아 캘리번과 수호 연맹은 장군 시리즈 드라이어드의 숲을 빠져나가기 위해 상호 협력한다.
-조사 정보를 공유한다.
-서로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
-서로를 배신하지 않는다.
2. 포레이아 캘리번과 수호 연맹은 드라이어드 숲을 빠져나가기 전까지 서로를 보호한다.
-위험에 처했을 시 서로를 구하기 위해 협력한다.
포레이아 캘리번과 수호 연맹은 위 계약을 ‘이름’을 걸고 약속한다.
위 계약을 지키지 않을 시 상응하는 벌칙이 내려진다.』
서로가 서로에게 바라는 것은 기껏해야 그 정도였다.
계약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대표의 사인 혹은 인장이 필요하다. 바로 에이온이 계약서 옆에 캘리의 인장을 찍었다. 인장이 태양을 닮은 적금색으로 빛났다. ……예전에는 검파랑색이 아니었던가?
레일리는 그러려니 했다. 그러며 옆을 돌아보았다.
“그럼……저희 쪽 대표는 누구로 할까요?”
“네가 하면 되잖아?”
“그래요, 레일리 씨가 해요.”
수호 연맹은 어디까지나 자의로 세계를 지키기 위해 모인 집단인지라 딱히 대표가 없다. 한 명의 대표를 정하기 힘들 정도로 쟁쟁한 조직이 나란히 대표를 이루고 있다. 레일리는 조금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일리가 수호 연맹의 인장을 찍자 계약이 완료됐다. 양측의 몸에 계약의 사슬이 얽혔다. 수호 연맹은 계약이 체결되자마자 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럼 팀별로 숲을 탐색해 보죠. 에이온 씨? 저희와 동행할 동료, 아니면 저희의 몸을 지킬 수단을 마련해 주세요.”
“그러도록 하지.”
아직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숲을 없애야 한다. 그런 결의를 안고 일행은 일어섰다.
팀은 아까와는 조금 다르게 나뉘었다.
윤시하와 강예슬은 정예리의 곁을 지키며 안에 남았다. 슬라임과의 싸움으로 슬라임을 상대할 수 있는 자와 없는 자가 확인됐다. 그걸 토대로 다시 팀을 나눴다.
1팀. 강인하, 윌리엄, 아르피나, 슐란 팀.
2팀. 레일리, 로일, 레베카 팀.
3팀. 최인성, 시몬, 스테이, 로카 팀.
4팀. 김형일, 이소영, 알반, 김미영 팀.
검은 숲은 위험하니만큼 맨 마지막에 함께 탐색하기로 하고, 우선 녹색 숲, 하얀 숲, 보라색 숲, 갈색 숲으로 각각 향한다.
그리고 1팀~4팀에 한 명씩 알 수 없는 ‘가호’를 지닌 캘리의 멤버가 한 명씩 따라온다. 1팀에는 코린, 2팀에는 부단장인 테온, 3팀에는 비키, 4팀에는 돌격 부대 대장인 비앙카.
비키를 제외하고는 다들 S랭크이니 상당히 협력하는 셈이다.
일행은 흩어져 각기 목표로 한 숲으로 향했다. 강인하가 속한 1팀에 따라온 코린은 키가 작고 머리는 분홍빛이며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기 힘들 정도로 중성적인 외모와 체형을 지녔다.
“너, 대현이랑 있었던 사건의 당사자라며? 아니, 당사자의 친구?”
코린이 머뭇거리면서도 조곤조곤 물었다. 강인하가 매섭게 코린을 째려보았다. 그 기세가 무시무시해 다른 팀원들은 하나같이 몸을 움츠렸다.
“그럼……우리가 싫겠네?”
“네. 매우.”
“계약이 끝나면 우릴 죽일 거야?”
“죽이는 것까진 모르겠고…….”
강인하는 꽉, 보란 듯이 주먹을 쥐었다.
“조지고 싶군요. 특히 단장은 주먹으로 직접 패고 싶습니다.”
“으음…….”
코린이 곤란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그럼 또 레비의 노래를 들어야 하겠네.”
머뭇거리던 코린이 잠시 후 가라앉은 기색으로 속삭였다.
“많이……아쉬워.”
“이제 헛소리는 작작 해 줬으면 하는데요.”
“하지만, 당신……김선아의 딸이잖아?”
“……엄마 이름 함부로 입에 담지 마.”
강인하의 눈동자에 결국 푸르스름한 살기가 어렸다. 윌리엄과 아르피나, 슐란이 말려야 하나 고민했다. 코린이 고개를 들어 강인하와 시선을 마주했다.
“혹시, 김선아한테서……우리 이야기를 들은 적, 없어?”
“…….”
강인하는 무심코 입을 다물었다. 김선아한테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느냐고?
강인하의 어머니, 김선아가 그녀의 앞에서 캘리의 이야기를 꺼냈던 것은 민희의 납치 사건 직후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때의 기억이 희미하게 되살아났다. 인연이 있다고, 그 정도의 말은 들었던 것 같다.
“없어요.”
“그래……. 선대 단장도, 지금 단장도 많이 아쉽겠어. …언제 한번 이야기를 들어 줘.”
그게 미심쩍었다. 강인하는 처음으로 궁금해졌다.
당연한 것처럼 김선아의 이름을 입에 담고, 당연한 것처럼 김선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했으리라고 말한다.
강인하는 오래된 기억을 되짚었다. 그녀의 기억력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한 번 스쳐 지나갔던 말을 바로 정확히 떠올릴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기억은 천천히, 느리게 머릿속에 파문을 일으켰다. 주민희가 납치당했을 때, 김선아는 이전에도 한 번 캘리와 싸웠던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겼다고도 말했고, 그것을 계기로 S랭크에 올랐다는 말도 했었다. 그렇다면 적대 관계 아닌가?
…아니, 지금은 이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강인하는 발을 멈추었다. 나무 뒤로 날개를 팔랑팔랑 움직이는 초록색 정령이 보였기 때문이다. 초록색 정령이 힘을 뿌릴 때마다 나무가, 바닥이, 공기마저 생기를 띤다.
나무가, 잔디가, 꽃이, 바람이, 정령이 자신의 일부로 그들을 얽매려 한다. 강인하는 한 호흡 쉰 후, 주위에 광채를 퍼트렸다.
그렇게 녹색 숲에서 전투가 일어났을 때 3팀, 최인성 팀은 꽤나 고생하고 있었다. 그러니까……최인성만 제외하고.
보라색 숲은 현혹의 숲. 나무가, 꽃이, 새가, 분위기가 그들의 불안을 부채질한다. 그림자에서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등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하고, 과거의 안 좋은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숲의 힘은 강력했다. 그들이 가호를 받고 있다는 걸 알자 그들에게만 들리는 뒷담으로 불안을 부채질했다.
[키득] [키득키득] [봤어? 녹색 숲에 들어온 침입자들. 자기들끼리 싸우더라니까?] [천칭을 쓰는 여자가 제일 약했지?] [맞아, 약했어.]이 정도는 약한 축에 속했다. 문제는 그의 말 자체가 언령을 담고 있어 그들의 불안에 불을 지핀다는 것이다. 웬만큼 정신력이 강해도 정신에 직접 불어넣어지는 불안과 혼돈은 막기 힘들다. 뭘 하나 밟을 때마다 최악의 과거가 생각난다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통하지 않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그게 바로 최인성이었다.
최인성은 계속해서 쌓이는 부정적인 감정을 몰아내거나, 혹은 그림자로 씹어 먹으며 오히려 마력을 불렸다.
“넌 아무렇지도 않아……?”
막 원수의 환상을 보고 빠져나왔던 로카가 이마를 짚었다. 최인성은 태연히 웃었다.
“이런 거엔 워낙 익숙하거든요.”
“익숙해?”
“애초에 제 마법부터 정신이나 감정과 통해 있거든요. 그래서 짜증은 나요. 이 숲, 저한테 모티프를 얻은 게 아닌가 싶어서.”
이 숲의 나무는 본체보다는 그림자가 공격한다. 그림자마다 하나의 환상과 부정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다.
“거기다 우리 리더가 이런 거엔 정통해 있거든요.”
“유은하가?”
“네. 그래서 환상은 바로 환상이라고 알 수 있어요. 그냥 귀 기울이지 마세요. 벌레 소리보다 못하다고 넘겨야 마음이 편해요. 아, 그리고 슐란 씨는 절대 걱정하지 마세요. 인하가 있는데 아무렴.”
태연하게 웃는 최인성의 주위로 어쩐지 사악한 그림자가 비치는 듯하다. 가호를 두른 덕분에 아무 일도 없던 비키가 어색하게 웃으며 식은땀을 흘렸다.
하얀 숲은 무난했다. 레일리가 규율마법으로 안개를 구속하고 정돈하며 돌아다녔다. 원래라면 불가능했을 일들이 캘리에서 붙은 마법사, 테온 덕분에 가능해졌다. 게다가 테온의 마법도 특수했다. ‘환경마법’이란 것으로 환경에 영향을 미쳐 제 뜻을 따르게 만든다. 그 덕분에 안개 속에서도 여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캘리의 가호가 완벽하지는 않다. 가호를 받는 본인은 스스로의 특수한 힘도 있으니 거의 마력을 뺏기지 않지만, 레일리나 레베카는 조금씩 힘을 뺏기고 있다. 그래도 그 힘이 근원까지는 달하지 않는 데다, 슬라임과 싸울 때보다는 뺏기는 힘이 훨씬 적었다.
참고로 로일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얀 안개를 뿌리치고 있다. 로일은 안개를 뿌리치며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저러나 마력을 빼앗기기는 한다. 이제 슬라임일 때는 통하지 않았던 특수한 마법도 조금씩 분해하며 삼켜 간다. 정말이지 성가시기 그지없다.
레일리는 걸음을 옮기다가 멈춰 섰다. 이런 곳에서는 표시도 할 수 없다. 마력이란 마력은 전부 먹혀 버리니까. 그래도 레일리의 규율마법은 파악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마법이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온 것 같아요. 여긴 아까 왔던 곳이에요.”
“그렇습니까?”
앞을 향해 일직선으로 쭉 걸어간다. 그랬을 뿐인데 왠지 지나쳤던 장소로 돌아와 있다. 더욱이 그런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안개 숲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길을 가리키고 있는 것은 레일리의 규율마법이니까.
“아무래도 이 숲, 상당히 배배 꼬인 것 같네요.”
한숨을 내쉬며 레일리가 궤도를 수정하려고 했을 때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은 걸음을 멈췄다.
역시, 그냥 안개만 있을 리가 없지. 병사도 있는 거다. 로일이 사나운 표정으로 레일리의 앞을 가로막았다.
갈색 숲은 골렘이 돌아다닌다. 나무는 대개 바위고, 마력을 혼동시켜 분해하고 흡수하는 중력파를 내뿜는다. 거기에서 끝이 아니다. 지진이 일어나고, 바닥이 불바다거나, 혹은 나뭇잎이 불덩이거나, 하여간 있기에 편한 환경은 아니다.
“이상하네. 그 녀석들이 너흴 맞으러 갔을 땐 저런 거 못 봤다고 했는데.”
굽슬거리는 보라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비앙카가 눈썹을 치켜뜨며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김형일이 시큰둥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변한 거겠지. 여긴 살아 있는 숲이잖아.”
그런 의미에서 갈색 숲에 김미영이 따라온 건 정답이었다. 불이든 뭐든 전부 얼려 버리는 무시무시한 고대얼음마법의 계승자이니까.
네 팀은 미리 약속했던 대로 1시간 정도 숲을 조사하고, 돌아왔다. 돌아온 일행을 맞은 것은 처음 이야기를 나눴을 때보다는 적은 숫자의 정예였다. 돌아온 일행에게 에이온은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줬다.
“함선의 탐지 시스템을 이용해서 너희의 움직임을 기록했다. 이게 그 결과다.”
“아, 역시.”
숲의 마법 효과인지, 숲이 움직이고 있는 건지, 전투를 해서 그런 건지, 진로가 엉망진창이었다. 구불구불 비슷한 자리를 맴돌고 있다.
그나마 규칙성 있게 나아간 게 레일리 팀과 최인성 팀이었다. 레일리 팀은 이상한 곳으로 가다가 억지로 궤도 수정을 한 흔적이 보였고, 최인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소 불안하기는 했지만 규칙적이었다. 규칙적이게 지그재그로 앞을 향해 나아갔다.
“하지만 꽤 오래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저기까지밖에 못 갔네요.”
“1팀은 얼마 못 갔네요?”
“정령을 만나서 싸웠습니다. 아무래도 정령이 이 숲의 관리자인 듯합니다.”
일행은 숲에서 본 것들을 각자 이야기했다. 녹색 숲은 정령들의 숲. 정령들에게 잡히면 마력을 빼앗긴다.
하얀 숲은 안개 숲. 상시 마력을 뺏긴다. 길을 찾기가 극히 힘들다.
보라색 숲은 현혹의 숲. 그림자가 말을 걸고 어두운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갈색 숲은 대지의 숲. 온갖 자연 현상이 일어난다.
그리고 숲에 따라 각기 다른 능력을 지닌 병사가 있다. 녹색 숲은 특히나 병사가 많으며, 특수능력은 마력을 빼앗고, 분해하고, 흡수하는 힘이다. 보라색 숲은 그림자 병사와 보라색 병사가 있다. 그림자 병사는 안 좋은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보라색 병사는 상대의 마법을 흉내 내서 쓴다.
하얀색 숲에는 안개 괴물이 있다. 실체가 없어서 보라색 숲에 있던 그림자와 마찬가지로 특수한 마법으로만 공격 가능하다. 갈색 숲의 병사는 골렘이다. 또 하나, 불꽃인 나뭇잎으로 마력을 태워 흡수한다.
그리고 각각의 적은 합쳐지기도 하는 모양이다. 싸움 중 강인하가 숲을 꽤 태워 버렸더니, 정령이 화가 나서 뭉치고 뭉쳐 괴물이 되었다고 한다. 가호와 강인하의 능력, 윌리엄의 실력 덕분에 무사히 빠져나올 수는 있었지만 아르피나와 슐란은 고생을 많이 한 모양이다. 정화마법을 썼을 때와는 또 다른 반응이었다.
캘리의 가호는 확실히 유용했다. 덕분에 대부분은 어렵지 않게 적을 상대할 수 있었다. 이 숲이 무서운 것은 결국 근원을 빼앗는 힘 때문이다. 그것만 어떻게 한다면 생각보다 상대할 만하다.
물론 그들이 수호 연맹의 정예들만 모은 토벌대이기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적 하나하나의 실력은 S랭크 하위권을 가볍게 상회한다. 거기다 마력을 빼앗고 분해하는 특수능력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숲마다 또 다른 특수능력을 하나씩 갖는다. 성가시기 그지없다.
“그리고 또 하나, 시간이 어그러져 있는 것도 확인했다.”
“시간이 어그러져요?”
“우리가 동시에 신호를 보냈기 때문에 동시에 돌아올 수 있긴 했지만……숲에 들어가고 얼마나 지났다고 생각하지?”
캘리의 함선은 녹색 숲에 있다. 레일리, 슐란, 최인성, 김형일이 차례대로 답했다.
“1시간요.”
“2시간으로 기억합니다.”
“거의 두 시간…….”
“1시간 30분 정도였을걸?”
그런 건가. 서로 골치 아픈 표정으로 마주 보았다. 숲마다 시간이 다른 거다.
“참고로 바깥에서는 15분밖에 안 지났다. 너희가 들어오고, 우리가 숲에 갇히고, 딱 15분이다.”
그렇게 말하며 에이온이 특수한 시계를 보여 줬다. 우주를 항해할 때 쓰는, 지구의 시간을 확인하는 특수한 시계다. 원래 시공간이 뒤틀리는 곳에서 쓰이는 시계이니 웬만해선 틀리지 않는다.
“오오. 생각보다 최악이네.”
김형일이 혀를 찼다. 다른 이들도 동의했다.
이곳의 3시간이 바깥에서는 15분이라니. 어차피 버틸 생각도 없지만 정말 버텨 봤자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 놀라거나 의외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공간이 일그러진 장소는 시간도 일그러지기 쉽다. 더군다나 트라베리아가 만든 상황에서는 이런 일이 꽤 비일비재했다.
“숲에서 뭐 발견한 건 없어?”
“아니요.”
“딱히.”
“아무것도.”
“적어도 단서로 이어질 만한 건 발견하지 못했어요.”
“보아하니 마법 하나하나가 독립되어 있더라?”
스테이가 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 하나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나무 하나하나가 생물처럼 힘을 가지고 있고, 소모되더라도 스스로 그 힘을 회복해. 그래서 그 키메라와의 연결점을 찾기가 어려워. 뭐, 숲의 특성 때문도 있지만.”
강인하가 평소 성질대로 손바닥에 주먹을 쳤다.
“다 태워 버리면 편하지 않을까?”
이소영과 김형일이 옆에서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거 좋다. 해 봐! 인하 아가씨라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나도 그게 편해.”
“자 자. 가호가 있어도 마법 분해 능력은 아까보다 더 좋아졌으니까 자중하자. 그랬다가 강물 때나 조금 전 조사 때랑 똑같은 일이 일어나면 어쩌려고.”
최인성이 박수를 치며 강인하의 폭주를 말렸다. 그러나 강인하는 아직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다.
“병사들이 뭉치기 전에 숲 하나를 몽땅 태워 버리면 되잖아. 그럼 화난 드라이어드가 쫓아오지 않을까?”
드물게도 슐란이 역정을 냈다.
“인하 씨, 아까 정령 괴물 때문에 고생했던 거 잊었어요? 그때는 이번엔 다른 숲이 다 일어날걸요? 정말, 가호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할 만하지 않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