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359
인호 오빠는 한국에서 봤을 때처럼 침착하게, 그러나 그때보단 좀 더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
“은하야, 우리는 한국이 전쟁터였다고 해도 갔을 거야. 클라인 남매의 발아래에 피바다밖에 펼쳐지지 않았더라도, 한국에 갔을 거야.”
인호 오빠가 다정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국이 위험해지더라도 네 탓이 아냐. 너희 탓이 아냐. 선택한 건 우리야. 너희가 싸우기를 선택했듯이.”
“맞아. 자기들은 싸움밖에 안 하는 주제에 한국에서 평화롭게 지내고 있는 우리를 걱정하다니, 이거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인 건 아니?”
한국에서 만났던 어른스러운 유정 언니는 없었다. 그녀는 어린 날처럼 활기차게 웃으며 나를 꽉 끌어안았다.
“우린 다 알면서도 한국에 돌아갈 거고, 한국에서 전처럼 나름대로 열심히 할 거야. 이야기 들어 보니까 클라인 남매는 우릴 ‘연료’로 여기는 모양인걸? 아마 강할수록 중요한 연료겠지? 그러니까 네 탓이라든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고, 알았지? 너무 우릴 걱정시키지 마.”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는 온기가 그리우면서도 기껍다.
“……릴리는 아마 대현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을 거야. 들어가는 방법도, 어쩌면, 알고 있을 지도 몰라.”
“응, 그 이야기도 여기 와서 알게 됐어. 그래도 돌아갈 거야. ……미안. 역시 우리가 제일 무모한가 봐. 그래도 피장파장인 거 알지?”
“……응.”
그래, 걱정한다면 진작 걱정했어야 했겠지. 한국이 변하는 것 정도로 대현은 변하지 않는다. 원래부터 한국은 미지의 장소였고, 세계에서 가장 위험할지도 모르는 장소였다. 그걸 알면서도 그들은 한국에서 행동하기를 선택했다. 그랬는데 지금 와서 익숙해진 일상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것 정도로 자신들의 신념을 버릴 리가 없는 것이다.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한국을 트라베리아의 손에서 구해 내고 싶다는 열망이 좀 더 강해졌다.
“그보다 난 너희랑 만나서 기뻐. 정말 이제야 만났네. 우리 거의 4년 만인 거 알아?”
드물게도 평화로운 이야기를 하다 대현에서 나왔다. 백한 선생님은 딱 한 번 나한테 잔소리를 하고 유정 언니와 인호 오빠에게 자리를 내줬다.
한동안 바깥에서 한국의 양상을 계속 지켜보기로 했다. 당장 변하지 않았다고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부작용은 천천히 괜찮아졌다. 반나절 지났을 때쯤엔 문이를 부를 수 있게 되었고, 마력 역시 점점 많아지고 깊어졌다. 원래 마력량은 이미 넘어섰다. 다음 날에는 고위정화마법도 정상적으로 쓸 수 있었다.
한국에 아주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봤다. 여전히 한국은 변함이 없었다. 그래 보였다.
마력이 완전히 돌아온 날 오후, 성진이 깨어났다. 깨어났을 때쯤 성진의 머리카락은 도로 짧아져 있었다. 부작용도 완전히 사라져 평소대로였다.
안도했으나 완전히 안심할 순 없었다. 성진도 사태를 전해 들은 후에는 난감해하며 표정을 찌푸렸다. 성진이라고 제정신이었겠나. 부작용 때문에 그렇게 고통스러워했는데.
우리는 어떻게도 할 수 없음을 알았다. 릴리에게 정체를 들킨 이상은, 상황이 돌아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성진이 회복한 걸 확인하고 바로 샐레나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샐레나의 상태는 영상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악화되어 있었다.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당장 꺼낼 수 없을 정도로.
가슴과 머리카락에 그치지 않고 피부색이 거의 변질됐다. 피부도 사람 피부와는 달라졌다. 눈으로 보기엔 물이 뚝뚝 흐를 것처럼 말랑말랑해 보인다. 마치 젤리 같다.
“은하 씨, 성진 씨!”
레일리의 얼굴이 다급하게 일그러졌다.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흐르고 있다.
레일리는 강한 사람이다. 언제 어느 때든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대처해 왔다. 그러나 이번만은 견디기 힘든 모양이다. 그렇겠지. 소꿉친구가 죽고, 보좌관인 부회장이 죽고, 어머니마저 중태라니.
“제발, 부탁해요. 저희 어머니를…….”
나와 성진, 예리는 샐레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반투명해진 피부에 손을 가져가 보았다. 마력의 압력이 거셌지만 그럭저럭 피부를 만질 수 있었다. 직접 만져 보면 딱딱하기도 하고, 부드럽기도 했다. 바람과도, 보석과도 비슷한 이질적인 감촉이다. 굳이 따지자면 정령과 닮았다.
‘이게 대체 뭐야.’
‘저주’라면 정화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저주임에도 마력은 이상하리만치 잘 조화되어 있다. 정령이라서? 정령이 했기 때문인가?
정령, 힘을 지닌 자연의 화신. 어차피 저 힘에는 내 힘이 미치지 않을 테지만, 설령 미치더라도 정화마법으로는 정화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진이라면…….
“오빠, 어때요? ‘죽일 수’ 있겠어요?”
잠시 샐레나를 바라보던 성진이 눈을 지그시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정령의 힘만이라면.”
“……!”
레일리의 표정이 환해졌으나 잠시 후 다시 흐려졌다. 뒷말이 남았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루카도, 우리도 심각한 눈으로 성진을 주시했다.
“다만 ‘정령의 저주’만 죽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른 저주라면 그렇게 해주할 수 있겠지만, 저건 힘이 너무 강해서, 확신할 수 없어.”
성진은 마법을 죽이는 것도 특기지만 마법을 푸는 것도 특기다. 특히 저주는 잘 걸고 잘 푼다.
하지만 저건 너무 위험하다. 나는 샐레나의 근원을 자세히 살피며 침음을 삼켰다. 정령의 저주가 마법의 근원과 동화되어 있다. 이미 생명에까지 동화되었다. 저걸 없애려면 필연적으로 근원은 물론이고 생명에까지 손을 대야 한다. 이성진이 샐레나의 생명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고 정령의 힘만을 죽일 수 있는 가능성은…….
“저와 은하 언니 둘이서 전력으로 방어한다면요?”
“이미 반쯤 동화되었는데 가능하겠어? 정령의 힘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하고 방어하면 남은 정령의 힘이 샐레나의 심장을 찌를 거야. 저걸 상대로 천천히 근원만을 섬세하게 보호할 수 있겠어? 저것, 혹은 내 힘을 상대로.”
“…….”
나와 예리는 표정을 흐렸다. 성진의 말대로 정령의 저주는 이미 샐레나와 반 이상 동화했다. 정령의 힘만 들어내기에는 정령의 저주가 너무 강하다. 어느 쪽이든 샐레나에게는 피해가 가겠지.
“가장 좋은 방법은 ‘봉인’하는 건데, 난 봉인은 별로 안 써서 말이지. 익숙하지 않은 기술을 써서 봉인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지, ‘저건’.”
“그 말대로입니다.”
불안한 눈으로 샐레나를 살피던 루카가 동의했다.
“저 역시 처음엔 봉인하려 했습니다.”
루카는 방어와 봉인이 특기다. 그런 루카가 봉인하지 못했다는 건…….
“하지만 정령의 저주가 너무 강해 제 힘으로도 봉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와 시카의 실력 차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루카는 랭킹 9위로 연맹에선 가장 뛰어난 마법을 지녔다. 예상은 했지만 트라베리아의 3강, 벨라, 엘리시아, 시카는 연맹의 뛰어난 마법들조차 건드리지 못한다.
“시도해 볼 가치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 내 힘은 확실히 정령의 저주에 닿는다. 하지만 그 위협에서 너희가 저 근원을 보호하고 샐레나의 생명을 지킬 수 있을 가능성은……낮아.”
“…….”
우리는 침묵한 채 샐레나를 응시했다. 샐레나는 이미 정령에 반쯤 잡아먹혔다. 이대로 두면 샐레나는 죽는다. 그건 틀림없다. 하지만 시카의 힘을 막을 수 있을 만한 실력자는…….
봉인마법에 정통한 루카가 안 된다면 그 이상의 실력자를 찾아야겠지. 1위에서 8위 사이에 살아 있는 마법사는 단 세 명. 2위인 하르펜과 3위인 로타, 4위인 이노키언뿐이다.
그러나 ‘예언가’ 로타는 수명과 병 때문에 50년 가까이 잠들어 있다. ‘치료사’ 하르펜과 ‘방랑자’ 이노키언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하르펜이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지는 이미 100년 이상 지났으며, 이노키언이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20년 전, 그것도 머나먼 은하에서였다.
“…부탁드려요.”
희미한 목소리가 불안으로 일렁거리는 마음을 붙잡았다. 레일리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우리에게 애원했다.
“어차피 이대로는 죽기를 기다릴 뿐이에요.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거기에 걸겠어요. 부탁해요, 은하 씨.”
레일리가 내 손목을 꽉 붙잡았다. 로일도 평소와 달리 침울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레일리와 같은 의견입니다. 부탁드립니다.”
“제 마법도 앞으로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루카까지 그렇게 말한다. 나는 손을 꼭 쥐며 샐레나에게 붙어 있는 정령의 저주를 노려보았다. 생존 확률 5% 이하의 가능성이 그나마 가장 높은 가능성이라니.
정령이 꿈틀거리며 고동친다. 그렇다면 조금이나마 확률을 높여야 한다. 좀 더 좋은 방법이 없을까? 어떤 기술을 써야 샐레나의 생명을 지킬 수 있나.
생명, 들러붙은 정령.
두근
귓가에서 고동 소리가 커졌다. 반복해서 고동을 듣는 동안 눈가에, 혹은 머릿속에 무엇인가가 스쳤다.
…정령의 감정, 샐레나의 감정.
──꿈속에서라면?
깨달음에 가까운 감정이 나를 휩쓸었다. 물리적으로는 저렇게 달라붙어 있어 접근하기 힘들지만, 정신세계에서라면? 트라던트의 정신세계에 정화의 나무를 심었을 때와 마찬가지다. 정신 속에서라면 좀 더 섬세하게 접근할 수 있다.
‘가능성은 있어. 하지만 상대는 시카의 정령. 정신세계에서 접근하면 이번엔 내가 위험해질 거야.’
나는 정령에 대해 자세히 모른다. 그러나 자연의 화신이 정신세계의 접근을 아예 모르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루카 씨, 루카 씨가 펼친 방어마법은 앞으로 며칠 버티나요?”
“오래 가 봐야 일주일일 겁니다. 왜 물으시죠?”
“아무래도 준비에 시간이 조금 필요할 것 같아서요.”
나는 두 사람과 시선을 교환했다. 두 사람은 영문은 몰라도 내 의견에 수긍했다.
“루카 씨께 하나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뭐든지 말씀하세요.”
“마법을 빌려주셨으면 해요. 강한 방어마법을 지닌 기둥을 만들어 주세요. 저 정령이 공격한다면 한 번이라도 좋으니 막을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루카는 생각보다 흔쾌히 받아들였다. 샐레나를 살리는 데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태도였다. 루카와 샐레나가 친하다고 듣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친한 모양이다.
치료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적어도 지금 당장 할 수 없는 건 확실하다. 우리는 레일리에게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한 후 일단 기지로 돌아왔다.
나는 성진과 예리에게 ‘가능성을 높일 방법’을 설명했다.
“정신세계에서 접근이라.”
“바깥에서 정화에 집중하는 것보단 훨씬 다양한 걸 할 수 있어.”
“정령은 화신이에요. 많이 위험해요.”
“위험한 건 알지. 하지만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해야 하는 일이야.”
연맹은 아슬아슬하게, 겨우나마 트라베리아를 견제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샐레나가 죽으면? 위험하다. 쓸 수 있는 수단을 전부 써서 살려야 한다.
그게 아니라도 살리고 싶다. 나는 레일리도, 샐레나도 좋아하니까.
우리는 환각 세계에서 몇 번이고 호흡을 맞췄다. 꿈속에서 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건 나뿐이다. 성진과 예리는 현실에서 힘을 쓸 거다. 나는 꿈속에서 정령의 영향력을 배제하며 샐레나의 생명을 지킬 것이다. 거기에 예리가 좀 더 힘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때가 되면 성진이 정령의 저주를 죽인다.
물론 꿈속이라 한들 대놓고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몸을 숨기며 움직일 생각이다. 정령을 직접 상대하는 건 피할 것이다. 상징적인 요소를 부수며 정령을 샐레나에게서 떨어뜨리려 한다.
대략적인 작전을 정한 후 샐레나의 정신세계에 찾아가 봤다. 정확히는 샐레나와 그녀에게 들러붙은 저주의 정신세계다. 완전한 꿈속이 아닌 꿈과 현실의 교차점. 그 안에 완벽히 녹아들어 정령과 샐레나를 살폈다.
샐레나의 세계는 이미 반쯤 정령에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적자색으로 고동치는 정신세계의 구조를 바꿨다.
샐레나의 근원과 생명, 샐레나를 이루는 요소, 그 안에 깊숙이 박힌 정령의 저주, 파편.
삭막하고 어두운 정신세계를 보며 결심을 다졌다. 그래, 이 안에서라면 바깥에서 하는 것보다 샐레나가 살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정령의 힘은 분명히 샐레나의 생명과 근원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정신세계에서라면 분리할 수 있다.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정령의 저주라……. 힘이 너무 강해.’
구조를 바꾼 정도로 정령은 반응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게 정신세계를 물리적으로 바꾼 게 아니라 같은 상태를 다른 식으로 보이게 한 것뿐이니까.
시카의 정령은 물리적인 마법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정신세계에서 느껴지는 정령의 힘이 너무도 강해 몸이 덜덜 떨렸다.
다시 한번 결심을 다졌다. 정신세계는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다. 정령의 정신을 조종해야 한다. 환각으로 속이고, 속여서, 반드시 떨어뜨리리라.
멘델의 시계를 사용해 쓸 만한 기술을 농축했다. 루카에게서 몸을 지킬 방어 기둥을 받았다. 하인리히도 협력해 주어, 일회용 호랑나비 패밀리어를 선물받았다.
그 이후엔 직접 본 저주의 세계를 구현하여 모의전을 했다.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반복해서. 내가 정령을 떨어뜨리고, 예리가 샐레나의 생명력을 지키고, 성진이 저주를 죽인다. 확실히 해내려면 타이밍이 잘 맞아야 한다. 하나가 수틀리는 것으로 샐레나는 목숨을 잃을 테니까.
루카의 마법이 유지되는 동안에도 정령은 서서히 샐레나의 안에 파고들었다. 시간을 오래 끌어선 안 된다. 우리는 이틀 만에 준비를 마쳤다. 샐레나의 몸은 이틀 전보다 더욱 정령에 가깝게 물들어 있었다.
“루카 씨, 혹시 모르니 병실에 결계를 쳐 주셨으면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만일을 위해서였다. 시카든, 소니아든, 그 외에 다른 뛰어난 힘을 지닌 트라베리아의 마법사든, 위험 요소는 넘치도록 많으니까.
“문이.”
「네, 마스터. 준비는 끝났습니다.」
이번 일은 상당히 복잡하다. 꿈에서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해야 하는 만큼, 문이의 도움은 필수 불가결하다.
이제 나는 꿈속으로 간다. 상대해야 하는 것은 시카의 정령. 위험한 일을 몸소 겪을 때마다 생각한다. 여태까지 중 제일 위험했다. 이보다 더 위험한 상황이 얼마나 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순간에는 더 위험한 상황이 찾아온다. 클라인 남매와 대치하고, 리피트를 마주하고, 지금 시카의 정령을 마주하게 된 것처럼.
“후우…….”
나는 심호흡을 하고 곧바로 샐레나를 향해 뛰어들었다.
정적이 찾아들었다.
주위가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하다. 이곳은 샐레나의 정신세계라기보다는, 샐레나의 정신과 정령의 정신이 섞이는 교차점이다. 새까만 공간 속에 붉은 힘과 적자색 힘이 녹아들어 있다.
나는 몽환마법으로 샐레나의 정신에 녹아든 채 샐레나의 생명과 근원을 찾았다. 보려고 생각하자 근원도 생명도 선명히 보인다. 그 안에 정령의 저주가 깊숙이 녹아들려고 하고 있다.
파고드는 힘을 루카의 마법이 겨우 억제하고 있다. 그러나 정령의 힘은 그 봉인마저 조금씩 파고든다.
「전체적인 동화율이 80%를 넘어섰습니다. 생명력, 근원, 둘 다 정령의 힘이 깊숙이 파고들어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죽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법의 ‘계승’조차 제대로 되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래.’
혈족마법 계승에는 주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선대가 후대에게 마법을 넘겨주어 시련을 부여하는 것. 이것은 자격을 가진 자만이 응할 수 있는 계승이며, 그 시련에는 목숨, 정신, 마법의 근원적 위험이 동반된다. 그 대신 시련을 이겨 내면 선대의 힘이 더해져 무시무시한 힘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보통 혈족마법의 계승이라 하면 선대가 죽은 후 힘이 자연스럽게 후대로 계승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위험도 리스크도 따르지 않는다. 그저 피에서 피로 이어지는 것이니까. 단지 후대에게 자격과 재능이 있다면 더 많은 힘을 쓸 수 있게 되고, 자격이 없다면 다음 피로 넘어가기 위해 피 안에서 잠들 뿐이다.
그 외에도 특수한 계승이 몇 개 있지만, 주로 이 두 가지다.
혈족마법은 그렇게 힘을 더해 왔다. 물론 레일리 역시 혈족마법을 훌륭히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샐레나의 근원이 이대로 부서져 사라진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큰 손실이다.
나는 보이는 시점을 또 한 번 바꿨다. 모든 것을 ‘조각’으로 보이게 했다.
생명도 조각으로, 그 안에 융합된 정령의 힘도 조각으로, 모든 요소를 나뉜 조각으로 살핀다.
생명과 정령의 힘이 완벽하게 동화되어 하나의 개체가 되어 버렸다면 그것은 이미 정령의 조각이다. 그러나 완벽히 동화되지 않았다면 분리된 조각으로 나타나라. 간단히 배제할 수 있도록. 세계는 나의 의지를 받아들였다.
화악─
그 순간 샐레나의 생명과 근원에 빛이 들어왔다. 예리다. 조금 집중하자 현실의 광경이 머릿속으로 투시되었다. 예리가 천사와 도구를 불러 샐레나의 생명력에 힘을 불어넣고 있다. 저주가 본능적으로 꿈틀거린다.
유일하게 조각의 형태를 지니지 않은 것은 루카의 봉인뿐이다. 그 힘마저 정령의 힘을 완전히 막지 못하고 속도를 느리게 하는 것에 그쳤다. 나는 문이와 함께 조각들을 빠르게 확인하며 루카가 만들어 준 기둥을 꺼냈다.
‘먼저 생명에 루카의 기둥을 설치한다.’
루카의 기둥은 미리 환각마법으로 꽁꽁 감싸 왔다. 나는 정령에게 들키지 않도록 루카의 기둥을 샐레나의 생명 조각 사이로 집어넣었다. 문이와 힘을 맞춰 환각을 조정한다. 천천히, 천천히…….
‘좋았어. 이제부터 동화된 정령의 저주를 최대한 분리한다. 들키지 않게, 신속하게. 성진이 정령을 죽여도 샐레나에게 죽을 정도의 충격이 가지 않도록.’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문이에게 명령했다.
‘정령의 기감을 속이는 건 너에게 맡길게. 난 조각을 움직일 거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마스터.」
환각을 쓰더라도, 정신세계라고 해도, 정령의 힘을 떨어뜨리는 것만으로 상당한 중노동이다. 나는 환각으로 정령의 눈을 가리는 건 문이에게 맡겼다.
우리는 드디어 본격적으로 꿈을 조종하기 시작했다. 정령의 저주는 어떤 식으로든 접촉한 것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현재 저주의 표적은 샐레나 혼자다. 그건 똑같이 저주에 걸릴 확률이 보이는 힘보다는 낮다는 소리다. 거기다 설령 내 몸에 저 저주가 들어와도 정화될 뿐이다. 다른 때와 달리 정화되기까지 고통스럽고, 시간도 걸리겠지만.
꿈은 현실에 적용되더라도 바로 인지하기 힘들다. 그건 정령이라도 마찬가지다. 꿈의 마력이 천천히 정령의 마력 주위를 둘러쌌다.
나는 긴장하며 조각들을 노려보았다. 생명의 힘과 정령의 힘, 이제 그냥 두 힘을 떨어뜨리면 되지 않나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빨리 거리가 멀어지면 정령의 힘이 이변을 깨달을 것이다. 저 저주는 죽은 정령의 저주. 죽고서도 사념으로 사람을 저주하는 무시무시한 악령. 그러니 자아가 존재하고, 기감도 가지고 있다.
문이가 속여 주겠지만 정령의 기감은 뛰어날 것이다. 나 자신도 조심해야 한다. 조금씩, 천천히 해야 한다. 어느 순간 정령의 힘이 샐레나의 생명력에서 자연스럽게 멀어져, 그 틈을 예리와 성진이 노릴 수 있도록.
먼저 근원 안에 들어가 버린 정령의 조각 중 적당히 강한 것 몇 개를 한곳으로 빼냈다. 환각속성 마력이 점점 넓게 퍼졌다.
‘후우…….’
이번엔 정신세계 속에 부서져 있는 물건을 복구하자. 저것은 꿈속의 물건이나 샐레나의 몸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정령이 ‘샐레나’를 덮어씌우며 파괴하고 있다. 그러니 무작위로 하나씩, 조금씩, 샐레나에게 힘을 돌려준다.
『‘샐레나’의 퍼즐』
여긴 샐레나와 저주의 경계이며, 샐레나의 내부이다. 나는 꿈속에서의 시간을 현실에 비해 빠르게 설정했다. ‘샐레나’의 퍼즐은 현재 샐레나의 몸 상태를 형상화한 퍼즐이다. 조각이 빈 부분은 내 환각마법으로 보충해 채워 넣는다.
찰칵, 하나를 채워 넣을 때마다 꿈속 분위기가 변한다. 한 조각을 제자리에 밀어 넣었을 뿐인데 엄청나게 힘이 들었다. 울렁, 생명이나 근원에 보다 가깝게 스며든 정령의 조각을 빼낼수록 세계가 일렁였다.
한층 깊숙한 곳을 향해 정신을 뻗었다. 그녀의 목숨도 마법도 지켜야 한다. 가장 깊숙한 곳에 박혀 든 정령의 조각을 하나 빼낸다. 죽어서도 샐레나에게 들러붙어 있는 정령이 점점 자신의 힘이 샐레나에게서 떨어져 나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게끔 문이가 환각으로 조율하고 방어했다.
현실에서라면 엄청난 힘 때문에 마법과 연결된 감각까지 속이기는 힘들었겠지. 그러나 이곳은 꿈속이다. 가장 오래된 나의 영역이다.
‘하나, 둘…뺐다.’
생명에서 두 번째로 깊숙한 곳에 있던 조각을 빼 왔다. 그것을 세계에 박힌 루카의 사슬 근처로 보낸다.
‘후우…….’
나는 짧게 심호흡을 했다. 고작 하나, 하나를 움직이는 데도 이렇게 가슴이 저릿저릿하게 뻐근하다. 큰 조각이 빠지고 난 빈자리도 문이가 알아서 환각으로 채워 넣었다. 겉보기에는 정령의 저주와 비슷해 보이나 내부에는 정순한 정화의 힘이 잠들어 있다.
퍼즐 조각을 하나 더 들었다. 생명이 먼저일까, 근원(마법)이 먼저일까. 그녀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생명이 먼저일 테고, 세계를 구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보면 마법이 먼저일 테지. 생명을 지키면 샐레나가 남는다. 마법을 지키면 설령 샐레나가 죽더라도 그 힘은 레일리에게 계승된다.
그러나 나는 레일리를 떠올렸다. 울고 있던 레일리와 우리의 결심을 떠올렸다.
‘─하지만, 역시, 생명이 더…….’
찰칵
나는 퍼즐을 끼워 넣었다. 생명과 관계된, 생명에서 정령의 힘을 떨치기 위한 조각을.
화아아악!
‘큭!’
생각보다 더 저항이 거셌다. 그러나 나는 안간힘을 써 조각을 끼워 맞췄다.
키이이잉─.
‘정령이 변화를 인지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아직, 아직이다.
「괜찮습니다, 마스터. 아직 정령은 저희를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속행해 주십시오.」
‘응. 문이 너도 계속해서 보조 부탁해.’
「물론입니다.」
정령이 상황이 변했음을 인지했다. 그러나 정신세계에서의 변화까지는 인지하지는 못했다. 내가 여기 있는 것 역시 조금도 모르고 있다. 그러니 한 번 더…….
‘위험한 조각부터, 빨리.’
나는 조각을 빼거나 끼워 맞추는 것에 집중했다. 문이가 환각을 보조하기 위해 정신세계 곳곳에 샐레나의 힘을 상징하는 붉은 꽃을 피워 냈다. 마치 샐레나가 저항하는 것처럼 느끼게끔. 꿈이 좀 더 깊어졌다. 생명 깊숙한 곳에 있는 조각을 하나 더 뜯어내 루카의 봉인 곁으로 보냈다. 정령의 힘이 넘쳐흐른다.
“큭!”
예리의 힘과 루카의 힘이 더 강해졌다. 현실에도 상황이 반영된 것이다. 나는 혀를 찼다.
‘아직 조금 더, 조금만 더.’
조각을 움직이는 게 아까보다 더 버거워졌다. 나는 조각 사이로 달려갔다. 샐레나의 근원의 조각을 들고 가 샐레나의 생명을 좀먹는 조각을 세게 내리쳤다. 내가 원하는 상상이 반영되며 정령의 조각이 세차게 무너져 내렸다.
꿀렁꿀렁
정령의 힘이 샐레나의 조각 안에서 요동친다. 다른 조각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려 한다.
깊게 동화된 조각을 다시 한번 깨부쉈다. 정령에게는 샐레나가 저항하는 것처럼 느껴지겠지. 힘이 보다 근원을 향해 몰린다.
“문이. 샐레나의 조각 몇 개가 동화되어 정령속성으로 바뀐 것처럼 실체화시켜. 정령의 힘이 안심하도록.”
「알겠습니다, 마스터. 그리고 샐레나의 마력을 증식시키는 것을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샐레나의 근원을 해석, 그녀의 마력을 복사해 붙여 넣는 것으로 샐레나의 힘을 빠르게 더할 수 있습니다.」
“응, 괜찮은 방법 같네. 부탁할게.”
「네.」
복사해서 붙여 넣기라. 꿈속이니까 가능한 기예지. 원래 자신보다 월등히 강한 힘은 똑같이 복사해 내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나 이곳은 정신세계이므로 남아 있는 샐레나의 흔적을 통해서라도 그녀의 힘을 증식시킬 수 있다. 물론 무한정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한동안 조각을 부수는 행위를 반복했다. 정령의 조각을 부수고, 부수고, 가끔은 억지로 끌어내 루카의 사슬 근처로 던져 넣는다. 그것을 문이가 가려 줬다. 오히려 정령의 조각이 늘고 있는 것처럼 보여 주는 것으로. 그러면서 문이는 샐레나의 힘을 증식시켰다.
몸에서 마력을 쥐어짜 내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도, 어째선지 생각보다는 지치지 않는다. 그래, 예리를 볼 때와 느낌이 비슷하다. 예리는 한계까지 마력을 짜내어도 그 직후에는 다시 근원을 통해 마력이 흘러나왔다. 마르지 않는 샘. 지금의 고조감은 실로 그것과 비슷하다.
‘아직, 아직이야. 아직 성진이 죽이기에는…….’
치직….
한순간 위화감이 들었다. 정신세계가 미묘하게 변했다.
찌르는 듯한 섬뜩함이 가슴을 스친다. 이건…….
‘시선?’
“……!”
휙 고개를 돌리는 순간 사슬 근처에 있던 정령의 조각에서 힘이 흘러넘쳤다. 루카가 만든 사슬이 삐걱거리며 금이 간다. 사슬 근처로 밀어 두었던 정령이 울음을 터트리며 사슬 사이에서 빠져나오려 들었다.
『환각 거울』
문이가 루카의 마법을 거울로 비춰 증식시켰다. 원래 있던 사슬과 대칭으로 선 사슬이 정령의 사념 덩어리를 꽁꽁 묶는다.
나는 손을 뻗은 채 힘을 줬다. 정령의 힘이 주춤했다. 그러나 이미 흘러나온 조각이 사슬을 더 비집는다. 그렇게 사슬에서 자유로워진 조각이 형체를 갖춘다.
“이런…….”
그래, ‘형체’를.
정신세계에서 조각이 아니라 정령으로서의 모습을 갖춘다. 이는 즉 ‘정신세계에서의 방해를 인지했다는 것’.
‘아직이야. 아직, 나를 찾지는 못했어.’
문이가 환각을 둘러 나를 가렸다. 마력이 안개가 되어 흘러넘친다. 그것이 정령의 시선을 가리도록. 아까보다 더 위험해졌지만 덕분에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정령은 정신세계에서의 공격을 인지한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생각보다 숨이 가쁘지 않은 건 꿈속에 있기 때문이리라. 진짜 육체를 데리고 왔지만 그래도 꿈속에서는 육체의 제약이 덜하다.
나는 샐레나의 조각을 꽉 쥐었다.
아직 저주를 풀기엔 샐레나의 힘이 부족하다. 하지만 정령은 이미 방해를 인지했다. 그렇다면 정령의 눈을 끌어 줄 환상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내’ 힘이 아닌 바깥에 있는 타인의 힘, 혹은 샐레나의 힘이면 좋겠다.
하인리히가 준 호랑나비는 나를 지키는 비장의 수단으로 놔두자. 이곳은 샐레나의 정신세계니, 샐레나의 저항력을 이끌어 낸다.
괜찮다. 샐레나도 이제 조금 정도라면 저항할 수 있다. 예리의 넘치는 마력이 샐레나의 마력과 생명력을 점점 회복시키고 있으니.
“문이, 잠깐 동안 샐레나의 퍼즐을 부탁할게.”
「알겠습니다.」
나는 문이와 위치를 바꿨다. 문이와 내 능력치는 비슷하다. 하지만 정신세계를 상상하고 조율하는 것은 역시 내 정신력이 핵심이다. 하물며 평소 사용하지 않았던 기술이라면.
문이가 정령이 당황한 틈을 타 내게 건네받은 퍼즐 조각을 끼워 넣었다. 샐레나의 세계가 또 한 번 생기를 되찾았다.
나는 샐레나의 흘러넘친 마력을 모아 왔다. 정신을 지키는 정령.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부터 주인을 수호하는 정령. 확실히 ‘요정과 춤을’에서 쓰지 않은 설정에 그런 정령이 있었지. ‘나이트메어 나이트’의 꿈 정령은 조금 사악한 면이 있으니, ‘요정과 춤을’에서 가져오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