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361
머리카락뿐만이 아니라 눈동자 색도 비슷했다. 마치……미영 할머니와 꼭 닮은 색이다.
그녀의 내부에서 새하얗게 시린 얼음의 마력이 느껴진다. 이 느낌, 혈족마법이다. 미영 할머니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폴리젠의 태반은 얼음마법의 계보를 이었다. 그리고 대대로 폴리젠의 수장은 ‘엘피로’의 성을 잇는다. 얼음 성의 엘피로. 엘피로의 고대겨울마법은 미영 할머니의 고대얼음마법과 나란히 자연계 최강의 혈족마법 중 하나라 불리며, 그 힘은 고대얼음마법을 뛰어넘는다.
전대 수장이었던 아이리스 엘피로는 참극 때 벨라의 손에 죽었다. 그녀는 아이리스의 딸인 시네라 엘피로다.
“제 생각이 맞다면 평범한 치료로는 지금만 넘기는 연명 조치가 될 뿐이에요.”
“무슨 뜻이죠?”
레일리가 굳은 얼굴로 시네라를 마주 보았다. 시네라가 소리 없이 우리 곁에 다가섰다.
“샐레나 씨께 부상을 입힌 상대가 ‘시카’인 게 문제예요. 두 분이 처음에 샐레나 씨를 치료하신 분인가요?”
“네, 맞아요. 지금만 넘기는 연명일 뿐이라는 건 무슨 소리인가요?”
“유펠르시아가 봉인된 이상, 이제 알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는 트라베리아의 고유마법.”
시네라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샐레나 위로 손을 얹었다.
“아니요, 그렇다기보다는 옛 마법사가 쓰던 무엇보다 근원에 가까운 마법이라 해야겠네요. ‘자연’의 목소리를 듣고 ‘자연’과 소통하여 ‘자연’의 가호를 얻는다. 그들은 죽음을 모아 타락해 버린 지금도 그 힘을 잇고 있어요.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마법보다 순수하고 근원에 가까운 마법을요.”
“자연……이라고요?”
“네. 그리고 시카의 혈족마법인 고대정령마법은 자연의 근원을 심도 깊게 이끌어 내는 마법이죠.”
“정령이 자연의 화신이니까요?”
말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나는 앞뒤가 맞는 이야기를 꺼냈다. 시네라가 수긍했다.
“네. 그래서 시카는 자연의 의지를 아주 손쉽게 이끌어 내죠. …역시.”
샐레나의 가슴 위에 손을 올린 채 가만히 있던 시네라는 곧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의 몸 주위로 냉기가 피어오르다 억눌리듯 가라앉았다.
시네라는 곧 샐레나를 향해 뻗었던 손을 거두며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마력의 균형이 무너진 이유를 알았어요. 샐레나 씨는 시카의 정령에게 저주받은 것으로 인해 자연의 미움을 샀어요.”
“자연의 미움을 사다니요?”
“그게 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예요. 죽음의 저주를 받고, 자연에게 죽어야 할 존재로, 살아 있는 게 이상한 존재로 인식을 당했어요.”
자연에게 미움을 산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개념의 이야기다. 시네라도 그것을 아는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살아 있는 이상, 세계에 존재하는 이상 자연이라는 위대한 흐름에서 벗어날 수는 없어요. 자연에 의지가 있다고 해요. 사람처럼 선명한 의식과 자아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세계를 유지하고 연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본능적인 의지지요. 더럽혀진 환경을 정화하고, 어느 곳에는 태풍을 일으켜야 하고, 비를 내리고, 파도치고, 그 모든 게 자연의 흐름이며 의지라고 생각해 봐요.”
자연이라는 개념만으로 이해하자면 그렇다. 자연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바람, 대지, 새싹, 바다, 구름, 하늘, 지구, 태양, 우주. 그 자연의 화신이 바로 정령이다. 보다 형태화된 힘과 의지를 가진 생명체에 가까운 것.
“그래요. 자연은 세계의 의지예요. 그들은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세상을 순환하며 지키고 유지하는 역할을 가지고 있어요. 트라베리아는 그 의지를 듣고 그들의 의지를 불러올 수 있어요. 그게 구체화된 게 바로 정령, 시카의 정령은 말 그대로 자연의 화신이에요. 그런 화신이 한 존재에게 죽음의 저주를 내렸어요.”
시네라는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이해시키기 위해 천천히 말을 골랐다. 그녀의 감정이, 생각이 조금씩 머릿속에 흘러들어 왔다. 이해하기보다 먼저 와닿았다.
“자연의 미움을 샀다는 건 세계에 미움을 샀다는 소리예요. 화신이 죽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으니 그 흐름을 느낀 자연도 그녀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겠죠. 세상의 흐름에서 내팽개쳐진 것과 다름없다고 해야 할까요. 그럼 어떻게 될까요? 주위 자연이, 그녀의 몸이 그녀를 거부해요. 마법은 그녀를 미워하고, 생명은 그녀를 거부하고, 세상은 그녀를 죽이려 들어요. 설령 정령의 저주를 없앤다고 해도 그 감정은 그녀의 이 안에 남아 있어요. 이것만은 마법으로 어떻게 해도 사라지지 않아요.”
천천히 시작됐던 이야기는 점차 충격적인 결론을 우리에게 가져왔다.
“그렇기 때문에 원래 정령의 저주를 푸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요. 은하 씨와 예리 씨였죠? 두 분은 어떻게 저주를 푼 거예요?”
“그냥 마법으로요. 저기, 어쨌거나 샐레나 씨가 이렇게 된 건 시카의 마법 때문이란 거죠?”
“네.”
시네라가 수긍하며 나와 예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곧 그녀가 흠칫했다.
“……!”
“그럼……왜 그러세요?”
“…….”
그녀는 멍하니 자신의 손을 보더니 수긍했다.
“그렇군요. 두 분은 자연의 사랑을 받는 존재였군요.”
“……네?”
당황하는 우리에게 그녀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알고 계시겠지만 제 마법은 자연 계열이에요. 전승된 마법을 익히면서 자연의 흐름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게 되었죠. 놀라워요. 자연과 소통할 줄 모르면서 이렇게까지 자연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처음 봐요. 당신과, 당신, 그리고……당신도.”
시네라는 차례로 나, 예리, 그리고 성진을 가리켰다. 솔직히 의외였다. 종말이라는 섬뜩한 능력을 가진 애가 자연의 사랑을 받는다고? 성진을 가리키던 시네라가 문득 겁먹은 얼굴로 몸을 살짝 떨었다. 예리가 초조하게 시네라를 붙잡았다.
“그래서요?”
“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태로는 암만 치료해도 임시 조치밖에 안 된다는 소리잖아요. 정령의 영향을 완전히 떨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적어도 이렇게 쓰러지지 않게 할 방법이 있나요? 아시나요?”
그래, 중요한 건 그거였다. 시네라가 원인을 줄줄이 읊은 이유도 그것일 것이다. 놀람으로 멍해졌던 시네라의 표정이 다시 진지해졌다.
“두 분, 지금 상태로도 치료는 할 수 있는 거죠?”
“네.”
“가능해요.”
예리가 손가락을 부딪치자 천사가 다시 치료를 개시했다. 다시 균열이 나기 시작했던 생명력이 순백의 마력을 맞고 점차 단단히 붙어 갔다. 나는 그 위에 손을 올리며 집중했다. 균형을 잃고 어지러워졌던 샐레나의 힘이 천천히 조정되어 갔다.
“당장 샐레나 씨의 붕괴를 막을 방법으로 떠오르는 건 두 개네요.”
“두 개요?”
“하나는 자연의 사랑을 받는 두 분의 마력을 샐레나 씨의 안에 계속 순환시키는 것으로 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에요. 보조 아이템을 몸 안에 직접 집어넣는다거나 해서요.”
“두 번째는요?”
“자연의 축복을 받은, 예를 들어 신물이나 성물의 가호를 받는 방법이에요. 가호가 있으면 자연도 샐레나 씨를 완벽히 배제하지는 못할 거예요. 리첼라가 가지고 있는 ‘겨울의 조각’ 같은 것요.”
“그럼…….”
우리에게 그런 물건은 하나밖에 없다. 미영 할머니 부모님의 유품인 겨울의 조각뿐. 아니, 잠깐, 신물이라고? 신물이라면 인하가…….
생각을 이어 갈 때쯤 성진이 불현듯 말했다.
“내 가호면 어때. 내 특수능력은 죽음에 가까운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죽음에서 지켜 줄 수도 있지.”
“…네? 가호요? 당신, 가호를 내릴 수 있나요?”
“그래.”
성진이 우리 곁에 다가왔다. 시네라가 무심코 뒤로 물러났다. 나는 마법에 집중하며 속삭였다.
“내리는 건 좋지만 네 가호는 내 힘이랑은 반발하잖아. 그건 치료할 때는 안 좋아.”
“그럼 치료할 때만 해제하면 되지.”
레일리가 시네라를 붙잡았다.
“어떤가요? 당신이 말한 자연이 사랑하는 자의 가호라면 엄마가 무사할까요?”
“그건……해 봐야 알아요.”
균형이 상당히 무너져 있었기 때문에 치료하고 조정하는 데 상당히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어째선지……‘반발’이 느껴졌다.
‘자연인지 뭔지 웃기지 마. 오히려 이 사람은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필요하단 말이야!’
예리를 도와 짙고 깊게 몸 안의 흐름을 조정했다. 반발한 것은 잠시뿐, 곧 정화의 흐름에 묻혔다. 균열로 가득했던 흐름의 균형이 어느 정도 갖춰졌다.
“정말 이렇게 해도 얼마 못 버틸까요?”
우리는 긴 치료를 마치고 물러섰다. 나는 샐레나의 근원을 빤히 살폈다. 막 치료받은 샐레나의 흐름은 정상적이다. 나는 내 마력과 예리의 마력이 완전히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막 가라앉았을 타이밍에 성진이 나섰다.
‘가호’라.
나는 아직 가호를 잘 모르겠다. 사실 지금 상황에서 가호를 내린다면 내가 내리는 게 더 나을 텐데.
그러나 가호는 아무나 내릴 수가 없다. ‘조건’이 있다.
그 조건은 마법사마다 제각각 다르며, 마법사는 스스로의 마법 안에서 그 조건을 찾아야 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성진은 이미 중학생 때 가호를 쓸 수 있었다.
사람마다 가호를 내리는 방법은 다르지만, 성진이 가호를 내리는 방법 중 가장 강력한 것은 키스와 상처다. 가장 강력한 두 방법이 정반대의 모습을 띠다니, 참 아이러니하지. 그것도 심장에 가까운 곳에 할수록 뛰어난 힘을 지닌다.
성진이 고개를 숙여 샐레나의 심장 위에 키스했다. 생각보다 감정의 동요가 없었다. 보는 동안 심정이 조금 복잡하긴 했으나, 샐레나를 살리기 위한 일이다. 망설이는 게 오히려 죄다.
성진은 키스한 자리 위에 숨결을 불어넣고 허리를 도로 폈다. 샐레나의 심장 위에 기하학적인 문양이 생겨났다. 근원과 아주 가까운 장소다.
원래 자신보다 강한 사람에게 가호를 내리기는 쉽지 않은데 성진은 아주 간단하게 했다. 강력한 가호가 샐레나의 몸을 타고 돌았다.
우리는 샐레나의 상태를 보기 위해 하루 정도 이곳에 있기로 했다. 앞으로는 정기적으로 여기에 와 샐레나의 상태를 살펴야겠지.
대현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서, 우리의 힘으로, 우리가 직접 복수하고 싶어서. 연맹과 함께하면 더 유리할 걸 알면서도 복수 이외의 일에 붙잡힐 것 같아 피하고 도망쳤다. 그런데 결국 붙들리게 됐다.
싫은 건 아니다. 어쩔 수 없지. 그러나 가슴 한구석이 조금 초조했다.
곧 우리는 레일리가 어떻게 우리가 플로리아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들을 수 있었다.
“파장을 추적한 거예요.”
“파장요?”
“네. 바로 곁에서는 저도 은하 씨의 환각을 꿰뚫어 볼 수 없어요. 하지만 멀리 떨어진 곳으로 향하는 통신의 파장, 환각과 환각 사이를 잇는 마력, 목소리. 으음, 잘 설명할 수가 없네요. 하여간 저는 은하 씨의 통신 파장을 쫓아서 추적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플로리아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었고요.”
정말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통신을 쫓아 추적했다고? 그야 레일리의 마법이 통신에 민감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전파를 하이잭 하는 것이 특기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트라베리아도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트라베리아에도 컴퓨터와 비슷한 마법을 가진 자가 한 명 있었다.
나는 염사로만 보았던 한 여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랭크 시험을 치지 않은 커븐 로드, 베로니카 위즈덤.
랭크 시험에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던 만큼 마법 불명, 실력 불명에 벨라나 엘리시아와 마찬가지로 참극 이후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커븐 로드다. 알려진 것은 정보 수집에 능통하며 마법이 컴퓨터와 비슷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뿐이다.
우리는 일정한 간격으로 샐레나의 상태를 살폈다. 성진의 가호 덕분인지, 아니면 우리의 치료가 좋았던 건지 시네라의 말처럼 샐레나의 힘이 흐트러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샐레나의 깊은 곳에서 균열이 생겨났다. 하나, 둘…….
그러면서 나는 우연히 부조화가 짙어지는 장면을, 샐레나가 자연에 ‘거부’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샐레나를 지켜보고 있는데 어느 순간 주위의 마력 흐름이 이상해졌다. 샐레나의 마력이 아니라, 주위를 타고 도는 마력의 흐름이.
바람 위로 적의에 가까운 감정이 어리며 일그러졌다. 그 힘이 샐레나에게 접근하는 순간 샐레나의 몸 안에서 균열이 일었다. 그러나 바람이 더 가까워지기 전에 성진의 종말이 그것을 잡아먹었다.
예리는 보지 못한 듯했다. 그야 예리가 보는 건 자연의 마력이 아니라 사람의 마력이니까. 나처럼 세세하게 구분하고 다니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보았다.
……시네라의 말이 옳았다. 자연이 샐레나를 배제하려 들고 있다. 성진의 가호는 반드시 필요하다.
내가 가호를 내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성진의 힘보다는 직접 몸 안의 균열을 조율할 수 있는 내 정화의 힘이 더 나을 것이다.
하긴……. 내릴 수 있다고 해도, 가호를 내리면 힘이 제한된다. 나는 아직 실력을 기르기에도 벅찼다. 그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방도를 생각해야 한다. 샐레나에게 지속적인 마법을 주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가지고 있는 아이템과 기술을 통해 샐레나를 어떻게 치료할지 고민했다. 예리 같은 경우에는 마법 약을 전부 다시 확인했다. 마법 약보다는 예리가 직접 힘을 쓰는 게 훨씬 낫지만, 약에 따라서는 예리의 마법과 합쳐져 시너지 효과를 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치료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그나마 도움이 될 것 같은 게 한국에서 예리가 샀던 그 마법 약이었다. 주인의 생명력을 끌어내 상처를 치료한다는 마법 약 말이다. 그러나 결국 그 약도 상처를 치료하는 약일 뿐이었다. 중요한 건 상처를 치료하는 게 아니라, 무너지는 샐레나의 균형을 바로잡는 것이다.
“천사의 팔찌를 아이템으로 만드는 건 어때요? 마법을 근원에 직접 심는 건 일시적인 마법이 아니고서야 좀 위험하잖아요.”
“흠, 그러네. 네 천사의 팔찌라면 샐레나의 균형을 잡아 둘 수 있겠지. 그러면 문제는 역시……성진의 가호인데.”
“성진 오빠의 마법은 위험하지만, 가호만은 은하 언니의 마력과 별로 충돌하지 않았잖아요. 실제로 은하 언니의 반지에도 가호가 걸려 있고요.”
“그렇긴 한데, 그래도 우리 마력은 서로에게 상극이라, 부딪칠 위험이 있다고 봐.”
“제 마력만이라면 괜찮을까요?”
“너랑 성진의 마력도 거의 상극이잖아?”
“그렇긴 해요. 저한테만 일방적으로 상극이지만요.”
“그럼……둘 중 하나는 버릴 수밖에 없나?”
“아마도요.”
우리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성진의 가호는 뛰어나서, 샐레나의 몸은 SR의 의사들에게 들은 상황에 비해서는 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근원에 새기는 가호는 성진의 몸에도 부담이 간다. 앞으로도 계속 싸워야 할 걸 생각하면 아이템을 만드는 게 우리에겐 더 낫다. 다만 이게 샐레나한테도 나은 선택일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
일은 빠를수록 좋다. 우리는 바로 샐레나의 균형을 조정할 수 있을 만한 아이템 만들기에 착수했다.
시험용 아이템을 완성했을 무렵 샐레나가 깨어났다. 우리는 바로 샐레나의 상태를 살피러 병실로 달려갔다.
“이렇게 수고를 끼쳐서 미안하구나.”
“아니요. 당연히 도와야죠. 이제 몸은 괜찮으신가요?”
“훨씬 가뿐해. 그리고 가호는 이제 풀어도 된다고 전해 주렴. 이 가호는 확실히 강력한 보호막임이 틀림없다만, 너희 동료의 몸에 부담이 갈 거야. 더군다나 본인보다 더 강한 자에게 가호를 거는 건 무척 부담이 가는 일이란다.”
그러게 말이다. 나와 예리는 성진을 곁눈질했다. 그럴 텐데, 저 녀석은 표정 변화 하나 없다.
“하지만 그러면…….”
“괜찮아.”
그렇게 말하며 샐레나는 손 위로 어떠한 물건을 소환했다. 그것은 녹색 보석이 박힌……담뱃대였다. 고풍스럽고 유려한 문양을 지닌 아름다운 담뱃대다.
‘이 느낌은…….’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신성’의 느낌이다. 여신님이 준 아공간이나 인하가 가진 빛의 검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종류의 기척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저것은 신물인가?
“신물……인가요?”
“그래. 그것도 치유에 특화된 신물이란다. 그러니 괜찮아. 가끔 상태를 봐 주기만 하면 충분해.”
신물을 보던 예리가 의아해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으음……힘이 느껴지긴 하는데……. 잘 모르겠네요. 별달리 강한 마력은 안 느껴지는데 말이죠. 그러고 보니 인하 언니가 가진 신물도 그랬죠.”
“응. 신물의 강함은 마력의 크기와 상관없나 봐.”
“신물을 가지고 있나요?”
“네, 하나.”
시네라가 놀랍다는 얼굴로 우리를 보았다.
“운이 좋았네요. 진짜 신물은 웬만한 연이 아니고서야 만날 수 없거든요.”
그러면서 시네라는 샐레나가 가지고 있는 신물을 가리켰다.
“그 말대로, 신물이 가진 힘의 대단함은 마력의 크기로는 알 수 없답니다. 저희도 신물이 어떤 식으로 그렇게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는 알지 못해요. 마법이 미치지 않는 미지의 힘을 지녔다는 사실만 알 뿐.”
그래. 신물이 지닌 힘의 대단함은 느껴지는 마력의 크기와는 전혀 다르다.
‘그건 그렇고, 이번엔 정말 좀 낯이 익은 것 같은데? 단순히 신의 힘을 지닌 것 때문만이 아니라…….’
무심코 시선을 굴렸다. 성진은 동요 없이 담뱃대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다.
‘아.’
그 순간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퍼뜩 담뱃대를 보았다. 저번에 성진이랑 같이 만났던……. 그러나 잠깐 떠올랐던 얼굴은 노이즈 소리와 함께 머릿속에서 잊혔다.
“그러니 이만 가호를 풀어 주렴.”
“하긴. 그것이면 충분하겠지요.”
“이 신물을 아니?”
“네. 압니다.”
생각보다 힘을 가진 신물인가 보다. 게다가 어째선지 성진이 아는 신물인 모양이다. 성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샐레나의 심장 위에 손을 뻗었다.
화악─.
노을빛 힘을 지닌 문양이 샐레나의 가슴 안에서 서서히 빠져나왔다. 신비롭게 요동치던 문장이 곧 성진의 손안으로 스며들어 다시 그의 힘으로 환원됐다.
성진의 가호가 사라진 순간 샐레나의 심장과 근원이 다시 부조화를 알리며 엇박자로 뛰었다. 그 순간 샐레나가 담뱃대에 마력을 주입하며 훅 숨을 불었다. 그러자 담뱃대에서 녹색 연기가 나오며 샐레나의 몸을 뒤덮었다. 담뱃대에서 나타난 문양이 샐레나의 몸 안으로 스며들자마자 가슴 안의 부조화는 물론이고 사나웠던 자연의 기세도 가라앉았다.
“세상에.”
예리가 눈을 크게 떴다. 이렇게 보니 대단한 힘을 가진 신물이다.
“조금 불안하지만 이것으로 괜찮을 거야. 나를 위해 여기까지 와 줘서 고맙구나.”
“아뇨.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당신에게도, 레일리에게도,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요.”
“그렇게 말해 주어 고마워.”
이제 돌아가도 될 것 같다. 아! 예리가 생각난 얼굴로 주머니에서 팔찌를 꺼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이거 가지고 계세요. 급할 때 임시 조치는 될 거예요.”
예리가 팔찌를 샐레나의 손 위에 넘겼다. 샐레나가 상냥하게 웃었다.
“고맙다, 착한 아이야.”
“…….”
예리가 부끄러운지 살짝 뺨을 붉혔다.
나와 예리는 지친 얼굴로 플로리아의 거점에 돌아왔다. 가호 때문에 가장 힘을 많이 썼을 성진은 오늘도 제일 멀쩡했다.
사건 개요를 전하니 동료들이 모두 안도했다. 샐레나 문제가 일단락된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거점이었다.
“거점……바꿔야겠네.”
“오래 머무르진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인성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레일리가 우리 거점을 발견했다. 단순히 몰래 알고 있는 것뿐이라면 그나마 정리할 시간이 있었겠지만, 그녀는 큰 소란과 함께 눈에 띄게 우리를 찾아왔다. 대현에 여기가 알려지는 것도 시간문제다. 사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묵인하고 있었다……는 일은 없겠지. 백한 선생님에 한해서는.
애당초 ‘알려졌다’는 것이 문제다. 이래서야 트라베리아에게 들키는 것도 시간문제 아니겠나.
“아직 트라베리아의 눈을 피할 방법도 찾지 못했는데.”
“혹시 인하가 가진 신물을 써서 숨을 순 없을까?”
소영이가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흠, 나는 인하가 가진 신물을 떠올렸다.
인하가 가진 신물은 ‘빛의 검’이다. 신의 힘은 트라베리아가 일컫는 진짜 자연의 힘과 어딘지 닮은 부분이 있다. 그래서 인하는 꽤 자주 신검을 꺼내 빛을 느꼈다.
신검은 인하의 손에 쥐어지는 횟수가 늘수록 조금씩 변했다. 처음엔 공명하듯 약하게 빛을 낼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때때로 타오른다. 인하가 검을 들고 명상을 할 때면, 검 안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는 한다. 그걸 지켜보다 보니 알게 됐다. 인하의 신검에 스며든 힘은 ‘태양’의 힘이다.
조금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포츈이 표현하길, 인하는 ‘태양의 검’. 그리고 인하는 태양의 검에 해당하는 신물을 지니고 있다.
“무리야. 여러모로 실험해 봤지만 그 신검은 한 번도 특별한 힘을 발한 적이 없어. 1년 이상 가지고 있었지만 내가 아는 건 빛과 태양의 힘을 지녔다는 것뿐이야.”
“그렇다고 내가 가진 성물로 피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내가 가진 성물의 효력은 고대 얼음을 가진 자에게 한정되니.”
“흠.”
옆에서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던 한재일이 끼어들었다.
“연맹이랑 친해 보이던데 거점을 들키면 안 되는 거야? 왜? 지구로 돌아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은 대충 알고 있어. 연맹이랑 협력하면 편하지 않나?”
그러고 보니 졸지에 짐을 지게 됐었다. 나는 한재일을 돌아보지 않고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협력하면 편하겠죠. 하지만 협력하지 않아요.”
“왜?”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거예요. 꼭 단어로 표현한다면, 고집이겠죠.”
“고집?”
“반드시 우리가 해내겠다는 고집요.”
“고집이라…….”
한재일이 킥 웃었다.
“맘에 드네. 좋은 이유야. 그래서 같은 팀이 될 수 있는 전력을 배척하는 거야? 대현과도 거리를 두는 거고?”
“네.”
“착한 아이구나.”
‘착한 아이’라.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건지 알겠다.
대현의 모두는 나에게 선생님이거나, 선배이거나, 존경할 상대이고, 어린 시절의 아주 좋은 추억 속에 자리 잡은 상징이다.
확실히 그런 것일지도 몰라. 선생님들 앞에서 나는 착한 아이이고 싶다. 복수에 미쳐 피를 흘리고, 피를 짓밟고, 종내에는 사람을 죽이는, 그런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이어 한재일이 아주 좋은 생각이 났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그렇다면 캘리번에서 지내는 건 어때?”
“……네?”
“캘리번은 트라베리아도 못 찾거든.”
말은 들었지만. 인하가 퉁명하게 말했다.
“‘가호’ 때문에?”
“맞아.”
“그런 건 소용없어. 이성진도 가호를 쓸 수 있어. 그것도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가호. 하지만 소용없었어.”
“‘사람의 가호’라면 그렇겠지. 하지만……으음, 이건 우리 조직 기밀이라 자세히 말하진 못하겠는데, 캘리번의 가호는 가호로 어떤 힘을 끌어오는 거거든. 아무리 트라베리아라도 ‘그’가 보호하는 이상 캘리번을 찾을 수는 없을 거야.”
‘그’? 보호? 자신만만하기는. 그 의견에도 회의적이지만, 어차피 우리가 캘리의 도움을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게 진짜든 착각이든 간에 캘리에 갈 생각은 없어요. 캘리는 ‘적’이니까.”
“고집이라며?”
한재일이 내게 가까이 다가오며 내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뻗었다. 그 손은 가까이에 있던 인성이와 인하가 튕겨 냈지마는.
“대현은 특별하니까 착한 아이로 있는다. 연맹과는 복수에 집착하기 위해 함께하지 않는다. 복수를 이루기 위한 고집이라면 목적을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지. 그게 설령 옛날 적이었던 자들과 결탁하는 것이라도.”
복수, 복수를 위해서. 그래, 확실히 우리는 최대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예정이다. 최대한이라는 건 몇 가지 예외가 있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것은 복수를 하기 위한 예외다.
“신경 거슬리는 소리 좀 그만해 주실래요? 확실히 복수를 위해서라면 웬만해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생각이지만, 그건 전혀 가리지 않겠다는 소리는 아니에요. 예외 정도는 있어요.”
“캘리는 너희가 정한 룰에 위반된다는 소리야?”
“네. 애초에 저희가 복수하려는 건 소중한 사람을 잃었기 때문이에요.”
“그 소중한 사람을 건드렸던 사람과 손을 잡는 건 아웃이라는 거야? 너와 내 소중한 사람이 똑같다고 해도?”
“네.”
“하지만 그거, 대현 때처럼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고집은 아니지?”
“…….”
나는 짜증을 내며 한재일과 눈을 맞췄다. 가늘게 웃는 눈동자가 재수 없었다. 빌어먹게도 잘 알고 있다. 나는 한재일을 한 번 노려보곤 고개를 돌렸다.
분명 동료가 되는 게 아니라 잠깐 협력하는 것뿐이라면 생각할 가치 정도는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서로에게 그럴 필요성이 있을 때다. 한때 친구를 위협했던 자에게 일방적으로 빚을 지는 건 사양이다. 나와 비슷한 기분인지 인하가 한재일을 향해 경고했다.
“옆에서 사람 신경 좀 그만 긁을래요? 쫓아내는 수가 있어요.”
한재일이 양손을 들며 항복했다.
“알았어, 그만할게. 하지만 캘리는 너희한테 딱히 유감이 없어. 오히려……너희한테 호감이 있는 것 같던데? 특히 대장들은……강인하랬나? 너를 많이 신경 쓰더라고.”
“전대 단장이 저희 어머니와 아는 사이였다는 말은 들었어요.”
아는 사이. 어릴 적의 일이 떠올랐다. 하지만 선아 아줌마는 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