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362
“그거 말인데, 조금 이상해요.”
나는 과거 선아 아줌마가 했던 말들을 떠올리며 팔짱을 꼈다.
“뭐가?”
“제가 알기로, 선아 아줌마는 분명 캘리와 싸웠던 적이 있어요. 적이었던 셈이죠.”
인하가 기억을 되짚는 듯 가라앉은 눈동자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런 말을 했었어. 아직 A랭크 마법사일 때 한 번 싸웠던 적이 있다고. 그 일을 계기로 S랭크 마법사가 되었다고 했었어.”
“그럼 캘리는 너희 엄마한테 졌다는 거네?”
이야기를 듣던 소영이 역시 의아해했다.
“그럼 캘리는 오히려 너희 엄마한테 적의를 가져야 정상 아냐? 대체 뭐지?”
슬슬 캘리와 선아 아줌마의 관계가 신경 쓰인다. 대체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신경 쓰였지만 고민한다고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한재일이나 인하가 모르는 이상에야. ……당사자들은 이제 이 세상에 없거나, 혹은 여기에 없으니까.
거기다 지금 신경 쓸 일은 그게 아니다. 거점이다. 이제 플로리아에서 떠날 때가 되었다. 그건 확실하다. 그럼 다음번에는 어디로 가야 할까. 어디로…….
“…….”
어차피 이제 플로리아에는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고민하기보다 우선 떠나기로 했다.
돌아다니는 동안 사용할 아이템은 마력은 물론이고 영혼에 정신세계까지 바꾸는 ‘변신 의태 아이템’이다. 잠시나마 릴리의 감지마저 피했던 이 힘이라면 트라베리아의 눈에서 오랫동안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금 홀로 서기 위해 또 한 번 닥치는 대로 시험해 볼 때다.
처음에 썼던 아이템은 릴리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한 개를 제외하고 전부 부쉈다.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것에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플로리아에서 사용했던 설정을 그대로 옮겨 붙여 새로운 변신 아이템을 만들어 냈다. 라라는……미안하지만 다시 성진의 아공간으로 옮겼다. 라라가 울며 싫어했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가 대현을 피하고자 하는 만큼 대현이 우리를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도 강력하다. 우리는 그로부터 하루도 지나지 않아 플로리아를 떠났다. 대현이 생각보다 빨리 플로리아에 찾아왔기 때문이다.
급하게 떠나는 우리의 곁에는 ‘혹’이 하나 붙어 있었다.
“오오, 신기하다. 진짜 딴사람 같네?”
생각해 보니 한재일은 아직 나를 찾아온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플로리아를 나온 우리의 첫 목적지는 바로 유펠르시아의 봉인이 있는 장소였다.
봉인을 풀 ‘기술’은 이미 존재한다. 바로 ‘별하늘의 열쇠’다. 문제는 봉인을 풀기 위해서는 정령의 감지를 속여야 한다는 점이다. 트라베리아에 들키지 않고, 적어도 범인이 우리인 것을 들키지 않고 봉인된 유펠르시아만 빼낼 방법을 우리는 아직 찾지 못했다. 자칫 실수라도 해서 트라베리아의 경계를 사 봉인의 위치가 옮겨지면 낭패다. 그런 이유로 한동안은 유펠르시아를, 그 안에 있는 라시아의 의지를 찾아가지 못했다.
오랜만에 봉인을 찾아가 라시아의 이야기를 들어 볼 생각이다.
변신 아이템이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를 가려 줄지는 모르겠으나 트라베리아는 적어도 당장 우리를 발견해 내진 못한다. 빨라도 하루라고는 했으나 트라베리아가 우리를 추적하기까지는 평균 3일에서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한동안 우리를 전혀 추적하지 못한 만큼 추적에는 손을 놓고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성진이 ‘시선’을 느끼기 전까지는 괜찮다. 여태까지도 트라베리아는 플로리아에서 잠깐 나왔을 때 우리를 바로 발견하지 못했다.
문제는 ‘혹’이 따라붙었다는 것이다. 한재일도 어쨌거나 릴리에게 찍힌 몸. 그냥 끌고 나올 수는 없기에 변신 아이템을 빌려주었다. 지금 그는 완벽하게 변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는 중이다.
“이 이상 저희랑 같이 있으면 위험해요. 캘리번이 그렇게 안전하다면 얌전히 돌아가시죠?”
“가출했다고 말했잖아. 돌아가면 이번에야말로 무시무시한 징계를 받을 거야. 그런데 목적도 달성 못 하고 돌아갈 수는 없잖아.”
마음은 약간 이해한다. 그의 말대로 그가 모르는 동안의 민 선생님이나 준휘 선생님, 민아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건 나뿐이다. 어쩔 수 없지. 봉인을 향해 가기 전에 혹부터 떼 놔야겠다.
“좋아요. 어떤 이야기가 듣고 싶은 거죠?”
“어? 여기서 바로 하는 거야?”
“싫어요?”
“아니, 나야 좋지. 이래저래 바빠서 결국 궁금한 건 하나도 못 들었잖아.”
드물게도 아이처럼 웃는 한재일을 보며 나는 백한 선생님을 떠올렸다. 백한 선생님도 나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겠지. 이어서 성후 오빠도 떠올렸다. 지금의 성후 오빠는 1년 전의 나와 닮았다. 주위 따윈 전혀 보지 못하고 오로지 어둠으로 달려만 가던 나와.
“그런데……이야기하기 전에 하나 물어봐야 하는 게 있어. 너, 민이랑 친했어?”
무슨 의미로 그러한 것을 묻는지 알 수 없었으나, 나는 대답했다.
“네.”
“즉답이네? 얼마나?”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거죠?”
“얼마나 친했냐고. 비밀이 없을 정도로 친했어? 중요한 걸 의논할 수 있을 정도로는 친했나?”
“비밀……이 없을 수는 없죠. 친했다고는 해도 민 선생님은 어른이었고, 선생님이고, 제가 모르는 비밀 하나둘 정도는…….”
한재일의 눈동자가 얼핏 차가운 빛을 띠었다. 비밀?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고서야 비로소 나는 한재일이 무슨 의미에서 그러한 말을 한 것인지 깨달았다.
민 선생님과 준휘 선생님에게는 친한 친구나 학생들에게도 쉽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내 빈틈을 노린 것처럼 한재일이 입을 열었다.
“민이랑 휘가 애인 사이라는 건 알아?”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이렇게 갑작스럽게 그 이야기부터 꺼낼 줄은 몰랐다. 동료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건만.
“──….”
놀란 인하가 뭐라 말을 잇기보다 먼저 소영이가 탄성을 질렀다.
“몰랐어! 그랬어?”
한재일이 소영이를 돌아보았다.
“넌 그 두 사람이랑 친했어?”
“아니, 전혀. 우린 중학생 때부터 대현에 다녔으니까. 너희도 몰랐지?”
두 사람은 자신들의 관계를 들키는 걸 두려워했다. 당연히 알 리─.
“음, 사실, 알고 있었는데.”
“알고 있었다만.”
없으리라는 내 예상은 빗나갔다. 인성이와 성진이 차례로 대답했다. 형일 아저씨와 예리는 젊은 A랭크 마법사였던 민 선생님의 얼굴 정도는 알고 있었으나 결국 잘 모르는 이였기 때문에 반응이 싱거웠다. 미영 할머니는 정말로 모른다.
그럼 예슬이와 시하는……두 사람은 어쩐지 어색한 얼굴로 대답했다.
“사실 저희도 알고 있었어요.”
“응…….”
“헉! 그럼 몰랐던 거 나뿐이야?”
“아니, 나도 몰랐어.”
인하가 분한 얼굴로 대답하더니 진지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사귀었다고? 확실히 자주 같이 있었지. 그냥 절친한 친구라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은하야, 정말로 그래?”
인하의 눈동자에는 순수한 의문만이 들어차 있었다. 친구들이라면 차별 없이 받아들여 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두 사람이 살아 있을 때 미리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하지만 한재일과 대화를 결심한 순간부터 어느 정도는 각오한 일이다. 선생님들의 이야기라 하면 이건 빠질 수 없다. 나는 가만히 수긍했다.
“응. 두 사람은 우리랑 만나기 전부터 연인 사이였어.”
“몰랐어. 그렇게 오래 있었는데. …너무 오랫동안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서 몰랐던 걸까? 왜 말을 안 해 준 거지?”
“두 사람은 그 사실을 숨기고 싶어 했거든. 동성끼리 사귄다고 하면 안 좋은 눈으로 보는 사람이 많으니까. 나는 내가 알아챈 거야.”
“아…….”
“나야말로 묻고 싶어. 너희는 어떻게 알았어?”
나는 담담히 수긍하는 인성이와 성진이, 조금 어색한 얼굴로 수긍하는 시하와 예슬이를 돌아보았다. 먼저 대답한 건 인성이와 성진이였다.
“그냥. 보다 보니까 알겠더라고. 그림자가 전해 준 것도 있고…….”
“감이랑 눈치.”
눈치껏 알아챘다 이건가. 그럼 예슬이와 시하는?
“저흰 초등학생 때 우연히…….”
“친구들이랑 놀러 갔다가 두 사람이 데이트하는 걸 봤어. 깜짝 놀랐고, 동성끼리 사귀는 걸 본 건 처음이라 당황했는데.”
“아르델이 비밀로 하자고 했어요. 그래서 그냥 비밀로 했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하길 잘했어요.”
민 선생님이랑 준휘 선생님, 밝히길 싫어한 것치고는 생각보다 조심성 없이 다녔었구나. 아니면 인성이랑 성진이가 눈치가 빠른 건가. 하지만 시하에, 예슬이, 아르델도 알고 있었을 줄이야.
“하여간 은하 넌 알고 있었구나. 알고, 그 사실을 민이네랑 나눴어. 언제부터 알았어?”
“그거, 중요한가요?”
“응. 얼마나 친했는지 알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잖아. 난 겉으로 보이는 가벼운 모습이 아니라 좀 더 깊게, 그 녀석들과 안까지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친한 사람 입장에서, 그 녀석들이 어떻게 지냈는지 알고 싶은 거거든.”
“당신이랑 마주치기 전부터는, 알고 있었어요.”
“다행이다. 찾아온 보람이 있어.”
생글 웃던 눈동자가 다시 차가운 빛을 띤다.
“혹시 이건 알아? 두 사람이 자신들의 관계를 숨겼던 이유.”
“사람들의 눈을 신경 써서잖아요?”
“아하하. 그야 그렇지만, 알잖아? 민 그 녀석이 사람 눈을 신경 쓰는 놈이야? 아니잖아?”
그건 그렇긴 하지만…….
나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아까부터 이 남자, 기색이 이상하다.
“있었거든. 친한 사람 중에, 그게 이상하다며 매도한 사람이. ─라울 말이야.”
백한 선생님? 라울은 백한 선생님의 본명이다.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내가 들어 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그 사실에 주춤하기 전에 한재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랑 민 녀석이 지내던 곳에선 동성애가 하등 이상할 것도 없었어. 난 그땐 이미 민이랑 사이가 멀어진 상태라 자세히는 못 들었는데, 하여간 민은 거리낌 없이 믿던 사람한테 휘야랑 사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던 모양이지. 그랬더니 대번에 헤어지라고 대답했다는 거야. 정신 차리라고. 그건 ‘이상하다’고.”
“잠깐…….”
“그랬더니 민아 누님이 격노해 가지고는, 라울이랑 대판 싸웠지. 네가 뭔데 내 동생들을 그딴 잣대로 판단하느냐고. 그러다가 완전히 실망해서는, 라울한테 등을 돌렸다는 거 있지?”
“…….”
“그 이후부터 숨기고 다니게 된 거야. 몰랐어, 이거?”
……몰랐다. 옆에서 인하도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맘에 걸리는 건 있다.
‘옛날엔 오히려 누님이 백한 형을 따라다녔어. 그게 언제부터 저렇게 역전된 건지…….’
그런 일이 있었던 건가. 그리고 내가 그 이야기를 듣지 못했던 이유도 알겠다. 그건 그들에게 있어 ‘트라우마’였을 거다. 적어도 일부러 꺼내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었겠지. 그걸 헤집어 가며 꺼낼 만한 상황도 없었다.
나는 이내 불쾌해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네, 몰랐어요. 꼭 알아야 할 필요도 없었고요. 그런데, 뭐 하자는 건가요?”
“…응?”
“떠보듯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모르겠는데요. 조심스럽게 꺼낸다면 모를까, 웃으면서 꺼낼 이야기는 아니지요.”
“…….”
“마치 절, 혹은 저흴 시험이라도 해 보고 싶은 것 같네요. 불만, 화풀이, 그것도 아니면, 질투인가요?”
한재일의 감정이 정곡에라도 찔린 듯 일그러졌다. 악의에 가까웠던 감정이 흐트러진다. 악의 한켠에 짙은 걱정과 불안이 잠재하고 있다.
“듣더라도 백한 선생님한테 듣고 싶은 이야기였어요.”
“…….”
“뭘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말할 수 있어요. 민 선생님과 준휘 선생님은, 백한 선생님과 무척 친했어요.”
“…친했어?”
한재일이 드물게도 조심스럽게 물었다. 친했다. 많이 친했지.
“형제같이 친했어요. 장난도 치고, 같이 작당도 하고요…. 민아 선생님과 백한 선생님도, 많이 친했어요. 백한 선생님은…….”
말을 잇는 동안 목이 멨다. 나는 겨우 감정을 다스렸다.
“백한 선생님이 민아 선생님을 많이 쫓아다녔죠.”
생각에 잠긴 눈길로 조심스럽게, 혹은 불만스럽게 한재일을 노려보던 인하도 말문을 열었다.
“맞아. 장난 걸다가 많이 혼났었잖아. 백한 선생님, 민아 선생님 일이라면 아주 바보가 됐었지. 얻어맞다가도 눈만 마주치면 헤실 웃고, 처음 민아 선생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꺼냈을 땐 진지하게 안부를 물어봤어. 평소 담백하던 사람이 끈질기게 꼬치꼬치 캐물어서 놀랐다니까? 생일날에는 좋아하는 꽃부터 시작해서 새로 개발한 무기까지 대량으로 갖다 바쳐서 걸리적거린다고 혼나고…….”
소영이가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이 사실도 몰랐었나 보다.
“어? 그분 민아 씨를 좋아했었어?”
“응. 그것도 아주 많이.”
맞다, 그랬다. 스승님은…….
인하는 시를 읊듯이 천천히 추억을 더듬었다.
“민 선생님과 백한 선생님은 그 반대였지. 위험한 물건 부탁했다가 백한 선생님한테 타박받고, 준휘 선생님한테도 혼나고, 민아 선생님한테 싹싹 빌고…….”
인하의 목소리가 잔잔히 흩어졌다. 흔들리는 눈으로 이야기를 듣던 한재일이 허리를 조금 뒤로 젖히며 하늘을 향해 숨을 내뱉었다.
“하아─. 그랬단 말이지. 그럼 역시 질투야. 역시 그 사람은 마음에 안 들어. 난 멍청하게 놓쳤던 걸 그 사람은 붙잡았구나.”
사과하지 않았더라면, 지난 일이 된 게 아니었더라면 그들이 그렇게 다시 허물없이 친하게 지냈을 리 없다. 적어도 내가 아는 백한 선생님은 민 선생님과 준휘 선생님의 사이를 알고 있었고, 그 사이를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불쾌하게 말해서 미안. 그래도 난, 확인하고 싶었어.”
“그러니까, 뭘요?”
“너한테 그들은 많이 소중해?”
대답을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네.”
“얼마나?”
“그건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네요……. 같이한 시간만큼 소중하죠. 8살 때 처음 만나 잊지 못하는 지금까지의 모든 시간을 합해서…….”
8살 때부터 18살 때까지, 10년 동안 함께했다. 우리를 가르치고, 때로는 구해 주고, 우리의 성장을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친구들만큼이나 오래 함께한 사람들이다. 그만큼 소중했다. 인생의 일부였고, 내 세상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것을 앗아 간 트라베리아를 결코 용서할 수 없다.
점점 흐려지는 목소리에 한재일이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하하.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네가 날 알고 있는 시점에서.”
“…….”
“오래전에 이미 그런 말을 했던 시점에서.”
‘그런 말’. 그건 아마 사건이 일어났던 겨울 내가 그의 뒷모습을 향해 했던 말이겠지.
“저기, 들려줘. 그 녀석들은 어땠어? 어떻게 지냈어?”
한재일은 비로소 추억을 들췄다. 그제야 나는 마음 놓고 과거의 기억을 캐냈다.
우리는 걸으며, 혹은 하늘을 날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평범한 이야기를 했다. 준휘 선생님이 컵케이크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던 것, 두 사람이 데이트하면서 우리에게 사 준 선물, 민아 선생님이 백한 선생님께 받은 액세서리를 몰래 했다가 내가 오자마자 부리나케 뺐던 것, 정말 하나같이 사소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들은 행복했고, 평범했다.
민아 선생님과 각별한 관계였던 건 여기에선 나뿐이지만, 민 선생님, 준휘 선생님과 각별한 관계였던 건 나뿐만이 아니다. 인성이는 마법 특성 탓에 준휘 선생님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 인하는 두 사람이 사귄다는 건 눈치채지 못했지만 나 못지않게 두 사람과 친했다.
예슬이와 시하도 나만큼 대현에 오래 있었고 소문에 밝았던 만큼 두 사람에 대해서도 기억하는 게 많았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밤이 깊었다. 내일 활동을 위해서도 슬슬 잠이 들 무렵이다. 그리고 내일은 반드시 이 남자를 떼어 놔야지. 캘리를 불러 떠맡길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을 텐데 그럴 수도 없다.
이야기에 집중하던 인하가 문득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고요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 기울인다.
“왜 그래?”
“아니……아닌가?”
성진이 소영이와 얼굴을 마주한 인하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무언가 싶어 고개를 돌리는 순간 한재일이 내게 손을 뻗었다.
“결심했어.”
잡으려는 건 내……손? 한재일의 감정이 짙게 일렁였다. 손을 뿌리칠 기세를 보이자 한재일이 피식 웃었다.
“인사야, 인사.”
“…….”
거짓말은 아니다. 그러나 뭘까? 이 꺼림칙한 느낌은. 한재일은 악수하듯이 내 손을 잡더니 자세를 바꿨다. 손바닥을 돌려 내 손을 제 손바닥 위에 올리고 무릎을 꿇었다.
“부탁이 있어.”
“…네?”
이상한 자세에 내가 당황하는 사이 한재일이 말을 밀어붙였다.
“날 부하로 받아 줘.”
“……응?”
“어?”
“뭐?”
나에 이어 주위에서도 의문과 당황이 담긴 반응이 터졌다.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한재일의 행동을 지켜봤다.
바로 손을 뿌리치지 않고 그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려 한 이유는 바로 ‘꿈’ 때문이었다. 몇 달 전, 한국에 들어가기 전에 예지몽을 꿨다. 머릿속에 이어지던 장면이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은하 손….”
경계하며 날을 세우는 소영이를 손을 들어 말렸다. 나는 한재일에게 붙잡힌 손을 애써 떨치지 않고 물었다.
“무슨 뜻이죠?”
한재일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아주 익숙한 감정이 비쳤다.
한재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내 한계를 알아. 분하고 좆같지만 내 힘은 여기까지야. 아무리 노력하고 노력해도 초월자에게는 닿을 수 없어.”
재능 있는 사람도 보통 한계는 거기까지다. 이런 시대가 아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살아가는 데 충분했을 것이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겠지만, 믿지 않겠지만, 나한텐 그 녀석들이 제일 소중했어. 그렇게 생각하는 건 나 혼자더라도 민을 가족처럼 생각했고, 휘를 사랑했고, 민아 누님을 정말, 누나처럼 생각했어…….”
이기적이고 어리석음에 가득 찬 후회가 말을 자아낸다.
“내 세계였어! 세상에서 제일 소중했어……. 그런데 세상이란 건 정말 불합리해서, 내 힘으론 어떻게 해도 복수할 수 없어.”
“…….”
“난 욕심이 많아.”
쉴 틈도 없이 목소리가 이어졌다. 감정에 북받친 것처럼.
“트라베리아를 막으려 들 놈은 세계 곳곳에 널려 있겠지. 하지만 그 심장에 칼날을 꽂는 게 ‘아무나’인 건 싫어. 너였으면 해.”
“…….”
“나와 똑같거나 그 이상으로 그 녀석들이 소중하고, 그 녀석들에게 소중했던 너였으면 해.”
그는 그렇게 광기에 젖어 갔다.
“증오에 미쳐 있고, 복수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고, 그것 때문에 시야가 좁아져도, 그렇기 때문에 고집스럽게 관철하지. 그래서 네가 좋아. 내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네 옆에서 네가 복수를 이루는 모습을 보고 싶어. 네가 그 녀석들에게 칼날을 박아 넣는 모습이, 나는, 보고 싶어 미치겠어.”
내 손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한재일이 잡은 내 손을 좀 더 자신의 얼굴에 가까워지도록 끌어당겼다.
“그걸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거야. 내 목숨 전부를 당신에게 바치겠어. 내 모든 걸 줄게. 그러니 제발……나를 당신 밑에 있게 해 줘.”
나는 시리도록 차가운 눈으로 한재일을 내려다보았다.
이기적이고, 어리석고, 그런데도 미칠 정도로 이해가 되며,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혐오스럽다. 그럼에도 내가 한재일이 하는 행동을 가만히 내버려 둔 것은…….
“그런 거였군.”
차가운 하늘 아래 낯선, 그러나 귀에 익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야!”
“이 목소리는…….”
“…갑자기 어디에서 나타난 거지?”
동료들이 당황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하늘이 열리며 그 안에서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기척에 민감한 나도, 성진도, 예리도, 인성이도, 뛰어난 감을 지닌 인하도, 형일 아저씨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한재일의 입술이 내 손등에 닿기 전에 멈췄다. 그가 당황하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나는 기척을 전혀 눈치 못 챘음에도 생각보다는 태연하게 하늘에서 갑자기 나타난 두 사람, 캘리의 현 단장과 부단장을 올려다보았다.
캘리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던 건 그들이 트라베리아에게서 벗어날 때 썼던 알 수 없는 가호 때문이겠지. 눈치챈 지금도 마력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다, 단장…….”
한재일이 매섭게 눈을 치켜뜨는 에이온을 보며 눈을 떨었다. 나는 한재일에게 붙잡혔던 손을 빼내며 담담히 에이온을 올려다보았다.
몇 달 전, 한국에 들어가기 전에 예지몽을 꿨다.
꿈속에서 동료들과 한재일이 나왔다.
나는 난생처음 본 장소에 있었다. 몇 달 전까지는 분명 처음 본 장소였다. 그런데 캘리의 함선 안에 들어간 순간 눈치챘다.
아, 꿈속에서 본 장소다.
완벽히 같지는 않고 여기저기 다른 부분이 보였지만 틀림없었다. ‘같은’ 장소다. 그래서 그들과 헤어진 후에도 예감하고 있었다.
조만간 한재일, 혹은 캘리와 다시 만나겠구나.
에이온과 부단장이 하늘에서부터 걸어 내려왔다. 성진이 캘리를 보며 혀를 찼다.
“역시 너희였군.”
“넌 알고 있었어?”
“‘시선’이 느껴졌으니까. 느껴 본 적 있는 시선이었으니 금방 알았어.”
“잘은 모르겠지만 대단하군. 그런 방법으로 느끼다니. 그래도 우리 위치까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을 테지.”
“…….”
성진이 내가 있는 방향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한재일의 목덜미를 붙잡고 캘리의 앞에 들이밀었다.
“너희 골칫덩이는 이만 데려가라. 용무는 끝났으니.”
“그래, 끝난 모양이군. 멍청한 형제의 용무는.”
“다, 단장!”
“은하가 왜 가만히 들어 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인성이가 내 옆으로 나서며 세 사람에게 시린 눈빛을 보냈다.
“제 입장에서 보면 고민할 가치도 느껴지지 않는 제안이군요.”
“…….”
“필요 없어요, 저희 복수에는.”
인성이가 냉정하게 잘랐다. 초조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한재일이 허탈하게 웃으며 흐트러졌다.
…그 말이 맞다. 하지만 내 예지몽이 지극히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하면,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한재일이, 혹은 캘리가 가지고 있는 카드가 더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