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365
“무너진다!”
행성이 조각조각 부서지고, 우주가 조각조각 부서지며 죽음의 나무가 줄기를 뻗어 그 사이를 감싼다. 그리고…….
에펠로나의 빛이 그들을 감싼 그 순간, 세계가 닫혔다.
그대로 끝인 줄로만 알았다.
……신.
……러……차려…….
「제발 모두 일어나 주세요!」
높은 목소리가 그들을 일깨웠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메인 조작실에 있던 캘리의 대장들이었다. 에이온은 퍼뜩 앞을 보았다.
보드라운 금색 날개가 코를 간지럽혔다. 주위는 온통 눈부신 빛으로 가득했다. 공룡의 몸뚱어리에 깃털 날개를 가진 그자는 바로 세 태양의 화신, 에펠로나였다.
“너는……에펠로나?”
에펠로나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역시 에이온 님은 바로 알아봐 주시는군요!」
그래, 죽음의 순간, 그들을 지킨 것은 바로 에펠로나였다. 에펠로나계를 비롯한 은하의 별과 암흑 물질, 행성, 우주의 요소요소들은 트라베리아의 의지를 따랐다. 그러나 에펠로나만은 그 의지를 따르지 않았다.
에펠로나에게 ‘의식’이 생겼던 게 언제였는지는 모른다. 다만 에펠로나는 자신의 행성계에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을 좋아했고 사랑스럽게 여겼다. 그들이 죽어야 하는 것을 납득하지 못했다.
때문에 그의 세계가 멸망하려는 순간, 그의 의식은 심저에서 물 위로 부상했다. 그들의 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의지대로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정령이 되었다.
캘리번에 있던 모두가 무사하진 못했다. 캘리번의 일부는 박살 났고, 그 박살 난 장소에 있던 자는 멸망에 갇혀 알 수 없는 세계의 일부로 재구성되었다.
세계, 그래, 세계다. 바깥은 혼돈으로 가득했다. 죽음의 나무와 꼭 닮은 연둣빛 속에 거센 파도와 떨어지는 운석, 몰아치는 폭풍, 날카로운 칼날,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위험이 공존하고 있었다.
온화한 것은 오직 그들이 있는 자리에 깔린 금색 길뿐이었다.
에펠로나는 현재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들은 죽음의 나무가 일으킨 새로운 힘에, 정확히는 ‘나무 안에’ 갇혔다. 그러나 그 힘이 완성되기 전 에펠로나가 어떻게든 ‘길’을 만들어 그들을 보호했다. 이제부터 그들은 이 세계에서 탈출해야 한다. 길을 만들며, 때로는 저 혼돈에 뛰어들어.
긴긴 고행의 시작이었다.
무지막지한 혼돈뿐만이 아니다. 누가 죽음의 나무 아니랄까 봐, 내부에도 마물이 있었다. 정확히는 그들을 불순물로 여기는 힘이 그들을 힘으로 녹이기 위해 구체화된 것이라고 해야 할까.
로지를 지키기 위한 싸움보다 더 긴 싸움이 펼쳐졌다. 아니, 그것을 싸움이라 해야 할까? 그건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주였다.
캘리번 안의 지구 시계는 지구의 시간을 가리켰으나 그것이 진실인지 알 수 없었다. 체감 시간으로 1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100년이 지났다.
해가 없으니 낮이고 밤이고 알 리가 없다. 하루가 언제 지난 건지도 당연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캘리번 안에 기록된 시간만으로 따지면 그들은 500년은 족히 넘는 시간을 마수정 안에서 헤맸다. 다만 체감 시간이 그럴 뿐이지, 내부에선 나이를 먹지 않는지 늙지는 않았다.
마수정 안에서 나오기까지 500년 내지 600년, 길을 가리키는 지표는 오직 에펠로나뿐. 그 안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트라베리아는 왜 이런 짓을 했을까. 무슨 짓을 벌일 속셈일까.
내부의 힘은 행성을 뒤덮었던 죽음보다 몇십 몇천 배는 강했다. 그러나 안에 있는 힘은 결국 에펠로나계, 더 나아가서는 은하의 힘. 조금이나마 에펠로나의 조율을 들었다.
도망치는 것이 그들에게는 사투였다. 죽음의 위기를 수십 수백 번 넘는 동안 생존자는 점점 줄어만 갔다. 다행히 그들은 뛰어난 마법사라 먹을 걸 만들 수 있는 데다, 식량이 그리 많이 필요하지도 않다. 하지만……마물이나 혼돈 때문이 아니라도 죽는 자는 계속 생겨났다. 그들은 모두 버티지 못하고 세계에 녹아 버렸다.
에펠로나의 힘도 점점 약해져만 갔다. 적의 힘은 혼돈과 그 안에 깃든 힘의 영향을 받아 점점 더 강해졌으며, 그럴수록 캘리는 초조해져 갔다.
에펠로나를 따라 겨우겨우 알 수 없는 세계에서 빠져나왔을 때 그들이 본 것은 은하가 있던 곳에 자리를 잡은 거대한 형상이었다.
문, 봉인, 모든 것을 담은 무언가. 정확히 딱 집어 말하기 힘들었다. 거대한 원 안에 알 수 없는 힘이 들끓는다. 그 위로 커다란 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그 주위를 기둥과 장식 같은 형상이 감싸며, 기둥 앞을 문 같은 막이 덮고 있다.
그것을 보고 일행은 깨달았다. 에펠로나가 없었다면 그들은 저항하지 못하고 저것에 녹아 사라졌으리라는 사실을.
저것의 힘 자체는 에펠로나보다 수만 수억 배 강했다. 그러나 에펠로나는 본래 저 안에 속한 중심 세계의 지배자였다. 저것은 에펠로나계를 먹고 자라났고, 에펠로나는 그 행성계를 지배했었다. 에펠로나가 저항할 수 있었던 건 그래서였다. 본래 자신의 힘이었던 것이기에.
에펠로나는 세 태양 에펠로나의 화신. 은하가 먹히는 그 순간 에펠로나는 정령이 되어 제 본체 역시 공룡의 몸뚱어리 안에 품었다. 그리하여 에펠로나와 캘리, 혹은 캘리의 지인, 로지 행성의 몇몇 주민들은 저 무시무시한 무언가에서 빠져나왔다.
그렇게 살아남은 생존자는 고작 47명이었다.
캘리의 이야기는 시작부터 끝까지 참혹했다. 동시에 트라베리아가 할 만한 짓이었다. 그래도 행성계 하나를 통째로 삼킬 줄은.
“네가 물었지. 얼마나 트라베리아를 쓰러뜨리고 싶냐고. 우리 심정은 저 녀석과 다름이 없어. 존경하고 따르던 아버지가, 단장이 죽었다. 처음에 지키려 했던 지인은 전부 죽었고, 그 고향마저 사라졌다. 도중에 끼어든 싸움이다. 처음에 도망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위험할 걸 알면서도,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다. 그에 따른 희생은 우리 책임일지도 모르지. 하지만……그렇다면 트라베리아가 한 짓은 정당한가?”
“…….”
“수많은 동료가 그놈들 손에 죽었다. 남은 동료들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우리는 그 녀석들을, 없애 버리고 싶다. 그러나 네 말이 맞다. 우리는 약하다. 우리 힘으로는 트라베리아를 이길 수 없어. 그렇다면 대신 이겨 줄 놈을 찾아야지. 트라베리아를 꿰뚫을 칼날이 될 수 있는 자를. 우리처럼 그 녀석들을 증오하며, 그 녀석들을 죽이고자 하는 일념으로 똘똘 뭉친 강자를.”
애써 담담한 척 이어 가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흔들렸다.
나는 가만히 에이온을 보았다. 격정으로 떨리는 에이온의 눈동자를.
“우주를 돌며 트라베리아가 한 짓을 살피고, 강한 힘을 지닌 우주의 잔해를 모아 에펠로나를 회복시킨 후, 우리의 힘이 될 만한 강한 힘을 모아 지구로 왔다. 그날의 일을 끝맺기 위해서. 그렇게 지구에서 벌어진 일을 알았고, 그렇게……우리가 죽어도 그놈들을 이길 수 없음을 알았다.”
알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오랜 시간 지구에 없었다 한들, 그 힘만은.
“네 말대로 연맹과 협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달리 방도가 없었다면 그렇게 했겠지. 망설였던 것은 연맹이 트라베리아를 쓰러뜨리기보다는 사람을 지키는 것에 급급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금방 알았다. 커븐 로드와 싸우면 주위에 피해가 너무 많이 간다. 트라베리아에는 S랭크 최정상급 전력이 13명이나 있고, 나라의 위치조차 알려져 있지 않으나, 연맹에는 S랭크 최정상급 전력이 5명밖에 되지 않는다. 트라베리아에 한참 뒤지고 있지. 그런 이상 정면 대결은 피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일대일 정면 대결이라면. 그렇게 상황을 확인하다 너희를 만났다.”
나를 똑바로 응시하는 에이온의 눈동자에서 온갖 감정이 흘러넘쳤다. 분노, 슬픔, 괴로움, 고통, 증오, 그것을 꾹꾹 누른 열기.
“네 힘을 봤을 때, 소름이 끼쳤다. 증오에 넘치는 그 눈으로 결코 이기지 못할 자를 눈앞에 두고 살아남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하며, 진화하지. 다음 순간에는 그들의 목을 노리기 위해서. 그 모습을 보았을 때 직감했다. 너는 연맹과 다르다. 네가 노리는 건 오로지 적의, 분수도 모르고 세계의 꼭대기에 있는 그놈들의 목뿐. 너라면, 너희라면 그놈들을 죽일 수 있다. 그렇게 되고야 말 것이다. 그때가 더 빨리 오기를 바란다.”
에이온의 목소리가 격양되었다. 그가 내 앞으로 다시 다가왔다.
“아까 말하지 못했던 게 한 가지 더 있다. 만약 아버지가 남긴 힘이 강인하와 잘 맞는다면, 강인하는 지금보다 더 강해질 수 있을 거다. 아버지는 A랭크 마법사였으나 그가 남긴 것은 혈족마법이다. 혈족마법은 사용자의 역량에 따라 진화한다는 것쯤은 너희도 알고 있겠지.”
소영이가 인하를 흘끔거렸다.
“인하야, 관심 가?”
“글쎄.”
“너희가 이기기 위해 우리를 맘껏 이용해도 좋다.”
에이온이 내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우리도 그 녀석들의 죽음을 보기 위해 너희를 이용하마. 그걸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
“…….”
“기꺼이 너희의 디딤대가 되겠다. 다시 한번 부탁하마. 우리를 너희의 부하로 받아 다오.”
그래, 이 정도 각오는 되어야 생각해 볼 가치가 생기지 않겠나. 나는 시선을 돌려 에이온의 뒤에 서 있는 자들을 응시했다.
“다들 똑같은 생각인가요?”
“그래. 한재일이 나간 사이에 이미 이야기를 마쳤어.”
“말썽쟁이인 이 녀석은 그사이 혼자 뛰어나가 버렸지만 말이야.”
한재일의 옆에 있던 금발 남자가 한재일의 이마를 툭 쳤다.
“윽, 미안, 미안. 은하야, 제발 부탁이야. 옆에 있게 해 줘. 너밖에 없어.”
고백 같은 대사지만 그 안에는 피비린내 나는 살벌함이 담겨 있다.
나는 속으로 셈했다.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거점, 인하의 전력 증강, 그리고…….
‘새로운 전력, 이라.’
속으로 쉰 한숨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좋아요. 이제 이야기할 가치 정도는 있겠군요.”
“그렇다면…!”
“하지만 제 의견은 변함없어요. 당신들은 약해요. 저희는 앞으로도 강해지기 위해 어떤 위험이든 상관하지 않고 직접 뛰어들 거고, 거기에 군대는 필요 없어요. 트라베리아와 직접 싸울 수 있는, 적어도 휘하의 뱀을 직접 상대할 수 있는, 소수의 전력만 필요해요. 복수를 위해, 그 목을 물어뜯기 위해, 우리에게 누군가를 감쌀 여유 따위는 없어요.”
에이온은 다양한 감정을 억누른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한다.”
“최소 A랭크, 그 밑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어요. 목숨 걸고 하는 일이고, 시간은 턱없이 부족해요. 그게 제가 생각하는, 자기 목숨을 지킬 수 있는 최저한의 실력이에요.”
“받아들일 거야?”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조건’만 본다면.”
실제로 저들과 함께하는 것에는 상당한 어드밴티지가 있다. 트라베리아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확률, 그들에게 발견당하지 않고 도망칠 수 있는 확률.
민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는 내가 이런 사람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죽어도 캘리를 적대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복수를 위해서라면 우리는 그보다 작은 고집을 꺾어야만 한다. 그게 언젠가 함께했던 친구를 저버리는 일일지라도.
“그 말은 지금 함께하고 있는 동료를 저버리라는 거군.”
“진심으로 저희 밑에 들어올 생각이라면요. 못 하겠나요? 아, 딱히 비꼬는 건 아니에요. 싸우지 못할 동료는 안전한 곳에 두고 오세요. A랭크이면서, 트라베리아를 수색하고 싸우기 위해 필요한 최저한의 동료만 데려오세요. 숫자가 너무 많아도 안 돼요.”
그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 말에 따르겠다.”
옆에 있던 보라색 머리 여자도 수긍했다.
“무모한 싸움을 시키는 것보단 낫지 뭐. 자연과 소통할 수 있는 놈을 한 명 딸려 보내야겠네.”
“가호는 그대로 유지할 거다만, 그래도 괜찮나?”
“소속마법은 연결된 자가 많을수록 강해진다면서요? 상관없어요.”
나는 숨을 한 번 골랐다.
“그럼 팀에 참가할 멤버를 추리는 게 끝나면 다시 보도록 하죠.”
나는 에이온에게 통신기를 던졌다. 언제든 우리와 연결할 수 있는 직통 통신기다. 한재일이 당황하며 물었다.
“나가려는 거야?”
“팀을 추리려면 못해도 며칠은 걸리지 않나요? 저흰 원래 할 일이 있어서 나온 거였어요. 그렇다면 그동안 할 일을 해야죠.”
“아니, 며칠씩이나 걸리지 않는다.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
“……?”
에이온이 바로 부정했다.
“네가 말한 것은 우리도 생각해 본 적 있는 것이다. 그 경우 누가 직접 싸울지는 이미 정해 두었다. 전투가 아니라 일을 보조할 서포트 요원을 포함해도 20명 정도일 거다.”
“20명이라.”
나쁘지 않은 숫자다.
“그럼 1시간, 얌전히 기다리도록 할까요.”
에이온은 고개를 끄덕인 후, 아까처럼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럼 잠시 후 정식으로 인사하겠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휴게소로 안내한 후 떠나갔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소영이가 내 곁에 다가서며 물었다.
“정말로 받아들일 거야?”
“나쁘지 않잖아? 우리랑 같은 걸 보고 있다면.”
“하긴.”
복수만을 위한 팀. 아직 우리에겐 조금이라도 더 힘이 필요하다.
“사실 이렇게 되지 않을까 예상은 했어.”
나는 한숨을 쉬며 허공을 보았다. 의아해하던 인성이가 잠시 후 숨을 삼켰다.
“설마…….”
“그래, 꿈을 꿨거든.”
별로 원하는 꿈은 아니었기에 말하지 않았다. 동료들은 놀라면서도 곧 납득했다.
“언제?”
“한국에 가기 전에. 꿈에 한재일이 나왔어. 내 머리카락을 그러쥐고 ‘리더’라고 부르더라고. 이 함선 안을 거닐면서.”
“그것참.”
소영이가 혀를 찼다. 우리는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한동안 침묵에 잠겼다.
정확히 한 시간 후, 우리는 다시 한번 모였다. 눈으로 앞에 서 있는 면면을 훑었다. 정확히 17명이다. 가장 강한 17명은 아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래, 그들 중에서 강자만을 모아 봤자 어차피 우리에게 미치는 건 한두 명밖에 안 된다. 부단장이라는 자와 윌터라는 남자뿐이다. 그렇다면 몇 명 정도는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 할애하는 게 더 낫다.
“새롭게 인사하겠습니다. 저는 에이온 다우즈, 포레이아 캘리번의 단장입니다.”
“테온 랄프, 캘리의 부단장입니다.”
“저희랑은 아직 인사한 적이 없죠?”
보라색 머리 여자가 활기차게 앞으로 나섰다.
“저는 비앙카 데르테르, 1소대 돌격 부대 대장입니다. 소대 이름 그대로 돌격이 특기죠.”
“마찬가지로 1소대 소속, 리카티입니다. 무기를 사용한 근접 전투가 특기입니다.”
리카티는 성별 구분이 모호한 얼굴에 귀가 길쭉하고 키가 상당히 컸다. 2m를 넘지 않을까? 로지인이로군.
소개는 소대순으로 이어졌다. 다음으로 2소대. 키가 크고 중후한 분위기의 남자와, 키에 비해 얼굴이 앳된 금발 소년, 검은색 곱슬머리 여자, 보통 키에 어두운 분위기의 남자가 차례로 나섰다.
“2소대 개발 부대 대장 윌터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음……대장?”
휙, 소영이가 나섰다.
“저흰 마음대로 리더라고 부르고 있어요.”
“어, 그럼 리더. 함선이나 화력 무기에 대해서라면 뭐든지 맡겨도 됩니다.”
“2소대 소속 비키예요! 로지인이고요! 자연의 기운을 이용하는 아이템을 만들어요. 잘 부탁드려요!”
“2소대 소속 오를레아 멜리브입니다. 전투복을 담당하고 있어요. 잘 부탁드려요, 리더.”
“얀 재프입니다. 마법석을 이용한 세공 아이템을 전담하고 있습니다.”
3소대에서는 몇 번 얼굴을 본 의사와 잘 모르는 예쁘장한 분위기의 남자, 적당한 근육질의 남자까지 세 명이었다.
“저랑은 이미 인사했죠? 레비 루가드입니다. 아시다시피 의사예요. 노래로 치료하니 잘 부탁드려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동료들의 표정이 구겨졌다.
“샌시 도미니트입니다. 마찬가지로 의사고, 레비 씨를 보좌하고 있습니다.”
“3소대 서포트 부대 부대장이자 취사반장을 맡고 있는 케일 로데인입니다. 잘해 보자고요, 리더!”
4소대의 멤버 두 사람은 대조적이었다. 싱글벙글 웃는 한재일과 키가 2m를 넘는 로지인 남자.
“나에 대해선 잘 알지? 4소대 전투 부대 부대장을 겸임하고 있어. 앞으로 잘 부탁해, 리더!”
“예의를 지키시지요, 재일 씨. 마찬가지로 4소대 소속 라브디아입니다. 소신을 다해 협력하겠습니다.”
5소대, 침착한 분위기를 지닌 분홍 머리 남자와 거친 갈색 머리를 지닌 중년 남자, 엷은 긴 갈색 머리카락에 조금 우울한 분위기의 남자가 나섰다.
“난 5소대 특수 기술 부대 대장 코린. 상상 속의 많은 걸 소환할 수 있어. 잘 부탁드려요.”
“스벤이다. 마법을 디스펠 하는 게 특기지.”
“부대장 알빈 갈란드……. 잘 부탁드려요…….”
6소대가 마지막인 모양이었다. 6소대에서 나온 멤버는 한 명이었다. 긴 흑색 머리카락에 수려한 외모를 지닌 남자가 인사했다.
“6소대 부대장 리앙입니다. 정보 수집과 잠입 전문입니다. 함께하겠습니다, 리더.”
나는 처음으로 본 얼굴과 이름, 마력 패턴을 외우도록 노력했다. 그러니까…….
“서포트 위주로 짠 모양이네요.”
에이온이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그게 더 좋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맞아요. 도구나 정보엔 항상 곤란해하고 있으니까요.”
“다른 동료들은 일주일 안에 안전한 장소에 정착할 예정입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나는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개를 받았으니 이쪽도 소개를 하는 게 도리겠지요.”
맨 먼저 나선 것은 당연하지만 리더인 나였다.
“새벽별무리 리더인 유은하입니다. 잠입 및 전투 서포트, 아이템 제작을 맡고 있습니다.”
그러자 에이온이 조금 의아해했다.
“잠입에 서포트, 아이템 제작……일이 많은 건 그렇다 치고 리더가 그걸 다 합니까?”
“저만큼 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거든요.”
“아이템 제작은 전문직입니다만.”
“네. 원래는 장인이었어요. 지금 귀에 걸고 있는 환각 아이템, 허리에 걸려 있는 가면, 전투복, 증폭기, 마법석까지……전부 제가 만든 물건이고요.”
캘리가 술렁이자 소영이가 뒤에서 가슴을 부여잡았다.
“아, 찔린다, 찔려.”
형일 아저씨도 소곤거렸다.
“우리 리더는 너무 다재다능해서.”
“서포트는요?”
“영역을 만들고 굳혀요.”
“……그렇습니까.”
그 후엔 인하부터 차례대로 앞으로 나섰다.
“강인하, 전투원입니다. 역할을 따지자면 1소대와 비슷하겠군요.”
“이소영이야. 인하와 마찬가지로 1소대와 비슷한 전투원이야!”
“이성진. 전투원이면서 감시, 정보 수사, 날 무기 제작, 여러 가지 맡고 있지.”
“최인성입니다. 정보 조사와 정리 및 잠입, 무기 제작을 맡고 있어요.”
“흠.”
캘리의 몇 사람이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인성이 역시 나만큼이나 하는 일이 많다.
“김미영이다. 전투원을 맡고 있지. 포지션으로 따지면 4소대가 아닐까 싶군.”
“강예슬이에요. 은하 님을 보조하고 있어요. 잠입, 아이템 제작, 서포트도요.”
“윤시하입니다. 전투원이고 정보 조사 및 정리를 보조하고 있습니다.”
“정예리라고 해요. 새벽별무리 전속 의사예요!”
“김형일, 원거리 전문 전투원이야.”
에이온은 우리를 주르륵 훑어보더니 말했다.
“서포트 위주로 멤버를 정하길 잘한 것 같군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인사는 이만하면 됐을까요. 자, 그럼 정리하자면.”
덤덤히 말하던 나는 눈빛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동시에 주위 분위기도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복수가 끝날 때까지, 저희 새벽별무리와 당신들 포레이아 캘리번은 협력 관계입니다.”
에이온이 주먹을 꽉 쥐었다.
“바라는 바입니다.”
뒤에서 인하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에 만날 땐 영락없이 적대 관계일 줄 알았는데 말이죠.”
“이렇게 됐으니 잘 부탁한다.”
“일단은……두고 보도록 하죠.”
“하하, 조금 봐줘.”
“…….”
인하가 한재일을 예리하게 노려보았다. 한재일이 인하의 서슬 퍼런 시선에 움찔했다. 나는 다시금 에이온을 보았다.
“말은 편하게 해도 좋아요. 동료라고 해도 협력 관계에 가까우니까요.”
“그럴 순 없습니다. 상하 관계는 확실히 하는 게 좋습니다.”
“그런가요…. 편할 대로 하세요.”
나는 다시 한번 캘리의 단원들과 눈을 맞췄다.
“저희 최종 목표는 트라베리아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커븐 로드를 쓰러뜨리고, 현재 활동하고 있는 트라베리아의 마법사를 쓰러뜨려,”
캘리의 단원들이 말없이 나를 보았다. 이번에는 눈동자에 굳은 의지가 흘러넘쳤다.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트라베리아에 사로잡혀 버린 한국을 해방하고, 무너지는 세계를 멈춘다.”
“…….”
“그리고 저는,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 벨라 트리저를 죽여 버릴 겁니다. 용서할 수 없어……. 소중한 사람들의 목숨을 장난감처럼 취급한 그 여자는, 반드시, 죽여 버릴 거야…….”
으드득, 그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저도 모르게 증오에 잠식되고 만다. 이제 조금 남았다. 정말로, 조금……. 여기까지 왔어!
나는 품 안의 반지를 꽉 쥐며 눈을 음험하게 빛냈다. 그러나 아무도 내 살기에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비슷한 감정을 꾹꾹 담은 눈으로 나를 직시했다.
“그럼 리더, 트라베리아를 쓰러뜨리기 위해 우리가 처음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머릿속에 퍼뜩 떠오른 것은 한국이었다. 이사장님, 유정 언니, 인호 오빠. 아직 한국은 겉으론 아무런 변화가 없다. 연맹이 우리가 준 정보에 따라 잠입조를 꾸린다고 했는데, 그건 잘되고 있을지.
아직 변하지 않은 한국이 두렵다. 하지만 당장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없음을 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유펠르시아의 봉인을…….”
나는 굳은 눈으로 앞을 보았다. 비로소 지금 해야 할 일이 머리를 채웠다.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처연한 여자와, 금색 머리카락을 지닌 처연한 남자, 그리고…….
“풀 겁니다.”
우리의 친구 아르델.
정말로,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이다.
##18. 새벽의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