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366
합류하고 하루, 캘리의 나머지 동료들은 정착할 장소를 찾고 있으며, 정착하더라도 얌전히 지낼 생각은 없어 보인다. 캘리와 연결된 소형선을 하나 이끌고 나가 따로 트라베리아의 정보를 살피며 우리를 도울 거란다.
우리는 전력을 확인하고 정비했다. 시작은 함선을 살펴보는 것부터였다. 에펠로나와 에이온의 안내를 따라 함선의 구조와 함선이 내장하고 있는 무기, 동력을 확인했다. 한재일도 부득불 안내하겠다며 끼어들었다.
캘리번의 동력은 세 개이면서 다섯 개였다. 하나는 캘리번의 본래 동력이며, 하나는 시어볼드가 남긴 혈족마법, 세 개는 에펠로나다. 세 개의 태양을 동력으로 쓰고 있는 셈이다.
세 개의 태양은 각기 다른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가호의 금색, 정화의 은백색, 소멸의 은청색.
“우리는 네가 아버지의 혈족마법에 동화했으면 한다.”
“저 근원에?”
“그래. 그렇게 하면 우리뿐만 아니라 이 캘리번 역시 새롭게 진화할 수 있다.”
인하가 생각에 잠긴 눈으로 시어볼드가 남긴 마법을 응시했다. 나는 캘리번의 마력을 확인하며 수긍했다.
“확실히. 에펠로나 씨의 가호는 숨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전면전이 되면……함선이 저희 힘을 못 견딜지도 모르겠네요.”
“아까부터 생각한 겁니다만.”
“……?”
“당신은 이제 저희 리더입니다. 에펠로나에게도, 저에게도, 존대를 쓸 필요는 없습니다.”
“아, 맞아 맞아.”
한재일이 에이온의 말에 수긍하며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만지려 했으나 인하가 신경질을 내며 쳐 냈다. 한재일이 킥킥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거 은근히 신경 쓰였어.”
별걸 다 신경 쓴다.
“그냥 편한 대로 해도 상관없지 않나요?”
“‘팀’이니만큼 상하 관계는 필요합니다.”
딱히 존대 여부로 상하 관계가 굳건해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 쓸게요.”
무엇보다 갑자기 말투를 바꾸라 해도 적응이 안 된다. 친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항상 존대였으니. 에이온이 한숨을 쉬었다. 그때 뽀르르 날아온 에펠로나가 인하의 옆에 앉았다.
「동화 말인데요, 인하 님이라면 저와도 동화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이니, 에펠로나?”
「네!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한 거지만 인하 님의 힘과 제 힘은 많이 닮았어요. 인하 님의 마법은 ‘빛’이라 하셨죠?」
“닮을 수밖에. 인하의 빛마법은 태양을 모방한 게 많잖아?”
「인하 님.」
에이온은 에펠로나의 이야기가 의외였는지 놀라워했으며, 인하의 기술을 알고 있는 우리는 수긍했다.
「저는 진짜 태양이에요. 마력은 인하 님보다 약할지 몰라도 본질적인 힘은 제가 더 많이 가지고 있어요. 저랑 계약하지 않겠어요? 저는 분명 인하 님께 도움이 될 거예요.」
“계약?”
“정령과 이름을 나누고 마법을 묶는 것을 ‘계약’이라고 한다. 아까 말한 동화도 계약의 일종이다.”
계약이라. 이건 또 생각 못 했다. 인하가 에펠로나와 눈을 맞췄다.
“강해질 수 있는 거라면, 좋아. 계약엔 뭐가 필요해? 시간은 얼마나 걸리고?”
으음. 에펠로나가 잠시 고민했다.
「동화까지 하려면 힘을 시험하고 동조해야 하니까 계약을 맺는 데만 하루, 동화하는 데는 이틀 정도 걸릴 거예요.」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지금 당장 하기엔 걸리는 게 많으니 마음의 준비를 한 다음에 하자.”
「알겠어요! 준비가 되면 제게 말씀해 주세요.」
“그래.”
정령과의 계약. 그것은 트라베리아가 일컫는 ‘진짜 마법’을 쓸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다. 인하가 이번엔 얼마나 강해질지 가늠을 못 하겠다.
에펠로나와 한재일, 에이온을 따라 캘리번을 쭉 둘러본 후, 나는 역시 캘리번에 한차례 진화가 필요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물건을 빠르게 강화할 수 있는 방법이라 하면 역시 ‘진화석’이겠지.
그런데 어느 것에게 진화석을 줘야 할까? 에펠로나? 시어볼드의 혈족마법? 아니, 아니다. 에펠로나는 동력이긴 하지만 캘리번과는 분리되어 있는 힘이다. 여기선 캘리번의 원래 동력에게 진화석을 주어야겠지. 그러지 않으면 진화한 에펠로나나 인하의 힘을 캘리번이 견디지 못할지도 모른다.
함선을 어느 정도 둘러본 뒤 우리는 각자의 역할에 따라 전력을 정비하기 위해 갈라졌다. 나는 2소대의 오를레아와 얀을 따라 아이템을 점검하러, 인성이는 2소대 대장인 윌터와 부대장 비키를 따라 화력 무기를 점검하러 갔다. 예슬이와 시하, 성진은 정보 조사 및 수색 부대인 6소대를 따라갔고, 예리는 서포트 부대인 3소대를, 인하, 소영이, 미영 할머니, 형일 아저씨 네 사람은 그 외의 부대에 속한 전투 마법사들을 죄다 끌고 훈련실로 향했다.
“우선은 실력 확인부터죠.”
소영이가 신이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은 굴리고 굴릴 테니까 그렇게들 아세요!”
“좋고말고! 너희처럼 강한 녀석들이랑 싸울 수 있으면 영광이지.”
이내 인하가 사나운 눈으로 한재일의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특히 당신, 오늘 각오해요.”
“와와, 나 아직 어제 맞은 데가 아프거든? 좀 살살 해 주라.”
인하는 캘리번과 팀을 맺자마자 우선 한재일한테 시원하게 주먹을 한 방 날렸다. 아무래도 한 방 먹이지 않으면 속이 풀리지 않는다면서. 인하가 한재일을 끌며 코웃음을 쳤다.
“안 맞고 싶음 리더한테 필요 이상으로 친근하게 다가서질 말든가.”
“에이, 친해지고 싶다는 표현……아얏, 아파라!”
“아프라고 하는 겁니다.”
“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인하 아가씨한텐 정면에서 덤비지 마. 인하 아가씨는 화력 조절을 잘 못해서 정면에서 덤비면 좀 아플지도 몰라.”
“누구 한 명 의사가 따라와야 하는 거 아니야?”
전투 마법사 일행은 소란스럽게 떠나갔다.
나는 오를레아와 얀, 더불어 그들과 마찬가지로 3소대에 속한 캘리의 단원들 앞에서 주요 전투복과 전투용 아이템을 탈탈 털어놓았다. 예비 전투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코트, 바지, 튼튼한 부츠를 차례대로 오를레아에게 건네고, 장비 아이템은 얀의 앞에 내려놓았다. 가면, 환각 귀걸이, 마력 보관용 귀걸이, 마법 증폭 팔찌, 변신용 마법석, 진화 보조석, 도주용 장막 아이템, 결계석과 마력 회복용 마법석 등 다양한 마법석. 오를레아와 얀이 내가 쏟아 낸 아이템 주위로 몰려드는 다른 단원들을 소란스럽다며 쫓아냈다. 살펴본 후 자신들이 자세히 설명해 주겠다며.
“와. 이게 새벽별무리의 무기?”
“세공된 것은 아니군요. 마법으로 직접 형태를 만든 겁니까?”
“네.”
“디자인 너무한다. 실용적이고 무난, 포인트라곤 하나도 없어. 어라, 이거 무슨 금속을 엮은 거예요?”
“생각보다 평범한 무기를 사용하는군요.”
“어디 보자.”
오를레아의 손에서 실이 뻗어져 나왔다. 얀의 주위로 마법진 같은 영역이 생겨난다. 두 사람이 동시에 경악했다.
“힉! 이게 뭐야! 이 옷 엄청나! 뭐야 이 방어력! 마법 감응력!”
“이 마력 수치는 뭐죠? 나머지는 그럭저럭 이름이 뜨는데, 큭, 이 두 개만 감정이 안 되는군요. 허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허가해요.”
“헉! 얘 뭐야? 살아 있는 것 같아. 성장한다니 이거 뭐야! 어? 진짜?”
“변신 아이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니, 그런. 진화 보조석. 마법사의 성장을 촉진…….”
두 사람은 번갈아 경악하며 나에게 질문했고, 나는 두 사람에게 아이템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어쩐지 피곤한 얼굴로 몸을 늘어뜨렸다.
“흐어어어……. 왜 전투에 집중해야 할 리더가 잠입에 아이템 제작에 서포터까지 맡고 있나 싶었더니……. 이건 맡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럼 설마 잠입도?”
“네. 잠입 실력도 제가 제일 뛰어나요. 실력에 맞춰서 조사하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상대한 조직들이 다 그때그때 우리가 전력으로 속여야 하는 상대들이라서, 제가 나서야 했죠.”
“그건 그렇고 이런 엄청난 하이테크 기술을 사용했으면서 디자인은 너~무 평범하네요.”
불만스러워하던 오를레아가 전투복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말을 걸었다.
“얘얘, 내가 예쁜 디자인 알려 줄게. 한 번 더 진화할래? 좋다고? 나야말로 고마워!”
“아무래도 여러분은 겉모습보다는 실용적인 것을 선호하는 모양이로군요. 저는 좀 더 전투에 효율적인 장비 디자인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생각보다 할 일이 없겠군요.”
“정말 그래요. 아까워요.”
“아뇨. 한동안은 할 일이 많을 거예요. 다른 분들 마법이랑 무기에 맞춰 마법석과 옷 소재, 진화석을 만들 테니 세공이랑 재단 부탁드려요.”
덤덤히 말하니 두 사람이 또 한 번 경악했다.
“네? 저희들 것까지 리더가 만드시게요?”
“팀이 된 이상 최저한의 조치는 해야지요. 이대로 트라베리아와 싸웠다간 죽어요. 그걸 조금이나마 방지하기 위해서도 이 정도는 제가 직접 해야죠. 캘리번에서 나가는 사람들 것도요.”
“네? 나가는 동료들 것도요?”
“저희 때문에 나가는 건데 안전을 위해 최대한의 조치는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분들용의 무기와 전투복, 더불어 도주용 아이템도 만들 생각이에요.”
“어어, 확실히 리더가 만든 아이템이라면 믿음직스럽지만, 그렇게까지 해 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고 안심되지만……하지만 리더, 그건 좀, 일이……. 리더, 혹시 일을 사서 하는 타입이라는 말 안 듣나요?”
“들어요.”
“역시.”
얀과 오를레아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오를레아가 말갛게 웃었다.
“그래도 좋네요. 리더가 우릴 신경 써 준다는 생각이 들어서. 열심히 할 테니 잘 부탁해요, 리더!”
“저 역시 다시 한번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우리는 한동안 전투복과 아이템에 사용할 소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현재 캘리의 마법사가 사용하는 장비와 아이템에 대해 기록한 후 예슬이와 시하, 성진이 있는 메인 작업실 겸 조종실로 향했다. 그곳은 생각보다 굉장히 평범했다. 메인 컴퓨터 주위로 병렬 컴퓨터가 돌아가고 있다.
“아, 은하 님!”
“이거 한번 모두를 불러 모아 정보 교환을 해야겠습니다. 유용한 정보가 많군요. 아,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리더. 캘리에서 본래 정보를 담당하던 리앙입니다.”
“네.”
이 사람들, 꼬박꼬박 ‘리더’라는 호칭을 붙인다. 조금 부담스럽지만 상황이 이러니 감수해야겠지.
“여기까진 무슨 일이신가요?”
“저도 잠입 전문이니까 확인 겸이요.”
“아, 들었습니다. 사람은 물론이고 마법마저 속이는 게 특기시라고요.”
“네.”
여태까지 어떤 잠입을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번엔 모두와 함께 훈련실로 향했다. 대부분의 마법사가 훈련실 안과 바깥에 몰려 있었다. 어쩐지 예리가 끙끙대며 유리 벽을 향해 마법을 쏟아붓고 있다.
“아! 마침 잘됐다! 은하 언니, 결계요! 제가 계속 복구시키고 있긴 한데 힘들어요!”
“…….”
인하와 소영이, 인성이, 형일 아저씨, 미영 할머니가 한 사람씩 잡아 대련을 하고 있다. 그러게. 저건, 여기의 힘으로는 버티지 못하겠군.
“『디멘션 에어리어』, 『책의 경계』, 『디멘션 박스』.”
결계로 세계를 단절시켰다. 보이지 않는 결계 위에 결계를 겹겹이 펼쳐 세계를 견고히 한다. 저 안은 내 영역, 내가 관리하는 한은 성진이라도 나서지 않는 한 부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활기차게 달려드는 일행을 보며 중얼거렸다.
“잘들 싸우네.”
이내 나는 예리에게 눈짓했다.
“너도 싸우고 싶지? 강해진 실력, 시험해 보고 와. 여긴 내가 맡을 테니까.”
지친 얼굴로 한숨을 내쉬고 있던 예리의 얼굴이 환해졌다.
“네! 갔다 올게요!”
“너희도. 여긴 너희랑 비슷한 실력자도 많잖아.”
“에헤헤. 사실 시험해 보고 싶었어요.”
“나도. 갔다 올게.”
이어 예슬이와 시하도 밝은 얼굴로 뛰어갔다. 나는 몸을 움찔거리는 성진을 막아 세웠다.
“넌 가지 마. 저기에 너랑 싸울 수 있는 놈은 없고, 네가 싸우면 내 결계가 못 버텨.”
“……알아.”
“알긴 뭘 알아.”
인하도 마찬가지다. 인하, 미영 할머니, 형일 아저씨 세 사람은 가볍게 캘리를 압도하고 있다. 소영이는 캘리와 대등한 대련이 가능하다. 500년 동안 고난을 겪은 탓에 캘리의 대장들은 대개 S랭크다. 에이온과 비앙카는 S랭크 중위권이며 윌터는 중상위권, 테온은 상위권이다. 소영이의 실력도 슬슬 S랭크 중위권에 접어들었다. 순조롭게 성장하고 있다.
그리고 인성이는……놀랍다. 내 아이템을 흡수했다고는 들었지만 잠깐 사이에 S랭크 중상위권이 되다니. 그러나 어딘지 위태롭다. 그림자가……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인성이의 그림자마법은 원래부터 불안한 편이긴 했지만.
‘괜찮으려나, 저거.’
기왕 온 김에 동료들의 현재 실력을 비롯해서 캘리의 마법과 실력까지 차근차근 파악했다. 우리와 함께 싸울 자들을 비롯해서, 우리와는 함께 싸우지 않고 여기를 떠날 이들의 실력까지.
테온은 확실히 강하다. 우리와 비슷한 나이라고 했던가? 어릴 때부터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그 정도의 싸움을 해 왔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해야 할까. 그래도 굉장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 후로도 반나절 정도 대련을 하며 실력을 파악하는 시간을 가졌다. 대련은 취사반장인 케일이 점심시간이 훨씬 넘었다며 방송을 흘린 후에야 끝이 났다.
“너희들끼리 지낼 때 밥은 어떻게 했어?”
“돌아가면서 했죠, 뭐. 일이 많은 인성이랑 은하만 제외하고요.”
식사는 무척 맛있을 뿐만 아니라 대련으로 진탕 마력을 소모한 사람들에게 무척 도움이 됐다. 마력과 체력을 회복하는 식사인가. 단순히 회복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마력이 더 활성화될 수 있도록 촉진시키고 있다.
식사가 끝난 후에는 6소대의 메인 작전실에서 정보를 교환했다. 여기에는 함선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참여했다.
에이온이 질문했다.
“유펠르시아의 봉인을 풀겠다고 했는데, 봉인이 어디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는 겁니까?”
“네. 알고 있어요. 몇 번이나 확인했는걸요. 봉인을 풀기 위한 마법도 준비하고 있어요. 문제는……그 장소를 정령이 지키고 있다는 거죠. 봉인을 푼 순간 들킬 거예요.”
“정령이 지키고 있지 않더라도 들키긴 할 테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엘리시아의 봉인. 엘리시아가 봉인이 풀리는 걸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네. 대응책이 필요해요. 유펠르시아의 봉인을 풀더라도 당장 들키지 않고 시간을 벌 수 있는, 도망칠 시간을 벌 수 있는 대응책이요.”
“끄응, 이거 참 골치 아픈데?”
「정령이 지키고 있다면 저도 도움이 안 되겠네요.」
캘리 단원들은 트라베리아가 저질러 온 사건을 살피며 침음을 삼켰다.
“그래서 우선은 봉인을 한번 찾아갈 생각이에요. 라시아 씨의 사념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요.”
“라시아의 사념이라고요?”
우리는 라시아가 남긴 사념에 대해서도 캘리에게 설명했다. 라시아라면 시카의 정령의 힘이나 엘리시아의 봉인에 대해 좀 더 알고 있는 게 있을 것이다.
봉인에 대해서도 좀 더 설명했다. 유펠르시아의 봉인은 여타 봉인에 비해 특수하다. 바깥과 안의 간섭이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으나, 내부의 시간은 흐르고 있다. 유펠르시아는 주위의 상황을 볼 수 있으며 바깥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바깥에 나갈 수도 없고, 외부에 있는 자가 내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시간이 흐르고 있으니 아르델은 성장하고 있다. 라시아의 말로 그 모든 것은 트라베리아의 의도라 한다. ‘지켜보라’는 것이다. 자신들로 인해 찾아올 멸망을 지켜보라고.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까? 시카의 정령이 지켜보고 있다면서요?”
“제 환각마법은 정령을 상대로도 통해요. 그리고……저와 소영이는 유펠르시아의 ‘감응자’예요. 라시아의 사념이 저희를 지켜 준 덕분에 지금까지 들키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도 정보를 교환하며 회의했다. 우리가 낸 정보는 지구에서의 것이 주를 이루었고, 캘리가 낸 정보는 우주나 트라베리아의 옛 족적이 주를 이루었다.
회의 결과 내일 바로 라시아와 대화를 하러 가기로 했다. 가는 사람은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나와 소영이, 둘이다.
다음으로 나온 이야기는 무기에 대해서였다. 트라베리아와 싸우기 위해서는 기능을 업그레이드시킬 필요가 있다. 진화석 이야기를 꺼내려는 찰나 인성이가 ‘캐티아에서 탈취해 왔으나 그대로 방치해 둔 무기’에 관한 이야기를 오랜만에 수면 위로 꺼냈다.
“캐티아의 무기, 기억하지?”
“응? 응.”
“그거에 진화석을 먹여 개조하면 어떨까? 나가는 다른 사람들한테 들려 줘도 되고. 총이나 날 무기를 주 무기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것도 괜찮겠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캘리번을 나가는 캘리 일행을 맨손으로 내보낼 수는 없었다. 이후로도 우리에게 협력하려 하는 자들이다.
“그러네. 우리 때문에 나가는 거니 장막이랑 변신 아이템, 도주용 무기……여차할 때 도망갈 수 있도록 최대한 조치해 줘야지.”
“오를레아와 얀에게서 이야기는 들었는데요, 정말 그렇게까지 해도 돼요? 힘들지 않아요?”
아직 인사를 나누지 않은 단원 한 명이 손을 들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니 걱정 마세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에요.”
그 단원이 어쩐지 감동한 눈을 했다.
나는 시선을 내리며 생각에 빠졌다. 캐티아에서 가져온 무기라. 확실히 우리에겐 도움이 되지 않는 물건이었지만, 캘리번과 캘리의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될 것 같다. 전부 S랭크 중상위 무기들 아닌가. 개중에는 캘리번에 설치할 수 있을 만한 대형 총 화기도 꽤 있다.
“그러네. 캐티아의 무기라면 도움이 되겠어. 하지만, 음…….”
캐티아는 현재 연맹에 합류했다. 그들이 지금껏 트라베리아의 뱀을 자처하고 있었다면 상관없었을 테지만, 연맹의 일원이 된 이상 훔쳐 온 무기를 마음대로 쓰는 것은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멋대로 훔쳐 온 거니, 이참에 제대로 사 둘까?”
“뭐야 뭐야, 도둑질을 했었어? 우리 리더 생각보다 나쁜 짓 많이 해 봤구나?”
익살스럽게 장난을 거는 한재일을 무시하며 인성이를 향해 말을 이었다.
“돈은 많으니까.”
인성이가 동의했다.
“하긴. 같은 편이 된 마당에 마찰이 생길 일은 피하는 게 좋겠지.”
“캐티아라면…….”
에이온이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무기 조합 캐티아를 말하는 겁니까? 그곳의 무기를, 심지어 이미 훔쳐서 얻어 낸 무기를 굳이 사실을 말하고 사겠다니.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 겁니다.”
“괜찮아요. 돈은 원하면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으니까.”
“……그렇군요. 마법석을 만들 수 있다고 듣기는 했습니다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봉인을 확인하는 것과 캐티아에서 훔쳐 온 무기를 해결하는 것, 그렇게 바로 두 가지 일이 결정됐다.
아침부터 조금 소동이 일었다. 지난밤 캘리의 실력과 정신세계를 충분히 관찰했다. 안심해도 된다는 확신이 들었기에 성진의 아공간에서 라라를 꺼냈다. 기본 장비를 걸치고 아침을 먹으러 갔다. 라라도 언제나처럼 나를 따라나섰다. 긴긴 여행 동안 낯선 장소에 익숙해진 라라는 처음 본 캘리번 함선에도 금방 익숙해졌다.
“식당에 동물을 데리고 들어가도 될까요?”
“상관없……얜 뭐예요?”
내가 무어라 대답하기 전에 한재일이 능청맞게 웃으며 인사했다.
“리더, 좋은 아침!”
그러더니 라라를 보고 눈을 빛냈다.
“고양이도 같이 왔네? 이름이 라라라고 했던가? 이리 온, 라라.”
그러나 라라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고양이? 설마 기르는 거야?”
나와 비슷한 시간에 식당으로 온 비앙카가 고양이를 보고는 기가 막히단 표정을 지었다.
“네.”
“나 살기도 급한데 고양이를 길러? 우리한텐 전력이 될 수 없을 만한 동료는 내보내라 했으면서? 제정신이야?”
예상했던 불만이었다. 나는 씁쓸한 감정을 삼켰다. 그러게 말이야. 라라를 캘리의 다른 동료들처럼 안전한 곳에 놔둘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유일하게 남은 가족이거든요.”
“아…….”
뭐라 더 항의할 기세이던 비앙카가 숨을 삼키며 말을 멈췄다.
“위험한 건 알지만 이 아이만은 어디로 보낼 수가 없네요. 이 아이가 사람이었다면 다른 곳에 맡길 수도 있었을 테지만.”
“아니, 그……그렇겠네. 가장 필사적인 건 리더겠죠. 가족이라면, 더군다나 그렇게 연약한 생물이라면……손을 뗄 수 없는 게 당연해요.”
주위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러게 말이다. 너무 연약해서 손을 뗄 수가 없다. 내 곁이 더 위험함을 알고 있지만, 이 아이가 반드시 무사할 안전한 장소를 찾을 수가 없기에.
사람이었으면 손에서 떨어뜨릴 수 있었을까. 이런 주제에 캘리에겐 약한 자는 싸움터에서 내보내라고 했으니, 그들 입장에선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그러나 캘리는 생각보다 쉽게 내 심정을 이해했다. 소중하고 연약한 하나뿐인 가족을 도저히 손에서 뗄 수 없는 심정을.
“그래서 여러분껜 더 죄송하게 생각해요.”
덤덤히 사과하니 다른 이들과 함께 떠날 예정인 프랜이 내 어깨를 붙잡으며 나와 시선을 맞췄다.
“한번 결정한 일에, 그리고 고작 이 정도 일에 리더가 고개를 숙여서야 씁니까. 저흰 리더가 한 말을 나름대로 받아들이고 납득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싸움에 끼어들어 봤자 당신들에겐 짐이 된다는 것을요. 그리고 리더의 가족과 저희는 다르죠. 이 아이는, 리더의, 이른바 목숨 줄인 거죠?”
그래, 캘리는 이해했다. 이 아이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네.”
프랜이 쓰게 웃었다.
“그야 안전한 곳에 피신시킬 수 있다면 그게 제일 좋겠지만, 그런 장소가 없다면 옆에 두는 게 최선이죠. 그리고 저희는 캘리번에서 나가더라도 계속 리더의 전력으로 있을 생각입니다. 지원이 필요하면 달려올 거고, 보조를 맡긴다면 최대한 해낼 겁니다. 그 점, 부디 명심해 주세요.”
“…….”
“저희 리더라면 언제나 당당하게 있어 주시라고요.”
프랜이 씩 웃었다. 나는 흠칫했으나 곧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할게요.”
나는 식사를 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이곳은, 캘리번은 여태까지 거쳐 왔던 다른 거점들과는 다르다. 플로리아도 이차원 속 기지도 싸움터로 만들 생각이 없는 장소였다. 하지만 캘리번은 함선이다. 진화를 마쳤을 때 이 함선은 우리의 무기가 된다. 우리는 이 함선과 함께 싸울 거다. 그때, 라라는…….
죽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 함선이 전부 부서져 생명 줄 간당간당한 상태로 도망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에펠로나, 혹은 시어볼드의 근원과 인하가 융합하고, 캘리번의 동력이 내 진화석으로 진화한다면, 그때는 설령 캘리번이 부서지더라도 안에 있는 라라만이라면 지킬 수 있을까?
우리의 당면 목표는 여전히 실력 향상이다. 기본적으로 캘리번은 기지로 두고 우리가 직접 날아다니게 될 테지만, 이전보다 불안감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라라를 손에서 놓는 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으니.
잃은 건 나만이 아니다. 라라도 마찬가지다. 참극 이후, 라라가 이성진의 손에 의해 내게로 돌아왔던 때를 기억한다. 밥을 제대로 못 먹어 삐쩍 마른 몸으로 애처롭게 울며 내게 기대 왔던 라라를. 지금은 괜찮지만, 라라는 한동안 내 곁에서 떠나려고 하질 않았다. 내게서 조금만 떨어져도 애원하듯 울었다. 그러면서도 라라는 누구를 찾는 것처럼 계속 바깥을 보며 울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 소영이는 바로 캘리번을 나섰다. 캘리번은 적당한 위치에서 멈춰 섰고, 우리는 단둘이 캘리번에서 빠져나와 유펠르시아가 잠들어 있는 해역을 향해 날았다.
만일을 위해 해역에 도착하기 전 에펠로나의 가호를 깔끔하게 지웠다. 우리는 아직 에펠로나의 가호를 각인하지 않았다. 같은 정령이라면 각인하지 않은 가호 정도는 눈치챌지도 모른다.
해역으로 향한 우리는 우선 ‘감응’했다. 여기에 올 때마다 라시아의 사념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라시아의 사념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선 사념이 어느 정도 힘을 비축한 상태여야 하고, 또한 어느 정도 활성화된 상태여야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운 여부가 크다. 운 좋게 사념이 맞아 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랜만이다. 라시아의 사념은 충분히 힘을 비축해 둔 상태일 것이다. 라시아의 사념에 대해선 트라베리아도 알고 있는 모양으로, 때때로 트라베리아가 그를 찾아오기도 하지만, 라시아는 우리가 온 이후로는 거의 대답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한 힘을 비축하기 위해서.
“……보여.”
먼저 감응한 것은 소영이였다. 그에 휩쓸리듯이 나도 감응했다. 유펠르시아의 봉인이 어디 있는지 선명히 느껴졌다. 우리를 부르는 목소리를……알겠다.
예전처럼, 아니, 예전보다 훨씬 완벽한 물고기로 변해 파도 안으로 스며들었다. 스며들 때마다 주변에 있는 다른 물고기들을 관찰하고 그 물고기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빠져든다.
봉인에 접근하자마자 익숙한 사념이 우리를 둘러쌌다. 정령이 일부러 방치하고 있는 힘이다.
「오랜만이로구나. 이번에는 10분 이상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