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371
“리더 님, 많이 피곤해 보이시네요. 제가 회복시켜 드릴까요?”
오, 소영이가 감탄했다.
“치료 마법사인가 봐?”
“전문 마법사는 아니지만, 상성이 잘 맞아.”
오시언은 조곤조곤 속삭이며 허공에서 카드를 꺼내 들었다.
카드 안에서 흘러넘친 파랑이 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뭐랄까, 치료마법이라기보다는 정신마법에 가까운 듯하다. 정신을 편안하게 하는 것으로 회복을 유도한다. 효과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오시언이 카드를 내리며 물었다.
“흠……여러분은 전투 조직이죠? 그것도 위험한 싸움을 하는.”
“네.”
“저희 편의를 봐준 답례로 당신들의 운명을 읽어 드릴까요? 저, 부업이긴 하지만 점술가거든요.”
점술가, 그 말에 바로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하달까 포츈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운명을 읽을 수 없는 자임을 알고 있었다.
“답례인 것도 있지만, 호기심이기도 해요. 이곳의 사람들은 전부 신기했지만, 그 안에서도 당신과 이성진이라는 분은 무척 특이해요. 그나마 이성진 씨한테서는 무언가를 볼 수 있는데, 당신에게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고개를 갸웃거리던 오시언이 허공을 향해 양손을 펼쳤다. 오시언의 손 위로 투명한 카드가 열 장 생겨났다.
“그래서 조금, 아니, 많이 궁금하네요. 운명을 읽어 봐도 될까요?”
빛을 흡수하는 듯이 반짝이는 투명한 카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멜리아와 셰린이 기대 어린 얼굴로 오시언의 점을 칭찬했다.
“봐 준다고 할 때 한번 받아 봐요! 얘 점은 우리 마을에서 엄청 유명했어요. 왕이 찾아왔을 정도라니까요?”
“맞아요. 정말 잘 맞아요.”
이어 오시언이 희미하게 웃었다.
“카드를 뽑아 보세요.”
홀린 듯이 손을 가져가던 나는 멈칫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내 마력이 카드에 이끌려 간다. 나는 눈을 날카롭게 치뜨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앞에서 내가 카드를 뽑기만을 기다리던 네 사람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탐색은 그만두세요. 정보를 남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아요. 미래의 정보라면 더더욱요.”
“그러게. 당신들은 어차피 여길 떠날 거잖아? 동료도 협력자도 아닌데 귀중한 정보를 줄 순 없어.”
“…….”
소영이가 빈정대는 말투로 긍정했고, 인하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10장의 카드가 3장으로 줄어들었다.
“탐색하는 것 같았다면 죄송합니다……. 그럼 하나만 대답해 주세요. 당신들은 엘리와 트라베리아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것만은 꼭 알고 싶어요.”
“…….”
‘트라베리아’, 그 단어에 우리는 반사적으로 표정을 구겼다. 네 사람이 어딘지 초조한 기색으로 몸을 움츠렸다. 이들은 아무래도 트라베리아와 친했던 것 같다. 앰버나 라시아, 유펠라처럼. 역시 우리는 모르는 유펠르시아 사람일까…….
우리는 인상을 찌푸리고는 손을 뻗어 앞에 떠다니던 카드를 각각 붙잡았다. 그 순간 손가락의 감정이 흘러들며 카드가 다양한 색으로 물들었다. 가운데 있는 카드는 일렁이는 흑남색, 왼쪽 카드는 휘몰아치는 은갈색, 오른쪽 카드는 섬광이 이는 금색. 카드의 색을 확인한 오시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런가요. 대답해 주셔서 감사해요.”
“실례했습니다…….”
일행은 곧 어색해하며 우리를 지나쳤다.
그들이 캘리에 머무른 지 닷새째 되던 날, 세계에 또 한 번 변화가 일어났다.
변한 것은 우리가 불안해하며 지켜보던 한국이었다.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던 한국 중심에 있는 디트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서로를 향해 얽힌 두 디트리가 대기층을 뚫으며 하늘로 솟았다. 디트리에는 나뭇잎이 무성했고, 열매와 꽃이 생겼다.
그와 동시에 한국 땅이 조금 솟아올랐다. 해안을 중심으로 명백하게, 절벽처럼.
디트리 꼭대기에서부터 베일 같은 잔가지가 펼쳐진다. 나뭇가지 베일이 한국을 꽁꽁 둘러쌌다. 아니, 한국만이 아니다. 주변 바다와 중국 대륙의 일부까지 한국 디트리 영향 안으로 들어왔다. 잔가지가 닿은 땅 근처에서는 기존의 디트리와는 명백하게 다른, 산호초 모양의 작은 트라던트가 생겨났으며, 그것들이 모여 한국을 가두는 새로운 결계를 이뤘다.
“저건…….”
“그래, 로지의 대기를 덮고 있던 것과 꼭 닮았군.”
캘리 단원들이 이를 빠드득 갈았다. 또 한 번 한국은 트라베리아의 견고한 요새로 변모한 것이다.
‘유정 언니, 인호 오빠.’
나는 속으로 한국에서 만났던 이들의 이름을 읊조리며 먼 하늘에서 한국을 내려다보았다. 전보다 더 내부의 마력을 보기 힘들어졌다. 예리가 열심히 스토리 감정을 했다. 예전처럼 들어오는 자는 막지 않는다. 아니, 저 산호나무가 오히려 사람을 끌어 들이고 있다. 대체 안은 어떻게 변한 걸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까.
나오는 건 전보다 더 요원해 보인다. 아니, 애초에 나올 수 있을까? 이사장님 일행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는 도저히 그들을 말릴 수 없었다. 그들이 우리를 말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복수를 위해 목숨을 건 것처럼, 대현 사람들은 한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레벨이 높아서 제 힘으로는 더 이상 읽을 수 없어요. 변화한 건 전부터 준비해 온 것 같고, 저희 때문에 한국의 비밀이 밝혀져서 더 빨리 진화시킨 것 같고요. 하늘을 덮은 저 잔가지는 외부의 마력도 흡수하고……저 산호는……사람과 생물을 끌어 들이는 특성이 있고……저것의 영역은 앞으로 더 넓어질 거고……. 어? 무차별 전송?”
“무차별 전송이라고?”
“네. 트라던트 가까이에 있는 힘을 ‘중심’인 한국의 디트리로 무차별 전송하는 기능이 생겼나 봐요.”
“‘중심’이라. 이렇게 보니 확실해지는군.”
에이온이 다시 한번 이를 빠드득 갈았다.
“한국에 있는 저것은 로지에 나타났던 죽음의 나무와 마찬가지로, 이 행성을 삼키기 위한 ‘핵심’일 거다.”
몇 시간 후, 진화한 한국의 트라던트에 다른 트라던트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진화가 시작되었으나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번에 트라던트를 지키는 것이 시카기에. 시카는 드물게도 그 무시무시한 마력을 대놓고 드러냈다. 트라던트에서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정령의 힘 때문에 그 누구도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시카의 힘이 트라던트에 녹아들었다.
더불어 리우가 기다렸다는 듯이 중국에 새로운 묘목을 살포했다. 그날 유일하게 남아 있던 중국의 평화 도시가 괴멸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동시에 중국 무술 협회 역시 괴멸했다. 생존자는 기껏해야 50여 명도 안 된다고 한다. 결국 중국이 멸망한 것이다.
“씨발 새끼들.”
그놈의 힘, 힘이 부족해서!
다시금 움직인 트라베리아 때문에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을 때 앰버 일행이 다 함께 우리를 찾아왔다. 마침 중요한 회의가 어느 정도 정리되었을 때였다.
앰버가 대표로 우리를 마주 봤다.
“먼저 고맙다. 덕분에 지금 이 세계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단다.”
“그런가요.”
“그리고 조사하는 동안, 너희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그야 그렇겠지. 우리가 조사한 정보니까.
‘새벽별무리’. 트라베리아에 복수하기 위해 휘하의 뱀 둥지를 하나씩 쳐 내고 있는 전투 팀. 강자로만 꾸려진 소수 팀으로 속한 마법사는 최저 A랭크다.
“리더는 최연소 A랭크 마법사이자 최연소 S랭크 마법사. 팀원 중에는 고작 22살에 S랭크 상위에 오른 마법사가 셋이나 있지. 오로지 커븐 로드를 쓰러뜨리기 위해, 복수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팀이며, 현재 수호 연맹 이외에 트라베리아를 쓰러뜨릴 가능성이 제일 높은 팀.”
가능성이 제일 높은 팀이라.
무심코 1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때는 아직 휘하 조직을 쓰러뜨리는 것조차 버거웠다. 누구도 우리가 트라베리아를 쓰러뜨리고 복수를 이뤄 낼 거라고 믿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압도적인 재능과 필사적인 마음으로 날아올랐다. 우리가 트라베리아를 쓰러뜨릴 가능성이 있다는 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나이를 본 순간 눈을 의심했다. 할 말을 잃었다. 그 나이에 그 정도의 힘을 얻는 건 기적보다 힘든 일인 걸 알기 때문이었지. 그런 게 가능한 마법사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단다.”
“…….”
“한 가지 사과할 게 있다.”
오시언이 앞으로 나오며 머뭇머뭇 카드를 내밀었다. 나와 인하, 소영이가 만졌던 카드다. 카드 안에 나타난 그림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인다.
“트라베리아에 대한 감정을 알고 싶다고 했었지만, 그것만은 아니에요. 이걸로도 아주 약간 운명을 읽을 수 있어요.”
“…….”
순간 황당해졌다. 그걸 내가 눈치채지 못했다고? 사람의 감정을 읽는 내가? 오시언의 감정은 이 순간에도 아주 부드럽게, 물감처럼 그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전 운명을 읽는 힘만큼은 포츈 님께도 뒤지지 않아요. 이걸 보고 저는 몇 가지 사실을 알았어요. 여러분이 운명의 중심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는 거예요. 정확한 결과는 보이지 않아요. 제 힘으로는 읽을 수 없고, 아마 읽어서는 안 될 거예요.”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언젠가 성진이 했던 말이었다. 모든 운명의 중심이 나라고 했던가?
‘믿고 있어.’
그 말이 떠오르자 가슴이 콱 짓눌리듯 아파 왔다.
“운명과 가깝다는 건 아주아주 특별한 운명이나 재능을 타고났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당신들이 트라베리아를 쓰러뜨릴 확률이 높다고 생각해요.”
“션의 읽는 능력은 여태까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어요. 그래서, 당신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있어요.”
말하며 아멜리아가 아주 괴로운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전하고 싶은 말요?”
“네. 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예요. 사실 이렇게 되기 전에 알려야 했어요. 알려도, 세상에 알려도, 달라지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아멜리아는 입술을 콱 깨물고는 천천히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아름다운 자홍색 눈동자가 나를 마주 보았다.
“이미 늦었지만, 이미 트라베리아는 세상에 극악무도하고 잔악한 나라로 알려져 버렸지만, 그래도…….”
마주 보는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멜리아가 팔을 움직여 천천히 옆으로 펼쳤다.
“그러려면 먼저 저희에 대해 소개해야겠지요. 앰버 선생님은 알다시피 유펠르시아 출신 마법사예요. 그리고 저는, 앰버 선생님을 제외한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는…….”
천천히 움직인 입술이 충격적인 사실을 토해 냈다.
“…트라베리아 출신의 마법사입니다.”
……뭐라고?
휙
화악!
쨍!
읊조린 말이 소리가 되어 울려 퍼진 순간 안에 있던 마법사들이 일제히 공격을 펼쳤다.
그들의 몸에, 목에, 급소에 마법이 겨누어졌다. 움직이지 않은 것은 오직 성진뿐이었다. 마법이 겨누어졌으나 아멜리아 일행은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우리를 주시했다. 아멜리아 역시 굳은 얼굴로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나는 이를 악물고는 물었다.
“트라베리아 출신 마법사라고요? 당신들이?”
“네.”
“사실인가요?”
나는 앰버를 돌아보았다. 앰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란다. 그러나 이들은 엘리나 커븐 로드와는 다르다.”
“무엇이 다르다는 거죠?”
“우리가 봉인당한 이유가…….”
앰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엘리와 커븐 로드가 내세우는 ‘복수’를 막기 위해서였기 때문이지.”
“……?!”
“당신들에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아멜리아가 마법이 겨누어진 상태로 목소리를 높였다.
“당신들에겐, 모든 트라베리아가 악마에, 복수에 미친 자들의 집단일지도 모르지! 그래, 맞아! 우리는 인간이 싫어! 이기적인 이유로 우리를 배척하고 죽이려고 한 교회가 싫어! 하지만, 하지만……모든 인간이 싫은 건 아니야…….”
“운명은 이미 전환되고 있었어요. 사람들은 점점 마법을 받아들였죠. 그렇다면 다시 사람과 교류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설령 이미 기만당했더라도, 악마가 되면 교회가 원하는 대로니까……. 그렇게 사람들 사이에 섞여 언젠가는 자신들의 기만을 사람들이 알게 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 이외의 인간을 전부 죽여 봤자 뭐가 돼? 더 나락으로 굴러떨어질 뿐인데. 알고 있지만,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거겠지.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복수할 건지 안 순간, 막으려고 했어.”
아멜리아의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다.
“힘을 써서라도. 그러기 위해 앰버를 불렀고, 싸웠지. 그리고……패배했어. 패배했기 때문에 100년 동안이나 봉인되어 갇혀 있었던 거야…….”
앰버 일행을 둘러싼 사나운 기세는 잦아들지 않았다. 나는 앰버 일행을 말없이 살폈다. 흘러넘치는 감정에 거짓이라고는 한 점도 없었다.
아멜리아의 입가에 얼핏 쓴웃음이 스쳤다. 그러나 그 표정은 다시 단호하게 굳어졌다.
“우리는……그 녀석들과는 달라. 세계를 멸망시킬 생각도 없고, 사람을 죽이고 싶지도 않아. 오히려 그 녀석들을 막고 싶어.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막고 싶었어.”
“…….”
“결국 돌이킬 수 없게 되었지만.”
나는 순간 멍해졌다.
──트라베리아.
세계의 공적(公敵).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자들.
죽고 죽이기 위해 살아가는 자들.
상실에 미친 자들.
최악의 마법사 집단.
그런 자들이었기에 차마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트라베리아 안에는 이 일을 반대한 자가 없었을까? 우리는 트라베리아에 대해 몰랐고, 참극은 일어나 버렸다. 일어나 버린 이상 그런 걸 생각할 수 있을 리 없다.
막으려 했던 자들이 있었다고는.
심지어 그자들이 같은 트라베리아라고? 나라. 그래, 트라베리아는 나라지. 눈앞에서 가족이, 친구가, 소중한 많은 사람이 살해당했어도, 그래도, 그렇더라도 고귀함을 잃지 않는 사람이 있음을 이미 나는 안다. ……대현처럼.
트라베리아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건가. 그리고 그들로는 엘리시아를 막을 수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리더, 어떡할래?”
“일단, 공격을……내려 주세요.”
“…….”
“적의도, 거짓도, 없으니까.”
씹듯이 내뱉은 말에 겨우 공격이 사라졌다. 앰버 일행은 그 순간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똑바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나는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물었다.
“그래서, 하고 싶다는 이야기가 뭐죠?”
“……당신들이 알아 줬으면 좋겠어요.”
아멜리아가 가슴 앞에 손을 꼭 모았다.
“그 녀석들을 증오하고, 복수하고, 죽이려 하기 때문에 더더욱……알아 줬으면 좋겠어요. 기억하고, 기억해 줬으면 해요.”
아멜리아가 한 발 걸음을 뗐다. 떨리는 자홍색 눈동자가 조금 가까워졌다.
“──우리에게 있었던 일들을.”
그렇게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15세기, 프라베리히 2세가 교황이던 시대.
이전 세기부터 마녀로 통칭되는 마법사들은 조금씩 배척받고 있었다. 이질적인 힘을 가진 자는 언제 어느 때든 배척받기 마련. 마녀가 숭배받고 존경받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지금 숭배와 존경을 받는 것은 신, 성직자들이다.
‘힘’을 지닌 성직자는 때때로 나타났다. 위협적이고 어두운 힘은 모두 악마의 힘이라 불려 처형받고, 이롭고 신성한 힘은 신의 축복이라 불리며 추앙받았다.
프라베리히 2세는 그 안에서도 특히 뛰어난 축복을 지닌 성직자였다. 그는 전염병 환자 수천 명을 고작 10분 만에 치료했다. 힘이 발현되면서부터 서서히 바뀌어 간 눈부신 백금발과 백금색 눈동자도 그를 칭송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토록 위대한 233대 교황 프라베리히 2세가 무척 탐욕스러운 인간이었다는 데에 있다. 그는 권위에 취했고, 이 힘이 오직 교회의 것이어야 한다고 여겼다.
프라베리히 2세는 ‘마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녀. 저주받은 힘을 쓰는 자들의 통칭.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힘이 자연과 소통하는 힘이라 말한다. 홍수정의 마녀 라트리카는 최근 이름이 오르내리는 점술가로, 수련을 위해 여행을 다니는 트라베리아의 마녀였다.
“성하, 성하는 마법을 아십니까?”
“마녀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은 적은 있다. 어차피 눈속임이 아니더냐.”
“눈속임입니까. 그렇습니까. 그럼 한번 보시지요. 수정이여.”
라트리카의 붉은 수정이 빛을 뿜어내며 변화했다. 붉은 수정 안에서 붉은 나비가 튀어나왔다.
라트리카는 목에 걸려 있던 수정 조각으로 자신의 팔에 상처를 냈다. 그러나 그 상처는 붉은 나비가 가까이 다가간 순간 말끔히 치유되었다.
“마법은 자연과 소통하여 기적을 만들어 내는 힘. 이것이 바로 마법입니다.”
“마법이라. 그런 게 세상에 정말 존재한단 말인가.”
“성하. 모른 척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느끼고 계시지요? 제 수정에서 느껴진 힘, 수정을 바꾼 힘, 제 팔을 치유한 힘, 그 힘의 흐름을 전부 느끼고 계시지 않습니까.”
“…….”
“저는 성하의 마력을 느끼고 놀랐습니다. 이렇게 강한 마법사는 처음입니다.”
“내가 마법사라는 것이냐.”
“네.”
“그럴 리가 없다. 마법은 배우지 않으면 쓸 수 없는 힘 아니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라트리카의 붉은 눈동자가 올곧이 프라베리히 2세를 응시했다.
“세상에는 배우지 않고도 마법을 사용하는 자가 있습니다. 마법에 대한 재능이 너무 뛰어나 스스로도 모른 채 마력을 쌓아, 마법을 발현하는 마법사. 성하는 바로 선천 마법사이십니다.”
라트리카는 어렸고, 순진했고, 솔직했다. 이 말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따위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라트리카는 그 자리에서 사살당했다. 죄목은 바로 교황을 능멸한 죄.
그리고 라트리카는 아멜리아의 하나뿐인 언니였다.
라트리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아멜리아는 망연했다. 라트리카의 스승 포츈도 절망했다. 그러나 그것이 절망의 시작에 불과했음은 당시 ‘바다 일족’이라 불렸던 트라베리아도, 다른 마법사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로부터 고작 한 달 후, 교황이 마녀 척살 및 마법 배척 명령을 내렸다. 당시 교황의 위세는 대단하여,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나라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정도였다. 걸 수 있는 죄목은 다 걸었다. 전염병, 저주, 사탄의 자식. 누군가의 죽음도, 누군가의 불행도 전부 마녀의 탓으로 바뀌었다.
프라베리히 2세는 ‘마법’을 영원히 신의 축복으로 만들기 위해 마법을 아는 모든 이들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프라베리히 2세는 뛰어난 선천 마법사였고, 동시에 뛰어난 위업을 지닌 교황. 반면 마녀들은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신비의 집단 혹은 괴물 집단. 마녀라는 존재가 흉악한 존재로 뒤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순식간에 신의 이름을 건 군대가 바다 일족이 사는 마을로 쳐들어왔다. 바다 일족은 나름대로 이름이 알려진 마녀 일족으로 그들이 사는 마을도 딱히 숨겨져 있지 않았다. 당시 마법사의 숫자는 적었고, 그중에서 강한 마력을 지닌 자나 그 정도의 저력을 숨긴 선천 마법사는 더더욱 적었으며, 더욱이 공격과 방어에 알맞은 힘을 가진 자들은 손가락에 꼽힐 정도였다.
반면 바티칸과 왕국의 군대는 싸우는 데 특화된 군대. 더군다나 프라베리히 밑에 있는 직위가 높은 성기사는 대개 ‘선천 마법사’였다.
그날, 조용히 살고 있던 바다 일족의 마을에 피의 비가 내렸다. 힘없는 마녀가 많이 죽었다. 갑자기 일어난 불꽃, 갑자기 날아온 칼날. 갑작스러운 습격에 많은 마녀가 손쓸 틈도 없이 휩쓸려 갔다.
습격을 가장 빨리 눈치채고 막아 낸 것은 시카였다. 그 뒤를 따라 다른 마녀들이 나섰다. 당시 엘리시아는 죽은 자의 기억을 읽고 그 영혼을 진혼하는 마녀였고, 때문에 시체를 이용하는 방법 따위는 알지도 못했다. 시카에게 있어서 정령은 자연과 소통하는 순수한 존재로 이 힘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 따위는 생각도 못 했다.
방어하고 도망가는 자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공격하는 자, 죽어 가는 자.
그리고……벨라.
벨라의 선천마법은 원래 위협적이었다. 슬럼가에서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 낸 마법이니 당연했다.
자신을 가족처럼 보살펴 주었던 이들이 죽는 순간 벨라가 스스로 봉인했던 마법이 폭주했다.
그것이 검은 사신의 낫.
피를 삼키며 피를 뿌리는 낫이 많은 군대를, 성기사를 베었다.
마을은 멸망했으나 바다 일족은 살아남았다.
바다 일족은 마을을 버리고 도주했다. 600명 가까이 되던 마녀가 반 가까이 죽었다.
마녀들은 모두 마법을 사용해 하늘을 날았다. 처음엔 영문을 몰랐다. 그들은 아직 마녀 척살 명령이 내려진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많은 자들이 망연자실했다. 그들은 곧 라트리카를 떠올렸다.
라트리카다. 라트리카가 죽은 것과 이 일은 무슨 관련이 있다.
시카는 정령으로, 엘리시아는 영혼을 찾아 라트리카의 기억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라트리카와 프라베리히 2세의 대화를 알게 되었다. 라트리카는 진실을 말한 탓에 죽었다.
그날 아멜리아는 많이 울었다. 친한 마녀들이 많이 죽었다. 그런데 그 원인이 언니인 라트리카다. 원인이라고 해도 그녀가 느끼기에는 불합리한 이유다.
한편으로는 벨라가 조금 무서웠던 것도 같다.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서라곤 하지만 손쉽게 사람을 죽여 버린 벨라가. 그때까지는 그러했다.
그들은 곧 마녀 척살 명령에 대해 알게 되었다. 바티칸이 그들을 적으로 간주했다는 것은 세상 전체가 그들을 적으로 돌렸다는 것. 바다 일족은 다급히 당시 ‘숲의 일족’이라 불리던 유펠르시아나 다른 마녀 일족 및 일가에게 마법 전서를 보냈다.
눈치 빠르게 피한 자도 있었고, 위치가 알려져 피하지 못하고 멸망당한 일족, 혹은 일가도 있었다. 숲의 일족은 다행히 라시아가 간발의 차로 습격을 눈치채 무사히 몸을 숨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나라의 위치가 알려져 있는 만큼 좀 더 숨기 좋은 다른 장소로 이사를 갈 예정인 모양이다.
바다 일족은 친한 숲의 일족에 별다른 피해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안도했다. 그리고 그들도 자연의 가호를 받기에 좋은 신천지를 찾아 떠났다. 바다 일족은 말 그대로 바다와, 혹은 땅과 친숙한 일족. 아무도 없는 무인도를 찾거나, 아예 다른 대륙으로 가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겠지. 인간과 달리 자연과 소통하는 그들은 하늘을 날거나 공간을 이동해 얼마든지 대륙을 넘을 수 있다.
그들은 자연에 숨으며 마을로 삼을 만한 빈터를 물색했다. 마녀 일족과 교회가 가진 힘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그것이었다. 마녀 일족은 자연을 알고, 바티칸을 비롯하여 아무런 배움도 거치지 못한 선천 마법사들은 자연을 모른다. 그러니 자연 속에 숨은 마녀들을 교회는 찾아낼 수 없다.
물론 아멜리아는 갑작스럽게 자신들을 습격하고 친구를 죽인 자들이 미웠다. 일족의 다른 마녀 역시 같은 기분일 것이다. 하지만 무얼 하든 간에 우선은 거처가 필요하다. 게다가 교회는 왕국만큼이나 거대한 세력. 복수를 하기엔 너무 드높았다.
거기다 당장 복수를 하겠다고 나서기에 그들에겐 ‘힘’이 없었다.
그들의 힘은 자연과 소통하고 사람들의 삶을 풍족하게 하기 위한 것. 누군가를 위험하게 하는 마법 같은 건 ‘저주’밖에 없다. 그러나 저주는 사용하는 자 역시 불행하게 하는 힘이다. 더군다나 안타깝게도 프라베리히 2세는 웬만한 저주는 통하지 않는 몸이다. 신의 위업을 등에 업을 만큼 성스러운 마법의 소유자가 아니던가.
그리고 지금은 다른 마녀들을 구하는 게 급선무다.
한시 빨리 거처를 마련하고 자신들처럼 교회에 쫓기고 있는 다른 마녀들을 구해 내야 한다. 그걸 알기에 그들은 참았다. 그러나 그들에게 심어진 원한이나 투쟁심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싸우기 위한 마법’을 처음으로 떠올린 것은 분명 이때이리라.
곧 바다 일족은 그럴듯한 무인도를 찾을 수 있었다. 힘이 없는 약한 마녀는 그곳에서 터를 잡고 선천 마법사나 힘이 있는 마법사는 다른 마녀들을 맞으러 갔다. 이 안에 아멜리아도 속해 있었다.
그들은 숲의 일족과 전서를 나누며 마녀들을 보호했다. 때론 감옥에 들어가 마녀를 빼 왔다.
그렇게 마녀가 하나둘 찾을 수 없는 장소로 사라짐으로써 전쟁은 소강상태를 맞는 듯했다.
그러나 마녀가 발견되지 않자 교회는 이번엔 ‘인간’을 노리기 시작했다.
인간들 중 마녀와 교류가 있었던 자, 혹은 교류가 있는 것 같은 자, 혹은 마녀로 의심되는 자. 교회는 그런 자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신고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중 대부분은 진짜 마녀가 아니거나 마녀와 관련이 없음에도 사형에 처해졌다.
죽이는 방법은 다양했다. 꼬챙이에 꽂거나, 검으로 목을 베거나, 고통스러운 독약을 먹이거나, 불에 태우거나, 수장시키거나.
가장 많이 쓰는 방법은 불에 태우는 방법이다. 그렇게 하는 것으로 ‘정화’시킨다면서.
끔찍한 일이다. 더군다나 그 안에는 실제로 바다 일족과 친한 자들도 있었다.
그 사실이 알려지고 아멜리아는 불안에 떨었다. 아멜리아 역시 인간 친구가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친구 세실에게서 편지가 왔다. 바다 일족은 보호를 원하는 인간 친구를 데려오기로 결심했다. 죄 없이 사형당하는 인간을 구하기로 했다.
그 타이밍에 맞춰 아멜리아가 바깥으로 나섰다. 그런데 오시언이 그녀를 말렸다. 오시언은 첫 번째 습격으로 부모를 잃고 현재 아멜리아가 보호하고 있는 아이였다.
“멜리, 가지 마. 가면 위험해.”
“괜찮아. 금방 올게. 세실한텐 션만 한 동생도 있어. 새로운 친구가 생기겠네. 그러니까 잠깐만 기다려, 알았지?”
아마 그때 이미 오시언에게는 운명을 읽는 능력이 있었던 거겠지. 그러나 아멜리아는 그것을 단순한 불안이라 생각하고 넘겼다. 자연과 소통하는 마녀들은 무척 순진했으며 세상 물정을 몰랐다.
마녀들에게 도착한 연락은 대부분 함정이었다. 모른다고 잡아떼거나 연락하지 않겠다고 한 사람은 이미 죽었다. 그리고 세실은 여동생을 인질로 잡혀 있었다. 아멜리아의 앞에서 세실도, 세실의 여동생도 칼에 찔렸다.
“미안……미안해. 멜리, 제발……도망…….”
마녀가 쉽게 나타나지 않자 교회는 이제 이런 방법을 썼다. 신의 사자가 하는 짓이라기에는 너무도 치졸하고 잔혹했다.
아멜리아가 세실의 품에서 떨어진 펜던트를 쥔 그 순간, 펜던트가 무기로 변했다. 그날 아멜리아는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아멜리아가 돌아왔을 때 바다 일족은 비탄에 젖어 있었다. 피투성이인 아멜리아를 보고 오시언이나 포츈, 엘리시아, 안즈, 벨라, 시카 등 아멜리아와 친했던 자들이 기겁해서 달려왔다.
사정을 캐물었고, 사정을 말했다. 다른 일족도 비슷한 상황에 처했던 듯했다. 반 이상은 돈에 눈이 멀어, 나머지는 마녀를 진정으로 사탄이라 생각해 밀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