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377
“네. 알고 있어요.”
나는 김유라 선배를 향해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에게……특히 인하에게 필요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협력하기로 했어요.”
에이온은 백한 선생님에게도 우리에게 했던 이야기를 전했다. 그들이 민희를 납치하려 했던 이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백한 선생님은 듣는 내내 시큰둥했다.
“그게 변명이라는 건 알지?”
“그래.”
“그런 일이 생겼다면 너희는 정식으로 협력을 요청해야 했어. 어린아이를 억지로 끌고 갈 게 아니라.”
“네 말이 맞다.”
“물론 협력을 요청한다 해도 접점도 없는 조직을 위해 우리가 어린아이를 그 먼 우주까지 보낼 일은 없었겠지만. 하지만 적어도, 그 행성계가 영지로 등록된 장소가 아니라 할지라도, 이 일을 공식적으로 알리고 관련 협회나 조직에 도움을 요청하는 정도는 했어야지. 응? 안 그러냐?”
등록되지 않은 행성계의 큰일에 조직이 공식적으로 나서는 일은 드물다. 그러나 다들 적어도 상황은 확인하려 했을 거고,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싶으면 토벌대를 짰을 것이다. 결국 범인은 트라베리아였던 셈이니 누가 어떻게 덤벼도 해결하진 못했을 테지만, 적어도 그 과정에서 민희 외에 다른 협력자를 찾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테온을 발견했듯이.
그러나 캘리는 그 일을 자신들만의 일이라 생각하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 그러다 급하게 납치를 계획하면서도. 에이온이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이지 할 말이 없군.”
백한 선생님이 불만을 눌러 참으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건 너희도 알 테지. 그렇다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협력할 정도의 ‘무언가’가 이놈들한테 있다는 이야기겠지? 그래서 어때. 도움은 돼?”
“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의 전력과 발을 붙이고 있을 수 있는 장소, 인하가 맺은 계약과 혈족마법. 이들과의 협력은 적어도 인하에게 지대한 힘을 가져다줬다.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새벽별무리와 캘리의 협력은 이미 맺어졌다. 대현과 새벽별무리의 협력도 이제 필수 불가결이다.
“하기는야, 상대가 그 트라베리아인 이상 수단을 가릴 수는 없겠지. 힘이 부족하니 그게 누구든지 최대한 협력하지 않으면 그 전에 죽음을 맞이할 테니. 좋아. 너희가 협력한다면, 우리도 같이 협력하마. 아무래도 우리가 도움을 받는 쪽인 것 같아 분하다만.”
문제는 아멜리아 일행이다. 대현이 트라베리아에 반감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 역시 그들을 기껍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협력하는 것으로 대현에 지대한 전력이 생길 것임은 분명하다. 지금 대현은 노림받고 있는 입장, 강한 보디가드가 있으면 좋다. 그러나 동시에 리스크도 커진다. 경우에 따라 트라베리아의 칼날은 우리가 아니라 대현을 향해 겨누어질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이 배신의 칼날로 변할 가능성도 있다. 그들이 트라베리아를 막고 싶어 하는 것도 진심이지만, 그만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트라베리아 출신들과 협력하는 건 리스크가 너무 커서 안 되겠어. 뭣보다 우린 당신들만큼의 전력은 필요 없어. 우리는 트라베리아와 직접 싸울 생각이 없거든. 하물며 어중간한 전력이라면 더더욱 필요 없어.”
“하하, 설마 어중간한 전력이란 말을 들을 줄은 몰랐네요.”
“마법 실력을 평가하자는 게 아니야. 당신들에겐 싸울 각오가 없어. 확실히 우리는 노려지고 있지만, 어중간한 각오로 임하는 당신들이 우리를 트라베리아의 손에서 지켜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드는데?”
“……그런가요.”
“그런 어중간한 전력을 리스크를 껴안고 받아들여 봤자 손해야.”
“부정할 여지가 없네요.”
아멜리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오시언이 만지작거리고 있던 카드로 입가를 가리며 물었다.
“그럼……리스크를 빼고 간다면 어때?”
“음?”
“어차피 우리는 조만간 깨어났다는 사실을 밝힐 거야. 그리고 조금 있으면 유펠르시아의 봉인이 풀리지.”
“뭐? 유펠르시아? 봉인을 찾았어?”
백한 선생님의 시선이 바로 우리에게 향했다. 예슬이가 환하게 웃으며 브이 자를 했다. 대현 일행이 놀라거나 허탈한 눈으로 우리를 보는 사이 오시언이 말을 이었다.
“유펠르시아의 핵심 전력, 초대 왕이나 초대 가주들은 우리와 비슷한 심정일 거야. 우린 원래 유펠르시아로 가려고 했어. 유펠르시아에 간 다음에 파견 형태로 당신들 팀에 간다면 어때? 괜찮지?”
백한 선생님이 떨떠름한 시선으로 오시언을 응시했다.
“확실히 그러면 트라베리아의 시선이 우리에게 주목될 일은 없겠구만. 하지만 그럴 바에야 유펠르시아에 있는 게 낫지 않나?”
“이유는 다양해.”
오시언이 카드 끝을 만지작거렸다. 그때마다 카드에서 희미하게 빛이 새어 나왔다.
“하나는 유펠르시아가 불편하다는 거. 라시아는 아직 우리를 친하게 대해 주고 있지만, 우리와 라시아는 이미 돌이키기 힘든 강을 건넜어. 두 번째는, 그 녀석들을 막아설 수 있는 장소에 있고 싶다는 거야. 어차피 우린 연맹에 가입할 생각이었어. 하지만 폴리젠이나 라비언트 측에 들기는, 죽어도 싫거든.”
쨍! 오시언의 손에 들려 있던 카드가 깨졌다. 눈동자에 얼핏 시퍼런 분노가 어렸다.
“뭐야. 같은 ‘시초의 나라’면서 그쪽과는 사이가 안 좋은 거야?”
“그쪽은 별생각 없을지도. 폴리젠은 냉정하고, 라비언트는 어중간하게 우리를 동정하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는 구역질 날 정도로 싫어.”
이야기가 길어지기에 트라베리아의 과거 이야기는 아직 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할지 말지도 아직 고민해 봐야 할 일이다.
“흠……. 그래서? 굳이 우리를 선택한 이유는?”
“하나는 빚.”
분노가 서렸던 오시언의 표정이 다시 냉정해졌다.
“새벽별무리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캘리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하여간 이들 덕분에 봉인이 풀렸고 지구에도 돌아올 수 있었어. 그러니 보답으로 당신들과 캘리의 예비 전투원들을 지킬 생각이야. 나는 조금이지만 운명을 읽을 수 있어서, 위험하다 싶으면 원인이 찾아오기 전에 당신들을 도망가게 할 수 있고, 숨길 수 있어.”
“흐음.”
“또 하나는 직감.”
오시언의 앞으로 이번에는 몇 장의 카드가 생겨났다.
“우리는 분명 어중간한 각오를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끝까지 지켜보고 싶어. 저들과 연이 있는 당신들 곁에서라면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
백한 선생님은 한동안 고민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 그 정도 리스크라면 나쁘지 않아.”
이어 백한 선생님이 생긋 웃으며 나를 돌아봤다.
“그런데 너희 안 보는 사이에 참 많은 일을 벌였다~? 유펠르시아 해방이라고? 이건 보통 일이 아니잖아! 어떻게 할 생각이야?”
“봉인을 풀어야죠.”
“그래, 풀 수 있다 치자. 그런데 그로 인한 여파는 어쩔 생각이야? 이번에야말로 커븐 로드가 너흴 죽이러 올 거다.”
“장소를 바로 들키지 않을 방법이 있어요. 여기에 아군도 생겼고요.”
나는 옆에 서 있는 앰버를 가리켰다.
“유펠르시아의 봉인은 완전 봉인이 아니에요. 안과 바깥이 완전히 차단되지만, 안의 시간은 변함없이 흘러가죠. 유펠르시아 사람들은 봉인이 풀리면 바로 대처할 수 있어요. 이미 우리가 봉인을 풀 준비를 마쳤다는 것도 알고 있을 거예요.”
“……그래도, 위험해.”
“위험한 건 어쩔 수…….”
“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건지 모르겠네! 위험한 걸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고 좀 대비를 하란 말이다! 이러니까 우리가 안심이 안 되는 거라고!”
백한 선생님이 화를 내며 내 뺨을 꼬집었다. 뒤에 서 있던 에이온과 비앙카가 움찔했다.
인하가 머뭇거리며 말리다가 같이 호통을 들었다. 인하마저 몸을 움츠리자 윌터와 테온 등 다른 대장 부대장들도 흠칫했다.
“언제 풀 건데?”
벨라 때문에 힘을 좀 써 버렸으니…….
“앞으로 일주일 후요.”
“그럼 우선 연맹의 대표……루카 씨나 샐레나 씨나, 하여간 몇 명한테 이 사실을 알려. 하려면 확실하게 해야지.”
“그건…….”
우리는 처음에 유펠르시아의 봉인을 회수하자마자 루카 씨나 하인리히 씨한테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내가 꿈속에 갇혔기에 그러지 못했다.
그때 미리 연락을 해 두었다고 했지만 봉인을 회수했다는 이야기를 한 건 아니었다. 소니아의 실력은 나보다 뛰어나다. 특히 연맹의 대표라면 꿈으로 염탐당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기에, 사정을 미리 전해 두진 않았다. 회수한 다음 직접 만나 사정을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그건 그만두는 게 좋겠어.”
그러나 오시언이 손을 들어 말렸다.
“벨라만이 아니라 베로니카도 지금 바깥에 나와 있어. 유펠르시아가 사라진 지금 그 장소를 찾고 있는 건 틀림없이 시카와 소니아, 베로니카일 거야. 소니아는 꿈을 뒤질 수 있고, 베로니카는 정보력이 뛰어나. 그 정보가 바깥에 흘러 나가면 위험할지도 몰라.”
“…….”
“여기 위치는 은하 씨나 인하 씨, 성진 씨 덕분에 들키지 않겠지만.”
에이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확실히 소니아는 위험하지.”
“시카의 정보력도 만만치 않아. 지금쯤 바람의 정령이 유펠르시아에 관련된 소리를 전부 시카에게 가져다주고 있겠지.”
역시 그들의 정보 수색 능력은 보통이 아니다. 우리는 굳은 얼굴로 오시언의 말에 동의했다.
우리의 정신은 이제 트라베리아가 엿볼 수 없다. 하지만 다른 자들은 아니다. 에이온이 속삭였다.
“베로니카, 에펠로나계를 멸망시킨 여자. 그 여자의 마법은 뭐지?”
“아카식 레코드. 세상의 모든 정보를 알 수 있다는 아카식 레코드 알지? 그게 바로 베로니카의 마법이야. 하지만 상태를 보니 아직……‘진짜’에는 도달하지 못한 모양이네.”
오시언의 손가락 위에서 카드가 빙글빙글 돌았다.
“커븐 로드인데, 진짜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이 세계의 진리는 아주 높은 곳에 있어. 베로니카는 세상에 직접 접촉해 정보를 해석할 뿐. 하지만 진짜에 도달하진 못했어도 그녀의 정보 수집 능력은 아주 뛰어나.”
“맞아요. 리카의 정보력은 시카와 소니아에 뒤지지 않아요. 특히 마법이나 이론에 관한 파악이나 해석 능력에는 따를 자가 없죠.”
리카는 베로니카의 애칭인가. 마법이나 이론이라. 우리가 관심을 가진 것을 눈치챘는지 오시언이 말을 이었다.
“베로니카의 마법은 말했다시피 세상에 접촉해 정보를 이끌어 내는 마법이야. 하지만 그 정보는 아마 모두가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달라. 보통 정보 하면 ‘이름, 인적 사항, 성격.’ 그런 걸 떠올리지? 하지만 베로니카가 끌어모으는 정보는 달라. 상대의 마력, 마법, 기술. 예를 들어 은하 씨가 입은 그 옷을 해석한다면 어떤 재료가 쓰였고 어떤 힘을 지녔고 누구의 손을 거쳤는지. 그게 베로니카식 아카식 레코드의 ‘정보’야. 세계에 접속해 세계의 기억을 읽는 거지.”
“세계의……기억?”
“그래.”
확실히 상상했던 것과 달랐다. 생각보다 스케일이 너무 컸다.
“형태는 컴퓨터와 닮았어. 그래서 우리도 컴퓨터에 금방 익숙해진 거야. 알고 있겠지만 우리 시대 때는 컴퓨터가 없었어……. 당시 베로니카는 리카르트의 혈족마법을 뚫지 못했어. 세계에 접속한다고 해도 아마 컴퓨터상에선 ‘정보 수색을 잘하는 뛰어난 해커’ 정도일걸?”
리카르트의 마법은 나라도 뚫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는 썩어도 커븐 로드. 적어도 문이나 인성이보다는 훨씬 뛰어난 해커일 테지.
“마법과 온 세계에서 이치와 이론을 끌어내 해석하는 마법이라 해야겠지. 혹은 세계에 물음을 던지고 답을 끌어낸다는 것도 좋겠다. 어쨌거나 멀리 보고 파악할 수 있는 마법이니만큼 정보력이 뛰어나. 베로니카가 정보를 모으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원하는 공간이나 물건을 지정해서 그걸 해석하는 방법. 둘, 세계에 키워드로 검색해 그와 관련된 정보를 끌어오는 방법. 셋, 끌어모은 정보로 세계에 접속해 그보다 고위의 마법 이론을 성립하는 것. 그래서 정보는 아마 세계를 해석한 ‘요소’가 큰 비율을 차지할 테고, 그다음엔 모두가 아는 ‘사실’, 누군가가 한 ‘말’. 뛰어난 정보력보다는 지식을 가졌다고 해야 할까?”
베로니카라. 순간 머릿속에 하멜이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베로니카는 내가 ‘죽음의 품에 안겨 있다.’는 해석을 했다고 했다.
지금은 안다. 그 죽음이란 바로 성진이다. 그걸 보면 우리에 대해 보는 게 아예 불가능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당시 포츈도 나에 대해 하나를 읽어 냈다고 하니.
“지금 생각해 보니 용케 죽은 척할 수 있었구나 싶어.”
웃고 있는 인성이의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우리의 생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꽤 있었어. 대다수가 대현이었으니 소니아나 베로니카라면 충분히 엿볼 수 있었겠지. 이 정도의 정보력을 가진 사람들이 용케 우리가 죽었다는 걸 SR의 정보만 보고 믿었네. 포츈이 우리를 신경 썼다고 했는데…….”
신경 썼다고 해도 ‘표적’, 그러니까 선아 아줌마만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 포츈 할머니라면 제대로 확인해 봤을 법도 한데.”
“베로니카의 해석 결과가……‘죽음의 품에 안겨 있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베로니카의 해석은 틀린 적이 없지. 다른 의미였겠지만, 그들에겐 그걸로 충분했던 거야. 하지만 과연 특별한 영혼을 가진 자다워.”
“영혼…?”
“네.”
벨라도 그런 말을 했다. 눈앞에서 보니까 알겠다고. 내 영혼은 무척 크고 특별하다고. 영혼이라…….
“영혼의 특별함은 세계에 속해 있어. 운명이 읽히지 않으며 운명의 근처에 있다는 것은 세계가 당신을 따른다는 말이야. 세계에는 자신의 사랑을 받는 자를 보호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어. 그게 당신들에게 운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커. 베로니카의 마법은 세계에 접속하는 마법이라, 그 영향을 많이 받거든.”
“…….”
세계, 사랑받는다, 운.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내용들뿐이라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쯧. 그렇다면 진실을 함구하고 협력을 구해야겠군. 혹시 베로니카의 정보력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없나?”
“여기 있는 세 사람은 안 통해.”
그러며 오시언은 나와 성진, 인하를 가리켰다.
인하가 자신을 가리키며 눈을 꿈뻑였다. 원래 ‘읽을 수 없는 사람’ 하면 나와 성진이었는데, 정령과 계약한 이후로는 인하도 그 틀에 조금씩 포함되고 있다.
“그 외에는……뛰어난 신물이나 성물을 가진 사람한테도 안 통할걸?”
“그럼 샐레나와 시네라에게 협력을 구해야겠군.”
“시네라? 혹시 시네라 엘피로?”
“그렇다만…….”
“부르지 마.”
오시언의 표정이 다시금 사나워졌다.
“어이, 이런 상황에선…….”
“부르지 마. 그 여자는 안 부르니만 못해. 하필이면 엘피로라니, 라시아도 기겁하겠군.”
“유펠르시아와 폴리젠은 딱히 사이가 나쁘진 않았던 것 같은데…….”
“나빠. 많이.”
“…….”
결국 봉인을 풀기 직전 사정을 알리지 않고 연맹의 S랭크 20위권 마법사 세 명 중 두 명을 부르기로 했다. 이전과 똑같은 방법이라 조금 마음에 걸렸다. 이번에는 우리가 가는 게 아니라 그들이 오는 것이지만……부득이하다고는 해도 한 번 약속을 어기고 말았으니.
몇 명이나 와 줄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연락을 보냈다. 그 후 나는 다시 봉인을 풀 열쇠 제작에 착수했다.
내가 열쇠를 다시금 완성시키는 사이 디트리의 진화가 끝났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막을 틈조차 없이 진화해 버리고 말았다.
새로운 디트리는 좀 더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덤불 가시, 이파리가 많거나 꽃이 많거나, 산을 넘을 정도로 커지거나, 오히려 작아지기도 했다. 그렇게 변한 녀석이 한국의 것을 제외하고 총 20개. 그 힘은 더 견고해졌으며 뿌리의 범위는 더 넓어졌다.
당장 해석하려 달려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그 심정을 누르고 열쇠를 만드는 데만 집중했다. 혹시라도 정보를 넘기지 않기 위해 대현 일행은 계속 캘리번에 머물렀다. 장례식만은 치렀다. 화장한 뒤 뼛가루를 작은 상자에 보관했다.
한동안 우울한 분위기였으나 그들과 우리가 금방 정신을 차리고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안타깝지만 죽음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일어나는 데 가장 오래 걸린 것은 성후 오빠였다. 그러나 성후 오빠도 비틀대긴 했으나 일어났다.
우리가 넘긴 봉인은 가짜 봉인, 벨라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생각해 긴장했으나 의외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미 봉인을 확인하고도 남았을 텐데도.
‘이건……넘어가 준다는 건가? 아니면 아직 눈치채지 못했나?’
내 환각은 견고하다. 주인조차 바로 보고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눈치채지 못했을 가능성도 분명 있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보통이라면 환각이 사라지는 걸 느꼈을 텐데, 가져간 게 벨라이니.’
이윽고 열쇠가 완성되었다.
그때 벨라의 기척은 이미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차피 봉인을 푸는 즉시 엘리시아가 눈치채겠지만, 그래도 봉인을 푸는 순간만이라도 그녀가 없는 게 더 편하다.
장소는……유펠르시아의 봉인이 있던 곳과 가까운 곳은 안 된다. 만일을 위해 협력하러 와 주기로 한 SR이나 경찰 본부와 가까운 장소로 하자.
트라던트가 있는 장소는 제외. 이제 그런 곳을 찾기도 힘들어졌다.
지구를 덮는 결계와 가까운 곳도 제외.
제외, 제외, 또 제외. 그런 식으로 전에 미리 알아 두었던 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 사이의 하늘로 내려섰다. 에펠로나와 에이온이 협력하여 자연의 가호를 펼쳤다. 그 위를 오시언과 아멜리아가 보강하고, 가호 아래를 이번엔 성진의 가호가 덮는다. 앰버가 바깥에서 자연의 가호를 확인하고 들어왔다.
“음, 상태가 좋구나. 이 정도라면 시카라도 쉽게는 눈치채지 못할 거다.”
갑작스러운 부름임에도 루카에, 경찰 서장 안토니오를 대신해 윌리엄까지 달려와 주었다. 샐레나는 몸 상태가 안 좋음을 아니 일부러 부르지 않았다. 두 번째 부름에도 응답해 준 루카에게는 감사할 따름이다.
그들은 영문을 모르며 우리 호출에 응답해 유펠르시아의 봉인을 푼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는 경악했다. 더군다나 현 트라베리아에 의해 봉인된 구 트라베리아라니. 심지어 루카는 아멜리아와 히스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던 모양이다.
“분명 최전방에서 싸우던 전력이었을 텐데 커븐 로드에도 없고 측근에도 없어서 어째서인가 생각했어요. 물론 트라베리아 대다수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지만요. 베로니카는 저도 모르는 사람이고요.”
“리카는 나서서 싸우지 않았으니까요. 저희가 봉인된 이후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그 아이는 183살, 저희 나라 마법사 중에서는 어린 세대예요.”
나는 성진의 상자를 열어 허공에 검고 작은 돌을 띄웠다. 봉인이 허공에 떠오르는 모습을 보니 새삼스럽게 가슴이 떨렸다. 나는 짧게 심호흡했다.
“…좋아. 시작할게.”
이 봉인은 힘만으로는 깰 수 없다. 힘만 두고 비교하면 이 봉인을 깰 수 있는 건 엘리시아와 비슷한 힘을 지닌 벨라나 시카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상대할 건 이미 완성되어 마법사에게서 떨어져 나간 마법이다. 그리고 우리는 위력을 무시하는 상성과 특수능력을 가졌다. 우리처럼 시간만 들인다면 아마 샐레나나 루카도 이 봉인을 깰 수 있을 것이다. 무속성마법을 지닌 앰버는 당연히 가능하다.
나는 각오하고 봉인을 건드렸다.
“『마법 문자 해석』.”
동시에 봉인이 문자로 실체화되었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문자와 문자의 도열을 바라보고 있자니 머릿속으로 날아드는 정보량에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엘리시아의 마법은 견고하고 성실하며 복잡하고 섬세하다. 씨실과 날실을 하나하나 짜 맞춘 느낌이라고나 할까.
“『열쇠 구멍』.”
그러나 그 어떤 복잡한 마법이라 해도 ‘중심’이 있다. 그게 설령 단단히 닫혀 있는 중심이라 할지라도.
문자가 변하며 문자의 중심에 열쇠 구멍이 생겨났다. 무언가 단단한 것으로 막혀 있는 열쇠 구멍이다.
‘첫 번째.’
나는 성진에게 눈짓했다. 그 순간 성진의 손에 주황빛 열쇠가 생겨났다.
‘어? 열쇠?’
봉인을 푼다고 해도 나는 그가 평소처럼 물로 만든 검 같은 것을 열쇠 구멍에 집어넣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만든 것은 암울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그러나 평소와는 달리 폭력적인 강함 따윈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열쇠였다.
‘평범한 열쇠……가 아냐! 이 느낌은 분명, 신물과…….’
신물과 닮았다. 흡! 지켜보던 누군가가 숨을 들이켰다. 성진이 말없이 열쇠를 열쇠 구멍에 가져갔다.
파직!
빠직, 빠직, 열쇠 구멍을 막고 있던 방어 막에 금이 간다. 주황빛 힘이 봉인을 내달리며 균열을 만들었다. 막이 사라지고, 복잡했던 문자열 중 몇 개가 사라졌다. 이윽고 주황빛 열쇠가 안개처럼 녹아 사라졌다.
나는 그것을 확인하며 미리 준비해 두었던 열쇠를 꺼냈다.
『특수 기술─별하늘의 열쇠』
무언가를 불러내고, 열고, 닫는 힘. 말 그대로 특수한 기술이다. 나는 밤하늘을 꼭 닮은 열쇠를 열쇠 구멍에 끼워 넣었다.
철컥.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성진이 열쇠를 끼워 넣었을 때와는 상반되는 빛이 퍼졌다. 그의 힘이 억지로 균열을 만들었다면, 나의 힘은 자연스럽게 마력 사이사이를 파고들어 간다. 열쇠의 힘이 봉인 구석구석에 스며들었다.
그그극….
열쇠를 향해 엄청난 마력이 끌려들어 갔다. 나는 다급히 만들어 두었던 마법석을 소환했다. 시간을 농축하고 농축해 내가 미래에 사용 가능할 힘을 앞당겨 결집시킨 열쇠, 그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힘인데 열쇠는 아직도 더 강력한 힘을 필요로 한다.
‘조정. 봉인을 조정, 정화….’
키이이. 눈앞이 은푸른색으로 물들었다. 소니아와 싸운 이후로 남색으로 물든 머리카락 주위로 별빛 같은 은빛이 맴돈다.
쨍! 채앵!
소환한 마법석이 가루로 부스러지더니 별 무리가 되어 열쇠 안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주위에서 계속 마력을 흡수했고, 흡수한 마력을 오롯이 열쇠에 쏟아부었다.
‘큭!’
──찰칵.
그그극거리며 기분 나쁜 소음을 내던 열쇠가 결국 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봉인이 ‘조정’되며 열린다. 열쇠에서 별 같은 마력이 파도처럼 쏟아져 나왔다. 별로 된 파도가 봉인 사이사이로 스며들며 휘감긴다. 정화의 힘이 은하처럼 나선을 그리며 퍼졌다.
찌릿
그러는 동안에도 열쇠는 내 힘을 끊임없이 가져갔다. 심장을 쥐어 짜내는 듯한 기아감에는 이미 익숙하다.
“모두 물러나십시오.”
그 사이로 루카가 끼어들었다. 힘이 자연의 가호 안을 벗어나지 않도록 루카가 봉인마법을 펼친다.
나는 이를 악물며 집중했다. 내 정화마법은 조정하는 힘. 정화의 힘은 자연과 조화하며 내가 생각하는 부자연스러운 힘을, 엘리시아의 봉인만을 조정해 갔다.
쿠과과과과!!
처음부터 유펠르시아의 크기를 상정해서 넓게 자연의 가호를 펼쳤었다. 가려야 할 범위가 커 트라던트의 영역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지기는 했지만, 자연의 가호가 있으니 안전 범위다.
봉인이 풀리며 섬의 원래 모습이 드러났다. 발아래에 떠 있는 광대한 본섬과 본섬을 지탱하는 다섯 개의 섬, 그리고 섬 안에 스며든 유펠라의 마력…….
“드디어….”
시하가 감격에 차 속삭였다. 목소리에 미약하게 울음기가 서렸다.
화아악─
그때 멀리에서 금색 빛이 솟아올랐다. 금색 마력이 순식간에 섬을 덮었다. 페일린가의 두 번째 혈족마법, 소망. 소망의 힘이 자연의 가호를 불러 모았다.
“가자!”
휙, 예슬이가 우리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다양한 감정으로 가득했다. 기쁨, 안타까움, 기대. 일그러지는 표정이 겨우 미소를 그려 내고, 웃고 있는 눈가는 눈물을 떨군다.
“아르델한테!”
나는 예슬이를 마주 보며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가자.”
“정말 오랜만이다. 우릴 보고 뭐라고 할지 궁금하네.”
“응! 빨리 만나고 싶어!”
예슬이가 하늘을 뛰듯이 날며 앞장섰다. 인하와 예리가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 나도 그 뒤를 따라 날려고 했다. ……그런데.
살랑
“……?”
바람……이 불었다.
어딘지 그리운, 낯익은 바람에 뒤를 돌아보았다.
“소영 님?”
테온이 이름을 부르자 멍한 눈으로 하늘을 보던 소영이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소영이가 테온을 향해 평소처럼 웃었다.
“아무것도 아냐. 빨리 가자!”
우리는 먼저 간 친구들을 뒤따라 날아갔다. 건물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하늘을, 우리를 올려다보며 환호했다.
머지않아 왕성 정원이 나왔다. 정문 앞에 우리가 만나려고 했던 일행이 모여 서 있다. 페일린 왕족을 포함한 유펠르시아를 지탱하는 7가주들, 그들의 혈족.
“아르델!”
“예슬아, 시하야!”
그리운 금발이 휘날렸다. 태양처럼 반짝이는 금발을 가진 소녀는 마지막에 만났을 때에 비해 많이 성숙해져 있었다. 아르델과 예슬이가 서로에게 달려들어 껴안는다. 우리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아래로 내려섰다.
“정말로 봉인이 풀렸군.”
“라시아.”
“앰버 스승님, 오랜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