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378
“……오랜만이야, 라시아.”
“멜리, 션, 다시 만나게 되어 기뻐.”
각자의 이야기가 오갔다. 나는 천천히 걸어 아르델을 향해 다가갔다. 아르델은 언젠가 보았던 유펠르시아의 친구들과 가족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다. 인하와도 한 번 끌어안은 아르델이 이내 우리를 돌아봤다.
“은하…어?”
나를 돌아보던 아르델이 조금 당황했다. 아르델이 우리를 한 명 한 명 가리켰다.
“성진이, 소영이, 인성이. 은하 너 맞지?”
“응, 맞아.”
아르델의 친구들도 나를 기억하고 있는지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아, 깜짝이야. 너 너무 많이 변했다.”
“변했나?”
“그럼! 머리 색부터 눈 색, 자세, 분위기까지, 한순간 딴사람인 줄 알았어. 다들 많이 변했지만, 은하만큼은 아니야.”
하긴, 머리 색에 눈 색까지 전부 변한 것은 여기에선 나뿐이다. 이내 아르델이 울먹이는 얼굴로 나에게 달려들었다. 꽉, 떨리는 손이 목에 감긴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난, 진짜로, 전부 죽은 줄만 알고…….”
“…….”
그래, 참극 당시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은 극소수의 사람과 SR의 레일리뿐이다. 당시 내가 구조했던 사람의 기억은 내 관계자가 아니고서야 대부분 기지를 나가기 전에 이사장님이 덮어씌워 버렸으니까. 그러니 내 생존 사실을 알고 있던 건 정말 극소수뿐이었다.
“여기 없는 사람은……들은 대로, 죽은 거겠지? 미안해, 이런 이야기 해서…….”
“응.”
“그래도 정말, 너희가,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나는 엉엉 울며 매달리는 아르델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 가슴을 울리는 심장 소리에 천천히 눈을 감으며 속으로 속삭였다.
고마워. 너도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20. 계승
친구들이 해후를 기뻐하는 모습이나 루카와 윌리엄이 연맹에 연락하는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던 이소영은 문득 몸을 돌렸다. 그건 본능이나 직감 같은 것이었다. 왠지 아까부터 계속 어느 장소가 신경 쓰였다.
‘아까, 왠지 누가 부른 것 같았어. 유펠르시아를 처음 발견했을 때와 똑같아.’
그때, 처음 유펠르시아가 있던 바다에 갔을 때, 이소영은 왠지 무언가가 자신을 부른다고 생각했다. 그자는 라시아였다. 라시아의 사념,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라시아를 만나 보니 알겠어. 날 부른 건 그가 아니야.’
유펠르시아가 해방된 지금, 그 부름은 점점 강해지고 있다. 누구일까? 누가 자신을 부르고 있는 걸까? 이소영은 이 감각의 정체가 무엇인지 미칠 정도로 궁금했다. 정신을 차리니 그녀는 움직이고 있었다. 이소영의 몸이 한순간 소리 없이 흐릿해졌다.
‘…소영 님?’
그것을 바로 눈치챈 건 그녀를 계속 바라보고 있던 테온뿐이었다.
이소영은 캘리 멤버 중에서 테온과 제일 친했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라 맘껏 대련을 신청하다 보니 친해졌다. 더군다나 테온은 주민희 납치 사건과는 전혀 연관이 없다. 노예로 있다가 구출받았다는 점에서 인간적인 동정심도 든다. 무엇보다 생각보다 마음이 잘 맞았다.
그 점은 테온도 같았다. 새벽별무리의 다른 멤버들과 달리 사심 없이 웃으며 다가오는 이소영이 테온 역시 기꺼웠다. 강해지기 위해 자신에게 대련을 신청하고 싸우면 싸울수록 점점 성장해 가는 이소영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즐겁다.
친하게 접근해 오는 이는 캘리의 가족들밖에 없던 테온에게, 이소영은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다. 처음으로 사귄 친구, 그 의미만큼 테온은 이소영을 많이 신경 쓴다.
테온은 무의식적으로 이소영의 뒤를 따랐다. 기척에 민감한 유은하도 어쩐 일인지 이번에는 바로 눈치채지 못했다. 두 사람이 사라진 후 오시언이 얼핏 그 장소를 돌아보았다.
테온이 뒤따랐을 때 이소영은 이미 먼 하늘을 날고 있었다. 테온은 조금 당황하며 하늘을 날았다. 이상하다. 이소영의 속도가 이상하게 빨랐다. 하늘에서 역풍이 불어오며 테온이 나는 것을 방해했다. 테온은 결국 이소영의 모습을 놓쳤다. 세찬 바람에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이미 이소영은 거기에 없었다.
“소영 님?”
테온은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늘을 빙빙 돌며 아래를 내려다보던 그는 겨우 이소영의 모습을 발견했다. 어느 공원, 이소영이 한 방향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걸어가는 이소영의 발치로 붉은 보석의 잔해가 점점이 나타났다.
“소영 님, 여긴 갑자기 왜…….”
비틀
그때 멍하니 앞을 향해 걷던 이소영의 몸이 일부 바람으로 흩어졌다. 투명해지는가 싶던 이소영의 몸이 그대로 앞으로 기울었다.
“……!”
테온이 당황하여 이소영을 부축했다. 이소영이 테온의 팔 안에서 축 늘어졌다.
“소영 님? 소영 님!”
테온이 정신을 잃은 이소영의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이소영의 몸은 축 늘어진 채 아무런 반응도 없다. 뿐만 아니라 한순간 그녀의 몸이 흐려지며 투명해졌다.
“……!”
테온이 당황하며 이소영을 똑바로 안아 들었다. 그는 다급히 텔레포트 하여 아직 화기애애하게 해후를 기뻐하고 있는 일행 사이로 끼어들었다.
“리더! 소영 님이!”
“뭐? 소영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일동이 경악했다. 유은하가 당황하며 이소영에게 달려왔다. 걱정스럽게 이소영을 살피던 유은하와 정예리, 레비의 눈빛에 의아함이 담겼다.
“어라?”
“왜 그러십니까? 소영 님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아내셨습니까?”
“아니, 이거…….”
유은하가 당황하며 손바닥으로 입가를 가렸다.
“인하가 정령이랑 계약했을 때와 상태가 비슷한데…?”
“뭐?”
“맞아요. 똑같아요.”
이어 정예리도 동의했다. 유은하의 시선이 떨리며 가라앉았다.
“게다가 이 마력은…….”
“공명.”
오시언이 카드를 쥔 채 유은하를 향해 걸어왔다. 유은하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소영이 몸에서 도는 마력……틀림없어요. 유펠라 씨의 마력이에요.”
“뭐?”
이번에는 유펠르시아와 트라베리아 측이 경악할 차례였다. 반면 오시언은 예상한 듯 평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유펠라는 우리와 똑같아요. 그들을 막고 싶어 하고 있어요.”
오시언이 유은하를 향해 쥐고 있던 카드를 내밀었다.
“그리고 이소영은 유펠라와 닮은 힘을 가지고 있죠.”
“유펠라 씨는 분명…….”
“유펠라는 돌연변이예요. 페일린의 피를 이었으면서도 빛속성이나 불속성이 아니라 어둠속성과 바람속성을 타고났어요.”
유은하가 카드를 건네받았다. 건네받은 카드 안에서 반짝이는 루비와 바람으로 이루어진 새가 움직이고 있었다.
이소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본 적도 없는 공간이 이소영을 맞았다.
“어……?”
이소영이 눈을 깜빡이다가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발밑은 새하얗고, 하늘은 검으면서도 끄트머리가 불그스름하다. 하늘에 붉은 별이 반짝거린다.
이소영은 다시 앞을 보았다. 어느새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루비빛 머리카락의 여자가 생긋 웃었다.
“안녕?”
이소영은 당황했다. 그 얼굴을 알고 있었던 탓이다. 루비빛 긴 머리카락에 녹색과 파랑색의 중간 색을 가진 푸른 눈동자. 바로 유펠라였다.
“아, 안녕하세요……. 유펠라 씨, 맞죠?”
유펠라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넌 이소영이지? 우리 손녀의 친구이며 나를 두 번이나 만나러 와 줬던 그 아이의 동료인.”
이소영이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어디예요?”
“네 마음속이야.”
“마음속…? 아! 혹시 절 계속 부른 건 당신인가요?”
“맞아.”
이소영이 당황한 기색으로 물었다.
“왜 절 부른 건가요?”
으음, 유펠라가 고개를 기울였다.
“정확히 말하면, 널 부른 게 아니야.”
“네? 절 불렀다면서요?”
“내가 부른 건 나와 파장이 아주 잘 맞는 마법사야. 그게 너였던 거지.”
이소영은 이해가 되지 않아 잠시 인상을 찌푸렸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절 불렀다는 거죠? 그런데 왜 부르신 거예요? 어라? 근데 유펠라 씨는 사라졌던 거 아니었어요?”
그 말에 유펠라의 눈동자가 씁쓸한 빛을 띠며 가라앉았다.
“맞아. 나는 사라졌어. 원래 죽는 순간 이 세계의 일부로 녹아야 할 영혼은 마지막 역할이 깨짐과 동시에 세계로 녹아들었지. 하지만, 그래도. 그런 미련이 나와 내 마법을 붙잡았어.”
유펠라가 천천히 이소영의 오른손을 양손으로 붙잡아 들어 올렸다.
“거기에 마지막 희망을 담았어. 내 힘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와 정령의 계약이 완전히 끊어지기 전에, 내 힘과 나를 지켜 주었던 정령을 계승받을 수 있는 사람이 온다면……. 이안에게는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이름을 받아 준 나의 바람. 죽고서도, 그 이후에도, 계속 나와 함께 유펠르시아를 지켜 주었지. 하지만 아직 나에게는 할 일이 남았어. 그리고 놀랍게도 네가 나타났지. 나와 파장이 맞으며, 그 녀석들에게 대항하고 있으며, 운명에게 사랑받는 자.”
유펠라가 활짝 웃었다. 그러며 이소영의 오른손에 이마를 댔다.
“자, 내 힘을 너에게 줄게. 너에게는 자격이 있어.”
“네? 대체 무슨…….”
“그러니 부탁이야. 부디 그들을 막아 줘. 이 이상──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그 순간, 이소영의 안으로 강렬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설마 소영이가 유펠라에게 감응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우리는 소영이를 손님방에 눕혀 두고 상태를 살피기로 했다.
자, 문제는 이다음이다. 유펠르시아의 봉인이 풀렸다. 엘리시아라면 이 사실을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트라베리아는 분명 그것을 확인하려 하겠지. 확인한 다음엔……어떻게 할까? 아무래도 유펠르시아를 다시 봉인하려 하겠지?
‘분명 유펠르시아에는 강한 마법사가 많이 있어. 라시아는 랭킹 18위고, 가주들도 S랭크 상위권이야. 하지만 봉인 때문인지 힘이 많이 약해져 있어. 지금의 트라베리아에는 한참 못 미쳐. 앰버 씨를 더하고, 아멜리아 일행을 더해도…….’
승률은 아주 낮다. 유펠르시아에 더해 연맹이 협력한다고 해도, 이 일에는 틀림없이 트라베리아의 3강 중 누군가는 나설 테니까.
유펠르시아는 트라베리아를 피해 숨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트라베리아는 유펠르시아를 찾아내려 할 것이다. 유펠르시아의 봉인이 어떻게 풀렸는지를 조사하면서. 그리고 유펠르시아의 봉인을 풀 수 있는 자는 한정되어 있다. 연맹 아니면 우리뿐이다. 이때 트라베리아가 가장 먼저 노릴 것은…….
벨라가 한 짓을 보니 알겠다. 벨라는 이번엔 연맹을 공격하여 유펠르시아를 끌어낼 것이다.
“봉인을 풀었을 때의 행동 지침은 이미 정해 두었습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유펠르시아의 봉인을 풀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건 샐레나의 힘이 부족해지고 시카에 의해 연맹이 기울기 시작한 지금이 딱 좋은 타이밍이지요. 설령 그로 인해 트라베리아와 정면으로 맞부딪치게 되더라도요. 원래라면 연맹을 통해 모두에게 미리 예고를 했을 테지만, 베로니카가 나와 있다니 어쩔 수 없죠. 봉인 해제식이 무산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루카는 우리의 걱정을 알고 있다는 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맞다. 어차피 봉인은 풀었어야 했다. 다만……앰버가 봉인을 풀었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갔으면 편했으리라는 생각은 든다.
“샐레나와 안토니오 씨, 하인리히 씨에게는 방금 이 사실을 전달했습니다. 베로니카에게 이 이야기가 전해질 것을 상정하고, 앰버 씨의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 사실을 알면 그들도 조금 더 신중하게 접촉해 오겠지요. 오산이 있다면 유펠르시아 여러분이 봉인의 영향 탓에 약해져 있다는 것이군요. 봉인되어 있었던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이야기해 주실 수 있습니까?”
“당연하다. 그리고 우리도 조금이나마 바깥의 전황을 알고 싶다.”
“알겠습니다.”
라시아 일행과 루카, 윌리엄, 에이온과 백한 선생님, 형일 아저씨, 미영 할머니 등, 그들이 필요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시하와 예슬이를 포함한 같은 세대 대현 출신 7명은 아르델 및 그녀의 친구들과 따로 이야기를 나눴다. 먼저 통성명부터다. 왼쪽에 있는 연녹색 머리 남자부터 시작해서 차례대로 라테나, 세필리오, 루빈, 세르히, 일리야, 리안이라고 한다. 이 중 내가 얼굴을 알고 이름을 들었던 것은 라테나, 세필리오, 루빈뿐이다.
“지금까지 어떻게 지낸 거야? 변해도 너무 변했잖아.”
“싸웠지.”
“트라베리아랑?”
“안타깝지만 아직 그 정도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했어.”
인하가 인상을 썼다. 누구나 우리가 쉽게, 빨리 강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직이다. 아직 부족하기 그지없다.
우리는 아르델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대강 설명했다. 세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예슬이와 시하가 어떻게 움직였고, 우리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대현은 지금 어떤 상태인지.
“너흰 어떻게 지냈어?”
“여긴 계속 그대로였어.”
곧 아르델이 봉인 속에서 어떻게 지냈는지를 이야기했다.
봉인된 유펠르시아는 무섭도록 평온했다고 한다. 하늘은 밤이 찾아왔다 아침이 밝기를 반복하고, 사람들은 성장하고, 가끔은 비나 눈이 내렸다. 넓은 하늘이 변함없어 보여 하염없이 날면 어느새 원래 장소로 돌아와 있더라.
그리고 조금씩……바깥의 이야기가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대부분 꿈을 통해서 봤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유펠르시아의 모든 주민들이 하나둘 꿈을 꿨다. 어딘가가 무너지는 꿈, 무시무시한 마정석, 누군가의 죽음, 전쟁, 그리고 수호 연맹.
가끔은 목소리가 들렸다. 푸른 하늘 아래 누군가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울려 퍼졌다. 때로는 일상적인 이야기, 때로는 소문 같은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봉인 바로 앞에서 하는 이야기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들렸다.
봉인 바로 앞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보통 라시아의 목소리였다. 라시아의 사념과 시카의 정령, 때때로 찾아오는 엘리시아와 커븐 로드. 3년 동안 예외라고는 없었다. 세계와 단절된 동안 아르델은 변함없이 자랐다. 몸만은 말이다.
마법은 봉인에 의해 억제되었다. 특히 7가주와 왕족의 혈족마법이 제일 많이 억제되었다. 마법은 강하면 강할수록 억제되어, 성장하기는커녕 오히려 힘이 줄어드는 자도 있었다. 라시아 같은 경우에는 한번 잠들면 한 달이나 깨어나지 못했다.
그에 비하면 아르델은 비교적 성장한 편이었다. 원래 B랭크였던 그녀는 이제 A랭크다. 마력 크기만 보면 시하와 거의 엇비슷하다.
그러던 어느 날 예외가 나타났다. ‘봉인을 풀고 싶다’며 ‘봉인을 찾아낸’ 자가 있었다. 그리고 아르델은 똑같이 반복되는 그 목소리가 나와 소영이의 목소리임을 금방 눈치챘다고 한다.
“그땐 다들 희망을 가졌지. 바깥의 강한 마법사가 우리 봉인을 풀어 줄 거라고. 그런데 너희가 스스로 풀겠다는 말을 하자 이번엔 또 다들 실망하는 거야. 너희가 봉인을 풀어 줄 거라고 믿은 건 나와 라시아 할아버지뿐이었어.”
그러며 아르델은 활짝 웃었다.
“역시 은하야.”
그러더니 이번엔 옆에 있던 예슬이를 꽉 끌어안았다.
“너희가 계속 노력해 준 거 알아. 고마워.”
그러자 예슬이가 다시금 훌쩍였다.
“많이 보고 싶었어…….”
“나도.”
아르델의 친구들이 그런 아르델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내 맞은편에 앉아 있던 갈색 머리 여자, 라테나가 문득 나와 시선이 마주치더니 움찔 굳었다.
“어, 저기……이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예전에는 미안했어.”
“……?”
아, 처음 만났을 때 이야기인가. 하긴, 내가 그녀와 만난 것은 지금을 포함해 딱 두 번뿐이다.
“내가 그땐 좀, 많이, 철이 없었지?”
“아니야, 괜찮아.”
기억 속 한편에 겨우 남아 있을 정도로 잊힌 일이다. 라테나에 이어 초록색 머리의 세필리오와 붉은색 머리카락의 루빈 역시 사과했다.
“나도. 그땐 진짜 많이 미안했어. 아르델한테도 많이 혼났어.”
“미안. 마법사답지 못했어.”
무슨 일 있었어? 조금 싸웠거든. 의아해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아르델이 흥 코웃음을 쳤다.
“내가 언제 너흴 혼냈니? 비웃었지.”
“우리 공주님 너무해…….”
세필리오가 훌쩍훌쩍 우는 척을 했다.
이야기를 마친 후 우리는 가까운 손님방 침실에 누워 있는 소영이를 살폈다. 소영이는 여전히 깊게 잠든 채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테온과 한재일, 예리, 김여울 선생님이 있었다.
“리더.”
“소영이는 괜찮아?”
“괜찮아요. 계약하고 있는 정령도 에펠로나처럼 강하지 않으니 금방 깨어날 거예요. 다만 다른 사람의 힘을 그대로 전달받고 있으니 안정되는 데에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지만요.”
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소영이를 살폈다.
소영이 안에서 두 종류의 마력이 휘몰아치고 있다. 하나는 소영이 본인의 마력, 또 하나는 유펠라의 마력.
남의 힘을 가져와서라도 강해질 수 있다면 물론 좋다. 하지만 우위에 서는 건 소영이의 힘이어야만 한다. 유펠라의 마력이 소영이의 마력을 삼키고, 소영이의 마력이 유펠라의 마력을 삼키기를 반복했다.
유펠라는 강한 마법사다. 얼마나 강한지는 나도 모른다. 꿈속에서 만나도, 기둥으로 보았을 때도, 강한 건 알 수 있었으나 그 깊이를 쉽사리 짐작할 수 없었다. A랭크 이상이었던 건 확실하다. 그런데 이렇게 보니 S랭크 상위에 가까운 힘을 지니고 있었나 보다.
‘소영이랑 대등하다는 건, 그런 뜻이지.’
듣기로 유펠라는 살아 있을 당시 라시아보다 월등히 강했다. 하지만 당시, 400년 전에는 강대한 마법사가 매우 적었다. 지금이야 훈련을 하고 싸우면서 힘을 늘리지만 그때는 자연과 소통하며 고유 기술을 갈고닦는 게 다였다. 평화롭게 갈고닦은 마법은 필사적인 지금의 마법에 비해 힘으로는 한참 뒤진다.
어쩌면 이 힘은 죽은 후에 쌓은 힘일지도 모르지. 유펠라는 몸과 영혼, 모든 것으로 유펠르시아를 지켰다. 그 힘을 정령이 조율했고, 정령은 점점 강해졌다.
거기에 어쩌면 ‘다른 것’도 섞여 있는지 모른다.
에펠로나는 정령이기에 마력을 초월하는 특별한 근원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소영이가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유펠라의 정령과 그녀의 마력이다. 자연에 동화되어 유펠르시아의 기둥이 되었던 그녀에게는 어쩌면 내가 볼 수 없는 특별한 힘이 깃들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런 힘은 크기와는 상관없이 얻은 자에게 크나큰 힘을 부여한다. 인하 때 그랬듯이. 그러니 분명 소영이는 지금보다 많이 강해져서 깨어날 것이다.
소영이를 살피고 있는데 루카가 나를 불렀다.
“저희는 이만 연맹과 합류해 대책을 짜려고 합니다. 만일을 위해 유펠르시아에는 저희가 나가면 위치를 옮기라고 전해 두었습니다.”
“그런가요.”
“하지만 역시 트라베리아의 정보망이 마음에 걸리는군요. 당신들은 현재 트라베리아의 추적 및 정보력에서 거의 벗어나 있는 상태라고 들었습니다. 그 방법을 혹시 유펠르시아에 적용할 수 있습니까?”
“글쎄요. 이건 저희의 고유 체질이라서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성물이나 신물의 가호를 받는 거겠죠.”
“그렇습니까…….”
‘……잠깐만.’
실망하는 루카를 보고 있자니 무언가가 떠올랐다. 고유 체질이라.
고유 체질에서 오는 효과를 다른 사람에게도 적용시키는 게 정말 불가능할까?
“아, 그래도 소니아의 힘은 막을 수 있어요. 소니아가 찾지 못하게끔 정신 결계를 쳐 드릴까요?”
“네. 부탁드립니다.”
나는 생각에 잠긴 채로 손을 뻗어 루카와 윌리엄에게 마법을 걸었다. 두 사람의 정신에 자물쇠가 굳게 채워지며 문이 꿈속 깊은 곳에 잠긴다.
‘가호가 아니더라도, 이런 식으로 마법을 사용해서……. 애초에 트라베리아가 나를 찾을 수 없는 근본적인 요소는 대체 뭐지? 영혼? 마력? 마력이라면 정화마법일 테고, 영혼이라면…….’
나는 아주 다양한 것들을 떠올렸다. 영혼석, 꿈 조각, 정화 마법석, 진화 아이템.
‘연맹 사람들이 트라베리아의 정보력에 걸리지 않게 되면 싸움이 많이 편해질 거야. 그런 아이템이 있다면 대현과 대현에 협력할 캘리의 다른 단원들에게도 전해 주고 싶은데.’
자물쇠는 정신력과 마력을 꿈에서 스스로 보충한다. 자아, 이제는 이 문을 소니아가 발견하지 못하리라.
나는 뻗었던 손을 내렸다. 루카와 윌리엄이 어쩐지 어색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왜 그러세요?”
“아뇨, 새삼스럽지만 놀랍군요.”
윌리엄이 복잡한 감정이 담긴 시선으로 나를 아래위로 훑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으니까요.”
“……그러게요.”
사실 나도 그것 때문에 가끔 불안해질 때가 있다. 너무 빨라서 이러다 어딘가에 걸려 넘어지는 게 아닐까 싶어서. 하지만 그것보다 충족감이, 기쁨이 더 크기 때문에, 더군다나 윌리엄처럼 예전이라면 엄두도 못 냈을 실력자에게 그런 말을 들은 것이 기뻐, 나는 그만 웃고 말았다. 윌리엄과 루카가 한순간 눈을 크게 떴다.
“가기 전에 인하한테 허가증을 받고 가세요. 그게 있으면 다시 유펠르시아에 찾아올 수 있어요.”
“알겠습니다.”
“음, 그리고.”
나는 아공간에서 조금 전 생각했던 물건들을 꺼냈다. 정화석, 영혼석, 환몽석, 고유 마력석.
손안에서 물건을 즉석으로 굳혔다. 그다음에 증식시켜 같은 힘을 가진 마법석을 다섯 개 정도 만들어 냈다.
“가지고 있어서 나쁠 건 없을 거예요. 제 ‘운명을 읽을 수 없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렇군요.”
“감사히 받겠습니다.”
루카와 윌리엄은 나에게서 물건을 받고 인하에게 허가증을 받은 후 잠시 연맹으로 향했다. 오늘 안에 새로운 정보 공유자를 두어 명 정도 데리고 돌아오겠다고 한다. 트라베리아의 정보력이 정보력인 만큼, 그리고 바깥에 어떤 위험이 생길지 모르는 만큼 당장 많은 사람에게 사실을 알리지는 못한다.
다시 소영이가 누워 있는 방으로 돌아가 한동안 소영이의 상태를 지켜보다가 나왔다. 아르델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물었다.
“저기 있는 테온이란 사람, 괜찮은 사람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테온은 캘리 중에선 제일 괜찮은 사람이다. 무뚝뚝해도 올곧고 상냥하다. 어린 시절부터 강제로 제시된 길을 걸어올 수밖에 없었던 자가 용케 저렇게 성실하게 자랐다.
“그래.”
“호오. 만난 지는 얼마나 됐어?”
“아직 한 달밖에 안 됐어.”
“한 달……짧네. 테온 말이야, 혹시 소영이를 좋아하는 거 아냐? 만난 지 얼마 안 된 것치곤 걱정이 가득 담긴 간절한 얼굴로 소영이를 보더라고.”
확실히 소영이와 테온은 친하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의견을 부정했다.
“테온이 소영이를 잘 따르기는 하지만, 그런 의미는 아닐 거야. 저 사람한테 소영이는……첫 친구야.”
소영이도 테온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으니 그렇게 말해도 되겠지. 첫 친구? 그 단어를 읊조리던 아르델이 납득했다.
“그렇구나. 간절할 만하네.”
우리는 조금씩 대화를 나누면서 유펠르시아 곳곳을 돌아다녔다. 바로 바깥을 확인하고 싶어 하던 유펠르시아 주민들도 상황을 감안해 가만히 그 마음을 눌러 참고 있다.
유펠르시아는 정말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소영이가 쓰러졌던 장소에도 가 봤다. 유펠라의 마력은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유펠라의 마력과 정령의 마력, 그리고 이 대지의 마력이 합쳐져 새로 생성된 마법석이 남아 있을 뿐.
그다음에 내가 향한 곳은 유펠르시아에서 벨라의 흔적이 남아 있던 장소였다. 아멜리아의 이야기에 따르면 라시아가 끝까지 마법 평준화 프로젝트를 해내기로 결심했을 때 트라베리아와 유펠르시아가 부딪쳤던 장소다.
그러나 그때 보았던 저주받은 마력은 흔적도 없었다. 한때 풀 한 포기 나지 않았던 땅에는 다시금 새싹이 돋아 있었으며, 건물 잔해는 말끔히 사라졌다. 봉인이 풀리기 직전 트라베리아 일행이 사념을 쫓아올 걸 걱정해 라시아가 부숴 버렸다고 한다.
그래, 사념이 남아 있다고 해도 오래전 힘이다. 라시아는 그 사념과 마력을 없애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그럼에도 이 장소를 남겨 두었던 것은……과거를 향한 미련 때문이겠지.
라시아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벨라는 한때 정의로웠으며, 그와 같은 아픔을 겪은 누구보다 소중한 친구였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악독한 가해자다. 옆에서 함께 정화된 토지를 지켜보던 아르델이 입을 열었다.
“예슬아, 시하야, 너흰……계속 싸울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