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379
“응.”
“우리의 첫 번째 목표는 너를 봉인에서 구해 내는 거였지만, 최종 목표는 트라베리아를 쓰러뜨리는 거야. 우리 힘으론 쓰러뜨릴 수 없겠지만 은하 님은 달라. 은하 님, 성진이, 인하, 소영이, 인성이, 다섯 명이라면 분명 커븐 로드를 쓰러뜨릴 수 있어.”
“아르델은 앞으로 어쩔 거야?”
“나?”
아르델이 가슴에 손을 올리며 평화를 되찾은 토지를 응시했다.
“유펠르시아는, 페일린 왕가는 분명 수호 연맹에 가입해서 사람들을 지키는 데에 힘쓸 거야. 하지만…….”
아르델이 입술을 꾹 눌렀다.
“유펠르시아가 커븐 로드와 진심으로 싸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봉인되고, 지켜보면서……알게 됐어. 라시아 님은, 엘리시아를, 벨라를……끊어 내지 못해.”
“초대 가주님들도 마찬가지야.”
“커븐 로드와 같은 세대를 산 분들은 다 그런 모양이더라.”
아르델의 친구들도 아르델에게 동의했다.
그래, 그들은 트라베리아가 어떻게 변해 갔는지를 알고 있다. 타의와 자의로 인해 바닥까지 떨어진 옛 친구를, 과연 죽일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나는 싸우고 싶어! 가만히 앉아 있는 건 나한테 안 맞아!”
아르델이 꽉 주먹을 쥐었다. 아르델이 나를 돌아보았다.
“새벽별무리도 이제 연맹과 협력을 맺는다며?”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래, 그럴 예정이야.”
“나도 너희 팀에 들어갈래. 너희와 함께, 시하랑 예슬이와 함께 싸우고 싶어!”
나는 아르델을 돌아보았다. 아르델의 눈동자에 선명한 진심이 어렸다. 라테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르델 님!”
“릴!”
“할 거야. 말리지 마!”
나는 아르델을 좋아하고, 그녀의 각오를 존중한다. 나는 아르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르델.”
“은하…….”
“지금은 안 돼.”
“……!”
아르델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어째서?”
크게 뜬 눈동자에 억울함이 담겼다. 나는 아르델의 의문에 대답했다.
“오랫동안 봉인되어 억눌린 탓이겠지. 네 마력은 봉인이 풀린 지금도 억눌려 있어. 아마 한동안 마력이나 몸이 생각만큼 움직이지 않을 거야.”
아. 아르델이 멍한 눈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주먹을 꽉 쥔 아르델이 잠시 후 다시금 나를 마주 보았다.
“알았어. 그럼 준비가 되면 찾아갈게.”
“……사실.”
나는 가라앉은 눈으로 아르델을 올려다봤다.
“우리는 이 이상 동료가 필요하지 않아.”
팀의 중심인 우리 다섯 명, 특수한 힐러인 예리, S랭크 전투 마법사인 형일 아저씨에 미영 할머니, 할 일이 많은 나와 인성이를 보조하는 시하와 예슬이, 마지막으로 캘리의 서포트원과 전투원…….
“필요한 사람도 능력도 전부 갖췄어. 새벽별무리는 커븐 로드와 직접 맞서기 위한 전투 조직이야. 커븐 로드를 상대하기 위해 중요한 건 머릿수가 아냐. 사건을 헤쳐 나갈 특별한 능력과 그러기 위한 뛰어난 힘, 도약할 수 있는 재능이 필요해. 그런데 지금의 너는 그만한 힘을 갖추지 못했어. 봉인의 영향이 사라져도 그건 변함없어.”
봉인 안에서 아르델은 힘이 억눌려 성장하지 못했다. 봉인의 영향이 사라진다고 한들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오는 것뿐이다. 지나간 시간을 돌이킬 수는 없다.
덤덤하고 냉정하게 말을 이어 가는 동안 아르델의 감정이 여러 번 바뀌었다. 처음엔 당황한 듯했다. 그러나 그 감정은 이내 깊고 어둡고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니 우리를 찾아왔을 때 너는 증명해야 해. 우리가 널 동료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를, 네 가치를.”
옛 친구에게 하는 말치고는 지독히도 냉정하고 차가운 말에 아르델의 친구들이 분노하거나, 동요하거나, 긴장했다. 그러나 동료들은 모두 당연하다는 눈으로 아르델을 마주 보았고, 아직 변해 버린 세상을 직면하지 못한 아르델과 그녀의 친구들도 결국 내 말을 납득했다.
곧 아르델이 쓰게 웃었다.
“너, 변했구나.”
“응.”
“많이 변했어. 변할 수밖에 없었다는 걸, 알겠어.”
목멘 목소리가 이어졌다. 흔들리던 녹색 눈동자가 천천히, 그러나 선명하고 단단하게 굳었다.
“알았어. 네 말 잊지 않을게.”
그것으로 일단락된 줄 알았다. 그러나 아르델을 따라 라테나를 비롯한 아르델의 친구들도 나섰다.
“릴이 들어간다면, 우리도 들어가고 싶어. 새벽별무리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을 알려 줬으면 해.”
“하나, 실력은 최소 A랭크. 둘, 트라베리아에 원한을 가지고 있을 것.”
나는 세필리오를 어두운 눈동자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평범한 원한으로는 부족해요. 사지가 부러지고, 뜯기고, 종내에는 죽더라도, 그 녀석들의 가슴에 검을,”
콱! 나는 신발 굽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땅이 쩌저적 갈라졌다.
“꽂을 수 있는지. 그 정도로 필사적인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놈들을 죽일 수 있는지. 그러기 위해서 살아남을 각오는 되어 있는지.”
바로 앞에서 살기를 맞은 세필리오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아르델의 친구들이 흠칫 뒤로 물러났다.
“우리는 그걸 확인해 볼 거예요. 그 정도의 각오가 아니면 방해가 될 뿐이에요. 실제로 저희도 팔, 다리 한 군데 뜯어지는 건 예사인 싸움을 넘어왔어요. 당신들에게 그 정도 각오가 있나요?”
날카롭게 후벼 파는 목소리에 세필리오가 질린 얼굴로 물러섰다. 그들에게 그런 각오가 있을 리 없다. 왜냐면 그들은 유펠르시아. 트라베리아의 손에 잃은 게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난, 있어.”
하지만 아르델은 다르다. 아르델의 소중한 사람은 예슬이나 시하의 소중한 사람과 대부분 일치한다.
“나리, 현제, 민하, 민아 선생님…….”
아르델은 우리가 아는 이름을 한 명 한 명 읊었다.
“한수, 민희, 현호……그리고 너희까지. 어떻게 싸우지 않고 참겠어?”
아르델이 눈시울을 붉히며 나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어떻게 가슴에 묻겠어?”
아르델은 한없이 터져 나오려는 원망을 애써 억눌렀다.
“너희가 고작 4년 만에 이렇게 강해졌으니, 나도 그렇게 강해지겠어. 이제 봉인은 풀렸잖아. 난, 싸울 거야. 너희가 없었어도 싸웠을 거야.”
“그래.”
예슬이가 아르델의 손을 꼭 붙잡았다.
“같이 싸우자.”
아르델이 활짝 웃었다. 눈부실 정도로 해맑은 미소였다.
“당연하지!”
소영이가 깨어날 때까지는 유펠르시아에 머물러야 한다. 우리가 다시 성으로 돌아왔을 무렵에는 백한 선생님과 유펠르시아 일행도 이야기를 끝낸 모양이었다.
“봉인을 푸는 게 끝났으니 이야기하는 건데.”
“네.”
“동맹을 맺었으니 너희 쪽에 사람을 몇 명 파견 보내려고 한다.”
백한 선생님이 팔짱을 꼈다.
“또 연락을 끊을 줄 누가 알아.”
“……대현에 캘리 단원들이 있는 한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그래도, 만일을 위해서다.”
무심코 변명에 가까운 말을 했다. 그러나 백한 선생님은 이미 결정을 내린 모양이다.
“아직 고민하고 있는데, 한 명은 아마 저 녀석일 거야.”
그러며 백한 선생님은 창밖에 있는 성후 오빠를 가리켰다. 죽어 버린 것처럼 허무한 눈으로 걷고 있는 성후 오빠를 보니 가슴이 아려 왔다. 참극 이후 항상 함께 있던 주연 선배도 이제는 없다.
‘친구도, 연인도, 부모도, 친한 후배도.’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싸우고 싶어 미치려고 하니까 적당히 싸우게 해 줘라.”
“……네.”
나는 가라앉은 눈으로 창문 너머를 응시했다. 머지않아 성후 오빠의 모습이 창가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저놈 한 명으론 불안하니까 두어 명쯤 더 보내려고 하거든?”
“네.”
“에이온과 대화를 나눠 보니까……보안이 조금 걱정되더군.”
“네? 보안요?”
추적도 안 통하는 데다 자연의 가호로 몸을 숨기고 있는 와중에 보안? 눈빛을 읽었는지 백한 선생님이 혀를 찼다.
“시스템 쪽 말이야. 지금까진 마법으로만 통신을 했고 서버도 문이와 인성이의 컴퓨터마법으로만 사용했지만 이제부터는 아니잖아? 함선의 컴퓨터와 정보 베이스 말이다. 다른 건 환각이랑 가호로 숨긴다 쳐도 인터넷 서버까지 그게 가능할까? 베로니카가 있잖아. 지금의 너희 기술로는 베로니카의 프로그램 기술을 막기는 어렵지 않겠냐?”
“……아.”
확실히, 맹점이었다. 그렇다고 서버에 계속 문이의 힘을 보낼 수도 없다. 물론 캘리번의 컴퓨터도 함선의 진화에 맞춰 성장했을 테고, 내 마력이 들어간 만큼 환각마법을 응용해서 프로그램을 지키거나 파고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과연……베로니카의 정보 수색 능력을 막을 수 있을 정도일까? 서버를 해킹당하면 아무리 자연의 가호를 받는대도 추적될 수 있다.
“보안 상태가 뛰어나긴 한데 너희의 중요성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 시스템의 방화벽은 기껏해야 A랭크, 함선을 관리하는 윌터는 프로그램보다는 무기 개발이 전공이고, 정보 부대 소속 리앙도 인터넷을 통한 정보 수색보다는 마법으로 정보를 찾는 게 특기인 모양이더군. 환각마법을 사용하면 확실히 다르겠지. 그래도 조금……부족해.”
“그건……그럴지도요.”
“우리 쪽에 마법 실력은 보통이지만 프로그래밍 실력만이라면 A랭크 이상인 놈이 있다. 네 마법에 그 녀석의 관리 실력을 더하면 베로니카의 정보력에 대응할 수 있겠지. 다만……마법 실력 말고도 문제가 있다.”
문제라고? 나는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일단……실력이 어느 정도인데요?”
“이제 겨우 B랭크다.”
“으음……너무 위험한걸요.”
그 정도 실력으로 우리 팀에 있다간 소리 소문 없이 비명횡사할 가능성이 높다.
“실력 말고는 뭐가 또 문제예요?”
백한 선생님은 날 보고 잠시 머뭇거렸다.
“하아……. 너 혹시 블랙 재규어를 기억하냐?”
“블랙……재규어?”
낯설면서도 완전히 생소하지는 않은 단어에 나는 잠시 기억을 뒤졌다. 생각보다 금방 떠올랐다.
“블랙 재규어라면…….”
백한 선생님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한테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만……그래, 그놈이다. 블랙 재규어의 뛰어난 해커이자 참모인 렉스.”
과거의, 지금 상황에 비교하면 별거 아닌 수준이라지만 무척 불쾌했던 기억이 떠올라 나는 표정을 굳혔다.
“그 사람이 왜 대현에 있는 거죠? 사형……된 거 아니었나요?”
“능력이 너무 뛰어나서 경찰 측이 기억을 지우고 이용하려 하더군. 그럴 바에야 차라리 우리가 감시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데려온 거야. 실제로 그놈의 프로그램 관리 실력은 무척 뛰어나.”
“솔직히 꺼림칙해요.”
“알아. 그냥 발닦개로 써. 너희 보안이 베로니카 상대로 불리한 건 사실이야. 한 명이라도 더 능력 있는 놈이 필요하지 않냐?”
“…….”
“문이로 골수까지 이용해 버려.”
확실히 나와 인성이의 서버 보안 실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다. ‘이용한다’라. 사람을 이용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알았어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실력을 한번 확인해 볼게요. 하지만 그럼 백한 선생님은 괜찮겠어요?”
“괜찮아. 난 이미 그 녀석의 골수까지 뺐거든.”
백한 선생님이 한 번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마지막 세 명째는 여울이다.”
“거절할게요.”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여울 선생님은 대현에서 가장 뛰어난 의사잖아요. 저희한텐 예리와 레비, 샌시가 있어요. 사실 예리만으로 충분하고도 넘칠 정도예요.”
“야, A랭크 마법사가 그렇게 흔한 줄 알아?”
“…….”
“하여간 고집쟁이. 예전엔 안 그러더니 고집쟁이가 다 됐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백한 선생님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니……예리를 찾는다고 너흴 찾던 놈이 한 명 있었는데, 걘 B랭크라서 안 되겠군. 나름 다재다능한 녀석인데. 방어도 하고, 치료도 하고, 공격도 하고, 서포트도 하고.”
“예리를요?”
“그래. 예리의 단짝이었다나 봐.”
단짝이라. 머릿속에 얼핏 예리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남자인가요?”
“어, 남자다. 알고 있냐?”
“아마도.”
아마 예리와 처음 만났을 때 예리와 같이 있었던 그 남자가 아닐까. 예리를 공주님이라고 부르다가 예리한테 타박을 받았던 유쾌한 남자.
나는 시선을 내리며 냉정하게 평가했다. 하지만 B랭크라니 안 되겠군. 원래 그 나이에 B랭크인 것만 해도 무척 대단한 일이지만…….
“여울이가 안 되면 유미를 보내야겠군. 괜찮지? 유미 걔는 의사는 아니어도 치료마법이 특기고, 전투도 그럭저럭 하는 데다, 마법석도 만들 수 있다. 다재다능하지.”
“…그런가요.”
나는 속으로 쓰디쓴 기분을 삼켰다. 유미는 내 가장 평온한 기억 속에 있는 친구로, 백한 선생님처럼 좀 더 안전한 곳에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바람은 이미 우리가 망쳐 버렸다.
“혹시 모르니 동료들과 의논한 뒤 대답해 드릴게요.”
“그래라.”
비교적 몸 상태가 양호한 왕궁 마법사 몇 명이 바깥을 조사할 계획을 짰다. 인하도 에펠로나를 통해 바깥 정보를 수집했다. 에펠로나와의 만남은 인하에게 정말 다양한 힘을 주었다. 부족했던 많은 것이 보충되었다. 제어력, 방어력, 정보력 등. 거기에 시어볼드의 마법이 포함되어 서포트까지 가능해졌다.
이미 인하는 대현 사람들에게도 소속마법을 연결했다. 이것으로 인하의 힘은 또 강해졌다.
트라베리아라 해도 당장 유펠르시아를 찾지는 못할 것이다. 소영이가 깨어나면 우선 유펠르시아 주위를 맴돌며 다음 작전을 생각할까. 며칠 동안, 아니, 몇 주 동안 열쇠에 마력을 쏟아붓느라 꽤나 기력을 소모했다. 유펠르시아에서 나는 오랜만에 깊게 잠들었다.
……….
번쩍 눈을 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숨을 골랐다.
“헉…!”
또 그 꿈이다. 세계가 무너지고, 그 사이에 웃고 있는 벨라가 있다. 그 뒤에는…….
…….
너무 흐려서 보이지 않는다…….
‘역시 예지몽이야.’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같은 예지를 몇 번씩이나 반복해서 본 건, 지금까지 딱 한 번뿐이다. 참극이 일어났던 날에 대한 예지.
‘그만큼 심각한 예지라는 건가. 그렇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세상이, 그렇게…….’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하늘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생각보다 많이 잤다.
‘느낌상 아마 아직 몇 년 남았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멍하니 걷다 보니 어느새 소영이가 잠든 방 앞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시간인 만큼 아무도 없었다.
방 안으로 한 발짝 발을 옮기는 순간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바람의 기척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나는 천천히 소영이에게 다가갔다. 원래도 옅은 갈색이던 머리카락이 좀 더 옅어져 있었다.
“다행히 잘……삼키고 있네.”
유펠라의 마력이 어느새 소영이의 안에 융화되고 있다. 나는 무심코 벨라의 말을 떠올렸다.
그녀는 내가 하늘에 닿을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다음에 말한 ‘영혼’. 영혼의 크기가 재능의 근원이란 말인가?
‘확실히 내 영혼은 커.’
그렇다면 확실히 우리는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다. 나는 아직도 이성진의 영혼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러나 크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건물 하나보다는 더 크다. 내 영혼도……그 정도는 된다. 사실 나도 내 영혼은 제대로 인지하기 어렵다. 안에서 보면 영혼이 끝나는 경계선이 어느 정도인지도 알 수 없다. 몸을 둘러싸고 있으면 주위를 관찰할 때 방해가 되므로 평소에는 작게 갈무리하고 다닌다.
인하와 소영이, 인성이의 영혼도 웬만한 사람보다 훨씬 크다. 방 하나는 채우고도 남는다. 나는 보통 사람보다 큰 영혼을 지니고 있는 자들을 하나둘 떠올렸다. ……그렇구나. 확실히 S랭크 상위권 마법사의 영혼은 다들 크다. 루카, 샐레나, 하인리히, 안토니오……. 영혼의 크기가 재능이라면 자칫 자만심에 빠질 것 같다. 우리의 영혼은 그들의 영혼보다 크니까.
……그리고 나는 S랭크 상위권 마법사보다 커다란 영혼을 지닌, 지녔던 자를 몇 명 더 알고 있다. 제현 오빠, 한수……. 나는 소영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역시 단순히 ‘영혼의 크기=재능’은 아닐 것이다. 소영이는 한수보다 커다란 영혼을 가지고 있지만 한수보다 성장이 느렸다.
‘여기까지 왔어. S랭크 상위까지 왔어. 유펠르시아의 봉인도 풀었어. 그들의 거미줄을 끊었어. 알카무라. 다음은 토게인과 무르시엘. 무르시엘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분명…….’
──커븐 로드와 대등한 자리까지 오른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트라던트도 좀 더 자세히 확인해 봐야 해. 성진과 인하의 실력과 특수함이라면 분명 이제 실력이 낮은 커븐 로드라면 상대할 수 있겠지. 그럼 첫 목표는 리우 홍링이나 소니아……일까. 베로니카를 직접 만나 보고 싶어. 어린 세대니까 다른 커븐 로드보다는 약할 확률이 높아. 리피트처럼 예외일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만난다면 어느 정도 실력인지 바로 알 수 있는데.’
상념과 함께 소영이의 옆자리를 지키다 일어났다. 조금씩 빛이 새어 들어오는 하늘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창공의 나라에 봉인이 풀린 이후 첫 번째 아침이 찾아오고 있다.
─섬찟.
“……?”
그 순간 이상하게 가슴이 차가워졌다. 아니, 뜨거워졌나?
평화롭게 흘러가던 하늘의 공기가 달라진 듯한 느낌이 든다. 심장이 경종을 울리며 쿵쿵 뛰었다.
나는 가슴을 꽉 붙잡았다. 내 불길한 예감은 잘 틀리지 않는다. 본능적으로 마법을 사용했다.
『책 속의 세계─꿈의 장막』
『책 속의 세계─꿈의 안개』
꿈의 마력이 유펠르시아에 퍼져 나간다. 나는 감각을 곤두세웠다. 이 느낌은 대체…….
‘다가오고 있어.’
뭐가?
‘여기로 오고 있어.’
그러니까, 뭐가?
꿈속을 꿰뚫는 내 시선이 한순간 정신세계 너머를 꿰뚫었다. 새까만 악의가 흘러넘친다.
‘이런!’
내가 마법으로 목소리를 전하기 전에 내가 마법을 쓴 것을 눈치챈 자들이 하나둘 바깥으로 나왔다. 성진이와 인성이, 인하, 예리와 에이온, 테온, 오시언, 앰버…….
유펠르시아의 가주들도 나왔다. 바람과 활을 계승하는 프로제 가문의 초대 가주와 나무와 물을 계승하는 실바디움 가문의 초대 가주. 나는 마력을 널리 퍼트렸다. 조금 늦게 라시아와 다른 가주들, 에밀리아 일행이 나왔다.
“무슨 일이지?”
“벨라가…….”
나는 한 곳을 노려봤다. 이제 흘러나오는 영혼이나 마력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다가오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겠다.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오고 있어요.”
“벨라가…?”
라시아의 눈이 아연하게 물들었다. 오시언이 재빨리 카드를 소환했다.
“…정말. 여기를 발견했어. 어떻게?”
어떻게? 그런 걸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인하가 다급히 에펠로나를 불렀다. 아직 천공을 떠다니는 섬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자연의 가호를 하나하나 헤치고 있다. 프로제의 초대 가주 시드가 물었다.
“라시아, 어쩔 거지?”
“…….”
무어라 말하기 위해 입을 벌렸던 라시아가 한 번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벨라와 만나기에는 너무 일러. 도망치자.”
시드가 흘끗 도미니크 실바디움을 돌아보았다.
“그렇다고 한다, 니키.”
“넌 내 귀가 먹었다고 생각하는 거냐? 나도 옆에서 같이 듣고 있었거든?”
“소망의 힘이여.”
라시아가 떨리는 눈으로 허공을 보며 읊조렸다.
“나에게 길을 알려 다오. 저들을 피해 갈 길이 있다면…….”
섬이 어느새 움직이고 있다. 옮기고 있는 것은 유펠라와는 다르나 그만큼 강력한 바람을 지닌 시드다. 라시아에게서 흘러나온 금빛이 휘몰아치더니 내게 다가왔다. 마법이 내게 스며들며 내게 말이 아닌 어떤 의지를 전한다.
“마법이 네게 어떤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구나.”
내게 있는 가능성……이라고 하면.
‘하나밖에 없지. 꿈속에 들어가는 거야.’
이렇게 커다란 것을 통째로 꿈속에 집어넣는 건 처음인데. 흔적을 남기지 않고 순식간에 꿈속에 들어가는 방법이라면…….
『책 속의 세계─이야기 모음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