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387
카인의 은푸른 망토 위로 별빛을 품은 듯한 새까만 망토를 두른 인형이 나타났다. 꼭두각시 인형의 망토 안으로 우주를 닮은 풍경이 펼쳐진다.
「집어삼켜라.」
주위로 바늘 같은 실이 퍼지는가 싶더니 실을 따라 거대한 어둠이 증식했다. 늘어난 검은 공이 제게 닿는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제압!!』”
나는 창백한 얼굴로 언령을 사용했다. 플로라의 마법석이 아니었다면 플로리아는 물론이고 세놀드까지 멸망하고도 남았다. 나는 이를 악물며 카인의 마법을 밀어냈다. 눈을 번뜩이며 환각마법을 사용했다. 그 순간, 검은 공이 끝에서부터 꿈의 힘에 녹아들었다.
환각마법의 기본기이자 오의─현몽마법.
소니아를 꿈에서 몰아낸 순간 내 환각마법은 무서운 속도로 진화했다. 그렇게 깨운 힘 중 가장 강력한 힘이다. ‘실제’를 ‘환상’으로 바꾸는 힘. 막대한 마력이 들고, 지금은 마법이나 물건 정도에밖에 적용하지 못하지만, 존재하는 것을 환상으로 취급하여 이윽고는 없애 버릴 수 있다. 명실상부 적을 요격하기 위한 기술이다.
내 마법은 원래부터 타인의 마법이나 물건에 영향을 끼쳤다. 그것들을 꿈속에 옮기는 것 역시 가능했다. 어찌 보면 그것이 진화한 것에 가까우나, 그것보다 훨씬 더 본질적이고 강력한 기술이다.
「아, 이 소리는 뭐지? 제법 재미있는 기술을 쓰는걸? 그럼 슬슬 진짜로 해 볼까. ─가시 성벽.」
래넌의 손에서 나온 종이 더미가 하늘을 날았다. 그게 위험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눈치챈 동료들이 공격했다. 동료들의 마법에 플로라의 힘이 실렸다.
그러나 마법석은 플로라의 것이어도 나는 아직 랭킹 20위권에 달하지 못했다. 동료들 역시. 반면 래넌은 커븐 로드 사이에서는 8위나 9위 정도지만 랭킹 20위권 이내의 무시무시한 초월자다.
그리고 랭킹 20위권 안에서는 1위 1위의 실력 차가 무섭도록 무겁게 다가온다.
플로라와 나의 마법이 악보를 휘감으려 했으며, 동료들의 공격도 래넌의 악보를 노렸다.
그중 반은 래넌의 곁에 있던 카인의 인형이 해치웠으며, 나머지는 래넌의 옆을 떠돌던 요정들이 없애 버렸다. 그러고도 남은 공격은 악보가 그대로 흡수해 버린다.
악보에서 휘몰아치는 힘이 플로라의 마법을 거세게 밀어냈다. 순도와 레벨은 플로라 쪽이 압도적으로 강할 터다. 하지만 사용하는 마법사가 나여서야…….
‘좀 더, 조금 더…….’
악보 안에서 무서운 속도로 가시 줄기가 뻗어져 나왔다. 바깥에 있는 가시 줄기와 거의 비슷한 효과를 지닌 가시 줄기다. 플로라의 마법과 동료들의 공격이 애써 가시 줄기를 막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래넌의 마법은 계속해서 플로라의 마법을 잡아먹었다.
아무리 플로라의 마법이라도 이것은 죽은 자의 힘이다. 죽은 자의 힘은 완전할 수 없다. 소모되고 언젠가는 노쇠해 사라진다.
플로라의 힘이, 밀린다.
‘하지만.’
하지만 밀리고 있을 뿐이다. 커븐 로드의 마법 역시 평소의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래넌이나 카인 역시 그 사실을 느끼고 있다.
콰득!
어딘가에서 튀어나온 그림자가 가시나무 끄트머리를 갉아먹었다. 차갑고 날카로운 얼음이 가시나무를 얼리고, 플로라의 힘에서 형상을 갖춘 괴수가 가시나무를 찢어발겼다. 래넌은 그에 맞춰 악보를 몇 개 더 던졌다.
「계절의 수호자.」
악보 안에서 튀어나온 정령이 마법을 내질렀다.
콰가가각!
그 순간 마법이 폭풍처럼 퍼지며 가시 줄기의 힘이 증폭했다. 동시에 플로라의 힘이 옅어졌다.
‘정화!’
그사이 카인도 인형의 힘을 증폭했다. 인형 군단이 도시를 무차별하게 유린했다.
「카인 형, 미안. 플로라의 힘, 생각보다 강력한걸? 이미 죽은 지 오래된 자의 힘인데.」
「그렇군.」
「그런데 어떻게 유은하가 플로라의 힘을 쓸 수 있는 걸까?」
「흠…….」
가시나무가 점점 도시 전체로 퍼졌다. 동료들은 필사적으로 피난민을 유도하고 있다. 그 사이를 카인의 인형과 래넌의 마수가 끼어든다. 곤란함을 느끼며 혀를 찰 무렵, 하늘에서 강력한 빛이 떨어져 내렸다.
콰과과광!
조금 놀랐으나 곧바로 수긍했다.
‘하긴, 이 상황에서 몰래 올 수만은 없었겠지.’
깃털을 흩날리는 강대한 태양의 힘이 가시나무를 태워 없앤다. 인형에도, 도시에도 불이 붙었다. 그러나 태양의 힘을 고스란히 간직한 빛은 이글거리는 빛으로 도시를 지킬 뿐 태우지는 않았다. 나는 인하를 보던 시선을 내려 다시 카인과 래넌에게 집중했다.
랭킹 20위권에 바짝 다가가고 있는 인하의 공격력과 나의 방어력, 거기에 플로라의 힘. 이 힘을 합치면 충분히 래넌과 카인을 견제할 수 있다.
“후우.”
나는 숨을 삼키고 다시금 플로라의 마법에 집중했다. ……그때, 어째서인지 갑자기 가슴이 선뜩해졌다.
“……?”
플로라의 마법석을 쥔 채 시선을 움직인 순간이었다. 알 수 없는 압력이 목에 부딪쳤다. 그 압력은 나를 그대로 바닥에 패대기쳤다.
「마스터!」
“큭!”
문이가 당황하며 나를 불렀다. 마법석과 통해 있는 영상 안에서 래넌이 웃었다.
「도착했네.」
“……!”
「자연마저, 엘리시아 전하마저 속일 수 있는 게 딱히 너만은 아니거든?」
내 목을 짓누르고 있는 건……누군가의 손이다. 내가, 보지도, 기척을 느끼지도 못했다고? 아…….
그런 일이 예전에도 한 번 있었다. 캐티아 때다.
‘음악으로, 가렸구나.’
내가 환각으로 모든 존재를 속일 수 있다면, 클라인 남매는 음악으로 모든 존재를 속일 수 있다. 상대의 몸을 가리고 있던 음악이 사라졌다.
「죄송합니다, 마스터.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얼굴 위로 긴 검은 머리카락이 사라락 흘러내렸다. 음악으로 이루어진 장막이 걷히자 몸 위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당신……은…….”
내 위에 올라탄 남자가 씨익 웃었다. 금빛 눈동자가 요사스럽게 휘어졌다.
“그때와 비교해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해졌군.”
나는 이를 악물며 내 목을 쥔 손목을 붙잡았다.
“다시 한번 나와 대등해진 너와 싸울 수 있을 줄이야!”
“데……미안!”
사납게 웃는 데미안의 등 뒤로 검은 피막 날개가 솟아올랐다. 손 역시 사람의 손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비늘에 감싸인, 짐승보다 날카로운 손톱이라니.
그래, 데미안이다. 장군 시리즈이자 클라인 남매의 직속 부하, 드래곤이 모델인 그 데미안!
날카로운 손톱이 나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손톱이 나에게 닿기 전에 나는 무릎을 들어 데미안의 배를 온 힘을 다해 걷어찼다.
콰과광!
“후우.”
내 괴력에 데미안이 벽에 처박혔다. 그러나 벽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래. 여긴 무너지지 않아. 아무리 커븐 로드라 해도 쉽게 무너뜨리지 못할 거야. 플로라의 기척이 가장 짙게 남아 있는 장소니.’
나는 손으로 목을 한 번 쓸었다. 자국이 남을 정도는 아니다. 내 몸은 튼튼해서 이 정도로는 상처 입지 않으니까.
나는 이내 플로라의 마법석을 꽉 붙잡았다. 이대로는 쥐고 있기 불편하다. 플로라의 마법석에 간섭해 모양을 축소하고 목걸이로 만들어 목에 걸었다. 데미안이 웃음을 터트렸다.
“큭……큭큭큭…….”
나는 데미안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클라인 남매의 음악 역시 우리 기술 못지않게 특수하다. 과연 이 안으로 들어온 것이 데미안 한 명뿐일까? 신경을 곤두세우며 주변을 훑었지만 알 수 없었다.
그건 그렇고 데미안은 어쩐지 한국에서 만났을 때와는 꽤나 분위기가 달랐다. 과묵하고 차가운 성격이 아니었던가?
“기쁘기 그지없군. 이렇게 다시 싸울 수 있을 줄이야.”
그 말도 좀 이상했다. 그도 그럴 게 나와 데미안이 싸운 건 한국에서 한 번뿐, 그것조차 제대로 된 싸움이 아니었다. 그는 분명 ‘대등해진 너와’라고 했다.
‘아.’
잊고 있던 기억이 머릿속에 스쳤다. 그러고 보니 내가 ‘드래곤’을 만난 건 한국에서, 혹은 장군 시리즈가 알려지고 나서가 처음이 아니다.
내가 드래곤을 처음 만난 건 아직 내가 대현에 다니고 있던 시절이다. 그리고 그 드래곤은 검은 비늘에 금색 눈을 지녔고 공간계열마법을 썼다.
잊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굳이 상기해 낼 정도도 아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 정도는 했지만 그것 역시 금방 잊어버렸다. 중요한 일도 아니었으니.
하지만 혹시나가 사실이었나 보다.
‘거기다 저쪽은 날 기억하고 있었나 보네.’
그는 내가 처음으로 손 속에 자비를 두지 않고 쓰러뜨렸던 상대다. 결과 그는 팔과 다리를 잃고 빈사 상태에 빠졌다. 사실은 그대로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그에게 그런 상대는 내가 처음이 아니다. 형일 아저씨와 하진 아저씨도 그를 쓰러뜨렸다고 했으니. 그러나 아무래도 나는 그에게 뭔가 특별한 상대였나 보다. 하지만…….
“전 당신과 싸우고 있을 틈이 없습니다만.”
──나는 아니다.
한때는 그가 무서웠다. 트라우마덩어리였다.
그러나 그 기억은 잊혀졌다. 머지않아 더 절망적인 기억으로 점철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손을 뻗었다. 목걸이 주위로 붉은 빛이 선명하게 퍼졌다. 겁도 없이 적진 중심부를 파고들어 올 줄이야. 더군다나 플로리아에서! 나와 그가 대등한 건 바깥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여기서는 압도적으로 내가 유리하다!
데미안이 호승심에 가득 찬 눈을 요사스럽게 휘었다.
“하하! 그런 것치고는 살기등등한걸?”
“빨리 끝내 드리죠.”
여기서 죽일 수 있다면야 나야 좋지. 어차피 우리의 적이니!
『특수 기술─검과 방패 시리즈』
사용할 마법을 정하고 손을 뻗었을 때, 데미안이 씩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의 손목이 빛나며 거기에서 황금색 마력이 뿌려지기 시작했다.
“네가 있을 줄은 몰랐지만……나라고 무방비하게 여기에 온 것은 아니다.”
릴리의 음악인가. 하지만 그것이 과연 플로리아에서 얼마나 통용될까. 여전히 유리한 것은 나다. 빨리 싸움을 끝내야겠다.
“문이! 마법석의 조정, 맡긴…….”
[은하야!]「마스터! 위험…!」
“……!”
쿠과과과광!!
경고 음이 들린 직후 무시무시한 마법이 우리가 있던 건물 벽을 정확히 관통했다.
카인의 인형이다. 사람과 꼭 닮은 인형 두 개가 내 앞에 내려섰다.
그 뒤로 마법석 너머로 보았던 인영이 쑥 나타났다. 은푸른 로브를 베일처럼 둘러쓴 카인. 로브 아래로 얼핏 창백한 외모가 드러났다. 데미안이 쯧 혀를 찼다.
“카인 님, 이 여자는 제가 맡으면 안 되겠습니까?”
“이 공간 안에서 너는 유은하를 이길 수 없다. 물러나라.”
데미안이 무척 분한 얼굴로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때 카인을 향해 날카로운 빛이 날아왔다.
빡!
카인의 인형이 인하의 발차기를 대신 얻어맞았다. 여자 인형이 간단히 인하의 공격을 튕겨 냈다.
쾅!
“……!”
인하는 금세 중심을 잡고 재빨리 내 옆에 내려섰다.
“……차례차례 죽으러 오는군.”
나는 목에 건 플로라의 마법석을 꽉 쥐었다.
키잉─.
귀 안으로 듣기 싫은 소음이 울렸다. 하늘에서 무시무시한 마력이 떨어져 내렸다. 색색의 불꽃이 별똥별로 변해 추락한다.
‘래넌!’
내가 차마 반응하기도 전에 플로라의 마법석이 빛났다. 내 안의 마력을 마구잡이로 뺏어 가며 플로리아를 지킨다. 그러나 래넌의 힘은 지금의 나보다 강했고, 음악을 두른 운석은 마법이 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큭.’
억지로 마력이 쥐어 짜내진 탓에 가슴이 아파 왔다. 목걸이를 쥔 손에 힘을 주는 와중 공격이 날아왔다.
콰! 과과과광!
아름다운 여자 인형이 쥔 창인지 지팡인지 알아보기 힘든 것에서 길쭉하고 붉은 탄환이 날아왔다. 가까스로 피한 탄환이 벽에 꽂히는 데 그치지 않고 벽을 관통해 날아갔다. 탄환이 멈추지 않고 관통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무시무시한 관통력이다. 인하의 빛보다 더할지도.
여자가 쥔 붉은 보석이 박힌 지팡이 같은 것에서 순식간에 날카로운 칼날이 자라났다. 여자 인형이 지팡이를 휘두른 순간, 단단한 외벽이 저항하는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플로라의 마법석이 점멸했다. 플로리아의 마법에 의해 붉은 머리카락의 인형과 파란색 머리카락의 인형이 튕겨 나갔다. 그러나 완전히 튕겨 나가지 않고 허공에서 버틴다.
끼리릭
카인의 손가락이 움직이며 주변으로 작은 빛 덩어리가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났다. ─인형들이다. 천과 솜으로 된 봉제 인형. 나타난 인형들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며 폭발했다.
콰과과광!!
바깥에선 래넌이, 여기에선 카인이! 마력이 계속해서 빠져나갔다. 플로라의 마력이 도시 전체를 타고 퍼져 나갔다.
“에펠로나!”
눈앞으로 금빛 날개가 폭풍처럼 펼쳐졌다. 나는 카인의 공격이 아주 잠시 주춤한 틈을 타 소리쳤다.
“『별 조각의 열쇠!』 『별들의 잔치!』 『별의 고래!』”
『특수 기술
별하늘의 열쇠 하위 호환─별 조각의 열쇠.
별들의 잔치.
별의 고래.』
별 조각의 열쇠는 별하늘의 열쇠보다는 강제성이 약하지만 그래도 충분히 적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열쇠이며, 별들의 잔치는 책 속의 세계보다는 덜하지만 빠르게 주위를 내 영역으로 만들 수 있다. 주위 모든 것을 별속성 마력으로, 즉 ‘내 마력’으로 강제 변환하는 마법.
──그게 설령 상대의 마법이라고 해도.
까드득
사라락
주위로 별빛 마력이 흩어졌다. 나는 분명 ‘모든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마력도, 혹은 물건이나, 때로는 생명마저도 내가 쓸 수 있는 마력으로 변환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것은 내 의지에 따른다.
플로라의 마법석은 플로리아의 건물이나 마법, 즉 플로리아 도시를 구분 없이 내 마력으로 변환하는 것에는 저항하리라. 하지만 마력 일부만 편입시키는 것이라면 막지 않을 것이다.
구르던 돌들이, 파편들이 별 조각으로 바뀌었다. 플로리아의 영역 안에서 나보다 약한 데미안은 커븐 로드와 달리 그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의 안에서 별 입자가 계속해서 튀어나왔다.
화악─.
별의 영역이 원을 그리며 넓어졌다. 마력 사이사이로 카인의 꼭두각시 실이 박혀 들었다. 박혀 든 실 일부가 내 마력으로 편입됐다. 별의 입자가 뭉치며 고래로 변했다. 고래가 카인을 향해 입을 벌렸다. 이질적인 소리와 함께 카인의 위로 커다란 전자 총이 생겨났다.
“들은 대로 까다롭군. 허나.”
콱! 콰과과과곽!
주위로 날카로운 실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박혔다. 그중 별 입자로 변한 것은 고작 몇 개뿐이었다. 채쟁! 나와 인하의 마력을 날카로운 칼날이 찢었다. 허공에 떠오른 총신에 검날과 탄환이 동시에 생겨났다. 마력 포가 별의 입자를 성대하게 날려 버렸다. 벽마저도.
“큭!”
플로라의 마법석이 또 한 번 점멸했다. 인하가 내 앞을 가로막으며 냉철한 눈으로 카인을 흘겼다.
“너희는 운이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모르겠군.”
카인의 주위로 신기해하는 감정이 흐트러졌다.
“운이 좋았다면 우리와 마주치지 않았을 것이며, 운이 안 좋았다면 그 마법석을 손에 쥐기 전에 우리를 마주쳤겠지.”
나는 코웃음을 쳤다. 뭐라는 건지.
여기에 오겠다고 선택한 것은 우리다. 거기다 정말 운이 좋았다면 여기에서 이렇게 대면할 일은 없지 않았을까.
“공명.”
인하가 오른 손목을 쥐며 읊조렸다. 인하의 손목 위로 금색 링이 떠올랐다. 체인 링에 연결된 빛을 따라 내 마력이 공명하며 증폭됐다.
인하의 주위를 금빛 날개가 감쌌다. 에펠로나, 그녀에게 연결된 수많은 ‘소속자’들.
나와 인하의 실력은 이제 대등하다. 초기에는 내가 월등하게 강했고, 인하가 그것을 따라잡는가 싶더니, 어느새 나를 뛰어넘었다. 그리고 이번엔 내가 인하를 따라잡았다.
새로운 기술, 진화하는 힘. 그럼에도 내가 결정적인 순간 아직 인하에게 뒤지는 이유는 바로 저 혈족마법이다. 인하의 혈족마법 ‘소속마법’은 자신이 소속되고 자신에게 소속되어 있는 사람의 숫자만큼 강해진다. 소영이와 인성이가 최근 급속하게 강해지고 있는 것은 본인의 재능 덕분도 있지만 인하의 혈족마법에 의해 끌어올려지고 있는 부분도 강하다.
“연결.”
“그리고 운이 안 좋았다면.”
카인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 순간 하늘에서 기둥이 떨어졌다.
‘루카!’
나는 흠칫했다. 그러나 카인은 루카가 온 것을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는지 태연히 말을 이었다.
“그녀가 오기 전에 너희는 내 손에 죽었을 것이며, 운이 좋았다면.”
오싹
나는 황급히 목을 뒤로 젖혔다. 그 사이를 칼날이 스치고 지나갔다.
서걱!
목에 단단히 매달려 있던 목걸이 줄이 잘려 나갔다.
「……!」
“아……!”
잘린 목걸이 줄은 두 개. 방금 즉석으로 만든 플로라의 마법석이 달린 목걸이와, 부적 삼아 가지고 다니는 반지 목걸이다. 전생의 남자 친구가 준 커플 링.
나는 완전히 잘리지 않고 덜렁거리는 목걸이 줄에서 다급히 반지를 붙잡았다. 반면 완전히 잘린 목걸이 줄에서 떨어져 나간 새빨간 보석은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정지했다.
화악─.
새빨간 보석이 무언가에 반발하듯 빛을 뿌린다. 플로라의 빛이 이 자리에 숨어든 또 한 사람의 모습을 가리고 있던 음악을 흐트러뜨렸다.
“인하야!”
인하가 빛을 퍼트려 다급히 상대를 향해 마법을 날렸다. 그러나 그자는 인하의 빛을 스르륵 빠져나가 카인의 옆에 섰다.
안개가 불확실한 사람 형태를 취했다. 카인의 손 위로 붉은 보석──플로라의 마법석이 떨어져 내렸다.
“운이 좋았다면, 내 부하가 여기 있다는 걸 눈치챘겠지.”
“──!”
나는 이를 악물었다. 문이도 나도 처음 데미안이 나타난 이후로 줄곧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눈치채지 못했다. 릴리의 음악은 지금의 나로서도 ‘파악할 수 없다’는 건가.
“‘부하’…….”
문이가 분한 듯 모니터를 지지직거렸다. 나는 새삼스럽게 안개 덩어리를 살폈다. 저것은 카인의 ‘인형’이 아니다. 키메라다. 카인에게 종속된 직속 키메라. 그래, 분명 카인은 키메라를 셋 정도 데리고 있었다.
‘모델은 고스트. 실력은 랭킹 30위 전후.’
지금의 우리와 비슷한 실력을 지닌 부하. 나는 이를 악물었다.
“잘했다. 로기아.”
“감사합니다, 주인님.”
안개가 합쳐지며 모습을 갖췄다. 창백한 피부를 지닌 여자가 나타났다. 그 형체마저 어느 순간 안개처럼 흩어진다.
나와 인하는 그 순간에도 오로지 카인이 쥐고 있는 플로라의 마법석만 눈으로 좇았다. 인하가 읊조렸다.
“공명.”
팔목에 새겨진 링이 떠오르며 나와 인하의 마력이 다시 한번 공명했다. 나는 플로라의 마력을 복사해 흘려보냈다. 나와 인하를 중심으로 붉은 마력이 퍼지자, 카인의 손안에 있던 플로라의 마법석도 공명하기 시작했다.
“연결.”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금색 선이 플로라의 마법석을 향해 뻗어진다. 그러나 카인은 베일처럼 덮어쓴 로브 아래로 웃었다.
“가소로운 짓거리를.”
카인이 붉은 마법석을 꽉 쥐었다. 마법석을 중심으로 폭풍 같은 마력이 일어났다. 그 순간, 주위에 퍼진 별의 입자가 카인에게 연결되었다.
“……!”
다급히 마력의 제어권을 도로 가져오려고 했으나 별의 마력은 응답하지 않았다. 카인을 중심으로 실이 계속해서 퍼져 나갔다.
“실감하는 것이 좋다. 네 아무리 제어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전문마법을 이길 수는 없다.”
카인의 실에 조종당한 별의 입자가 우리를 향해 몰려들었다. 인하가 다급히 빛을 퍼트렸다. 그와 동시에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커다란 폭발이 일었다.
가까스로 하늘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별의 고래’ 덕분이었다. 별의 고래가 우리의 데미지를 대신 받았다.
“은하 씨, 인하 씨, 괜찮으십니까?”
우리가 이동한 장소는 루카 옆. 루카는 아르피나와 함께였다.
“네. 괜찮아요.”
“잘 버텨 주셨습니다.”
나는 이를 아득 갈았다. 이번에는 드물게도 상처를 입지 않았으나 상황은 오히려 나쁘다.
“안, 좋아요. 플로라의 마법석을 빼앗겼어요.”
“플로라의 마법석……!”
두 사람이 눈을 크게 떴다.
나는 이를 갈며 먼 하늘에 있는 카인을 돌아보았다. 카인의 기척도 폭발과 함께 플로리아의 중심부를 벗어났다. 플로리아의 끄트머리에 선 카인이 손을 펼쳐 보였다. 목걸이 장식용으로 작게 축소되어 있던 플로라의 마법석이 어느새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플로라의 마법석 주위를 마력 실로 된 나뭇가지 같은 것이 둘러싸고 있다.
“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