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388
루카의 주위로 생겨난 기둥이 날카롭게 카인을 향해 쏟아졌다. 그러나 플로라의 마법이 카인과 공명하더니 루카의 마법을 완벽히 막아 냈다. 허공에서 멈춰선 루카의 기둥이 빠직빠직 부서져 내렸다.
“……!”
“저건!”
우리는 숨을 삼켰다. 아르피나가 이를 악물었다.
“어째서 플로라의 마법석이 카인을 따르는 거죠?”
나는 그 이유를 안다. 시야에 비치는 광경에 입술을 악물었다. 카인이 인형술로 플로라의 마법석을 조종하고 있다. 마법석은 물론 마법석에 담긴 영혼, 즉 정신세계까지도.
플로라의 마법석을 덮은 실고치가 두터워졌다. 카인이 아공간에서 ‘열매’를 꺼냈다. 트라던트 씨앗을 품은 특수한 열매다.
“……!”
설마……! ‘씨앗’을 본 순간 우리는 카인이 하려는 짓을 눈치챘다. 누군들 눈치채지 못할까! 우리는 곧바로 마력을 일으켰다. 그것만은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한다.
“플로라, 그대에게.”
카인을 막으려는 마법사의 마력이 여기저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나는 한 발짝 디뎌 꿈속 세계로──.
“회색빛 세계.”
그때 세상에 얼어붙었다.
차갑고 활기가 없는 악보가 주위를 감싼다. 세상이 온통 회색빛으로 변했다. 공간은 얼어붙고, 마력은 빛을 잃고, 세상은 생명을 잃는다.
“루시드(꿈 장인)의 특수능력은 성가시다니까. 거기다 네 범위는 소니아 누나보다 훨씬 넓잖아.”
“래넌!”
인하의 공격이 래넌을 향했다. 그러나 그보다 빠르게 하늘에서 빛이 쏟아져 내렸다. 눈부신 빛이 회색빛 세계를 희미하게나마 빛으로 물들인다. 캘리번의 마력 포다!
귓가에 렉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리더, 괜찮으십니까?]“괜찮아. 견제 부탁해.”
인하가 손을 뻗으며 외쳤다.
“에펠로나!”
「태양의 가호를 그대에게.」
인하의 주위로 금빛 깃털들이 파도처럼 일어났다.
“라이트 리버!”
깃털이 나선을 이루며 카인을 향해 쏟아졌다. 곧이어 루카의 기둥이, 아르피나의 방패가, 아래에서 이성진의 마법을 흉내 낸 그림자가, 천공의 바람이, 모든 것을 분해하는 마력이 휘몰아쳤다.
나는 허공에서 검을 꺼냈다.
“『란스의 검!!!』”
─째깍.
그러나 그보다 빨리.
“돌아가는 시계.”
째깍.
래넌의 악보가 펼쳐졌고, 그 뒤를 이어……카인의 인형술이 완성되었다.
“플로라여. 그것이 그대의 새로운 몸이다. 이곳이 바로 그대의 영지다.”
플로라의 마법석이 트라던트의 씨앗을 흡수한 건지, 아니면 그 반대인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째깍….
다만 우리의 마법은 래넌의 손에 의해 튕겨 나갔고, 그와 함께 카인의 손에서 떨어진 트라던트가 순식간에 가지를 뻗으며 꽃을 피웠다. 새빨간 가지와 새빨간 나무, 새빨간 LV3 트라던트 디포르. 줄기처럼 뻗어진 가지가 우리의 마법을 순식간에 흡수하며 우리를 덮친다.
“자, 이제 너희가 할 일을 하러 가거라. 남아 있는 사람을 전부 죽게 만들고 싶은 것은 아닐 테지?”
그 사이에서 카인이 사납게 웃었다. 회색빛으로 굳었던 세계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크윽……!”
이전에 경험한 적이 있다. 씨앗을 통해 재생하는 트라던트는 주위의 모든 마력과 생명을 흡수하며 커져 간다. 휘말리면 설령 S랭크 마법사라 할지라도 순식간에 생명을 흡수당해 죽는다.
나나 인하처럼 S랭크 상위 마법사에게까지 통용되지는 않지만 우리라고 영향을 안 받을 수는 없다.
찰나, 루카가 지탱하고 있던 기둥이 플로리아에 남아 있던 사람들을 구했다. 전부 구하지는 못했다. 플로라의 마법석 가까이에 있던 사람 백여 명이 죽었다. 육체와 함께 흙처럼 부서져 트라던트에 흡수됐다.
“읍……!”
우리는, 죽지는 않았지만 무사하지도 않았다. 트라던트 바로 앞에 있던 나는 팔 하나를, 인하는 다리 하나를 잃었다. 문이가 재빨리 결계를 쳤음에도 이 모양이다. 아르피나는 몸의 반신을 잃었다.
다행인 점은 루카가 방어 마법사임과 동시에 치유 마법사였다는 것이다. 아르피나는 겨우 목숨을 구했다.
팔다리는 나중에 치료받으면 된다. 아르피나도 완치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하겠지만 당장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치료보다는 트라던트를 어떻게 하는 게 먼저다. 플로라의 마법석을 삼키고 자라난 트라던트는 여타 트라던트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했다. 심지어 주위에는 아직 래넌의 가시덩굴이 쳐져 있고, 이제는 트라던트의 방대한 힘마저 텔레포트를 막고 있다.
생명력을 마구 잡아먹고 커지려는 트라던트를 루카의 기둥과 내 『프리즈마 필러』, 인하의 속박 사슬이 겨우겨우 억눌렀다.
“쿨럭!”
루카가 마법을 사용하여 원군을 불렀다. 하늘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동료 몇 명이 캘리번에서 빠져나왔다. 레비가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리더! 인하 씨!”
“가까이 다가오지 마!”
인하가 무서운 기세로 외쳤다.
“위험해! 잡아먹힐 거야!”
그 말대로, 지금 우리는 겨우 억누르고 있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놓는 순간 잡아먹힌다.
“우리가 걱정되면, 빨리, 사람들을 대피시켜!”
“윌터, 래넌이 친 가시덩굴, 최대한 없애 버려.”
나는 입 안에서 터져 나오는 기침을 애써 씹어 삼켰다. 현재 트라던트가 자라는 걸 억누르고 있는 건 거의 루카의 힘이다. 나와 인하는 보조 수준이지만, 그 보조 하나가 아쉬운 상황이다. 플로라의 마법석을 통해 자라난 이 열매는 지금까지 생겨났던 어느 트라던트보다도, 강하다!
“그리고 인성이랑 테온은, 조금 떨어져서 보조하고, 소영이는…….”
말을 있는데 갑자기 허공이 일그러지며 폭발했다.
콰과과광!
나는 공간의 일그러짐을 피해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우리 위로 거대한 검은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네 발목을 붙잡고 오라더군.”
“데미안…!”
데미안의 입 주위로 불꽃 같은 마력이 흩어졌다. 뒷발이 허공을 박찬 순간, 데미안이 내 코앞에 나타났다. 찰나에도 나는 보조에 손을 늦추지 않았다. 데미안의 이빨이 내 어깨를 물어뜯고, 나는 그의 몸에 밀려 아래로 추락했다.
‘문이!’
기둥을 보조하던 마법을 문이가 대신 받아 유지했다. 몸이 바닥에 닿기 직전, 그제야 나는 겨우 반격했다.
“『아─멜다의 불꽃─!!』”
거대한 빛이 나를 집어삼켰다. 눈부신 빛이 화르륵 불타오르며 나를 중심으로 넓어져 간다. 나는 데미안이 피할 줄 알았다. 그러나 데미안은 피하지 않고 힘겨루기라도 하듯 나처럼 몸에서 마력을 방출했다. 나와 데미안의 마력이 흐트러지며 서로를 향해 격렬하게 부딪쳤다. 거센 힘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짐승의 모습임에도, 나는 데미안이 웃었다는 것을 알았다.
“언제 다시 한번 한국에 와라. 반이 널 보고 싶어 하거든.”
“누가 갈까 봐…!”
“어차피 넌 올 수밖에 없다. 주인님들을 죽이기 위해서라도. 아니면……최상헌이나 대현을 구하기 위해서려나?”
나는 눈을 홉떴다.
“너─!”
“다행으로 알아라. 한국은 제일 ‘마지막’이다.”
무시무시한 마력이 파열하는 와중, 데미안의 입에 새로운 공간마법이 응집됐다.
“그럼 다음에 또 만나지.”
직후 공간과 시간마저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숨결이 일대를 덮쳤다.
플로리아 엄호전의 결과는 한없이 실패에 가까웠다. 대피시킨 주민은 원래 주민 중 5분의 1밖에 안 된다. 그만큼이나마 대피시킬 수 있었던 것도 인하와 루카의 덕이 크다.
다행이랄 것이 있다면 한소이네 가족 세 명은 무사히 대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제외하면 희생이 너무 컸다. 플로리아에 새로 생긴 트라던트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주위의 수많은 생명을 흡수했고, 그 힘의 크기는 너무도 거대하여, 루카나 이청우가 힘을 합치더라도 웬만해서는 파괴할 수 없을 수준이었다.
나와 인하의 부상은 레비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우리보다 더 위급한 건 아르피나다. 아르피나는 루카 대신 레비가 맡았다. 아르피나의 목숨도 중요하지만, 트라던트를 제압하는 것도 중요하다. 지금 트라던트를 제어하고 있는 건 거의 루카의 힘이니까.
힘으로는 연맹의 최강자조차 쉽게 부술 수 없다. 우리는 적어도 사람을 전부 대피시킬 때까지는 트라던트를 부수기보다 트라던트의 힘이 더 이상 뻗어 나가지 못하도록 제압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저 트라던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부숴야 한다. 저 트라던트는 너무 강하다. ‘완성되기 전에’ 부숴야 한다. 아직 부술 기회가 남아 있을 때.
그래. 저 트라던트는 미완성이었다. 왜냐면 내부에 플로라의 마법석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본래라면 무엇을 제물로 썼든 트라던트 안에 들어간 순간 트라던트의 힘으로 녹아들어야 한다. 하지만 플로라의 힘이 너무 강한 탓에 녹아들지 않고 핵으로 남아 있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트라던트에 녹아들겠지.
아직 완성되지 않아 불안정한 트라던트를 카인의 실이 정신세계부터 실체까지 긴밀하게 엮어 안정시키고 하나의 개체로서 존재하게끔 유지하고 있다. 조종을 끊으면 트라던트의 균형은 단숨에 무너질 것이다. 어쩌면 힘을 잃을 수도 있고, 어쩌면 더 불안정하고 무시무시한 트라던트가 생겨날 수도 있다.
그러나 ‘틈’만 있으면 된다. 틈을 노릴 수 있다면 내 정화의 힘을 써서 어떻게든 부술 수 있다.
「마스터의 정화마법이라면 그 정도 틈은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 알아.”
문제는 정신세계다. 우리가 트라던트를 부수는 방법은 주로 정신세계부터 장악하는 것인데, 플로라의 트라던트는 정신세계를 통해 침입하기가 요원하다.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평소와는 달리 위험 요소가 너무 많다.
플로라의 트라던트는 정신세계가 2중 구조다. 핵심에는 플로라의 마법석이 있고, 그 주위를 트라던트의 힘이 감싸고 있다. 그리고 트라던트와 플로라의 마법석 사이에 카인의 꼭두각시 기술이 걸려 있다.
카인의 인형마법을 직접 본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단순히 인형을 조종하는 마법이 아니다. 인형을 만들고, 도구를 만들고, 마법을 조종하고, 사람을 조종하고, 생물을 조종한다. 조종할 때는 그것의 심연에까지 파고든다.
카인은 정신마법에 정통한 마법사다.
카인의 조종이 너무도 견고하고 단단하다. 카인의 조종은 소니아라 할지라도 쉽게 없앨 수 없을 거다. 그리고 없애려고 하기 위해 건드린 순간, 웬만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카인에게 들킨다.
‘그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겠지. 하지만…….’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차라리 정신세계를 직접 공격해 약화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것 역시 트라던트 자체가 워낙 강하기에 시간이 걸린다. 무엇보다 내가 정신세계에서 트라던트를 공략하고 있다는 건 트라베리아조차 모르는 사실이다. 그걸 눈치챌 만한 단서는 주고 싶지 않다.
우리가 트라던트의 힘을 제한하고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동안 다른 곳을 처리하고 있던 연맹의 최정상 마법사들이 찾아왔다. 아멜리아와 셰린도 뒤늦게 이야기를 듣고 우리를 찾아왔다.
“세상에! 은하 씨, 인하 씨! 팔이! 다리가…!”
셰린은 뛰어난 힐러다. 우리는 그들의 등장에 내심 안도했다. 계속 트라던트의 힘을 제한하는 우리 옆에 셰린이 달라붙었다.
“팔, 다리, 어떻게 된 거예요?”
잘렸을 뿐이라면 그냥 붙이면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엔 잘린 게 아니다.
“저 트라던트에.”
“흡수되었군요.”
셰린이 인상을 살풋 찌푸렸다.
“복원, 시킬 수밖에 없네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잠시만요!」
목소리와 함께 우리 앞에 붉은 덩어리가 나타났다. 유펠라의 요정, 지금은 소영이의 요정이 된 리브다. 나는 요정의 이름을 불렀다.
“리브.”
참고로 리브의 목소리는 아주 일부의 사람에게만 들리는 모양이다. 이안의 힘으로 반쯤 정령화되긴 했으나 완전한 정령이 아닌 데다, 유펠라가 요정을 조금 별다르게 상상했다. 모습은 빛의 덩어리, 목소리는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주인 내지 걸맞은 특수능력이나 마법을 지닌 몇 사람뿐이다. 내가 요정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문자마법에 더해 모든 언어와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특수능력 덕분이다.
「오랜만이에요, 셰린 님!」
“안녕, 리브. 무슨 일이니?”
「소영 님이 보내셨어요. 은하 님, 인하 님.」
리브가 나와 인하를 불렀다. 고개를 돌린 순간 리브와 우리 주위로 붉은 마법진이 생겨났다.
“뭐야?”
“소영이가 보냈대.”
리브가 소영이의 마법을 사용했다.
「소환! 유은하의 오른팔! 강인하의 왼 다리!」
강력한 마력이 내 어깨와 인하의 골반을 둘러쌌다. 셰린이 상황을 눈치채고 재빨리 마력을 더했다.
리브가 힘을 다하고 사라졌다. 그러나 복원된 것은 기껏해야 팔과 다리의 반 정도였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다.
“이런.”
혀를 차는 셰린을 향해 인하가 고갯짓했다.
“저희보다는 아르피나 씨를 봐 주세요. 목숨이 위태로워요.”
“저흰 나중에 돌아가서 예리한테 치료받으면 되니까요.”
셰린이 고개를 끄덕이고 아르피나에게 달려갔다. 통신기 너머로 실망한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 아직 내 힘으론 안 되나 봐.]인하가 소영이를 향해 다정히 대꾸했다.
“전보다 많이 성장했는걸. 우린 괜찮으니까 이제 피난시키는 데 집중해.”
[응! 너무 무리하지 마!]다른 마법사들의 개입 덕분에 피난은 무사히 끝났다. 공격당한 것이 플로리아이기 때문인지 루카에 더해 이청우까지 달려왔다.
“이런.”
이청우가 오자 셰린과 아멜리아의 분위기가 냉랭하게 변했다. 이청우는 류진령과 같은 세대의 마법사다. 류진령이 알고 있던 일을 이청우가 몰랐다는 건, 사실이기 때문에 더 변명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소리다.
이청우가 용 기사인 것은 그가 용의 후세이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혈족마법이 그런 것이지만 몇백 년 전에는 그 사실을 진실로 믿었다. 더군다나 성물 ‘용의 검’까지 지니고 있으니.
이청우가 검을 뽑음과 동시에 푸른 용의 형상이 트라던트를 둘러쌌다.
루카에 이청우, 두 사람이 힘을 합치고서야 겨우 트라던트가 확장을 멈췄다. ……그러나 그것도 아주 잠시뿐이었다.
쿠구구구궁!
붉은 나무 안에서 드드득거리는 진동이 일며 나무가 마법을 비집고 억지로 자라났다. 루카와 이청우가 당황하며 마법에 마력을 더했다.
얇게 뻗어진 가지가 몸의 어느 부근에 모였다. 나무에 동굴 같은 공동이 열렸다. 공간을 비집고 어두운 붉은 머리의 ‘가디언’이 나왔다.
‘가디언!’
나는 숨을 삼켰다. 가디언 주위로 무시무시한 마력이 휘몰아쳤다. 플로라의 가디언이 용을 베고, 기둥을 베었다.
“큭!”
‘가디언’의 모습은 몇 번 봐도 역겹다. 트라던트 내부에 있는 영혼과 마력이 결합하여 가디언이 된다. 그리고 저 모습은 아까 플로리아의 중심부에서 만났던 어젠드 혈족 중 한 명과 무척 닮았다. ─어젠드 혈족 중 한 명이 저것에게 먹힌 거다. 밀리 씨가 아니라 다행이라 해야 할까.
‘어젠드의 영혼에 어젠드의 피와 마력. 미친. 아까보다 연결이 더 긴밀해졌잖아.’
번쩍! 이청우가 검을 들어 올린 순간 번개가 휘몰아쳤다. 무시무시한 푸른 마력과 굳건히 힘을 유지하는 백금색 마력. 이청우와 루카가 소리쳤다.
“여러분 모두 여기에서 벗어나세요!”
“위험합니다!”
“은하 씨와 인하 씨도 이만 멀어지십시오. 서포트, 부탁드립니다!”
나는 이를 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타오르는 듯한 붉은 마력이 레비에게 향했다. 나는 레비의 앞을 막아서며 붉은 마력을 주먹으로 튕겨 냈다. 하나 남아 있던 주먹마저 바스라졌다.
“……! 리더!”
“피하자.”
트라던트가 본격적으로 지배를 시작했다. 이 기류 안에서는 마법을 제대로 쓰는 것조차 힘들다. 공간마법은 당연히 통하지 않는다.
눈부신 빛이 이어졌다. 인하가 우리를 이끌고 순식간에 공격 범위에서 멀어졌다. 플로리아에서, 벗어났다.
인하는 그 시점에서 레비, 셰린, 아르피나를 내려놓았다.
“레비, 넌 아르피나 씨와 함께 캘리번에 돌아가. 우린 여기서 서포트할 거니까.”
“리더!”
레비가 평소 늘어지게 말하던 것과는 딴판으로 나를 다급히 잡아 세웠다.
“리더가……부하인 절 감싸면 안 되죠.”
“무슨 소리야?”
인하가 무심한 눈으로 굳게 나를 응시하는 레비를 돌아보았다.
“강한 사람이 보다 약한 사람을 감싸는 건 당연한 일이야. 됐으니까 빨리 아르피나 씨 데리고 함선으로 돌아가.”
“아아아악! 이래서 별무리님들은 곤란하다니까요~!”
레비가 골치 아파 하는 표정으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플로리아를 벗어났음에도 필요 이상으로 거대한 탓에 트라던트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나는 시야를 크게 떴다. 마정석 안에 연결되어 있는 카인의 실을 확인했다. 그보다 더 거대한 힘을 지닌 것이 플로라의 마법석과 연결된 트라던트의 힘이다. 그것이 카인의 조종을 유지하고 있다.
루카와 이청우가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 지금이라면 할 수 있다. 약한 부분을 노려, ‘조정’한다.
약간 아쉬웠다.
‘성진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 녀석의 염력이라면 저 정도 조종술 따위, 힘으로 파괴할 텐데.’
그의 상대는 ‘슈리아’. 적도 심해, 아군도 심해, 그러나 마력은 분명 적이 더 강하다. 하지만……성진에게는 무시무시한 특수능력이 있다. 상성이 나쁘지만 않다면 그 상성으로 상대를 역공할 놈이다. 특수능력이 특수능력이니만큼 죽이고 오겠지.
그렇다고 슈리아가 쉬운 상대라는 건 아니다. 무척 어려운 상대다. 쓰러뜨리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우리끼리 할 수밖에 없다.
곧이어 우리 곁에 익숙한 인영들이 모여들었다. 소영이와 인성이, 아르델을 중심으로 한 동료들, 아멜리아와 연맹의 다른 마법사들이다.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긴.”
마력을 회복할 틈이 생겼기에 나는 바로 나와 인하의 몸 위에 환각을 실체화해 고정했다. 붕괴되었던 내 양팔과 인하의 한쪽 다리가 새로 생겨났다. 그렇게 ‘보이는’ 거지만.
“여기에서 엄호해야지.”
나는 바로 언령을 읊었다.
“『정화의 날개』.”
인하의 주위로도 수많은 빛 덩어리가 생겨났다. 우리는 마법을 루카와 이청우에게로 뻗어지는 마력과 나뭇가지, 꽃잎 등을 향해 보냈다. 가디언과 트라던트의 공격 하나하나, 우리가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루카와 이청우에게 시간을 벌어 줄 정도는 되었다.
카인의 실은 사념이 들어간 실, 내 정화마법으로 조정할 수 있는 실이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이 엄청나 웬만해선 금 하나 가지 않는다. 나는 가디언의 마법을 향해 환각마법을 사용했다. 그 순간 나무를 중심으로 붉은 돔이 생겨났다.
“으윽!”
붉은 마력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대지를, 도시를, 공간을 집어삼켰다. 인하가 우리를 데리고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그 장면을 관찰했다. 돔이 커지면서 안에서 붉은 실이 퍼진다. 인하도 그것을 느꼈다.
“저건……링크?”
인하가 그것을 볼 수 있었던 건 단순히 그녀의 혈족마법과 특성이 닮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플로라의 트라던트와 연결된 것은…….
“빌어먹을!”
“링크 해제!!!”
연결된 선을 통해 힘이, 생명이 흡수된다. 링크된 자는 플로리아의 주민, 혹은 가호를 받았던 자, 즉 우리 루시드도 포함된다. 상대가 얼마나 멀리 있든 어젠드 혈족의 수호마법은 한번 지키려 한 자를 찾아낸다. 그리고 지금 그 수호마법을 통해 오히려 수호해야 할 자들을 위협하고 있다.
쩌저저정!
인하가 소속마법을 사용해 붉은 마력을 끊어 내려 했다. 그러나 붉은 돔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링크는 해제하지 못했다. 붉은 마력이 나와 인하, 소영이, 인성이에게 연결됐다.
“욱….”
“큭!”
나는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연결됐던 링크가 파직파직 점멸하며 사라진다. 내 체질은 특수하여 원하지 않는 마법은 내 몸에 특수한 효과를 잘 미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성진의 몸에도 링크가 미치지 않았으리라.
「내 계약자한테 손대지 마!」
인하에게 연결되었던 힘도 불꽃이 되어 타올랐다. 인하의 손목에 매달린 태양의 신물이 번쩍번쩍 빛을 냈다.
“공명!”
인하가 주먹을 들며 외쳤다. 손목에서 이어진 링과 우리 사이의 연결이 마법진 모양으로 드러났다. 인성이와 소영이 몸에 이어진 붉은 선도 차례차례 타올랐다. 소영이와 인성이가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링크를 반쯤 끊어 냈기에 가능했다.
나는 인하와 손을 꽉 잡았다. 인하가 다시 한번 외쳤다.
“『링크 해제!!!』”
태양의 마력과 정화의 마력이 길게 뻗어져 나갔다. 멀리에서 루카와 이청우가 외쳤다.
“수호하라!”
“가련한 자에게 가호를!”
그들 역시 상황을 파악한 모양이다. 나는 멀리에 있는 가디언과 점점 더 커다랗게 자라나는 트라던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이건 아끼고 있을 상황이 아니야. 전심전력으로 할 수 있는 건 전부 다 해야 돼. 저것이 진짜 트라던트가 되기 전에, 플로라의 힘이 연결된 모든 사람을 죽이기 전에.’
“얘들아, 갔다 올게.”
나는 아공간에서 마력석을 꺼내 아득 씹어 먹었다. 링크 해제도 정신세계에서 하는 게 훨씬 이득이다. 그러나 몸을 움직이기 전, 인성이가 내 손을 잡아 왔다.
“나도 같이 갈게.”
인성이 역시 ‘그림자 세계’를 공략할 요량인 모양이다. 그러나 혼자 그림자 세계를 공략하는 건 너무 위험하다. 인성이의 그림자 세계도 일종의 정신세계, 나는 인성이의 손을 붙잡았다.
“갔다 올게.”
고개를 끄덕이는 동료들의 모습이 순식간에 어둠에 감싸여 사라졌다. 우리는 어느새 트라던트의 정신세계 안에 들어서 있었다.
“여긴 몇 번을 와도 기분이 더러운걸.”
내가 환각으로 정신세계에 녹아들어 있듯이, 인성이도 어느새 그림자로 변해 이 세계에 녹아들어 있었다. 문이가 우리 위에 환각 결계를 쳤다.
트라던트 안은 언제나 끔찍하다. 산 자를 죽여 힘을 짜내는데 어련할까. 부글부글 끓는 것 같은 검은 자국, 영혼의 절규, 악의와 절망, 사람의 부정적인 감정에 영향을 크게 받는 인성이에게는 더 끔찍하게 느껴질 거다. 나는 인성이의 손을 잡은 손에 꽉 힘을 줬다.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