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394
일행은 레일리와 로일의 안내에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회의실에는, 놀랍다고 해야 할지, 예상했다고 해야 할지, 이백한도 있었다. 혼자는 아니고 옆에 오시언이 함께였다. 최인성은 오시언에게 목례를 한 후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 위험한 데까지 따라오시는 거 아니에요?”
그러자 이백한이 대놓고 표정을 구겼다.
“너희가 할 말이냐?”
“하하.”
“그리고 나랑 오시언은 나름대로 연맹에서 중역을 맡고 있거든?”
“네, 그렇죠.”
회의에는 평화 기구 PE를 중심으로 어린 마법사 보호 협회, 리브리, 경찰 조직, 미국 보안 조직 등 다양한 조직이 참여했다. 그러나 숫자도 적었고, 무엇보다 S랭크 마법사의 숫자가 적었다. 레일리와 그들을 포함해 5명밖에 되지 않았다.
싸움에 급급한 상황이지만, 사람의 피난 및 보호도 아주 중요하다.
평화 도시를 비롯해 사람이 계속해서 습격받는 상황에서 그들의 눈을 피해 새로운 평화 도시를 구축한 건 극히 소수의, 옛 전승마법을 익혀 자연의 가호를 받는 자들이었다. 그중 중심이 되는 도시가 대현과 구 트라베리아 팀이 지키고 있는 장소, 파텔이다.
그들은 곳곳에서 피난민을 받아들이는 한편 가호의 힘으로 정보를 계속 차단하고 있지만, 그게 언제까지 버틸지 확실하지 않다. 트라베리아에는 자연의 가호를 꿈으로 뚫는 소니아가 있고, 그 정보조차 점칠 수 있는 포츈이 있으며, 마법으로 세상의 정보를 긁어모으는 베로니카가 있고, 자연의 힘으로 정보를 긁어모으는 시카가 있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으나 노리지 않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 탓에 오시언 일행은 슬슬 파텔을 움직이게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현재 그나마 트라베리아로부터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도시는 세 도시뿐이다. 파텔, 유펠르시아의 보호를 받는 루시카, 라비언트와 폴리젠의 생존자가 사는 유라프섬.
그러나 자연의 가호를 다룰 수 있는 마법사는 현재 극소수다. 안전한 도시가 고작 세 개여서는 부족했다. 좀 더 많은 대책이 필요한 상황이다.
레일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회의를 시작했다.
“미국에서 지내던 분들은 대부분 여기 멕시코로 피난해 왔어요. 하지만 알다시피 평화 도시가 계속 노려지고 있어요. 이제 단순히 막는 것으로는 안 돼요. 숨어야 합니다. 도시를 지키는 힘이 악용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요.”
“해결하기 힘든 과제군요. 그 트라베리아를 피해 숨어야 한다니.”
“하지만 그러지 않으면 죽어 갈 뿐이에요.”
“그 말이 맞습니다.”
모이긴 했지만 회의는 처음부터 난항을 겪었다. 그 ‘트라베리아’의 공격을 피할 도시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당연히 당장 좋은 방법이 떠오를 리 없었다. 자연의 가호 이외의 방법으로 트라베리아에서 숨는다. 지금까지 그런 게 가능했던 건……새벽별무리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레일리는 새벽별무리에게 협력 요청을 보낸 것이겠지.
“자연의 가호를 제외하고 지금 가장 가능성이 있는 건 리더의 기술이겠군요.”
“네.”
이어 레일리가 손을 내저었다.
“아, ‘그 마법석’을 지원해 달라는 건 아니에요. 그건 은하 씨한테 부담이 크잖아요.”
유은하가 다른 사람의 존재를 자신의 운명으로 가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만든, 그녀의 요소를 빼서 만든 마법석. 그러나 그것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유은하에게 리스크였다. 그 마법석에서는 유은하의 영혼, 마력, 꿈, 마음 등 다양한 것이 뭉쳐 있다. 적에게 빼앗기면 유은하를 추적할 매체가 되며, 유은하를 해석할 단서가 된다. 때문에 유펠르시아도, 루카도, 윌리엄도 머지않아 그 보석을 유은하에게 돌려줬다.
“압니다. ‘꿈’을 말하는 거죠?”
“네.”
이제 새벽별무리의 리더 유은하의 마법에 대해서 꽤 알려졌다. 적어도 그녀가 소니아에 필적할 만큼 뛰어난 꿈 장인이라는 것은 말이다.
“꿈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은하 씨는 그 힘으로 소니아의 추적을 피할 수 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은하 씨의 꿈의 힘으로 도시를 방어하면 어떨까 싶어서요.”
“네, 그렇긴 하지만…….”
최인성이 무심코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최인성의 그림자와 유은하의 꿈은 닮은 부분이 있다. 정착지는 다르지만 원류는 같다고 표현해야 할까.
최인성이 그림자에 시선을 둔 순간 그림자가 불길하게 일렁거렸다. 이번에 그림자 안에 비친 것은 ‘적’의 얼굴이었다.
연두색 머리카락에 연두색 눈동자를 지닌 바람속성 마법사, 알카무라의 제8기사, 실프.
그가 죽인 적 중 제법 인상 깊었던 상대이며, 죽이고 나서 드물게도 죄악감을 느꼈던 상대다.
「복수한다고 해 놓고서 그분들과 똑같은 짓만 하고 있지 않아?」
「살인자, 더러운 놈. 차라리 위선을 안 떠는 그분들이 훨씬 나아. 네 동료들도 용케 참아 주고 있다?」
전부 그가 이미 마음속에서 한번 받아들인 단어들이다. 최인성의 시선이 잠시 어둠으로 침잠했다. 최인성이 그림자에서 벗어난 것은 오시언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였다.
“추적당하지 않기 위해 꿈으로 도시를 지키는 건, 난 반대야.”
최인성이 먼저 반대했어야 할 걸 오시언이 먼저 반대했다. 오시언의 손가락에는 습관처럼 카드가 나와 있었다.
“한 사람의 힘에 너무 의존하는 것도 문제고……웬만큼 힘을 쏟아붓지 않으면 추적을 피할 수 없을 거야. 상대는 소니아잖아. 그래서 어쩌면 꿈으로 도시를 지킨 것 때문에 소니아한테 유은하의 꿈에 대한 단서를 줄지도 모르고, 거기다 유은하가 그 장소에서 떠났을 때 베로니카와 포츈에게 장소를 들키지 않을지는 확실하지 않아. 우리야 한자리에서 지킬 수 있지만 유은하는 아니잖아.”
오시언의 말은 타당했다. 어중간한 방어로는 오히려 완벽하게 쫓긴다. 트라베리아에는 소니아가 있으니까.
“그렇다고 꿈속에 도시를 만드는 건……으음, 보통 사람의 몸과 정신에는 안 좋을걸?”
“그렇겠죠. 힌트를 얻고자 하는 거예요. 단순히 이차원에 숨는 것 정도로는 트라베리아의 시선을 한시도 속일 수 없잖아요.”
“음……그렇지. 하지만 ‘도시’라면……나는 대현이 쓰고 있는 방식이 더 좋다고 봐.”
“대현이 쓰는 기술……이라면.”
이백한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 인호가 만든 환수의 술식 말이군.”
한국에 있는 대현의 도시는 그 장소에 있으나 그 장소에 없다. 올바른 입구에서 올바른 방법을 따라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들어올 수 없다.
“확실히 그건 도시를 지키는 데 유용한 기술이죠. 다만 우리 중에선 인호밖에 쓸 수 없고, 그만큼 특수한 기술입니다.”
“어떤 기술인데? 기록만 하면 웬만한 기술은 흉내 낼 수 있어. 리더의 기술은 레벨이 너무 높아서 무리지만.”
코린이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커다란 책을 꽉 끌어안았다. 이백한은 최대한 상세히 청인호의 기술을 설명했다.
“……아, 흔히 말하는 ‘미로 입구’구나. 그건 확실히 쓸 만하지.”
그 기술은 흔한 기술도, 그렇다고 아주 희귀한 기술도 아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기술이지만 그 기술은 레일리와 최인성, 코린, 오시언도 쓸 수 있다. 레일리가 끙 신음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응. 그것만으론 부족하지. 베로니카라면 금방 해제 주문을 알아낼 거야.”
“뿐만이 아니에요. 피난하러 찾아온 사람을 빨리 보호할 수 없어요.”
오시언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처럼 자연의 가호로 보호하는 것이겠지만……그건 바로 배워서 쓸 수 있는 힘이 아냐. 자연과 소통하는 재능은 마법적 재능이랑은 따로 봐야 해. 뭐, 자연에게 사랑받는 사람은 결국 마법 재능이 뛰어나니까, 완전히 별개로 볼 수는 없지만.”
레일리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옛 전승마법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어요.”
“네 어머니는 300살 가까이 되지? 오래된 마법사라면 들어 봤을 만해.”
“네. 거의 잊혀진 마법이었지만……그래도 시초의 나라가 일부 명맥을 잇고 있었으니까요.”
레일리가 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알고 있었는데, 배울 생각은 안 했어요.”
“그래. 강함을 추구하는 시대와는 안 맞았으니까.”
“네. 하지만……배워 뒀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 이미 저도 어머니도 조금씩 배워 보고 있어요. 하지만…….”
“자연과의 소통도 마력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릴 때 가장 느끼기 쉬워. 난 둘 다 재능이 있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자연의 흐름을 희미하게 느끼는 데만 반년이 걸렸어. 아멜리아는 5년, 셰린은 1년, 히스는 3년…….”
오시언의 눈동자가 착잡하게 가라앉았다.
“배우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그에 비해선 위력이 대단하지 않지. 그에 비해 지금의 마법은 배우는 것도, 강해지는 것도, 금방금방 느낄 수 있을 만큼 빨라. 고대의 피를 잇는 마법사조차 구태여 배우지 않을 만해.”
주위가 숙연해졌다. 좀 더 편리하고 합리적이라는 이유로 오랜 기간 명맥을 이은 마법을 소홀히 한 대가가 이제야 조금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다 막 배운 초보자가 사용해 봤자 서툴러서 오히려 시카를 자극하는 꼴이야. 혹은 토지의 정령과 계약해서 도시를 지키는 방법도 있지만…….”
“정령이라……. 정령은 그렇게 많이 존재하나요?”
“자연이 개체로 의지를 가진 존재, 그게 정령이야. 꼭 그게 아니더라도 그 장소에 깃든 의지를 불러낼 수 있다면 그것 역시 정령이지. 하지만 힘들 거야. 지구의 정령은 대부분 시카의 명령을 따르니까.”
“……그렇군요.”
현재 세계는 트라베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 사실이 절실히 느껴져 레일리는 새삼스럽게 등골이 오싹했다. 방위부 소속, 키사가 손을 들어 물었다.
“정령석은 어떻습니까?”
“정령석도 정령석 나름이지. 제대로 공명하지 못하면 마법을 쓰느니만 못해.”
“이 이상 자연의 가호로 도시를 만들기는 힘들다는 거네요.”
“응.”
오시언이 평온한 어조로 냉정하게 끊었다. 주위가 한숨으로 가득 찼다. 이내 최인성이 손을 들었다.
“솔직히 트라베리아의 추적을 완벽히 피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니 균형을 중시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균형이라고요?”
“트라베리아 입장에서 거슬리지 않을 정도이며, 그렇다고 바로 발견되지 않을 정도가 딱 적당하지 않을까요? 사실 그것조차 트라베리아를 상대로는 힘들겠죠.”
“일리 있는 말이군. 어차피 트라베리아의 눈에서 완벽하게 숨는 건 불가능할 테니.”
이백한이 무심한 눈동자로 턱을 괴었다. 최인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다 일단 커븐 로드가 직접 평화 도시를 노리는 일은 적으니까요.”
모두가 동의했다.
“그렇죠. 커븐 로드가 직접 도시를 습격할 경우는 항상 강한 힘을 가진 특수한 물건이 있거나, 상대할 만한 마법사가 있거나, 아니면 사람이 많이 모였을 경우니까요. 트라던트를 생성하기 위해서 사람을 습격하는 거니.”
“커븐 로드가 장소를 지시하고 부하가 습격했을 때 바로 사람을 피난시키고 도시를 옮길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하는 게 지금으로선 제일 현실적인 방법이군요.”
“뱀들이 그렇게 놔두진 않겠지만요.”
역시 쉽지 않았다. 그들은 의견을 모은 끝에 ‘이동하는 도시’가 그나마 효율이 좋겠다 판단했다.
트라베리아를 완전히 뿌리칠 수 없다면 뿌리칠 수 없는 범위 안에서 최선을 선택할 수밖에. 도시는 도저히 못 찾을 정도는 아니더라도 적당히 찾기 힘들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만일의 경우 빠르게 대피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도시째로 움직이는 것이 좋을 것인가. 아니면…….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다. 꿈속 세계는 아니라도 이차원에 걸친다든가, 환각이나 특수한 결계를 쓴다든가. 도시를 이동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다양하게 의논했다. 도시를 지킬 방범마법, 공격마법…….
“‘균형’을 생각한다면 인성 씨의 마법도 괜찮지 않을까? 인성 씨의 그림자 세계는 이차원이고 꿈속 세계에 가까우면서도 꿈속 세계가 아니잖아.”
“‘그림자’라.”
그림자에는 다양한 의미가 있다. 그리고 최인성이 보는 그림자 세계가 모두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잠시 고민해 보던 최인성이 눈을 크게 떴다.
‘괜찮은걸?’
코린의 말대로다. 딱 적당하다. 더군다나 그림자 세계는 꿈속과 가깝되 꿈속이 아니고, 정신세계와 가깝되 이차원이다.
무엇보다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 도시와 그림자를 연결해 그림자 결계를 쳐 둔다 가정하자. 만일의 일이 일어났을 경우 현실의 도시를 그림자 도시로 통째로 바꿔치기하는 것도 가능할 테고, 혹은 사람의 그림자만 그림자 세계로 빠트리는 것도 가능하다. 그럼 사람들은 그림자 세계를 통해 다른 도시로 이동할 수 있다.
생각보다 좋은 방법이다.
그림자 세계는 유은하의 꿈속 세계에 비교하면 대단한 특수성이 있지는 않다. 그림자마법은 그다지 희귀하지 않고, 최인성이 다루는 그림자 세계를 다루는 자 역시 아주 드물지는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흔한 것은 아니다. 그럭저럭 사람을 지킬 만한 특수성도 있다.
“인성 님의 마법, 은하 님 때문에 바래 보이는 거지 본래는 무척 다양하게 쓸 수 있는 마법이야.”
그림자를 이용하면 이동하는 도시를 보다 간단히 구축할 수 있다. 물론 그런 장점을 가진 것은 최인성의 마법만은 아니다. 코린의 마법도, 레일리의 마법도, 상응하는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시험해 봐야겠네요.”
그 외에도 다양한 마법이 제기됐지만 독보적으로 효과가 있을 만한 기술은 없었다. 일행은 선택된 마법을 두고 논의하고 또 논의하며 새로운 방위 체제를 고민했다.
여느 때처럼 전쟁터로 향했던 나는 우연히도, 또한 처음으로 독각귀 ‘라스’와 마주쳤다.
“윽!”
머리에 솟은 진녹색 뿔에 머리카락 역시 진녹색, 눈자위는 검은색에 눈동자는 붉은색이다.
‘와, 마력 색이 세 개인 놈은 또 처음 보네.’
나는 한순간 숨을 삼켰다. 검적색, 진녹색, 검은색이라. 게다가 검적색과 진녹색은 속성이 정반대다. 나나 성진과 비슷한 올라운더 상극 속성에, 우리보다 상성이 맞는 마력이 더 많다. 그렇다고 우리만큼 특수하지는……않은 것 같지만, 그것 역시 확실하지는 않다.
이빨은 육식 동물의 이빨처럼 전부 날카롭고, 송곳니가 길어 입 밖으로 튀어나와 있다. 그 도깨비는 돌기가 돋은 검녹색 방망이를 들고 나를 덮쳤다.
쿠과과광!
무시무시한 압력이었다. 힘으로 압도한다고 하더니 그 말대로다. 주위로 그림으로 그린 듯한 진녹색 안개가 몽실몽실 흩뿌려졌다. ──독이다. 마력을 침식하는 독.
‘내가 힘이 세서 다행이지!’
이거야 원 웬만한 마법사는 마법이 대등하더라도 힘에 짓눌려 버릴 정도다. 이렇게 힘이 강한 적은 반 이후로는 처음이다.
하지만 반과는 달리 힘만이 아니다. 마법을 분해하는 듯한 마법 독, 랜덤으로 신비한 효과를 뿌리는 마력, 순간 방망이에서 검녹색 번개가 치밀었다.
콰과과과과과!
라스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바닥이 부서졌다. 나는 오랜만에 힘에 져 튕겨 나갔다. 몇 미터고 날아갈 뻔했으나 마법으로 겨우 제동을 걸어 멈춰 섰다.
“나랑 힘 겨루는 놈, 두 번째. 첫 번째, 반.”
그러시겠지. 나는 기감을 한껏 열었다. 특히 감정과 기억, 마음을 듣기 위해 한껏 귀를 열었다. 마음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 그의 몸 주위를 맴도는 녹색 기류 때문이다.
‘여기까지 오니 쉽게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적이 없군.’
“리더!”
“다가오지 마! 더 떨어져!”
내게로 달려오려던 성후 오빠와 한재일이 멈칫했다. 도깨비가 무뚝뚝한 어투로 끊어 말했다.
“동료, 공격 X. 관심, 지금, 너뿐.”
알아듣기 힘든 말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예리한테 듣긴 했지만, 대체 무슨 대화법이야? 강한 힘이 있는 대신 이성이 부족하기라도 한 거야?
“제대로 말할 수 없나요?”
“…….”
그러자 도깨비가 한숨을 내쉬었다.
“제대로 말하기 귀찮아…….”
그러니까 지금 귀찮아 가지고 일부러 중요한 단어만 끊어 말했다 이건가? 어차피 나도 딱히 대화를 나누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도깨비가 힘주어 바닥을 디뎠다. 바닥이 부서진 순간 나를 향해 신형이 쏘아졌다.
쿠과과광!
‘무거워 죽겠네!’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 내며 이를 악문 순간, 도깨비의 뒤로 날카로운 검이 날개 모양을 이루며 나를 겨누었다.
“『디멘션 박스!!』”
몸 주위로 검은 박스가 여러 겹 겹치며 다이아몬드 필링을 이루었다. 그러나 휘둘러진 방망이가 박스를 화려하게 깨부쉈다. 이건 힘만으로 한 게 아니다. 아마 방망이의 효과다.
‘형태는 다르지만, 내 마법과 좀 비슷해. 구현화 계열……환각……독……다양한 무기에 안개, 효과…….’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하멜의 마법이었다. 하멜의 마법은 ‘마녀’라는 존재를 실체화하는 마법이다. 이 녀석도 마찬가지 아닐까. ‘도깨비’란 존재를 실체화하는 것 같다. 그럼 저 방망이는 원하는 게 이루어지는 방망이이려나.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은 짧았다. 나는 또 한 번 힘에 밀려 튕겨 나갔다.
여러 번 상처 입으면서 알게 된 것은 독각귀와 내 상성이 생각보다 안 맞는다는 것이다. 상대는 접근전이 특기에, 스피드도 빠르고 힘이 무지막지하게 강한 육체파다. 나는 저런 육체파에 제일 약하다. 육체파, 혹은 스피드 계열에…….
확실히 독각귀의 독은 나에게 안 통한다. 하지만 내 정신마법도 독각귀에게는 별로 통하지 않는다. 말했잖은가. 저 도깨비방망이는 원하는 게 실체화하는 환각 계열 및 구현화 계열 무기. 그리고 이 도깨비는 온갖 ‘신비’에 익숙하다.
“윽…!”
방패째로 어깨가 꿰뚫렸다. 붉은색 눈동자 위에 초록색 불씨가 켜졌다. 안개를 닮은 초록색 불씨가 나를 뒤덮었다.
‘윽……!’
나는 바닥에 처박힌 채로 주먹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아르쿠벨리스!!!』”
도깨비의 불꽃은 뜨거웠다. 뜨겁다기보다는 온몸이 잘게 저며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불꽃이기 때문에 얼렸을 따름이다.
내 얼음은 고대얼음마법을 복사한 마법. 불꽃이 서리가 끼며 얼어 갔다. 그러나 도깨비는 나와 시선을 마주한 채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라스의 안에서부터 푸른색 서리가 나왔다. 푸른색 서리에 섞인 의지와 함께 얼음에 초록색 금이 갔다.
‘이…건……!’
틀림없다. 이 도깨비의 힘은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힘. 나, 그리고 리피트와 비슷하지만 또 다르다. 나와 리피트는 제한 없이 개개인의 특성에 맞춰 상상하지만, 이자의 상상은 어디까지나 도깨비로서의 모습에 한정되어 있다. 하멜도 그러했지. 이 마법에 이름을 붙인다면 ‘도깨비의 신비’ 정도일까. 그리고 조건이 붙은 구현은 한계 없는 상상력보다 강건하다.
‘기분 더럽네.’
하지만 아무리 라스의 힘이 강하더라도, ‘상상’은 내 영역이다. 이 얼음을 도깨비의 힘으로 바꾸게 둘까 봐.
우리의 마력과 정신력이 한 장소에서 부딪쳤다. 정신력을 쓰는 요령은 내가 훨씬 위다. 그러나 정신력과는 다른 이유로, 마력의 차이로 인해 얼음으로 만든 거신이 산산이 깨어졌다.
콰장창!
나는 내 몸을 중심으로 게이트 중력장을 쓰며 라스를 떨쳐 내려고 했다. 하지만 라스는 오히려 방망이를 휘둘러 중력장과 함께 내 몸을 공격했다.
“큭!”
아직 일대일로 이기기에는 레벨 차이가 너무 난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러나 아직 물러날 수 없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은 새로운 도시가 공격당하는 걸 막기 위해서니까. 아직 피난이 다 끝나지 않았다.
기습 때문에 조금 늦었지만, 영역을 펼치려고 할 때였다. 자리를 박차고 나를 공격하려던 라스가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귓가의 통신기를 눌러 누군가에게 연락한다.
“곤란. 여기, 실패. 유은하.”
라스가 방망이를 쥔 채 깜빡였다.
“실력만 확인. 어차피 실패. 나, 귀환.”
“…….”
“응.”
통신을 끊은 라스가 나와 눈을 맞추더니 얼굴 옆에서 작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뭐지? 갑자기 사라지다니.”
다행이지만 기분 나쁘다. 독각귀가 사라진 걸 확인하고는 흩어져서 사람을 피난시키고 있던 동료들, 한재일과 성후 오빠, 코린이 돌아왔다.
“독각귀는?”
“돌아갔어.”
나는 코린에게 대답하며 너덜너덜해진 팔을 꽉 쥐었다. 어차피 실패? 실력으로 따지면 내가 더 불리했는데. 하지만 그래, 그의 목적은 도시를 공격하는 것이고, 내 목적은 사람들이 피난을 끝낼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공간이 단단히 막혀 있던 것도 아니기에 피난은 금방 끝난다. 피난이 끝나면 동료들이 나를 도우러 올 테니, 확실히 실패하긴 했겠지.
‘사람이 있는 게 중요한 거라면, 목적은 트라던트를 키우는 것이었겠군.’
몸에서는 트라던트의 열매나 씨앗이 보이지 않았으니 아공간에 가지고 있었겠지. 나는 리피트나 성진과는 달리 아공간까지는 볼 수 없다. 팔을 쥔 손에 좀 더 힘을 주었을 때, 성후 오빠가 상처투성이가 된 내 손을 약하게 감싸 쥐었다.
“상처, 치료해야지.”
나는 우울하게 가라앉은 눈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성후 오빠의 정신에 새겨진 상흔은 깊다. 깊은 것뿐만이 아니라 거기에서 별로 진전이 없다. 우울한 눈으로 복수보다 더 깊게 죽음을 바라보고 있을 뿐. 옆에서 계속 그를 지탱해 주던 주연 선배도 이제는 없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복수에 대한 ‘가능성’이 그에게 활기를 준 모양이다. 성후 오빠의 눈동자에 어렴풋이 과거에 우리를 보던 감정이 어렸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손에서 힘을 뺐다. 그러자마자 코린이 책 안에서 털을 닮은 안개를 꺼내 내 팔에 꽁꽁 감쌌다.
“리더, 상처에 익숙해졌다고 방치하면 안 돼.”
“다른 사람은 안 되지만 나랑 성진이는 괜찮아.”
“그래도 좋지 않아.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 말이 맞아, 리더. 그나마 성진 님은 부상을 입는 일이 별로 없기라도 하지.”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만난 독각귀의 모습을 떠올렸다. 덕분에 마력 패턴과 타입을 파악했다. 나보다는 성진이나 인하랑 잘 맞을 듯하다. 인하라면 아슬아슬하게 혼자서 이길 수 있지 않을까.
그건 그렇고 분위기가 묘했다. 사실 장군 시리즈라고 무조건 우리에게 적의를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그중에서도 상당히 무심하고……투명했다.
놀라울 정도로 평온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전투 의지는 있었지만 적의라기보다는 호승심이나 흥미에 가까웠다. 손가락에 꼽히는 장군 시리즈치고는 참……충성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구나.
‘하긴. 그 좀비……반도 그렇게 말했으니.’
장군 시리즈라고 무조건 트라베리아를 따르지는 않는다. 죽기 싫어 마지못해 따르는 자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곧 다른 곳을 도우러 떠났다. 그렇게 또 며칠간 마법만 쓰다가 캘리번으로 돌아와 강제로 잠에 들었다. 나는 꿈속에서 눈을 떴다.
의사들은 제대로 잠을 자라고 잔소리를 했지만, 잠이 들면 무심코 꿈속 세계에 들어오고 만다. 거기다 이 정도로는 별로 피곤하지 않다. 마력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육체와 정신력도 점점 강해지고 있다. 치유 속도가 빨라지고, 몸의 강도는 튼튼해지며, 몸은 피곤함을 잊는다.
그리고 ‘피’. 육체에 새롭게 변화가 생겼다. 저번에 피를 통해 마법이 증폭되었듯, 육체의 일부에 강대한 힘이 깃들었음을 깨달았다. 성진의 말에 의하면 그렇게 사용할 수 있는 건 ‘피’만이 아니라는 듯하다. 가벼운 것부터 보면 머리카락, 손톱, 살갗, 피, 뼈, 눈동자, 혹은 팔다리를 통째로 사용할 수도 있다고 한다.
다만 부작용이 심하다. 피를 쓴 직후 사흘을 꼬박 앓았으니까. 참고로 이성진은 나보다 부작용이 더 심하다고 한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녀석이 이 방법을 쓴 적이 없었던 이유만은 분명했다.
레녹의 정신세계에서 가져온 12면체 주사위는 이미 부서졌다. 하지만 나는 부서뜨렸던 정신 조각을 모아 12면체 주사위를 복원시켰다. 성진의 말로 레녹의 특수능력은 내 곁에서 떨어졌다니, 그 힘이 다시금 발동할 리는 없다.
그렇게 복원한 12면체 주사위는 내 특성 덕분에 완벽했다. 거기다 내 힘이 섞였기 때문인지 원래 주사위보다 더 레녹에 대해 잘 보여 줬다. 여기에서 드문드문 나오는 기억은 대개 울비스의 대장, 단탈리온과의 기억이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고 또 회상한다.
우스운 일이다. 스스로 선택해 적이 되었으면서 끊임없이 과거를 회상하는 꼴이라니.
나는 12면체 주사위를 꽉 쥐며 눈을 감았다. 이런 걸 보는 것보다는 그냥 푹 쉬는 게 훨씬…….
…….
……잠들었던가?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어느새 꿈을 꾸고 있었지?
고개를 들자 어딘지 모를 건물 안에 서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자리에 선 채 굳어 있는 레녹과, 뒤에서 공간을 열고 나타나 레녹의 목에 검을 겨눈 소니아.
……소니아라고?
“─우리가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너희 머릿속에는 우리한테 복수할 생각밖에 없잖니.”
“이젠 너희한테 볼일 없어.”
“어차피 필요 없는 정보지만, 그래도 새벽별무리한테 간다니 기분 더럽잖아.”
“잘됐어. 여기에서 너와 새벽별무리까지 한꺼번에 묻어 줄게.”
목소리가 연속해서, 끊기며 들려왔다. 풍경이 조금씩 움직였다. 이제 보니 먼 곳에 아슬란으로 보이는 긴 검은 머리 남자가 쓰러져 있다. 레녹을 향해 속삭이던 소니아가 사납게 웃으며 검을 든 손에 힘을 줬다. 녹색 검이 거품처럼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쨍그랑!
장면이 깨졌다.
깨지며 조각들이 주위로 흩어진다. 조각 하나하나마다 기억이 떠올랐다.
아주 오래전, 지금으로부터 90년쯤 전.
트라베리아는 시험 삼아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 안에는 레녹이 형처럼 여겼던 자도 있었다. 랭킹 16위, 단탈리온 이전에 울비스의 대장이었던 케인 랄프다.
「케이 형!!!!」
목소리가 깨지며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 케인을 죽인 벨라에게 복수심을 보이며 필사적으로 훈련하는 청년. ──지금보다 어린 레녹 브란데다. 그 옆으로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런 레녹을 보는 단탈리온이 보였다.
여러 장면이 지나자 보인 것은 참극 날의 풍경이다. 손쉽게 부서지는 세계, 죽어 가는 사람들. 그 사이에 있는, 울비스의 대원들.
SR, 방위 부대, 경찰도 그렇지만 울비스는 전투 부대로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제일 먼저 앞서 싸웠다. 그리고 그 목숨은 벨라의 손에 의해 쉽사리 부서져 내렸다. 벨라는 적당히 사람을 쳐냈을 때쯤에 일부러 멈췄다. 일부러, 보란 듯이.
「여기까지 하지 뭐.」
「어차피 언제든 죽일 수 있으니까.」
레녹은 절망했다.
그는 벨라를 죽이기 위해 실력을 키웠다. 그런데 닿지 못한다. 눈앞에서 마주치고서 처음 알았다. 결코, 닿을 수 없다. 그녀와 그 사이엔 그 정도로 큰,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두껍고 큰 벽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