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399
나는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해서다. 소니아의 눈이 가늘어지며 날카로운 빛을 품었다.
“그건 너희도 마찬가지지? 매번 표적을 정해 두고 싸웠잖아.”
소니아의 주위로 연둣빛 거품 같은 구름이 몽실몽실 퍼졌다. 저것도 꿈 조각이다. 그에 따라 나도 별의 마력을 주위로 하나둘 퍼트렸다. 소니아의 눈이 좀 더 가늘어졌다.
“후후. 아쉽게 됐구나. 여기서 나를 만나다니. 거기에 네가 알지 못했던 진실도 알게 됐잖아? 이번 작전은 후회가 많겠어.”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미국 팀도 벌써 시작되었겠구나. 조금, 아니, 많이 걱정되었다. 그 이성진이 불길함을 느끼고 심장 근처에 가호를 내렸을 정도다. 더군다나 인성이는 많이 불안한 상태니.
“거기다 너희가 아주아주 쓰러뜨리고 싶었을, 어쩌면 이후 너희 아군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표적도 몇 명, 우리 차지거든.”
“무슨……뜻이지?”
어안이 벙벙한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레녹이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소니아의 눈꼬리가 곱게 휘어졌다.
“여기 오고 많이 아쉬웠겠어. 뛰어난 마법사가 많이 빠져 있었잖아? 실력을 키우기 위해 하는 싸움인데, 그야 많이 아쉬웠겠지.”
이어 소니아가 레녹을 보았다.
“에릭의 명령으로 간 네 부하들은, 돌아오지 못할 거란다. 왜냐면 그네들은 제물이거든.”
“제……물……?”
“어머, 우리 밑에서 계속 우리를 이용했잖니. 그렇다면 이건 당연한 결과 아냐?”
“이……용이라고?”
레녹이 빠득 이를 갈았다.
“이용한 게, 누군데…!”
“뭐라니. 자기들도 속셈 숨기고 들어와 놓고. 그럼 우리 밑에서 아무것도 잃지 않을 것 같았어?”
소니아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장난치듯이 손바닥 위에 주먹을 올려놓았다.
“아, 양의 탈을 쓴 늑대는 제외하고 말이야.”
“……!”
“가엾게도, 배신당했다는 것조차 몰랐구나.”
레녹이 눈을 부릅떴다. 소니아가 키득키득 웃으며 레녹을 비웃었다.
“자, 그럼……둘이서 한번 덤벼 보겠니? 이번 여흥은 아주 재미있을 것 같아.”
“……문이.”
부름과 함께 옆에 책이 나타났다. 소니아가 검지와 엄지로 원을 만들며 그 안에 숨결을 불어 넣었다. 그러자 손에서 나온 꿈 조각이 어딘지 해마를 닮은 용으로 변했다.
소니아는 시종일관 웃고 있었다. 레녹이 무척, 몹시 어색한 얼굴로 내 눈치를 봤다. 그러더니 한숨을 내쉬며 내게 말을 걸었다.
“자세한 상황은 나중에 설명하지. 이렇게 된 이상…….”
그러나 나는 범위 안으로 다가온 레녹을 향해 말없이 주먹을 내질렀다. 레녹이 당황하며 내 주먹을 막았으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한번 벽에 처박혔다.
“……어머?”
소니아의 눈이 장난스러운 빛을 담고 동그래졌다.
“─착각하지, 말아 주시겠어요?”
곧 소니아가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보는 양 팔짱을 끼고 우리 양상을 지켜보았다.
“아군?”
하,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아군은 무슨 아군? 말해 두겠는데, 저희는 무르시엘을 부수기 위해 여기에 왔습니다. 당신들이 속셈을 가지고 트라베리아의 밑에 붙었다는 건 알았어요.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거죠?”
“……!”
“당신들은 적이에요.”
레녹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그래, 꿈에서 만났을 때도 나는 말했다. 당신들은──적이다.
“적의 적은 아군? 이야기가 그렇게 단순할 거라고 생각하나요? 장담하건대 무르시엘은 오늘로 끝날 겁니다. 기지는 전부 부술 거고, 멤버는 전부 쓰러뜨릴 거예요.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아니, 잠깐만.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알겠어. 하지만 조금만 냉정해져 봐. 지금 상황이…….”
“냉정? 냉정해져도 제 대답은 변함없어요. 그리고 소니아는 제 표적이에요. 방해하지 말고 꺼져 주실래요?”
같은 목적을 가진 만큼 더 질이 나쁘다. 트라베리아를 적대하면서, 그들과 똑같이 사람들을, 그렇게 많은 목숨을…….
감정이 격해지며 저절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소니아의 표정도 굳었다.
“…뭐? 표적?”
“이봐……!”
“그럼 제가 왜 괜히 당신 앞을 막아섰을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소니아를 마주 보며 일부러 입가를 끌어 올렸다. 이건 도발이었다. 명명백백한 도발.
“확실히 방금 대화를 듣고 레녹 그란데의 우선순위는 떨어졌어요. 그리고 전 만전을 기하고 여기 서 있죠. ──당신이라면, 가까스로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나는 그녀의 자존심을 비웃으며 깎아내렸다.
자존심, 그래, 자존심이라 표현하는 게 옳겠지. 트라베리아는 제 힘을 믿는 오만한 마녀 집단이나 스스로의 힘을 과신하지는 않는다. 언제든 칼을 간 복수자가 자신보다 강해져 자신의 뒤를 노릴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트라베리아가 현재 모든 마법사 중에서 최정상에 위치해 있음은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다. 전 세계의 지난 기록을 뒤져도 커븐 로드는 모든 마법의 정점에 서 있다. 소니아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만 한 정신마법을 지닌 마법사가 세상에 얼마나 있었을까.
그 자리를 고작 1년 전만 해도 자신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던 애송이가 조롱한다. 더군다나 소니아는 내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음을 생생하게 느끼고 있다.
하하. 소니아가 헛웃음을 지으며 이를 갈았다.
“갑자기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르네……. 그땐 그냥 ‘재미있는 마법사’였는데.”
그나마 유지되고 있던 미소가 사라지며 소니아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서서히, 하지만 강렬하게 주위로 마법이 들끓는다.
“하지만 인정할게. 너는 지금 나랑 동일 선상에 섰어. 마력도, 실력도 모자라지만, 마법만큼은 충분히. 그런데,”
소니아의 주위로 흩어지던 보석과 구름이 선명해지며 해마를 닮은 드래곤이 날개를 펼쳤다. 위협적인 파동에 벽이고 정신세계고 할 것 없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나와 대등하다는 착각은 하지 말아 주겠어?”
소니아가 손을 위로 치켜들었다. 직후, 소니아가 손을 내리는 것과 함께 주위로 흩어진 정신파가 일제히 아래로 가라앉았다.
윌터와 아르델은 상성이 잘 맞는다고도, 그렇다고 잘 안 맞는다고 하기도 애매했다. 윌터와 아르델이 하무라를 맡은 것은 소거법에 의해서다. 하무라 위의 마법사들이 하나같이 너무 강해 위 순위부터 정하다 보니 두 사람이 남았다.
사실 아르델과 윌터, 두 사람의 실력은 개인으로도, 개개인을 합쳐도 하무라에 비하면 많이 모자랐다. 그러나 윌터는 만일의 경우 캘리번의 힘을 끌어올 수 있고, 아르델에게는 ‘정수’라는 비장의 무기가 있다. 그 힘은 잠깐이라지만 베로니카의 힘을 녹였다.
세 사람은 건물과 사막이 섞인 건조하고 텁텁한 영지에서 눈을 마주했다. 하무라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굽슬거리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미남자였다. 그의 검갈색 눈동자가 윌터와 아르델을 향했다.
“그 가면은……하하, 결국 우리를 쓰러뜨리러 왔다 이건가. 넌 유펠르시아의 왕녀 아르델 페일린이고, 너는 포레이아 캘리번의 윌터 벤자민, 맞지?”
“정답!”
“뭐, 그렇지.”
아르델은 가면을 머리 뒤에 매달고 있었고, 윌터는 허리에 찼다. 아르델의 금발 위로 녹색 술이 흔들렸다.
“모처럼 와 주었는데 미안하지만, 우리 전력은 지금 만전이 아니란 말이지.”
“그딴 건 알고 있어.”
“응? 아아, 그럼 그 틈을 노린 건가?”
“아니? 그냥 오늘이어야만 했어.”
아르델은 자신보다 훨씬 강한 상대를 앞에 두고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즐겁다는 얼굴로 생긋 웃었다. 그 얼굴을 하무라는 조금 씁쓸한 기색으로 마주 보았다.
“기왕이면 조금만 더 기다려 주기를 바랐는데.”
아르델이 말없이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그건 조만간 트라베리아의 문장을 버릴 생각이었다는 소리일까.
하지만 그들의 리더는 이미 무르시엘을 적이라 확정 지었다. 그게 과연 새벽별무리만의 생각일까. 3년간 무르시엘은 충실한 트라베리아의 종으로서 무수히 많은 실적을 쌓아 왔다. 그 실적은 ‘살인’.
연맹의 대다수는 무르시엘을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용서하지도 않을 것이다.
차랑…….
목뒤로 넘긴 하무라의 손에 어느새 흑도가 생겨났다. 아르델과 윌터는 하무라의 메인마법을 떠올렸다. 그의 마법은 ‘무기사역마법’이다. 그리고 그의 애무기는 바로 저 흑도다.
히무라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흑도가, 그어졌다.
쿠과과과과!!
그어진 검로를 따라 검기가 날아왔다. 흑도 주위에 얼핏 용을 닮은 형상이 맴돌았다. 검기를 가로막은 것은 윌터의 손에서 나타난 은색 방패였다.
“어이쿠.”
윌터의 주위로 커다란 총구를 가진 전자 총이 수십 개 생겨났다. 그중 윌터의 바로 옆, 대포보다도 커다란 총구에서 빔 포가 쏟아졌다.
쿠과과광─!
아르델이 휘파람을 불었다. 아르델은 윌터가 실전에 나서는 모습을 몇 번 본 적이 없다. 캘리번의 첫 번째 항주사인 만큼 캘리번을 조종하며 대원들의 서포트에 힘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윌터는 캘리번 안에선 테온 다음가는 실력자다.
“「증폭!」”
아르델의 손 위에 금색 불꽃이 생겨났다. 불꽃 주위로 주황빛 안개가 뒤덮인다. 아르델이 이를 드러내며 손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던졌다. 그 전부를 하무라가 거칠게 베어 냈다. 검풍(劍風)이 아르델과 윌터를 덮쳤다.
“윽…!”
아르델은 주춤했으나 그뿐이었다. 유은하가 가공하고 오를레아가 기술을 더한 전투복은 실로 튼튼했다. 자신보다 훨씬 강한 상대의 마법을 견딜 수 있도록 해 준다. 물론 그 힘은 무한하지 않다.
윌터의 총 중 10여 개의 불빛이 커졌다. 하무라가 흑도를 당기자 흑도에 매달린 방울이 울며 주위로 용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세 사람의 마법이 다시 부딪치려고 할 때였다.
쿠과과광──!!
“윽…!”
“꺅!”
‘이건…….’
그들의 눈에 띈 것은 두 장소의 마력이다. 그러나 그중 하나는 거리가 그들과 극과 극이라고 할 정도로 멀었다. 그러므로 무르시엘의 방어마법을 넘어 그들이 있는 곳까지 위력이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
벽을 부순 마력은 좀 더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연두색으로 빛나는 거품 같은 마력과 안개를 닮은 남색 마력이 서로를 향해 부딪치고 부딪치며 휘몰아쳐 닿는 것을 전부 깨부쉈다.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
짤랑…….
“윽!”
하무라가 귀에 꽂고 있던 금색 귀걸이가 진동하며 흔들렸다. 하무라가 당황하며 귀걸이를 붙잡았다.
“이즈라, 설마…….”
윌터와 아르델도 곧바로 폭풍의 정체를 알아챘다.
‘은하다…….’
‘시작했나.’
아르델이 긴장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다시 하무라에게 집중했다.
‘괜찮아.’
‘하지만 리더라면 틀림없이.’
‘은하라면 틀림없이 이길 거야!’
그때 표정을 바꾼 하무라가 어딘가로 달려갔다. 발사를 멈춘 채 잠시 기다리고 있던 윌터의 총구에서 마력이 빠르게 쏟아졌다. 어지럽게 꼬리를 그으며 떨어진 마력이 감옥이 되어 하무라를 막아섰다.
“타냐!”
흑도가 공명하며 울었다. 떨어져 내리는 검로를 날아온 총이 가로막았다.
화르륵!
동시에 불꽃이 타올랐다. 무르시엘의 외벽마저 태우는 뜨거운 불꽃에 하무라가 아까와는 달리 차가운 눈으로 아르델과 윌터를 돌아보았다.
“─어딜 가시려고?”
아르델 역시 차가운 얼굴로 대응했다. 하무라가 칫 혀를 찼다.
“너희야말로 상황 파악 좀 하지? 저 마력, 소니아 에셔다! 너희라면 꼬리를 말고 도망가야 할 상대 아닌가?”
“꼬리를 말고? 누가?”
아르델이 차갑게 대꾸했다.
“우리가 언제까지 도망 다닐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
하무라가 순간 말문을 잃은 얼굴로 아르델을 보았다. 그러더니 휙, 다시금 소니아의 마력이 시작된 자리를 노려보았다. 그곳에서 솟아오르는 마력은 분명 하나가 아니다. 그래, 틀림없다. 지금 누군가가 소니아와 싸우고 있다.
“설마, 저거……유은하인가?”
새벽별무리에는 뛰어난 강자가 여럿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 소니아와 대등하게 마력을 나눌 만한, 그러니까 소니아와 대등할 정도로 정신마법을 다루는 마법사는 한 명밖에 없다. 바로 새벽별무리의 리더 유은하다. 하무라가 인상을 찡그리며 이마를 짚었다.
“하, 하하…. 아니, 근데 진짜 영문을 모르겠네. 왜 갑자기 소니아가 나타나? 너희 대장이 왜 소니아랑 싸우고 있고? 그리고 저 방향이면 레녹도 휘말렸…….”
“알고 싶어?”
묘하게 해맑은 목소리에 하무라가 아르델을 돌아보았다. 아르델은 얼굴에 목소리와 똑같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해맑은 미소를 띄웠다.
“왜 저렇게 된 건지 알고 싶어?”
“뭘……알고 있는 거지?”
훗. 아르델이 비웃듯 입술을 비틀더니 하무라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도발했다.
“알고 싶으면, 우릴 쓰러뜨려 봐.”
“너…….”
“그리고 고맙게 생각해. 어이없이 리타이어당할 뻔한 걸 막아 준 거니까. 우리 표적이 그렇게 어리석게 쓰러지면 얼마나 황당하고 아쉬웠겠어.”
윌터는 속으로 박수를 쳤다. 유펠르시아의 왕녀님은 놀랍게도 도발이 수준급이었다.
“넌 어차피 저기에 가까이 가지도 못해. 가기 전에 마력에 휩쓸려 죽을걸? 어이없이 죽고 싶으면 어디 한번 가 보든가.”
하무라가 흑도를 꽉 쥐며 아르델을 노려보았다. 반론을 하지 못하는 건 그게 사실이라서다.
“그럴 바에야 우리한테 듣는 게 낫지 않아? 물론 우릴 쓰러뜨려야 들을 수 있겠지만.”
아르델이 곱게 웃었다. 아르델을 사납게 노려보던 하무라가 무심코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주 자신만만한걸?”
하무라의 기세가 변했다. 아르델의 도발에 넘어가 준 것이다. 그를 따라 아르델의 몸 주위로 불꽃이 타올랐다.
“그래, 어디 한번……제대로 해 보자고!”
새카만 도신이 일렁이며 용으로 변했다. 두 사람을 향해 거대한 마력이 덮쳐들었다.
강인하의 위로 길쭉한 검이 수없이 생겨났다. 태양처럼 불타오르는 검 무리가 비처럼 라스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라스가 방망이를 들어 다가오는 빛을 거세게 후려쳤다. 상상을 실체화하며 마법을 독으로 녹이는 녹색 불꽃이 강인하의 빛을 어지럽혔다. 그러나 그보다 빨리 강인하의 빛이 라스의 독을 녹였다.
그보다 빨리 라스가 마력을 더한다. 그렇게 하면 빛의 순도가 라스의 불꽃을 조금 웃돌아도 소용이 없다. 라스의 힘에 전부 휘말리고 만다.
“큭!”
기술을 몇 번 겨뤘을 뿐인데 벌써 마력을 반 이상 써 버렸다. 두 사람은 직감했다.
이 싸움은 길어지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의 싸움은 실질적인 실력 차에 비해서 무척 대등해 보였다. 그건 바로 강인하의 마법 순도가 그녀의 현재 마력량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원인은 바로 정령 에펠로나와 손에 든 이름 없는 신검이다.
순수한 자연의 기와 태양의 신검까지 손에 든 강인하는 존재 자체만으로 태양, 혹은 자연의 화신이나 다름없다. 때문에 강인하의 마법은 자신보다 강한 라스의 마법마저 태운다. 비록 자신의 것으로는 만들지 못할지언정 태우고야 마는 것이다.
반면 라스는 실력만큼 강인하보다 훨씬 뛰어난 마력을 지니고 있다. 레벨이 아슬아슬하다면 힘으로 밀어붙이면 된다.
라스는 힘으로 밀어붙이기 위해, 강인하는 자신보다 뛰어난 마법 레벨을 지닌 라스의 마법을 태우기 위해, 두 사람 다 서로를 상대하기 위해선 평소보다 많은 마력을 내야만 했다. 그 결과 평소보다 마력이 빠르게 소모되고 있다.
“…….”
눈이 마주치는 순간 강인하와 라스는 느꼈다.
이자를 상대로는 평소 같은 ‘평범한’ 전투는 안 되겠구나.
기술을 겨루는 것도, 서로의 눈치를 보는 것도, 전부 쓸데없는 시간 낭비다. 이기려면 한 번에 확실하게 온 힘을 담아야 한다. 일격으로 결판을 내는 거다.
“에펠로나.”
「동화!」
강인하를 중심으로 빛이 폭발적으로 휘몰아쳤다. 주위의 빛과 온기가 온통 강인하를 향해 휩쓸려 사라지고, 빛나는 것은 오롯이 강인하 혼자뿐이다. 강인하의 온몸을 감싼 커다란 날개가 폭풍을 따라 흔들릴 때마다 빛으로 이루어진 깃털이 떨어져 내린다.
라스가 방망이를 꽉 쥐었다. 색이 짙어질수록 도깨비방망이도, 라스의 모습도 변했다. 그의 녹색이 좀 더 짙은 검녹색으로 변하고, 주위로 녹색 불꽃이 흐드러졌다. 불꽃이 점멸하듯 뿜어질수록 색이 변한다.
방망이의 손잡이가 길어지고, 그 위에 있는 돌기는 강철로 된 듯 금속빛이 도는 검녹색을 띠며, 둥그렇던 형태는 각이 진다. 평균 성인 남자에 비해 작았던 라스의 몸이 커다래졌다. 짧았던 머리카락도 길어지고, 간소했던 옷 위로 망토가 겹쳐졌다. 손톱과 귀, 송곳니가 길어지며 뿔이 자라난다.
한편 강인하의 몸을 감싸고 있던 날개가 펼쳐졌다. 강인하의 몸이 온통 금색으로 타올랐다. 옷도, 하얀 얼굴도, 머리카락도.
정령에 완전히 동화된 강인하는 문득 충동적인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본능대로 손에 쥐고 있던 검을, 태양으로 된 것 같은 검을 가슴에 박아 넣었다.
화르륵!
검으로 살을 찌르는 섬뜩한 소리는 나지 않았다. 불꽃이 힘을 더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천천히 강인하의 가슴 안으로 파고들었다.
스륵, 스륵, 화르륵……!
남아 있던 손잡이마저 강인하의 가슴 안에 집어삼켜졌다.
“「욱…!」”
정령과의 동화. 세 개의 태양과 동화하고 신검마저 삼켜 버린 지금의 강인하는 인간과는 영 동떨어져 있었다. 울리는 목소리마저 사람보다는 정령과 닮아 있다. 과도하게 가슴 안에 들어차는 마력에 강인하는 순간 구역질을 삼켰다.
신검을 가슴에 집어넣은 것은 충동적인 행동에 가까웠다. 정령과 완전히 동화한 순간, 이 힘을 전부 발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았다. 신검이 가슴 안에 있는 마법의 근원에 녹아들었다. 가슴 안이 부글부글 끓으며 마력이 주위로 흘러넘쳤다. 그 힘이 주위의 모든 것을 불살라 갔다.
준비를 마치고 강인하가 눈을 떴을 때, 눈 안에서 타오르는 태양을 본 순간 라스는 깨달았다.
아, 지금의 강인하는 자신과 대등하다.
그의 입가에 드물게도 웃음이 어렸다. 첸이 보면 놀라리라. 그는 한평생 미소를 지은 적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새벽별무리의 마법사는 참으로 신기하다. 한계가 있는 인간이면서, 누군가에게 마법이 주입된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저렇게 끝이 없이 강해질 수 있나. 한순간에 계단 하나를 한꺼번에 날아올라 뛰어넘는다.
“…….”
고요한 눈동자가 마주친 순간, 강인하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러나 라스는 당황하지 않고 방망이를 꽉 쥐었다. 그가 쥔 방망이를 중심으로 녹색 불꽃과 검은 안개가 무시무시하게 응축되었다. 커다래진 라스 주위로 더 커다란 도깨비의 형상이 환상처럼 일어났다. 무시무시한 마력에 라스의 피부마저 녹색으로 물든 순간─.
하늘에서 태양이 떨어져 내렸다.
“후….”
떨어져 내리는 속도는 빛보다 빠르고, 때문에 떨어지는 금빛은 시간을 지배한다.
인지하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임에도, 그를 향해 가까워지는 빛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그 찰나가 세상의 전부처럼 느껴졌다. 라스는 손에 꽉 힘을 쥐며 전심전력을 다해 하늘을 향해 방망이를 휘둘렀다.
쿠과과과과!!
이윽고 떨어진 태양과 도깨비의 검녹색 마력이 충돌했다.
눈부신 태양의 불꽃이 주위를 폭포처럼 집어삼켰다.
이성진의 승리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는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고서도 첸을 농락했고, 결국에는 이겼다. 이성진의 승리가 확정되었을 때 첸의 상태는 꽤나 엉망이었다. 옷은 너덜너덜하고, 팔 하나가 날아갔으며, 얼굴을 비롯해 칼날 자국이 난 곳을 따라 피투성이였다. 이성진은 그의 어깨와 다리에 칼을 박아 그를 구속했다. 완벽하게 구속한 후에야 다리에 꽂힌 칼을 뽑았다. 어깨에 꽂은 물 검은 만일을 위해 뽑지 않았다.
“큭!”
“음…….”
이성진은 조금 곤란한 얼굴로 피가 뚝뚝 흐르는 팔 한 짝을 들어 올렸다. 용케 그 난리 통에 부서지지 않았다.
능력을 최대한 제어한다고 제어했는데 결국 결손을 만들고 말았다. 이성진은 그에게 경고하고 또 경고했던 유은하를 떠올리며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야 못 미더울 만도 하다.
이성진은 첸의 잘린 팔과 어깨에 담긴 종말의 마력을 흡수해 없앴다. 그는 잘린 팔 단면을 첸의 어깨 단면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팔이 서서히 붙었다.
‘역시.’
마력의 흐름으로 보아 재생력이 뛰어날 거란 건 예상하고 있었다. 숨을 고르며 겨우 정신을 유지하던 첸이 의아한 눈으로 이성진을 올려다보았다.
“콜록! 흐……조금 전까지, 신나게……베시던 분이……이건 또 무슨 변덕이랍니까……?”
“리더의 명령이다.”
이성진은 겨우 조금 붙은 팔을 쥔 채 싸늘한 눈으로 첸을 내려다보았다.
“너만은 살려서 끌고 오라더군.”
“유은하가…….”
빛이 흐려진 첸의 은색 눈동자에 의아한 감정이 떠올랐다. 이성진의 눈에 얼핏 살기가 어렸다. 본능적인 생존 욕구를 자극하는 살기에 첸은 섬뜩함을 느끼고 숨을 멈췄다. 그러나 이내 입가에 옅게 미소를 띠었다.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싫은 모양이로군요……. 그럼 그분을……뭐라 부르면 좋겠습니까……?”
“아니, 내가 마음에 걸리는 건 그게 아냐.”
“……?”
“그 녀석의 이름을 부를 때 묘하게……다정하더군. 너랑 우리 리더는 만나 본 적이 없을 텐데?”
“…….”
첸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곤란한 미소를 띠며 숨만 고르는 게 대답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이성진이 코웃음을 쳤다.
“뭐, 됐어. 어차피 심문하기 위해 데려가는 거니. 리더는 네 마법에 관심이 있다는 모양이다.”
“그렇……습니까. 그건 참, 기분 좋네요…….”
첸은 몇 번 숨을 고르며 벽에 기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좋습니다……. 그녀를 만나면……전부 이야기하지요…….”
첸의 시선이 문득 어딘가로 향했다. 레녹, 지금쯤 그도 새벽별무리와 싸우고 있을까? 그렇다면 상대는……유은하겠지.
‘유은하.’
첸은 속으로 그 이름을 읊조렸다. 이어 그녀의 이름을 처음 입에 담았던 친구를 떠올렸다.
“…….”
──그때 하늘에서 빛이 떨어졌다.
쿠과과광!!
빛이 폭포처럼 흘러넘치며 안개보다 짙게 주위를 휩쓸었다. 정령을 얻은 후로 제어력이 많이 섬세해졌지만, 그래도 강인하는 유은하만큼은 힘을 제어하지 못한다. 자연히 주위로 터진 마력 역시 강력한 공격력을 지니고 있다.
이성진은 손을 앞으로 내밀며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태양의 파도를 막아 냈다. 염력으로 단단히 굳힌 공기 너머에서 치직치직 타는 소리가 났다. 이성진은 입꼬리를 올렸다. 유은하도 강인하도 정말 무섭도록 순조롭게 강해지고 있다.
“이……건…….”
첸이 숨이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