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4
나는 그 자리에서 감정에 삼켜져 환호하기보다는 막 만든 마법을 마구 사용하는 것으로 기쁨을 표현했다. 마구마구 글자를 썼다. 어둠의 구, 불, 물방울 등등의 짧은 단어를 계속 써넣어 갔다. 전부 형상화되지는 않았지만 중간중간 작은 몇몇 형체들이 떠올랐다. 그것을 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게 너무 기뻐서, 나는 또다시 펜을 움직였다.
이번엔 문장을 써 보자. 그래, 환영을 만들어 보자. 그럼 좀 더 환각마법을 빨리 익힐 수 있을지 모른다. 직접 환영을 보면, 꿈의 세계를 펼치면──.
그러니까, 나는 바보였던 거다. 처음 만든 마법을 그렇게 마구잡이로 사용해 봤자 결과는 뻔한데. 결국 나는 그날 들떠서 마력이 고갈될 때까지 마법을 사용한 덕분에 반쯤 기절하듯 잠들어 버렸고, 아침이 돼서야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리고 왜 이런 곳에서 자고 있냐며 엄마한테 타박을 얻어맞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질리지도 않고 그 행동을 반복했다. 처음으로 내가 만들어 낸 마법에 푹 빠져 밤마다 마법을 쓰고 또 쓰는 것을 반복했다. 그나마 마력 고갈이 되지 않도록 조절하기는 했다.
그러다 보니 며칠 후에는 환각마법을 만드는 것에도 성공했다. 처음으로 사용한 환각마법은 작고 약한 환상 수준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순조로웠다.
두 개를 만드니 그다음은 더 쉬울 것 같지? 아니, 어려웠다. 문자마법과 환각마법에 비해서 시공간을 모태로 둔 결계마법은 만드는 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단, 시공간마법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마력을 발휘하려 하자 마력을 움직이는 것조차 제대로 안 됐다. 그래서 결계의 모티프와 형태를 중점적으로 되새겨 거의 한 달 가까이 시간을 소비한 끝에 겨우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겨우 만든 결계마법은 생각 이상으로 초라했다. 기껏해야 내 손바닥을 감싸는 방패 막을 펼칠 수 있을 정도였다. 그걸 본격적인 결계 모양으로 만들어 낼라치면 더 심했다. 결계마법 중에서도 가장 쉬울 거라 예상한 ‘몸을 감싸는 결계’조차 막상 만들어 보니 중지의 손톱만 겨우 감쌀 수 있을 정도였다. 솔직히 말해서 약간 충격이었다.
나는 그 후로 마법 훈련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명상을 하고, 마력을 호흡하는 걸 계속하며 순차적으로 마력을 쌓고, 골방에 자주 틀어박혀 끊임없이 마법을 쓰고 또 썼다. 매우 어려웠지만, 다행히 마법 실력은 조금씩 진전을 보였다. 그 가장 어려웠던 결계마법도 말이다.
하지만, 그, 매일매일 잠을 줄여 가면서까지 마법을 사용하며 마법에 정신이 팔려 있었던 덕분인지, 하여간 나는 요즘 유치원에서 가끔 졸았는데……덕분에 들키고 말았다. 뭐냐면, 내가 마력을 느낀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실‘만’ 말이다.
☆
내가 이렇게 마법 실력에 진전을 보이는 사이 유치원 아이들 중에서도 마력을 느낄 수 있는 아이들이 한두 명 정도 늘었다. 이게 다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마력을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해 물건이라든가 주변 환경 조성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쓴 덕분이었다.
뭐, 마력을 느낀다고 바로 마법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마력을 느끼면 그다음으로는 주변의 마력을 볼 수 있게 되어야 하고, 이어서 그 마력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거기까지 가야 비로소 자신의 몸에 마력이 쌓이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또 마법을 쓸 수 있을 때까지 성장하려면 제법 시간이 걸린다. 특히 이런 어린 몸으로는 말이다.
어쨌거나 내가 마력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나마 들키게 된 것은 머릿속이 마법에 대한 것으로 꽉 차 말을 생각 없이 내뱉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보니 나는 스스로 선생님께 마력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 꼴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지금은 이 모양이다.
“오늘로 은하, 수이가 마력을 느낄 수 있게 되었어요. 자, 모두 박수!”
“와아아아!”
짝짝짝! 박수 소리를 들으며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 이 상황이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아이들이 환하게 웃으며 축하할수록 그 마음은 더 커졌다. 난 진짜, 누구 앞에 나서는 건 딱 질색이란 말이다. 그것도 선생님께 불려 나가 축하받는 꼴이라니, 진짜 싫었다. 부끄러워 미치겠다.
나는 쪽팔림을 애써 숨기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돌아가자마자 유미가 밝은 얼굴로 나를 축하해 줬다.
“축하해.”
“고마워.”
하지만 이건 나쁘지 않았다. 친구가 웃으며 나를 축하해 주는 건. 나는 유미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이번엔 좋은 의미로 쑥스러웠다.
“우리 친구들 중에 또 마력을 느낄 수 있는 친구가 생겨서 참 기쁘죠?”
““네!!””
“그럼 이번 소식도 기쁘겠네요. 실은 다음 주 화요일에 우리 모두 소풍을 가게 됐어요!”
‘겍─…….’
나는 속으로 수줍게 기뻐하던 것을 멈추고 속으로 괴음을 냈다. 소풍? 소풍이라고라?
‘으아……싫다.’
소풍은, 최악은 아니지만 별로다. 일단 귀찮다(가장 중요하다). 챙길 것도 많다. 간식에 도시락에 물까지! 그리고 이곳저곳 돌아다녀야 한다. 결론적으로 귀찮다.
““와아아아아아!””
그러나 내 심정과는 달리 아이들은 환성을 내질렀다. 이 소풍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건 아무래도 나뿐인 것 같았다. 내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푹 숙일 때였다. 선생님의 말이 이어졌다.
“이번에 갈 곳은 유리 식물원이란 곳이에요. 유명한 곳인데 혹시 아는 사람?”
“유리 식물원?”
“저 알아요! 신기한 마법 식물이 있다는 곳이에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퍼뜩 들었다. 선생님이 손을 모으며 박수를 쳤다.
“어머, 잘 아네요. 맞아요. 그 말대로, 유리 식물원은 마법의 영향을 받은 신기한 마법 식물들이 잔뜩 있는 곳이랍니다. 예쁘다고 소문이 자자한 곳이기도 해요. 모두, 가 보고 싶죠!”
““네!””
시큰둥하게 죽었던 내 눈빛이 반짝이며 되살아났다. 헤에, 마법 식물이라. 마법 식물이란 말이지.
나는 가슴 가득히 차오르는 기대감을 느끼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말을 듣기 전까진 관심도 없고 오히려 귀찮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기대가 되었다.
마법의 영향을 듬뿍 받은 식물이라니, 얼마나 예쁘고 신기하고, 또 어떤 색으로 빛날지…….
나는 소란스럽게 환호하는 아이들 속에서 마찬가지로 환하게 웃었다. 내 옆에서 유미도 호기심이 가득 어린 표정으로 기뻐했다.
나는 속으로 앞으로 소풍까지 남은 날짜를 세어 보았다. 가는 날이 다음 주 화요일이라면……앞으로 5일이 남았다.
나는 기대감이 가득 넘치는 눈빛으로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어느새 종이 뭉치를 들고 서 있었다.
“지금부터 선생님이 소풍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는 종이를 나눠 줄 거예요. 이건 꼭 엄마 아빠한테 전해 드려야 해요! 알았죠?”
““네!””
프린트물을 받는 동안 반 여기저기에서 ‘우와’ 하는 막을 수 없는 탄성들이 터져 나왔다. 나 역시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진짜 재밌겠다!
신기한 마법 식물들이 잔뜩 있는 곳이라고? 진짜 신기하겠다!
그날은 들뜬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돌아간 나는 잠깐 놀랐다. 웬일인지, 오늘은 인하와 선아 아줌마에다가, 선아 아줌마의 남편이자 인하의 아버지인 정민 아저씨까지 우리 집에 와 있었던 것이다. 분명 돌아오기까지 몇 주 남았다고 알고 있는데?
뭣보다 오늘 나를 마중 온 게 정민 아저씨라서, 나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놀라야만 했다. 아저씨가 말하기를, 엄마랑 아줌마의 수다가 도저히 끊이질 않아서 대신 마중 왔다고 한다. 음, 확실히 아줌마들의 수다는 끝이 없지. 그 느낌 알지.
약간 새로운 기분으로 정민 아저씨의 뒤를 따라 쪼르르 집으로 돌아온 나는 인사하며 가방에서 곧장 프린트물을 꺼내 엄마한테 건넸다.
“어머, 소풍을 가네.”
“응!”
“게다가 가는 곳은 유리 식물원…….”
“헤에, 거기 유명한 데잖아. 다른 곳에선 볼 수 없는 신기한 식물이 많다고.”
“응. 과연~. 그래서 우리 은하가 이렇게 신났구나.”
“정말.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폈네.”
귀엽다 귀엽다 하며 선아 아줌마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잠시 쑥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엄마를 향해 물었다.
“엄마는 가 본 적 있어?”
“응? 그럼, 있지.”
“예뻤어?”
“엄마가 가 본 건 6년 전이었는데, 그때도 굉장히 즐거웠어.”
“그렇구나─.”
그 말로 인해 기대감이 더욱 커졌다.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기대감과 함께 호기심도 더욱 키워 갔다.
마법으로 된 식물이라고?
과연 어떤 것들이 있을까.
어떤 색으로 빛날까. 얼마나 예쁠까.
나는 즐거운 상상에 빠졌다. 머릿속으로 그럴듯한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문득 환각 계열 마법을 더 능숙하게 쓸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마법으로 시뮬레이션을 해 볼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지금의 내 능력으로는 작은 형상의 환각, 그것도 척 봐도 환영이라 볼 수 있는 아주 작은 것을 만들어 내는 것만 겨우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문자는 이제 문장으로도 쓸 수 있게 됐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환각마법과 숙련도 차이가 큰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차라리 문자로 환각을 만들어 내는 게 빠를 정도였다. 이거, 가끔은 메인과 서브가 바뀐 게 아닌가 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하지만 나는 문자보단 환각마법이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만들어 내기에 더 완벽한 마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내 마법 실력이 한참 부족한 것만은 틀림없었다. 역시 오늘도 더 연습하다 잘까? 그럼 결계마법을 연습해야겠다. 결계마법은 정말로 아직 모자라고도 한참 모자라니까.
생각에 가득 차 웃으며 고개를 돌리던 나는 문득 인하와 시선이 마주쳤다. 평소처럼 차가운 무표정을 한 인하는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지 아까부터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무심코 인하의 마력을 살펴보다가 감탄했다. 헤에, 인하는 벌써 마력을 움직일 수 있구나. 무표정 속에서 그 애는 명백하게 의아한 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평소라면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말하는 게 두려워서 한발 물러났을 나지만, 나는 인하를 향해 활짝 웃으며 물었다.
“왜 그래? 인하야?”
“…….”
인하는 대답 없이 조금 놀란 기색으로 뒤로 물러났다. 내 말이 뜬금없었는지 선아 아줌마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응? 왜 그러니? 인하가 왜?”
“아니, 인하가 뭔가 묻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어머, 그런 게 느껴져?”
“그냥, 왠지……?”
내 말에 선아 아줌마도 정민 아저씨도 꽤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요? 그렇게 물으니 무표정하게 나를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돌린 인하를 두고 선아 아줌마와 정민 아저씨가 입을 모아 말했다.
“그게, 우리가 일상생활에선 실수투성이라 그런 건지 몰라도 쟤가 좀 어릴 때부터 철이 들어서.”
“모르는 사람한텐 절대로 말 안 걸고 사교성도 없고.”
“게다가 얼굴에 표정이 잘 안 드러나거든. 그래서 많이 걱정했는데……은하랑도 쉽게 친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근데 이이 말고 인하의 표정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처음이야.”
나는 놀랍다는 듯이 이어진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이내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환생자인 나와는 달리 인하는 그냥 평범한 어린아이일 뿐인데 확실히 너무 말이 없고 차갑긴 하다. 평범한 어린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치 어른스럽다.
아니, 평범하진 않나.
성격에서부터 그랬지만 벌써 마력을 움직일 정도면 미래의 그림이 어느 정도 그려진다. 충분히 드문 재능이다.
아, 나? 난 어쩌다 보니 아공간 버프도 얻어서 마력의 흐름에 민감한 것뿐이니까 뭐…….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뺨을 긁적이는데 선아 아줌마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개를 들자, 뻗어진 손 사이로 다정하게 웃고 있는 선아 아줌마의 얼굴이 보였다.
“아줌마는 역시 은하랑 인하가 친해지면 좋겠어. 나랑 미래처럼.”
나는 선아 아줌마를 보며 잠시 쓴웃음을 삼켰다. 사실은 나도 인하랑 많이 친해지고 싶다. 하지만 나는 말이다, 사람과 친해지고 그러는 게 그렇게 쉽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그 사람과 친해지고 싶으면 친해지고 싶은 만큼 나는 움츠러든다. 말을 거는 것조차 두렵다. 애초에 난 소심형인걸. 그래, 남에게 쉽사리 먼저 말을 걸지 못하는 성가신 성격이라고. 나도 이런 내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하가 나와 친해지고 싶은 생각이 없다면 이런 고민들도 말짱 꽝인 거다. 게다가 인하는 소심한 나만이 아니라 누구나 말을 걸기 힘든 차가운 분위기를 지니고 있기도 하고…….
나는 이미 돌아서 있는 인하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지금은 그냥 곁에서 조용히 함께 앉아 있거나 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
오늘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풍날이다. 어제 드물게 마법 연습을 줄이고 일찍 잤을 정도로 나는 오늘 소풍을 기대하고 있었다. 가방에 과자랑 음료수, 수첩, 필기구 등을 챙겼다. 다만 사진기는 결국 엄마의 반대로 챙기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 나이에 핸드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나는 속으로 툴툴대며 다음엔 염사마법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원하는 장면을 얼마든지 마법으로 남길 수 있잖아!
……솔직히 말해서, 사진을 찍지 못하게 된 것이 좀 많이 분했다.
마지막으로 도시락까지 챙긴 나는 유치원 버스에 올라탔다. 방금 전까지 툴툴댔던 것도 잊고 창밖에 있는 엄마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엄마가 잘 갔다 오라며 배웅해 주는 동안 나는 계속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오늘은 정말 기분이 날아갈 것같이 좋았다.
버스는 일단 유치원으로 향했다. 거기에서 아이들을 더 태우고 반끼리 버스를 나눠 탄 후에 다 함께 소풍지로 출발하게 된다.
유치원에 도착하자 먼저 유치원에 와 있는 유미가 보였다. 유미는 유치원 근처 동네에서 살기 때문에 구태여 버스를 탈 필요 없어 걸어서 유치원을 다니고 있었다.
유치원에 도착한 나는 일단 버스에서 내렸다. 맨 처음 유미에게 웃는 얼굴로 인사를 했다. 그리고 다음 버스가 아이들을 다 태우고 돌아올 때까지 유미랑 반 안에서 오늘 소풍에 대한 기대감을 답지도 않게 들떠서 떠들어 댔다. 다른 아이들도 대개 우리처럼 기대감에 가득 젖은 채 떠들고 있었다.
선생님한테서 다시 버스에 타란 신호가 왔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옆자리에 앉았다. 유미가 창가 자리, 내가 바깥쪽 자리를 차지했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 버스가 출발하기를 기다렸다.
나도 유미도 서로가 편했다. 자연스러운 침묵이 찾아왔을 때 일부러 어색하게 말을 걸 필요도 없고, 서로 책을 좋아하고, 서로 조용한 성격이기도 하니까.
뭐, 그렇다고 대화를 안 한다는 소리는 아니다. 우리는 제법 대화를 나누는 편이었다.
“은하야, 넌 무슨 간식 사 왔어?”
“음……초콜릿이랑 사탕이랑, 과자는 포테토칩이랑 콘칩으로 사 왔어. 음료수는 보리차.”
“난 간식으로 오렌지 가져왔어. 이따 은하도 먹을래?”
“응. 먹을래.”
이처럼. 뭐……필요한 말만 하고 말 때도 많지만 말이다.
그러는 사이 버스가 출발했다. 나는 의자에 기대어 앉은 채 빠르게 움직이는 창밖의 풍경을 계속 기웃거렸다. 보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유리 식물원이라는 곳은 꽤 먼 곳이었다. 내가 예전에 살던 세계의 평범한 교통수단으로 가면 틀림없이 가는 데에만 3시간쯤 걸릴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지구라도 그냥 지구가 아니라 마법이 보편화되어 있는 지구였다.
예전 21세기에는 긴 거리를 자동차로 빨리 달리기 위하여 고속 도로가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도 그런 게 있다. 그저 길만이 이어진 고속 도로 같은 것보다 훨씬 빨리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마법 그 자체의 길이.
흔히 「게이트」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열심히 창밖을 기웃거리던 나는 이내 몰래 마력을 유동시키며 투시마법을 사용했다. 마법을 발동시키자마자 주변 광경이 온통 꿰뚫려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허공을 부유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약간 어지러웠다. 나는 곧바로 마력을 조절했다.
창밖의 풍경이 점점 확장되며 가까워졌다. 버스 바로 앞, 빠르게 달리는 풍경이 보인다. 도로가 보인다. 그리고 저 앞에 있는 새까만 터널이 보였다.
겉모양은 터널이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어둠은 공간이 밀폐되어 생긴 그런 어둠과는 차원이 달랐다. 새카만 그것은 마치 우주와도 같은 일렁임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저것이 바로 내가 그토록 보고자 했던 ‘게이트’였다.
마침 창밖을 보고 있던 유미가 내 옷깃을 끌었다.
“은하야. 저것 봐. 게이트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가를 보는 척하면서 투시마법으로 바깥 광경을 생생히 훑어보았다. 정말로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저게 게이트…….’
머지않아 버스가 게이트 안으로 들어섰다. 주변이 새카만 어둠으로 가득 차올랐다. 그런데도 표지판이라든지 글자 같은 것이 잘 보인다는 점이 또 신기했다.
앞으로 공간계 마법을 계속 개발해 갈 나에게 있어서 이 상황은 공간계의 마력을 맛볼 수 있는 정말이지 큰 기회였다.
게이트 안은 마치 별과 은하가 한가득 들어찬 우주 같았다. 굉장히 특이한 느낌의 마력이 주변에 가득 차올라 있는 것이 느껴졌고, 또 보였다. 나는 눈에 마력을 집중시키며 주변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결계와 게이트를 시공간마법의 기초로 잡았지만, 나는 아직 게이트를 어떻게 만드는지 모른다. 게이트마법은 공간계 마법 중에서도 매우 어렵고 엄청난 마력이 드는 고난이도의 마법이었다. 그만큼 마력의 움직임도 복잡했다. 하지만 기본 원리만으로 설명하자면, 게이트란 것은 긴 길을 한 번에 축약시키는 또 다른 공간이자 ‘길’이란 느낌이다. 공간과 공간 사이의 거리를 축약해 연결하는 공간의 통로란 느낌이랄까?
만드는 데에 공간계 마법을 지닌 마법사 몇 명과 질이 좋은 수십 개의 마석, 복잡한 마법진 몇 개가 필요한, 그야말로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길이었다. 당연하지만 길의 출구와 입구도 겨우 한 개로 그치지 않는다. 게이트 안에는 수십 개나 되는 길이 이어져 있었다. 표지판도 수십 개가 서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가 가려는 길을 빛나는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었다. 그 모든 광경이 투시마법으로 인해 선명히 보였다.
“우와, 멋있다.”
나는 유미의 말에 긍정하며 그 우주 공간 같은 공간의 길에 흠뻑 빠졌다.
내 공간계 마법의 기본은 ‘결계’다.
결계로 나의 세계를 ‘구축’하고 내 세계 외의 것을 ‘단절’시키거나 결계끼리의 공간을 ‘잇는’ 것이 내 결계의 기초였다.
예를 들어 보자. 결계를 하나 만든다. 그 결계가 나의 세계이기 때문에 나는 그 결계의 모든 것을 조정할 수 있다. 꽃을 만들고 집을 만들고 바람을 휘몰아치게 하고 번개를 내리고, 원한다면 시간마저 돌릴 수 있다. 그리고 결계 안의 세계와 밖의 세계는 단절된다. 밖에서 마법을 써도 내 결계는 그것을 완전히 막는 것이다. 마치 세계가 나뉜 것처럼. 그리고 결계와 결계끼리는 소통을 할 수 있고 이동을 할 수 있다. 두 개의 결계를 만들어 그 결계 중 한 곳에 물건을 하나 두자. 나는 그 물건을 이쪽, 저쪽으로 내 맘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좀 더 간단한 텔레포트 방법이었다.
이것은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결계마법의 모습으로, 아직은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마법은 결계이기 이전에 시공간마법이기 때문에 나는 결계만이 아니라 ‘통로’도 생각해 두고 있었다. 수첩에도 처음부터 그렇게 적어 두지 않았나. 결계와 게이트를 기본으로 한다고.
나는 게이트를 바라보며 내가 만들 게이트의 형태를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잇는 통로, 단절하는 통로. 기본은 ‘잇거나’ ‘단절’하는 것. 하지만 역시 처음은 ‘결계’가 그 마법의 모태가 되겠지.
그건 전생에서부터, 태어난 이후로 몇 번이나 상상하곤 했던 내 시공간마법의 이상적인 모습이었다. 그리고 내가 항상 쓰는 아공간도 따지자면 공간을 다루는 힘이었다. 나는 결계마법이 문자마법만큼이나 나와 상성이 맞는다는 확신이 있었다.
게이트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도 당연하다. 애초에 게이트는 먼 거리를 축약하기 위한 공간의 통로인 것이다. 나는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나도 언젠가 저러한 기술을 만들고 말겠다는 꿈 같은 생각에 부풀어 있었다. 거기에서 나는 문득 뜬금없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인하는 어떤 마법을 만들고 싶을까.’
정말로 문득 떠오른 뜬금없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번 그런 생각이 들자 호기심이 일었다. 벌써 마력을 움직일 수 있게 된 것 같은데, 조만간 몸 안에 마력이 쌓이지 않을까. 어떤 마법을 만들고 싶을까. 어떤 마법부터 배우고 싶어 할까. 그런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머릿속에 긴 검은 머리카락에 차가운 얼굴을 한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애가 너무 예쁘기 때문에, 나는 그 애를 볼 때 때때로 가슴이 두근거리곤 한다. 그래서 사실은 엄마의 말이 아니더라도 항상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떠올랐던 건지도 모른다.
“은하야. 게이트 예뻤지?”
그러나 나는 곧 나를 향해 그렇게 물어 온 유미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인하에 대한 생각을 지웠다. 그리고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게이트를 지난 버스는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섰다. 나는 반복해서 게이트의 마력을 떠올리면서도 창밖의 풍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풍경이 빠르게 달리다가 어느 커다란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아이들이 소란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례대로 버스에서 내려 차례대로 줄을 섰다. 이번에도 나와 유미는 짝지였다.
나는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탄성 같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우와.”
나만이 아니라 다른 모두도 마찬가지의 반응을 보였다. 내리자마자 보인 것은 제법 커다란 건물이었다. 건물의 색은 대개 하얬다. 층의 중간중간에 끼워져 있는 큼지막한 유리창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온통 유리로 된 원형 건물도 있었다. 그 사이로 묘한 마력을 뿌리는 나뭇잎의 모습이 드문드문 보였다.
하지만 내가 탄성을 낸 것은 그런 먼 모습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식물원의 정원 주변에 난 꽃 때문이었다. 전부 유리로 만들어진 양 투명한 꽃이 주변 화단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래서 식물원의 이름이 ‘유리 식물원’인가 싶을 정도였다.
게다가 햇살을 받을 때마다 오색 빛깔로 빛나는데, 그 모습이 너무 예뻤다. 아이들이 탄성을 지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예쁘다며 꽃이 있는 쪽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아이들을 향해 선생님이 웃으며 말했다.
“후후. 예쁜 꽃이죠? 참고로 저 꽃들은 다 살아 있는 꽃들이에요. 마법으로 품종 개량한 꽃으로, 이 유리 식물원에만 있는 특별한 식물들이랍니다.”
나는 선생님의 눈치를 보며 꽃을 저렇게 맘대로 만져도 되는 건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보면 괜찮은 거겠지.
나는 약간 뒤늦게 꽃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꽃을 향해 손을 뻗었다.
투명한 꽃잎이 손가락 끝에 살짝 닿았다. 손가락 끝에서 느껴진 보드라운 감촉에 나는 문득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건 환희와도 같은 감정이었다. 고개를 숙여 꽃 바로 앞으로 얼굴을 가져가자 식물 그 자체의 향기가 느껴졌다. 나는 시야를 개방했다. 살아 있는 것에서만 볼 수 있는 마력의 흐름이 보였다.
나는 귀여운 동물을 보듯 꽃잎을 손가락으로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이번엔 꽃에서 꽃가루 같은 작은 빛 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흐아, 나는 그 순간 신기해서 방방 뛸 뻔했다.
“자. 이제 다들 한 번씩 만져 봤죠? 그럼 일단 출발하도록 해요. 자, 앞에서 줄 서야지?”
선생님이 흩어져 있는 아이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 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유미와 손을 잡고 맨 끝에서 줄을 섰다.
선생님은 출발하기 전에 우리들 전부에게 마법으로 ‘선’을 연결해 놓았다. 미아 방지 선이었다. 만일의 경우엔 자신이 있는 곳으로 직접 이동시킬 수 있는, 사람을 붙잡거나 찾는 데에 유용하게 쓰이는 선생님의 고유마법이었다. 단, 자신이 있는 곳 이외의 장소로는 이동시킬 수 없지만 말이다.
선생님은 그렇게 우리를 잃어버려도 찾을 방도를 마련해 둔 후에 우리를 이끌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 그럼 식물원 안으로 들어가 볼까요?”
“와아!”
줄을 서서 차례대로 식물원 안을 돌았다. 이 식물원은 다른 곳과는 다르게 마치 전시관이나 박물관처럼 여러 종류의 식물들을 진열해 놓은 장소가 많았다. 땅이 아닌 곳에서도 자랄 수 있는 식물이 많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선생님은 애들을 조용히 하도록 통제하는 것에 많은 수고를 쏟아야 했다.
나는 유미와 손을 잡은 채 대열을 유지하면서도 온통 신기하단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중에서 공기에 뿌리 내린 채 자라는 것도 있었다. 게다가 뿌리도 굉장히 신기했다. 줄기가 안 보이기에 벽에 달린 꽃 장식인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은 꽃이었던 경우도 있었다.
어디를 봐도 마력이 반짝반짝 빛을 뿌리는 것 같았다. 잘 보면 식물과 인간의 마력의 색은 조금씩 달랐다. 이곳에 있는 마력의 색은 너무나도, 정말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때때로 묘하게 변질된 것 같은 색도 보였지만 꽃이 너무 예쁘고 신기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그냥 그러려니 하며 넘겼다.
우리는 온갖 방을 지났다. 개중에는 태연하게 말을 하는 꽃이나 아예 거대 꽃으로 만들어진 방까지 있었다.
“이번에는 ‘철로 된 식물’이 있는 곳으로 갈 거예요. 이 식물 중에도 정말 신기한 게 많아서, 어떤 건 나무에서 철로 된 도구들이 열린다고 하네요.”
“선생님, 선생님, 숟가락 같은 거요?”
“핀이라든가?”
“구슬?”
“구슬은 철이 아니잖아!”
“철 구슬도 있어!”
철이라.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나는 금속마법에도 상성이 있었다. 금속이라니, 대체 어떤 마법을 만들 수 있는 건가 싶었다.
내가 배운 기본마법 중에서도 철에 관련된 건 별로 없었다. 있다 쳐도 공격마법이라 아직 배우지 못했다. 예를 들어 땅에서 솟아나게 한다든가, 그렇게 모양을 바꿔서 창처럼 쏜다든가. 그런 종류가 대부분이라 마법을 만든다 해도 대체 어떤 마법을 만들 수 있는 건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감이 안 잡힌다. 그냥 전부 공격마법만 있을 것 같았다. 금속에 대한 마법은 생각도 해 본 적 없었다.
나는 선생님을 뒤따라 철의 방으로 들어갔다. 철이라서 회색빛으로 가득할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그 안에는 반짝이는 온갖 색의 식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헤에?’
다만 꽃의 모양이나 느낌이 명백하게 금속성을 띠고 있었지만 말이다. 금이나 은으로 된 꽃을 보고 있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살아 있다기보다는 장식물 같았다. 나는 감탄 어린 기분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확실한 건 방 안의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는 것이다. 대열이 저절로 흐트러졌다. 나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은색 침엽수 잎을 만져 보았다. 금속성을 띠고 있는지라 날카롭거나 딱딱할 것 같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파리나 꽃잎이 의외로 잘 휘어졌다. 만지다 말고 깜짝 놀랐을 정도였다.
반면 모습 그대로 굉장히 딱딱한 것도 있었다. 색도 가지각색이라서, 나는 왠지 웃음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을 참았다. 나무엔 정말로 철로 된 구슬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게다가 선생님은 저걸 먹을 수 있다고 말했다.
‘헐…….’
정신없이 방을 둘러봤다. 나는 열매를 보며 살짝 입맛을 다셨다. 보기엔 별로 맛있어 보이지 않지만, 먹을 수 있다니 한번 먹어 보고 싶었다.
“자, 모두 이제 다음 방으로 이동해요!”
“네에?”
“에이, 벌써요?”
아이들이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왜냐면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아이들은 실망스러운 표정을 하면서도 앞서 걸어가는 선생님의 뒤를 따랐다.
나는 옆에 난 풀잎들을 스치듯 손으로 만지며 그 대열을 따랐다. 머지않아 꽃들이 나란히 이어진 화단이 끝나고 출구가 바로 눈앞까지 가까워졌다. 그때, 내 눈에 무언가가 박혔다.
‘저건……?’
그건 하얀빛을 뿜어내고 있는……‘꽃’이었다.
두근!
철로 된 꽃. 그 꽃잎의 가운데에서 마치 꽃술인 양 빛나고 있는 투명한 보석 같은 구슬.
나는 꽃잎 사이에서 신비한 빛을 뿌리는 구슬을 보며 묘한 감각에 삼켜졌다. 기이한 마력이었다. 마치 주변을 일그러트리는 것 같은 이질적인 마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본능 같은 것이었다. 나는 순간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그 아름다운 것을 보자마자 오싹한 느낌을 받았다. 아름다운 그 마력이 내게는 굉장히 위험한 기분이 들어서, 그래서──.
‘저기 있으면…….’
나는 저절로, 혹은 무심코 그 구슬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발돋움을 함과 동시에 유미와 잡고 있던 손이 스르륵 풀렸다. 손이 천천히 그 구슬을 향해 다가갔다. 시간이 느려진 것 같았다. 멍한 정신 한구석에서 울리는 경종을 나는 분명히 들었다. 저절로 몸이 긴장되었다.
꽃잎이 내 손을 스치고 구슬이 내 손가락에 닿았다. 그와 동시에 구슬이 내 손 위로 툭 하고 떨어졌다. 구슬의 빛이 좀 더 강해진 것 같다고 느꼈다. ──그 순간이었다.
“어, 어……?”
갑자기 바닥에서 빛이 나기 시작하더니 주변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쿠궁.
“꺄악!”
나는 귀를 막고 몸을 굽히며 깜짝 놀라 주변을 돌아보았다. 방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철이 마치 흔들리는 천이나 파도처럼 일그러졌다. 환상이 녹아드는 것처럼, 혹은 철이 열로 녹는 것처럼. 나는 그것을 경악한 눈동자로 보았다.
지진이라 생각했던 것이 파도가 되어 주변을 넘실거리며 덮쳤다. 그런 장소에서 제대로 서 있을 수 있을 리도 없었다. 나는 파도처럼 출렁이는 철의 힘을 이기지 못한 채 엎어지고야 말았다. 짧은 팔다리로 아무것도 지탱할 게 없는 바닥을 마력으로 붙잡았다. 본능적으로 손에 꽉 힘을 줬다.
엎드린 채로 당황하다가 앞을 보았다. 그 순간, 나는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나 주저앉았다.
“꺅!”
눈앞에서 갑자기 뾰족한 철의 기둥이 솟아오른 것이다. 그것도 그 자리에 무언가가 있다면 그대로 꿰뚫어 버릴 기세로.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철로 된 창과 벽이 아래위, 옆으로 마구잡이로 뻗어 나가며 솟아났다. 무척 위협적이고 재빠른 그것은 찔리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나에게 심어 주기엔 충분했다. 나는 눈앞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점차적으로 솟아오르는 쇠의 기둥을 보며 눈을 꼭 감았다. 저절로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