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402
“에리카의 트라던트 실험을 돕기 위해 미국에 간 동료들이 있지?”
“……네, 있습니다.”
“한 명만 빼고 전부 죽었을지도 몰라. 실험 완성을 위한 제물이었거든.”
“……!”
입을 벌리던 첸이 차마 아무 말도 못 하고 감옥을 주먹으로 쳤다. 분이 담긴 주먹은 오히려 그에게 번개를 되돌려 줬다.
“젠장!”
“……살아남은, 한 명은?”
드물게도 라스가 입을 열었다. 강인하는 그를 내려다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어째서, 한 명이 산다는 것까지, 알지?”
심각한 상황에 드물게도 그의 말이 문장을 이루었다. 첸 역시 입술을 악물며 고개를 들었다.
“당신들은, 알고 있군요? 저희가, 트라베리아를, 배신했다는 걸…….”
“…….”
“그럼 살아남은 한 명은……‘우리의’ 배신자입니까?”
강인하는 속으로 조금 고민했다. 그러나 시선을 가라앉히며 대답했다.
“그래.”
“배신자가……있는 거군요.”
“라샤 무하드야.”
“……! 그럴 리가, 라샤는…….”
첸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나 강인하의 시선에는 흔들림 한 점 없었다. 첸이 고개를 숙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라샤는……젠장! 라쿤, 페르카니, 다들……그럼 정말로…….”
“…….”
강인하는 말없이 몸을 돌렸다. 첸은 비탄에 젖어 감정을 곱씹었다. 오를레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실험을 막으러 간 인성 님네는 살아 있잖아? 그럼 제물들도 살아남았을 가능성 있지 않아?”
그 말에 첸과 라스가 반색했다. 그러나 강인하는 냉정했다.
“모르지. 인성이네는 난입자고, 그 녀석들은 정식 제물이었으니.”
강인하가 링크를 보며 한 번 인상을 찌푸렸다.
“하여간 갇혀 있어서 교신이 안 돼.”
그때 컴퓨터를 뒤지고 있던 렉스가 강인하를 불렀다.
“인하 님, 지금 막 연맹에서 정보가 도착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다급히 렉스를 향했다.
“미국 전역에서 트라던트가 이상 현상을 일으키고 있다고 합니다. 트라던트가 서로 연결되어 마력 장을 일으키는 탓에 안에 있던 마법사와는 전혀 연결이 안 되고, 안의 풍경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군요. 이게 그 사진입니다.”
렉스가 허공에 스크린을 띄웠다. 스크린 안에 시커먼 형상만이 가득 찬 사진이 떠올랐다. 마치 심령사진 같다.
“미국은 지금 접근 금지령이 내려와 있습니다. 또한 영역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 마법사를 유클라프와 카인이 막아서고 있다고 합니다.”
“…….”
강인하는 말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 이래서야 동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실패한 게 확실해졌네.”
“어쩔까요? 도우러 가요?”
비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강인하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도 똑같이 위험해. 우선은 소니아부터야. 거긴……인성이랑 소영이한테 맡길 수밖에 없어.”
“네.”
“네!”
이어 강인하는 손목에 걸린 링을 꽉 붙잡았다. 그러자 그 밑으로 사슬이 생겨나며 긴 선이 나타났다.
“간섭하는 건 좋지 않지만……이 정도 보조는 괜찮겠지. ‘공명’.”
우웅
강인하는 소속마법에 힘을 불어넣었다. 곧 모두의 시선이 바깥에서 싸우고 있는 자들의 마력에 향했다.
윌터는 기본적으로 원거리 마법사다. 로봇 등 공학 무기를 조종하여 저격하는 게 그의 싸움법이다. 반면 아르델은 무투파다. 근거리와 중거리에서 마법을 쓰며 마지막에는 주먹을 꽂아 넣는다. 하무라는 어느 쪽이냐 따진다면 근거리 마법사다. 주로 쓰는 무기는 검, 하지만 총이나 화살 등 원거리 무기도 가지고 있으므로 전방위에 가깝다.
세 사람 다 전투 경험이 많고 능수능란하다. 더불어 아르델은 소망마법까지 있다. 세 사람의 싸움은 점점 길어졌고, 그럴수록 지치는 건……아르델과 윌터였다.
“좀, 쓰러져라!”
윌터가 만든 기계 건틀릿을 주먹에 낀 아르델이 하늘에서 불꽃을 떨어뜨렸다. 금빛 불꽃은 의지를 가진 것처럼 집요하게 하무라를 노렸다.
“그건……내가 할 말이거든!”
치링….
흑도에 걸린 방울이 울었다. 검은 검기가 진동하며 그 힘으로 궤도를 날카롭게 벤다. 그 사이를 하늘색 집속 포가 꿰뚫었다. 그러자 하무라의 뒤에 떠 있던 구슬 체인이 반응하며 집속 포에 휘리릭 휘감긴다.
한편으로는 폭탄이 터지고, 한편으로는 방패가 공격을 막는다. 나비를 닮은 마법 보구가 얼어붙거나, 마력을 흡수하거나, 폭탄을 내뱉고, 장난감과 로봇이 대치한다.
말 그대로 난전이었다. 아르델은 주먹을 쥔 채 혀를 찼다. 도무지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비전의 언령을 쓸 만한 ‘빈틈’이.
‘지금 내 실력으로 평범하게 싸워선 윌터와 힘을 합쳐도 하무라를 이길 수 없어. 소망의 힘으로 지지 않도록 하는 게 겨우. 알고는 있었지만……힘드네. 여기에서 이기기 위해선 비전을 써야 하는데……하아아.’
계승자가 된 지금의 아르델이더라도 정수를 불러내는 건 쉽지 않다. 무엇보다 정수 본체를 무작정 불러내는 건 리스크가 너무 심하다.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짧고, 부작용이 심하다. 무엇보다 실력만큼 정수의 힘도 무척 불완전하다. 라시아의 말에 의하면 다음번에 불러냈을 때도 베로니카의 마법을 녹였을 때만큼의 위력을 가지고 있을지 확실하지 않단다. 아르델이 정수의 힘을 따라잡지 못하는 한, 불러낸 정수의 힘은 평균 S랭크 상위 정도일 것이라 생각하는 게 좋다고 했다.
그러나 페일린가에는 정수를 근원으로 두고 강한 힘과 특수한 능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비전 기술’이 있다. 계승자인 아르델은 라시아를 통해 여러 가지 비전을 전수받았다.
이 역시 아르델에게는 무척 부담이 가지만, 힘의 근원인 정수를 기술로 다듬는 것이기에 그냥 정수를 다루는 것보다 훨씬 안정되어 있다. 아주 짧은 시간 힘만으로 밀어붙여도 이길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비전 기술을 사용하면 시간은 걸려도 확실하게 하무라를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아르델은 흘끔 윌터를 의식했다. 생각해 보면 바로 언령을 쓸 만한 틈을 만들 방법이 있기는 하다. 바로 윌터가 캘리번과 융합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그건 안 된다. 그들의 싸움은 어디까지나 성장하기 위한 싸움, 캘리번의 힘과 융합하는 건 반칙이나 다름없다. 거기다 이미 마력 회복용으로 캘리번의 마력을 조금이나마 끌어 쓰고 있다. 캘리번도 마력 포를 날리며 마법병을 보내는 등 싸우고 있다. 싸움에 이기기 위해 이미 쓰이고 있는 마력을 더 끌어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랬다간 조만간 캘리번의 마력이 바닥날 것이다.
하무라가 흑도를 들고 아르델을 향해 덤벼들었다. 그 사이를 윌터가 만든 방패가 끼어들었다.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그 정도 검으론 못 베지!”
목소리에 언령이 섞여 들었다. 하무라의 몸이 한순간 굳었다. 아르델이 다시 한번 손을 내뻗었다.
“타올라라!”
아르델의 몸이 불꽃이 되어 무너졌다. 윌터의 무기가 아르델의 힘을 한계까지 증폭한다.
“큭.”
뜨거운 열기가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것을 느끼면서도 하무라는 흑도를 쥐지 않은 왼 주먹을 불꽃을 향해 내질렀다.
“안 맞아!”
하무라의 몸에 육중한 부담이 실렸다. 마법 중에는 상성도 실력도 위력도 다 무시하는 마법이 있는데, 아르델의 ‘소망’은 그런 종류였다. 거기다 아르델은 살의를 담은 공격을 하는 데 익숙했다. 불꽃으로 이루어진 안개가 불꽃을 중심으로 위력을 넓혔다. 하무라의 주먹을 중심으로 뾰족뾰족한 가시가 자라났다.
“공주님, 떨어져!”
잠깐 움직임을 주춤하게 한 것으로 충분하다. 아르델이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 사이로 윌터의 집속 포가 작렬했다.
“후.”
하무라 역시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아르델의 눈에 하무라의 뒤, 집속 포의 직선상에 또 하나의 총구가 튀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키잉…….
아르델과 윌터는 순간 흠칫해 오른손을 보았다. 오른 손목에서 금색 줄이 나선을 이루며 돌고 있다. 이 마법에 연관이 없는 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 강인하의 소속 공명이다. 아르델과 윌터가 씩 웃었다.
‘타이밍 좋고! 드디어 쓸 수 있겠어.’
아르델은 표정을 가라앉히며 집중했다. 평소보다 마력이 고조된 것처럼 느껴지는 건, 착각이 아니다. 실제로 평소보다 더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아르델의 주위로 안개가 퍼졌다. 팔 위로 번개와 불꽃이 모인다.
“「천공 속에 숨은 그 새는 태양에 깃들어 불꽃이 되었다.」”
언령을 읊을수록 가슴 안이 강하게 짓눌러졌다. 아르델은 그 느낌을 눌러 참듯 토해 냈다.
“자인, 기어를 올려라.”
하무라는 이번엔 오른손이 아니라 양손으로 흑도를 붙잡았다. 흑도 타냐와 장갑 자인이 공명하며 울었다. 하무라가 아르델을 향해 도약했다. 동시에 하무라의 귀걸이가 울었다. 어떤 소리를 들었는지, 하무라가 당황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뚫린 공간과 총은 이미 아르델의 안개에 의해 모습을 감췄다.
“「압도하라! 요격하라! 내 안에 깃든 불꽃이여, 적을 불태워라!」”
일순, 하무라는 공중에서 자세를 바꿨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려던 것을 흑도를 허리 옆으로 옮겨 횡으로 그었다.
─쾅!
허공을 날던 윌터의 무기에서 하무라를 구속하듯이 빛나는 선이 쏟아졌다. 피할 틈도 없이, 뒤에서 광선 포가 날아왔다.
하무라는 흑도를 휘둘렀다. 하무라의 뒤로 나비와 방패가 그를 지키기 위해 달려든다. 그리고 아르델의 위로 모습을 드러낸 불새가 하무라를 무시무시한 기세로 압도하며 요격했다.
‘정수’ 본체는 아니다. 그러나 언령으로 불러낸 이것은 정수와 연결된, 정수의 분신이다. 아르델의 힘보다 강한 불꽃이기에 몸에 부담이 가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콰과과과광!
하무라의 위로 떨어진 불꽃이 폭풍으로 변했다. 아르델은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공명하라. 빛과 불, 번개는 같은 곳에서 태어난 동지일지니. 때려 부숴라. 그 안에 불꽃의 증거를 새겨라. 태워라. 다시는……」 쿨럭!”
언령을 끝까지 외치지 못하고 아르델이 기침했다. 체력과 마력이 한계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르델은 주먹을 꽉 쥐며 언령을 이었다.
“「다시는 이 불꽃을 잊을 수 없도록!」”
‘소망’의 힘과 그에 잇따른 정신력. 아르델의 안에 있는 혈족마법에 반응해 불꽃이 화려하게 타올랐다.
“공주님, 이제 잠시 뒤로 물러나서 마력이라도 보충하라고!”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 법. 윌터의 총에서 다채로운 빛이 쏟아졌다. 거기에 이변이 일어난 것은 하무라의 손을 떠나 있던 무기 때문이다. 허공을 날던 나비가 얼음이 되며 터졌다. 혹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마력을 집어삼켜 분쇄했다. 불꽃과 빛이 흐트러졌다.
──직후, 무시무시한 굉음을 내며 그 모든 빛이 갈라졌다.
아르델과 윌터는 아슬아슬하게 검은 진동파를 피했다. 아르델은 진동파가 스친 팔을 꽉 쥐었다. 상처를 입지 않은 건 어디까지나 입고 있는 전투복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맨몸에 스쳤다면 그대로 팔이 날아갔으리라. 아르델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나 성장하고 진화하는 이 전투복도 슬슬 한계였다. 유은하가 만든 전투복이기에 평균 강도는 그에 알맞게 맞춰져 있지만, 주인은 아르델. 스스로 수복하고 성장하는 무기라 할지라도 힘에는 한계가 있다. 아르델은 공격을 너무 많이 맞았다.
‘젠장.’
불꽃 안에서 화상을 입은 하무라 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인상을 찡그린 채 금색 불꽃 사이에서 유유히 걸어 나왔다. 이어진 광경에 아르델과 윌터는 두 눈을 부릅떴다.
치직…….
살이 타는 소리가 났다. 그런데 분명 화상으로 벌겋게 물들어 있던 부위가 서서히, 그러나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치료되고 있다. 뿐만이 아니다. 가면이나 고글 너머로 마력 상태를 보며 아르델과 윌터는 당황했다. 소모되었던 마력이 순식간에 회복되며 팽창하고 있다.
화상 자국을 따라 갈색 문신이 뒤덮였다. 그 안으로 주위로 날고 있던 나비가 스며들었다. 문신 안으로 마력이 빨려 들었다.
“하아……이번엔 좀 아팠어.”
기껏 깎아 뒀더니 금세 회복했다. 보는 것만으로 전의가 깎일 만한 광경이다. 아르델은 주먹을 쥔 채 숨을 골랐다.
“이걸로 알았겠지만, 나한테 소모전은 의미가 없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미 상당히 소모된 당신들한텐 질 것 같지 않은걸?”
아르델이 이마를 짚었다.
“아……돌겠네.”
“그러니까 슬슬 말하는 게 어때? 저기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말했잖아? 우릴 이기면 이야기해 주겠다고.”
“공주님.”
윌터가 아르델에게 총을 던졌다. 아르델이 총 안에 미리 만들어 온 마법석을 충전했다. 아르델이 총에 불꽃을 불어넣자 그 힘이 윌터의 총에도 이전됐다.
이것은 실상 아르델에게 힘을 집중시키는 것보다 위력이 덜하다. 아르델의 ‘소망의 힘’은 고유의 혈족마법에 더해질 때 힘이 더 강해지니까. 하지만 지금 아르델의 마력은 10분의 1 이하로 떨어졌다. 그렇다면 좀 더 긴밀하게 협력할 필요가 있다.
“나 참, 진짜 이렇게 치사하게 나올 거야?”
아르델은 눈을 치켜떴다. 전투 마법사답게 전투 동안 집중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역시 저들은 그들을 ‘죽일’ 생각이 없다.
‘저 녀석은 은하랑은 달라. 살기 없이 진심으로 싸울 수 있는 타입이 아냐.’
유은하는 그 뛰어난 제어력 덕분에 살기 없이도 전력으로 싸울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마법사는 전력으로 마법을 쓰면 상대의 몸을 위험에 이르게 한다. 그 극단적인 예가 이성진이었다.
‘아직이야. 아직 저 녀석은 전력이 아니야. 거기다 저 회복능력…….’
유은하조차 저 정도는 아니다. 그러니 저것은 마법, 혹은 상당히 뛰어난 특수능력이다.
‘하지만 언령이 완성되면 저런 건 관계없어.’
아르델이 주먹을 꽉 쥐었다.
‘사실 몸에 무리가 가서 여건이 갖춰질 때까지는 쓰고 싶지 않지만……이번 상대는 무리하지 않고서야, 목숨을 걸지 않고서야 이길 수 없으니까.’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저절로 이가 갈렸다. 이쪽은 이기고 싶어 죽겠다는데 저쪽은 이쪽을 죽일 생각이라곤 요만큼도 없다.
‘하무라는 아직 언령을 눈치채지 못했어. 우선 마력을 회복하자.’
아르델의 의지에 반응하며 귀걸이에서 마력이 천천히 흘러 들어왔다. 잠깐의 대치 상태가 변한 것은 하무라가 꺼낸 말 때문이었다.
“응? 이즈라, 뭐라고? ……손목?”
“……!”
아르델이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아르델이 동요한 것을 눈치챘는지 윌터도 총을 쐈다. 잠시 물러나 있던 로봇이 달려들었다. 마력 포가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효과로 쏟아지고, 로봇이 광선 포를 들이밀었다.
그러나 그 힘은 이어진 검기에 죄다 잘려 버렸다. 아르델은 섬뜩한 느낌에 윌터를 붙잡고 도약했다. 아르델이 지나간 자리에 검격이 떨어졌다.
──아까와는 다르다. 명백히 살기가 섞여 있다.
“너……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거야?”
하무라가 손목을 내보였다. 손목에 금색 인장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마법의 주인이 아니고서야 화상으로 보이거나, 아예 보이지 않을 터다. 그런데 하무라에게는 보이는 듯했다.
아르델은 하무라의 손목에 새겨진 금색 인장이 선명히 보이게끔 드러내며 손 위에 작게 아까 불러왔던 불꽃 새의 형상을 띄웠다. 다만, 지금 부른 것은 분신조차 아닌 모조품이지만.
페일린가의 정수는 붉은색과 금색 깃털로 이루어져 날개가 네 개 있는 거대한 새다. 그 모습은 불사조와도 닮았다고 한다. 형상을 본 것만으로 하무라의 손목이 뜨거워졌다. 하무라의 몸 안에서 하무라의 마법과 아르델의 마법이 반발했다. 아르델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저게 완성되면, 그때는.
‘나도 쓰러지겠지. 하지만, 그래도.’
아르델이 차가운 눈으로 하무라를 내려다보았다.
“표식이야. 그건 당신의 힘으로도 없앨 수 없어. 페일린가의 비기거든.”
“허! 이런 걸 나한테 써서 어쩌겠다는 거지?”
“그건 아직 미완성이야.”
아르델이 눈을 곱게 접어 웃었다.
“하지만 완성되면 당신은 목숨을 내놓게 될 거야. 페일린가의 화마가 당신을 내부에서 집어삼킬 테니까.”
하무라의 표정이 굳었다. 처음으로 심각함을 깨달은 듯한 표정에 아르델은 그만 비웃고 싶어졌다.
“……내 이즈라는 거짓을 꿰뚫어 볼 수 있지. 그런데 너에게서는 진실도 거짓도 느낄 수 없다더군. 과연……새벽별무리라고나 할까…….”
아르델은 방긋 웃은 채 대답하지 않았다.
“웬만하면……대답을 듣기 위해서라도 적당히 할 생각이었다만, 이거야 원 그럴 수도 없겠군. 그럼 물으마. 이 인장을 없애는 방법은 뭐지?”
“음……특수한 힘을 지닌 성진이나 은하, 예리라면 고유마법으로 풀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정통적인 방법은……내가 언령을 해제하는 거지.”
“그것뿐인가?”
화르륵!
아르델의 위로 날개 모양을 지닌 불꽃이 타올랐다. 불꽃의 모습이 확실해질수록 하무라는 몸 안의 힘이 어딘가로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건 아마 사실이다. 처음엔 불완전하고 지지직거렸던 날개가, 아르델의 주위를 둘러싼 새의 형상이 점점 완전한 모습을 갖췄다. 하무라의 손에 새겨진 인장을 통해 정수의 힘을 보다 이끌어 내고 있는 거다.
“그렇지.”
하무라가 곤란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하아, 과연 페일린가 혈족마법이군. 죽어도 마법은 남는다 이건가?”
“맞아. 하지만 이번엔 특별히, 네가 이기면 언령을 지워 줄게. 아, 걱정 마. 내가 죽어도 없어지도록 해 줄 테니까.”
“그것참 고맙구만.”
“참고로.”
윌터가 뒤에서 미리 이야기해 두었던 마법석과 총, 기계 장치를 꺼냈다.
“그거, 그대로 내버려 두면……앞으로 5시간도 못 버틸 거야.”
──거짓말이다.
확실히 정수에서 옮겨 간 저 비전은 아주 강한 힘을 지니고 있어, 언령에 담긴 힘대로 적을 제압한다. 그러나 아르델은 아직 그 전승마법의 본래 힘을 이끌어 내기에는 실력이 부족하다.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나 아마 5시간이 아니라……최저 사흘 이상 걸릴 것이다.
하지만 하무라는 아르델의 거짓말을 간파할 수 없었다. 아르델이 검격에 의해 너덜너덜해진 모습으로 입가를 끌어 올려 웃는다. 피가 나는 곳을 약으로 지혈한 게 다인데도 그 여유로운 모습에 하무라는 반대로 여유를 잃었다.
“…거참 무섭구만.”
하무라는 조금 전과는 달리 흑도를 꽉 쥐었다. 하무라의 주위로 검은 마력이 파문처럼 흩어졌다. 조금 전과는 기세부터 달랐다.
화르륵!
그러나 하무라가 움직이기도 전에 위로 불꽃이 떨어졌다. 윌터가 가져온 총이다. 주위가 화마로 가득 찬다. 아르델이 불꽃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윌터는 빛, 아르델은 불꽃, 하무라만이 어둠이다.
윌터의 서브마법은 사념구현마법과 조립마법. 미리 가져온 마법석과 캘리번에 있던 불꽃, 그리고 주위에 모여든 별빛과 이 땅과 벽에 가득한 빛속성과 불속성을 조립해 불꽃을 더, 더 많이 불러일으켰다. 그것이 아르델의 불꽃과 조립되며 더 강한 힘으로 변한다. 불꽃이 하무라를 덮쳤다.
그러나 하무라는 그의 무기에 의해 지켜지고 있다. ……그럴 터였다. 하무라는 아릿한 아픔을 느끼고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목에 새겨진 인장은 원래 한 쌍의 날개였다. 그런데 그것이 불꽃에 닿을 때마다 점점 새의 형상을 갖추고 있다. 아르델은 하무라가 상황을 파악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금색 불꽃이 언령과 함께 하무라를 덮쳤다.
“「천공 새의 깃털은 태양 빛으로 자아내니!」”
“티엘라, 곤!”
허공을 떠돌던 방패 곤이 하무라에게 돌아와 갑옷이 되었다. 진보라색 갑옷 곤이 빛나며 다가오는 불꽃을 튕겨 냈다.
“「불꽃의 가호를 받은 자여! 그대는 타오르는 태양을 피할 길이 없도다!」”
“그렇다네.”
윌터가 씩 웃으며 하무라를 향해 총을 들었다. 두꺼운 총구를 가진 두꺼운 총을 들고 방아쇠를 당기는 게 아니라 휘둘렀다. 그러자 총에서 예리한 칼날이 나왔다. 불꽃이 아니라 빛이었다.
은푸른색 빛이 번개를 두른 채 범위를 넓혔다. 하무라가 이를 악물며 흑도를 그었다. 진동하는 검은 공이 나타났다.
“휘몰아쳐라!”
파직!
쿠과과과!!
검은 공을 중심으로 검격이 휘몰아쳤다. 윌터와 아르델이 힘을 합쳐 막았지만 마법도 몸도 불꽃도 너덜너덜해졌다. 그럼에도 불꽃이 완전히 꺼지지 않은 이유는 아르델이 새긴 인장이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꽃이 닿을 때마다 인장이 점점 영역을 넓혀 갔다. 처음엔 하나뿐이었던 날개 옆으로 쌍을 이루는 날개가 생겨나고, 크기가 점점 커져 손목을 덮었다. 하무라가 애써 불꽃의 힘을 막는데도 완전히 막히지 않는다. 아르델이 거기다 대고 말했다.
“그 불꽃이 심장에 이르면 넌 죽는 거야.”
“하하!”
하무라가 더 거세게 타냐를 쥐었다.
“그래, 어디 한번……확인해 볼까. ──티타.”
키이잉──.
아르델과 윌터는 당황했다. 하무라의 부름과 함께 주위 공간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하무라의 뒤로 보이는 모습은, 우주와 꽤나 닮았다. 그 사이에서 보라색 가죽에 금색 문양이 그려진 책과 진보라색 머리와 눈동자를 지닌 작은 요정이 나왔다. 요정의 손에는 보라색 깃펜이 쥐여 있었다.
“쟤도 무기?”
“그래. 책이 본체야.”
하무라는 위급한 상황임에도 아르델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아마 아르델이 정말로 죽이고 싶은 적이었더라도 비슷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을까.
‘강해 보이진 않는데…….’
“주인님! 무엇을 할까요?”
콰광!!
먼저 시험해 본 것은 윌터였다. 광선 두 개가 부딪쳐 날카롭게 자라났다. 그러나 요정은 그 힘을 그대로 윌터에게 반사해 돌려줬다.
“큭!”
피하려고 했으나 피할 수 없었다. 아르델은 부작용으로 슬슬 몸에 통증이 일어나는 걸 느끼면서도 윌터의 불을 자신의 불꽃 안에 합쳤다.
하무라는 이번에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르델과 윌터는 유심히 요정을 관찰했다. 강한 건 분명한데 그냥 보기에는 그 정도로 큰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유은하처럼 잘 숨기는 타입인 것일까.
“티타, 이 인장에 대응할 만한 마법을 소환해라.”
“알겠습니다! 슬롯 마법진 소환! 마법을 뽑겠습니다!”
“……?!”
티타를 중심으로 마법진이 일어났다. 마법진이 닿는 장소마다 불꽃이 속절없이 밀려난다. 아르델과 윌터는 이번엔 힘을 합쳐 공격했다. 그러나 아까와 마찬가지로 공격이 반사됐다.
“티타는 내 마법의 관리자인 만큼 특별해. 공격능력은 없지만. 공격에 쓸 힘까지 전부 방어력과 특수능력에 쏟았거든. 티타의 방어벽은 내 전력의 10배 이상 강한 공격이 아니고서야 깨지지 않아. 힘이 강해도 특수한 기술이 아닌 한 마찬가지로 방어벽을 부술 수 없어.”
“호오…….”
자신만만하게 웃는 얼굴을 일그러뜨려 주고 싶어졌다. 아르델이 거대한 창을 만들어 던졌다.
“「꿰뚫어라!!!」”
콰광!
윌터가 당황하며 외쳤다.
“이보셔, 공주님! 또 반사된다고!”
“괜찮아! 내 언령이라 반사돼도 안 다쳐!”
“맞아 보고 느꼈는데, 거기에도 아마 특수한 효과가…….”
빠직….
“어림없어요!”
하무라가 말한 대로 요정의 힘은 대단히 특수했다. 아르델의 공격은 결국 튕겨 났다. 아르델은 호언장담한 것과 다르게 고통을 느꼈으나, 불꽃은 결국 아르델의 안에 녹아들었다.
그사이 티타가 마법을 소환했다.
“소환 성공! 마법 봉인 인장, 마법 억제 사슬, 마법 분쇄 인장이 소환되었습니다! 설치하겠습니다! ……실패했습니다! 불완전하게 성공했습니다! 실패했습니다! 마법 해석합니다. ……일부 해석 완료. 현재 능력치로는 봉인할 수 없습니다.”
“허어, 혹시나 했지만 진짜로 안 되는군. 티타, 적합한 무기 세트로 교환한다.”
“알겠습니다, 주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