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414
“정신 계열이라……. 응?”
소속마법에 정신을 집중하던 인하가 눈을 크게 떴다.
“인성이한테 집중하느라 몰랐는데, 가까이에 소속마법에 연결된 사람이 있어. 이 반응은, 노아와……김준영도 같이 있네.”
“네? 어, 진짜다. 가까이에서 노아의 반응이 있어요.”
놀라며 탐색 장치를 켠 비키가 반색했다. 노아, 본디 캘리번 소속으로, 새벽별무리의 팀이 되기엔 힘이 부족한 다른 캘리번 멤버들과 함께 대현과 협력해 정보 수색을 하고 있다. 다만 노아 본인은 새벽별무리 소속이 되기에 충분한 S랭크 마법사로, 본디 정보 부대 6소대 대장이다. 인하가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김준영이 같이 있지? 여긴 걔한텐 너무 위험한데.”
옆에서 예슬이가 물었다.
“김준영이 누구였지?”
“우리 후배.”
노아가 여기 있는 건 별로 의아한 일이 아니다. 이런 상황이니 주변에 강대한 힘을 지닌 마법사가 수십 명 몰려 있다. 무서운 건 그 많은 마법사를 유클라프와 카인이 막았다는 거다. 이청우도, 루카도, 하인리히도, 연맹에서 손에 꼽히는 마법사를 전부!
하지만 김준영은 다르다. 나이에 비해 뛰어나긴 해도 기껏해야 B랭크 마법사다. 그래도 지금 정도의 마력 장이라면 B랭크까지는 어떻게든 접근할 수 있을 것 같다. 거기에 아마 노아가 지켜 주고 있을 테니.
김준영이 여기 온 건 감지능력을 지니고 있어서가 아닐까. 적어도 대현에서는 제일 뛰어난 감지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알고 있다.
“노아도 우리를 눈치챈 것 같은데,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들어 봤자 변하는 건 없어. 저쪽도 정신마법 때문에 발도 못 디디는 상태일 테니.”
나는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진의 말대로다.
“들어오라고 해. 다만 우리는 우리 일을 우선하자.”
“네.”
인하가 인상을 굳히며 물었다.
“저 중 인성이가 들어간 탑이 어느 건지 알겠어? 난 아직 모르겠어.”
저 탑 중 하나에 인성이네가 갇혀 있는 것은 틀림없다. 예지몽의 광경을 떠올려 보면, 그들이 세우려 한 것은 이 탑이었을 테니까. 그리고 지금 당장 인성이의 기척을 좇을 수 없는 걸 보면 확실하다.
“중심은 6개.”
이성진이 손을 펼쳤다.
“가장 강한 것은 에리카와 유클라프가 있는 탑이야. 저긴 아무리 그래도 아니겠지. 워싱턴 코앞이니.”
“인성이가 갇힌 곳도 정신 계열 탑일까?”
“저 탑 전부 정신 계열이야. 하지만 ‘제물’이 쓰였을 정도니…….”
말을 잇는데 머리가 핑 돌았다. 풀썩 주저앉는 나를 샌시와 시하가 재빨리 부축했다. 인하가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다가 주위를 쭉 훑었다.
“지금 저기에 뛰어들 만한 여력을 지닌 건……나랑 성진이, 에이온까지, 세 명뿐인 것 같네.”
“앗! 나도 갈 수 있어.”
“너희가 가기엔 너무 위험해.”
손을 들었던 예슬이가 실망한 얼굴로 손을 내렸다. 인하가 다시 나와 시선을 맞췄다.
“인성이는 내가 찾을게. 소속마법과 공명하다 보면 찾을 수 있을 거야. 다만 세 명만으로 우리가 저 안을 헤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
“저 안을 들키지 않고 헤치는 건…….”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아니고서야 힘들어.”
이어 나는 성진을 곁눈질했다.
“성진이라면 무시하고 나아갈 수는 있겠지. 중심을 파악하는 힘이 나보다 뛰어난 만큼 길을 잃지도 않을 거야. 하지만 무조건 에리카한테 들킬 거야.”
그러나 내 몸은 한계에 가깝다. 나도 동료들도 느끼고 있다.
“…그럼 먼저 이쪽 일부터 마무리 짓도록 할까. 포로, 어떻게 처리할래?”
성진이 흘끗 뒤를 가리켰다. 나는 눈을 짚던 손을 떼며 그를 따라 철창을 돌아보았다. 쓰러진 동료들은 아직 깨어나지 못한 반면 무르시엘의 포로는 전부 깨어 있었다.
“어떻게 할까? 리더.”
캘리 일행이 아까와 별로 다름없이 담담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가볍게 공간을 넘어 철창 앞에 내려섰다.
갇혀 있는 인원은 고작 8명. 레녹과 첸, 라스, 하무라를 비롯해 한 명을 제외하곤 레녹의 동료다. 사실 이 안에 레온이 있는 것은 조금 의외다.
나는 망설임 없이 레온의 가슴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부상을 입은 레온은 반항하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내게 손을 허용했다.
“컥…!”
헤매지 않고 레온의 ‘근원’과 ‘기억’을 꺼냈다. 레온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레온의 근원은 제법 특이했다. 보통은 내가 ‘고정’하기 때문에 둥근 원 모양인데, 그의 것은 근원에 싹이 돋아 있다. 또한 정신은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녹색에서 하늘색까지 푸른 계열로 계속 반짝였다.
정신은 기억만 복사하고 다시 도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마법의 근원은 당연히 돌려줄 리가 없다.
“그것도 먹을 거야?”
나는 반짝이는 보석을 보며 한재일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레온을 쓰러뜨린 건 내가 아냐. 예리나 형일 아저씨에게 줘야지. 두 사람 다 빛속성 마법사니 누구에게든 잘 맞겠지. 예리의 마법은 충분하니 흑조에게 주는 게 좋으려나.”
이따가 깨어나면 물어봐야겠다. 나는 마법석을 휙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레온의 처분이 끝났으니 이제 남은 자는 6명.
“문제는 당신들이군요.”
“확실히 이 녀석들은 레온보다는 성가신걸.”
무르시엘은 레온이 당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았음에도 태연했다.
아니, 태연하다는 말은 어폐가 있다. 다른 것이 신경 쓰여 그런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태도다. 그들은 초조한 기색으로 탑을 노려보고 있었다.
인하가 성진을 향해 걸어갔다.
“그 녀석들은 은하 네가 알아서 해. 나는 성진이랑 에이온과 함께 바깥의 상황을 확인하고 올게.”
“하지만 내가 아니면…….”
인하가 손을 들며 나를 막아섰다. 손목에서 금색 링이 빛났다. ……인성이의 상태, 생각보다 안 좋은 걸까?
“상황이 급하니 이제 들어간 걸 들키는 건 아무래도 좋아. 위치만 특정당하지 않으면 돼. 그 정도의 꿈이면 충분해. 거기다 에펠로나도 있고, 성진도 있어. 이성진 너, 이런 건 특기 아니던가?”
이성진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인하가 한재일의 손목에 걸린 팔찌를 빼냈다.
“그리고 여기에 문이의 분신도 있지.”
문이의 분신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거기다 한재일에게 준 저 분신은 이번을 위해 특별히 만든 것으로, 여타 분신보다 강하고 특별하다. 인하가 팔찌를 손목에 차며 같은 손목 위에서 빛나는 페어 링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느낌이 안 좋아. ‘짙어졌어’. 우리가 끝낼 때까지 나오지 못했을 정도인 데다, 대부분은 만신창이, 한시라도 빨리 도우러 가야 할 것 같아.”
그렇다고는 해도 지원을 갈 수 있는 게 인하랑 성진, 에이온뿐이라니. 가장 필요한 지원은 ‘의사’일 텐데.
하지만 예리는 저 상태다. 나는 예리와 형일 아저씨, 이어 아르델을 보며 호흡을 고르듯 숨을 삼켰다. 세 사람이나 성장통이다. 성장 열은 의사도 하루 이틀 만에는 어떻게 할 수 없다.
“그사이에 은하야, 약이라도 마시고 몸을 회복시켜. ……힘들겠지만.”
그래, 이 몸과 정신은 설령 예리가 만들어 둔 중상용 약이라 할지라도 쉽게 회복시킬 수 없다. 사실 나만은 아니다. 캘리에 있는 S랭크 마법사들 모두 일정 이상의 마법사들에게 부상을 입었다. 샌시와 미리 만들어 둔 마법 약만으로는 치료하기 힘들 정도로. 그나마 많이 회복된 게 윌터다.
“알았어. 하지만 가기 전에 확인부터 하자. 저 녀석들이라면 ‘저것’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건 그러네.”
노아 일행이 온 것은 그때쯤이었다. 반갑다는 인사를 하기엔 참 곤란한 타이밍에 온 셈이다. 거기다 노아와 김준영 둘이 아니었다. 아멜리아와, 그녀와 마찬가지로 구 트라베리아인 도나가 함께였다.
그들은 어수선한 상황을 보고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조용히 다른 일행의 곁에 섰다. 가까이 있는 윌터가 속삭이며 상황을 설명했다. 나는 돌아보지 않고 다시 철창을 향해 다가갔다.
“자, 그럼 묻겠습니다. 당신의 동료들은 본래 ‘무엇’을 하기 위해 미국에 갔지요? 알고 있으니까 소중한 동료를 보낸 거겠죠?”
“디트리의 생성 및 증폭이다.”
레녹은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우리는 본디 디트리를 퍼트리는 걸 도왔다. 디트리를 키우는 힘은 알다시피 영혼과 생명이다. 그리고 이 녀석들은 영혼을 모을 수 있지.”
레녹이 첸과 라스를 가리켰다.
“이번에도 그러한 일이라 들었다. 씨앗은 이미 심어 놨다고 했다. 이번에 새로운 디트리의 실험을 할 거라고 했지. 그 힘이 미국에서 계속되는 전쟁에 도움이 될 거라고 했다.”
“저것의 자세한 기능은 모르나요?”
“우리는 어디까지나 ‘부하’다. 자세한 정보는 전달받지 못했어.”
“…….”
“알고 있잖아? 트라베리아가……자신들 외엔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걸.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지. 동료들의 힘을 믿을 수밖에…….”
“…….”
“뭐어, 그런 거다.”
결국 저것에 대해선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했다. 나는 묵묵히 수긍하며 다음을 위해 움직였다.
“그래요. 그럼……성진아, 잠깐 도와줘.”
나는 손짓으로 성진을 불렀다.
미리 계획해 둔 일 중 성진을 부를 만한 일은 하나밖에 없다. 동료들은 모두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채고 긴장했다.
나는 양손을 뻗어 첸과 라스의 가슴에 집어넣었다.
“……!”
옆에 있던 무르시엘 일행이 경악했다. 그들은 성진의 마력에 억죄여 꼼짝도 못 하는 채로 내가 하는 짓을 지켜봤다. 곧 가슴에서 두 키메라의 ‘핵’이 빠져나왔다.
“잠깐만!”
새파랗게 된 얼굴 중 가장 먼저 나를 말리려 한 것은 하무라였다. 그가 압박감에 의해 덜덜 떨며 소리쳤다.
“이 녀석들은 키메라야! 트라베리아에 복속하게끔 태어났고, 그렇게 사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어! 하지만 그 녀석들은 스스로의 의지로 트라베리아에 적대할 것을 선택했어! 그러니까…!”
나는 무시하고 핵을 확인했다. 레온 때와 달리 라스와 첸은 정신을 잃지 않았다. 근원과의 연결을 끊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진의 종말은 내 손안에 있는 핵에까지 옮겨 왔다. 그러니 이 행동이 트라베리아에 들키진 않을 테지만, 성진의 힘이 핵을 오묘하게 가리고 있어 나 역시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걸 알았는지 성진이 방법을 바꿨다. 아공간에서 미리 만들어 뒀던 마법석을 꺼내 우리가 있는 공간 자체를 감싼다. 주위가 노을색으로 물들었다.
“윽.”
인하가 신음을 내뱉었다. 나 역시 몸을 한 차례 떨었다. 성진의 영역은 살아 있는 자라면 별수 없이 오싹함을 느낀다. 그와 동시에 핵을 감싸고 있던 성진의 마력이 사라졌다.
“대체 뭘 하려고……!”
레녹이 당황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첸이 팔을 들어 레녹을 막아섰다.
“기다리세요, 레녹.”
“첸……!”
“죽이려고 마음먹었다면 바로 죽였을 겁니다.”
“…….”
“나는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저 핵은 트라베리아의 문장이 새겨진 것. 유은하 님이라도 먹을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한 핵을 굳이 꺼냈고, 사신은 이 주위를 석양으로 가렸죠. 거기다 그녀는 제 힘을 보고 싶다고 했다더군요.”
무르시엘 일행이 떨리는 눈으로 침묵했다. 첸이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눈을 휘며 나를 향해 물었다.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유은하 님? 당신은 저희를 죽일 생각입니까?”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죽일 생각은 없어요.”
첸의 눈이 좀 더 휘어졌다.
“어째서지요? 인간은 그렇다 쳐도, 키메라라면 거리낌 없이 죽여 왔잖아요?”
“알고 싶으니까요.”
“무엇을?”
“‘키메라’에 대해서요. 당신들이 어째서 트라베리아에 저항하기로 했는지를요.”
그러자 첸이 어이없다는 양 헛웃음을 지었다.
“하하, 본인이 모른다니 참 곤란한 일이로군요.”
“……?”
“우리가 ‘인간’에게 마음을 열게 된 것, 트라베리아를 배신한 이유, 어쩌면 인간과 함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 희망을 얻고 저항한 것.”
첸의 눈동자가 씁쓸한 감정을 띤 채 휘어졌다.
“그 첫 번째 원인이, 당신이건만.”
……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동료들도 숨을 삼켰다.
그도 그럴 것이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원인이 나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그게 무슨…….”
나를 바라보던 첸이 천천히 시선을 움직였다. 그 시선이 곧 인하를 바라본다.
“흠……이야기하자면 좀 길어져서 말이지요. 괜찮습니까? 하고자 했던 일부터 먼저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건…….”
인하가 나를 보았다. 그러나 곧 굳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이야기는 언제라도 할 수 있다. 지금은 탑에 갇힌 동료들이 먼저다. 더군다나 이건 성진이 없으면 할 수 없다.
“저흴 살려 둘 생각이라면 갑자기 저희의 핵을 꺼낸 이유는 그 핵에서 트라베리아의 문장을 없애기 위해서입니까?”
“뭐?!”
“확인해 보고 싶은 것 아닌가요? 우리 키메라가, 트라베리아의 가호 없이 살 수 있는지를.”
무르시엘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무언으로 대답하며 ‘핵’에 집중했다.
성진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지금은 내 눈보다는 성진의 눈으로 확인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성진의 공간에 갇히는 것으로 트라베리아와의 연결은 일시적으로 끊겼을 것이다. 핵이 쿵쿵 맥동한다. 이 안에 무시무시한 힘이 응축되어 있다. 마법과 죽음, 그리고 생명. 손이 떨릴 정도로 복잡하고, 경이로운…….
‘엘리시아의 마법.’
엘리시아를 직접 보았기에 알 수 있다. 이 생명의 근원은 트라베리아의 여왕 엘리시아의 것이다. 이미 독립된 마법인 것은 틀림없다. 이미 생명을 가졌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 근원은 엘리시아이기에, 엘리시아의 명령 하나로 사라질 것이다.
‘설령 트라베리아의 문장을 지운다고 해도…….’
나는 시선을 가라앉혔다. 키메라. 강한 힘을 가진,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인공 생명체. 그 마법조차 부여받은 것. 자아가 생기는 조건은 확실하지 않다. 생명이 언제부터 생명이 되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분명한 건 그들은 감정을 가졌고, 원하는 것이 있고, 그것을 위해 움직일 수 있다.
나는 손 위에 올린 핵을 보며 몸을 떨었다. 그야말로 ‘경이’. 이 순간 나는 트라베리아의 지배자 엘리시아와 우리의 실력 차를 실감했다.
“트라베리아의 문장은 지울 수 있어. 하지만…….”
긴장으로 가득한 진중한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성진이였다.
“살아남는 것은 너희 몫이다. 한동안 가호로 지켜 줄 수는 있지만,”
“저흴 만든 건 트라베리아. 그러니 문장이 있거나 없거나 죽이고 살리고는 핵을 만든 자의 권리라는 거군요.”
“네 말대로다.”
“어쩔 수 없지요. 만들어진 생물의 한계란 그런 법이니.”
첸은 슬플 정도로 덤덤히 수긍했다. 드물게도 라스가 입을 열었다.
“우리 몫, 무슨 소리?”
“만들어진 생명이라도 영혼은 깃들었지.”
“그 영혼조차 만들어진 것이더라도 말입니까?”
“그렇더라도.”
성진이 핵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핵을 붙잡을 줄 알았던 그 손은 이내 내 손을 붙잡았다.
“너희가 살아 있다면 창조주의 의지에 저항해서 살아남아 봐라. 살아가기 위해 트라베리아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라면. 저항할 마음이 있다면 계기 정도는 만들어 줄 수 있으니.”
“성장…….”
첸이 내뱉은 단어에 나는 흠칫했다. 성진이 말한 ‘계기’가 무엇을 말하는 건지 알 것 같았다.
“하라는 거군요, 저희에게. 이런 목숨이어도 살아 있다고 증명해 보이라는 겁니까.”
첸이 가볍게 조소했다.
“하지만 확실한 방법은 아닌 모양이군요.”
“그래. 네 말대로 만들어진 생명의 한계다.”
“어느 쪽이든 다 비슷하군요.”
“어느 쪽이든?”
성진이 의문을 표했다. 첸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아공간을 열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둥근 구슬……첸이 비축해 둔 듯한 본인의 영혼 구슬과 익숙한 유리병에 담긴 약이었다.
“그렇다면 보다 확신을 가진 자의 힘을 따르지요.”
나는 유리병을 자세히 살폈다. 유리병 바깥으로는 마력이 전혀 새어 나오지 않는다. 색조차 보이지 않는다. 전에 한국에서 예리가 사 왔던 것보다 훨씬 꼼꼼하지만, 저 병은 혹시나…….
“그건……한국에 있는 마녀의 가게에서 파는 약이군.”
성진의 말에 첸이 빙긋 웃었다.
“그렇군요. 여러분도 가셨나요. 혹여 그곳의 주인을 만났습니까?”
“나는 아니야. 만난 건 저들이야.”
성진이 손가락으로 아직 정신을 못 차리는 예리와 형일 아저씨를 가리켰다. 첸이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비켰다.
“그렇군요. 만나지는 못한 겁니까. 조금 아쉽군요.”
첸에 이어서 라스 역시 비슷한 약을 꺼냈다.
“이건 저희가 트라베리아의 비호 없이 살기 위해 받은 약입니다. 인간 마법사 중에 협력자가 있거든요. 저희와 같이 트라베리아에 저항하려 하는 장군 시리즈에게 협력하는 자가.”
무르시엘 말고도? 게다가…….
“장군 시리즈끼리 협력하고 있는 건가요?”
“그렇다고 해도 동조자는 저희를 포함해 6명밖에 되지 않지만요. 거기에는 그녀의 도움이 컸지요.”
첸이 다시 나와 눈을 맞췄다.
“무르시엘은 전멸, 커븐 로드는 우리를 처리하려 하고 있고, 소니아는 패퇴. 확률은 반반이지만 이렇게 된 이상 걸어 볼 수밖에 없겠군요. 실패하면 죽거나, 살더라도 좋지 않은 꼴을 당하겠지만요.”
“첸…….”
무르시엘 일행이 걱정스럽게 첸과 라스를 보았다. 첸이 손을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마셔야 했습니다. 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찾아온 지금 차라리 마음이 편합니다. 유은하 님, 이성진 님.”
우리는 조용히 시선으로 대답했다.
“그러므로 당신들께서 궁금히 여기는 것은 저희가 깨어난 후에 대답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만 트라베리아의 문장을 없애 주셨으면 합니다.”
자신이 넘치는 얼굴이었다. 드러난 감정에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 따윈 조금도 없다. 성공할 것이라고, 살아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표정이다.
“혹여 운이 아주 안 좋아 저희가 대화를 나누지 못할 상태가 된다면, 그렇군요, ‘듀크’를 찾아가시길.”
“듀크라면…….”
협력하는 자는 하나같이 특수하거나 강한 건가? 아니면 그 정도가 아니면 속마음을 숨길 수 없었던 걸까.
듀크라면 듀라한이 모델인 장군 시리즈로 그 실력만큼 유명하다. 그의 실력은 미영 할머니와 엇비슷한 정도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트라베리아의 문장 정도야 지금의 우리라면……아니.
나는 힘을 너무 소모해서 힘들다. 하지만 성진이라면 없앨 수 있다. 성진이 뒤를 돌아보았다.
“강인하.”
“왜?”
“정령의 가호를 좀 써 줘야겠다. 만일을 위해.”
성진이 처음 키메라의 핵에서 트라베리아의 문장을 제거한 것은 내가 장군 시리즈의 핵을 먹으려 했을 때였다. 그러나 핵에 새겨진 문장은 키메라의 힘에 비례한다. 그러므로 이번 문장은 커븐 로드 수준의 힘을 지니고 있다.
“……잘 좀 해.”
인하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핵을 하늘로 날려 보냈다.
스르릉
성진이 검을 뽑았다. 나는 인하와 힘을 합쳐 핵을 보호했다. 인하의 손 주위로 깃털이 떨어져 내렸다. 성진과는 상극인 정화의 힘이 그 위를 감쌌다.
화륵…….
우리의 ‘간섭’에 트라베리아의 문장이 반응했다. 그러나 노을의 감옥에서 홀로 움직인 문장의 생명은 그 순간 끝났다.
스걱!
검이 그어졌다. 섬뜩한 감각이 마력을 훑고 지나갔다. 그 순간 트라베리아의 문장이 날카롭게 갈라졌다. 갈라진 문장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깨어졌다.
“……!”
속을 헤집는 것처럼 기분이 이상했다. 인하 역시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머리가 어질어질한 가운데서도 핵에 시야를 집중했다.
생명은 여전하다. 의지를 가지고 타오르고 있다.
트라베리아의 문장을 베고 나서도 성진은 서늘한 눈으로 주위를 훑으며 검으로 허공을 천천히 그었다. 그는 곧 영문을 알 수 없는 행동을 끝내고 검을 다시 넣었다. 나는 핵을 다시 첸과 라스에게 돌려줬다.
핵을 돌려받은 후 첸과 라스는 입 안에 영혼 구슬과 물약을 털어 넣었다.
“자, 그럼……얼마 후에 다시 뵙죠…….”
첸과 라스가 자리에서 쓰러졌다. 쓰러진 첸과 라스의 핵 주위에 신묘한 힘이 깃들기 시작한다. 이성진이 쓰러진 첸과 라스의 양 손목을 붙잡았다.
“그럼 어디 저항해 보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