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418
이소영은 앞을 거닐며 눈을 크게 떴다. 붉은 바람, 이 분다. 아니, 바람이 아니다. 꽃보라다. 붉은 꽃잎이 시야를 크게 일그러뜨렸다.
사박
꽃잎으로 이루어진 환상이 사라졌을 때 나타난 것은 ‘방’이었다. 방의 분위기는 조금 전까지와 사뭇 달랐다. 아까까지는 검은 길만 계속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붉다. 문양은 같으나, 붉다.
소파도 붉고, 벽지도 붉고, 화병은 검고, 꽃은 붉은 장미다.
“기분 나빠!”
정신을 차린 이소영이 소름이 돋은 팔을 쓸었다. 그사이 레비와 셰린은 최인성을 정신 차리게 하기 위해 마법을 사용할 준비를 했다. 이소영이 성큼성큼 최인성에게 다가갔다.
“기다려 봐. 내가 할게.”
이소영이 마력을 소모하려는 두 사람을 말리며 몽롱하게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최인성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짜악─!
일행이 당황했다.
“그, 그래도 돼요?”
“마법보다 이게 확실해.”
이소영의 말대로 최인성은 바로 정신을 차렸다. 아픈 뺨을 쥐던 최인성은 이내 당황하며 주위를 살폈다.
“어라? 나, 지금…….”
“자자, 정신 차려.”
이내 상황을 파악한 최인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참 마음대로 안 되네.”
“걱정 마. 그때마다 내가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게 해 줄 테니까.”
“와, 맞지 않으려면 정말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네.”
“그럼, 그럼.”
쓰게 웃은 최인성이 곧 방 한구석을 가리켰다.
“나, 방금 저기로 가려고 했어.”
모두의 시선이 최인성의 손가락을 따라갔다. 검은 공간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하게 창문 없이 창틀과 커튼만 있는 벽이다. 최인성의 눈동자가 다시금 몽롱하게 물들었다.
“붉은……꽃잎이 흘러나오고 있어…….”
이소영이 반사적으로 최인성의 귀를 잡아당겼다. 아야! 비명과 함께 최인성이 제정신으로 되돌아왔다.
“지금도 보여?”
“응? 응. 보여. 날……부르고 있어.”
“그으렇단 말이지.”
이소영이 최인성과 꽉 팔짱을 꼈다.
“좋아, 가 보자. 뭔진 몰라도 중요한 것일 것 같아.”
“동감.”
“네에~.”
일행이 동감했다. 그들은 만일을 위해 서로의 손을 쥐고 벽으로 다가갔다. 그들의 몸이 벽을 통과해 들어갔다. 그렇게 도착한 장소는……스산하고 어지러웠다.
주위를 둘러싼 색은 피에 가까운 검붉은색이다. 검붉은색 방을 온통 가시나무가 휘감고 있다. 책상도, 꽃병도, 그림도, 온통 가시나무에 해어져 있다.
사이사이 붉은 꽃이 피어 있다. 겹겹이 쌓인 톱니 모양 꽃잎, 카네이션을 닮았다.
“앗, 저기!”
가시나무를 따라 걷던 이소영이 가시나무로 꽁꽁 싸여 있는 문 너머를 가리켰다. 낯익은 여자가 가시나무에 감싸인 채 잠들어 있었다.
“저 사람은 확실히…….”
“니시모토 칸나. 내 상대야.”
비앙카가 주먹을 꽉 쥐었다. 오시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으음……저 사람한테는 있네. 그렇다기보다, 주입당하고 있는 느낌?”
“주입당하고 있다니?”
“‘중심’은 아냐. 커다란 에너지원……. 응, 커다란 에너지원 중 하나야. 그렇게 만들기 위해 사람 안에 무언가를 주입하고 있어. 저게 부서져도 이 성이 무너지는 일은 없어. 힘이 약해지는 일은……일시적으로는 그럴지도 몰라도 곧 회복할 거야.”
“그래?”
최인성이 냉정한 얼굴로 총을 꺼냈다.
“부수자.”
“OK!”
비앙카가 접고 축소해 허리에 꽂아 넣었던 도끼를 꺼냈다.
“……어라?”
그런데……도끼가 커지지 않는다.
“윽!”
더군다나 적의를 발산하며 움직인 마력이 마법을 완성하지 못하고 빠르게 흩어진다. 흩어진 마력이 가시나무를 향해 빨려 들었다.
“큭. 유이!”
「알겠다옹!」
최인성에게서 빠져나온 검은 줄기가 지그재그로 주위를 메웠다. 유이는 만든 이의 특성을 꼭 닮아 있어 방어에 특화되어 있다. 무서운 속도로 흡수되던 마력이 조금 진정되었다.
“후…….”
그러나 그렇다고 흡수되지 않는 것도 아닌 데다, 막고 있는 최인성의 부담이 너무 컸다.
셰린이 팔찌를 꽉 쥐며 마법을 사용했다.
“하앗!”
셰린을 중심으로 온화한 파동이 뻗어졌다. 안정되어 있던 그림자가 더욱 굳건히 굳어졌다.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부정적인 감정을 억누르고 있던 최인성이 눈을 크게 떴다. 기이한 감각이었다. 마력이 떨리며, 공명하며, 차오르는 듯한…….
“셰린, 저 가시나무와 교감할 수 있겠어?”
최인성을 향해 힘을 보내고 있던 셰린이 오시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걸 할 수 있었다면 힘을 뺏기지 않았겠지.”
“그건 그렇네. ─칼날.”
짧은 언령과 함께 오시언의 앞으로 푸르른 검이 나타났다. 오시언은 검을 들어 크게 그었다.
“윽!”
세찬 바람과 함께 하늘과 바다가 섞인 냄새가 퍼져 갔다. 검날이 세차게 가시나무를 그었다. 푸른 상처 자국이 났다. 검로를 따라, 검로 주위에도 세 줄기 이상 긴 검날 자국이 그어진다. 오시언이 그 위에 또 한 번 검을 박아 넣었다.
“물들어라.”
검날을 통해 가시나무 안으로 푸른색이 스며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붉은 방이 크게 출렁거렸다.
“셰린! 고정해!”
“윽─.”
“유이! 윽……!”
출렁거리는 방이, 흔들리는 가시나무가 모두의 마력과 정신을 유린한다. 최인성은 한순간 시야가 흔들리며 심장이 쿵 떨어지는 감각을 느꼈다.
‘……어?’
시야가 일그러지며 잠시 이상한 풍경이 보였다. 이상한 풍경이라기보다……익숙한 풍경이다.
‘그림자 속의 풍경. 하지만 평소보다 훨씬……선명해.’
날카로운 가시나무와 그 가시에 꽁꽁 감싸인 여자. 붉은 꽃, 붉은 방, 붉은 가구, 붉은 그림. 그 사이에서 빛나는 어두운 조각과, 가시에 꽁꽁 감싸인 칸나를 양팔로 끌어안고 있는 붉은 여자…….
“……!”
한순간 최인성과 붉은 여자의 시선이 맞았다. 여자가 웃으며 최인성을 향해 손을 뻗는다. ─악령임을 느끼고 있으나 최인성의 손이 무의식중에 여자의 손을 따라 올라갔다.
“날아가라!”
콰과과광!
그 풍경은 거센 폭풍 속에서 희미해졌다. 그러나 여자의 목소리만은 그치지 않고 최인성의 머릿속에 울렸다.
「인성 님!」
그때 어깨에서 차갑고 아릿한 기운이 퍼졌다. 알 수 없는 강제력이 실이 끊긴 듯 사라졌다. 그러나 그 대신 최인성의 의식까지 희미해졌다.
최인성이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무시무시한 폭풍이 모든 것을 날려 버리려 한다. 하지만 가시나무가 그 폭풍조차 삼키며 억눌렀다. 방이 축소되며 시원한 푸른 파도가 흘러넘치고 가시나무가 붉게 변한다. 그 순간, 가시나무 주위로 단단한 바위가 생기며 허공에서 나타난 유리병들이 가시나무를 막아섰다.
“인성 님!”
누군가가 최인성의 손을 붙잡아 잡아당겼다. 익숙한 얼굴을 확인하며 최인성은 눈을 감았다.
위기일발이었던 최인성 일행을 구한 것은 테온 일행이었다. 정확히는 캘리번의 테온, 코린, 거기에 무르시엘 초기 멤버인 마로니 드벨, 그와는 별개의 무르시엘 멤버인 지제, 칼, 아진.
최인성 일행 중 정신을 잃은 것은 셰린과 최인성, 둘이었다. 레비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먼저 최인성을 살폈다.
“에휴, 역시 상태가 안 좋네요. 힘이 많이 들어갔어요. 동화도 심하고…….”
테온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비틀거리는 레비를 부축했다.
“레비, 괜찮습니까?”
“괜찮습니다. 여러분도 용케 무사했네요~?”
“리더의 아이템, 많이 가지고 있었거든.”
“아, 큰일 났다. 카드가 손상됐어.”
오시언이 지친 얼굴로 가방에서 카드를 꺼냈다. 떨어뜨린 카드 안에서 겐과 후안이 튀어나왔다. 두 사람은 이미 정신을 차린 상태였다. 무르시엘 멤버가 나름대로 해후를 나누는 사이, 새벽별무리도 해후를 나눴다.
“인성 님은 괜찮을까요?”
“으음, 어쩔 수 없네.”
테온과 코린은 쓰러진 최인성을 걱정스럽게 살폈고, 이소영은 고민하다가 재킷을 벗어 셰린에게 입혔다. 테온이 당황하며 이소영을 돌아보았다.
“소영 님! 여기서 전투복을 벗으면…!”
“그렇긴 한데, 레비 혼자로는 힘들걸? 지금 우리한텐 셰린의 도움이 많이 필요해.”
셰린은 이소영보다 키가 크다. 곧 셰린의 몸에 맞춰 이소영의 전투복이 커졌다.
“그렇긴 해. 나도 선물. 정화 아이템은 이게 마지막이야.”
코린이 다른 것보다 강한 정화 아이템을 셰린의 손목에 채웠다. 이소영이 레비를 돌아보았다.
“인성이 상태 많이 안 좋아?”
“그렇죠, 뭐. 힘을 좀 많이……흡수했어요. 아니다, 흡수했다기보다, 지금 인성 님의 상태는 마치 ‘그릇’ 같아요. 주위 모든 것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이는 상태죠.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끌어모으고 있네요~.”
“트라던트의 특징과 같네.”
코린이 인상을 찌푸렸다.
“트라던트를 먹었기 때문인가?”
“그럴지도 몰라요. 거기다 여기는 ‘트라던트’라고요~. 동조가 심해요.”
그 순간 최인성의 그림자에서 새벽빛이 새어 나왔다. 커다란 고양잇과 맹수의 그림자가 최인성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울렁거리며 새어 나오던 그림자의 움직임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레비가 눈을 빛냈다.
“급한 불은 껐네요. 역시 유이!”
그제야 이소영은 주위를 확인했다. 검은 공간, 붉은 방, 이어서는 붉은 공간이다. 쓰러진 사람도 있으니 일행은 잠시 휴식하기로 했다.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정화석을 핵심으로 힘의 소모를 막기 위한 결계도 쳤다. 간식을 좋아하는 코린은 다른 사람에 비해 먹을 것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식량에 조금 여유가 생겼다. 비앙카가 걱정 어린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설마 코린과 테온이 같이 있을 줄이야. 최악의 경우 전부 합류하지 못하고 흩어져 있을 가능성도 생각했지만, 그래도 웬만하면 한 명 정도는 얀이나 리카티랑 같이 있어 주길 바랐는데.”
“그 둘은 나도 걱정이야.”
현재 합류하지 못한 새벽별무리 멤버는 네 명. 김미영, 스벤, 얀, 리카티다. 저주와 해주에 능한 스벤이나 고대 얼음의 계승자인 김미영은 높은 확률로 무사할 테지만, 다른 두 사람은 아니다.
“어? 잠깐, 이게 뭐야.”
그때 이소영이 어떤 것을 발견하고 테온의 손목을 잡아챘다. 테온도 항주용 시계를 차고 있었다. 비앙카의 시계에 표시된 체재 시간은 29시간, 그런데 테온의 시계에 적힌 체재 시간은 36시간이다.
“시간에 차이가 나잖아?”
다른 일행 역시 시간을 확인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7시간 차이라.”
“드라이어드 때랑 좀 닮았나? 구역이 나뉘어 있고, 거기마다 시간의 흐름이 다른 거야? 앞으로 이런 구역이 몇 개나 있을 텐데. 아오…….”
이소영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레비가 물었다.
“죽음의 성 때는 어땠어요?”
“그땐 이런 거 없었어. 함정이랑 숨겨진 통로는 많았지만, 길은 다 연결되어 있었고, 나뉘어진 공간도 없었어. 전부 한 구역이었어.”
“흐음…….”
셰린이 창백한 얼굴로 손을 모았다.
“시간이 많이 다르다면, 운이 나쁘면, 상성이 안 좋은 분들은…….”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 나아가기 힘들어져.”
오시언이 고민하며 카드를 소환했다. 그 카드로 레비를 비춘다.
“음……동료를 매개로 해도 역시 점이 안 쳐지네.”
이소영이 머리를 손으로 에워싸며 이를 갈았다.
“미치겠네, 진짜.”
“테온, ‘붉은 공간’에 대해 알려 줘.”
비앙카가 테온을 불렀다.
곧이어 일행은 ‘검은 공간’과 ‘붉은 공간’의 차이점을 알게 됐다.
붉은 구역 역시 기본은 길과 방이다. 검은 공간과의 첫 번째 차이점은 식물이 많다는 점이다. 어디든 붉은 꽃이 꽂힌 화병이 있다. 그리고 이 꽃이 사람의 정신을 어지럽히는 매개체다. 특히 모퉁이를 돌 때는 조심해야 한다. 붉은 꽃잎과 함께 환상에 빠질 확률이 높다. 그렇게 되면 정신을 붉은 꽃에 뺏기게 되는데, 그걸 제정신으로 되돌리는 건 상당히 힘들다.
혹은 거짓으로 만들어진 동료를 따라 길도 아닌 장소로 갈 뻔한 적도 있다고 한다.
전용 실내 화단도 있는데, 여기도 조심해야 한다. 들어간 순간 공간이 일그러져 빠져나가기가 힘들다.
두 번째 차이점은 ‘붉은 특이점(特異點)’이다. 붉은 공간을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 한 곳이 붉게 물드는 경우가 있다. 이 붉은 것에는 두 가지 패턴이 있다. 안개로 변해 주위를 갑자기 휙 쓸었다 작아져 소멸되는 파도 패턴, 바닥에서부터 일어난 붉은 것이 사람의 형태로 변해 한동안 공간을 배회하는 악령 패턴.
사실 그들은 본래 무르시엘 멤버 한 명과 더 동행하고 있었단다. 그러나 그 한 명은 그 붉은 특이점, 파도 패턴에 당해 죽었다. 붉은 것에 갇혀, 붉은 것에 짓눌려, 한 줌의 핏물이 되었다. 그 핏물은 종내에는 한 송이 꽃이 되어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여자의 것인지 남자의 것인지 모를 커다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던가…….
“소름 끼쳐!”
이야기를 다 듣고서 이소영은 팔을 감싸며 몸을 떨었다. 코린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빨리 나가고 싶어.”
“본격적으로 악령의 집 같아졌네.”
오시언의 몸 주위로 보석이 퐁퐁 솟아올랐다. 셰린 왈, 오시언이 고민할 때는 자주 저런 현상이 벌어진단다.
“여긴 사람의 영혼과 죽음을 모아 만든 곳이잖아. 어련하겠어.”
이소영은 이내 걱정스럽게 쓰러져 있는 최인성을 보았다. 이래서야 제대로 쉴 수 있을까? 다행히 그 붉은 특이점이 나타나는 일은 드물다고 하는데, 그래도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오시언도 가만히 앉아 체력을 회복하며 고민에 잠겼다. 빼내지 못한 칸나, 공간의 색. 어쩌면 그들이 지나갔던 검은 공간에도 찾지 못했을 뿐 ‘힘의 중심’이 있었을까. 그리고 이 공간의 진짜 중심은 어디에 있지?
불안한 감정이 주위를 계속해서 메웠다.
최인성은 꿈을 꿨다. 그건 참으로 행복하고 즐거우면서, 동시에 구역질 날 정도로 기분 나쁜 꿈이었다.
꿈속에서 세계는 평화로웠다. 최인성은 이성진과 함께 여행을 하며 돌아다녔다. 때때로 자신들과 비슷하게 세계를 누비는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다. 한국으로 돌아갔을 땐 한국에서 혼자 평온하게 살고 있는 유은하를 만났다. 유은하는 무척 그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평화 속에 물든 행복하고 평온한 얼굴이다. 그것이 무척 기쁘고, 울분이 날 정도로 괴로웠다.
「……성 님.」
이윽고 최인성은 눈을 떴다.
치직…….
귀에 노이즈가 꼈다. 아니다. 귀만이 아니라 머릿속과 시야도 이상했다. 눈앞이 어쩐지 흑백으로 보인다. 완전한 흑백은 아니지만 시야가 노이즈로 가려지듯 회색이 겹쳐졌다.
“윽…….”
──그림자의 세계다.
그림자가 되지도 않았고, 엿보려고 한 것도 아닌데 주위가 그림자로 덧씌워졌다. 시야는 노이즈가 끼며 점멸하면서도 때때로 평소보다 훨씬 짙고 선명한 풍경을 엿보여 줬다.
“…성아!”
“─란……네요.”
이상하게 목소리가 멀었다. 마치 유리 막에 덧씌워진 것 같다. 최인성은 몸을 일으키며 인상을 찌푸렸다. 최인성의 눈을 본 이소영의 표정이 굳었다.
“눈이 왜 이래?”
이소영이 최인성의 양 뺨을 잡고 심각한 눈으로 최인성의 얼굴을 노려봤다.
“…왜 그래?”
최인성의 목소리는 비교적 멀쩡했다. 그러나 눈동자는.
흰자가 검게 물들고, 눈동자는 초록색으로 빛난다. 레비가 입술을 깨물었다.
“상~당히 안 좋네요.”
최인성보다 한발 빨리 일어난 셰린이 한발 늦게 최인성을 보았다. 곧 셰린은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정말……본격적으로 위험하네요.”
오시언이 최인성을 향해 카드를 내밀었다. 투명했던 카드가 점점 어두운 색으로 물들었다. 카드 안에서 검보라색 힘이 넘실거렸다.
“그림자랑 옷, 당신의 몸에 걸린 수호마법이 죽음의 힘이 흘러넘치려는 걸 겨우 막고 있어.”
이어 오시언이 최인성의 목덜미를 가리켰다.
“그 가호는 이성진 것 맞지?”
최인성이 문득 손으로 목과 어깨의 경계선을 매만졌다.
최인성 일행이 캘리번에서 떠나기 직전의 일이었다.
‘잠시만.’
‘왜?’
돌아서는 최인성을 이성진이 불렀다. 그대로 최인성의 어깨를 붙잡고 목깃을 내린 이성진이 최인성의 목을 콰득 깨물었다.
‘윽…!’
이성진의 ‘가호’를 모르는 자에게는 자극적인 광경인지라 최근에 새벽별무리에 합류한 대원들은 하나같이 숨을 삼켰다. 반면 유은하와 정예리는 의아해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평소보다 훨씬 많은 마력이 가호 안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심상찮은 힘에 유은하나 정예리가 말리기 전 이성진이 최인성의 목에서 이를 뗐다. 최인성 역시 의아해하며 목에 난 상처를 가리켰다.
‘갑자기 왜? 이미 난 네 가호가 든 물건을 가지고 있잖아.’
최인성이 항상 하고 다니는 귀걸이에 이성진의 가호가 들어 있다. 유은하는 반지 목걸이에, 강인하는 아공간 팔찌에, 이소영은 단검에.
가호는 주인의 체력과 마력을 빼앗는 기술이다. 때문에 이성진의 가호를 지니고 있는 건 그에게 가장 중요한 네 명뿐이었다.
‘어쩐지……느낌이 안 좋아.’
최인성은 이성진이 말하는 ‘느낌’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 그리고 이성진이 싸움 전 허투루 이렇게 강한 가호를 줄 리 없다.
종말이란 특수능력을 가졌기 때문일까, 이성진은 사람의 흉(凶)을 본다. 그중에서도 죽을 상을 잘 본다.
죽을지도 모른다.
이성진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사히 돌아와라.’
그때의 이성진의 얼굴을 떠올리며 최인성은 목을 덮은 손에 힘을 줬다. 어쩐지 상처가 남은 목이 따끔거리는 듯했다.
“맞아.”
“하지만 상태가 좋지 않아. 그리고 가호는 본인의 마법이 가진 성질까지는 막을 수 없어. 당신은 이제 마법을 되도록 쓰지 마. 그림자를 보는 것도 자제하도록 해.”
“……알았어.”
최인성은 오시언의 말에 수긍하며 눈을 몇 번이고 깜빡여 시야를 고쳤다. 그러나 그림자의 세계는 사라지지 않고 노이즈로 남았다.
일행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붉은 길, 붉은 꽃잎, 일행은 번갈아 가며 환각 아이템을 펼쳤다.
그들의 이번 목적은 다시 그 붉은 가시나무 방을 찾는 것이다. 테온 일행이 그 가시나무 방을 발견한 것은 최인성 일행의 마력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반복해서 변하지 않는 붉은 길을 돌아다니면서도 한 번도 발을 디디기 어려울 정도로 잘 숨겨져 있는 곳이란 소리다.
일어난 최인성은 그곳에서 본 여자 악령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가시나무, 갇혀 있는 칸나, 그것을 조종하는 듯한, 붉은 악령. 틀림없다. 그 방은 이 붉은 공간의 ‘핵심’이자 ‘가장 큰 단서’다.
최인성은 길을 걸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길이 검게 울렁거린다. 정신을 잃기 전과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이것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아까도 분명 그림자가 빼곡히 채워져 있었지만 너무 짙고 강해서 그 이면까지는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평소보다 더 꿰뚫려 보이는 듯하다. 그 순간 최인성은 허공을 배회하던 그림자가 폭주하듯 거칠어지는 것을 발견하고 모두를 불러 세웠다.
“…멈춰.”
“어?”
“……! 옵니다!”
최인성에 이어 테온, 셰린, 오시언, 레비가 차례대로 눈치챘다.
──붉은 특이점이다.
붉은 특이점이 언제 나올지 바짝 긴장하고 있던 테온과 코린, 마로니 등의 행동은 빨랐다. 경험이 많은 이소영, 비앙카, 민감한 셰린과 오시언의 반응도 그 못지않게 빨랐다.
“……인성아?”
그런데 가장 먼저 이상을 눈치챈 최인성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그는 움직이지 않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큭, 기분 나빠.」
「인성 님!」
유이가 그림자를 움직여 최인성의 무릎을 꺾었다. 아슬아슬하게 최인성이 ‘붉은 파도’를 피해 몸을 숙였다.
“하아…….”
최인성은 멍하니 아래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