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419
그림자가……꿰뚫려 보인다. 아니, 꿰뚫려 보인다기보다는……. 최인성은 청각도 시각도 멀어진 세계에서 악령처럼 일그러지는 그림자에 정신을 뺏겼다. 이게 ‘동조’한다는 것일까?
그림자를 가만히 보고 있다 보면 어딘가 다른 세계로 빠져 버릴 것 같았다. 바닥에서 그림자가 물결처럼 흔들린다. 사이사이로 어둠이 짙게 빛난다. 저 초록색은 무엇일까? 파도처럼 일렁거리는 그림자에 빠져들 것 같은 기분으로 손을 뻗는 순간, 가까이에 있던 오시언과 레비가 다급히 최인성의 양팔을 붙잡았다.
“……아.”
한 발짝 늦게 최인성이 반응했다. 달려온 이소영이 이번엔 최인성의 뺨을 꽉 잡아당겼다.
“…윽.”
“평소보다 반응이 느린데? 한 번 더?”
그러며 이소영이 양손으로 최인성의 양 뺨을 쳤다. 반사적으로 눈을 꽉 감았던 최인성은 한발 늦게 눈을 크게 떴다.
“어…….”
최인성이 당황하며 이마를 붙잡았다. 최인성의 그림자 속에서 영과 유이가 술렁거린다.
‘나, 방금.’
셰린이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방금, 뭐 했어요?”
“네?”
“방금 그건…….”
“동화…….”
오시언이 셰린의 뒷말을 이었다. 레비가 혀를 찼다.
“거울의 통로를 발견했을 때보다, 붉은 그림에 홀렸을 때보다 더 깊이 들어갔네요. 인성 님, 지금 제정신 맞나요~? 응? 괜찮아요?”
“한 번 더 때려 줄까?”
“어? 응……?”
“역시 한 번 더…….”
이소영에게 한 번 더 꼬집힘을 당하고서야 레비가 한 말의 의미가 최인성의 가슴에 닿았다. 눈앞에서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파도처럼 일렁거리던 그림자의 움직임이 서서히, 서서히 멈췄다.
“…….”
최인성이 심각한 얼굴이 되어 손바닥으로 입을 감췄다.
‘방금 그건 뭐였지?’
눈앞이, 그를 비추는 그림자가 일그러지며 ‘길’이 열렸다. 그 안으로 가라앉았다면 과연 무엇이 나타났을까. 최인성은 새삼스럽게 자각했다.
“……제가 생각보다 상태가 안 좋나 보네요.”
“그러게. 설마 사랑의 매가 안 통할 줄이야.”
“사랑의 매…….”
코린이 떨떠름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레비가 심각한 눈으로 최인성을 살폈다.
“맞아요. 인성 님은 지금 아~~주 상태가 안 좋아요. 몇 번이나 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제발 조금이라도 이상한 기분이 들면 바로 말해요. 아까처럼 멍하니 있지 말고. 아셨나요? 제 노래로 제어해 드릴 테니까.”
“그건 좀…….”
최인성의 표정이 어색해졌다. 비앙카도 시선을 피했다.
레비는 심각한 음치다. 그 괴로운 노래를 그냥 들어 넘기는 건 기껏해야 이성진이나 유은하 정도다. 레비와 셰린이 최인성의 파동을 진정시키는 사이 최인성은 제 그림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방금 나 어떻게 된 거야?’
「트라던트와 점점 더 깊게 동화되고 있다옹. 제어하고 있지만 계속 흘러넘친다옹.」
‘동화…….’
분홍 눈을 가진 표범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평소 고양이 모습을 하고 있던 유이가 표범 모습을 드러낸 것 역시 최인성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증거다.
「흐음. 확실히 정신에는 안 좋지만……이거 어찌 보면 기회 아냐?」
‘기회?’
「그건 그렇다옹. 탈출에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옹.」
최인성의 눈에만 보이는 유이가 앞발을 들었다.
「주인님과 동조해 다른 공간과의 ‘통로’가 연결됐다옹. 이 성과 깊게 동화된 지금의 주인님이라면 공간 이동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옹. 그 칸나라는 여자의 그림자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동료들을 향해 길을 열 수 있을지도 모른다옹.」
「근데 그렇게 하면 더 미치는 거 아냐?」
「야옹……그건 감수할 수밖에 없다옹…….」
‘그럼 조금 더 보는 정도는…….’
“인성 님?”
무심한 레비의 눈동자에 의문이 드러났다. 레비가 아공간에서 전용 마이크를 꺼냈다.
“역시 사랑의 매만으로는 부족하나 보네요~.”
“아니, 그게 아니라.”
어느 때라도 레비의 노래는 괴롭다. 최인성이 양손으로 마이크를 쥔 레비의 손을 붙잡았다.
“방금 이상한 게 보였어.”
레비가 손을 잡아 빼려다 말고 최인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떤 건데요?”
“너희 눈엔 내가 어떻게 보였어?”
“어떻게라고 할지…….”
“가라앉았어.”
먼저 그들이 본 것을 말로 표현한 건 오시언이었다.
“어둠이 나풀나풀 오라처럼 펼쳐지며……가라앉았어.”
셰린과 레비의 말이 잇따랐다.
“트라던트의 힘이 그림자로 흘러 들어가며 넘쳤어요.”
“파장이 딱, 맞춰지는 느낌이랄까~.”
“인성이 넌 어땠어?”
이소영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최인성이 고민하는 기색으로 대답했다.
“그림자의 세계가 선명해졌어. 그러면서……그림자에 통로가 열렸어.”
“통로?”
“그대로 걸어갔으면 아마 ‘어딘가’로 이동했을 거야.”
최인성이 장갑을 낀 손으로 한쪽 눈을 덮어 가렸다.
“어쩌면 이걸 이용해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거, 위험하지?”
차가운 눈빛으로 묻는 이소영을 향해 최인성이 수긍했다.
“응. 그런데 여기 오래 있는 거랑, 좀 더 빨리 탈출하기 위해 동조하는 거랑, 어느 것이 위험할까?”
“판단하기 어렵네요.”
셰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레비도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오시언이 충고했다.
“…동조는 역시 그만둬. 일부러 동조하려 들지 말고, 최대한 보지 않게끔 흘리면서, 문득문득 보인 것으로만 정보를 찾아. 보이는 건 이용하는 게 좋으니까.”
“그게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서……. 최대한 노력해 볼게요.”
무르시엘 일행은 영문을 몰라 자신들끼리 모여 상황과 눈치를 살폈다.
최인성이 눈을 깜빡였다. 그림자 세계는 여전하다. 보려 하지 않아도 무언가가 눈 안에 들어오고, 그것이 온몸의 감각을 사로잡으려 든다. 그 안에서 최인성은 진득한 빛을 찾았다. ……틀림없다. 칸나다.
키이잉──.
인지한 순간 세상이 멀리, 보다 더 멀리 보였다. 머릿속에 그림자가 얽히고설킨다. 최인성은 그 감각을 억지로 회피했다. 그림자의 색이 달라졌다. 붉고……검고……파랗게……일그러진다. 최인성은 혼자서는 답을 내리기 어려운 질문을 했다.
“갇혀 있는 사람을 구해 내는 것과……다른 공간으로 가서 동료들과 합류하는 것. 어느 게 먼저라고 생각해?”
최인성 일행은 지금까지 두 가지 공간을 확인했다. 지나온 검은 공간과 지금 걷고 있는 붉은 공간. 이제 검은 공간으로 돌아가기는 어렵겠지만, 최인성은 방금 ‘초록색 공간’을 보았다. 어렴풋이 동료들의 기척도 느꼈다.
지나간 공간으로 언제든지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면 합류를 우선시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번 떠나간 공간에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최인성은 확신할 수 없었다.
“둘 다~?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는 게 좋겠죠?”
“칸나를, 발견했어.”
“칸나를?”
무르시엘 대원이 반색했다. 특히 칸나와 같은 무르시엘 초기 멤버인 후안 일행이.
“흐음~.”
레비가 고개를 기울였다. 오시언이 카드를 펼쳤다.
“적의 힘은 깎아 두면 좋지. 이번엔 제대로 대책을 세우고 가자.”
아까보다 사람이 모였다. 전투법을 좀 더 궁리할 수 있다.
아까 그 방의 모습으로 보아 현재 가장 유용한 마법은 테온의 환경마법이다. 주위 환경을 원하는 대로 변화시키는 마법. 테온의 강제력은 대단하여, 아까도 가시나무 방을 조금이나마 변화시켰다.
그러므로 이번 구출 작전의 메인은 테온이다. 서포트는 최인성과 셰린. 최인성은 그림자 세계를 통해 조정하고, 셰린은 교감하며 가시나무를 흐트러트린다. 가시나무를 직접 해체하는 것은 그 외의 멤버들. 이소영과 코린, 오시언이다.
여러 번 고민했지만 가시나무를 확실히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곳은 적의 소굴,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된다.
최인성이 길을 안내했다. 그런데 최인성의 길 안내는 꽤나 기묘했다. 멀쩡히 걸어간다 싶다가도 벽을 향해 돌진하거나, 장롱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지나가는 장소가 기묘할수록 셰린과 레비는 최인성을 신경 썼다. 그러는 동안 묘하게도 붉은 꽃의 마수에는 한 번도 걸리지 않았다.
머지않아 가시나무 방에 도착했다. 최인성이 가리킨 입구는 겉보기엔 입구도 통로도 아닌 서재 중간에 있는 책꽂이였다. 허나 일행은 그 책꽂이에서 불길한 마력을 느꼈다.
“좋아, 이번엔 제대로 한번 해 보자고.”
이소영의 주먹 주위로 바람이 일렁거리며 일어났다. 일행은 입구에서 이는 약간의 거부 반응을 무시하며 다시금 가시나무로 가득 찬 장소에 진입했다.
“윽…….”
가시나무 방은 아까보다 더욱 기분 나쁘게 변해 있었다. 바닥이 질척한 붉은 물로 가득 차 있다. 그 물을 흡수하며 자라나는 가시나무와 꽃. 칸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칸나는?”
“저기…….”
최인성이 손가락으로 어느 방향을 가리켰다. 가시나무가 뭉치고 뭉쳐 굵은 줄기로 변해 있다. 안에 무엇이 있어도 더듬을 수도 없을 정도로 틈 하나 없다.
“갇힌 거야?”
“아, 보이네요~. 이건 완전히……변하고 있네요.”
“변하다니, 뭘로?”
“핵……에 가까운 에너지원……?”
“아, 변했다고 해도 사람의 형태를 잃지는 않았으니 걱정 마. 아직까지는.”
──아직까지는.
그 말이 가진 의미에 무르시엘 일행이 숨을 삼켰다.
“그럼 시작하자!”
이소영이 테온의 등을 탁 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와 동시에 테온이 움직였다.
“환경 조작, 마그마.”
테온을 중심으로 공간이 변화했다. 테온의 속성은 땅속성이다. 메마른 땅과 바위, 들끓는 마그마. 바닥에 고인 물이 펄펄 끓는 마그마와 섞였다.
한 번에 완벽하게 바뀌지는 않았다. 그러나 테온은 계속해서 환경을 전염시켰다. 최인성과 셰린이 움직였다. 셰린이 가시나무와 동조하며 가시나무의 힘을 약하게 했고, 최인성의 안에서 나온 그림자 손이 그림자를 헤쳐 가시나무를 비키게 했다.
손의 정체는 바로 영이었다. 그냥 최인성이 하려는 걸 영이 말리며 앞으로 나섰다.
영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것은 유이가 그림자에 녹아든 이후다. 그 전까지는 스스로를 그냥 마법의 일부로 취급하며 겉으로 나오지 않았다. 최인성 역시 그림자의 본체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으나 딱히 관여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이가 녹아들면서 달라졌다. 유이와 영은 처음엔 별로 맞지 않았다. 유이는 영이 뭐라고 하든 웃으며 튕겨 냈고 영은 혼자 열을 냈다. 며칠 동안 그 목소리가 시끄러워 잠을 자지 못했을 정도다.
그림자에 자아가 생겨도 마법의 일부일 뿐이다. 그 생각이 달라진 건 유이가 들어선 후부터다. 영은 이제 최인성의 공격에 마법의 중심으로서 동조할 뿐만 아니라 자율적으로 움직인다.
「노쇠의 갈색.」
“마비의 보라.”
공격하는 자들은 가시나무를 헤치며 다가갔다. 이소영의 바람이 가시나무를 헤집고, 책에서 나온 작은 용들이 불꽃을 뿜어 가시나무를 태우고, 오시언의 카드에서 나온 칼날이 가시나무를 물들이며 짓이겼다. 비앙카도 온 힘을 다해 도끼로 가시나무를 비틀었다.
아까처럼 바닥이 출렁거렸다. 마그마로 뒤덮인 바닥에서 붉은 꽃이 피고, 가시나무가 출렁거리며 넘쳐 났다.
동시에 최인성의 시야 역시 일렁거렸다. 가시나무는 아직 밑에 있는데, 어둠으로 된 붉은 파도는 이미 어깨를 넘어 출렁거리고 있다. 주위로 꽃잎이 흩날렸다. 꽃잎은 몽환적일 정도로 짙은 마력을 뿜어 대며 시야를 붉게 물들였다.
「이리 와.」
눈을 깜빡인 순간 최인성의 시야는 그림자의 세계에 완전히 사로잡힌다. 최인성은 가시나무에 앉아 있는 붉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홀린 듯이 그 형상을 바라볼 뿐이었지만, 이내 최인성은 그 심연을 꿰뚫어 보았다. 붉은 여자를 이루고 있는 수없이 많은 원한과 영혼, 그녀는 악령 덩어리였다.
멍하니 걸어가는 최인성의 발목을 붙잡는 게 있었다. 새까만 가시나무다. 가시나무가 하나, 둘, 얽혀 온다. 셋, 넷, 다섯…….
콱!
그것을 끊은 것은 그림자에서 모습을 드러낸 유이와 영이었다. 밀려 들어오던 마력이 억지로 밖으로 배출되는 느낌과 함께 최인성은 정신을 차렸다.
“큭…!”
시야가 더 어두워졌다. 아니, 더 맑아졌다. 최인성은 상반되는 기분을 느끼며 블래스터를 뽑았다.
총신에 마력을 충전하는 최인성에게로 가시나무가 동조했다. 최인성은 그림자를 똑바로 조준하고 쐈다. 총구에서 나온 탄환은 가시나무를, 그림자에서 함께 날아간 탄환은 가시나무의 그림자를 공격했다.
쾅!
가시나무가 산산조각 났다. 그와 동시에 굉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끼아아아아악─!
“윽.”
일행이 당황하며 귀를, 혹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 소리는 보통 소리가 아니다. 정신에 직접 울리는 소리다. 레비가 그에 맞춰 허공에서 마이크를 꺼냈다.
“그렇게 나온다면, 저도─!”
레비의 목소리가 가시나무에서 나온 음량을 조금이나마 반사시켰다. 레비가 숨을 들이켜는 것과 동시에 비앙카가 비명을 질렀다.
“악! 분위기 깨니까 노래 말고 언령만 해!”
“네에~? 노래하는 게 더 흥이 나는데~.”
“태평하게 노래할 때냐? 응? 빨리빨리 하자?”
“체엣. 알았다고요~.”
레비가 짧은 말로 파장을 방어했다.
가시나무 줄기가 주위를 향해 날카롭게 쏘아져 나갔다. 붉은 꽃잎이 활짝 꽃을 피운다. 그 순간, 붉은 특이점이 나타났다.
“수그려!”
꽃잎에서 나온 붉은 특이점은 순식간에 허공을 날카롭게 휩쓸었다. 붉은 안개가 닿는 부분마다 마법이 녹고, 분해되고, 혹은 베였다.
한번 뻗어졌던 안개가 다시 가시나무 상공에서 모였다. 모두에게 보이는 것은 안개뿐, 그러나 최인성에게는 다른 것이 보였다.
“욱…….”
머릿속을 엄습하는 기이한 기분에 최인성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붉은 여자가 사나운 표정으로 악령을 불러 모으고 있다. 선명했던 붉은 눈동자에서 피눈물이 흐른다. 악의가, 원한이, 죽음이 최인성의 머릿속을 날카롭게 때렸다.
「정신 차려! 트라던트가 그럼 그렇지 뭘 동요하고 난리야!」
「인성 님, 쏘라옹!」
최인성은 그림자가 시키는 대로 총을 겨눴다. 블래스터에 마력이 흡수되는 것과 동시에 주위로 전기를 두른 그림자 공이 수십 개 생겨났다. 그것이 모조리, 아까처럼 가시나무의 그림자를 겨눴다.
──피와 악의를 두른 악령을 정확히 꿰뚫었다.
꺄아아아아악!
그것이 현실에도 영향을 끼쳐 가시나무에 뻥뻥 구멍이 뚫렸다. 동시에 가시나무 안에 갇혀 있던 단발머리 여자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동료인 지제와 마로니가 다급히 칸나를 붙잡았다.
“헉, 헉…….”
최인성은 숨을 고르며 붉은 악령을 똑바로 노려봤다. 악령을 노려보면 노려볼수록 머릿속으로 기분 나쁜 감정이 밀려든다. 그것을 아는데도 노려보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악령 역시 고개를 돌려 최인성을 바라보았다.
세계가 일렁이며 파도쳤다. 붉은 안개가 넓게 퍼졌다. 가시나무가 일행을 붙잡기 위해 날아왔다. 그런데 가시나무가 노리는 건 아직까지 그들의 힘을 품고 있는 칸나가 아니라 숨을 고르며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최인성이었다. 이소영이 다급히 바람으로 가시나무를 막으며 일갈했다.
“최인성! 정신 차려!”
그러나 최인성은 여전히 허공을 볼 뿐 반응이 없었다. 바람으로 등을 때려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이소영이 이를 갈며 우선 방어에 집중했다.
“아, 진짜! 쟨 왜 인성이를 노리고 난리야?”
“아는 거지. 최인성의 안에 있는 ‘조각’이 아주 유용하다는 걸.”
“망할!”
오시언의 대답에 이소영이 욕을 내뱉었다.
“테온, 멀어지게 해.”
코린이 다급히, 그러나 침착한 어조로 테온을 불렀다. 테온이 입술을 악물었다.
“안 됩니다. 여기는 단단히 고정되어 있어요.”
“에휴~.”
“도망가자.”
레비가 한숨을 내쉬었다. 오시언이 만들어 낸 카드에서 파도가 쏟아졌다. 테온이 환경을 움직여 일행이 출구로 다가올 수 있도록 도왔다. 환경마법이 닿지 않는 가시나무 근처에 있던 일행을 이소영이 바람으로 재빨리 휘감았다. 출구를 향해 날며 이소영은 어중간한 위치에 서서 머리를 붙잡고 있는 최인성까지 단번에 낚아챘다.
──그게 실수였던 건지도 모른다.
“어…?!”
바람에 휘감겨 최인성과 칸나의 거리가 가까워진 순간, 칸나의 몸에서 빛이 일었다. 암울한 빛, 붉은 빛이다.
“안 돼!”
셰린과 레비가 눈치챘을 땐 이미 늦었다. 칸나의 안에 있던 ‘에너지원’이 최인성의 안으로 스며들었다.
“헉…!”
이소영이 창백한 얼굴로 숨을 삼켰다.
“윽!”
최인성이 가슴을 부여잡으며 신음했다. 붉은 에너지원이 최인성의 안에 녹아든다. 최인성의 몸 주위로 그림자가 파도치듯 일렁거렸다. 낭패라 생각하면서도 코린이 목소리를 높였다.
“일단 여기서 나가자!”
“쳇. 알았어!”
세계가 점점 출렁거린다. 저번에 여기에 왔을 때처럼 가시나무가 파도치며 그들을 심저에 묻어 버리려 한다.
최인성은 울렁거리는 시야 속에서 계속해서 그 붉은 악령을 바라보고 있었다. 악의와 원한을 주체하지 못하고 날뛰는 악령을. 본능에 맡겨 이 우리 안을 지키는 악령을…….
「넌,」
「누구?」
일행이 세계의 붉은 힘에 저항하며 달렸다. 일렁거리며 닫혀 가는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껏 달리던 그들은 어느새 들어온 입구를 찾을 수 없게 되었음을 알았다. 이소영에게 매달려 있던 최인성이 쿨럭 기침하며 손을 뻗었다.
울렁….
최인성을 중심으로 그림자가 서서히, 서서히 퍼져 갔다. 그러자 주위의 붉은 빛이 공명하며 진동했다. 곧이어 최인성의 그림자 안에서 튀어나온 그림자가 어딘가를 꿰뚫어 희미하게 ‘빛’을 만들었다. 일행이 빛을 뛰어넘었다.
“쿨럭, 쿨럭!”
모두 기진맥진한 상태로 귀환했으나,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붉은 방에서 탈출했다. 그랬더니 아까 있던 서재가 아닌 익숙한 복도에 떨어졌다. 복도가 일렁거리며 기분 나쁜 현상을 보였다.
전등도 없는데 전등이 깜빡이는 것처럼 어둠과 빛이 반복해서 나타나며 점멸한다. 주위가 진동하며 그림이며 화병이 떨어져 내린다. 깨어진 화병에서 물이 질척하게 흘러넘치고 그 물을 따라 꽃이 줄기를 뻗으며 피어난다.
기괴한 모든 현상이 그들을 향해 빠르게 가까워졌다. 그들은 붉은 가시나무 방을 탈출한 후에도 멈추지 않고 달렸다. 신음하는 최인성의 그림자에서 유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불안정한 최인성과 다르게 유이는 평소처럼 안정되어 있었다. 원래는 최인성의 그림자가 아니기 때문일까.
「내 등에 타라옹!」
유이는 평소 표범 모습을 취했을 때보다 더 거대했다. 여기 있는 사람이 다 타고도 남을 정도로.
일행이 재빨리 유이의 등에 올라탔다. 유이가 빠르게 달려갔다. 빠르게 지나치던 풍경이 어느 순간 휙 어두워졌다. 새카맣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마력의 기척은 물론이고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소영이 무심코 주먹을 꽉 쥐었다.
“…유이?”
그러나 손안에 닿는 털의 감촉만은 분명했다.
일행이 눈을 깜빡인 순간, 암흑이 씻은 것처럼 사라졌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파란색으로 채워진 물로 된 복도였다. 파란색 복도는 일렁이며 조용히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헉, 헉…….”
그림자가 작아지며 유이의 등 뒤에 타고 있던 이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또 새로운 길.’
최인성은 흐릿한 시야 속에서 다시 한번 정신을 잃었다.
이번에 기절한 것은 최인성만이 아니었다. 칼, 아진, 비앙카마저 기절했다. 가시나무에 휘말린 이들은 모두 정신력이며 마력이며 할 것 없이 힘을 극심하게 소비했다. 휴식을 취하면 힘이 회복되어야 하는데 환경 탓에 힘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는다는 게 참 곤란했다.
레비는 기절하기 직전인 상태면서도 비틀거리며 최인성에게 다가갔다. 걸을 때마다 바닥에서 찰박찰박 기분 나쁜 소리가 났다. 최인성의 상태는 명백히 이상했다. 겉으로 보기에도.
칸나의 안에서는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에너지원이 최인성의 안에서는 진득하게 녹았다. 피부에 드문드문 그림자가 눌어붙어 있고, 머리카락이 길어졌다.
“빼……내야…….”
“무리야. 이미 녹아들었어. 우리 힘으로는 못 빼내.”
“유이! 인성이는 괜찮은 거야?”
오시언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이소영이 다급히 평소대로 크기를 줄인 유이를 돌아보았다.
「좋진 않다옹……. 갑자기 과도한 힘이 흘러들어 오면서 그림자 역시 과도하게 흘러넘치고 있다옹. 그래도 아직은 그림자로 녹일 수 있는 크기다옹. 문제는…….」
유이가 꼬리로 바닥을 툭툭 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똑같은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될 거라는 거다옹. 나도 영도 힘내고 있지만, 이대로는 힘들지도 모른다옹.」
으득.
이소영이 세게 입술을 깨물었다. 당시 최인성은 트라던트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는 하나……설마 상황이 이렇게 악화될 줄 누가 알았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