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421
최인성은 지금 그림자에 사로잡혀 있었다. 지나온 길, 그 너머에 있는 새카만 ‘구멍’. 시야 안에서 구멍이 점점 커져 간다. ──사람을 끌어 들이고 있다.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유이가 최인성의 머리 위로 올라가 손바닥으로 최인성의 얼굴을 쳤다.
「정신 차려랑! 정! 신! 차! 려라옹!」
최인성이 얼굴을 붙잡으며 신음했다.
“…윽. 아야! 알았어, 정신 차렸어.”
일행이 최인성을 돌아보았다.
“뭐야? 왜 그래?”
“괜찮으세요?”
최인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을 보다가, 이내 신음하며 눈을 감고 시선을 피했다.
“앞에……무시무시한 게 있어. 검은……통로인가? 어쩌면 저것이야말로 이 공간의 ‘중심’일지도.”
“중심이라고?”
“그 정도로 무시무시하고 거대해.”
일행의 표정이 굳었다. 최인성은 그 힘에 동조하지 않기 위해 시선도 감각도 거기에서 최대한 멀어지려 노력하며 방금 느낀 감각을 입으로 전했다.
“새카맣고, 주위의 힘을 끌어당기고, 방출하고 있어.”
셰린과 코린, 이소영, 테온이 앞을 보며 집중했다. 그러나 최인성과 달리 그들은 무언가가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저 안에 사람이 있을까?”
“모르겠어. 다만 간다면.”
최인성이 침을 꿀꺽 삼켰다.
“만전 상태가 아니면 위험해.”
이소영이 혀를 찼다.
“아직 못 찾은 사람이 있는데.”
무르시엘은 그렇다 쳐도, 김미영, 스벤, 리카티, 모두 꽤 얼굴을 마주한 동료다.
셰린이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그렇다면……다음 영역으로 넘어가죠.”
“어? 아직 탐색하지 않은 곳이…….”
이소영은 말하다 말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곳은 넓다. 다른 곳은 한 번에 파악했던 최인성이 바로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그러나 최인성은 시계를 한 번 확인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여기를 마저 탐색하는 게 좋겠어.”
최인성이 시계를 내밀었다. 지금은 카드에 있는 비앙카에게서 받은 항주용 시계다.
시간의 흐름이 바깥과 조금 가까워진 덕분에, 현재 바깥에서는 2시간 30분이 지났다. 그렇다곤 해도 시간은 여전히 유동적으로 변하고 있다. 보라색 길 안은 특히 바깥에 비해 시간이 빠른가 보다. 이상한 검은 통로를 발견하기 전까지 몇 시간이나 탐색했는데 바깥에서는 채 10분도 지나지 않았다. 최인성이 트라던트에 심하게 동조한 이후 시간의 흐름이 느려졌는데도다.
다른 길과도 차이가 많이 난다. 여기에서 1시간이 지나도, 다른 길은 10분이나 지났을까. 그러므로 그들이 다른 길에서 3일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이 안에서는 그보다 몇 배나 되는 시간이 지났으리라는…….
셰린, 코린, 이소영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네가 말한 그, 중심을 닮은 검은 구멍 안도……그럴까?”
“모르겠어. 거기는 또 한 번 공간이 일그러져 있어서. 하지만…….”
“…….”
“여기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안 들어.”
이소영은 손을 꽉 모아 쥐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 검은 통로 안에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죽었을 가능성이 높아. 아무리 정화석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은하가 만든 전투복과 진화석이 있다 해도, 버틸 수……있을 리가.’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보다 훨씬 짧은 시간을 헤맨 이쪽 팀이 이미 기진맥진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렇지만, 그래도 혹시……남은 동료가 거기에 있다면? 지금까지 버티고 있다면? 하지만 희망을 안고 들어서기에 그 검은 통로는 만전 상태가 아니고서야 위험하다.
“알았어요. 그럼 남은 곳을 빨리 확인하고, 다른 통로에서는 더 빨리…….”
“최대한 빨리 찾아내야지. 그리고 한시라도 빨리 중심 같은 공간 안에 들어가야 해.”
이소영이 입술을 짓씹었다. 설마 같은 공간인데 이렇게까지 시간이 차이 날 줄은 몰랐다.
이소영이 바람을 더 불러왔다. 빠르게, 빠르게 날아간다. 몇 분, 몇 시간에 걸쳐 계속. 검은 통로만을 무시하고 빙 돌아 계속해서 나아갔다.
일행은 거의 하루에 걸쳐 보라색 길을 검은 통로만 빼고 전부 확인했다. 그사이 카드 안에서 몸이 회복된 비앙카와 레비, 보라색 길에서 기진맥진해진 코린이 자리를 교체했다. 쓰러지기 전 오시언이 카드를 수정해 그들이 쓸 수 있도록 조치해 준 덕분이었다. 셰린은 이소영이 빌려준 전투복 덕분인지 아직까진 버틸 만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탐색하는 동안 나온 사람은 딱 한 명, 비교적 약한 무르시엘 멤버로, 이미 죽어 있었다. 보라색 공간을 뒤로하며 일행이 불안을 곱씹었다.
“리카티, 스벤…….”
“미영 할머니…….”
최인성이 주위로 그림자를 퍼트렸다. 그림자를 퍼트릴수록, 마법을 쓸수록, 길의 어둠이 가까워지며 그를 유혹한다. 그는 이미 손톱도, 머리카락도, 눈도, 완전히 그림자에 물들었다. 트라던트에 점점 더 깊게 동화되는 것을 이젠 스스로도 확실히 자각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잘 보일 리 없다. 최인성은 ‘그것’과는 반대의 방향을 보며 눈을 떴다. 그림자의 세계는 점점 선명해져, 이제 길이 몇 개인지도 보인다.
검은 공간, 붉은 공간, 파란 공간, 녹색 공간, 그리고 여기 보라색 공간. 보라색 공간을 제외하면 탐지하지 못한 장소는 녹색 공간과 처음에 들러 그림자로 탐색하지 못하고 지나쳐 버린 검은 공간뿐이다.
“우선 검은 공간으로 갈게.”
일행은 또 한 번 이동했다. 최인성은 검은 공간에 내려서자마자 바로 그림자의 기척을 확인했다. 돌아다니는 사람의 기척은 없고, 그렇다고 죽은 사람의 기척도 없다. 그럴 거라 생각했다. 최인성은 이미 검은 공간에서 많은 사람과 합류했다.
바로 ‘에너지원’을 찾았다. ……없었다. 이곳에는 에너지원이 없다.
‘처음부터 없었던 건가.’
최인성은 지금까지 봐 온 길을 머릿속에서 조합했다.
‘그렇군. 검은 공간은 ‘현관’.’
검은 공간은 입구이자 현관, 붉은 공간과 파란 공간은 입구와 이어지는 내부 길, 보라색 공간은 최중심부다. 아직 가 보지 못한 녹색 공간은…….
‘최중심부와 이어지는 다리라는 느낌이군.’
“녹색 공간은 조금 조심해. 피해서 갈 생각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여기는 ‘함정’이 많은 것 같아.”
“인성 님, 성진 님의 가호는 아직 남았나요?”
레비는 그 말을 듣고 최인성의 몸부터 걱정했다. 최인성은 옅게 웃었다.
“그래. 내가 미쳤을 때 한순간 원래대로 되돌려 줄 정도는 돼.”
일행은 녹색 공간에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최인성은 그림자를 발견했다.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특정마저 했다. 특정하고 최인성은 흠칫했다. ‘그’가 설마 이곳에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때문에 인원수로 꼽지도 않았다.
최인성은 무의식적으로 그 기척을 향해 이동했다. 심지어 기척 옆에는 무르시엘 멤버가 한 명 더 있었다.
라샤와 하티크. 둘 다 무르시엘의 초기 멤버이며, 라샤는 무르시엘의 배신자다. 이 상황이 일어나기 전 동료를 제물로 바친.
생각하기 이전에 최인성의 마법이 멋대로 움직였다. 흉폭한 그림자가 라샤와 하티크를 얽맸다.
“으악!”
“큭!”
최인성은 라샤와 하티크의 그림자에 검을 박아 넣었다. 자신의 옆에 검을 박아 넣는 최인성을 확인하고 라샤와 하티크가 숨을 삼켰다.
“새벽…….”
“별무리…….”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최인성은 서늘한 눈으로 라샤와 하티크를 노려봤다. 유은하의 꿈은 단편적, 그래서 놓쳤나 보다. 무르시엘의 멤버 중에는 또 한 명 배신자가 있었다. 라샤와 하티크가 함께 움직였던 건 그래서겠지. 마침 지금 무르시엘 멤버는 전부 잠들어 있으니 거리낄 것 없다.
“잠깐……만요. 기분은 알겠지만, 여기에서는 싸워 봤자, 의미가…….”
“변명하지 않아도 돼.”
이소영이 최인성의 뒤로 천천히 다가왔다.
“이런 곳에 있었는데 둘 다 용케도 멀쩡하네. 여긴 말이지……셰린이나 오시언 정도의 특수한 실력자조차 힘들어하는 곳이라고?”
“그건……당신들도 마찬가지잖아요……?”
라샤가 소심하게 대꾸했다. 그러며 불안한 어조로 물었다.
“그런데, 그 유명한 셰린이 왜 여기에……?”
“션이 불길한 점괘를 뽑았거든요. 확인하려고 왔다가 여기에 갇혀 버렸어요.”
“그렇……군요.”
라샤가 셰린을 흘끔거렸다. 아까보다 훨씬, 진심으로 초조해하고 있다.
그림자로 물든 최인성의 시선이 냉혹하게 라샤와 하티크를 훑었다. 사실 트라베리아라면 같은 편이든 말든 상관 않고 배신자인 라샤마저 제물로 바쳤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닌가 보다. 그들은 명백히 이 공간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다. 그리고 그들이 그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원인은 바로 그들의 체내에 있는 ‘어떠한 것’이다. 술렁거리는 그림자가 최인성에게 진실을 알린다.
“트라던트로 만든 아이템을 먹었군. 오로지 당신들만, 이 상황에 대비해서.”
“……!”
“오는 길에 무르시엘의 멤버와 여럿 만났어. 죽은 자가 다수, 살아 있더라도 빈사 상태였지. 동료를 제물로 바치다니. 과연……‘뱀’다워.”
상황을 넘어가기 위해서라도 변명을 하려는 하티크와 달리 라샤는 가만히 최인성의 눈동자를 살폈다. 눈동자에 익숙한 적의가 묻어났다. 라샤의 특수능력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있는 직감, 더해 거짓조차 진실로 믿게 만드는 언령이다. 라샤는 최인성의 눈에서 흔들림 없는 진실을 읽었다. 이 사람에겐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 진실을 알고 있으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당신들과는……상관없는 일이에요. 어쩌다가 말려들어, 여기에 있는지는……모르겠지만…….”
“…….”
“덕분에 에리카 님이 즐거워하시겠네요…….”
라샤의 표정에서 조급함이 사라졌다.
“그래서, 트라베리아의 뱀, 여기서 뭘 하고 있었지?”
“뭘 하고 있긴요. 아시다시피 에리카 님은……실험 기록을 빼놓지 않으시는 분이시라…….”
이소영이 사납게 눈을 빛냈다.
“아하, 역시 네가 감시자였구나?”
“그러기 위해 아이템을 삼켰죠…….”
“너도 에리카의 실험체라는 생각은 혹시 안 했어?”
라샤가 입가에 조소를 띄웠다.
“그걸 알아볼 정도의 판단력이 있기에……그분들이 저에게 일을 맡기신 거예요…….”
“우릴 감시했다는 건, 여기에서 만난 것 역시 우연은 아니겠군요.”
셰린이 단호한 눈으로 라샤와 하티크를 주시했다. 라샤가 아까보다 좀 더 정중한, 혹은 긴장한 태도를 취했다.
“확실히 저희는 계속 감시하고 있었습니다만……이렇게 만난 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랄까……. 설마, 설마……최인성 씨의 동화가 이 정도까지 진행되었는지는 몰랐으니까…….”
“……!”
최인성이 라샤와 하티크 위에서 진득하게 살기를 드러냈다. 라샤는 조금 몸을 움츠렸으나, 천천히 말을 이었다.
“우리의 역할은 시간이 끝날 때까지의 감시와 조정……. 제 마법으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셰린 님과 오시언 님이 말려든 건 무척 예상외라 어떻게 할지 고민했지만, 일단 기절할 때까지는 지켜본다는 것으로……. 하지만 이 이상은 위험할 듯해, 두 분을 조만간 돌려보내려고 했습니다만…….”
“쓸데없는 참견이에요.”
셰린은 분이 오른 얼굴이었다.
“우린 이미 커븐 로드와는 적이에요.”
“네, 알고 있습니다만……저희의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저희는 아직 죽고 싶지 않고…….”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으면서. 하물며 우리가 무엇을 해도 막지 않았으면서!”
“그거야 상황이 에리카 님의 취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으니까요…? 특히 인성 씨가 이 성에 동화되고 있는 모습은……실로 에리카 님의 취향인지라…….”
“정말 악취미야!”
셰린의 표정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셰린이 아는 에리카는 그렇지 않았다. 에리카는 본래 셰린과 같은 트라베리아 소속이 아니었다. 마법에 아주 약간 재능이 있던 약사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약이 마법처럼 잘 듣는다는 이유로 가족과 함께 마녀사냥의 희생자가 되었다.
가족을 전부 잃고 망연자실해 말마저 잃었던 작은 아이를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없는 사이 옛 친구이자 동료는 끔찍하게 변하고 말았다. 피와 저주에 얼룩져 악귀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 그럴 때가 아닌 것 같네요……. 그럼, 잠시 후에 다시…….”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최인성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주위 그림자가, 혹은 공간 전체가 움직였다. 라샤가 식은땀을 흘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순간, 최인성의 몸이 멈추고, 라샤와 하티크의 몸이 보라색으로 빛났다.
“동화 상태를 충분히 이용하고 계신 모양이지만……그래도 아직은, 이 힘이 더 영향력이 강해요……. 거기다, 여기서 싸울 틈은, 없으실 듯한데.”
“뭐라고?”
“보라색 공간 안에 있는 심연에 갇혀 있는 에너지원은…….”
라샤가 긴장한 얼굴로, 그러나 입가를 끌어 올려 웃었다.
“당신들의 동료를 포함해, 5명, 이니까요…….”
“……!”
일행은 숨을 들이켰다. 현재 찾지 못한 무르시엘 멤버는 하티크를 빼면 3명, 동료도 3명이다. 더군다나 그중 리카티는 이러한 기운에 극히 취약하다.
“저랑 싸우면, 꽤 시간이 소비될 텐데……. 확실히 여러분은 강하지만, 저도 만만치 않다는 거,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해요…….”
“……망할!”
이소영이 주먹을 꽉 쥐었다. ──분하지만 그 말대로다.
라샤는 무르시엘의 초기 멤버이며, 무르시엘 멤버 중에서도 열 손가락에 꼽히는 실력자다. 즉 S랭크 상위 마법사다. 물론 여기에 있는 이소영도, 최인성도, 셰린도 S랭크 상위 마법사이나, 라샤는 멀쩡하고, 그들은 힘과 정신력을 상당히 소비했다.
“다들 목숨이 간당간당한데……죽이는 것과 살리는 것, 어느 쪽을 우선하시겠어요?”
최인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림자를 통해 속내를 읽는다. 저들이 말하는 것은 진실, 그렇다면 보라색 검은 통로 안에 삼켜진 동료들은 아직 살아 있다. 한없이 낮은 생존 가능성을 붙잡은 것은 아마…….
‘미영 씨……겠군.’
“인성아!!”
이소영이 목소리를 높였다. 최인성은 천천히 그림자에 박아 넣은 검에서 손을 뗐다.
“……가자.”
최인성이 그림자를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눈을 빛낸다.
이소영의 바람과 최인성의 그림자, 두 사람의 마법이 동시에 라샤와 하티크를 강타했다. ──초록색 ‘공간’에는 더 이상 그림자가 없다. 다만 에너지원이 한 개. 최인성은 동료들과 함께 바로 이동했다.
“큭!”
라샤가 탑 안의 힘을 끌어모아 결계를 펼쳤다. 녹색 결계가 최인성의 그림자에 얻어맞자 오래 견디지 못하고 흩어졌다. 마법이 사라진 자리에 새벽별무리 일행은 없었다.
“…….”
라샤는 긴장한 눈으로 그림자에 침식된 손을 보았다. 라샤와 하티크는 이 탑을 만든 주인 에리카에 의해 관리자의 자격을 부여받았다. 그런데 최인성의 영향력은 이미 그들을 뛰어넘고 있다.
‘다음에 만날 때는……정말로 조심하지 않으면…….’
원래 라샤와 하티크는 그들과 만날 생각이 없었다. 한계까지 힘을 소모했을 때, 그렇게 출구도 없이 쓰러졌을 때, 오시언과 셰린만 몰래 바깥으로 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최인성이 먼저 그들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라샤……이 검…….”
라샤가 생각에 잠긴 사이 하티크는 그림자에 박힌 검을 뽑기 위해 한껏 힘을 쓰고 있었다. 그림자 검은 하티크에 이어 라샤가 힘껏 동조해서야 겨우 뽑혔다. 그러고도 한동안은 몸이 마비되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이어 라샤가 마법을 열었다. 금색 테두리 안에 영상이 비친다. 선명했던 영상이 이내 흐려졌다.
처음에는 잘 보이던 관찰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것도 이 안에서 최인성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는 증거다. 그건 즉…….
“다시 만나면 위험하겠지만……아무래도 먹히는 게 먼저일 것 같네…….”
하티크가 라샤의 뒤로 다가왔다. 라샤는 치직치직 흐려지는 화면을 손으로 천천히 쓰다듬었다.
이동한 직후 일행이 조금 안심한 것은 제일 걱정되었던 이를 찾았기 때문이다.
녹색 우리에 갇혀 힘을 빼앗기고 있는 것은 한 사람, 길쭉한 귀를 가진 로지인 동료, 리카티였다.
로지인인 리카티의 마법은 ‘신성한 나무’다. 그의 마법은 고향인 로지에 있던 특별하고 아름다운 나무에서 따왔고, 그 능력에 거의 한정되어 있다. 그런 만큼 순수하고 마력 이상으로 강한 마법이나, 그런 순수한 마법도 트라던트의 더러움을 이길 수는 없었다.
“리카티!”
비앙카가 다급히 녹색 우리를 향해 달려갔다.
쿵!
그러나 비앙카가 일정 이상 다가간 순간 보이지 않는 벽이 비앙카를 막았다.
“큭! 방어 막인가?”
“이건…….”
이 안에 익숙해진 최인성의 눈에는 기술의 숨겨진 모습이 훤히 보였다.
방벽으로 된……미로다. 저 우리는 가까이에 있는 것처럼 보여도 아니다. 저것은 허상, 아니, 허상이라기보다는 유리에 비쳐 반사된 모습이다. 더해 저 마법을 이루고 있는 방벽을 만드는 것은 아래에 있는 줄기 식물들이다.
“하아앗!”
비앙카가 성급하게 도끼를 들고 휘둘렀다. 그러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뒤이어 테온이 지진을 일으켰으나, 투명한 방벽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었다. 애초에 영향이 있더라도 테온과 비앙카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리라. 셰린이 투명한 벽에 손을 올리고 관찰했다.
“깨기에는 너무 단단해요. 정말 온 힘을 다해야 가능할 거예요. 으음, 여기서는 저 두 사람과 전혀 교감이 되지 않네요.”
“따라와.”
고민하는 일행에게 최인성이 지시하며 몸을 돌렸다. 이소영이 최인성의 어깨를 붙잡았다.
“잠깐.”
“왜?”
“전력이 적은 판에 좀 힘들긴 하겠지만……그래도 넌 역시 저기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게 낫겠어.”
“음…….”
최인성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납득했다. 최인성의 상태는 점점 좋아지는 것과 동시에 점점 나빠지고 있다. 정신력, 체력, 마력이 안정되었으나 그건 이 공간과의 동화 상태가 안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력이 트라던트에 확실하게 익숙해져, 이제는 몸이 저항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
“그럼 아까처럼 유이만 보내고 나는 여기에 서 있을게.”
“이번엔 제가 옆에 붙어 있을게요~.”
레비가 최인성의 팔을 끌어안았다. 일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인성은 곧 유이를 소환했다. 최인성과 레비를 제외한 일행이 유이를 따라 미로 안에 들어선다. 곧 방벽의 효과에 따라 일행의 모습이 사라졌다.
“으음~, 파장이 어지럽게 반사되고 있어서 아무리 저라도 파악하기가 어려운걸요~? 인성 님은 다 보이나요?”
“보여.”
레비는 먼 곳을 향하는 최인성의 시선을 날카롭게 살피며 끌어안은 팔에 더 힘을 주어 밀착했다. 레비가 최인성의 팔을 끌어안은 건 단순한 스킨십이 아니다. 최인성의 파장은, 트라던트에 푹 물든 주제에 무섭도록 안정됐다. 마치 그것이 최인성의 원래 파장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래서일까. 카드에 들어갔다 나온 후부터 최인성의 파장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이건 아주 희미한 조짐도 놓치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최인성은 말없이 일행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미로의 모든 구조가, 마력을 따라 움직이는 그림자가 보인다. 유이의 감각이 최인성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유이와 최인성의 그림자 사이를 영이 헤엄친다.
이소영 일행이 녹색 우리 앞에 다다랐다. 비앙카가 온 힘을 다해 도끼를 내질렀으나, 이번에도 방어 막에 튕겨 나갔다.
일행이 우리를 다양한 방법으로 공격했다. 셰린이 일행의 힘을 연결하며 증폭한다. 이소영의 바람이 진동하고, 테온의 주위로 적갈색 마력이 모여들었으며, 비앙카의 도끼에 보라색 마력이 퍼졌다.
최인성의 그림자를 통해 유이에게로 힘이 흘러 들어갔다. 유이가 사납게 입을 벌렸다.
다들 초조한 기색이었다. 최인성은 주먹에 꽉 힘을 줬다.
‘이러는 동안에도 보라색 길에선……. 저 우리가, 열리기만 하면…….’
최인성의 의지와 함께 주위의 그림자가 어렴풋이 일렁거렸다. 그 힘이 최인성의 그림자를 타고 가라앉은 탓에 레비는 바로 눈치채지 못했다.
최인성은 녹색 우리를 주시했다. 우리를 보면 볼수록, 최인성의 눈 안에서 그림자가 선명해졌다. 일렁거리는 힘 사이로 무언가가 반짝였다. 그것은, 두 에너지원을 가둔 우리의 중심에 있는 것으로, 작은…….
‘……열쇠 구멍?’
최인성의 생각과 동시에 그림자가 움직였다. 유이의 그림자와 녹색 우리의 그림자가 연결되더니 그림자와 그림자 사이에 작은 열쇠가 생겨났다.
“……어?”
그것은 생각해서 만든 기술 따위가 아니라 극히 자연스럽게 일어난 현상이었다. 유이의 등에서 검녹색 날개가 뻗어져 나왔다. 유이가 이 현상을 경계하기 위해 만든 날개다. 그러나 열쇠는 아랑곳하지 않고 녹색 우리에 꽂혔다.
찰칵.
열쇠가 꽂힌 순간 우리를 중심으로 마력이 흘러갔다. 열쇠에서 시작된 마력이 녹색 우리의 모든 부위를 스치고, 미궁을 만들고 있는 식물로 흘러가, 이 방 안에 있는 모든 요소에 한번 빛을 부여했다. 중심에서 시작된 빛은 끄트머리부터 사라져, 빛이 사라진 부근은 힘을 잃었다. 미궁을 이루고 있던 방벽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욱…….”
그 광경을 레비가 경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최인성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놀랍다. 경악스럽다. 이 원인이 무엇인지는 뻔하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다’.
아까 공명했을 때처럼 이질적인 느낌도 없고, 그렇다고 구역질이 나지도 않는다. 손바닥으로 입을 가린 것은 마음에서 나온 반사적인 행동일 뿐, 마력은 지독히도 평온하게 가라앉아 있다.
일행이 당황하는 가운데 마찬가지로 당황하던 유이가 일단 이 장소에서 빨리 빠져나가자 싶었던지 우리 안에서 리카티를 향해 그림자를 뻗었다.
「일단은 구하고 보겠다옹!」
유이의 손이 리카티에게 닿았다. 그 순간…….
스르륵
그것은 마치 비가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듯, 시간이 멈추지 않고 흘러가듯, 바람에 의해 나뭇잎이 흐트러지듯.
그토록 자연스러웠다. 리카티의 가슴 안에서 떨어진 에너지원이 그대로 유이의 그림자 안에 스며들었다.
정확히는 유이와 연결된 영, 그 바탕에 있는 최인성의 그림자에.
“아…….”
최인성은 무심코 주먹을 쥐었다 폈다. 기이할 정도로 자연스러워 일어난 현상의 의미를 깨닫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어?”
아무 일도 없었다.
가슴이 아프거나, 힘이 요동치거나, 아니면 기절하든가, 다른 힘을 받아들였을 때 응당 따라오는 그런 감각이 조금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저 원래부터 있었어야 했던 것을 받아들인 것처럼 고요했다.
“잠깐……!”
침묵을 깬 것은 이소영이었다. 이소영이 다급히 유이를 붙잡고 흔들었다.
“유이! 너 괜찮아?”
「아, 아무렇지도……않다……옹…….」
“레비!!”
“아무……느낌도, 안, 들어요…….”
레비가 최인성의 팔을 꽉 끌어안은 채 대답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잘 동요하지 않던 레비의 얼굴에 식은땀이 맺히며 긴장이 서렸다. 이소영이 마지막으로 셰린을 돌아보았다.
“셰린!”
“…….”
셰린이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다만……. 셰린이 최인성을 보며 참담한 감정을 눌러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