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423
통로의 끝에 다다른 이소영 일행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건물 안이 아니라 동굴을 닮은 공간에 내려섰다. 주위가 온통 보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틀림없다, 트라던트다. 보석들이 기둥과 벽, 천장을 이루며 끝없이 늘어섰다. 미로나 다름없다.
서로를 연결한 마법은 이소영과 오시언의 것이었다. 두 사람은 내려서자마자 곧바로 최인성의 기척이 사라진 것을 느끼고 당황했다.
“인성아!”
“인성 씨!”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마법으로 탐색했지만 최인성의 기척도 마력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지금 일행은 마지막 구출 작전을 위해 이 공간에 한번 깊게 동화되어 제 상태가 아닌 칸나나 리카티를 제외하고는 전부 카드 바깥으로 나와 있는 상태다. 새벽별무리와 오시언 일행은 온갖 마법을 사용해 최인성을 탐색했다. 이소영은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페어 링과 교감했다. 그러나 전혀 연결되지 않았다. 결국 그 누구도 최인성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몰라도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는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이 공간이 인성 씨를 부른 거야. 여태까지 몇 번이나 그랬듯이.”
탐색이 제대로 듣지 않는 공간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밖에 없었다.
일행은 가장 탐색에 뛰어난 이소영의 정령과 오시언의 점술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걸어도 걸어도 같은 풍경뿐이었다. 트라던트로 이루어진 돌기둥, 주위를 맴도는 보라색 안개, 클러스터.
힘의 소모가 극심했다. 안개가 그들의 마력과 정신력을 무섭게 빼앗았다. 다행히 그들은 생각보다 빨리 동료들이 갇혀 있는 보라색 공간의 ‘중심’을 발견했다.
김미영, 스벤, 라쿤, 페르카니, 샴페인 다섯 명은 동그란 보석 안에 갇혀 있었다. 그 주위를 클러스터가 고치처럼 감쌌다.
그들이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모두의 목숨이었다. 곧바로 이안이 대답했다.
「멀쩡한데요? 생각보다 상태가 많이 괜찮아요.」
“응? 정말?”
「네. 동화도 심하지 않고, 소모된 마력도 적습니다. 아마……‘가호’ 덕분인 것 같아요.」
“가호……. 아! 얼음의 성물!”
“혹시 폴리젠의 성물인가요? 마음에 안 들지만 폴리젠의 피는 확실히 대단하죠.”
“틀림없어. 얼음의 성물이야. 다, 다행이다…….”
더군다나 얼음의 성물은 이번에 한해 김미영만이 아니라 같이 보석에 갇힌 다른 이들까지 지켜 준 모양이다. 셰린이 갇혀 있는 일행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반색했다.
“그 덕분인지 에너지원이 아직 심어지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제 힘이 다한 것 같네요.」
“성물이 부서질 정도라면 상당히 오랜 시간 여기 갇혀 있었다는 거겠죠.”
“과연 여기 시간은……어라?”
“무슨 일이야?”
이소영이 의아한 눈으로 비앙카를 돌아보았다. 마찬가지로 시간을 확인한 테온이 눈을 크게 떴다.
“시간이…….”
테온이 짧게 숨을 삼켰다.
“시간의 흐름이 달라졌습니다.”
비앙카가 눈을 크게 뜨고 시간을 확인했다. 이곳의 시간과 바깥의 시간, 보라색 공간 안에 들어오고 지나간 시간, 움직이는 초침.
“시간이 갑자기 바깥과……같아졌어. 아니, 오히려 느려졌어. 바깥의 시간이 좀 더 빨라.”
“뭐? 갑자기 왜…….”
“인성 씨……때문이겠지.”
“……!”
오시언의 말에 이소영은 숨을 삼키며 양손을 꼭 감싸 쥐었다. 불길해도 너무 불길했다. 바깥의 시간과 트라던트 안의 시간이 비슷해졌다는 것, 그것은 즉……최인성과 이 장소의 동화가 훨씬 더 심해졌다는 이야기다. 최인성이 원하는 대로 공간이 변화하고 있다는 소리니까.
쿠구궁…….
그때 어디선가 진동 소리가 들렸다. 천장이 흔들리며 보석 가루가 떨어진다. 일행은 불안을 느끼며 고치를 주시했다.
“눈에 보이는 것부터 하자. 저 사람들을 고치에서 빼내야 해.”
“응.”
시야공유마법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고치가 무척 단단하고 강하다는 것뿐이었다. 먼저 공격을 개시한 것은 이소영이었다.
“리브, 증폭.”
언령과 함께 이소영의 앞으로 작은 갈은색 덩어리가 나타났다. 유펠라에게서 이어받은 마법, ‘요정’의 힘이다. 이안이 이소영의 의지를 따라 날개를 펼치며 이소영의 바람에 합쳐졌다.
“이소영의 바람, 소환!”
이소영은 힘을 아끼지 않았다. 이소영에 이어 다른 마법사들도 공격을 준비했다. 그런데 고치 위로 보석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날개가 나타나더니 이소영의 마법을 갈기갈기 잘라 뿌리쳤다.
안개를 뿌리는 날개는 곤충의 것이었다. 보라색의 반투명한 보석 같은 질감의 날개, 더듬이와 잔털, 보라색 나방이다.
“그렇지! 아무것도 없을 리가 없지!”
“내리쳐라!”
셰린의 외침과 함께 하늘에서 빛이 떨어졌다. 빛은 정확히 날개로 떨어져 보라색 힘을 진동시켰다. 셰린은 마법으로 공격하면 할수록 상대의 마법을 깊게 파악할 수 있다. 그녀의 마법은 ‘파고든다’.
하지만 파고들기 전에 힘이 흡수당했다.
이소영의 몸이 점점 바람으로 흐트러졌다.
“고치를 부술 사람과 나방을 막을 사람으로 나누는 게 어떨까?”
“좋네요, 그거.”
일행 중 가장 강한 것은 오시언이다. 그다음이 셰린, 테온, 이소영. 이소영과 테온의 실력은 이제 거의 비등비등하다. 거기다 넷 다 이 공간의 특수성을 어느 정도 상대할 수 있다.
셰린과 테온, 오시언과 이소영을 중심으로 팀을 나눴다. 셰린과 테온이 나방을 막고, 그사이 오시언과 이소영이 우리를 부술 것이다.
시간은 여전히 바깥이 더 빠르다. 바깥에 있는 동료들이 구출해 줄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 그러나 새벽별무리는 본래 자신의 위기는 자신이 처리한다.
적어도 동료들을 저 고치 안에서 구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달려 나갔다. 그 순간…….
키이이이익──!!
“욱…….”
퍼지는 보라색 안개, 그와 함께 주위를 진동시키는 음파.
마력의 크기도 마법의 강함도 대부분 무시하는, 오로지 정신만을 똑바로 찢어발기는 마법이다. 강대한 정신력과 정신마법을 가지지 않고서야 대항할 수 없다.
“……!”
괴음이 내질러진 순간 일행 중에서 비교적 약한 무르시엘 멤버는 대부분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꺄악!”
“으윽!”
이소영은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며 무너지려는 몸을 겨우 버텼다. 파직파직, 정신보다 먼저 마법이 깨져 나간다. 마법 위로 스파크가 튀었다. 방금 전 터진 충격파를 견딘 것은 기껏해야 셰린, 오시언, 테온, 이소영, 코린, 무르시엘에선 후안뿐이었다. 레비와 비앙카도 당했다. 바삭바삭 조각난 마법처럼 정신 역시 바삭바삭 조각났다.
“흐윽…!”
이소영이 신음했다. 가면의 시야공유마법 너머로 무언가가 조각나 떨어졌다. 이소영은 곧바로 요정을 불렀다.
“솜!”
본디 유펠라의 요정인 솜은 유은하나 소니아와 마찬가지로 꿈을 보는 요정이다. 단순히 정신을 다루는 요정이 아니다. 꿈을 본다고 표현할 만큼 특별하다. 요정들의 힘은 정령들처럼 독립되어 있고, 더군다나 솜은 정신 에너지를 무척 좋아하여 유은하의 꿈 조각을 자주 먹었다.
요정들은 오랫동안 유펠라의 마법을 유지하며 힘과 영혼을 소모한 탓에 성장이 느려 아직 이소영의 마법을 따라잡지 못했는데, 그중 그나마 가장 힘을 회복한 요정이 바로 솜이다. 정신 전문 마법이기 때문에 가장 쓰기 어려운 요정이기도 하지만.
“떨어진 꿈 조각, 전부 모을 수 있겠어?”
「힘낼게!」
요정의 의지는 기본적으로 이소영과 이안한테밖에 들리지 않는다. 솜의 주위로 오색 수정 조각이 나타났다. 개중 몇 개는 유은하의 꿈 조각이었다.
파지지지지직─!
유은하는 꿈을 복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조각나 잃어버린 꿈 조각은 복원하기엔 시간이 많이 걸린다.
퐁…퐁…….
아무리 정신력과 생명력을 흐트러트리는 공간이라 할지라도 꿈에 정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으나, 이소영의 예상은 틀렸다. 이소영은 솜을 통해 꿈을 보았다.
‘꿈’이다.
꿈이 펼쳐져 있다.
“윽…….”
이 세계 위로 이 세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보인다. 꿈에서 나타난 그림자 같은 것이 모두의 꿈 조각을 먹어 치우고 있다.
퐁….
화아아악─!
나타난 꿈 조각과 힘을 합치며 솜이 꿈의 영역을 펼쳤다. 영역이 트라던트의 꿈을 밀며 커졌다. 그러나 그 직후─.
키야아아아악!
셰린과 테온은 충분히 몸을 가누고 있었고, 정신이 부서진 후에도 곧바로 나방 괴물을 제어했다. 깨어진 정신을 유지하기 위한 환경과 교감을 뿌리며.
그때 다시 한번 나방이 정신파를 내질렀다. 나방을 중심으로 흩뿌려지는 보라색 보석 조각, 꿈과 마법을 조각내는 정신파. 정신파가 교감을 파고든다. 테온의 주위를 둘러싼 환경과 오시언의 형상의미마법이 만들어 낸 의미가 산산조각 난다. 마법의 의미까지 깨부수어, 그 마법을 쓸 수조차 없을 정도로.
‘안 돼─!!’
그 무시무시한 꿈마법에 제대로 저항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정령의 가호와 솜의 보호를 받고 있는 이소영뿐이었으나…….
쩡….
결국 솜의 빛에도 금이 갔다. 이소영은 눈앞에서 조각나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장갑 위로 그녀의 정신체가 조각나는 게 어렴풋이 보였다.
최인성은 거대한 검을 휘두르는 가디언을 향해 그림자를 날렸다. 그림자에서 전도된 전기가 가디언의 위로 흩뿌려졌다. 분해하고 얽매는 전기와 본질을 공격하는 그림자. 휘둘러지는 대검은 실체가 없는 그림자를 당연하다는 듯이 쳐 내거나 잘라 냈고, 대검 주위로 보라색 수정이 흐트러지며 최인성의 그림자를 뒤흔들었다.
쿠구구궁….
두 사람의 마법이 격렬하게 부딪쳤으나, 이상하게 반발이 적었다.
“유이!”
「흡수는 안 된다옹! 위험하다옹!」
“알고 있어!”
계속 공격하는데도 아무 타격도 받지 않은 듯한 가디언의 모습에 가슴으로 초조감이 내달렸다. 반면 의아하기도 했다. 가디언의 공격 역시 최인성의 몸에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최인성이 그림자를 움직여 유이의 발톱을 휘둘렀다. 유이는 마법을 흡수해 주인의 힘을 더해 주는 역할도 있지만 동시에 마법을 해석하고 분해하는 힘도 가지고 있다. 『별의 고래』 시험판다운 능력이다.
유이의 그런 해석능력은 최인성의 특수 기술과 잘 맞물려, 최인성은 전보다 남의 기술을 그림자로 복사해서 사용하는 데 능숙해졌다.
“암신의 방패!”
최인성이 그림자를 사용하자 공간의 마력이 함께 일어나 최인성의 그림자에 휘말렸다. 조금씩 시작된 그 휘말림의 범위는 시간이 지날수록 넓어졌다.
채재재쟁!
그건 가디언도 마찬가지였다. 최인성과 달리 가디언은 처음부터 주변의 힘을 검에 휘감아 사용했다.
“체인 라이트닝!”
하늘에서 떨어진 그림자 번개가 보라색 보석을 깨부쉈다. 깨부순 힘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최인성의 그림자에 스며든다.
‘이상해.’
이상했다. 무엇이 이상한가 묻는다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이상했다.
현재 최인성의 실력은 S랭크 상위에 겨우 발을 디딘 정도다. 반면 이 공간은 S랭크 30위 후반 실력자인 오시언과 셰린조차 부술 수 없는 장소다. 그리고 저자는 이곳의 가디언이다.
그런데 어째서 전혀 질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을까. 왜 최인성은 이렇게 대등하게 가디언과 싸울 수 있을까. 왜, 가디언의 그림자가 꿰뚫려 보일까.
쿵……쿵…….
“강탈.”
최인성은 본능적으로 행했다. 가디언이 쥐고 있는 검을 복사해 손안에 쥐었다.
“이제 네 검은, 쓸 수 없어.”
최인성의 기술, ‘강탈’은 상대의 마법에 깃든 그림자를 빼앗아 자신이 복사한 마법을 진짜로 만드는 것이다. 가디언이 쥐고 있던 검이 손에서 무너졌다.
「…이……가…….」
「안……다…옹……. 인성 님!」
머리가 몽롱해지고, 가디언의 모습만이 오롯이 선명해졌다. 반면 유이와 영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희미했다.
쩌적─.
공간에 금이 가며 최인성의 옆으로 보라색 보석이 몇 개 떨어져 내렸다. 최인성이 몽롱한 눈을 감았다 떴을 때, 가디언은 어느새 최인성의 코앞에 서 검을 쥐고 있는 최인성의 손목을 감싸 쥐고 있었다.
“나는 가디언. 이 공간의 방어 기제일 뿐이다. 감정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심어진 것, 나는 ‘심연의 탑’에 따를 뿐 그 이상은 될 수 없어.”
목소리와 함께 가디언의 메마른 표정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당신은 달라. 이 장소에 ‘선택’받았거든.”
쩌적, 쩌적──.
주위의 분위기가 이상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데도 어째서인지 최인성은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몸이 소리를 내며 굳는다. 아니, 오히려 안개가 되어 흩어지는 것 같다. 거대한 중력에 짓눌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허공에 붕 뜬 것 같기도 하다. 몽롱해진 눈을 애써 감지 않는 최인성을 바라보던 가디언이 손을 움직였다. 자유로운 오른손을 들어 최인성의 뺨을 옅게 쓰다듬었다.
쩌정
세계가 깨어졌다.
쩌저저적!
이소영이 솜과 함께 가까스로 세 번째 정신파를 막고 있을 때였다. 허공이 깨어지며 그 안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추락했다.
‘허공’, 그러나 보통 사람이 볼 수 있는 실질적인 허공이 아니다. ‘꿈’이 깨지며 두 그림자가 떨어졌다. 흐릿했던 그림자가 솜을 통해 명확해졌다.
“인성아?”
위에서 최인성의 손목을 잡고 같이 떨어지던 가디언이 눈을 굴려 이소영을 보았다. 이름을 부른 순간 솜의 꿈과 최인성의 꿈이 연결됐다. 공간의 한 겹 위, 꿈속에서 최인성의 몸이 바닥에 늘어졌다. 어쩌면 바닥이 아니라 허공이었는지도 모른다.
최인성이 있는 장소를 중심으로 이소영이 있는 현실에도 금이 갔다. 주위를 이루고 있는 기둥이 조각나 허공에 떠오르고, ‘공간 아래’ 현실에 있던 고치마저 부서지기 시작했다.
“인성아!”
이소영이 다급히 최인성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커다란 나방이 꿈을 넘나들며 그 앞을 막아섰다. 이소영은 쓰러진 동료들과 함께 뒤로 밀려났다. 날아가는 동료들을 바람으로 끌어모았으나, 이 돌풍은 바람이자 바람이 아닌 꿈이기 때문에 쉽게 붙잡을 수가 없었다.
보석 고치가 부서지며 그 안에 묶여 있던 김미영 일행의 몸이 바닥으로 털썩 쓰러져 내렸다.
이소영은 눈을 크게 떴다. 가면 너머로 꿈과 마력이 움직였다. 부서진 고치와 기둥의 마력이 꿈에 섞여 한데 모였다. 고치에 갇혀 있던 일행 안으로 스며들었던 이 공간의 마력과 꿈 역시 꿈 뭉치를 향해 빨려 든다. 지독히도 불길했다. 이소영은 필사적으로 외쳤다.
“인성아! 인성……유이! 영! 막아─!!!”
이소영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최인성 뒤로 그림자가 지지직거리며 일어났다. 그러나 그 움직임은 공간의 흐름에 휘말려 부서졌다.
그리하여 허공에 보라색 ‘에너지원’이 만들어졌다. 가디언이 고개를 숙여 최인성의 귓가에 속삭였다.
“자, 주인님. 깨어나십시오.”
‘주인님?’
이소영이 눈을 크게 떴다. 가디언의 몸이 그림자로 흐트러지며 최인성 위에 흩뿌려졌다. 무섭도록 빛나던 보라색 에너지원이 최인성의 안에 떨어지듯이 스며들었다.
“……!”
마력 폭풍이 훨씬 거세졌다. 어느새 보라색 공간은 원래의 형태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기둥과 벽은 조각으로 흐트러져 폭풍을 따라 흔들리며 빛난다. 일정하게 휘몰아치던 바람이 한순간 불안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최인성을 중심으로 보라색 꿈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솜!!!”
파도처럼, 짙은 물감처럼 흘러넘치는 마력을 솜이 막아섰다.
솜의 힘으로는 잠시 막는 것이 최선이었다. ‘힘’을 상징하는 요정 리브와 정령 이안이 요정에게 힘을 부여했다. 그래도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완전히 쓰러진 듯했던 최인성이 풍선 인형처럼 흐느적흐느적 몸을 가누며 허공에 발을 디뎠다. 흘러넘치는 파도 속에서 최인성이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무언가를 뱉는 게 보인다. 마력……그림자다.
보라색 힘이 한층 짙어졌다. 최인성의 몸이 꿀렁꿀렁 꿈의 힘을 뱉어 냈다.
“큭.”
이소영은 파도에 휩쓸리면서도 애써 손목에 손을 뻗었다. 페어 링이 발동되자마자 페어 링을 통해서 무지막지한 에너지가 이소영을 향해 파고들었다.
“악…!”
빠직! 빠지직!
온몸이 부서질 것 같다. 이 전류는 정신을 직접 관통한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 이소영은 온 힘을 다해 페어 링에 ‘마음’을 부여했다.
“최인성! 정신 차려!!!”
온 힘을 담은 언령, 페어 링을 따라 정령의 가호가 연결됐다. 이소영의 마력, 영혼, 정신력이 한순간 심연의 힘을 밀어냈다. 최인성의 손목에 있는 페어 링이 어렴풋이 갈은빛을 띠었다.
「으…….」
솜의 힘이 점점 약해지며 뒤로 밀려났다. 이소영의 몸이 조금씩 파도에 잠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력’은 선명히 보였다.
「으──아아아아악─!!!」
보라색 마력이 주위를 심해처럼 덮고 있었고, 그렇기에 그 목소리 역시 공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머릿속에 직접 울려 퍼졌다.
최인성의 목덜미에서 주황색 인장이 선명하게 빛났다. 주위를 뒤덮은 심연의 보라색에 뒤덮여도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하고 선명한 빛깔이었다.
목에서 시작된 ‘가호’는 이윽고 불꽃처럼 옮겨붙으며 최인성의 온몸을 뒤덮었다. 이어서는 그림자로 타고 내려가 이 탑에서 비롯된 ‘심연의 마력’마저 활활 태워 갔다.
「먹히게 놔두지……않겠다옹!」
심연의 마력에 먹혀 희미해졌던 최인성의 검녹색 마력이 색을 되찾았다. 최인성의 뒤에서 유이의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콰과과과과!
그 순간 심연의 마력이 펑 터지듯 분산했다. 이소영은 파도에서 벗어나 자리에 주저앉았다.
“켁! 쿨럭, 쿨럭!”
이소영은 정신없이 마력을 추스르며 금이 간 손을 감쌌다. 그러나 중요한 건 자신의 별거 아닌 부상이 아니다. 이소영은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동료들은? 고치에 갇혀 있던 김미영이나 스벤은?
“윽……쿨럭!”
철퍽!
몽롱한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명히 들린 소리에 이소영은 앞을 보았다. 하늘에서 트라던트 조각들이 반짝거리며 떨어져 내린다. 그 사이에서 최인성이 고개를 숙인 채 기침하고 있었다. 기침할 때마다 입 안에서 마력이 한 움큼씩 쏟아진다. 가호는 그치지 않고 이 공간을 상징하는 심연의 보라색 힘과 함께 타올랐다.
“인성아!”
기침하던 최인성이 고개를 들었다. 이소영은 최인성의 모습을 확인하고 흠칫했다.
목 뒤만 듬성듬성 길어졌던 머리카락이 어느새 온통 길어져 허리까지 흘러내리고 있다. 검녹색이었던 머리 색은 보라색과 검녹색 사이에서 점멸하듯 바뀌기를 반복한다. 눈은 검은색에, 눈동자는 보라색과 녹색의 오드 아이다.
최인성이 또다시 기침하고, 그림자에서 유이가 튀어나왔다.
“유이야! 인성, 인성이는…!”
「가호……덕분에, 겨우……나랑 영이 잡아 삼킬 수 있었다옹……. 하지만……이제 이 탑의 모든 힘은……꿈은……인성 님을 중심으로…….」
그림자 안에서 또 한 마리의 짐승이 튀어나왔다. 영의 본체는 사실 최인성과 꼭 닮아 있으나, 지금은 늑대나 그보다 작은 개 형상을 선호한다. 어차피 그들은 그림자. 어떤 모습으로든 바뀔 수 있다.
「결국 그렇게 되어 버렸다. 최인성이 이 공간의 ‘주인’이 되어 버렸어.」
“뭐?!”
「덕분에 이곳에 대해서 조금 알게 됐다옹. 이곳의 이름은 ‘심연의 탑’. 여기는……은하 님의 ‘이트리’에 대응하기 위해 만든 공간이다옹.」
“……뭐?”
이소영이 또 한 번 눈을 부릅떴다. 최인성이 지친 얼굴로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꿈……을…….”
솜은 이미 힘을 다하고 들어갔다. 그래서 이소영은 최인성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다만 불안했다.
주위 공간이 최인성의 마력인 검녹색으로 물들어 간다. 흩어지던 트라던트 조각들이 수정으로 합쳐져 바닥에 떨어진다. 심연에 묻혔던 사람들의 몸이 떠오르며 빛났다. 이제 보니 오시언의 카드는 대부분 힘을 잃은 상태였다. 가공 봉인만 겨우 유지되고 있다. 최인성의 안에서 나온 반짝이는 것이 사람들의 몸을 감쌌다.
「조각난 꿈을 돌려주고 있는 거다옹. 한번 인성 님의 몸에 흡수되었지만…….」
「뭐, 그래도 어느 정도 회복시키면 리더랑 의사가 복구할 수 있잖아?」
“응…….”
사람들의 꿈을 회복시킬 수 있을 정도로 복구하려면 꽤 시간이 걸린다는 모양이다. 최인성이 눈을 감은 채 집중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왜 갑자기 없어졌던 거야?”
「뭐긴 뭐야. 초대받은 거지.」
“초대받은 다음엔?”
「선택받았지. 이곳의 가디언한테.」
이소영의 눈이 떨렸다.
“그럼 지금 인성이는 정말로 이곳의 중심이야?”
「그러니까 조각난 꿈을 돌려줄 수 있는 거 아니겠냐.」
최인성을 보고 있자니 이소영은 조금 알 것 같았다. 이곳이 ‘이트리’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곳이라는 걸.
여기는 소니아와 에리카의 합작이다.
유은하는 이트리를 정신세계에 심는다. 트라던트의 정신세계는 사람의 꿈이 아닌 무생물의 정신세계, ‘꿈’만 보는 사람은 아주 보기 어려운 장소다.
소니아와 에리카는 유은하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그 기이한 영역을 파악하고 싶었던 거다.
실제로 그 시도는 반쯤 성공했다. 최인성은 지금 디트리의 꿈속 세계에서 나타났다. 그것이 유은하가 보는 세계와 같은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대로면 위험하다. 그들이 트라던트를 제거하기 쉽게끔 만들어 주었던 유은하만의 영역이 침범당할 것이다.
유은하가 소니아를 이기지 못하면.
소니아는 유은하의 세계를 조금씩 파악하고 있었다. 꿈을 전문으로 다루는 마법사인 만큼 빠른 속도다.
“이곳에 대해 알게 된 거, 또 뭐가 있어?”
「말했다시피 이 장소는 ‘이트리’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병기용 트라던트. 그중에서도 ‘정신마법’을 담당하는 트라던트다옹.」
「뉴욕에 세워진 트라던트는 전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게끔 만들어졌어. 아니, 이번 실험이 완성되면 다른 트라던트의 힘 역시 연결될 거야. ‘영역’이 완성된다.」
「특히 뉴욕은 보다 단단한 영역이 될 거다옹.」
「어쩌면 이트리를 심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