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424
에리카의 실험은 잔혹하고 잔인하다. 그러나 이번 실험은 ‘실험’이라기보다 ‘실전’에 가깝다. 다른 곳은 무너뜨리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이 장소만은 무너뜨려야 한다. 트라던트와의 전투에 있어서 유리한 점을 잃지 않기 위해!
“탈출하는 방법은 몰라?”
「탈출하는 방법은…….」
유이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니, 탈출하려면 ‘가디언’이 될 수밖에 없다옹. 그리고 가디언이더라도 트라던트의 의지를 거슬러 자신이 아닌 타인을 바깥으로 내보낼 수는 없다옹. 그게 타인의 ‘꿈’이라 할지라도.」
예를 들어 최인성이 모두를 그림자에 흡수하더라도 그들은 ‘타인’으로 취급된다. 물건으로 바꿔도, 아공간에 집어넣어도 마찬가지다.
‘탈출할 방법이 없다니…….’
이소영이 심각한 얼굴로 숨을 삼켰다.
「인성 님은 지금 가디언과 융합한 상태다옹.」
「융합이라기보다 가디언이 멋대로 그림자랑 꿈 사이에 끼어든 거지만. 하지만 우린 ‘꿈’은 잘 몰라서 도무지 쫓아낼 수가 없단 말이지.」
「냐옹냐옹. 그래서 인성 님은 탑을 나갈 수 있지만……그뿐이다옹.」
“그럼 부술 방법을 찾아야겠네.”
「부술 수는 있다옹.」
“당연하지. 이건 ‘무기’야. 부술 수 없는 건 없어. 그러고 보니 부숴서 출구를 만들 순 없어?”
「그건 이 공간을 부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다옹.」
“어떻게 된 게…….”
이소영이 쯧 혀를 찼다. 유이가 설명을 이었다.
「게다가 이 공간은 바깥에선 은하 님이 와도 부수기 힘든 구조다옹. 안에서 부숴야 한다옹.」
“트라던트, 그것도 꿈 계열 트라던트인 주제에? 미친 거 아냐?”
「말했잖아. ‘연결되어’ 있다고. 바깥에서 부수면 다른 트라던트가 그걸 느끼고 여기로 힘을 보내올 거야. 부수려면 여기에서 연결을 끊고 부숴야 해. 유은하가 안에 들어왔다면 편했겠지만……. 뭐어, 어쩌겠어. 우리가 좀 무리해야지. 그러지 않고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장소니 어쩔 수 없지.」
“아, 진짜.”
이소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최인성은 계속 일행의 꿈을 복구하고 있었다. 유이와 영 위로 그림자가 일렁일렁거리는 걸 보아 하니 아무래도 힘 조절이 어려운 듯하다.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솜을 불러내려 했으나 솜은 나타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이안도 상당히 힘을 소모한 상태로, 깃털이 너덜너덜하다.
“너희 이렇게 나랑 대화하고 있어도 괜찮아?”
「이제 와서 묻냐? 참 빠르다.」
「냐옹……. 도와주고 싶지만, 우리는 서로 능력이 다르다옹.」
“영이 그림자, 유이가 마력 흡수 및 회복 담당인 건 알고 있지만, 유이 너도 은하의 특수 기술인 『별의 고래』의 파생인 만큼 정신마법엔 정통하잖아?”
「그렇긴 하지만, 저건 그 정도 지식과 능력으로는 안 된다옹.」
「S랭크 상위 꿈마법 전문 기술이 필요해. 지금 꿈의 복구를 도와주고 있는 건 저 녀석의 안에 들어간 ‘가디언’이다.」
“트라던트의 가디언이 인성이를 도와주고 있다고?”
「어. 상~당히 우리 주인님을 마음에 들어 하는 모양이더군. 그림자로부터 그런 감정이 전해져 와.」
“인성이를? 어째서지?”
「그것도 있지만, 꿈이 흡수되면서 인성 님한테도 꿈이 보이게 됐다옹. 내 해석능력도 있으니 지금의 인성 님은 웬만한 꿈 장인 이상으로 꿈을 다룰 수 있다옹.」
“흐음.”
이소영의 정신체는 어느새 완전히 회복되었다. 정신을 따라 새어 나오던 통증도 사라졌다.
이소영은 집중하고 있는 최인성을 걱정스럽게 살폈다. 최인성은 아직도 이성진의 가호에 감싸여 있다. 노을색 마력은 최인성의 몸이나 정신에 그치지 않고 그림자나 영, 유이도 감싸고 있었다.
가호 없이는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다는 거다.
‘그럴 만도 하지. 흡수된 게 마력만이었다면 몰라도 그만큼 많은 악령을, 트라던트의 악의를, 정신을 받아들였는데…….’
이전, 최인성이 처음으로 흡수한 트라던트의 그림자는 플로리아의 것이다. 플로리아의 트라던트는 플로라의 마법을 삼킨 것으로, 그 힘은 많은 트라던트 중에서도 손에 꼽힌다. 연맹에서 가장 강한 루카가 한 번에 쓰러뜨리지 못하는 수준이다.
플로리아의 트라던트는 무척 강하고, 그만큼 많은 영혼과 악의를 담고 있다.
이곳의 트라던트는 순수한 힘만 따지면 플로리아보다 약할지 모른다. 그러나 다른 트라던트와 연계되어 있으며, 무엇보다 꿈 전문이다. 정신적인 공격성이나 위험성은 플로리아보다 훨씬 강할 것이라는 뜻이다.
허공에서 트라던트 가루가 끊임없이 몽환적으로 흩뿌려졌다. 세상이 넓어지며 최인성의 ‘꿈’으로 물들었다.
유은하가 말하길 최인성의 꿈은 ‘우주’라고 한다. 유은하와 조금 닮은 점이 있지만 완전히 다른 꿈이다.
우주로 가득 채워진 공간에는 별이 떠돌아다닌다. 무중력으로 이루어진 허공을 떠돌다 보면 다양한 것이 나타난다. 책장, 테이블, 우주선 등등. 문이 있어 열어 보면 평범한 방이다. 건물 내부 공간은 그나마 중력이 있어 물건이 둥둥 떠다니지는 않지만, 가끔 집이 비행기가 된 것 같은 부유감을 느낀다. 유은하의 꿈보다 훨씬 꿈답고 몽환적인 세계다.
그 꿈이 주위를 잠식하며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몸이 풍선처럼 가볍다. 주위를 녹색 별이 반짝이는 우주가 채우고 있다. 문득 허공에서 익숙한 제목의 책을 발견했다.
사람의 몸을 휘감고 있던 검녹색 그림자가 하나둘 사라졌다. 오시언, 스벤, 김미영. 한 명 한 명, 차례대로 사라졌다. 정신력이 강한 사람일수록 손상이 적었고 회복도 빨랐다. 꿈이 깨어져 인사불성이었던 사람이 일부 깨어났다.
“큭……여긴……?”
이소영은 지친 듯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고르는 최인성의 옆으로 다가갔다. 부축할 생각이었으나, 최인성은 이소영이 다가오자마자 속삭였다.
“라샤와 하티크는 지금 이 장소를 못 보고 있을 거야.”
“……! 응.”
“이 장소를 만든 방법은, 물리적인 힘과 악령의 사기(邪氣)를 바탕으로 꿈의 힘을 잔뜩 채워 융합한 거야. 그렇게 해서 무생물의 꿈을 불러내려 했어……. 하지만 모르는 영역을 상상해서 만든 거라 불안정해……. 은하한텐, 그렇게 말해 주면……알아들을 거야…….”
“……알았어.”
이소영은 초조한 심정을 삼키며 대답했다. 그는 이미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있다. 어느새 최인성의 머리카락이 가슴께에 닿을 정도로 짧아져 있었다. 아까보다는 상태가 안정되었다는 의미겠지만, 그게 최인성에게 있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웬만하면……이 공간을 부수면서 라샤와 하티크도 함께 없앨 생각이고…….”
“응. 아니, 출구도 없고 나갈 수 없게 되어 있다면 걔네는 대체 어떻게 나갈 생각이었대?”
“그 녀석들이 삼킨 건 이 장소의 조각……. 예비 가디언으로, 나갈 생각이었던, 거야…….”
“그럼 우리도 예비 가디언으로 만들 수 없어?”
“그건, 내 힘으론 위험 부담이 너무 많아서…….”
“하긴, 트라던트를 삼켜야 하니.”
“인성 씨, 괜찮아?”
깨어난 건 오시언, 셰린, 김미영, 페르카니, 스벤, 코린, 후안까지 7명이 다였다. 일행이 너덜너덜한 최인성이나 이소영을 걱정하며 달려왔다. 정작 더 위험했던 것은 그들임에도. 오시언을 향해 최인성이 하하 웃었다. 셰린이 정색했다.
“아니, 안 괜찮네요.”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여긴 또 어디야?”
처음부터 끝까지 잠들어 있던 페르카니나 스벤, 김미영은 영문을 몰랐다. 그러나 최인성에게는 설명할 시간이 부족했다. 이성진의 가호가 몸에서 흘러넘치려는 ‘꿈’을 겨우 막아 내고 있다. 최인성 안에 있는 가디언은 어중간하게 최인성에게 협력하고 있다. 그는 최인성이 자아를 잃고 미쳐 이 공간에 갇히길 바라는 것 같기도 했고, 제정신을 유지한 채 모든 것을 받아들이길 바라는 것 같기도 했다. 유이와 영이 어렴풋이 느꼈던 감정이 최인성에게는 보다 확실하게 전해져 왔다.
최인성은 당장 해야 할 말만 했다.
“지금부터 이 장소를……부술 겁니다.”
“부순다고요?”
“네. 하지만 그러면……여러분의 정신이 제법 흔들릴 거예요. 그러니까…….”
최인성은 식은땀을 흘리며 가호의 인장을 손으로 짚었다. 노을색 불꽃이 더 짙게 타올랐다. 그것을 통해 현재 상황이 아주 좋지 않다는 것을 상황을 모르는 이조차 짐작했다. 기본적으로는 ‘적’인 페르카니조차 목 안에서 터져 나오려는 궁금증을 당장은 삼켰다.
“정신을 차리지 못한 사람들의 손을 놓지 말고, 정신방어마법을 최대로 사용하고, 제 옆에서……떨어지지 마요.”
최인성을 보던 오시언이 카드를 꺼냈다. 그러나 종말의 가호에 가려 최인성의 미래를 조금도 점칠 수 없었다.
일행은 최인성의 지시에 맞춰 최대한 빨리 준비를 마쳤다. 최인성 역시 유이와 영을 그림자 안에 넣고 세계를 부술 준비를 했다.
최인성은 지금 이 공간, ‘심연의 탑’의 중심이다.
심연의 탑을 부순다는 건 즉 최인성 자신을 부순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자살할 생각은 없다. 마법을 잃을 생각도 없다.
그러니 최인성은 자신의 안에서 ‘탑’의 존재성을 없앨 만한 요소를 긁어모아 바깥으로 버려야 한다. 나머지 힘은 최인성의 그림자에 흡수할 것이다. 구분하고, 배제하고, 끌어모으고, 떨궈 낸다. 그림자에 스며든 가디언과 트라던트를 이루는 악령의 꿈, 그것이 최인성에게 이 장소를 구분할 수 있을 만한 지식을 전해 줬다.
평소의 그림자가 안개나 늪, 혹은 물컹거리는 젤리 같았다고 한다면, 지금 최인성이 다루는 그림자는 보석 같다. 최인성의 그림자와 꿈 사이에서 가디언이 속삭였다.
‘정말로 이 세계를 부술 생각인가? 기껏 얻은 힘이 사라질 거다. 복수하기 위한 힘이. 너를 위험에 처하게 하면서까지 그렇게 할 가치가 있나?’
그것은 목소리라기보다 공유된 그림자를 통해 전해져 오는 마음의 소리였다. 가디언의 예상과 달리 최인성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별무리는 언제나 새벽별무리다워야 한다. 그들은 복수를 맹세하며 그 말을 끊임없이 자신에게 되새겼다. 유은하가 살인의 대상을 제한한 것 역시 그것을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그들은 복수가 끝나고 나서도 그들답게 서 있고 싶었다.
최인성이 보는 세계가 현실과 그림자 공간으로 나뉘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꿈은 그림자 세계로 분리됐다. 그 안에서 최인성은 심연을 상징하는 보라색 보석을 모았다. 검녹색 그림자 안에서 보라색 보석이 분리되며 모였다. 그 광경이 모두의 눈에도 비쳤다.
오싹─.
셰린은 본능적인 두려움에 숨을 삼켰다. 최인성이 한순간 그림자에 삼켜 사라진 듯했다. 주위로 일렁이는 농도 짙은 그림자가, 그 안에서 느껴지는 트라던트의 기운이 두렵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손을 잡고 좀 더 마력을 일으켰다. 그 마력을 느꼈는지 레비가 정신을 차렸다.
“으음…….”
레비는 불길하게 짙어진 최인성의 그림자를 보고 흠칫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말없이 마법만 쓰고 있는 것을 보고, 신중하게 최인성을 살폈다. 일렁거리는 그림자의 흐름이 평소와는 명백히 달랐다. 그것이 흐트러지는 즉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긴장하며, 레비는 다른 사람을 따라 정신마법을 사용했다.
최인성은 제 안에서 보석 조각을 꺼내며 울렁이는 기분을 참아 냈다. 그림자에서, 정신에서, 마력에서 악의와 감정이 일렁거린다. 보석이 하나 모일 때마다 ‘장면’이 보인다. 악령의 목소리, 악령의 기억, 이곳에 녹아든 마법사들의 기억과 마음, 혹은 ‘가디언들’의 속내.
‘분위기가 이상한걸?’
‘음……. 슬슬……흘러넘쳐도 이상하지 않은데…….’
‘아아……. 사라지고 싶지 않아.’
이윽고 심연의 탑을 지키는 ‘진짜 가디언’의 목소리가 선명해졌다.
‘이런 공간에 갇혀서 답답하게 살다가 사라지고 싶진 않아. 기억 속에서 본 세계를 보고 싶어. 그것이 설령 멸망해 가는 황폐한 세계이더라도.’
최인성은 찌릿찌릿 마찰하는 그림자와 정신을 되짚으며 가디언을 향해 말을 걸었다.
‘그렇다면……나를 도와. 세상을 보고 싶다면.’
꿈의 경계에서 가디언이 웃은 듯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군.’
그 순간 보석을 모으던 힘에 인력이 더해졌다. 가호와 함께, 최인성은 ‘검’을 소환했다. 가디언이 다루던 ‘심연의 검’이다.
“‘심연’이 명령한다.”
최인성의 앞에 모인 보석이 어느새 형태를 갖췄다. 말을 하면서 최인성은 조금 우습다고 생각했다. 새벽별무리에서 ‘심연(어비스)’이라 불리는 것은 다름 아닌 이성진이었으니까. 위아래로 뾰족뾰족한, 다이아몬드 문양 형태의 클러스터를 향해 최인성이 검을 내리꽂았다.
“부서져라, ‘탑’이여!!”
콰창!
우르르릉…….
보석을 중심으로 세계에 쩌적 금이 갔다. 보석에 난 금을 따라 금이 점점 많아지며, 공간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쿨럭!”
최인성의 입에서 심연의 마력이 핏물에 섞여 떨어졌다. 새벽별무리와 오시언 일행은 흠칫했으나 차마 움직일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미 자신의 안에 녹아든 탑의 존재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최인성이 배제하려 한 것은, 깨부수려 한 것은 본인과 동료를 제외한 모든 것이었다. 악령도, 그 안에 속한 공간도, 사람도, 전부 깨부수려 했다. 그러나 불가능했다. 그의 안에는 탑의 요소가 아직 짙게 남아 있다. 악령의 그림자도, 악의도, 잔뜩 남았다.
쩌적, 쩌적…….
금이 점점 깊어졌다. 최인성이 토하는 마력량도 많아졌고, 고통도 심해졌다.
무엇보다 정신적인 고통이 심했다. 부서지는 그림자를, 정신을, 꿈을 영과 가디언이 제어한다. 흘러넘치고 부서지는 마력을 유이가 제어한다. 잔해는 흡수하고, 악의는 버린다.
머릿속을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죽고 싶지 않아!’
‘사라지고 싶지 않아…….’
‘살려 줘! 제발, 살려 줘!’
‘끄아아아아악!’
최인성은 이를 악물었다. 악령이 괴로워하는 목소리, ‘죽는’ 목소리다.
‘그래도 나는 탑을 부술 거야.’
그러나 최인성은 그 목소리를 외면하며 탑을 찌르고 있는 검에 더 힘을 실었다. 보석을 깨부수고, 검이 ‘공간’에 깊이 박혔다.
유은하라면 탑을 정화할 수 있었겠지. 탑을 정화하고, 마력을 정화하고, 꿈을 정화하고, 그 안에 깃든 악령마저 정화한다. 유은하에게는 그게 가능하다.
그러나 최인성에게는 불가능하다. 최인성에게 가능한 것은 부수는 것뿐이다. 그리고 지금, 최인성은 악령을 죽일 생각이다. 이곳에서 나가기 위해, 이 탑을 부수기 위해, …살기 위해.
그것을 누가 원망할 수 있으랴.
…….
……….
‘……야.’
‘넌 살인자잖아.’
쨍!
한순간 시간이 정지했다. 아니, 아니다. 여긴 정신의 틈새다. 그리고 이 광경은 분명 최인성에게만 보이는 광경이다. 악령들이, 원한이 최인성을 향해 고개를 들이밀었다.
‘살인자.’
눈앞에 형체를 드러낸 것은 짧은 연두색 머리카락의 소녀였다.
‘잃어버린 기억을 억지로 들춰냈잖아. 너는 그토록 비겁하게 나를 죽였어. 날 명예로운 기사가 아닌 피해자로 만들었지. 그리고 피해자란 걸 알면서도 네 목적을 위해 나를 죽이길 선택했어. 네가 살인자가 아니면 누가 살인자야?’
최인성은 그녀를 기억하고 있다. 이름은 모른다. 하지만 사용하던 호칭은 ‘실프’, 최인성이 죽이고 후회했던 두 번째 사람이다.
‘나는 자식을 구해 내고 싶었을 뿐이다.’
이번에 눈앞에 나타난 것은 추레한 차림의 남자였다. 안색은 창백했고 걸치고 있는 옷은 넝마나 다름없었다. 실력도 대단치 않았다. 그러나 트라베리아가 행했던 어떤 실험의 중심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너는 나를 죽였지. 이야기를 들어 주려고도 하지 않았어.’
죽이고서 처음으로 후회했던 상대. 딸을 뱀에 인질로 잡혀 사람을 공격할 수밖에 없었던 가엾은 자. 지금도 가장 후회를 가지고 있는 상대다.
이윽고 또 한 명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육중한 몸을 지닌 상처투성이 남자였다.
‘나를 죽였던 때를 기억하나?’
최인성의 눈동자가 떨렸다. 잊을 수 있을 리 없다. 그날을,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던 순간을!
‘너는 나에게 살인자라고 했지. 큭큭큭. 그랬던 너도 이젠 어엿한 살인자로군!’
“아…….”
최인성은 숨을 삼켰다. 목소리가 들린다. 괴로워하는 목소리, 죽고 싶지 않다고 외치는 목소리, 아픔, 슬픔, 미움, 괴로움, 원망.
「인……님…!」
「최……성…!」
「…인…….」
그런데 어디선가 아주 익숙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금이 가며 낯익은 마력이 공간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쩌적, 쩌적, 공간이 분해되며 현실이 스며든다.
그런데 부서져 흩어지던 마력이 갑자기 정지했다. 쩌적…쩌적……. 최인성의 안에 심어진 악의가 흩어지는 악의를 불러들였다. 그와 동시에 ‘가호’에 금이 갔다.
쨍!
가호가 최인성의 안팎에서 밀려드는 트라던트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깨지고 나서야 일행은 가호 뒤에 숨겨진 최인성의 현재 상태를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악!!!”
“인성 님!”
“인성아!!”
허공에 정지한 채 멈춰 있던 조각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최인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심연은 최인성을 삼키고 감싸며 소용돌이쳤다. 심연이 천지를 파고드는 균열처럼 날개를 펼쳤다.
‘시간’은 최인성 일행이 거대한 마력에 덮쳐지는 장면까지 보여 준 후 깨어졌다.
“션, 셰린…….”
“…….”
아멜리아와 히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강인하가 매서운 눈으로 ‘탑’을 노려보았다.
“이거,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귀찮게 만들어졌군. 이건 내 힘으론 움직일 수 없어.”
이성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른 사람들이 무슨 뜻이냐는 눈으로 이성진을 보았다.
“이번 탑은 정신적인 힘이 많이 들어가 있지만 이 탑은 그중에서도 꿈의 힘이 다량으로 포함되어 있다. 난 정신을 조종할 수는 있어도 꿈을 영역으로 다룰 수는 없어.”
“꿈이라. 그럼 이건 소니아와 에리카의 합작인가?”
“그렇겠지.”
괴로운 얼굴로 탑을 올려다보던 아멜리아가 숨을 내뱉었다.
“그렇다면 들어간 게 린과 션이어서 차라리 다행이에요. 두 사람은 저와 히스랑는 달리 꿈마법에 내성이 있거든요.”
“그나마 다행이네.”
히스가 아멜리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강인하는 속으로 납득했다. 역시 동료들을 감싸던 힘은 오시언과 셰린의 마법인 모양이다. 일행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이성진은 유심히 탑을 살폈다. 하늘 위까지 솟은 탑에서 평소와는 달리 ‘보라색’으로 일그러진 최인성의 영혼이 보였다.
우우웅…….
──그때였다.
‘저건, 대체…….’
이성진이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최인성의 ‘의지’에 가까우면서도 달랐다. 최인성의 마력과 영혼에 ‘탑의 힘’이 들러붙으며 동화되었다. 어느새 최인성의 힘은 온통 보라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눈앞에 있는 탑이 진동하며 힘을 방출했다.
화악─!
원래도 탑은 다른 탑과 연동하며 연계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확실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닥을 통해 탑끼리 힘이 연결되며 전달된다. 힘이 지나가는 길을 따라 마법진이 이어졌다. 하늘에서 바닥을 향해, 바닥에서 하늘을 향해 번개가 오갔다. 그 번개는 마법진을 따라서도 이어지고 있었다.
쿠과과과과과!
땅이 진동하기 시작한 것은 무시무시한 마력이 하늘로 솟아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마력을 하늘로 올려 보낸 것은 눈앞의 탑이 아니었다. 멀리에 있는 다른 탑이었다. 마력 기둥이 하나둘 늘어났다. 그를 따라 하늘이 온통 트라던트의 힘으로 덮이며, 하늘을 덮은 마력이 문양을, ‘진’을 그려 간다. 명백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저 힘들의 중심 중 하나는 틀림없이 눈앞의 탑이다. 눈앞의 이 탑은 다른 탑과는 달리 결코 대체할 수 없는 기둥 중 하나다.
“안 되겠어! 부숴야…!”
“기다려!”
이성진이 마법을 쓰려는 강인하의 손목을 꽉 잡으며 다급히 말렸다.
“이 탑은 지금 ‘최인성’이야! 어떻게 된 건진 몰라도 지금 탑과 인성이가 완전히 동화되어 버렸어! 지금 억지로 탑을 부수면, 그 녀석의 정신과 꿈에도 영향이 갈 거다. 애초에 지금의 네 힘으로는 부술 수 없는 데다, 그렇다고 내 힘으로 부수면, 인성이를 영영 되찾을 수 없어!”
“뭐라고?”
“네?”
강인하의 손에서 마력이 사라졌다. 다른 일행 역시 눈을 부릅떴다.
“과정까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인성이뿐일까, 안에 있는 다른 녀석들도 같이 부서질 거다. 안에 들어간 놈들은 탑에 동화하고, 일부가 된다. 그런 공간이야. 그리고 저 탑의 핵심은 현재 최인성이야. 탑을 부순 순간, 그 녀석은 확실히 부서진다.”
“그럴 수가…….”
강인하가 눈을 떨며 탑을 올려다보았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이성진이 주먹을 꽉 쥐었다.
“스스로 이 탑의 힘을 밀어내게 할 수밖에. ‘가호’로…….”
“아직 가호가 멀쩡하다는 건가? 그렇다면 도대체 어째서 최인성은 탑과 동화된 거지? 왜 가호가 최인성을 지키지 않았지?”
“‘가호’는 주인의 ‘위험’에 반응해 발동한다. 하지만 저건 최인성에게 ‘위협’이 되지 못한 모양이야.”
이성진이 혀를 찼다.
“동화라는 방식이 가호에 맞지 않았던 탓도 있겠지. 외부의 마력이 마법사의 내부로 스며드는 건 당연한 일이야. 그게 명명백백한 독이라 마법사의 몸에 당장 위험을 끼친다면 모를까 아니라면 가호는 반응하지 않아. 그렇게 파고든 마력은 서서히 마법사를 물들이지. 가호가 발동할 무렵에 마법사는 이미 그 마력에 완전히 물들어 있는 거야.”
“…….”
“하지만……반응했을 거야. 다른 마법사의 마력이었다면, 가호는 위험이 일정 수치에 도달했을 때 인성이의 것이 아닌 마력을 태워 버렸을 거야. 그런데 저 녀석의 안에 이미 트라던트의 힘이 스며들어 있었잖아.”
체념과 닮은 감정으로 납득하는 강인하나 침중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는 에이온과 달리 아멜리아는 당황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본래부터 트라던트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니…….”
“플로리아의 트라던트가 커지는 것을 막을 때……‘먹었’거든.”
“그런 무모한 짓을…! 그걸 그대로 내버려 둔 건가요? 잘라 내지 않고?”
“그래. 강해지기 위해서 삼키겠다더군.”
“무모해요!”
“우린 항상 무모하게 강해졌지.”
강인하가 이성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콱 깨물었다.
“하지만, 그래서……계속 불안정한 상태였어. 역시 인성이는 보내지 말 걸 그랬나……?”
“…….”
이성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성진이 탑에 집중하는 것을 보며 강인하는 손목의 페어 링을 감싸 쥐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미국 전역에서 발동한 마법진은 계속해서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탑을 노려보던 이성진이 혀를 찼다. 아무래도 가호가 쉽사리 발동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성진이 의지를 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히스, 안에 있는 동료들과 교감할 수 없니?”
“하고 있지만 안 돼.”
“윽….”
째앵─.
그때 강인하의 페어 링이 무언가에 공명하듯 눈부시게 빛났다.
강인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소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최인성’을 향한 목소리. 그 순간 이성진의 손목에 불완전하게 채워져 있던 페어 링 역시 빛났다. 페어 링을 통해 이성진의 ‘가호’가 전달된다.
“성진아! 소영이가…….”
“그래.”
이성진의 표정이 무겁게 굳었다.
“덕분에 ‘가호’가 발동했다. 가장 강한 걸로 심어 두길 잘했군. 이 정도면 제정신으로…….”
그때 땅과 하늘을 뒤덮은 마법진이 거대한 마력을 뿌리며 완성되었다. 아멜리아가 반사적으로 무기를 꺼냈다. 강인하가 다급히 이성진을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