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431
다음에 정신을 차린 것은 꼬박 이틀이 지나고 나서였다. 라스와 첸은 나보다 한발 먼저 깨어나 있었다. 두 사람만이 아니라 정신을 잃었던 다른 동료들도, 긴 성장 열을 앓고 있는 아르델을 제외하고는 전부 깨어나 있었다.
깨어나자마자 내가 들은 소식은 캐밀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캐밀은 물론이고 그의 측근까지 전부 죽었다. 레일리는 서포터로 활약했고, 성진은 캐밀의 측근을, 루카와 윌리엄은 캐밀을 죽였다. 죽은 측근 안에는 트라베리아의 마법사인 아넬라와 로베르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루카는 유럽을 ‘분리’했다.
말 그대로다. 유럽의 트라던트가 북아메리카에 이어 아시아와 연동하는 트라던트에 영향을 받기 전에 유럽을 아시아와 중동에서 통째로 분리해, 떨어뜨렸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잘한 일이었다. 북아메리카의 영역은 완성되었고, 완성된 영역을 따라 꿈의 힘이 ‘연결’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보통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실이 다른 트라던트를 향해 뻗어 나가며, 그물 같은 길을 따라 새로운 트라던트가 형성된다. 실과 연결된 트라던트는 꿈의 힘을 띠고, 연결된 트라던트와 공명하며 힘을 나눈다. 분리하지 않았더라면 유럽도 그 힘에 삼켜졌을 것이다.
트라던트 영역이 넓어지는 양상을 살피던 리브리는 SR과 경찰 및 미국의 생존자가 모여 있는 남아메리카 대륙을 꿈의 그물이 내려진 범위를 제외하고 분리하고 있다.
이렇게 된 이상 대륙 원형을 신경 쓰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러나 멀리서 공명하는 같은 개체의 힘에 이끌려 꿈의 그물에 직접 연결되지 않은 트라던트들마저 공명을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잠든 사이 일행은 육지와 바다를 막론하고 아직 트라베리아에 빼앗기지 않은 영역에 존재하는 트라던트를 어떻게든 부수고 돌아다녔다고 한다.
또한 꿈의 영역이 더 강해지기 전에 힘을 합쳐 아시아와 아메리카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피난시키려 했으나 꽤 난항을 겪고 있다고 한다. 트라베리아 역시 이번 기회에 대륙을 확실하게 잡아 삼킬 작정인지 릴리, 홍링, ……벨라가 나섰다.
그래, 벨라가.
그 여자가 나섰다.
소니아에 이어 캐밀까지 죽었다. 커븐 로드가 둘이나 죽은 것이다. 격노한 벨라의 일격에서 가까스로 버틸 수 있었던 것에는 성진의 힘이 컸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원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간 대륙은 자연의 가호나 사람의 가호, 성물과 신물을 이용해 숨어 있다.
상대가 벨라이니 이쪽도 몸을 사리며 움직일 수밖에 없다. 혹은 유펠르시아나 구 트라베리아를 방패로 내세우거나. 하지만 벨라는 유펠르시아와도 싸웠다. 결과 라시아며 초대 가주며 상관 않고 몸 한 군데씩은 잘렸다. 상대가 벨라이니 아주 많이 봐준 것이라 보아야겠지만, 그녀가 유펠르시아 사람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것만으로 무척이나 충격적이었다. 우리가 그런데 라시아를 비롯한 유펠르시아의 마법사들은 어련할까.
벨라가 나선 탓에 사태가 아주 곤란해지기는 했지만, 벨라는 자신이 펼친 영역 안이 아니고서야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 전력을 다한 순간 이 조막만 한 지구를 비롯해 가까이 있는 항성이나 행성마저 조각나 버릴 테니까.
벨라가 잘 안 나서는 이유는 그 탓이 클 것이다. 그녀는 힘을 세밀하게 조절하지 못한다. 그녀에게 있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주 손쉬운 일이고, 목숨이 붙어 있도록 공격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나설 일이 적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트라던트의 영역이 확장되는 중이다. 벨라라고 한들 눈에 뵈는 것 없이 베어 가르기는 힘들 테지.
여러모로 강한 마법사가 많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현재 연맹의 전력은 반 가까이 줄었다. 그 사라진 전력 반을 채울 수 있는 게 바로 우리 새벽별무리다. 적어도 성진의 힘은 커븐 로드 및 연맹의 최고 전력과 대등하다.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 동료들은 연맹을 도와 트라던트를 부수며 피난을 유도하고 다녔다. 전력 대부분이 큰 부상을 입었으나 연맹의 의사들이 전력을 다해 회복시켰다. 부서진 정신은 내가 쓰러진 와중에도 문이와 문이 분신의 힘으로 어떻게든 회복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덕분에 특수한 경우인 나와 인성이를 제외하고 예리, 인하, 소영, 형일 아저씨, 미영 할머니, 테온 등 S랭크 상위는 무사히 회복하여 빠짐없이 바쁘게 돌아다녔다.
그뿐일까. ‘무르시엘’도 협력했다.
손 하나도 부족해서 허덕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레녹은 트라던트를 부수기에 아주 유용한 실력자다. 그래서 구속구를 찬 채 협력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연맹이 지키고 있는 대륙에 솟아 있는 트라던트가 반 이상 부서졌을 무렵 겨우 잠에서 깬 내게 두 키메라가 협력을 요청했다. 내가 상황을 인지하고, 바깥에서 트라던트와 싸우고 있는 동료들에게 내가 깨어났다는 연락을 하자마자 바로.
“부탁이 있습니다.”
“뭔가요?”
두 키메라에게는 개인적으로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지만 지금은 태평하게 그런 이야기를 나눌 때가 아니다. 몸과 정신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으니 나도 당장 밖으로 나가야 한다. 트라던트에 꿈의 힘이 섞인 지금도 트라던트를 제일 잘 부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나일 테니까.
첸은 긴 소매에 가려진 손을 공손하게 모으고 나를 바라봤다.
“‘꿈의 공명’이 끝나면 트라베리아의 영역과 사람들이 사는 곳은 단절될 겁니다.”
그렇겠지. 꿈의 그물 안에 트라베리아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들어가는 건 아주 힘들 테니까.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다.
지금 이 순간 가장 걱정되는 것은 한국에 있는 대현이었다. 대현은 원래도 한국에서 활동해 자유롭지 않았지만, 꿈의 그물이 완성되면 정말로 연락이 두절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대현에게 연락을 취하기엔 늦었다. 그게 너무 괴로웠다.
“그러니 공명이 완벽해지기 전에 동료를 데려오고 싶습니다.”
동료라. 나는 첸이 진화하기 전 우리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당신들과 뜻이 같은 장군 시리즈 네 명 말인가요?”
“아니오. 한 명입니다.”
“한 명……?”
“두 명은 어차피 저희 힘으로는 빼 올 수 없습니다. 한 명은 믿음직스러운 자의 곁에 있습니다. 그러하니 데려오고 싶은 자는 한 명뿐입니다.”
“누구죠?”
“듀크입니다.”
듀크.
듀라한이 모델인 이 장군 시리즈는 미영 할머니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으며 중국에서 주로 활동한다. 그의 역할은 트라던트의 가디언이다. 리우 홍링과 같이 행동하는 일이 제법 있으나 리우 홍링의 직속은 아니다.
직속이 아니라는 건 커븐 로드 개인의 문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거다. 빼 오는 데 큰 어려움이 따르지는 않을 것이다. ─보통 상황이었더라면.
“어디 있는지는 아나요?”
“중국 타클라마칸 사막입니다.”
“와, 미친 거 아냐?”
당연하지만 캘리번에는 사람이 몇 명 남아 있었고, 그들이 나와 장군 시리즈 셋만 둘 리 없었다. 이야기를 듣던 한재일이 혀를 찼다.
“지금 이 상황에 우리 리더를 데리고 꿈의 그물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거야?”
“아닙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염치가 없을까요.”
“그럼?”
“마법과 영혼을 조금만 떼어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첸과 라스가 허공에서 무기를 꺼냈다. 첸이 꺼낸 것은 자루까지 금속으로만 이루어져 푸른 불꽃을 발하는 은색 단검이었고, 라스가 꺼낸 것은 새까만 상자였다.
“트라베리아의 문장을 없앨 방법은 계속 연구해 왔습니다. 그러기 위해 무기를 만들었고, 힘을 모았습니다. 더군다나 듀크의 안에 있는 강제력은 저희 안에 있는 것보다 훨씬 약합니다.”
듀크의 힘은 S랭크 50위 전후, 그의 안에 있는 트라베리아의 문장 역시 그 정도의 힘을 가진다. 저 힘이라면 확실히 트라베리아의 문장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트라베리아의 문장이 없는, 지금의 그들이라면.
“문제는 들키지 않고 꿈의 그물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촘촘히 쳐진 꿈의 그물은 오가는 사람을 감시하며 얽매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중국은 꿈에 완전히 물들지 않았습니다. 중국의 트라던트가 본래 지니고 있던 힘과 악의가 굉장히 강하기 때문이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은하 님이라면 중국의 꿈 안을 파고들 수 있을 줄로 압니다. 당신이라면 직접 가지 않고 마법만 통과시킬 수도 있겠지요. 분명 당신의 영혼 혹은 마법의 일부 역시 그 정도 힘을 가졌을 겁니다.”
“…….”
“저희 부탁은 두 가지입니다.”
말없이 바라보자 첸이 부탁을 이야기했다.
“하나는 꿈의 그물을 회피할 수 있는 마법을 빌려주셨으면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정기 보충입니다.”
“정기?”
생소한 단어에 모두 의아함을 드러냈다. 첸이 그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진화했다고 한들 체질이 바로 변하는 것은 아닌지라, 사실 저는 지금 상당히 약해져 있습니다. 식사를 하지 않은 탓입니다. 당신께서는 이미 눈치채셨을지도 모르겠군요.”
“…….”
나는 무언으로 답했다. 눈을 뜨고 마주친 순간부터 의아하게 생각하긴 했다. 마력은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그런데……이것을 뭐라 설명해야 할까. 색이 약하다. 무언가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
“사람은 실력과는 별개로 물과 음식을 오랫동안 먹지 않으면 죽는다고 압니다. 그건 저희 키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구미호인 저는 음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에너지, 즉 ‘정기’를 오랫동안 섭취하지 못하면 죽습니다.”
나는 시야를 겹쳐 떴다. 오랜만에 ‘생명’을 보았다.
……이 눈은 이렇게 성장한 지금도 완전하지 않다. 흔들리고, 흔들리고, 또 흔들린다.
그래도 주변과 비교하니 대충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첸은 다른 이들에 비해 생명력이 약하고 불안한 것 같았다. 특히 라스에 비해서는 한참 부족했다.
“그럼 지금 당신은 성장하느라 힘을 많이 소모했는데 체력을 회복시킬 음식을 전혀 먹지 못한 상태라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과일이나 나무, 짐승을 통해서도 조금씩 힘을 얻을 수 있지만 역시 가장 좋은 것은 사람의 정기입니다. 무엇보다 사람 이외의 생물은 정기가 적어 제게 흡수당하면 생명이 위험합니다. 웬만한 식물은 시들고, 동물도 병을 앓거나 심하면 죽지요.”
무엇을 떠올렸는지 첸이 손을 내저었다.
“걱정 마시길. 아무리 배가 고파도 결코 당신의 동생을 건드릴 일은 없을 겁니다.”
순간 가슴이 내려앉았다. 내 서늘한 시선에 첸이 조금 몸을 움츠렸다.
“……쓸데없는 말이었던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여하튼……당신께 정기 보충을 부탁드리는 건 지금 제 몸이 평소보다 많은 정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정기는 충전하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니 기왕이면 정기가 강하고 안전한 힘을 가진 당신께 받고 싶습니다.”
“그렇군요.”
이야기를 들어 보니 정기는 ‘생명력’에 가까운 듯하다. 우리 일행 중에 가장 생명력이 강한 것은 성진과 나다. 그러나 성진의 정기를 가져갈 수는 없으리라. 무시무시하니까.
“정기를 주는 건 상관없어요. 다만…….”
나는 첸과 라스를 보며 고민했다. 생겨난 꿈의 그물, 힘이 그나마 약한 중국, 진화한 꿈마법…….
머릿속에 생각이 얽히고 얽혔다. 여러모로 시험해 보고 싶어졌다.
“저도 함께 가죠.”
“리더?”
“은하야?”
동료들이 당황하며 표정을 굳혔다. 첸과 라스 역시 생각지도 못했다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더, 위험해!”
“응. 알아. 하지만 이 시기가 지나면 꿈의 그물을 자세히 살펴보기 더 어려워질 거야.”
“…….”
“꿈에 한해서는 내 눈이 제일 정확해. 그러니 웬만하면 직접 들어가서 확인해 보고 싶어.”
꿈의 그물을 파악할 수 있는 건 전 세계를 뒤져도 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꿈의 그물은 완전하지 않으며, 동시에 활발하게 변화하며 진화하고 있다. 즉 지금이라면 비교적 안전하게 꿈의 그물의 상태와 진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완벽하게 파악하려면 바깥에서 보는 것보다 직접 경험하는 게 더 좋다. 결국 동료들은 납득했다.
“알았어. 어쩔 수 없네.”
“바깥에 나간 동료들한테도 메시지로 알릴게요.”
“그래.”
비키가 재빨리 메시지를 작성했다. 시하가 걱정의 말을 건넸다.
“동료들이 연락 받을 때까지 기다렸다 가면 안 돼?”
“언제 연락을 확인할지도 모르잖아. 시간이 지날수록 꿈의 힘은 점점 견고해질 거야. 그렇게 되면 듀라한을 데리고 나오기도 어려워져. 한시가 급해.”
“그래. 그렇지…….”
꿈의 그물이 생성되기 시작하고 사흘이 지났다. 움직이는 건 빠를수록 좋다.
“가기 전에 식사가 필요하다고 했죠? 정기인지 뭔지, 빨리 먹으세요.”
얼떨떨해하고 있던 첸과 라스가 감사를 표했다.
“협력, 감사드립니다.”
“고마워.”
“말해 두지만, 들킬 것 같으면 바로 물러날 겁니다.”
“그 경우에는 어쩔 수 없지요.”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상황은 꽤 어렵다. 꿈의 그물도 문제인데, 이번에는 몰래 들어가서 들키지 않게 듀크의 문장을 제거하고 데리고 나와야 한다.
아주 힘든 일이다. 문장 제거까지 포함하면 완전히 들키지 않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꿈의 그물 안쪽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나머지 일은 어떻게든 될 것 같다. 꿈의 그물은 트라베리아의 영역인 것과는 별개로 꿈의 힘인 데다, 그물 안에 있는 이상 벨라는 나를 제대로 공격하지 못한다. 소니아의 유산을 망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나는 빨리 정기를 먹으라며 재촉했다. 첸이 내게 몇 걸음 다가오며 정기에 대해 좀 더 설명했다.
“정기는 쉽게 말해서 기력 혹은 생명력입니다. 마력과는 달리 자유자재로 건드릴 수 있는 힘이 아니지요. 하지만 예로부터 생명을 전하는 의식이 몇 가지 전해 내려오고 있지요. 정기를 섭취하는 방법은 그와 닮았습니다.”
바로 떠오르는 게 있었다.
“키스인가요?”
“네?”
“쿨럭! 뭐?”
생명을 전하는 의식에 대해서는 성진에게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키스는 생명을 전하는 가장 숭고한 의식이며 특별한 ‘주문’이다. 치료, 가호, 수호. 성진만 해도 가장 강한 가호는 키스로 내릴 수 있다. 신화를 봐도 그렇다. 그들이 생명을 줄 때 쓰는 방법은 숨결이다. 숨결은 입술을 통해 나온다. 첸이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그게 가장 빠르기는 합니다만…….”
“너! 은하 님한테 손대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예슬이가 비명을 질렀다. 첸이 손을 내저었다.
“기다려 주십시오. 인간 물정에 어두운 저도 키스가 인간에게 소중한 행위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도 그 방법은 급할 때, 정기가 많은 하무라와 레녹한테가 아니고서야 쓴 적이 없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당황하던 동료들이 진정했다.
“키스 외에는 뭐가 있나요?”
“기본적으로 접촉을 통해서 충전합니다. 손을 잡으면……으음, 당신의 정기는 어째서인지 잘 보이지 않습니다만, 마력의 느낌이나 치유력으로 보아 정기가 강하다는 건 알겠습니다.”
“네. 이 중에선 저와 성진이 제일 정기가 강할 거예요.”
그보다, 나는 물었다.
“어째서 라스 씨의 정기를 흡수하지 않은 건가요?”
“라스는 확실히 생명력이 강합니다만……그의 정기는 저에게 해가 됩니다. 라스만이 아니라 키메라나 장군 시리즈의 정기는 대체로 그러합니다.”
첸이 아까 하려고 했던 말을 이었다.
“손을 잡는다면 정기가 차는 데 한 1시간 정도 걸리리라 생각합니다. 포옹이라면 20분…….”
나는 첸의 목소리를 들으며 흘끔 바깥을 보았다. 영역은 계속 깊어지며 넓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키스는요?”
“1분 정도입니다.”
나는 빠르게 결단했다. 기왕이면 빠른 게 좋지.
“그럼 키스하죠.”
“뭐?”
“은하 님!”
“리더!”
“안 돼!”
동료들이 연이어 거부하고 나섰다. 라스는 아무래도 좋다는 표정이었고, 첸은 주위와 마찬가지로 놀란 모양이었다.
“당신은 별로 순정을 고집하지 않으시는 모양이로군요.”
“상황이 안 좋으니까요. 빠른 게 좋죠.”
“안 돼!”
시하가 내게 달려들며 내 손을 감싸 쥐었다.
“은하야, 절대 그러지 마. 키스는 좋아하는 사람이랑만 하는 거야. 나중에 인하랑 소영이한테 많이 혼날 거야!”
“혼나면 돼.”
“아니……!”
시하가 발을 동동 굴렀지만 나는 시간을 끌 생각이 없다. 내가 손짓하자 첸이 주위를 슬쩍 둘러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당신의 정기를 확인해 보고 정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나는 다시 첸을 보았다. 시하도 울분이 담긴 얼굴로 첸을 돌아보았다.
“확인이 필요한가요?”
“네. 동족의 정기를 가져갈 때 그런 것처럼, 해가 되는 정기가 가끔 있습니다. 거기에 말했다시피 당신의 정기는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우선 손을 통해 흡수 속도를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그런가요. 자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온 첸이 내 오른손을 감싸 쥐었다.
정기는 ‘생명력’, 나는 시야를 전개했다.
첸이 내 손을 쥔 순간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그를 향해 빨려 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에게 생명은 ‘점’이다. 흐르는 힘의 중심이나 덩어리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생명 주위로 일그러지는 ‘에너지’ 같은 것도 조금씩 보이게 됐다.
이것을 통해 ‘신의 힘’도 조금 보인다. 여전히 이성진의 힘은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몸에서 아지랑이 같은 것이 첸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그 순간, 첸이 숨을 들이켜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읍…….”
그가 구역질을 하며 숨을 헐떡였다. 나는 당황하며 첸을 살폈다. 잠시 후 그가 천천히 내 손을 놓았다.
“왜 그러나요?”
“……그게.”
첸이 숨을 고르며 진정했다. 첸을 주시하던 동료들도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이렇게 짙고 농밀한 정기는 처음입니다. 너무 짙어서 부담스러울 정도로군요. 이 정도면 키스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포옹만으로 5분 만에 다 찰 겁니다.”
“그런가요.”
나라고 키스에 전혀 거부감이 없는 건 아니다. 나는 무심히 팔을 벌렸다. 동료들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이번엔 반대하지 않았다.
“……잠시만. 조금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부담스러울 정도라고 했던가. 조금 머뭇거리던 첸이 이내 내게 다가와 나를 끌어안았다.
첸은 키가 적당히 크다. 성진보다 조금 작은 정도일 것이다. 그 탓에 내 몸은 완전히 첸의 품 안에 폭 파묻혔다. 이성과 정면으로 마주 안는 건 오랜만인지라 생각보다 기분이 이상했다. 여태껏 이렇게 나를 끌어안은 이성은 기껏해야 제현 오빠와 민 선생님 정도였다.
첸이 나를 안은 채로 심호흡했다. 처음에는 힘이 빨려 가는 것이 느껴졌으나, 그 감각은 곧 희미해졌다. 내가 생명력의 흐름에 둔하거나 빠져나가는 느낌에 익숙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가진 생명력이 아주 방대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품에 파묻힌 탓에 투시마법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주위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동료들이 우리를 보며 복잡한 심정을 느끼고 있는 건 알겠다. 딱 그때 공간 이동의 기척이 느껴졌다. 밖으로 나갔던 동료들이 돌아온 것이다. 이렇게 빨리 돌아올 줄 몰랐기에 나는 조금 놀랐다.
“첸! 라스!”
“은하가 깨어났다고……뭐 하는 거야?”
“…….”
순식간에 주위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특히 인하와 성진이, 소영이의 시선이 따갑다. 성후 오빠나 후배인 김준영도 당황한 기색이다. 사정을 설명할 틈도 없이 달려들려는 동료들을 막은 건 그들과 함께 돌아온 예리와 무르시엘 멤버들이었다.
“잠깐만요!”
“잠시만! 오해야.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뭐?”
나는 투시로 동료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저건 아마 치료 행위예요. 아니, 치료라기보다는……식사인가?”
“그래. 이 아이 말대로야!”
무르시엘 멤버 중 하무라가 다급히 일행 앞을 막아섰다.
“저 녀석은 음식이 아니라 사람의 ‘정기’로 에너지를 보충해. 저건 정기를 보충하기 위해서 하는 행위야. 유은하한테 부탁한 건 아마 유은하의 생명력이 가장 강하기 때문일 거고.”
“옳다.”
라스가 수긍하며 동료들 곁에 다가갔다.
“우리, 유은하, 부탁. 정기 보충.”
“뭐라는 거야? 제대로 말을 해.”
여전히 중요한 단어만 내뱉는 이상한 말투에 소영이가 열을 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무라는 라스의 말을 알아들었다.
“어? 유은하한테 정기를 달라고 부탁했어? 그래서 지금 정기를 보충받는 중이고?”
“응.”
“잠깐만 기다려.”
나도 첸의 품에 안긴 채 동료들을 만류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첸이 나를 놓았다. 그는 비틀거리더니 무릎 꿇으며 허리를 숙였다.
“쿨럭, 쿨럭!”
그 모습을 보고 소영이가 눈썹을 치켰다.
“뭐야? 정기를 보충받아 놓고 왜 저래?”
“유은하, 정기, 너무 맑다.”
“그렇겠지.”
성진이 서늘한 눈으로 첸을 흘겼다.
“저 녀석의 생명력을 직접 받았는데 멀쩡하겠어.”
나는 몸을 숙이고 첸의 등을 두드리며 물었다.
“다른 사람의 정기를 받는 게 나았을까요?”
“아니……아닙니다. 너무 짙고 맑아 몸이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는 무척 좋습니다. 일주일은 정기 없이 버틸 수 있을 듯하니.”
“와, 대단한데?”
하무라가 감탄했다.
잠시 후 우리는 다시금 마주 봤다. 첸과 라스가 깨어난 것은 동료들이 바깥에 나간 사이였다. 나는 이미 확인했고, 성진과 예리가 또 한 번 자세히 첸과 라스를 살폈다. 결과 첸과 라스의 상태가 완전히 안정되었다는 걸 확인했다. ‘키메라’의 느낌도 옅어졌다. 적어도 트라베리아의 힘은 느껴지지 않는다.
나도 그랬지만, 두 사람도 ‘핵’을 신경 써서 주시했다. 다시 한번 핵을 보았다. 핵 안에 깃들어 있는 마음이야말로 이들의 생명이다. 어렴풋이 단편적인 꿈이 비쳤다. 빛났다 사라지는 은녹색 마력은 약에 스며들어 있던 마력이었다.
실상 이들이 ‘엘리시아의 마법’이 아니게 됐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엘리시아의 마력은 느껴지지 않고, 생명력이나 마력도 안정되어 있지만, 이들은 만들어진 생명체고, 인간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약을 먹기 전보다 상태가 나아진 것은 틀림없었다.
상태 확인이 끝난 후 나는 두 사람과 중국에 가기로 한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동료들은 물론 무르시엘 일행의 표정 역시 무섭게 굳었다. 성진과 인하가 냉정한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같이 갈 거라고?”
“그래.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지 않으면 의미가 없으니까.”
소영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할 말은 많은데 반론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그렇지. 그것만은 네 눈으로 보지 않으면 소용이 없지. 하지만 그다음은 어쩌려고? 듀크를 데려오려면 어쨌거나 문장을 제거해야 하잖아. 안에서 제거하든 바깥에서 제거하든 너무 눈에 띄어. 꿈의 그물 안에서 부하의 기척이 사라지면 누구든 다 널 의심할걸? 꿈의 그물 안에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현재 전 세계를 뒤져도 너밖에 없어.”
“하지만 찾지는 못하겠지. 소니아는 이미 이 세상에 없어.”
소영이가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만…….”
“들키지 않을 방법은 몇 개 생각해 뒀어. 그중 가장 가능성이 있는 건, 아무래도 바꿔치기 같더라.”
나는 손 위에 환각으로 ‘핵’을 만들었다. 아직 듀크의 핵을 자세히 확인해 보지 않았으므로 겉모양뿐인 핵이다.
“‘구 트라베리아의 봉인’을 바꿔치기했을 때처럼 한번 해 보려고.”
“아!”
벨라도 엘리시아도 내가 건넨 봉인이 가짜임을 바로 눈치채지 못했다. 그때는 엘리시아의 마법을 흉내 내느라 만드는 데만 며칠이 걸렸지만 듀크의 핵 정도는 금방 흉내 낼 수 있다.
“미리 말해 두지만, 이번 일, 넌 따라오면 방해밖에 안 돼.”
나는 대뜸 성진을 손가락질했다. 동료들이 내가 이 두 키메라랑 셋이서 가는 걸 마음에 내켜 할 리 없기 때문에 미리 선수 친 셈이었다. 성진이 쉽게 수긍했다.
“알아.”
우리에게 있어 성진은 비장의 검이다. 하지만 그 비장의 검은 스스로를 숨길 줄 모른다. 성진이 나선다는 건 즉 잠입이 실패한다는 것과 동일한 소리다. 거기다 성진은 내 환각마법과는 특히 안 맞는다. 내가 잠입할 때 성진은 정말 방해밖에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