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434
『항상은 아니지만, 가끔 공명해요.』
김준영이 퉁명스레 대답했다. 나는 침을 삼켰다. 아멜리아의 평가대로다. 이 아이는 옛 전승마법에 있어선 천재다.
자연의 가호로 무언가를 숨긴 기척을 알아채는 건 시카 정도는 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정령들도 쉽사리 해내지 못하는 일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는 공명한다고 말한다. 김준영이 나를 돌아보았다.
『자연의 가호와 공명하면요, 뭐라고 말해야 할까, 열기로 공기가 일그러지는 것처럼, 한순간 위화감이 느껴져요. 처음엔 그게 뭔지 몰랐는데, 트라베리아 사람들과 함께하다 보니 알게 됐어요.』
그러고 보니 김준영은 장군 시리즈는 꺼림칙하게 여기고 있으면서 아멜리아 일행은 별로 싫어하지 않는 모양이다. 하긴, 같은 트라베리아라 해도 아멜리아는 지금의 트라베리아가 하는 일과는 전혀 상관없었다. 오히려 막기 위해 나섰다가 봉인당한 입장이다.
‘자연의 가호로 대체 무엇을 감추고 있는 거지?’
처음 한국에 들어갔을 때 우리는 자연의 가호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알게 된 건 한국에서 빠져나온 직후, 시네라를 거쳐 캘리를 만나고 나서였다.
나는 김준영의 눈이 향하는 방향을 향해 시야를 전개했다. 청와대를 보다 자세히 살폈다. 지금 내가 가장 깊게 볼 수 있는 ‘꿈’, 더해서 생명을.
꿈속에 설치된 가호는 꿰뚫어 볼 수 있다. 그러나 꿈을 통해 봐도 현실의 가호는 아직 꿰뚫을 수가 없다.
그래서 대신 꿈속에 남은 잔흔을 살폈다. 흩어지는 감정, 흩어지는 꿈. 어렴풋이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김준영이 알아채지 못했더라면 나도 영영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김준영을 보았다.
자연의 가호가 신경 쓰였지만 한국에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새로운 발견을 하나 가슴에 안고 한국을 떠났다.
한국에서 북동 방향으로 일본, 러시아를 따라 쭉 올라가다가 남하해 북아메리카로 향했다. 남아메리카는 아직 붙잡힌 상태다. 하인리히를 위시한 리브리 일행이 북쪽에 있던 피난민을 남쪽으로 이동시키며 대륙의 반을 떼어 냈으나 그 떼어 낸 대륙을 아직 트라베리아가 놓아주지 않고 있다. 그 탓에 리브리를 중심으로 한 연맹의 마법사들이 방어전을 벌이고 있는 실정이었다.
꿈 그물의 진원지가 점점 가까워졌다. 아무리 이 눈이 멀리까지 본다고 한들 가까이서 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나는 하늘에서 멈춰 꿈을 내려다봤다.
연두색에 가까운 은녹색 꿈이 흐트러진다. 꿈 조각이 꽃잎처럼, 눈송이처럼 흩날린다. 대륙 전체를 빼곡히 둘러싼 꿈에 가슴이 선뜩했다.
‘날 죽이지 않은 걸 후회할 거다.’
후회하고 있어.
하지만 그건 당신을 죽이지 않아서가 아니다.
더 철저하게 날개를 꺾고 다리를 부러뜨리지 않은 걸 후회하고 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있다고들 하지만, 나한테는 죽음보다 더한 죄도, 벌도 없다. 죽음은 모든 것을 종식시키니까.
하늘 위로는 여전히 유클라프의 공단벽이 링 형태로 떠올라 있었다. 새카만 힘과 은녹색 힘이 무섭도록 완벽하게 조화된다. 마치 살아생전 두 사람의 사이를 증명하는 것 같다.
‘유클라프의 마법과 소니아의 몽마가 협력하고 있다고 했지. 둘 다 꿈의 영역과 반쯤 융합해 조종하고 있다고…….’
전해 들은 이야기를 되짚으며 시선을 굴리던 나는 등을 훑어 내리는 섬뜩함에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아니야. 이건 그런 단순한 게 아니야.’
단순히 마법이 융합된 게 아니다.
몽마가 유클라프에게 가호를 내리고 있다. 이것만 보면 그저 협력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클라프의 몸에 소니아와 정령의 인장이 새겨져 있다!
‘이건…….’
저것은 계약이라기보다는 계승을, 혹은 각인을 닮았다. 소영이가 받은 것보다 짙고 깊다.
‘죽은 자의 각인’이다!
‘소니아!’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꿈의 그물이 아니라, 유클라프의 몸에 소니아의 각인이 새겨졌다!
소니아는 동료들에게 나에게 대항할 장치를 두 가지나 남겼다.
하나는 그녀의 꿈을 트라던트에 녹여 트라던트 전체에 꿈의 그물을 친 것. 또 하나는 유클라프에게 그녀의 마법과 정령을 계승한 것.
트라던트에 꿈의 힘을 섞어 트라던트의 정신세계에 직접 이시리즈를 심는 걸 방지하려 했다. 그리고 트라던트에 스며들어 꿈의 그물을 퍼트리게 된 몽마를 트라던트 탑들을 관리하게 된 유클라프에게 계승하여 연결하는 것으로 꿈을 보는 ‘눈’을 물려줬다. 아마 저 각인은 정령이 계승되는 과정에서 새겨진 것일 터다.
울컥!
그 순간 가슴께가 찌르듯 아파 왔다. 몸 안에 경종을 울리는 불길함과 닮은 감각, 내 안에 미약하게 남은 소니아의 부스러기가 트라던트와 공명했다. 그와 동시에 꿈으로 감춰진 우리를 향해 공간을 찢어발기는 검은 창이 날아왔다.
쾅──!!!
새까만 창이 꿈마저 찢어발겼다. 라스가 첸과 듀크를, 나는 김준영을 보호했다.
커븐 로드의 힘을 직접적으로 느낀 건 이번이……두 번째려나. 나는 내 뒤에서 안쓰러울 정도로 바짝 굳은 김준영 위에 정신 결계와 방어 결계 등 겹겹이 방어마법을 덮어씌웠다. 그나마 직면하지 않아 기절하지 않고 버틴 거겠지. 아무리 자연과의 교감에 있어선 천재적이더라도 김준영의 몸은 기껏해야 B랭크 마법사의 몸이다. 몸에 찬 환각 아이템이 김준영의 정신을 조금씩 안정시켰다.
그것을 확인하며 나는 다시 상황에 집중했다. 꿈이 깨어졌다고 해서 우리 모습이 드러난 건 아니다. 깨어진 꿈이라도 장막을 유지하기엔 충분하다. 그러나 아직 내 꿈에 남은 몇 조각이 ‘공명’하고 있다.
『문이.』
『알겠습니다. 지금부터 꿈을 조정하겠습니다.』
문이가 내 정신세계를 조정하며 공명을 짓눌러 닫는다. 그러나 공명을 완전히 없애려면 아직 조금 시간이 걸리리라. 몽마가 공명을 놓치지 않도록 공명을 일으키고 있다.
문이가 꿈을 조정하는 동안 나는 온몸으로 마력을 감지했다. 유클라프의 마법은 무시무시한 위력과는 달리 전조가 희미하다. 더군다나 그의 마법은 공간을 가르고 나타난다.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피하는 것조차 힘들다.
주위 공간이 무자비하게 열렸다. 나는 공간이 열리는 범위를 파악하며 일행을 이끌고 피했다.
『공간을 막거나 마법을 부수지 마요.』
마법을 계승하기 전 많은 꿈을 잃었다고는 하나 ‘죽음’을 대가로 바쳤으니 유클라프에게 스며든 꿈은 본래 소니아의 마법 레벨과 별다르지 않을 것이다. 몽마가 살아 있었던 만큼 어쩌면 레벨이 더 높을지도 모른다. 거기다 유클라프는 소니아나 몽마와는 달리 공간을 보는 힘도 탁월하다. 공간의 힘만 따지면 나는 유클라프를 이기지 못하고, 몽마가 보는 꿈의 깊이는 나와 엇비슷하다.
그러나 유클라프에게는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유클라프는 아직 꿈의 힘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소니아가 보던 꿈의 깊이는 하루 이틀로 익숙해질 수 있을 정도로 얕지 않다.
거기다 지금은 김준영이 우리를 자연의 힘으로 가리고 있다. 나는 입술을 움직였다.
『괜찮아요. 유클라프에겐 저희가 보이지 않을 거예요.』
열린 공간의 범위가 그 예상을 사실로 증명하고 있다.
우리 반경 500m 정도가 공간의 힘으로 꽉 찼다. 즉 이 범위 안에 있다고 어렴풋이 느낄 뿐이지 정확한 장소를 확신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꿈속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으면 된다. 좀 더, 좀 더 깊이…….
키잉──.
그때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다. 흐르던 공기가 억지로 동결된 듯한 감각이다. 나는 멈춰서 꿈의 영역에 둘러져 있는 공단 링을 돌아보았다.
꿈은 차원이면서 차원이 아니다.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니까. 즉 제아무리 유클라프의 공단벽이 대단하다고 한들 이전에는 그 힘이 ‘꿈’에까지 미치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소니아의 힘을 받아들인 유클라프의 공단벽은 꿈마저 고정한다. 주춤한 순간 공단 기둥이 우리 주위를 둘러쌌다.
공간이 고정되었다. 어느 차원으로도 이동할 수 없도록.
수천 킬로미터 너머에서 유클라프와 시선을 맞췄다. 비록 그의 시선은 정확히 나를 향하고 있지는 않지만 내가 자신이 만든 공간 안에 갇혔다는 것은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는 듯했다.
‘꿈을 멈춘다라.’
재능이 없는 사람은 파악하기 힘든 꿈속이라지만 본능적으로 갇힌 것을 느꼈는지 일행이 긴장하며 몸을 굳혔다.
그러나 유클라프, 공간을 가두는 것보다 꿈을 가두는 게 훨씬 어렵다. 당신은 아직 정신마법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지금 나에게는 ‘마법 증폭 서포터’가 붙어 있다.
나는 말없이 김준영의 손을 잡으며 마력을 방출했다. 김준영이 몸을 조금 떨면서도 내 마력을 이끌어 증폭했다. 나는 가두어진 꿈을 녹여 꿈의 경계 하나를 넘어섰다. 우리가 사라진 자리에 유클라프의 마법이 내리꽂혔다.
직후 우리가 있는 곳을 포함하여 꿈의 영역 주위로 무수히 많은 공단벽과 기둥이 생겼다.
저건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다. 김준영과 공명하면서부터 유클라프는 내 위치를 놓쳤다. 저건 영역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우리가, ‘내’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그 위에 에리카의 마법과 카인의 마법이 겹겹이 쌓였다.
지금 트라베리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꿈에 접근한 우리를 쓰러뜨리는 일이 아니다. 영역을 망치지 못하도록 배제하는 일이다. 그렇다고 지키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다른 커븐 로드가 달려오는 것도 시간문제일지도…….
쩌정!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료들에게 전해 주었던 내 꿈 조각을 따라 ‘기억’이 흘러들어 온다. 남아메리카에서 움직이던 릴리가 뒤를 돌아보고 있다.
쨍!
또 한 번 풍경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플로리아다.
루카는 성진, 레일리, 윌리엄과 함께 캐밀 일행을 죽이고 유럽을 탈취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유럽에는 모든 트라던트 중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트라던트, 플로라의 디트리가 있다.
상당히 중요한 트라던트인지 거기에도 커븐 로드가 셋이나 있다. 정확히는 벨라의 공격이 트라던트를 해치지 않도록 막기 위해 둘이 붙은 거다. 벨라, 베로니카, 포츈.
그랬는데 유클라프가 힘을 쓰는 것과 동시에 포츈과 베로니카가 우리가 있는 방향을 돌아봤다. 움직이려던 세 사람을 성진이 막아서고 있는 형국이다.
커븐 로드가 유럽에서 돌아간다면 연맹으로서는 좋은 일이다. 그런데 성진이 막아섰다. 그 의미를 알아챈 것인지 루카도 세 사람의 앞을 막아섰다.
베로니카가 생긋 웃었다.
「유은하구나?」
이제 내가 북아메리카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1분도 되지 않는다. 남아메리카에는 인하와 소영이가 있다. 바로 여기에 오려는 릴리를 인하가 막아섰다. 지금의 인하라면 릴리와 싸울 수 있다.
찰나의 순간, 고민했다. 꿈 그물의 진원지는 지금 과도하게 힘이 부풀어 있다. 꿈과 공간의 힘을 파고들어 가시가 자랄 씨앗을 남길 수 있을 것인가? 남긴다면 정밀히 조정해야 하기에 온 힘을 씨앗에만 집중해야 한다. 옆에 있는 장군 시리즈조차 방해다.
『마스터.』
찰나 머릿속에 떠오른 방법을 바로 실행했다.
세 장군 시리즈와 김준영을 내 꿈속에 집어넣었다. 이러면 장군 시리즈는 방해가 되지 않고, 증폭도 더 쉽게 할 수 있다. 몸이 약한 김준영이 커븐 로드의 마력을 직접 느낄 일도 없다. 문이가 메시지를 보내 네 사람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보조를 부탁했다.
『적정 제한 시간은 40초입니다.』
‘좋아. 어디 한번 해 보자.’
문이와 나는 주위에 펼쳐져 있는 커븐 로드의 마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꿈에 물들어 순식간에 그물 안으로 파고들었다. 어쩌면 몽마와 유클라프는 미약하게나마 내가 꿈의 그물을 건드렸다는 것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정확히는 예감하고 있겠지. 나라면 한 번 정도는 건드릴 것이라고.
꿈의 힘을 지닌 트라던트 탑, 이 영역은 완벽하게 유클라프와 몽마의 영역이다. 중국이나 한국과는 달리 트라던트의 힘이 완벽하게 천지를 통제하고 있다. 꿈을 따라 그 그물 사이를 빠른 속도로 나아간다. 안으로 갈수록 짙어지는 몽마의 마력과 유클라프의 마력을 속이고 또 속인다. 평소보다, 아니, 조금 전보다 더 고양감이 들었다. 김준영이 마법을 증폭해 주고 있어서다.
그렇게 진짜 진원지로, ‘소니아가 묻힌 장소’로 향했다.
소니아의 앞에 멈춰서 나는 숨을 들이켰다. 내가 어지럽다고 생각할 정도로 소니아의 죽음이 잠긴 꿈은 짙디짙었다. 꿈의 그물은 현재 내 힘으로는 없앨 수 없다. 예상하고 있었지만, 좀 더 확실해졌다.
지금도 이 정도인데 모든 트라던트가 공명하면 과연 얼마나 무시무시해질까. 가슴이 섬뜩해졌다. 어쩌면 여러 면에서 나보다 강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잊지 마요, 소니아. 당신은 죽어 시간이 멈췄고, 나는 살아 있어요. 나는 곧 죽음으로 강해진 당신의 힘조차 뛰어넘을 거예요.’
…때문에 이 안에 무언가를 숨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숨기는 게 아니라, ‘속여야’ 한다.
씨앗이 아니라 소니아의 꿈을 똑같이 흉내 낸 ‘가지’를 숨겨야 한다.
도착하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진짜 힘든 것은 여기서부터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작은 한 조각이면 된다. 작은 크리스털 하나를 내가 만든 가짜와 바꿔치기해 소니아의 크리스털과 연결한다.
가장 중요한 건 그물의 인식이다. 그물이 이것을 자신의 힘이라 완벽하게 믿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설령 내 마법이 풀리더라도 이것은 소니아의 마법으로 남는다.
‘꿈에 녹아라. 실체화하여, 융합하라.’
바꿔치기와 암시 때문에 결국 적정 제한 시간을 초과해 버렸다.
쿵! 쿠구구구궁!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을 눈치챈 것일까. 그게 아니면 내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위기감을 느낀 것인가. 유클라프의 힘이 지척까지 가까워졌다. 나는 그물과 공명하며 순식간에 꿈을 뛰어넘었다. 닫혀 가는 공간을 피해, 좁게 남아 있는 꿈길을 따라 도주했다.
쨍! 쨍! 콰직!
그동안에도 경고는 많아지고 있었다. 성진이 벨라를 놓쳤다. 포츈이 성진의 앞을 막아선 탓이다. 벨라와 베로니카가 여기에──도착했다.
“벨라, 멈춰라.”
에리카가 벨라를 막아섰다. 허공에 공간이 열리며 안에서 상처투성이인 성진이 나왔다. 벨라의 힘이 ‘벤다’라면 성진의 힘은 ‘죽인다’다. 놀랍게도 성진은 벨라를 상대로 상성에 우위를 차지한다. 하긴, 저 녀석의 상성이 언제는 다른 사람에 비해 낮았던 적이 있냐 싶지만.
즉 성진은 유일하게 벨라의 베는 힘을 막아 낼 수 있다. 유일하게 벨라에게 저주를 걸 수 있고, 유일하게 벨라의 힘을 상쇄시킬 수 있다. ……저번에 걸었던 것 같은 저주는 이제 통하지 않는다는 모양이지만.
성진이 벨라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마찬가지로 휘둘러진 낫이 성진의 종말을 베어 냈다.
벨라치고는 상당히 마력이나 범위를 잘 제어했다. 벨라의 기술이 아슬아슬하게 그물에 닿지 않고 비껴갔다. 성진이 파도를 일으켜, 검을 휘둘러 벨라의 날을 가까스로 파훼했다. 그러나 잔흔이 성진을 스치고 지나쳤다.
“키키키킥! 이명에 걸맞지 않게 한심한 모습이잖아! 아니, 이렇게나 실력 차가 나는데 버티는 걸 가상하게 여겨야 하나?”
베로니카가 그녀의 주위에 펼쳐진 창 중 하나를 끌어오며 말했다.
“포츈 할머니는 루카가 잡아 두고 있나 봐. 예상보다 더 강했어. 현세대 최강의 인간 마법사다워.”
“확실히 그 여자의 봉인은 베는 맛이 좋았지!”
낫을 쥔 채 킥킥 웃던 벨라가 뒤에 선 에리카를 곁눈질하며 물었다.
“그래서~? 유클라프가 움직였다는 건, 유은하지? 대체 어디에 숨었으려나?”
벨라가 낫을 들어 성진을 겨누었다.
“이놈의 목을 붙잡으면 나오려나?”
“불가능할걸.”
“자신만만하긴.”
“내 목을 베려면 소니아의 유산을 벨 각오도 해야 할걸?”
“꺄하하하하! 설마 나를 앞에 두고 그런 도발을 할 줄이야! 그런데 잊지 말라고.”
벨라의 음성이 훅 가라앉았다.
“난 지금 혼자가 아니야. 왜 저 장소를 라프가 지키고 있는지, 왜 베로니카가 따라왔는지, 왜 에리카가 나섰는지……잘 생각해야지?”
일렁
직후 공간이 일렁거리며 릴리가 나타났다. 뒤를 잇듯 공간을 가르며 인하와 소영이가 나타났다. 인하가 이를 드러냈다.
“벨라…….”
“틀림없네. 릴리. 유은하의 소리 들려?”
“안 들려.”
릴리가 입술을 삐죽였다.
“완벽하게 안 들려. 어쩌면 소니아의 소리에 섞였을지도 모르겠어.”
“흐음.”
“행여나 베지 마.”
“그런 건 나도 알아.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우리의 자랑스러운 파괴 신님이지?”
릴리가 샐쭉하게 웃었다.
나는 그사이 꿈을 움직였다. 동료들까지 여기 와 버렸다. 동료들과 함께 벗어나려면 밑 작업이 필요하다.
『은하 선배! 선배! 인하 선배랑 소영 선배는……괜찮을까요? 벨라를 막을 수 있는 마법은…….』
『성진이가 있어. 버틸 수 있어. 우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네.』
모습을 숨기고 날아간 별 조각이 그물 사이에 동화되어 달라붙었다. 그물을 해석하고 분류한다. 꿈의 흐름, 속도, 순서, 그나마 힘이 약하게 흐르는 그물.
“흐응~. 뭐, 됐어. 그보다 자, 슬슬 모습을 드러내는 게 어때?”
벨라가 가늘게 뜬 눈으로 릴리를 흘기더니 허공을 향해, 나를 향해 말을 걸었다.
“확실히 나는 내 힘을 주체 못 해. 아니지. 정확히는 제어할 생각이 없다고, 제어해서는 안 된다고 해야겠지? 내지른 기술이 아무것도 베지 않는 건 내 신념에 위반되는 일이라서.”
진지하게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다. 신념은 무슨. 벨라가 사랑스럽다는 듯이 새까만 낫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이 아이도 벨 수 있다면 별말 안 해. 나는 골라서 벨 수 없는 게 아니야. 고를 필요성을 잘 못 느낄 뿐이지! 그럴 땐 정하면 되는 거야. ‘사람’만 베겠다고!”
벨라가 낫을 허공을 향해 겨누었다.
검은 낫을 따라 사슬이 촤르륵촤르륵 섬뜩한 소리를 내며 끌려갔다.
“괜찮지? 괜찮다고? 좋아, 좋아. 그럼 오랜만에 베어 볼까? 표적 제한!”
벨라의 외침과 함께 낫 주위로 검은 폭풍이 불었다. 벨라의 주위로 유클라프의 검은 공단벽과 에리카의 코럴색 벽이 늘어섰다.
‘공명.’
동시에 나도 움직였다. 빠르게, 그러나 침착하게 파악한 정보를 통해 나와 그물을 동화시킨다. 그물에서 흘러들어 온 ‘악령’의 상념이 정신을 찌릿찌릿하게 꿰뚫었다. 기분이 더럽긴 하지만 그래도 버틸 만하다. 손을 뻗어 그물의 힘을 더 끌어왔다. 김준영이 끌어온 가호가 그 속도를 가속시켰다.
벨라의 낫이 가리킨 목표는 나, 혹은 사람.
그렇다면 보여 주면 된다.
꿈의 그물 안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
퍼져 나간 벨라의 마력은 단순한 폭풍일 뿐임에도 우리의 존재를 분쇄해 버릴 것 같았다. 몇 없는 응용 기술조차 무언가를 베기 위한 것. 베기 전의 준비 단계조차 이토록 위협적이다. 그러나 오늘의 벨라는 그렇게 무섭지 않다. 그녀는 지금 드물게도 인내하고 제어하고 있다. 그 벨라가! 동료의 흔적을 없애지 않기 위해서!
‘빌어먹을 놈.’
흩어지는 검은 폭풍을 통해 벨라가 어떤 기술을 쓸 것인지를 대강이나마 읽었다. 지금껏 나는 벨라의 마음도 꿈도 마력도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그녀의 영혼, 마력, 꿈조차 다가오는 자를 베어 버린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모든 것이 칼날 같다. 단편을 읽는 것만으로 정신력이 베어진다. 그나마 꿈에서 접근했기에 멀쩡한 것이다. 보통 사람은 그녀에게 정신마법을 사용하는 것만으로 정신도 마법도 육체도 산산조각 나 죽음에 달하리라. 실제로 그렇게 죽은 사람이 꽤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꿈속에서라면 버틸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그리하여 지금의 내 존재를 벨라 앞에 들이민다. 벨라가 표적으로 지정한 것은 ‘나’다. 동시에 새벽별무리이거나, ‘인간’이다. 죽음을 불러오는 벨라의 눈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살아 있는 존재를 꿰뚫고 규정한다. 동료들과, 나와, ──일대의 꿈의 그물이 새까맣게 물들어 버렸다.
“……!”
잘나신 커븐 로드들이 당황할 정도의 결과였나 보다. 만면에 광기에 찬 웃음을 띄우고 있던 벨라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환상인가?”
벨라가 낫을 치켜들었다. 에리카가 당황했다.
“벨라!”
“괜찮아! 조금만 벨게!”
벨라의 진짜 무서운 점은 그녀가 벨 수 없는 것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마음으로 인식한 모든 것을 벤다. 사물도, 사람도, 마법도, 영혼도, 정신도, 진로에 있는 것은 무엇 하나 빠짐없이 죄다 베어 버린다.
‘갈라진다.’
동화했다고 해도 그물을 끌어들였다 뿐이지 내 일부가 그물에 실린 게 아니다. 그래도 그물에 실린 내 꿈은 베어지고 말았다.
벨라는 그물이 까맣게 변한 게 환상이라 판단했지만, 이건 환각마법으로 꿈의 그물을 조종한 결과지 베면 사라지는 허상이 아니었다. 그물이 한 차례 베어졌으나 내가 붙인 별 조각이 남아 있는 그물은 여전히 검게 물든 그대로였다.
‘별 조각이 붙은 그물은 내 것. 그물 스스로가 내 마법이라 인식하고 있지.’
벨라가 눈을 가늘게 뜨며 혀를 찼다.
“환상이 아니란 건가……. 라프!”
설마 유클라프가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겠는가. 그는 그물이 검게 물든 순간부터 탑에서 계속 조정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내 기술이 우위라 되찾지 못했을 뿐이다.
화악─.
유클라프는 결국 가디언을 보냈다. 꿈의 그물만의 가디언, 즉 소니아의 몽마다.
「소니아한테서 떨어져!」
그물을 따라 퍼지는 염파를 듣고 나는 조금 놀랐다. 소니아의 기억 속에서조차 정령은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니아도 나도 저 정령은 말을 하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물을 통해 진화했기 때문인가?’
그물을 따라 정령의 힘이 퍼졌다. 정령이 필요 없는 그물을 끊어 내고 새로 그물을 만든다. 타이밍에 맞춰 나는 손가락을 부딪쳤다.
파직
“이런……!”
콰과과과과광─!!!
그와 동시에 내가 그물에 심어 둔 씨앗이 자라나며 가시가 폭발했다. 정령과 유클라프의 힘이 폭발에 의해 혼란스럽게 엉켰다. 그사이 나는 꿈의 그물을 새로 끌어와 동료들의 모습을 가렸다.
“너무 그러지 마…….”
벨라의 기세가 변했다. 새까맣게 번지는 검은 오라. 찰나 벨라의 공격에 반응한 것은 오직 성진뿐이었다.
서걱!
그러나 벨라의 검격은 아슬아슬하게 성진의 반응 범위를 빗겨 갔다. 그리하여 벨라는 검게 물든 꿈의 그물을 통째로 잘라 냈다.
“그렇게 나오면 직접 베어 낼 수밖에 없잖아. 킥킥킥!”
……아. 벨라는 이제 ‘이성적으로’ 벨 생각이다. 감으로 위치를 파악하고, 그물의 희생을 최대한 줄여, 그물과 함께 우리를 베어 버릴 심산이다.
몽마의 힘이 내가 퍼트린 씨앗을 뒤덮었다. 이제 씨앗은 그물에서 돌출되어 그물의 적으로 간주되고 있다. 벨라가 낫을 들었다. 다음 공격까지는 성진이 가까스로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다음 공격은 내가 막아야 할 것이다. 나는 바짝 집중했다.
콰과과과과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