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437
우리와 무르시엘, 혹은 장군 시리즈의 관계는 여전히 적대적이다. 적의가 가장 심한 것은 도중에 우리 일에 끼어든 노아와 김준영이었다. 특히 김준영은 함께 꿈의 그물로 향했을 때와는 달리 음울한 눈으로 첸을 노려보았다.
“자세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습관인지 이야기를 하며 첸이 부채를 만지작거렸다.
“은하 님, 당신은 ‘반’을 처음 만났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반쯤 편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나를 바라보는 첸의 눈동자에 낯선 감정이 어렸다. 그 감정은 순수한 호기심 같기도 했고, 기대감 같기도 했으며, 그리움 같기도 했다.
“반?”
“설마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요. 여러분은 반이나 데미와 여러 번 마주쳤지 않습니까.”
모를 리가 없다. 클라인 남매의 측근이자 장군 시리즈, 좀비 반과 드래곤 데미안.
“참고로 제가 말한 ‘기억하십니까?’는 참극 이전에 그와 만났던 것을 기억하고 있느냐는 의미입니다. 기억하십니까? 반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데미는 기억하고 있겠지요?”
첸의 눈동자가 이번엔 확실한 기대감을 담고 흔들렸다.
나는 첸을 보며 기억을 되짚었다.
“참극 이전에?”
유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마찬가지로 캘리와 대현 역시 영문을 몰랐다. …혹시 트라베리아의 실험장에 갇혔을 때를 묻는 건가? 그리고 그 장소에 갇혔던 사람은 여기에 나 혼자가 아니었다. 나보다 먼저 형일 아저씨가 대답했다.
“실험장 말하는 거야? 기억하지. 그곳에 있던 괴물 중 반은 유일하게 말을 했으니까.”
“……그렇군요. 당신도 거기에 갇혔습니까.”
이어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해요.”
첸이 안도하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눈을 살포시 내리깔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희 장군 시리즈의 자아 생성 유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처음부터 자아가 있었던 자, 또 하나는 실험을 거듭하다 보니 자아가 생긴 자입니다.”
첸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저와 라스는 처음부터 자아가 있었습니다.”
손장난을 치듯 부채가 한 단씩 접히다가, 다시 한 단씩 펼쳐졌다. 이윽고 첸이 다시 시선을 올려 나를 마주 봤다.
“당시 트라베리아가 만든 키메라는 다섯 자리 숫자를 넘겼습니다만, 자아가 있는 건 저와 라스를 포함해 200명 정도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말에 조금 놀랐다. 200이라니…….
“지금보다 훨씬 많잖아?”
첸이 엷게 미소 지었다.
“대부분은 참극이 시작되기 전에 실험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으니까요.”
“…….”
질문을 던졌던 소영이가 굳었다.
“자아가 있는 자끼리는 교류가 제법 있는 편이었습니다. 당시에도 자아가 있는 키메라는 중요하게 취급되었고, 우리는 한곳에서 관리되었습니다. 그때 이미 우리는 트라베리아를 증오하고 있었습니다.”
서론이 생각보다 길었다.
“저희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지는 않습니다. 저만 해도 태어난 지 30년이 넘었습니다. 우리를 만드는 실험은 생각보다 오래되었거든요.”
알고 있다. 트라베리아의 실험장에서 탈출했을 때, 이런 실험장이 몇십 년 전부터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거기다 자아를 가진 생명체라니, 트라베리아라고 해서 간단히 만들 수 있을 리가 없다.
“증오했으나 그뿐이었습니다. 저희는 어차피 트라베리아의 손에 만들어진 괴물. 자아를 가졌든, 가지지 않았든, 이용당하든, 버려지든, 우리는 그들의 손에 운명을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선택지는 가질 수 없었지요.”
자조하듯 중얼거리던 첸의 입가에 엷게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데 어느 날 실험장을 지키다 돌아온 반이 말하더군요. 이상한 여자를 만났다고.”
“…….”
“은하 님, 반을 처음 만났던 때를 기억하신다고 했지요? 그때 반이 무엇을 했고, 당신이 무엇을 했는지,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것을 묻는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반이 누군지 알아채고 나서 몇 번 되새겼던 기억이니까.
“그를 만난 건……트라베리아의 단절된 실험장 안, 구조도 모양도 뒤죽박죽인 어느 건물 안에서였어요. 싸웠고, 이겼죠.”
너무 간단했기에 조금 더 덧붙였다.
“당시에도 그는 힘으로 밀어붙이는 타입이었어요. 저는 환각으로 숨었고요. 그런데 환각을 감으로 맞추더군요.”
“맞아. 은하 아가씨 그때 기겁했었지? 피할 틈도 없이 다가온 주먹을 팔을 교차해 막더니 엄청 아파하면서 바로 주먹을 날렸잖아. 그런데 사실은 은하 아가씨도 엄청난 괴력이라 주먹 한 방으로 그 녀석은 KO당했고. 늑골이 나갔다고 했었나.”
그랬다. 거기까지 이야기가 나왔음에도 첸은 여전히 눈으로 내게 무언가를 재촉했다. 말할 게 더 있었던가?
“그런 체질 변화가 생겼다는 건 그때 처음 알아서……힘 조절을 못 해서 당황했던 게 기억나네요. 그냥 기절만 시킬 생각이었는데 뼈까지 부러뜨리다니……. 당황해서 사과하고, 마음이 급해서 몸을 돌렸던가요.”
“…….”
“정말로 이게 끝이에요. 뭐가 더 궁금한 거죠?”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첸이 ‘후’ 하고 한숨 같은 웃음을 뱉었다.
“아닙니다. 충분합니다.”
부채를 내린 첸의 입가에 다정한, 혹은 안타까움을 담은 미소가 맺혔다.
“실험장에 갔다 온 반이 이상한 여자를 보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반을 힘으로 이긴 것도 놀라운데, 주먹을 내질렀던 여자가 다친 반을 보더니 당황하며 사과를 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요, 사과를요.”
“그게 뭐가…….”
“그야말로 생각한 적도 없던,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이야기였습니다. 괴물인 저희한테 인간이 사과를 하다니요.”
“…….”
나는 흠칫 놀라 무심코 입을 다물었다.
“실험장에 끌려온 인간은 모두 영문도 모르고 실험장에 갇힙니다. 키메라는 대부분 이성이 없고, 이성이 있더라도 인간과는 다른 모습을 지녔습니다. 그래요, ‘괴물’입니다. 그런데 확인해 보니 그 여자는 자신을 쓰러뜨리려 했던 적에게 사과를 했을 뿐만 아니라, 실험장에 있는 키메라를 한 놈도 죽이지 않았다지 뭡니까. 일정 이상 공격을 받아 마법석을 남기고 역소환된 놈은 있어도 죽은 놈은 없었습니다.”
“…….”
“한 명도, 단 한 마리도.”
첸의 말을 들으며 나는 고민했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으나 알 수 없었다.
“……그게 왜 이상하죠?”
“하.”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영이와 인성이는 서로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으며, 성진은 한숨을 내쉬었고, 인하는 나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기울였다. 첸이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
“아니, 설마 저희가 생각한 것보다 더할 줄은 몰랐군요. 왜 이상하냐고 물었습니까?”
첸이 웃음기 어린 얼굴로 내게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그곳에 있던 괴물을 죽이지 않았습니까? 무슨 생각이었지요?”
왜 죽이지 않았냐니. 당연한 것 아닌가?
“살아 있었으니까요.”
첸의 입꼬리가 더 올라갔다.
“하지만 당신을 죽이려 했습니다. 많은 인간을 죽였습니다.”
“그땐……그들에 의해 다른 사람이 죽었을 거란 생각은 못 했어요. 알고 난 후에도……기능을 멈추면 어차피 사라지니까, 일부러 피를 보고 싶지는 않아서.”
“아무래도 당신에게 키메라는 흉포한 맹수 정도였던 모양이로군요.”
그 말대로다. 동물, 딱 그거였다. 죽인다는 생각은 차마 하지도 못했다. 라라를 떠올리기도 했다. 그때는 그랬다.
“그때는 그랬죠. 하지만……저는 그때 키메라를 죽였어요.”
아니, 나는 말을 바꿨다.
“죽이려 했어요.”
“‘데미안’을 말하는 겁니까?”
“네.”
“당연한 겁니다. 데미안은 당신을 죽이려 하지 않았습니까.”
첸이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반이 당신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을 때 드물게도 데미안이 반응을 하더군요. 그 여자라면 자신도 만났다, 재미있고 특이한 여자라며, 꽤 즐거워했습니다.”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 검은 드래곤, 데미안과 만난 기억에는 하나같이 좋은 것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첫 만남이 제일 최악이었다.
“뭐어 데미가 당신에게 흥미를 가진 이유는 반과는 전혀 달랐지만요. 전투광답게 당신의 실력과 재능에 흥미를 가진 것이니.”
“어라? 그 드래곤이라면 나랑 하진이도 이겼었는데?”
“아, 당신이 그 궁수입니까.”
보아하니 형일 아저씨와 하진 아저씨의 이야기도 일단 들은 적은 있는 모양이다.
“데미가 말하길, 그 세계에서 자신을 이긴 자가 세 명 있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녀석은 뼛속까지 호전적인지라, 자신이 이긴 상대한테는 흥미를 끊습니다.”
형일 아저씨가 인상을 찌푸렸다.
“와……. 자기가 더 강해졌다 그거지?”
첸이 형일 아저씨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그리고 데미가 은하 씨에게 흥미를 가졌던 이유 역시 그와 비슷합니다. 한 번은 이겼던 상대가 얼마 후 전보다 강해져 자신을 꺾었다. 당신의 무시무시한 잠재력과 성장 속도에 흥미를 가진 겁니다.”
나는 말없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당신이 그때 데미안을 죽이려 들지 않았거나, 혹은 다시 만난 당신이 여전히 키메라를 죽이길 주저하는 유약한 자였다면, 나와 라스, 데미안은 당신에게 신경을 끄거나 실망했을 겁니다. 목숨의 위협을 앞에 두고 싸우지 않는다면 그건 멍청이입니다. 마음이 약하든 약하지 않든요. 아니라니 다행이지요. 아니라서 기쁩니다.”
“…….”
“얼마 전에 만났을 때 데미가 즐거워하며 당신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신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예상을 벗어난다고요. 한국에서 만났을 때는 다시 저보다 약했던 여자가, 플로리아에서 만났을 땐 다시 자신과 대등해져 있었다며. 자신이 한계를 가진 키메라라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라더군요.”
말을 잇는 첸의 표정이 아까와는 전혀 달랐다. 천진난만한 얼굴로 즐거워하고 있다. 반과 데미안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혹시나 하는 의문이 생겨났다. 혹시…….
“혹시 남은 세 명의 협력자 중 두 명은 반과 데미안인가요?”
의문을 먼저 말로 표현한 것은 인성이였다. 첸이 곧 얼굴에 선명히 드러났던 즐거움을 진정시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누구라고? 혹시나 하긴 했지만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에 우리는 술렁거렸다.
반과 데미안은 단순한 장군 시리즈가 아니다. 클라인 남매의 측근이다. 커븐 로드의 측근!
거기다 반은 몰라도 데미안이 트라베리아를 배신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가……인간에게 전혀 흥미가 없는 듯하던 그 남자가 인간과 손을 잡았다고?
내가 놀라 멍해져 있는 사이 인성이가 또 한 번 첸에게 물었다.
“마지막 한 명은 누구죠?”
“루니라입니다.”
“루니라?”
“고양이 수인입니다. 여러분은 모를 겁니다. 참극이 일어난 후에도 실험체로 쓰이다가 2년 전 디나 님의 도움으로 죽은 것으로 하고 트라베리아와 연을 끊었습니다.”
이들의 인간 협력자가 디나라는 것은 듀크를 통해 이미 알고 있다. 곧 첸이 다시 나를 향해 말을 걸었다.
“은하 님, 이전에 말했었지요. 저희가 트라베리아를 적대하고, 인간과 협력하게 된 첫 번째 원인이, 당신이라고.”
“……네.”
나는 당황한 심정을 추스르며 첸과 시선을 마주했다. 나를 바라보는 첸의 눈동자는 여태껏 숨겨 왔다는 게 놀라울 정도로 따스하고 다정했다.
“그 말은 진실입니다. 당신이 있었기에 저희는 인간에게 호의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
“저희도 저희가 괴물인 것을 압니다. 실험장에 끌려온 인간들에게 저희가 얼마나 무서운 괴물일지 모를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실험장에서가 아니더라도 저희는 인간에게 괴물입니다. 그렇게 생각했고, 때문에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까지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습니다.”
“…….”
“어쩌면 저희를 괴물로 생각하지 않는 인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첸의 말이 맞았다. 그들이 트라베리아를 배신해, 결국엔 그들만의 힘으로 자유를 되찾았다고 한들, 인간은 그들을 적대시했으리라. 왜냐면 그들은 트라베리아가 만든 키메라, 인간의 목숨을 위협하는 ‘괴물’이니까. 그리고 마찬가지로 키메라에게도 인간은 적이며 괴물이었을 것이다. 마찬가지였을……것이다.
“그런데 우리를 괴물이 아니라 존중해야 하는 상대로 봐 주는 인간이 있었습니다. 다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사과하고, 살아 있다는 이유로 저희를 죽이지 않습니다. 그런 인간이 세상에 존재했던 겁니다.”
“…….”
“그건 저희의 사고를 뒤집는 발견이었습니다. 어쩌면 인간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 모른다고, 친구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적어도 처음으로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를 준 것은 당신이었습니다. 당신이 알려 준 겁니다.”
나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첸의 시선은 순수하고 곧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첸의 미소가 짙어졌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가슴이 괴로웠다.
그때, 나는, 그저, 단순히…….
그때의 나는 연약했다. 가장 연약한 건 마음이었다. 싸울 각오도, 싸우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지금도 그때의 내가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쁘다면 지금이 더 나쁘지.
그때 내가 사과한 건……그래, 죄악감 때문이 맞다. 짐승인지, 사람인지, 괴물인지도 알 수 없지만 그는 감정을 느끼는 살아 있는 존재였다. 그래서 사과했다.
그냥 가벼운 마음이었다. 죄책감을 덜어 내기 위한 의미 없는 사과였다. 그런데 그 행동 하나가 이런 결과를 낳을 줄 누가 알았으랴.
첸은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이야기를 이었다.
“반의 이야기는 저희에게 파문을 던졌습니다. 트라베리아의 실험은 혹독합니다. 인간에게만이 아니라, 저희에게도 혹독합니다. 아까 자아를 가진 키메라가 200여 명 정도 있다고 말했습니다만, 그 숫자는 월 단위로 크게 늘어나거나 줄어들곤 했습니다. 실험을 견디지 못하고 죽거나, 인간에게 죽거나, ……마녀들의 제물이 되기도 했지요.”
나는 순간 한국에서 반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장군 시리즈라고 꼭 트라베리아를 따르지는 않는다고 했던가. 각인된 병아리처럼 진심으로 따르는 자들도 있었지만 죽고 싶지 않아 마지못해 따르거나, 혹은 저항하다가 척살됐다고도 했다.
“그럼에도 저희가 진심으로 트라베리아를 벗어나겠다고 결심하지 못한 것은 인간들 역시 우리를 똑같이 취급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희망이 생겼습니다. 어쩌면 모든 인간이 그렇지는 않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요. 도망가자는, 자유를 얻자는 의지가 진심이 된 것은 그 무렵입니다.”
첸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내가 첫 번째 원인이 되었다는 것은 이런 의미였나 보다.
“저와 라스, 데미는 본래부터 트라베리아에서 벗어날 생각으로 정보를 교류하고 있었습니다마는, 거기에 반이 합류한 이유는 순전히 당신 덕입니다. 반은 본래부터 무심한 성정으로, 자신이 지배당하든 말든 관심이 없었거든요. 저나 데미는 지배당하는 것이 싫어 벗어나려고 한 것이지만요.”
이어 첸이 헛웃음을 지었다.
“우습고 어리석다 생각하시겠지만 무심한 반이나 겁쟁이 노리스가 진심으로 트라베리아를 적으로 돌리고자 결심한 것은 오로지 당신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노리스는 누구야?”
“동료입니다. 지금은 이 세상에 없지만요.”
죽었다는 뜻인가. 질문했던 소영이가 또 한 번 굳었다.
“트라베리아에 저항하려 한 게 지금 살아 있는 6명뿐일 리 없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동료가 20명 정도 있었습니다. 트라베리아에게 바로 진심을 들키지 않을 만한 능력자를 고르고 골라 이야기를 나눈 20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제외한 이들은 실험을 견디지 못하고 죽거나, 트라베리아에 척살당하거나, 인간에게 졌습니다.”
“…….”
우리는 무겁게 침묵했다. 예상은 했지만 장군 시리즈의 생존은 인간만큼이나, 인간 이상으로 처절했다. 첸의 눈동자 역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노리스는 반의 이야기를 듣고 당신의 팬이 되었습니다. 언젠가 꼭 당신을 만날 거라고,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많이 기대했었습니다. 반은……처음으로 받은 사과가 상당히 마음을 울렸던 모양이지요. 입만 열면 당신을 만나고 싶다며 이야기하고는 했습니다.”
무거운 이야기를 무거운 기분으로 듣고 있던 나는 순간 떠오르는 것이 있어 숨을 삼켰다. 그건……언젠가 한국에서 반이 했던 이야기다.
‘만나고 싶은 인간이 있거든…….’
‘데미는 한 번 더 싸우고 싶어 하고 있고……난 그냥……만나고 싶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 우리 목숨을 신경 쓴 인간은……. 데미는 정신이 빠졌다고 말했지만…….’
당황해서 입을 가리며 그날의 일을 되짚었다. 첸의 말로 비추어 보아 그 인간이 ‘나’를 가리키는 것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말로만 들었던 이야기에 그날 반이 보여 줬던 눈빛과 감정이 겹치니 무척 당혹스러워졌다. 그때 내가 무엇에 놀랐는지도 떠올랐기 때문이다.
‘장군 시리즈가 인간을 사랑하다니.’
그리워하는 듯 애틋했던 눈동자와 감정. 그때 나는 그의 감정을 그렇게 결론 내렸다. 그런데 그때 반이 생각한 상대가 설마 나였을 줄이야. 심지어 나는 반에게 그 인간을 사랑하느냐고 묻기까지 했다!
그날 내가 본 감정은 연애 감정이 틀림없을까? 처음 준 다정함에 각인된 건 아니었던가? 그렇든 아니든, 그 감정이 ‘사랑’의 일종이란 것만은 틀림없었다.
‘반은 모르겠다고 대답했지만……미친.’
흘러나온 영혼을 통해 감정을 읽어 내기라도 한 것일까. 첸이 나를 보며 눈가를 살풋 접었다.
“저도 놀랐답니다. 울고, 분노하고, 절망하는 모습까지도 봤지만, 설마 저희가 사랑을, 그것도 연애 감정을 느낄 수 있을 줄은 몰랐거든요. 누군가를 ‘사랑’한 키메라는 아마 반이 세계 최초일 겁니다.”
“뭐?”
골치 아파하는 내 옆에서 소영이가 기겁했다.
“사랑?”
첸이 놀리듯이 소영이를 흘겼다.
“이야기를 들었다면 아실 것 아닙니까. 한 번 만난 이를 잊지 못하고 목숨까지 걸며 만나고 싶어 한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듣고 보니! 아니, 하지만, 으윽! 너희가 인간만큼 감정을 느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당황하며 복잡한 표정으로 내 주위를 둘러보던 소영이가 몸을 떨었다.
“하필이면 은하를 좋아하냐! 상황 복잡해지게! 불쌍하게!”
소영이의 시선을 따라 내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인하였다. 그러나 인하는 드물게도 불쾌함보다는 놀람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어 나는 성진이나 인성이, 동료들을 차례차례 살폈다. 다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만 성진만은 유일하게 놀람보다 불쾌함이 앞서는 모양이었다. 살기가 스산하게 스쳤다 사라졌다. 모두의 시선이 은근슬쩍 성진을 향했다.
놀랍지도 않았다. 인하 다음으로 나를 과보호하는 게 성진이니. 세계가 이 꼴이 되고부터는 날이 갈수록 과보호가 심해지고 있다. 거기다 장군 시리즈가 나를 사랑한다고 하니, 걱정될 만도 하다. 장군 시리즈는……그들이 설령 우리와 같은 편이 되고자 마음먹었다 한들……인간과는 다른 환경에서 자랐다. 사랑을 어떤 형태로 표현할지 가늠할 수 없다. 나도 장군 시리즈가 동료 중 다른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했다면 걱정했을 것이다.
“흠, 불쌍합니까?”
“겁나 불쌍해.”
첸이 의아한 기색으로 묻자 소영이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너 친구의 감정을 함부로 말하고 다녀도 돼? 좀 그렇지 않아?”
“아, 괜찮습니다. 말해도 된다고 했거든요. 첫사랑이라 그런지 그는 좋아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답니다.”
으음. 나는 작게 신음하며 물었다.
“전에 만났을 때는……. 사실, 전에 만나고 싶은 인간이 있다기에, 상대가 저인 줄도 모르고 그 사람을 좋아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는 모른다고 대답했는데…….”
“아, 들었습니다. 좋아하는 상대에게, 좋아하는 상대인지도 모르고 이야기를 듣고서야 자각하다니,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사랑이 무엇인지 공부하다가 깨달았다는 모양입니다. 참 반다워요.”
이어 첸이 어쩐지 즐거운 기색으로 내게 부탁했다.
“곤란하다면 부디 정중하게 거절해 주셨으면 합니다. 상당히 진심이거든요.”
“……그러죠.”
나는 당황스러운 분위기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으로 머리를 굴렸다. 곧 화제가 떠올랐다.
“……당신과 데미안 씨, 반 씨, 루니라 씨가 트라베리아에 대항하려 하는 이유는 알았습니다.”
끝까지 실험체로 쓰이다 죽은 것으로 하고 도망쳤다고 했나. 인간 협력자가 첫 번째로 구한 장군 시리즈, 루니라.
“그럼 라스 씨와 듀크 씨는 어떤가요? 비슷한 이유인가요?”
“이유야 결국 같지요.”
첸이 가볍게 내 말을 받았다. 그가 펼치고 있던 부채를 입가에 대며 완전히 접었다.
“트라베리아를 싫어하기에 그들과 대치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만 거기에 담긴 사정은 각기 다르지요. 더군다나 두 사람의 사정은 저보다 훨씬 한이 깊습니다.”
무심한 얼굴로 서 있던 라스가 문득 이를 드러냈다. 짙은 초록색 눈동자 안에 진득하게 들끓는 분노가 어렴풋이 드러난다.
“트라베리아의 손에 태어난 저희는 강해지기 위해 트라베리아에 의해 다양한 실험을 받았습니다만……라스는 개중에서도 강도가 심했습니다. 지금은 라스의 감정이 가라앉아 있으니 모르시겠지만…….”
첸이 눈치를 보듯 라스를 흘끗 보았다. 어느새 라스는 다시 평온한 얼굴로 첸과 눈을 마주했다.
“라스의 힘은 감정에 비례해 강해집니다. 그러니 사실 인하 님과 싸웠을 때 라스의 실력은 최대치가 아니었습니다.”
“뭐?”
“라스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으니까요.”
인하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꽤나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다.
“라스는 분노할수록 강해집니다. 라스는 그들이 만든 키메라 중에서도 꽤나 특수한 개체입니다. 우연히 탄생한, 가공할 만한 특수능력을 가진 특수한 개체. 트라베리아가 아끼고 아껴 특수하게 연마한 원석이랍니다.”
라스가 눈을 깜빡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남 말.”
“흠, 그렇긴 하지요.”
그렇게 말하는 첸도 라스만큼이나 특수한 능력을 가진 개체였다. 하지만, 분노할수록 강해진다라…….
“하지만 저와 라스는 경우가 다릅니다. 제가 가진 능력은 분리하는 것으로, 이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갈고닦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라스는 아닙니다.”
라스의 표정이 점점 차가워졌다.
“라스는 ‘분노하는’ 능력을 제어하지 못하였습니다. 악령과 감정 더미에서 탄생한 라스는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쉽게 폭주했지요. 처음에는 그래도 어려서 괜찮았는데…….”
“그건 감정이 약했다는 뜻이야? 아니면 힘이 약했다는 뜻이야?”
“으음……둘 다 맞습니다. 뭐랄까……저도 드문 타입이지만 라스는 저희 중에서 가장 희귀합니다. 라스는 ‘성장하는’ 타입이었습니다.”
키메라가 성장한다? 무슨 뜻인지 쉽사리 감이 오지 않았다. 첸의 설명이 이어졌다.
“라스는 처음에는 어린아이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감정이 격해질 때마다 힘이 몇 배나 불어나며 모습이 자랐습니다.”
“……!”
자라났다고? 그러니까……진짜 보통 생명체처럼?
우리는 놀란 눈으로 라스를 보았다. 라스는 귀찮은 기색으로 시선을 굴리더니 다시 제 옆에 앉은 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감정이나 마력 등 ‘에너지’를 식량으로 삼아 자라났죠. 그 변화를 눈치채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눈치채고 나선 취급이 달라졌습니다.”
첸이 자신을 보던 라스와 시선을 맞추고는 안쓰러운 아이를 대하듯 라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의 ‘독’에 걸맞은 감정과 마력을 무리하게 주입했으며, 그의 분노를 증폭시키기 위해 온갖 끔찍한 실험을 자행했습니다. 몸에 상처를 입히거나, 누군가의 끔찍한 기억을 보여 주거나, 눈앞에서 동기를 죽이고, 혹은 죽이게 하기도 했죠.”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기분이 더러웠다. 목소리 속에 섞인 감정이 내게 ‘기억’을 보여 줬다. 얼핏 스친 피투성이의 살육 현장 속에 피투성이가 된 첸이 있었다.
“‘동기’? 그런 게 있어?”
“네. 같은 세대, 같은 장소에서 태어난 키메라를 ‘동기’라 부릅니다. 저와 라스도 동기입니다.”
첸은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꼭 이성이 없더라도요.”
다시 한번 기억 파편이 머리를 때렸다. 커다란 여우를 닮은 키메라 위에 라스와 첸이 올라타 있었다. 이성이 있든 없든 키메라끼리는, 혹은 ‘동기’끼리는 통한다는 것일까.
“그러는 동안 라스는 쉽게 이지를 상실하게 됐습니다. 기억과 분노가 뒤섞여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는 일이 잦아졌죠. ……그때마다 제가 영혼과 기억을 갈라 라스에게 제정신을 되찾아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라스는 줄곧 파트너였습니다.”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얼핏 눈치챘다.
라스의 능력에 트라베리아가 그토록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면, 어쩌면 희귀한 능력자인 첸 역시 분노 유발을 위해 이용당했을지 모른다. 그것도 첸의 능력을 개화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첸을 보는 라스의 눈동자와 몸 주위로 진득한 분노가 일그러졌다 사라졌다.
“지금은 분노를 잘 조절할 수 있습니다. 너무 자제해서 트라베리아가 재미없어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잘 참는 만큼 한번 터졌을 때 힘이 대단하여 트라베리아도 딱히 더 분노하라며 건드리진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S랭크 상위 정도의 실력이면 충분하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