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439
“루니라는 특수한 체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본래 모든 속성이 동등하게 섞인 속성을 무속성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가끔 빛과 어둠의 힘을 동등하게 가지고 있음에도 완전히 섞이지 못하고 따로따로 분리된 채 부딪치는 체질이 있습니다.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이 체질을 ‘혼돈속성’이라 합니다.”
혼돈속성, 읽어 본 적이 있다. 학생 시절, 특수속성에 관심을 가지고 조사할 때 몇 번 책을 통해 보았던 체질이다.
혼돈속성을 타고난 마법사는 강력한 힘의 대가로 시한부의 삶을 살게 된다. 어둠과 빛이 섞이지 못하고 계속 부딪치기 때문에 대부분의 마법사는 이 힘을 견디지 못하고 일찍 죽는다. 웬만큼 강해져도 속성이 부딪치는 부담을 몸이 견디지 못해 전력으로 마법을 쓰지 못한다. 역사상 혼돈속성을 타고난 마법사는 수첩 한 페이지를 다 못 채울 만큼 적었고, 성인 이후까지 살아남은 자는 강력한 파괴력 덕분에 평균 B랭크 정도의 힘을 얻었으나, 부작용 때문에 A랭크까지 도달한 자는 한 명도 없다. 그리고 혼돈속성이라 알려진 모든 사람이 죽을 때까지 부딪치는 마법 속성과 싸웠다. 불치병과 다름없는 속성이다.
“혼돈속성은 타인에게만이 아니라 소유자에게도 위험한 속성입니다. 몸이 혼돈을 버티지 못합니다. 하지만 키메라였기 때문일까요, 루니라는 혼돈속성을 곧잘 사용해 내고는 했습니다. 그래도 역시 몸에 부담이 가, 자주 몸 위로 어둠과 빛이 독에 중독된 것처럼 일어나 몸을 침식했습니다. 그리고 그 체질 때문에, 참극이 일어난 후에도 계속 에리카의 실험체로 있어야 했지요.”
“…….”
“하지만 실험이 축적되고, 많은 힘을 얻을수록, 루니라의 몸은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그래서 에리카는 루니라의 혼돈 체질을 이용한 마지막 실험을 계획했습니다. 빛의 독과 어둠의 독을 퍼트린 ‘혼돈 전염’이 바로 그것입니다. 루니라의 몸은 견디지 못하고 부서지고 있었고, 실험의 기둥이 되어 새로 만든 트라던트 병기 안에 갇혔습니다. 그 모습을, 우연히 그 도시에 다다랐던 디나 님이 발견한 겁니다.”
그러니까, 디나는 데미안과 접촉하기에 앞서 루니라를 만난 거다. 그리고…….
“디나 님은 그 무렵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던 짐승형 키메라를 같은 편으로 만들기 위해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고, 가까스로 그 시험작을 완성한 상태였습니다.”
“그 약을 루니라 씨한테 실험한 거군요…….”
“루니라도 동의했습니다. 어차피 약을 먹지 않았어도, 제물이 되지 않았어도, 루니라의 몸은 한계였으니까요. 루니라는 생사의 기로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에 손을 뻗은 겁니다.”
“…….”
“디나 님은 마법을 이용해 루니라가 혼돈을 토해 내고 죽은 것으로 꾸며 기둥에서 꺼내고 약을 먹였습니다. ……루니라는 트라베리아의 지배를 벗어났고, 살아났습니다. 또한 디나 님의 경이로운 힘은 루니라의 혼돈속성마저 안정시켰습니다.”
“혼돈속성을요?”
특수속성에 대해 익히 알고 있는 만큼 놀라웠다.
첸이 빙긋 웃으며 내 의문에 답했다.
“진화했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빛과 어둠의 힘은 여전히 루니라의 안에 분리된 채 있지만 이제 서로 충돌하지는 않습니다. 균형을 유지한 채 움직이고 있지요.”
혼돈속성이라. 오랜만에 호기심이 들었다. 한번 이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다. 그 속성은 우리 속성만큼이나 특별할까.
“저희는 디나 님이 접촉해 오기 전까지만 해도 루니라가 죽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루니라는 디나 님 덕분에 살았고, 또한 디나 님이 자신들과 닮은 키메라의 처지를 신경 쓴다는 것을 알게 됐죠. 루니라의 이야기를 통해 디나 님은 저희에게 접촉했습니다. 우선 한국에 있는 데미와 반에게, 이어서는 듀크에게 접촉했고, 듀크 편으로 저희에게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저희는 무르시엘의 임무로 바깥에 나서면서 디나 님과 접촉했지요. 그때 디나 님은 이성이 없던 동물형 동료를 몇 명 데리고 있었습니다. 디나 님과 접촉한 그들은 자아가 생겨나 있었습니다.”
우리는 흠칫했다. 소영이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첸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마법으로 자아까지 깨울 수 있는 거야?”
첸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잠시 말을 고민했다.
“그런 모양입니다. 저희를……그러니까, 저희를 한 번에, 트라베리아의 마법이 아닌 독립된 개체로……완전한 종족으로 진화시키는 것은 무척 큰 리스크를 동반합니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조금이라도 적다면 죽거나, 자아를 잃거나, 폭주합니다. 어느 쪽이든 실패하면 가망이 없습니다.”
순간 섬뜩해졌다. 이들의 삶은 생각보다 참혹하고, 그들은 그 사실에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애초에 진화시킨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니.”
덤덤히 납득하는 것은 성진 정도였다. 첸 역시 담담히 수긍했다.
“그 말대로입니다. 기적에는 리스크가 동반되는 법입니다. 반면 자아를 끌어내는 것은……이것 역시 일종의 진화입니다만, 키메라는 본래 자아를 가질 것을 상정해 만들어진 고등 생명체입니다. 못해도 웬만한 동물보다는 뛰어난 지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자아를 이끌어 내는 건 비교적 어려운 일이 아닌 모양입니다. 생명을 자극하는 걸 몇 번 반복하여 디나 님은 동료들에게서 자아를 이끌어 냈고, 이윽고 그들의 의지를 토대로 그들의 몸을 진화시켜 트라베리아와의 연결도 끊었다고 합니다.”
역시 설명만으로는 바로 감이 오지 않았다. 다만 굳이 연상한다고 하면…….
‘진화라. 진화 아이템과 조금 닮았네.’
내 손에서 명백한 진화를 보인 것은 현재 세 개다. 하나는 형일 아저씨의 팔인 흑조, 하나는 인성이의 마법에 융합한 유이, 마지막 하나는 캘리번이다.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누군가의 마음이 깊게 담긴 물건들이었다.
흘러들어 간 주변인의 마음이 그들의 의지가 되고, 그것이 진화의 스케일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 루니라의 진화는 흑조와 닮았다. 흑조도 깨어져 버린 껍데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스스로 마법을 끌어오는 자아를 가진 무기이자 형일 아저씨의 든든한 파트너다.
‘실제로 내 진화 아이템은 저들에게 도움이 된 것 같고.’
그들이 진화 물약을 먹고 잠들었을 때 내가 부여한 언령은 분명 그들에게 먹혔다.
“처음에는 디나 님을 경계했습니다만, 그녀가 루니라를 살린 것은 틀림없고,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힘을 가진 것 역시 틀림없었습니다. 몇 번에 걸쳐 연락을 나눴습니다. 그러는 동안 저희는 디나 님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디나 님은 저희에게 있어 소중한 동료입니다.”
첸이 또 한 번 다정하게 웃었다. 선 안에 들인 자에게는 꽤나 살갑구나 싶었다.
“저희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입니다. 이로써 저희의 사정은 전부 이야기한 셈입니다.”
첸이 우울한 감정을 삼키고 있는 무르시엘 일행을 돌아봤다.
“협력자나 디나 님에 대한 이야기를 숨겨 미안합니다. 저희에 대한 이야기는, 더하여 디나 님에 대한 이야기는 차마 바깥으로 꺼낼 수 없더군요. 베로니카에 시카, 소니아의 정보력에서, 트라베리아의 집요함과 두려움을 저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의 배신이 들킨다면 그건 저희의 능력이 부족했던 것인데, 거기에 다른 동료들을 끌어들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무르시엘은 그 말에 쉽사리 수긍했다. 무르시엘 역시 트라베리아에게 속내를 들킨 상태였고, 이번에는 소니아에게 배제당할 뻔했다. 곧 첸의 시선이 다시 내게 돌아왔다.
“그래서 더 은하 님과 만날 날을 기다렸습니다. 당신의 앞에서라면 저희는 두려워하지 않고 이야기를 꺼낼 수 있으니까요.”
나는 기뻐하는 눈으로 입꼬리를 올리는 첸을 보며 조금 부담스러운 심정을 느꼈다. 호의와 신뢰로 뭉친 감정이 부담스러웠다. 나는 그러한 시선을 받을 정도의 일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만나기 어렵더군요. 하하, 지금도 기억납니다.”
“…….”
“당신이 살아 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특히 반과 데미가 기뻐하며 전언을 보내왔지요.”
“……곤란하네요.”
나는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투덜거림에 가까웠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때로는 한마디 말이 누군가를 구하는 법입니다.”
나는 머뭇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내가 무언가를 했다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 심정은 조금 알 것 같았기에.
“거기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표현을 쓰기에 당신은 저희의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습니다.”
기대라고? 나는 의아한 눈빛을 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다정한 눈길이 선명했다.
“죽지 않았습니다.”
“그건…….”
“그뿐이겠습니까. 트라베리아를 쓰러뜨리기 위해 팀을 짰습니다. 트라베리아를 쓰러뜨리기 위해 힘을 기르고, 무시무시할 정도로 빠르게 강해졌습니다.”
“…….”
“저희는 당신이 아주 많이 변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다정한 눈빛이 자아내는 빛은 무섭도록 올곧았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당신이 복수를 하기 위해 팀을 만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소중한 이를 잃고, 싸우기를 선택한 사람이, 변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그것이 두렵기도 했고, 다행스럽기도 했습니다. 어느 쪽이든 좋았습니다. 자비가 없어진 당신이 적인 저희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리라 생각하면 안타까웠고, 언젠가 만나고자 했던 사람이 트라베리아를 쓰러뜨릴 만한 힘과 재능, 각오를 가졌다 생각하니 기쁘더군요. 하지만 당신은……둘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
“반이 당신을 만났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때와는 달리 독기를 가지고 덤벼들었지만, 그때처럼 특이한 그대로였다고. 반은 무척 기뻐 보였습니다. 당신이 키메라인 자신을 두려워하면서도 평범하게 대화를 나눠 줬다고. 자신이 궁금해하던 이야기를 알려 줬다고.”
불편한 기분은 커졌다. 키메라와 대화를 나누는 것 정도야 안전만 확보된다면 누구든지 할 수 있다. 별것 아닌 일이다. 당장 친구들만 해도 대답해 주었을 것이다. 성진이야 평소처럼 무시했을 테지만, 인하는 질문했다면 대답해 줬을지도 모르고, 인성이는 능글맞게 정보를 캐내려 했을 테고, 소영이는 틱틱거리면서도 대답은 해 줬겠지.
“노리스와 반만이 아니라 저와 라스 역시 언제고 당신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습니다. 그때의 여리고 상냥한 소녀가 아니더라도, 당신은 처음으로 우리를 ‘살아 있는 자’로 봐 준 인간입니다.”
“…….”
“하지만 이전과는 달리 당신에게 협력을 구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반과 데미가 한국에서 당신이 보여 줬던 행동을 이야기해 주기 전까지는요. 당신은 우리의 동족을 죽이는 지금도 저희에게 예의를 지키고, 여전히 ‘살아 있는 존재’로서 대해 주고 있었습니다.”
“…….”
“대등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살아 있더라도, 트라베리아와 적대하더라도, 연맹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더라도, 저희와 대등해지기는 힘들 거라고. 실력 차가 너무 벌어지고 말았다고. 하지만 저희에게만 특별한 듯했던 당신은 사실 세계에서 가장 특별해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저희를 따라잡고, 뛰어넘었습니다.”
무시무시한 과대평가였다. 사심 하나 없이 나오는 동경을 닮은 칭찬에 나는 오랜만에 부끄러움을 몸에 새겼다.
“그뿐일까요. 저희가 트라베리아를 배신했다는 사실을 미리 눈치채지 않았습니까. 더군다나 저희가 인간과 협력한다는 사실도 놀라기는 했지만 편견 없이 받아들였지요.”
“…….”
“그리고 이제부터 당신이 무엇을 하든, 그게 여기에 있는 저희에게 해가 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아닙니까?”
할 말이 없었다. 확실히 나는 이제부터 저들을 전력으로 취급할 것이다. 무르시엘과는 달리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악행을 반복했으며, 자유를 찾고자 트라베리아를 적대할 이들을. 첸이 활짝 웃었다.
“그것 보십시오. 한 번도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지 않습니까.”
웃는 첸을 멍하니 바라보던 소영이가 툭 중얼거렸다.
“우리 리더는……어렴풋이 눈치채고는 있었지만 참 특이한 사람에게 사랑받는 체질이구나…….”
부정할 수가 없었다.
첸이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빙 돌아 내게 다가왔다. 동료들은 경계의 시선을 보내면서도 막지 않았다. 나는 첸의 움직임을 따라 뒤로 몸을 돌렸다.
“당신을 만나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무엇인가요?”
“감사합니다.”
담담하지만 깊은 눈빛으로 인사하며 첸이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당신의 그 한마디가, 고작 그 한마디가 저희를 ‘실험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반은 당신에게 깊은 감정을 느꼈고, 노리스는 당신을 동경했습니다.”
나는 내밀어진 손을 보며 살짝 눈가를 떨었다.
“그러니 당신은 언제고 저희의 희망이었습니다.”
“…….”
“지금도요.”
나는 천천히, 느릿하게 숨을 들이켰다.
이렇게 순수하게, 호의로만 가득 찬 감사 인사를 받은 게 얼마 만이었던가. 생각지도 못한 감사 인사를 얼떨떨하게 느끼면서도 그 안에 담긴 진심이 상당히 쑥스러웠다. 이런 감정은, 정말 오랜만이다.
“…….”
나는 말없이 첸의 손을 쥐고 온기를 나눴다.
정보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장군 시리즈의 일이나, 디나 심포니에 관한 일. 처음 알게 된 게 너무 많았다. 첸은 기꺼이 우리와의 대화에 응했다.
“궁금한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질문하십시오. 전부 대답할 수 있다고는 장담하지 못하겠습니다만.”
그러자마자 이때라는 것처럼 의료진이 손을 들었다.
“심포니 님의 마법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아, 저도 듣고 싶네요~.”
“동의합니다. 생명에 닿는다는 게 어떤 소리인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음…….”
첫 번째 질문부터 첸은 곤혹을 표하며 고개를 저었다. 듣자 하니 그는 트라베리아의 눈 때문에 디나를 몇 번 만나지 못했고, 그래서 디나의 마법 원리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른다고 한다. 듣고 보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 이해하지 못해, 아까 해 준 설명 이상으로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한다. 거기다 디나는 가디언의 보호를 받고 있어, 기억을 재생하는 마법도 제대로 먹히지 않는다.
“알고 싶으시다면 직접 만나는 게 제일 좋을 듯합니다. 디나 님도 여러분을 만나 보고 싶어 하고 있습니다. 특히 예리 씨, 당신을요.”
“저를요?”
“당신은 하르펜 님의 마법을 품고 있지 않습니까. 디나 님의 마법과 가디언님의 지식은 분명 당신에게 도움이 되겠지요.”
이어서 인성이는 어째서 디나가 개인적으로 활동하는지를 궁금해했다.
키메라와 협력하는 것은 확실히 이해받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키메라를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그들을 진화시키는 것도 꽤 큰일이다. 분명 현재 키메라를 진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디나밖에 없을 테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도움을 줄 수 있는 마법사는 있을 것이다. 키메라를 올바르게 진화시키는 약을 만들기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을 터인데…….
연맹을 끌어들이면 트라베리아에 정보가 퍼질 것을 경계한 것일까? 그게 아니면 역시 사람들에게 이해받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냥 개인주의라서?
“혼자 활동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만……. 확실히 지금의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똘똘 뭉쳤기는 하지요. 글쎄요. 굳이 따지자면 혼자 다니는 게 편한 듯 보였습니다. 거기다 디나 님이 만드는 약은 생명과 관계된 걸 하나라도 볼 수 없다면 제조를 도울 수 없다고 하더군요.”
특수한 마법이기에 도울 수 없다……는 건가. 나는 흘끔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하고 있는 예리를 보았다. 그러나 예리와 나라면 어떨까?
“그리고 아무 사람들에게 자신이 하르펜 님의 딸이라거나 그가 남긴 가디언을 데리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어 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디언님도 마찬가지로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모양이더군요. 아,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은 허락을 받았습니다.”
아무래도 하르펜과 마찬가지로 디나 역시 많은 비밀을 안고 있는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많지 않았다. 트라베리아는 그들이 만든 키메라가 자신들을 배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눌 수 있는 이야기는 트라던트에 관한 것이나, 알려지지 않은 장군 시리즈에 관한 정보, 이제 트라베리아에서 떨어져 나온 라스와 첸이 어떻게 하고 싶은지 정도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고 싶으신가요?”
“한동안 숨어서 트라베리아의 동향을 살필 생각입니다. 문장을 없앤 것은 그렇다 치고, 저희가 ‘진화’하여 완전히 독립했다는 것을 알면 트라베리아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자칫하면 반과 데미에게도 피해가 갈지 모르니 저희를 한동안 숨겨 주셨으면 합니다.”
무르시엘이 트라베리아를 배신한 것은 이미 밝혀졌다. 과연 트라베리아는 라스와 첸이 사라진 것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문장이 떼어졌다는 걸 눈치챘을까? 듀크에 대해서는? 아니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클 것 같았다. 적어도 그들은 이미 예전에 그들 손에서 빠져나간 루니라를 ‘죽었다’고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이들이 여기에 있는 한, 직접 마주치지 않는 한 트라베리아는 이들의 생존 여부나 진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할 것이다.
“숨어서 저희와 협력할 가능성이 있는 다른 장군 시리즈와 접촉해 볼 생각입니다. 인간처럼 대거 무리를 짓고 싶지는 않지만, 같은 편은 많을수록 좋죠.”
참고로 장군 시리즈가 무르시엘과 함께 배신했다는 것은 아직 트라베리아만 알고, 연맹은 모른다.
“그러나 연맹 앞에서 모습을 숨길 생각은 없습니다. 은하 님, 이번 회의 때 저희를 연맹 앞에서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 자유로워졌으니 자유롭게 살고 싶습니다. 사람 앞에서까지 숨고 싶지 않습니다. 저희도 저희가 사람 사이에 섞이기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저희는 장군 키메라고, 악독한 짓을 많이 했지요. 인정받지 못하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적어도 새벽별무리는 저희를 무조건 적대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으니 충분합니다.”
“우리가 무르시엘을 ‘적’이라 여기는 건.”
나는 아까의 당황스러웠던 감정을 담담히 숨기며 평소처럼 공적인 이성 상태를 유지했다.
“그들이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이에요. 선택해서, 아주 많은 사람을 죽였죠.”
아프게 가라앉은 감정이나 시선이 나를 찔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과 내 사이에 있는 선이 확실하기를 바란다. 이어 냉정한 눈으로 첸을 마주 보았다.
“하지만 당신들에게는 선택권이 없었어요.”
“…….”
첸과 라스의 눈동자가 한순간 일렁거리며 흔들렸다.
“그러니 저희가 당신들의 신원을 보증하지요. 당신들이 인간들 사이에 자리 잡을 수 있게 도울 것이며, 자리 잡지 못한다면 자리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반드시, 약속하겠습니다.”
첸과 라스가 눈을 크게 떴다. 나는 씁쓸한 심정으로 말을 이었다.
“뭐……다른 사람은 몰라도 레일리 씨라면 당신들을 받아들일 것 같지만요. 레일리 씨도, 루카 씨도, 하인리히 씨도, 연맹의 대표들은 무척 이타적인 사람들이거든요.”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아직도 이렇게 많은 인간이 살아 있을 수 있는 거겠지요.”
그렇다.
세계 수호 연맹이 있기에 나는 보다 안심하고 복수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수호 연맹의 책임자들이 하나같이 강한 데다 사람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기에, 복수만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 놀랐습니다. 성격이란 완벽하게 바뀌기는 어려운 법이라 당신이 저희를 인정할 가능성은 꽤 높다고 예상했지만, 이렇게 호의적으로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생각할 시간이 많았거든.”
소영이가 손등 위에 턱을 괴었다.
“너희가 트라베리아에게 적대적이라는 정보, 한 달 전에 얻은 거야.”
“어떻게 얻었는지 궁금하군요.”
“대충 알고는 있잖아? 하지만 자세한 건 비밀이야.”
소영이가 입가에 검지를 댔다. 나는 첸을 바라보며 마음을 정리했다.
“당신들은…….”
그것을 묻는 데에는 적잖은 용기가 필요했다.
“스스로를 인간이라 생각하나요?”
이것은 내 마음의 근원에 속해 있는, 아주 중요한 질문이었다.
나는 애써 담담한 눈빛을 유지했다. 첸의 고민은 짧았다.
“아니요.”
안심될 정도로 단호한 대답이었다.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인간과 대등해지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저희는 인간이 아닙니다. 그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희는 트라베리아의 손에 태어난 키메라입니다. 사실 ‘키메라’라는 호칭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만, 다른 이름을 짓자니 생각나는 게 딱히 없더군요. ……저희는 저희의 수명을 모르고, 여전히 스스로의 힘으로는 마법을 만들지 못하며, 다른 이들과는 달리 아이를 낳을 수도 없습니다. 여전히 괴물이고, 인공 생명체입니다. 그걸 알면서도 누군가를 사랑하며 사람들 옆에 있고 싶습니다.”
“……죄악감이라고 생각하세요.”
“네?”
첸이 이해하지 못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이것은 첸이 ‘어째서 이렇게까지 호의적으로 대하느냐’ 물었던 것의 답이다.
“마지막 양심일지도 모르죠.”
“무슨 뜻인지……모르겠습니다만.”
나는 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을 감추며 첸을 노려보듯 눈을 치켜떴다.
“나는 당신들을 인간이라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들이 인간과 대등하다는 것은, 인정해요.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당신의 동족들을 죽여 왔고, 앞으로도 적으로 나타날 당신의 동족들을 죽일지도 몰라요.”
“그건…….”
‘당연한 거다’, 그렇게 대답하려고 했던 첸이 멈칫했다. 그러더니 어쩐지 재미있다는 얼굴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렇지요. 당신은 죽이지 않기로 맹세했었지요.”
“네. 맹세했어요.”
나는 그날의 각오를 되새기며 애써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처음으로 죽이는 ‘인간’은 벨라다, 그렇게 맹세했죠.”
동시에 이것은 무르시엘전 직후 흐지부지되었던 이야기 속에 담겨 있던 내 결심을 동료들에게 알리기 위한 대답이다.
“당신이 죽이지 않는 것은 ‘인간’뿐인 겁니까.”
“그래요. 그게 최대한이에요.”
무엇의 최대한인지는 삼켰다. 넣을 수 있는 단어가 너무 많았다. 양심이기도 했고, 안전이기도 했고, 죄악감이기도 했다.
“리더.”
한재일이 다가와 내 책상 옆을 손으로 짚었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해 두고 싶어. 사람을 못 죽이는 건 이해해. 그걸로 당신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 따위는 없어. 누구를 죽이든 살리든, 그것은 승자의 마음이야. 거기다 리더는 강해. 싸우면서 죽음을 고를 여유를 당신은 가지고 있어. 하지만 트라베리아는 아니잖아?”
“그건…….”
“누구보다도 필사적인 건 리더야.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당신이 보여 줬던 살기는 섬뜩하고 소름 끼칠 정도로 커다랬어. 그런데 어째서 ‘트라베리아’까지 죽이지 않는 범위에 둔 거야? 누구보다도 트라베리아에 복수하기를 바라는 당신이 어째서 소니아를 죽이지 않고 살려 둔 거야?”
한순간 김준영이 눈을 크게 떴다.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뜨인 눈동자가 이내 새까맣게 물든다. 과거를 보는 눈동자다. 증오하고, 원망하는 눈동자…….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아? 죽이지 않고 싸운다는 게, 안 그래도 무지막지하게 강한 놈들을 상대하는 와중에, 얼마나 위험한 일인 줄 알아?”
격렬해진 감정을 나는 부딪치지 않고 받아 주었다. 입을 다물고 한재일의 말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죽이기 무섭다는 소리가 아닌 거, 알아. 리더는 목숨을 걸고 싸우잖아. 목숨을 걸고, 몸을 버리고. 남을 죽이는 것보다 나를 죽이는 게 더 어려워. 더 무서워. 이제 리더는 커븐 로드와 싸우게 될 거고, 벨라는 아마 마지막 상대가 될 거야. 벨라를 죽이기 전까지 아무도 안 죽인다는 게 가능해? 이번 상황을 봤잖아? 어떻게 할 거야? 어째서……누구보다도 죽이고 싶어 하는 리더가, 죽이지 않기로 결심한 거야?”
“……한 가지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한재일의 감정이 조금 가라앉은 것을 느끼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할 것이다.
“나는 사람을 죽이고 죽이지 않는 데 조절을 할 필요가 없어. 내 제어력은 그런 경지를 넘었거든. 죽이기 싫어서 마법이 약해지거나 주춤할 일은 없어.”
“…….”
“우리가 복수를 시작하기 전에 맨 먼저 정한 게 뭔지 알아?”
함께 정했다. 인성이, 인하, 소영이, 성진이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범위’를 정하는 거였어.”
“…….”
“복수의 범위.”
“범위…….”
“그 녀석들처럼 미치고 싶지는 않았거든. 그때 우리는 아주 많이 미쳐 있었을 거야. 지금도 미쳐 있고.”
“…….”
한재일은 차마 아무 말도 못 했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충분하지 않을지 몰라도,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충분히 복수에 미쳤다.
“그 녀석들은 훨씬 더 미쳤잖아.”
“…….”
“쌓이고 쌓인 증오로 본래 쓰러뜨리려 했던 적을 무너뜨렸지만, 결국 완벽한 복수가 아니었어. 잃고 잃고 또 잃었지. 죽이고, 짓밟고, 죽이고, 배신당하고, 짓밟히고, 다시 살해한 끝에.”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한재일의 멱살을 붙잡았다.
“─미쳤어. 나는, 이렇게 되고도, 그렇게 많이 잃고도,”
나를 바라보는 한재일의 눈이 흔들렸다.
“죽이고 싶고, 베고, 찢고, 뜯어 발기고 싶어도, 그래도.”
“…….”
“그 녀석들이 그 모든 걸 똑같이 해 왔다고 해도, 그래도──살인은 죄라고 생각해.”
멱살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참혹하게 구겨진 내 얼굴을 보며 한재일이 숨을 삼켰다.
“그렇잖아. 그 녀석들은 그렇게 했잖아. 잃고, 또 잃고, 그런데도 계속 죽여서, 미쳤잖아. 그러다 잃은 게 우리의 소중한 사람이야! 그런데 그게 어떻게 죄가 아냐? 안 그래?”
한재일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울분 섞인 눈동자로 입가를 떨었다.
“자신들을 마녀라고, 다른 종족이라고 했지만 그 녀석들은 인간이야. 아니야?”
“…아니, 인간이지.”
인간이다. 인간이고, 인간인데, 인간을 멸망시키겠다고 한다.
“맞아. 인간이야. 인간이지. 인간으로 죽게 할 거야. 내가 그렇게 할 거야.”
한재일이 자신의 멱살을 쥔 내 손 위에 손을 얹었다. 그 손은 창백하여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녀석들에게 있어서는 이게 정당한 복수겠지. 하지만 나는 이게 정당한 복수가 아니라는 걸 그 녀석들한테 알게 할 거야! 아니, 정당하지 않다는 건 이미 알고 있으려나? 나는 세상이 이 꼴이 되고도, 이 꼴이 되었기에, 잃었기에, 목숨이야말로 제일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해. 살아 있으면, 살아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지금은 아니라도 미래에 가능성이 찾아와. 아니야?”
“……아니, 맞아.”
흔들리던 한재일의 눈이 굳어 갔다. 선생님들을 떠올리고 있을까.
“그래서 복수의 범위를 정했어. 우리가 미치지 않도록. 다행스럽게도……고민할 필요도 없었지만 말이야.”
“…….”
“하지만, 내가 처음 정한 목표는, 범위는, 벨라였어.”
벨라였다.
다른 사람은 누가 죽여도 된다. 하지만 벨라만은 기필코 내 손으로 죽이겠다고 맹세했다.
만약 동료들이 벨라를 노린다면 긴 시간을 들여 설득해서라도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나와 달리 네 사람은 ‘트라베리아’를 목표로 정했다. 정확히는 트라베리아의 이름을 걸고 활동하는 마녀들이다. 때문에 인하는 목표를 엘리시아로 좁혔다. 왕이야말로 한 나라의 핵심 아니겠는가.
“그 녀석들이 우리의 소중한 사람을 전부 앗아 갔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 녀석들을 죽이는 게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그 녀석들이 한 행동을 보면 알잖아?”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을 죽이는 건 정당한 복수였다.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아주 조금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인간 사이에서 철저히 인간이 아닌 무언가로 배제당했다. 그 시기는 아주 길고 길어, 결국 그들은 하나의 틀 속에 갇혔다. 그리하여 그들은 인간을 자신들과는 다른 종족으로 규정하고, ‘인간’들에게 복수를 맹세했다.
내가 하는 것도 복수다. 하지만 나는 결단코 그 녀석들처럼은 되고 싶지 않다. 한구석도 닮고 싶지 않다.
“그날, 축제 날, 내 모든 걸 앗아 간 건 벨라였어.”
“……!”
으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잃은 것은 동시에 여기에 있는 많은 사람이 잃은 것이다. 내 소중한 사람의 범위에 있는 사람은 누군가의 스승이었으며, 누군가의 친구였고, 누군가의 선배였으며 누군가의 연인이었다.
한국을 덮친 건 벨라다. 누구나 그 사실을 안다. 나는 한재일의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풀었다.
“시간을 봤어. 그 여자는 모든 것을 피투성이로 만들고서, 재미있다고 웃고 있었어.”
우리가 복수해야 할 상대는 그런 놈이다. 그런 놈을 쫓는데 안 미칠 리가 있나. 그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