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44
여자아이가 당황하며 제 학생증을 붙잡았다. 그러나 학생증은 그녀의 의지나 손짓에 반응하지 않았고, 빛은 점점 더 커졌다.
“어? 어어?”
그 빛이 아이를 삼켰다. 정신을 차렸을 때 아이의 모습은 교실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는 당황하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이가 있던 장소를 바라보았다.
“뭐야? 얘 어디 갔어?”
“모르겠어.”
아이들이 수군수군거렸다. 그렇게 수업 종이 치고도 한동안 공황 상태에 빠졌던 우리를 진정시킨 것은 앞문을 열고 들어온 담임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평소보다도 훨씬 굳은 얼굴로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조용. 손민주는 지금 이사장실에 불려 갔단다. 선생님도 가 봐야 하니, 이번 시간은 자습하거라. 도서관이나 실습실을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좋아. 하지만 복도를 다닐 때는 조용히 할 것, 알았지?”
빠르게 지시한 선생님은 굳은 표정으로 다시 교실에서 나갔다. 우리는 영문을 모른 채 서로를 돌아보았다. 나만이 설마 싶어 표정을 굳혔다.
결국 수업 전체가 흐지부지되었다. 우리는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귀가하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단축 수업을 맞이한 친구들은 영문을 몰랐다.
“오늘 수업 일찍 끝났네.”
“뭐 어때. 놀 시간이 늘었잖아! 우리 지금부터 어디 갈까?”
“……미안, 난 오늘은 먼저 돌아갈래. 생각할 게 있어서…….”
“어? 진짜?”
친구들이 눈에 띄게 아쉬워했지만 나는 창백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아냐. 인하는 친구들이랑 놀고 와. 놀고 싶지?”
“그치만…….”
“괜찮아. 그냥 생각할 게 있는 것뿐이니까. 마법 때문에…….”
“그런 거야?”
“응.”
몇 번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친구들은 쉽게 납득했다.
“……그렇다면, 알았어.”
“가자.”
한수가 머뭇거리고 있던 인하의 등을 밀었다. 인하가 약간 섭섭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친구들과 함께 나에게서 등을 돌렸다. 나는 친구들을 배웅하다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친구들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상황을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 오늘 갑자기 자습을 한 것도……단축 수업도……다 그 하진성이란 아이의 실력을 밝혀 버린 여자애 때문이겠지.’
비밀 준수 교칙,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룰’이라고 정한 것이다.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긴 아이. 학생증이 빛나고 아이가 사라졌었지. 그럼 학생증에 마법이 걸려 있었던 건가.
‘그런 거구나. 몸에 직접 거는 것보단 그게 더 확실하지. 수준별 수업 때 외에는 마법으로 제약을 건 걸 느낀 적도 없고…….’
확실한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에 비해 마력에 민감한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모든 마법을 감지하지는 못하니까.
‘하지만 하진성이란 애, 괜찮을까?’
나는 소문의 주인공이 된 그 아이가 조금 걱정이 되었다. 다른 일이라면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안됐다고 생각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현이기에, 같이 실력을 숨기고 있는 입장이기에 신경 쓰였다.
나는 그 남자아이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평범한 아이였다. 활발하게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는 했다.
나는 교문 쪽으로 걸어가며 엷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이상으로 걱정되는 건 그 손민주란 아이가 교칙을 얼마나 어기고 다녔는지다. 어쩌면 피해자가 한 명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자 막막해졌다. 정말이지…….
“하아…….”
그저 아무 말 안 하고 있으면 끝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실력을 숨긴다는 건 복잡한 일이었다.
솔직히 나야 고맙지만,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왜 이 학교는 그렇게 부득부득 아이들의 마법 실력을 비밀에 부치려고 할까. 물론 아이들이 이용당하는 걸 막기 위해서란 건 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할 필요가 있는 걸까 싶어서. 은희 언니의 사정을 듣고, 선아 아줌마의 사정을 들었지만 여전히 실감이 안 나나 보다.
‘나야 좋지만.’
그러나 그렇게 생각해 보아도 가라앉은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까 그 상황은 최악이다. 실력이 밝혀지는 상황 중에서도 최악의 상황이었다. 우리 학교는 비밀 준수 교칙을 적용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입으로 실력이 밝혀지면……그럼…….
‘다른 아이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을까? 그럴까?’
그럴지도 모른다. 나처럼 눈에 띄기 싫다는 이유로 부득부득 실력을 숨기는 아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친구들도, 부모님이나 보호자가 숨기라니까 숨기는 것뿐이다. 머릿속이 생각으로 가득 찼다. 나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진위가 밝혀진 것은 다음 날이었다.
조례 시간, 단체 조례로 학생들이 강당에 모였다. 평소에는 단체 조례가 있어도 보통 교실 안에서 스크린을 통해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초등학교 2학년 학생 전체가 강당으로 이동했다. 학생들은 물론 2학년을 담당하고 있는 교사들까지 전부 모였다. 수준별 수업 담당 선생님들까지 전부. 나는 무대 위에 서 있는 준휘 선생님과 민 선생님의 얼굴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뭐야?”
“무슨 일이지?”
영문을 몰라 떠드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래도 우리 학교는 이 일을 상당히 큰일로 여기고 있는 모양이다. 하긴, 여태껏 비밀 준수 교칙은 잘 지켜지고 있었다. 학교 안은 모르겠지만 밖에서는 철저하게 마법으로 입단속이 되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렇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 마법 제약 덕분에 여태까지 유지되던 비밀 준수 교칙의 불문율이 바로 어제, 한 여자아이에 의해서 깨져 버렸다. 어린애라서 더더욱 순진하게 지켜 나가던 것을, 어린애이기 때문에 순진하게 대대적으로 밝혀 버렸다. 물론 그동안에도 소곤소곤 이야기하다가 벌을 받은 사람은 있었을지도 모른다. 몇 번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대대적인 사건은 입학한 이래로 진짜 처음이었다.
“자, 조용! 지금부터 이사장님이 상황을 설명할 테니 모두 조용히 해 주세요!”
당연하지만, 100명 가까이 되는 아이들을 통제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선생님의 말이 떨어져도 아이들은 여전히 시끄럽게 떠들었다. 그러나 이사장님이 나타나자 그 목소리도 천천히 수그러들었다. 그에게는 그 정도의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는 전 세계에서 200명 정도밖에 없는 S랭크 마법사, 즉 초월자의 지위에 있는 자였다.
그가 마이크를 입에 댔다.
“자세한 사정은 각 반 담임 선생님께 전해 들으리라 생각하니, 이번에는 경고를 겸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간결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제, 초등학교 2학년 손민주 학생이 많은 사람 앞에서 가장 중요한 교칙을 어겼습니다.”
역시. 이어서 나는 묘한 표정으로 이사장님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왜 이렇게까지 비밀 준수 교칙을 고집할까? 상황이 복잡해질 걸 알면서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다 말고 나는 이어진 말에 흠칫했다.
“학생증에 이 교칙을 어겼을 때 어떤 처벌을 내리는지 적혀 있습니다. 손민주 학생은 이번을 포함하여 교칙을 총 15번을 어겼습니다. 그동안 큰 소동이 되지 않았고, 저학년이라는 점을 생각해 공개적으로 벌을 주진 않았지만, 이렇게 일이 커진 이상 손민주 학생은 퇴학시킬 예정입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다시 웅성거리며 떠들어 댔다. 퇴학이라고? 정말로? 정말로 퇴학시킨다고? 그렇게 심한 일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 아무리 교칙으로 정해져 있었고 많은 주의를 들었다고 한들, 막상 그러한 상황이 닥쳐 오자 아이들은 모두 당황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교칙에 그렇게 명시되어 있다 할지라도 실제로 퇴학시키는 학교는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런데…….
“너무한 처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전에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고……그리고 소문이 어떻게 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손민주 학생이 아이들에 대한 것을 밖에서 몇 번 말한 탓에, 어제 소문의 대상이 된 하진성 학생을 비롯한 3명의 학생이 납치당할 뻔했기 때문입니다.”
뭐……? 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이사장님의 차가운 금빛 눈동자가 시야 안에 시리게 자리 잡았다. 손끝에서부터 피가 식었다. 발아래로 무언가 슬금슬금 기어 올라왔다. 그건,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그래, ‘실감’이란 감각이었다.
“하진성 학생을 비롯한 3명의 학생은 모두 손민주 학생과 친했습니다. 서로 친했기 때문에 실력을 밝혔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을 밖에서 이야기하고 돌아다녀서는 안 됩니다. 이런 일은 빈번히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칙이 있는 겁니다.”
소동이 일어난 것은 바로 어제였다. 걱정하면서도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저 그 아이가 어떤 성격인지를 떠올렸다. 실력이 밝혀져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아이인가를 걱정했다. 결국 가라앉고 괜찮아지리라 생각했다.
어깨 뒤로 소름이 찾아왔다. 나는 오싹한 기분으로 손을 떨었다.
“다행히 세 사람은 곧바로 헬프 시스템을 사용했기에 협회의 힘으로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납치당하기 직전에 약을 맞아 정신을 못 차리는 상태입니다. 지금은 입원 중입니다.”
“…….”
“따라서 손민주 학생에겐 퇴학 조치를 내리기로 결정했습니다.”
강당 안이 침묵으로 젖어들었다. 약……약이라고……? 소설이나 만화 속에서나 나오는 이야기다. 나에게는 그러‘했던’ 이야기다. 나는 덜덜 떨리고 있는 입술을 깨물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비밀 준수 교칙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해하더라도 위기감을 느낀 적은 없지 않을까요? 하지만 학교에서 학생의 실력을 비밀에 부치는 것은 어리고 재능 있는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여러 조직의 ‘인재욕’에서 여러분을 보호하기 위한.”
그리고 내가 머릿속에 떠올린 건, 엄마가 해 줬던 선아 아줌마의 과거 이야기였다.
“지금 이 세계는 수십 개의 마법 조직들이 각자 파벌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법 조직들의 세력의 크기가 정해지는 조건은 오직 하나입니다. ‘조직에 소속된 마법사 개개인의 실력’. 마법사 조직은 재능 있는 인재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나는 표정을 천천히 굳혔다. 그러니까……엄마가 어떤 단어를 사용해서, 어떤 문장으로 말을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 말의 내용이나 말을 하던 엄마의 분위기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야기를 해 주면서 나를 꽉 끌어안았던 엄마의 온기도.
“여러분도 알고 있을 겁니다.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이 세계 곳곳에서 얼마나 많은 전쟁이 벌어지는지. 얼마나 많은 마법사가 죽고 상처 입는지. 때론 전투 구역만이 아니라 관계없는 사람들이 있는 거주 구역에서까지 전투가 벌어져 사람들의 가슴에 큰 상처를 새깁니다. 법이 있고 규칙이 있어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지는 않지만……이 세계는 결코 평화롭기만 한 세계가 아닙니다.”
걱정이라고, 몇 번이고 그렇게 말했던 떨리는 목소리도.
나는 시선을 가라앉히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다. 그리고 나는 어릴 적에 그것에 대한 두려움을 한 번 경험했다. 내 재능을 노리고 찾아온 것은 아닐지라도, 나는 어릴 적에 테러 사건에 한 번 말려든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이 학교와 연이 닿았던 것이 아니었나.
그러나 나는 그때 있었던 일을 완전히 잊어 가고 있었다. 이미 지난 일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겪게 될 수도 있다. 내 재능이 들통나면, 언제라도.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건 사고가 지금 이 세계에 만연하는 것은, 이 세계가 그토록 마법사들의 실력을 우선시하는 것은……이 ‘조직’, ‘파벌’이라 하는 것들이 세계에 만연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휘하에 있지만 때로는 국경을 넘나들고, 온갖 세력과 규칙을 구축하며……싸운다. 멀리 가지 않아도, 민희나 선아 아줌마만 해도 그 희생자였다. 다만, 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분야의 희생자였다.
민희는 부모님이 없다. 민희가 어렸을 무렵에 두 분 다 전투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제현 오빠는 중학생이었다고 들었다. 다행히 유산이 제법 많았기 때문에 한동안 같이 살아가는 데에는 별로 지장이 없었다. 즉 민희는 몇 년 전부터 제현 오빠한테 키워지다시피 한 것이다. 제현 오빠가 민희를 키우는 데 많은 도움을 준 것이 옆집, 그러니까 시하네 부모님이라 들었다. 친척들과는 많이 먼 사이라서 도움을 구하기가 어려웠던 시점이라고 했던가.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 세계에선 이러한 일이 그리 드물지 않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흔한 편이다. 우리 학년만 해도 부모님 한 분이 전투 중에 돌아가신 경우가, 민희를 포함하여 다섯이나 된다. 100명 중에 5명, 그것이 어떻게 적은 숫자라고 할 수 있을까. 친척이나 지인까지 포함하면 더 많을 것이다.
선아 아줌마는 또 다르다. 그녀 역시 제도의 희생자지만, 그녀는 누군가를 잃은 것이 아니라 제 몸을 희생해야 했다. 아주 가끔 그녀 본인과 우리 엄마를 통해서 그 이야기를 듣는다. 초등학생일 때 그녀는 이미 마법 전투에 나가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바로 어제 일어났다고 한 납치 사건까지.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먼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당장에라도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문 채 그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는 마법사에 관한 정보입니다. 그리고 어린 여러분들의 재능에 관한 정보입니다. 어릴 때부터 재능을 개화한 자들은 그 힘을 꼭꼭 숨기거나 지켜 줄 사람이 없으면 어린 나이부터 끊임없이 전투 구역에 끌려다니게 됩니다. 심할 때는 어둠의 조직에 의해 납치되어 어렸을 때부터 고문과 훈련으로 키워지게 되지요. ……저 또한 그러한 희생자였습니다.”
아,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조직에 들지 않고도 제 나름으로 사회에 공헌하며 일하는 마법사들은 매우 많다. 조직에 끌어들이는 것에도 수많은 규정과 법이 있다. 그러나 이 세계는 법만으로는 막을 수 없는 일이 너무나도 많다. 이 세계는 결국 모든 것을 힘으로 제압하는 세계니까. 게다가 어둠의 조직은 그런 법이나 윤리 따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 그러니 무지하고 힘이 약한 어린아이는, 끌려가 이용될 뿐이었다.
“어린 나이에 팔다리가 잘리거나, 눈동자가 도려내어지거나, 그런 끔찍한 고통을 몇 번이고 겪어 왔습니다. 고문과도 같은 훈련을 받았지요.”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만약 학생들의 실력이 다른 곳으로 흘러 나가게 되면 가장 먼저 납치되어 전장에 끌려 나갈 만한 존재는 우리였다. 나와, 인하, 한수, 민희, 현호. 나는 그 정도로 끔찍한 상황을 겪어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 후에……제가 조직을 만들고 이 학교를 세운 것은, 저와 마찬가지로 고통받을 아이들을 지켜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비밀 준수 교칙은 그것을 위한 규칙입니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어쩐지 울컥한 기분이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설령 여러분이 교칙을 어기거나 여러분에 대한 정보가 밖으로 퍼져 나가도, 이 학교의 동료는 여러분을 지킬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노리는 사람들은 무슨 일이라도 서슴지 않습니다. 협박, 고문, 살인, 약물,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합니다. 그런 자들로부터 여러분을 확실히 지키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정보가 밖으로 퍼지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문에 아직 어려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여러분에게 마법으로 제한을 건 겁니다. 학교 안에서는 그 정도 제약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지금 보면 그는 참으로 예쁘게 생긴 사람이었다. 외모가 예쁘다기보다는 머리 색과 눈동자 색이 예뻤다. 스스로 빛을 품은 것 같은 백금색, 아름다웠다. 허나 표정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그러나 그 상황을 직접 부모에게 전해 듣고 두려워하는 친구들도 많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비밀 준수 교칙만큼은, 그 무엇을 어기더라도 지켜 주길 바랍니다. 어기는 경우에는 역시 무거운 벌이 주어집니다. 이건 여러분이 안전한 학교생활을 보내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입니다. 반드시 지켜 주기를 바랍니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우리를 훑어보았다. 저렇게 차가운 눈동자로, 저렇게 상냥한 말을 한다. 나는 주먹을 굳게 쥐었다. 아이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소곤거리는 가운데, 이사장님의 말씀은 끝이 났다.
교실로 돌아간 우리는 담임 선생님께도 엄숙한 경고를 전해 들었다.
“이사장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모두들 아직 어리지만 이 세계 이곳저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마법사들이 세운 룰 덕분에 그 전투가 비전투 구역 내에서 일어나는 일은 적지만, 그래도 가끔 그 피해가 시내에 미쳐 사람들이 죽는 일이 있지. 그만큼 마법 전투는 많이 일어나고 있어.”
우리는 예비 퇴학자가 한 명 생기게 된 만큼 진지하게 선생님의 말을 들었다. 이 세계의 위험성을 이토록 실감한 것이 언제 이후던가. 아아, 그래, 아마 다섯 살 때, 테러 사건에 휘말린 이후 처음이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정규 조직은 그런 짓까지는 벌이지는 않지만, 법으로는 전부 심판할 수 없는 뒷세계 조직도 존재한단다. 그런 사람들은 테러를 일으켜 재능이 있을 만한 어린아이를 납치하기도 하지. 경찰 조직만 해도 그래. 인재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어린 마법사를 협조라며 데려가 싸움에 일찍 발을 들이밀게 만들거든. 그만큼 많은 조직이 ‘인재’에 목말라 있어.”
이 세계는 그런 세계다. 예전에 내가 살던 세계가 언뜻 평화로워 보여도 북한과 남한이 기 싸움을 했듯이, 먼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기아들이 굶어 죽었듯이, 이 세계는 물질적으로도 금전적으로도 풍족했지만 그 안에는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세계 인구의 70%는 마법사다. 그 마법사들 중 50% 정도가 경찰을 비롯한 조직에 소속되고, 그 외는 프리랜서 등의 다른 직업을 가진다. 예를 들자면 의사, 변호사, 선생님, 혹은 장인, 기계 설계 및 개발 등등…….
세계 인구의 70% 이상이 마법사라는 것은 그만큼 힘을 지닌 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당연히 뒷세계 인물들도 대부분 마법사고 수단을 가리지 않는 만큼 강한 힘에 대한 욕구가 굉장히 크다. 범죄자 역시 마법사의 비율이 압도적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어느 곳이든 강한 힘을 가진 자들을 원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 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은 모두 재능이 검증된 학생들이야. 학생들에 대한 정보는 확실히 통제되고 있지만, 그래도 위험은 많아. 그자들은 우리 학교의 교복이 어떤지 머릿속에 넣어 두고 있어. 사실은 너희들 모두에게 나눠 준 텔레포트 통학 배지나 학생증에는 혹시 너희가 납치당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둬서 추적마법 및 방어마법이 걸려 있단다. 보통은 너희들처럼 어리면 재능을 개화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높아서 집중적으로 노리지는 않지만…….”
나는 불안한 눈으로 그 이야기를 들었다. 이 학교에 다닌다는 사실만으로 납치 위협을 받는다고? 철저한 보호와 그것을 노리는 승냥이 떼, 참으로 모순적이다. 그래서 초등학생은 교복을 입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건가? 이 학교 학생임을 들키지 않는 편이 좋을 수도 있어서?
“그래도 평균 2년에 한 번씩은 어제 같은 소동이 일어나고 있어. 5, 6년에 한 번씩 정말로 납치당하는 학생이 생기지. 그런 위험이 발생하면 학생증이나 텔레포트 배지를 통해 신호가 가게 되어 있어. 그럼 가드 한 명이 바로 그쪽으로 텔레포트 하게 되어 있지만……거기엔 어느 정도 제약이 있단다. 조건부라 반드시라고도 할 수 없고. 그러니까 정말로 위험할 때는 학생증의 헬프 시스템을 사용하도록 해. 학생증에 대고 도와 달라고 외쳐. 알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울적한 기분에 잠겼다. 무심코 인하의 얼굴을 떠올렸다. 인하가 걱정되었다. 인하도 3학년 때부터는 나처럼 교복을 입겠다고 하고, 또 눈에 띄는 외모이지 않나. 정말로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싶어서…….
“그래서 중학교 학생은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야 반드시 기숙사에 들어가게 하는 거야. 수업 시간 때문에 그런 것도 있지만……. 보호자가 없는 초등학교 학생도 마찬가지고.”
말을 이어 가던 선생님이 고뇌에 가득 찬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너희들은 쉽게 위험에 휘말릴 수 있는 입장이란다. 그런데 자칫 누군가의 말실수로 실력에 관한 정보가 밖으로 퍼지면…….”
선생님이 괴로운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미리 자세히 설명해 줘야 했었던 걸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납치 사건은 예외로 치더라도 이런 식으로 혼이 나는 건 거의 1년에 한 번씩,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학년은 반드시 겪는 소동이라…….”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선생님은 그 시점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교탁을 탕탕 두드리며 아이들의 주목을 모았다.
“조용! 그리고 이번에 실력이 밝혀진 하진성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말 것. 오늘 학교를 빠지고 입원한 친구들에 대해서도 그냥 모른 척하도록 해라. 아무것도 묻지 말고 입을 다물어 주는 게 그 친구들을 위한 일이야. 큰일을 겪었다는 거 잘 들었지?”
““네에!””
과연 아이들이 이 말을 전부 이해했을지는 의문이었다. 언젠가 찾아올지도 모르는 위험도, 당장 친구들이 겪고 만 위험도 어쩌면 이 나이에는 아직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황이 심각하다’, ‘절대로 말하면 안 된다’ 정도는 진짜 염두에 넣어 뒀으면 한다.
결국 그날도 우리 2학년은 전부 단축 수업을 하게 되었다. 강당에 소집된 후 선생님한테서 경고성 말을 듣고 바로 수업을 마치게 된 셈이었다. 정말로 전생이었다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대대적인 소동이었다.
우리는 수업을 일찍 마친 후 초등학교 언덕에 있는 놀이터에서 모였다. 모처럼 수업을 일찍 마쳤음에도 어디에 놀러 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흘끔 민희의 눈치를 봤다. 민희는 평소와 달리 심각한 얼굴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걱정이 되었다. 오늘 들은 이야기는 민희의 부모님과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는 이야기였으니까. 따져 보면 전혀 상관없는 마법사가 얼마나 되겠나 싶지만서도…….
“그래서 숨기라고 한 거였구나. 나 오늘 그 말 듣고 처음으로 그렇구나 했어. 진작 그렇게 말해 줬으면 다른 애들도 말 안 하고 다녔을 텐데.”
“그러게 말이야.”
현호가 민희의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하, 그러자 한수가 코웃음을 쳤다.
“못 알아듣는 바보가 많아서 그렇지.”
“난 아니거든?”
“하.”
한수가 다시 한 번 코웃음을 쳤다.
나는 그것을 보고 내심 안심했다. 아무래도 부모님의 일을 떠올리고 괴로워하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다. 나는 속으로 엷게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진성이 걔 괜찮을까? 어딜 어떻게 다쳤길래 약까지 맞고 입원하게 된 거지?”
“무슨 소리야?”
나는 그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민희는 물론이고 다른 아이들 역시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봐서, 나는 그제야 아이들이 무언가 착각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다쳐서 입원한 게 아냐. 물론 다쳤을 수도 있지만 거기까진 모르겠고……걔들이 입원한 건 약을 맞아서야.”
“뭐어? 약을 맞았는데 왜 입원해? 약은 아픈 걸 고치기 위해 있는 거잖아?”
아이들의 눈동자가 순진무구하게 빛났다. 이런.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냐. 그게, 약이 무조건 좋은 건 아냐. 왜, 약은 여러 종류가 있잖니.”
“응? 응.”
“감기약, 진통 약, 두통약, 종류가 굉장히 많잖아. 먹는 것도 있고, 바르는 것도 있고, 알약도 있고 가루약도 있고, 물약도 있잖아.”
“응.”
“근데 약이라는 건 있지, 꼭 좋은 것만 있는 건 아냐. 고치는 약도 있고, 짐승을 죽이기 위한 것도 있고, 무언가를 억누르기 위한 것도 있어. 몸에 해로운 것도 있다고. 술 같은 것도 약이라고 부르기도 한단 말이야.”
“뭐? 왜?”
“말했잖아. 약이라는 건 여러 종류가 있다고. 술도 약이라고 부를 수 있어.”
나는 일단 거기까지 말하고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대답을 하거나 추임새를 넣는 건 주로 민희와 현호지만, 친구들은 다 내 말을 말똥말똥한 눈으로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약은 주사로 몸속에 직접 넣기도 하잖아. 근데 술을 약이라고 찔러 넣으면 어떻게 되겠어?”
“뭐?”
한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민희가 숨을 삼켰다.
“수, 술은, 많이 먹으면 몸에 안 좋지?”
“안 좋지. 술의 안 좋은 성분이 몸에 한꺼번에 많이 들어가면 죽을 수도 있어.”
“그, 그런 게 주삿바늘로 들어가면…….”
나는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 민희가 어쩔 줄 몰라 발을 구르며 나를 보았다.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런 약이 있어. 어떤 방법이든 간에 사람 몸에 들어가면 안 좋은 약. 마비시키거나, 잠에 빠지게 하거나, 약이 없으면 살지 못할 정도로 약에 빠지게 만들어서 몸을 약하게 만드는 그런 약이 있어.”
나는 차마 독약에 대한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친구들은 내 말을 들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민희가 눈을 글썽거렸다.
“그, 그럼……진성이랑……유나랑 민혁이도…….”
“응. 납치하기 위한 거라면 잠에 빠지게 하는 약이 아닐까? 더 심한 걸 수도 있고……그래서 병원에 입원한 걸 거야. 약은 후유증이 남으니까……그걸 고치기 위해서.”
“어, 어떡해…….”
민희랑 시하가 글썽거리더니 눈물을 쏟아 냈다. 나는 그것을 보며 표정을 가라앉혔다. 아이라서 그런 걸까. 남의 아픔에 생각보다 심하게 동조했다. 현호도 반쯤 울먹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과는 조금 다른 위화감을 느꼈다. 저 아이들이 저렇게 걱정하고 괴로워하는 건 어린아이의 순수한 감성 때문만은 아니구나, 하는…….
“혹시 너희들 진성이란 애랑 같은 반이던가?”
“응? 응.”
울먹이던 친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수가 울먹이고 있는 세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세 녀석은 그 세 명이랑 다 사이가 좋아.”
“아……그랬구나…….”
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럼 너무 비관적이게 말한 것 같다. 상황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좀 안 좋은 면을 부각했던 건데,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친구들을 위로했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약은 과할 때 위험한 거야. 어린애니까 몸에 부담이 갈 걸 생각해서라도 심한 약은 안 썼을 거야. 지금 구출되어서 병원에 있잖아. 바로 구해 냈다니 약을 맞아도 한 번 정도만 맞았을 거고, 병원에서 제대로 치료하면 후유증도 안 남을 테니 금방 괜찮아질 거야. 납치당했으니까 불안할 테지만, 그것도 주위에서 잘 위로해 주면 괜찮아. 걔들이 돌아왔을 때 너희들이, 너무 과도한 관심은 보이지 말고, 조금 배려해 주고, 그리고 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럼 곧 괜찮아질 테니까. 알았지?”
내 말에 세 사람이 조금 진정한 듯했다. 그러나 민희는 여전히 불안한 표정으로 울상을 지었다.
“그, 그걸 어떻게 알아?”
“어…….”
“그, 그치만, 은하가 틀린 말 잘 안 한다는 거 알지만, 은하는 그런 일을 당해 본 적이 없잖아. 엄청 무서웠을 텐데……. 오빠가 트라우마란 건 위험한 거래. 못 잊으면 병이 된대…….”
나는 민희의 시선을 피하며 잠시 침묵했다. 그건……그렇지. 게다가 트라우마는 어릴 때의 경험일수록 깊게 남기 쉽다. 하지만 난 정말로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다. 일단, 혼자 겪은 게 아니니까. 누군가가 바로 구해 주러 왔으니까. 그러니까…….
“……트라우마란 건 옆에서 마음을 치료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생겨나는 거야. 납치당할 때 혼자가 아니었고, 누군가가 바로 구해 주러 왔어. 그리고 너희들이 옆에서 걔네들을 위로하고 지켜 줄 거잖아. 그럼 괜찮아. 그럼 금방 괜찮아질 거야.”
그러나 친구들은 여전히 풀이 죽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그런 아이들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그네를 흔들었다.
“정말이야. 마음만 치료가 되면,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다니까? 나도 테러에 휘말려 본 적이 있는걸.”
나는 오래전의 일을 떠올리며 흐리게 웃었다. 나도 그때 당시에는 무척 무서웠다. 바닥이 흔들리고, 칼날이 솟아오르고, 그것에 금방이라도 온몸이 꿰뚫릴 것 같았다. 두려움에 생각을 제대로 이어 가는 것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결국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의외로 낙천적인 면이 있는지, 지나고 나니 운이 안 좋았을 뿐이라고 생각하며 넘길 수 있었다. 실제로 그 후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는 선명히 기억나지 않는 옛날 일이 되어 버렸다. 그래, 시간이 지나면 이렇게 생각하는 법이다. ‘아, 그런 일도 있었지.’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웃은 거였다. 그런데 친구들한텐 그렇게 여겨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친구들이 당황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경악에 가득 찬 음성에 나는 제법 세게 흔들리고 있던 그네를 멈춰 세웠다.
‘아……그러고 보니 얘들한테는 말한 적 없었던가?’
당황하지 않은 것은 인하뿐이었다. 인하는 나에게 이 이야기를 몇 번 전해 들었다. 나는 잠시 머리를 긁적였다. 확실히 얘들한테는 말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어, 그러니까, 몇 년 전의 일이야. 5살 때였나? 유치원에서 식물원으로 소풍을 갔는데, 거기에서 테러 사건이 일어나서, 나만 혼자 살벌한 방에 갇힌 적이 있었어. 테러범의 마법으로 마구 폭주하고 있는 방에. 위험하긴 했지만 별일은 없었고, 다치지도 않았고, 그냥 잘 탈출했어. 어떻게 탈출했냐면……그건 여기서 이야기하기는 좀 그러니까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해 줄게.”
나는 그네에 앉은 채로 다리를 흔들었다.
“결국, 그런 거야. 그 당시에는 엄청 무서웠거든? 내가 갇힌 방은 철의 방이라고 해서, 방이 폭주하면서 바닥에서 막 철창 같은 것이 솟아오르는데, 엄청 무서웠어. 진짜 엄청. 근데 5살 때 일이란 말이야. 그 이후론 그렇게 위험한 일도 없었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냥 지나간 일이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고. 절대 잊을 수 없는 일은 개뿔. 이젠 기억이 많이 희미해졌어.”
이젠 단편적인 인상밖에 기억이 안 난다. 폭주 원인이 내가 쥐었던 구슬이었던 것, 철이 날카롭게 솟아올랐던 것, 지면이 흔들리던 것, 마법으로 벽을 깨뜨릴 수 없어 금속조형마법을 만들었던 것.
“그러니까 그 애도 분명, 옆에서 잘 커버해 주면 괜찮아질 거야. 무서워할 때 옆에서 부모님이나 친구가 위로해 주면 괜찮을 거라고.”
“…….”
이야기를 끝마쳤을 때 친구들은 나를 무척 걱정스러운, 혹은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이 말한다. 정말 괜찮은 거냐고. 그런 일이 있었던 건 처음 들었다고. 어째서 지금까지 말해 주지 않았느냐고.
시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로 괜찮아……?”
“응. 이미 지난 일인걸.”
그러나 친구들의 표정은 한동안 펴지지 않았다. 사실을 알고 있던 인하마저 엄호를 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 후로도 친구들에게 몇 번이나 반복해서 괜찮다고 말해야 했다.
우리는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곧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놀 기분이 아니다. 어제 오늘 일어난 사건이 머리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비밀 준수 교칙, 납치, 약……그런 게, 그런 영화 같은 일이 우리 곁에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니.
‘아, 기분 꿉꿉하다.’
물론 그렇다고 거기에 구애되면 안 된다는 사실은 잘 안다. 하지만 바로 어제 같은 학년 친구가 납치당할 뻔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사장님의 과거 이야기까지 듣고, 바로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건 무리였다.
‘이사장님은 그래서 이 학교를 만든 거구나…….’
이사장님은 겉보기엔 매우 차가운 인상이다. 외모 자체가 엄청 뛰어난 건 아니지만 은은한 화려함을 가진 사람이다. 빛을 발하는 것 같은 금발에 금색 눈동자에 마른 체형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고 여자처럼 생겼다는 건 아니다. 남자라는 건 얼굴을 보면 한눈에 알 수 있다.
그 눈빛은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차갑다. 그 사람 주위에는 알 수 없는 박력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차가운 눈으로, 이사장님은 항상 다정한 말을 입에 담는다. 그만큼 인덕도 많다.
“…….”
나는 답답한 기분에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누가 내 어깨를 툭 하고 쳤다.
“……어?”
“안녕, 얘들아. 오늘 너희 학년에서 큰일이 있었다며?”
검은 가드 복장을 입은 은희 언니가 우리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민희가 은희 언니를 돌아보며 적극적으로 반응을 보였다.
“응! 맞아! 어떤 애가 교칙을 어겨서 그것 땜에 엄청난 소동이 일어났어! 큰일을 당한 건 우리 반 친구야. 얘들만큼은 아니지만 친한 친구인데…….”
민희의 표정이 우울함을 담고 가라앉았다.
“약 같은 거에 당해서 병원에 입원했대…….”
“아……너희 친구였구나. 그래, 같은 학년이니까…….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약이라고 해도 그냥 몸에 힘이 안 들어가게 하는 정도였어. 심한 거 아니니까 며칠만 푹 쉬면 금방 괜찮아질 거야.”
“정말?”
“응.”
은희 언니가 믿음직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약간 의아함을 느끼고 물었다.
“왠지 잘 아시네요?”
“그야……걔들을 구하러 간 게 나였거든. 그것도 가드가 하는 일이야.”
“그랬구나……!”
민희가 비로소 안심했다. 구해 낸 본인이 하는 말이라 그런지 무척 믿음직스러웠다. 나 역시 다행이라 생각하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늦든 빠르든 학년마다 한 번씩은 꼭 겪는 일이긴 한데. 아이들이 처음부터 그 규칙의 의미를 알 리도 없고, 또 잘 지킬 리도 없으니까. 나는 뭐 중학교 때 비밀 준수 교칙이 좋아서 이 학교 들어온 거니까 안 그랬지만.”
은희 언니가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이번 건 좀 커. 소동의 원인이 된 애는 볼 것도 없이 퇴학이네. 당한 애들 부모님도 이유를 들으면 가만히 있겠어?”
그러며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가장 힘든 건 그것 때문에 실력이 밝혀진 애들이지. 한동안은 계속 밖에 나갈 때마다 두려워하지 않겠니. 걔들은 당분간 기숙사에서 살게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 학생이든 어른이든 수군대는 사람이 생길 테고.”
“정말, 그렇겠다.”
민희가 걱정에 가득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은희 언니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뭐랄까, 이사장님이 그런 사람이라서 그런가. 이 학교에는 정말로 상냥한 사람이 많은 것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나. 어떤 사람이 괴로운 일을 겪었을 때, 내가 이런 일을 겪어 힘들었으니 다른 사람은 이런 일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사심 없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보통 사람은 그러한 상황을 겪은 걸 그저 원망할 것이다. 왜 하필 많은 사람 중 내가 이런 괴로움을 겪어야 하냐며. 일부는 어쩌면 나 말고 다른 사람도 이런 아픔을 겪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혹은 실제로 그것을 실행하려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은희 언니는 예전에 그 남자애랑 비슷한 일을 겪었다. 그보다 훨씬 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저렇게 ‘그렇기 때문에’라고 말하며 자신과 똑같은 상황을 겪은 사람들을 구하거나 위로해 주려고 한다. 정말 그건 보통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때, 그 뒤에 이어진 말에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은희 언니가 민희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어라, 몰라? 제현이 걔가 그런 경우였잖아.”
그 말에 나는 숨을 삼키고, 두 눈을 크게 떴다.
“뭐어?!”
소리를 지른 것은 민희였다. 처음 듣는 이야기에 놀랐던 우리는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설마 동생인 민희조차 그 사실을 몰랐던 건가?
“왜? 어째서? 어쩌다가?”
민희의 표정이 단숨에 당황으로 일그러졌다. 은희 언니가 당황하며 대답했다.
“어? 그게, 나도 들은 이야기인데……. 내가 아는 건 별로 없어. 그냥 제현이가 아직 초등학생일 때, 3학년인가 4학년 때라고 했던가? 친구였던 애가 제현이의 실력을 퍼트렸다고 들었어. 그 일로 그 아이는 정학 처분을 받았지만, 이미 제현이의 실력은 전부 다 밝혀진 후였지, 뭐. 그런데 그 소동을 일으킨 애 어머니가 왜 그런 거 가지고 정학이냐고 쳐들어왔다가 본전도 못 찾고 아예 전학 가게 됐대. 사실상 퇴학이지. 그 친구란 애가 제현이 소문을 퍼트린 이유는 잘 모르겠어. 내가 오기 전 일이라 전학 간 애가 누군지도 모르고. 난 그 이야기를 주연이한테 들었거든. 아무튼 뜬소문만 많아서 잘은…….”
은희 언니의 말을 들으며 민희가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