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441
“인간적이다라……. 그래요. 그렇지요.”
레일리가 납득하며 말문을 열었다.
“은하 씨 의견이 그렇다면 저는 좋아요. 제 동의가 필요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은하 씨가 그들과 협력을 맺는 것에 동의할게요.”
SR 사이에서 레일리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레일리 다음으로 지위가 높은 제레미와 로일도 묵묵히 곁을 지켰다.
“트라베리아 출신 마법사도 협력하고 있는걸요. 이제 와서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의심스럽다면 저들도 마찬가지예요. 인간이 아니라고 배척하는 것도 우스운 일인 것 같아요.”
기분 나쁠 지도 모르는 말, 혹은 타당한 의심이었으나, 구 트라베리아 일원은 별다른 불편을 보이지 않았다. 아멜리아는 오히려 레일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레일리가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거기다……아무래도 새벽별무리보다는 적겠지만, 저도 장군 시리즈를 여럿 만났어요. 하나같이 개성적이었어요. 이형적인 모습만 아니라면 다들 사람이라 착각할 정도로 확실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어요.”
이번 말에는 모두가 수긍했다. 여기 있는 사람은 모두 최소 한 번 이상 장군 시리즈와 마주쳤다. 키메라는 인형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물이다. 더불어 장군 시리즈는 자아를 가진 지성 생명체다.
“하물며 ‘살아 있다’고 하기에 애매한 로봇도 감정을 가지고 주인을 배신하잖아요.”
로봇은 지금까지 활발하게 사용되는 무기이며 마법사다. 방위부에도, 경찰에도, SR에도 로봇 대원이 세 자릿수 가까이 있었다. 격렬한 싸움 끝에 지금은 대부분 소거되고 말았지만…….
우리는 감정과 자아가 각인된 로봇을 ‘안드로이드’라 부르며 인격체로 취급한다. 그렇다면 키메라도 마찬가지라는 것일까.
“게다가 은하 씨가 직접 접촉한 상대에요. 정신마법에 가장 능한 마법사가요. 차라리 무르시엘 보다 낫군요.”
이어 레일리의 표정이 조금 가라앉았다.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요. 무르시엘과 무르시엘에 속한 장군 시리즈에게는 정말 많은……신세를 졌으니까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누구나 모르는 사람과 자신의 목숨을 저울에 올린다면 자신의 목숨을 선택할 텐데. 전력이 된다면야, 그 힘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을 더 지킬 수 있다면야…….”
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다소 가라앉았다.
레일리는 키메라를 인정했고, 그것에 동조하는 시선도 제법 있었다. 그러나 불안이나 적의를 가진 시선은 여전히 존재했다. 어쩔 수 없다. 장군 시리즈는 본래 적인데다, 레일리의 말대로 라스와 첸은 본의가 아니라고는 하나 많은 인간을, 아군을 죽였다. 이 안에는 두 사람에 의해 소중한 자를 잃은 마법사가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라스와 첸을 증오할 수밖에 없는 자들도 이성적으로 생각할 땐 적대하기만 할 상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인정할 것이다. 라스와 첸은 죽지 않기 위해 싸울 수밖에 없었으니까.
“은하 씨의 이야기대로라면 두 분 외에도 트라베리아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장군 시리즈가 있겠군요.”
“네. 하지만 여러분은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
“그냥 죽이시면 됩니다.”
첸이 차가운 눈으로 단언했다. 동족이고 같은 처지임에도 자비 하나 없는 말에 모두가 불안을 드러냈으나, 첸의 말은 타당했다.
“어물쩍 신경 썼다간 여러분이 목숨을 잃을 겁니다. 트라베리아의 감시는 강력합니다. 그걸 피해 계획을 짜려면 저나 라스처럼 특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는 영혼을 조각 냈고, 라스는 도깨비의 신비로 기억을 감췄습니다. 장군 시리즈는 힘 있는 ‘제물’입니다. 그들은 충성심이 약한 자부터 배제합니다.”
첸은 그러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트라베리아를 거부하면서도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면 그 자는 틀림없이 강하고 특수합니다. 그런 상대를 제압하고, 기억을 보고, 즉시 문장을 제거한 다음, 트라베리아가 조치를 취하기 전에 완벽하게 문장을 제거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면, 약간의 동정도 하지 않는 것이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우리가 트라베리아를 배신하려 한다면 틀림없이 살기 위해서일 겁니다. 그 사실을 명심해 주십시오.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법입니다.”
“……그렇군요.”
고민이 가득하던 루카의 눈동자가 점점 명확해졌다. 첸의 경고는 조금 더 이어졌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일부러 살려 두지도 마십시오. 임무에 실패한 키메라는 드문 케이스에 해당하지 않고서야 어차피 돌아갔을 때 죽습니다. 차라리 잡아 두는 게 더 생존할 가능성이 높겠군요. 그래봐야 원격으로 죽일 수 있지만요.”
첸이 입가를 가리고 있던 부채를 내려 손바닥을 탁 쳤다.
“무엇보다.”
첸의 눈빛이 씁쓸하게 가라앉았다.
“저는 영혼을 보는 자입니다. 제가 태어난 이후에 살아 있거나 새로 태어난 모든 장군 시리즈를 한 번씩 보았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러나 트라베리아를 배신하고도 살아남을만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자는 적었으며, 그 적은 가능성을 가진 동지는 현재 대부분 죽었습니다. 새로 태어난 자들은 독립심을 가지기엔 어립니다. 그러니 가차 없이 적으로 여기고 죽이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루카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첸과 라스를 한 번 보며 수긍하는 척했다.
저건 거짓말이다. 그는 분명 같은 편이 될 가능성이 있는 자와 접촉해 보겠다고 했다.
세계를 통해 정보를 구하는 베로니카와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비집고 들어올 꿈의 그물을 생각하니 믿을 만한 사람에게도 모든 정보를 털어놓기가 힘들다. 털어놓을 수 있도록 환경을 최선을 다해 영지의 환경을 정리해야겠다.
머릿속으로 다양한 마법이 스쳤다 사라졌다. 내가 생각에 잠긴 것을 눈치챘는지 인성이가 앞으로 나섰다.
“그럼 이들이 연맹에 서는 걸 인정한 것으로 알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단, 불안해하는 사람, 혹은 원한이 있는 자도 많을 테니 새벽별무리가 확실히 관리하셔야 합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아무래도 좀 더 논의가 필요할 것 같다.
회의는 며칠에 걸쳐 계속되었다. 중간중간 멤버가 바뀌었다. 나와 루카, 레일리는 다른 사람에게 회의 진행을 맡기고 본격적으로 방어 결계 구축에 돌입했다. 기본은 우리 세 사람이었으나, 중간에 김준영과 인하가 합류했다. 인하의 소속마법을 사용하면 마법끼리 좀 더 긴밀하게 엮을 수 있다. 김준영은 자연의 가호를 짜 넣기 위해 함께했다.
첸과 라스도 결국 우리가 관리하는 것으로 결정 났다. 본인의 의견을 받아들여 우리는 두 사람을 무르시엘과 같은 팀으로 엮었다. 관리는 인하가 하기로 했다. 소속마법 기술 중에서 적을 관리할 때 쓰는 기술, ‘구속’으로 연결했다.
그걸 보고 도시 안의 사람들을 관리할 때 소속마법이 많이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안마다 하나하나 마법을 의논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꿈을 통제하는 것이다. 바깥의 꿈이 침입하는 것을 방어하면서, 내부의 꿈이 바깥으로 흘러나가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 꿈의 그물처럼 그물 형태로 짜 볼까. 꿈의 그물이 이상을 일으켰을 때 역공도 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 그물의 파장을 따라 해킹도 할 수 있게 해 볼까?
‘그것도 좋지. 결계가 자체적으로 가까운 꿈의 그물의 정보를 모을 수 있도록 하면 편할 텐데.’
결계 안에 있는 사람의 꿈을 일일이 관리하는 건 내 마법에 조금 걸맞지 않았다. 그래서 인하의 소속마법을 같이 사용하기로 했다. 결계를 소속의 실로 긴밀하게 엮고, 결계의 영향을 받는 사람에게 실을 내려 꿈을 최대한 관리한다.
사생활을 엿볼 생각은 없다. 레일리의 규율마법으로 규율에 위반하는 것을 특정할 생각이다. 적어도 소속마법으로 연결되면 트라베리아의 손에 사람들이 흩어지더라도 좀 더 빨리 찾을 수 있다. 거기다……생존자 안에 스파이가 없으리라고 확신할 수 없다. 그걸 확인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그러나 소속마법에 연결된 사람을 한 명 한 명 인하가 파악하며 다니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인하는 소속시킬 뿐, 소속마법은 레일리의 규율마법을 바탕으로 한 결계 전용 시스템이 관리할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문이와 레일리의 마법을 합친 것이다.
……프로그램을 이것저것 조정하다가 불편해져서 결계 관리 전용 가디언을 하나 만들어 독립시켰다.
그렇게 만들어진 결계에 김준영이 자연의 가호를 내린다. 다른 누군가의 기척이 닿으면 바로 눈치챌 수 있도록. 자연의 가호를 넣고, 힘을 증폭하고, 강화한다.
세세한 설정이 계속해서 추가 됐다. 결계의 가디언에게 진화석을 먹여 빠르게 진화시켰다. 처음으로 진화석을 본 마법사 일동이 탐나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것도 만들 수 있다니…….”
“S랭크 상위 이상 마법사한테는 별로 도움이 안 돼요. 일시적인 증폭 효과는 있지만요.”
“마법사한테만 통하는 게 아니잖아요! 누군가가 만든 무기를, 설치된 마법을 진화시킨다니.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건데요!”
나는 탐나는 얼굴로 진화석을 흘끔거리던 김준영에게 진화석을 세 개 건네줬다.
“어?! 제, 제가 받아도 돼요?”
“네 힘은 연맹에 필요해.”
“……!”
“이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더 강해졌으면 좋겠어.”
네가 네 몸을 조금이라도 더 지킬 수 있도록.
김준영이 진화석을 꽉 쥐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조금 그리운 심정으로 김준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른 팀도 바쁘게 움직였다. 대피와 피난은 인성이가 책임지게 되었다. 예전에 피난 도시 대책으로 계획했던 ‘그림자 세계’의 진화판을 만들 예정이다. 기본적인 설정은 저번 도시와 비슷하지만, 이번에 그림자 도시가 만들어지는 장소는 ‘꿈과 그림자의 경계’다.
꿈과 그림자의 공간은 유클라프도 파악하기 힘들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위험한 일이 생기면 그림자와 현실을 교체한다. 이상은 이렇지만, 트라베리아가 가만히 놔둘 리 없겠지. 이 마법 역시 조만간 인하의 소속마법으로 연결하여 결계에 엮을 것이다.
결계를 제외하고도 트라던트나 트라베리아에 저항할 만한 환경을 조성해야겠지. 이트리와 이플라워를 많이 만들 거다. 루카의 봉인석과 레일리의 규율마법석도 곳곳에 심을 예정이다. 우리가 만든 가디언은 이틀도 되지 않아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 마을마다 뿌렸다.
우리 진영이 정해졌다. 무르시엘과 첸, 라스도 여기에 속한다. 우리 진영은 호주를 제외한 오세아니아 섬을 모아 만든 신대륙이다. 위치는 북아메리카와 비교적 가깝다.
회의는 닷새가 지나서야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반 이상은 할 일을 마치고 정해진 진영을 지키기 위해 떠났으나, 우리는 한동안 방위부 본부에 남았다. 결계 보강이며 이것저것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김준영은 S랭크 마법사 사이에 낀 게 상당히 어색한 모양이었다. 며칠이 지났으니 익숙해질 법도 한데 계속 긴장된 모습을 보였다. 힘의 차이 때문에 압박감을 심하게 느끼는 걸까.
반면 우리, 김준영과 자주 마주치는 결계조 마법사들은 김준영이 편했다. 자연의 가호를 이용한 김준영의 증폭은 진심으로 대단하다.
또한 김준영에게는 진화석이 잘 맞는 모양이었다. 진화석을 먹은 며칠 사이 김준영의 마력이 제법 늘어났다.
1차 결계 작업이 끝나갈 무렵 김준영이 나를 개인적으로 찾아왔다. 며칠간 밤을 새다가 인하, 레일리와 잠깐 교대한 참이었다.
“선배, 부탁드릴 게 있어요.”
“뭔데?”
“다음에…….”
고민하던 김준영이 고개를 들었다.
“다음에 꿈 그물이나 한국을 조사할 때도, 저를 데려가 주세요.”
나는 대답을 머뭇거렸다. 위험하다고 반대하기에는 이미 한 번 같은 일을 저질렀다. 거기다 김준영이 위험하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실제로 무척 고심하고 말을 꺼낸 기색이었다.
“백한 씨는 허락해 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서……은하 선배한테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았어요.”
“꼭 조사에 참가하고 싶은 특별한 이유가 있니?”
조심스럽게 물으니 김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서 제가 자연의 가호를 느꼈었잖아요.”
“그랬지.”
정확히는 자연으로 무언가를 숨긴 기척을 발견했다. 그러나 자연의 가호는 직접적인 공격력을 발휘하는 것조차 확실하게 느끼기 어려우니 사실상 구분하는 게 무의미하다.
“……은하 선배가 벨라에게 당하고, 벨라가 막 물러났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 났어요.”
말을 잇던 김준영이 문득 혼란스러운 얼굴로 앞머리를 헤집었다.
“아니……벨라한테서도 비슷한 게 느껴졌어요. 그걸 뭐라고 말해야 할까……. 섬뜩했나? 온화했나? 사슬로 연결되어 있는데……한 곳이 아니에요. 맞춰지는 퍼즐처럼, 혹은 흩어진 퍼즐이 고의적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완성되는 것처럼……연결되어 있는데, 분리되어 있어요.”
“무슨…….”
“결계예요.”
김준영이 겨우 알겠다는 듯 읊조렸다.
“결계인 것……같았어요. 가호가 열리면서, 사슬이 연결되고, 어렴풋이……마법의……기척이라 해야 하나……. 그런 게 흘러나오는데…….”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심상찮은 이야기임은 알겠다. 나는 벨라를 보면서 그런 건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김준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선배. 저는, 저는요……트라베리아가 미워요.”
“…….”
“이 말은 너무 가볍네요. 정말,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증오해요.”
“알아.”
나는 무거운 눈으로 답했다.
“알고 있어.”
김준영이 나를 마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저는 트라베리아를 멸망시킬 수 있다면 뭐든지 다 할 거예요. 하지만 전 약하니까, 생각만 할 뿐 직접 무언가를 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김준영의 표정이 점점 차가워졌다.
“선배, 저는요, 사실 선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그 녀석들이 인간인가요? 저라면 그냥 죽일 거예요. 하지만 그래요, 복수의 방법은 다 다른 거니까요. 저는 선배가 반드시 트라베리아를 죽일 거라 믿어요. 그래서 선배한테 가장 먼저 말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준영아?”
나는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김준영이 다시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선배, 저는요, 방금 말한 그게……‘트라베리아’ 같다고 생각해요.”
“……뭐?”
“무시무시하게 섬뜩하고, 무시무시하게 강대했어요. 한순간 ‘무언가’에서 시작된 사슬이 한국에서 연결되어 온 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걸……본 듯한 기분이 들어요. 감응한 것 같아요.”
김준영이 말을 이으며 불안한 기색으로 메마른 입술을 축였다.
“벨라가 사라지자 잠시 모였던 퍼즐이 멀어지며 사라졌어요. 이동, 하고 있어요. 아니, 고정되어 있지 않나? 굳이 따지면 한국에 대현이 쳐 놓은 결계와 닮았어요. 거기에 있지만 거기에 없어요. 분리해서 입구를 만들어 놓고, 올바른 순서로 연동해야만 평소에는 흩어져 있던 입구가, 아니면 세계가 완성되는 거예요.”
말을 듣는 내 표정도 점점 차갑게 굳어갔다. 김준영이 굳건한 얼굴로 다시 한번 말했다.
“선배. 저를 데려가 주세요. 다시 한번 그걸 확인하고 싶어요.”
“너…….”
“어쩌면 트라베리아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몰라요.”
##28. 영지와 영지
꿈의 그물은 팽창을 멈추고도 오랜 기간 변화했다. 꿈이란 세계를 잡아 묶는가 싶던 그물은 현실에 그치지 않고 ‘차원’을 잡아 연결했다. 소니아의 능력이 합쳐진 유클라프의 힘은 무시무시하여, 그물에 갇히고 연결된 모든 공간과 차원이 유클라프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지구에 존재하는 차원의 3분의 2이상을 뺏겼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곳에도 영향을 준다. 서로의 결계가 서로를 향해 팽팽하게 얽히고, 밀려, 선명한 경계선을 남긴 채 굳었다.
굳어버린 경계선을 마지막으로 꿈의 그물이 안정되었다. 그 무렵에는 새벽별무리를 비롯한 연맹이 관리하는 영지, 세계 수호 연방국 새블레도 어느 정도 안정되어 있었다.
꿈의 그물이 안정되고 시간이 조금 지났다. 그동안 새블레는 짧은 평화를 보내고 있었다.
새블레에 있는 사람은 약하든 강하든 모두 마법사다. 만일을 위해 새블레에 들어선 사람은 모두 마력 패턴과 주민증으로 확인받고 있고, 어린아이가 아니고서야 나라의 어떤 곳에서든 기여하고 있다.
도시가 형성되며 진영이 안정되고 피난 대책이 마련되며 결계가 점점 강해졌다. 꿈의 그물이 움직임을 멈추고 약 한 달, 결계를 강화하는 틈틈이 나는 감지 마법사들을 교대로 데리고 움직이며 조금씩 꿈의 그물을 파악했다.
꿈의 그물을 통해 트라베리아의 영지는 이미 현실 위에 존재하는 이차원에 더불어 정신세계와도 섞였다. 트라베리아의 영지에 속한 모든 공간은 소니아와 유클라프의 힘에 의해 고정되어 있다. 그러니 공간 이동이 아니라 걸음을 통해 천천히 꿈의 그물을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물을 파악할 수 있는 건 현재 전 세계에서 나와 인성이밖에 없다.
그사이 꿈의 그물은 전보다 훨씬 견고해져 있었다. 나는 꿈을 통해, 인성이는 트라던트의 꿈과 공명하며, 우리는 빠르게 꿈의 그물의 법칙을 파악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파악하는 속도가 느린 건 유클라프의 힘이 너무 짙어서였다. 유클라프의 공간마법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다 파악할 수 없는 경지에 있었다. 인성이와 그림자가 트라던트에 공명하는 방법이 있긴 하지만, 그 힘은 바로 익숙해지기엔 어려움이 따랐다. 그래도 꿈을 통해 꾸준히 파악한 덕분에 꿈의 그물을 파악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하늘과 바다에 새겨진 경계선을 벗어나면 바로 트라베리아의 영지다. 트라베리아는 자신의 영지에 들어왔다고 바로 반응하거나 공격하지는 않는다. 대놓고 꿈의 그물이 우리에게 닿지 않도록 방어해 봤을 때도 반응이 없었다. 바다를 걸을 때는 그렇다.
그러나 레벨2 이상 트라던트나 육지에 접근하면 다르다. 꿈의 그물을 통해 트라던트가 사람의 꿈과 기척을 예민하게 느끼고 마력을 흡수하는 공격을 시작한다.
그것을 기척을 드러내고, 혹은 숨기고 꿈의 그물을 돌아다니며 확인했다.
꿈의 그물이 지닌 힘이나 정밀도는 확실히 무시무시하지만, 이런 광범위한 마법이 전방위에서 같은 힘을 발휘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전력으로 기술을 발휘하는 상태라면 더 그렇다. 그물의 힘은 트라던트와 육지에 가까울수록 강하고, 전체적으로 북아메리카에 가까울수록 강하다.
짧은 탐색이 여러 번 이어졌으나 우리는 아직 가장 힘이 강한 북아메리카에는 다가가지 않았다. 꿈의 그물 탓에 움직일 수 있는 속도가 제한되는 데다, 환각으로 숨길 수 있는 면적이 생각보다 좁고, 오래 거점을 비우기에는 걸리는 점이 많은 탓이다.
꿈의 그물을 탐색하는 멤버는 나와 인성이를 제외하고는 자주 바뀐다. 루카와 레일리도 한 번 함께 따라 나섰고, 김준영은 꽤 자주 따라오는 편이며, 눈이 좋은 예리와 성진이도 몇 번 함께 나섰다. 특수한 능력이나 감지능력이 있는 자는 다 한 번씩 나섰다고 볼 수 있다.
이번 조사는 지금까지 중에서 제일 오래 걸렸다. 처음으로 육지까지 갔다 왔기 때문이다. 이번 조사 멤버는 나, 세필리오, 준영이, 인성이, 오시언이었다. 아직 꿈의 그물을 전부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안전 지역’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첫 번째 육지 외곽 조사를 마치고 진영으로 돌아오자 생기발랄한 소녀가 나와 인성이를 맞았다.
“안녕하세요~!”
겉모습은 평범한 인간이지만 사실 이 자는 장군 시리즈다. 첸과 라스의 새로운 동료다.
꿈의 그물 탓에 우리는 바깥에 쉽게 나서지 못하게 됐다. 그 사정은 라스와 첸도 같다. 능력이 능력이니만큼 전혀 돌아다닐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위험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없다. 즉 아직 바깥에 있는 키메라에게 말을 걸기엔 이른 시기였다.
여기 있는 라이라는 대륙과 대륙이 갈라질 때 연맹의 영지 안으로 트라베리아가 보낸 ‘스파이’였다.
막 대륙과 대륙이 갈라졌을 때, 연맹의 영지 안에는 예상대로 트라베리아의 부하가, 뱀과 장군 시리즈가 잠입했다. 뱀은 숙청당하거나, 쓸모가 있는 경우 범죄 노예로 구속됐다. 라이라는 스스로 우리에게 모습을 밝히고 트라베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싶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라이라는 변신의 기예로, 정해진 이름은 없으나 도시 전설로 많이 알려진 거울 요괴다. 거울에 살며 거울에 비친 자를 흉내 내고 때로는 거울에 비친 자를 거울 안으로 끌어들인다는 거울 요괴, 혹은 귀신.
그녀는 장군 시리즈 중에서 라스나 첸 못지않게 특수한 개체다. 장군 시리즈는 만들어 낸 생물 병기, 그런데 본체가 ‘무생물’이라니.
라이라는 알고 보니 듀크의 동기였다. 다양한 모습, 성격, 감정을 거울에 저장하고 있으며, 거울 안의 모습을 번갈아 사용해 마음을 감추는 것으로 트라베리아의 의심을 피해 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트라베리아를 배신할 마음을 가지고 있는 키메라들은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라이라는 참극 이전부터 베로니카의 총애를 받은 측근이었다. 하필이면 그렇다. 라이라는 키메라 중에서 상당히 사교성이 좋은 편이었으나, 그 탓에 아무도 라이라에게는 속내를 털어놓지 않았다.
라이라는 ‘비치는 것(거울)’을 통해 상황을 엿보고 정보를 모을 수 있다. 특수능력이기 때문에 라이라의 거울 엿보기를 눈치챌 수 있는 자는 아주 적다. 그러나 척살당한 키메라 중에 라이라에 의해 배신이 밝혀진 자는 아무도 없다. 어느 키메라가 혼자서만 안고 있던 비밀을 알고 있다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하면서도, ‘유은하’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번도 꺼낸 적이 없다.
베로니카의 총애를 받았던 만큼 라이라가 지닌 특수함은 라스와 첸 저리가라 수준이었다. 저 작은 몸 안에 영혼과 감정이 수십 수백 갈래로 나뉘어 만화경처럼 반짝이고 있다. 본래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정신세계는 하나일진데, 라이라는 수백 개가 넘는 ‘문’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 라이라가 복사하고 수집한 영혼들이다.
그래서 처음 라이라를 조사할 때 꽤 애를 먹었다. 나는 아니고, 문이가. 그 문을 일일이 열어 보며 라이라의 진의를 확인해야만 했다.
결론적으로, 라이라가 트라베리아를 배신한 것은 진실이었다. 디나의 약은 다 써버린 참이고, 당장 디나를 만나러 갈 방법은 없었다. 그런데도 라이라는 문장을 없애 달라 청했다.
문장을 ‘없애길 바랐다’는 것 자체가 트라베리아를 배신했다는 무엇보다 큰 증거다. 라이라의 힘은 첸보다 조금 약한 정도였고, 어렵지 않게 문장을 없앨 수 있었다.
그러나 라이라를 첸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특수 케이스라 표현한 진짜 이유는 이다음에 있다. 라이라는 놀랍게도 거울로 수집한 영혼과 감정으로 핵을 가공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진화했다. 디나의 약 없이 홀로 독립한 것이다.
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문장은 없앨 수 없었다.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문장을 없애 줄 마법사를 계속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더니 혼자 지내는 것보단 친구랑 같이 지내는 게 더 즐겁다며 우리 진영에 붙었다. 꽤나 자유로운 성격이다.
“리더 님, 오랜만이에요! 일주일만이네요! 여러분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게 다가온 라이라의 모습이 한순간 나로 바뀌었다. 정확히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다. 라이라는 무언가에 가까이 다가가면 습관적으로 모습이 변하게 된다는 모양이다. 이때 보통 비친 상대의 마법도 복사한다는데, 아무래도 날 상대로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듯했다. 나만이 아니라 트라던트의 힘을 가지고 있는 인성이, 하르펜의 일부를 지닌 예리, 종말의 힘을 지닌 성진이 등 특수함의 도를 넘은 힘을 지닌 자들의 마법은 복사하지 못한다.
라이라는 아차 놀라며 곧바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곧이어 동료들이 우리 귀환을 눈치채고 우리를 맞으러 나왔다.
우리는 짧게 인사만 나눈 후 이번 탐색 결과를 연맹에 보고하러 갔다. 꿈의 그물이 안정된 이후로 처음 발을 디딘 대륙은 무척 혼란스럽고 어지러웠다. 미로 같고, 유령대륙 같고, 동화 속에서나 존재할법한 환상적인 세계 같았다.
제대로 된 길이 없었다. 처음 대륙에 다가갔을 때는 유령 도시처럼 스산한 분위기에 안개가 짙었다. 공간이 섞인 채 굳어 있어 앞으로 직진해도 자칫하면 알 수 없는 먼 곳에 도달하게 된다. 진짜 숲과 트라던트 나무, 꿈으로 이루어진 숲이 섞여 있으며, 그 사이로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동물들이 많았다. 겨우 ‘길’이라 생각하고 도달한 장소는 누군가의 꿈을 부풀린 동화 속 세계였다. 사막으로 이루어진 대지는 하늘에 붕 떠 있고, 하늘은 유독 맑았으며, 허공을 커다란 동물들이 날고 있고, 하늘에 흐트러진 모래산 사이사이로 꽃잎이 날아다녔다.
우리가 발을 디딘 대륙은 새블레에서 비교적 가까운 중동이었다. 꿈의 그물이 생기고 공간이 서로를 침범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어렴풋이 예상하기는 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혼란스러웠다. 특별한 눈을 가진 자가 아니고서야 지나다니는 것은 무리다.
기억으로 만든 영상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숨을 삼켰다. 보고를 마치고 연맹 본부 엘디나 바깥으로 나온 우리를 마중하러 온 것은 성진과, 이번에도 라이라였다.
“리더님!”
진영에 들어오면서 라이라는 나를 ‘리더’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말하는 걸 깜빡했지 뭐예요. 어제 거울이랑 잠깐 연결 됐어요!”
“뭐?”
앞서 말했다시피 라이라는 형상이 비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연결할 수 있다.
라이라는 마음에 든 거울이나 좋은 위치에 있는 거울에 특별한 표식을 집어넣는다. 꿈의 그물 영역 안에 있어도, 그 거울들이라면 라이라와 연결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라이라는 본디 스파이로 여기에 왔던 만큼 우리보다는 트라베리아의 영역을 좀 더 잘 알고 있었다. 꿈의 그물이 펼쳐진 트라베리아의 영지는 길이 복잡해지긴 했지만 사람이 아예 살 수 없는 곳은 아니다. 악령의 힘에 꿈의 힘이 더해지며 ‘악의’가 많이 사그라들었다. 더해 트라베리아는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구역을 따로 만들어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안전 구역’에 도착하기까지 인간은 영혼과 재능을 시험당한다. 안전 구역에 도착하지 못한 인간은 트라던트에 삼켜져 제물이 될 운명이다.
즉 현재 꿈의 그물이 가진 역할은 사람의 침입을 막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이용하고 시험하는 것이다. 안전 구역 당 장군 시리즈가 한 명씩 붙는데, 라이라 역시 안전 지역 지킴이였다. 라이라는 잠입을 끝내고 제가 맡기로 했던 안전 구역에 본인의 성인 ‘거울 성’을 옮겨다 두었다고 한다. 라이라가 지금까지 수집한 거울을 전시한 건물이다.
연맹에 들어온 라이라는 같은 편이 된 이상 협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하며 거울 성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의 흔적이 많이 남은 거울과 여기에서도 교신할 수 있을지 모른다며 지금껏 계속 꿈의 그물 안에 있는 거울을 향해 교신했다. 그리고 지금, 그 거울 중 하나와 연결되었다.
참고로 라이라의 배신 사실 역시 아직 트라베리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스파이로 왔다가 신호가 끊겼으니, 아마 죽었다고 알려지지 않았을까.
우리는 약간 초조한 심정으로 물었다.
“성 안은 어땠나요?”
라이라가 번쩍 손을 들며 대답했다.
“넵! 꽤 사람이 모였어요!”
“얼마나요?”
“음……자세히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500명은 넘는 것 같았어요. 아마도? 제 성으로 흘러든 인간은 참 운이 좋아요. 제 성은 안전 구역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안전하니까요!”
라이라의 성은 다른 장군 시리즈의 거처와는 달리 침입을 저지하지 않는다. 성을 옮기기 전에도 그랬다고 한다. 사람이 많이 들어오고 거울에 비치는 이가 많을수록 라이라에게 이득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라이라의 성은 내부 물건을 부수지만 않는다면 더없이 안전하다.
라이라가 한 손으로 제 머리를 짚었다. 동시에 라이라의 모습이 일그러지며 변했다. 곧이어 구릿빛 피부에 긴 갈색 머리카락을 지닌 우아한 여자가 나타났다. 란 리나. 뛰어난 실력을 지닌 리브리의 의사이며, 그녀의 치유마법은 연맹에서 예리 다음이다. 대륙이 갈라질 적에 부상을 입은 친구를 구하려다 꿈의 그물로 들어갔고, 그대로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이 사람 얼굴이 딱 보였어요. 그다음에는……이 사람?”
이어서 보인 얼굴은 마찬가지로 그물이 펼쳐지던 날 행방불명된 연맹 소속 마법사였다. 평화 기구 소속으로, 실력은 A랭크 오버다.
“거울과 다시 연결할 수 있을 것 같아?”
“음~.”
“꿈의 그물에 감지되진 않을까?”
“잘 모르겠어요.”
라이라가 팔짱을 끼며 고민했다.
“거울을 엿보는 건 마법 기술이라기보다는 특수능력에 가까워요. 거울 성은 제 성이고, 제 마법이 쫙~ 깔려 있어요. 꿈의 그물도 특수하지만 제 성도 특수하고, 독립된 장소고, 으음……엿보는 정도로는 들키지 않을걸요?”
첸과 라스도 그렇지만 특히 라이라가 우리 편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연맹에서 아주 일부밖에 모른다. 트라베리아에 라이라의 배신 사실이 밝혀지면 당장 안전 구역에 있는 거울 성 부터 사라질 거다.
“할 수 있는 만큼 해 보죠, 뭐. 들켰을 경우 쓸 변명도 있으니까요!”
“변명?”
“거울에 남은 제 사념입니다!”
라이라가 찡긋 윙크하며 검지와 중지로 브이 자를 만들었다. 연기인지 진짜인지 참 발랄한 성격이다. 특이한 체질인 만큼 라이라도 꽤나 험한 실험을 겪었을 터이건만.
“실제로 그런 능력도 있거든요!”
“그래……. 그럼 앞으로도 계속 거울과 연결을 시도해 주면 좋겠어.”
“네넵! 기합 넣고 힘낼게요!”
우리는 본부에 되돌아가 라이라가 거울 과 교신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연맹에 알렸다. 란 리나와 PE 사람 한 명의 생존 소식을 전해 듣고 그들의 동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다 란 리나는 생존자들과 함께 행방불명됐다. 그렇다면 같이 성에 있는 사람들은 북아메리카에서 멕시코를 따라 내려왔던 생존자일 확률이 높다.
부디 빨리 라이라와 거울이 다시 연결되기를 바란다. 되도록 라이라가 정기적으로 거울과 교신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거울을 통해 성 안과 바깥을 조사할 수 있고, 생존자 구출 계획을 더 빨리 진행할 수 있다.
라이라의 말에 의하면 한 번 안전지대에 들어서면 그곳의 주민으로 ‘고정’된다고 했다. 다시 바깥으로 나가 헤매고 또 헤매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그 마을로 돌아가게 된다는 소리다. 적어도 그곳에 있는 생존자 일행이 당장 위험해질 일은 없다.
거울과 교신하는데 집중하겠다고 한 라이라였지만, 그녀답게 진지하게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집중하겠답시고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지는 않았다는 소리다. 평소처럼 여기저기 날아다녔고, 여기저기 참견하러 다녔다. 거울과 교신하는 것은 라이라의 특수능력이자 종족 특성이다. 어디 다른 일에 필사적으로 집중하지 않는 한 일상적인 행동을 하면서도 집중할 수 있다.
라이라가 다시 한번 성의 거울과 연결된 것은 첫 교신으로부터 일주일 후였다.
새블레에 들어왔으나 새벽별무리 조직 규모는 변하지 않았다. 새벽별무리는 여차할 때 최전선에서 싸울 전투 마법사 집단이다. 그러므로 어린 학생이나 A랭크 이하 비전투 마법사를 포함하고 있는 대현은 새벽별무리에 합류하지 않았다. 노아와 프랜을 비롯하여 대현과 함께하게 되었던 캘리의 멤버들도 그들 곁에 남았으며, 어린아이들에게 마법을 가르치며 인간들과 퍽 정이 든 구 트라베리아 일행도 대현에 남았다.
더해지지도, 줄어들지도 않았다. 그러나 교류가 활발해진 만큼 이전과는 차이가 많았다. 거기다 새벽별무리가 맡은 것은 오세아니아 진영이며 신대륙 스틸라에 모여든 사람들의 목숨이다. 생존자들은 각 대륙에 적당히 흩어졌다. 아주 강하지 않은 이상 뭉쳐 있어 봐야 트라베리아의 칼날에 한꺼번에 목숨을 잃을 뿐이기 때문이다.
대륙의 중심 마법사는 실력에 걸맞은 목숨을 떠맡는다. 대현은 새벽별무리가 지키는 땅, 스틸라에 자리 잡았다.
이소영은 자연의 가호를 사용해 나라의 결계 유지와 그림자 도시 다음으로 준비할 예비 피난 도시 구축에 협력하고 있다. 주로 강인하나 최인성의 교대 멤버로 테온과 자리를 함께하는 일이 많다. 테온의 마법은 환경마법, 그림자 도시 구축에도 예비 피난 도시 구축에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연맹과 교류가 많아지고 새블레에 자리 잡으면서 ‘단독으로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는 룰이 많이 퇴색되기는 했으나, 어느 정도 명목을 유지하고 있었다. 현재 이소영의 파트너는 테온이다.
새벽별무리 멤버는 파트너가 자주 변한다. 이소영의 파트너도 항상 달라졌다. 전투 역할을 기준으로 나눌 땐 강인하와 함께하고, 성향으로 나눌 땐 최인성과 함께했다. 테온과 이소영은 마력 상성은 보통이지만 마법 특성은 꽤 잘 맞는 편이었다. 성격도 의외로 잘 맞는데다, 지금은 역할도 비슷하니, 자연스럽게 그리 되었다.
역할을 교대하고 이소영은 기분 전환을 이유로 들어 테온을 이끌고 방위부가 지키는 새블레의 중심 도시, 사이라로 나섰다. 어딜 가든지 사람들은 이소영과 테온을 알아봤다. 유은하나 최인성은 그게 귀찮은지 환각 아이템으로 모습을 숨기지만, 이소영과 테온은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돌아다녔다.
사람들이 자리 잡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도시는 거의 완성 수준이다. 생존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마을이고, 식량용 식물이 숲 여기저기에 있지만, 자급자족만으로는 부족한 법이다. 이런 때이기 때문에 더더욱 일상 속에 있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다. 덕분에 시장이 꽤 활발하게 돌아갔다.
“뭘 사 갈까. 책……을 샀다간 은하는 공부만 할 것 같고.”
최근에 드물게 서점에 나오는 책은 죄다 실용서다. 살아남는 노하우, 실전 마법. 가끔 소설이나 시집 같은 것도 보이지만 지금의 유은하라면 읽지 않을 것이다.
“리더가 공부할 만한 책은 이제 없지 않을까요?”
“그렇지. 리브리 중심 도서관에 있는 책이라면 모를까. 흠…….”
주위를 쭉 둘러보던 이소영은 눈에 띈 소품점으로 향했다. 인형부터 시작해서 액세서리까지, 아기자기한 소품이 많았다.
“헉! 소영 님, 테온 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하하, 일 중독자들한테 기분 전환이 될 물건이 없나 싶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