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442
“헉……. 영광이지만 저희 가게에 별무리님들이 쓸 만한 레벨 높은 아이템은 없어요….”
“아뇨. 기분 전환용이니까 힘은 상관없어요. 눈에 띄게 귀엽거나 신기한 게 중요하죠. 여기가 딱 눈에 띄더라고요.”
“가, 감사합니다!”
테온은 이소영을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종류별로 진열되어 있다. 이소영은 작은 가게 안을 빙 둘러보았다. 노트, 인형, 가방 등에 시선을 뒀다. 고민하던 이소영은 리본과 방울이 달린 귀여운 장난감 하나를 골랐다.
“이거, 라라가 좋아할 것 같지 않아?”
“…좋아하겠군요.”
라라는 노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하늘거리는 리본을 물어뜯기를 좋아한다. 리본 장난감을 사고 밖으로 나서며 테온이 물었다.
“혹시 인형을 좋아합니까?”
“응?”
“인형에 시선을 오래 두시더군요.”
“아.”
“아니면 별무리 님들이 좋아하나요?”
“아니, 내가 좋아해. 은하도 좋아하고.”
잠깐 고민하던 이소영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예전엔 좋아했다고 말해야겠다. 나 말고, 은하 말이야.”
이소영은 조금 고민했다.
“인형보다는 귀여운 액세서리를 더 좋아했지만. 인형, 커버가 예쁜 노트……. 귀엽거나, 예쁘거나, 멋있는 소품을 보면 눈을 반짝이며 좋아했어. 옛날엔 그랬는데.”
이소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옛날엔 좋아하는 게 너무 많아서 생일에 뭘 선물할지 많이 고민했어. 귀여운 소품도 좋아했지만, 그 이상으로 먹는 걸 아주 좋아했어.”
“먹는 거라면……예를 들어 어떤 건가요?”
“식사 종류? 단 건 별로 안 좋아했어. 대중적으로 ‘맛있다’고 하는 음식은 보통 다 좋아했어. 햄버거나 피자 같은 패스트푸드, 우동이나 라면, 고기와 생선, 냉동 식품. 맞다, 안주도 좋아해. 어느 날은 안주가 맛있다면서 술은 안 마시고 안주만 몇십 접시나 시켰다니까? 맛있긴 했지만.”
이소영이 이전 일을 추억하며 킥킥 웃었다.
“나, 물건을 살 일이 있으면 거의 은하랑 같이 나갔어. 다른 애들은 귀여운 소품엔 관심이 없었거든. 인하랑 성진이는 좋아하진 않아도 보는 눈은 있어서 가끔 데리고 갔지만. 은하랑 나, 취향이 같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맞는 게 많았어. 은하가 액세서리를 볼 때 나는 인형을 봤고, 은하가 장식물을 볼 때 나는 가방을 봤지. 은하는 식사류를 좋아했고, 나는 음료를 좋아했고.”
이소영의 친구 중에 소품과 옷에 관심이 많은 것은 유은하와 이유미 정도였다. 하지만 이유미는 학교가 다르기 때문에 방학이 아니고서야 만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소영과 유은하는 서로의 취향을 알고 난 뒤 자연히 자주 함께 쇼핑을 다녔다.
아닌가. 유은하는 이성진과도 같이 쇼핑을 다니고는 했다. 두 사람의 공통 관심사는 책으로, 두 사람은 책을 사러 서점에 가면 기본 다섯 시간은 돌아오지 않았다. 폐점 없이 24시간 하는 서점에 갔다가 3일 동안 돌아오지 않은 적도 있었다.
이소영의 눈빛이 그리움과 사랑스러움에 점점 잠식되었다. 이소영의 감정을 예민하게 포착하고 초조함에 가까운 안타까움을 느끼던 테온이 한 장소를 가리켰다.
“저기 인형도……예쁘네요.”
“응? 앗, 진짜다. 귀여워.”
이번 가게는 인형 전문점인 듯했다. 이소영은 어린아이만한 인형을 보고 달려들었다. 토실토실하고 잘 늘어나는 분홍색 토끼 인형이다.
“귀여워라. 아! 저 인형은 라라가 좋아하겠다.”
라라는 리본 달린 인형을 물어뜯는 것도 좋아한다. 요리조리 움직이다 던지면 신이 나서 달려간다.
인형을 보고 좋아하는 이소영과 인형을 보고 좋아할 라라를 떠올린 테온의 입가가 느슨해졌다. 하얀 고양이 라라는 어디서나 인기가 많다. 테온은 작은 동물을 접한 게 라라가 처음이었다. 작고 애교 많은 모습에 금방 좋아하게 됐다. 캘리 멤버들만이 아니라 자주 오가는 대현, 유펠르시아, 다른 연맹의 인물들도 라라를 무척 좋아한다.
이소영은 그 외에도 여러 곳을 들리며 확실하게 기분 전환을 했다. 테온은 불만 없이 그 뒤를 따랐다. 테온은 평범하게 번화가를 걸어 본 적이 몇 번 없었다. 돌아온 지구는 거의 망가져 있었고, 장을 보러 가는 것은 거의 비전투원이었다. 지구가 망가지기 이전은 기억이 있는 순간부터 노예였기에, 자유롭게 바깥을 걸어 다니지 못했다.
여기에 와서도 테온은 구태여 바깥을 돌아다닐 생각을 하지 않았다. 거리를 걸으며 쇼핑을 하는 건 더더욱 생각도 못했다. 생각났다고 해도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으리라. 평범한 산책이나 쇼핑은 테온에게 무척 난이도 높은 일이었다.
그 난이도 높은 행동을 테온은 최근 이소영과 함께하면서 여러 번 겪고 있다. 이소영과 함께하니 무척 난이도 높아 보이던 ‘평범’이 이상하리만치 쉬웠다.
여기저기를 누비며 동료들이 좋아할 만한 간식이나, 식재료도 샀다. 이번엔 액세서리 공방에 들어서며 이소영이 물었다.
“넌 뭘 좋아해?”
테온이 약간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아까부터 내가 좋아할 만한 곳만 들르고 있잖아. 아니지. 오늘만이 아니지. 항상 그랬잖아. 가고 싶은 곳이 있거나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사양 말고 말해. 뭘 좋아해?”
“갑자기 물으셔도……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음,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데.”
이소영은 액세서리를 둘러보다 마음에 드는 것을 찾았는지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냥 아무 거나 눈길이 가는 걸 말하면 돼.”
“눈길이 가는 것…….”
“그래. 아무 이유 없이, 생각 없이 눈길이 가는 것 있잖아. 멍하니 있을 때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그런 거 말이야.”
“……모르겠습니다.”
테온은 이번엔 풀이 죽어 대답했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테온을 보고 이소영이 풋 웃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니까. 좋아하는 걸 바로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은 많으니까. 그래도……좋아하는 걸 정해 두면 좋아.”
“그렇습니까?”
“응. 이런 식으로 빠르게 기분 전환 할 수 있잖아.”
짤랑.
이소영이 손을 뻗어 테온의 머리카락에 무언가 날카로운 것을 꽂아 고정했다. 주황색 머리핀이었다. 테온이 거울을 보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귀여운 구석 하나 없는 자신이 하기에는 너무 귀여운 디자인이었다. 붉은 코르사주 장미에 주황색 구슬이 매달린 꽃핀이라니.
“이건 저한텐 안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만…….”
“킥킥, 그런가? 그럼 이건 어때?”
이소영이 이번엔 테온의 왼손을 붙잡아 손목에 사슬로 이루어진 팔찌를 끼워 넣었다. 금속으로 이루어진 단조로운 팔찌지만, 단조롭기 때문에 멋이 있었다.
“선물이야. 항상 어울려 줘서 고마워.”
“아뇨…….”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는 것은 처음이 아니다. 테온은 어색하게 사슬 팔찌를 매만졌다. 그러나 순수한 호의로 선물을 받은 것은 어쩌면 처음일 지도 모른다. 그를 거둔 캘리 멤버들은 테온에게 많은 호의를 가지고 있지만, 그들이 처한 상황이 순수하게 호의를 주고받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테온이 받은 첫 선물은 싸우기 위한 무기였다.
이소영은 테온에게 생긴 첫 친구고, 처음으로 순수한 의미의 선물을 준 사람이다. 테온은 한동안 감정에 벅차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도 조금 더 어울려 줘!”
이소영이 테온의 손목을 이끌고 산 물건을 계산하러 계산대에 향했다. 테온이 무심코 웃었다.
“당연히 그러겠습니다.”
이소영 역시 테온을 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마지막에 들린 서점에서, 이소영은 우연히 반가운 책을 발견했다. 이제는 절판되었을 것이 분명한 유은하의 첫 장편 소설, 다.
인기 있는 소설이니만큼 전권 모여 있지는 않았다. 있는 것은 1권, 6권, 7권뿐이다.
‘초아.’
테온은 이소영을 따라 루크알의 마법사에 시선을 고정하고는 제목 밑에 있는 저자 이름을 읽었다.
리피트에 의해 유은하의 필명 ‘초아’는 널리 알려지고 말았다. 과거에 인기 있었던 판타지 소설이 다시 한번 인기를 얻었다. 그건 비단 재미나 유은하의 명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유은하가 쓴 판타지 소설은 재미있다. 다만 소설에는 소설을 쓴 마법사의 마법관이 녹아들기 마련이다. 그중 는 C랭크 남짓한 마법사들의 필수 참고서다. 에 나오는 주인공은 본디 D랭크 마법사. 이 책은 평범한 마법사가 평범한 실력으로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분투하는지를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다른 몇 가지 소설도 그러했다. 는 정신마법을 분석하는 데, 과 고위 마법사용 스토리 북인 은 고위 마법 참고용으로 쓰인다. 나머지 소설은 단편인 데다 마법의 비중이 적어 재미로 읽히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이 설마 아직 남아 있을 줄이야. 과연 리브리 소속 서점이야.”
“살까요?”
“아니야. 필요한 사람이 사야지. 이 책은 우리한텐 도움이 안 돼.”
“그것도 그렇군요.”
“거기다 인성이랑 성진이가 이 책을 가지고 있어. 성진이 걔는 좋아하는 작가 책이라고 읽는용, 관상용, 예비용까지 3권씩 사놨다니까? 흥미 있으면 성진이한테 빌려봐.”
“…네.”
테온은 작게 대답하며 시선을 피했다. 테온은 이성진이 어려웠다. 누구라 한들 이성진에게 위압되지 않을 수 있겠느냐마는.
이소영과 테온이 들어온 서점은 이 도시에서 가장 크다. 일반인을 상대로 하는 가게이기는 하지만 리브리가 운영하는 서점이다. 책을 그다지 즐기는 편이 아닌 두 사람이 서점에 들어선 것은 구경하고 싶어서였다. 리브리의 서점은 구경하는 맛이 있었다. 총 5층이나 되는 서점은 층마다 있어야 할 천장이 뚫려 있으며, 그 사이로 커다란 책장이 허공을 부유한다. 천장 위치마다 움직이는 발판이 있고, 책장을 둘러싸고 사다리와 계단이 있다. 계단과 사다리, 책장이 얽히는 모습은 미로 같기도 하고, 어트랙션 같기도 하다. 1층에 있는 책장만 수백 개를 가볍게 넘는다.
“어라? 소영 선배?”
“앗.”
계단을 따라 장대한 서점을 구경하던 이소영과 테온은 김준영과 오시언을 만났다. 이소영, 테온과는 달리 공부할 책을 사러 온 모양이다. 두 사람은 마법 사례 공부에 열심이다. 특히 오시언은 갇혀 있던 시간만큼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했다.
“찾던 책이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온 김에 다른 사례 책을 찾는 중이었어요. 여러분은요?”
“우리는 기분 전환 중이야. 여긴 커서 구경하는 보람이 있어.”
“그건 그래.”
오시언이 동의했다. 이소영은 얼굴에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김준영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살폈다.
“그런데 너 괜찮아?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다크써클이 턱에 닿겠다, 야. 일주일만에 돌아온 건데 이틀은 푹 쉬어. 넌 우리랑은 체력이 다르잖아.”
“그건 그런데 기다렸던 책이 왔다기에……. 전 아직 경험도 실력도 지식도……뭐든 부족하니까요.”
어제 제대로 자긴 한 건지 의심스러운 안색으로 김준영이 눈을 비볐다.
김준영은 막 B랭크에 오른 실력으로는 과분할 정도의 중책을 맡고 있다. 결계를 비롯해 새블레를 이루는 모든 마법에 자연의 가호를 덧씌우고, 증폭한다. 수시로 꿈의 그물 안을 살피며 감지한다. 그러나 김준영은 자연과 교감하는 자신의 재능을 깨닫기 전까지 비교적 약한 전장에 있었다. 감지하는 기술은 뛰어나도 강자를 상대할 만한 경험이 부족하다. 무언가를 느껴도 느낀다는 감각이 익숙하지 않아 뒤늦게 알아챌 때도 있고, 지식이 부족해 말로 표현하기 곤혹스러워 할 때도 있었다. 김준영은 한시라도 빨리 그것을 보충하고 싶어 한다.
“나도 쉬라고 했는데 가만히 있질 못하더라고. 그래서 그냥 데리고 나왔어. 우리도 반쯤은 기분 전환이야. 돌아가면 재울 거야.”
“어, 하지만, 책…….”
“재울 거야.”
오시언이 단호한 어조로 반복했다. 이소영이 안쓰러운 눈으로 김준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리하진 마. 우리 리더는 튼튼해서 괜찮지만, 아니, 괜찮지 않지만……. 어휴, 괜찮지 않은데 괜찮게 만드는 그 체력이 밉다, 미워. 하여간 넌 무리하면 진짜 쓰러지니까 체력 아껴. 네가 지금 엄청 귀한 몸이란 것도 잘 알아 두고.”
김준영이 조금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지나가겠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하강하는 책장을 확인하고 네 사람이 물러났다. 곧 미로 같은 책장 벽 사이로 새로운 장벽이 내려섰다. 책장 위에 한 마법사가 서 있었다. 제복과 가슴 주머니에 장식된 배지를 보아하니 리브리의 5급 사서다.
“앗, 소영 님 맞으시죠! 우와~!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사서가 책장 위에서 폴싹 뛰어내렸다. 어깨를 조금 넘어서는 길이의 갈색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앳된 소년 같은 외견의 남자가 눈을 빛내며 이소영의 앞으로 달려왔다. 키가 이소영과 엇비슷했다.
“꼭 한 번 뵙고 싶었어요. 와! 와와와와!”
연신 감탄하는 사서를 보며 이소영이 멋쩍은 기분을 감췄다. 설마 리브리의 사서마저 이런 태도를 보일 줄이야.
새벽별무리는 사람들에게 영웅이나 다름없다. 눈동자에 선명하게 드러나는 존경심이 기쁘면서도 그 이상으로 씁쓸했다. 이소영 일행이 생각한 복수는 전혀 존경할 만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활약 항상 즐겁게 들었어요! 아, 악수! 혹시 악수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응? 그 정도쯤이이야.”
이소영은 가볍게 그와 악수했다. 사서는 이소영의 손을 쥐고 몇 번이나 크게 아래위로 흔든 다음 아쉽다는 기색으로 손을 빼냈다. 설레는 눈으로 제 손을 보던 사서가 이내 깜빡했다는 듯이 이소영을 보았다.
“앗 참! 저는 5급 사서인 파샤 다르시예요. 교대로 여기 하늘 바람 서점에서 일하고 있어요.”
사서는 그 후에도 몇 번이나 호들갑을 떨다가 선배의 호통을 듣고 자리를 떠났다. 떠나가는 사서의 모습을 이소영이 곤란한 눈으로 바라보다 고개를 돌리니, 김준영이 어쩐지 멍한 눈으로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방금 내려온 책장 벽 위를 따라, 이 서점의 꼭대기를 계속 응시한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김준영이 이내 뻑뻑한 눈가를 주먹으로 비볐다. 이소영이 심각한 눈으로 충고했다.
“너 빨리 돌아가서 쉬는 게 좋겠다. 지금 당장!”
라이라가 두 번째로 거울과 교신한 때는 마침 나와 인성이, 레일리를 비롯해 여러 사람과 함께일 때였다. 웃으며 과일을 집어 먹고 있던 라이라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라이라의 눈동자가 거울처럼 무기질적으로 변하며 눈동자 위에 이곳과는 전혀 관계없는 형상이 맺혔다.
“쉿.”
첸이 검지로 입가를 가렸다. 소란스럽게 떠들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목소리를 죽이고 침묵했다.
침묵 속에서 라이라는 말없이 허공을 응시했다. 몽환적으로 뿌예졌던 눈동자가 다시 돌아온 것은 침묵이 시작되고 5분이 지난 후였다.
“휴우.”
라이라가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라이라, 거울과 연결된 겁니까?”
“응!”
“뭔가 보였나요?”
마침 함께 있던 레일리가 물었다. 라이라가 사과를 포크로 찍다 말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저번이랑 다른 거울과 연결됐어요. 아! 거울 성 안의 거울인 건 똑같아요. 저번에 연결된 거울은 예쁘게 꾸민 방 안에 있는 건데요. 응접실로 쓰는 곳에 설치해 둔 거였어요. 이번에 연결된 건 복도에 걸려 있는 거울이에요. 좀 깊숙한 곳에 있어서 그런지 아무도 없더라고요. 이번엔 대화를 해 볼 생각이었기 때문에, 10분 동안 열심히 소리쳤는데, 연결이 약해서 목소리는 한 번도 안 전해졌고요, 마지막까지 아무도 절 발견하지 못했어요. 그래도 거기 거울을 통해 다른 거울이랑 공명해서, 어렴풋이 성 안의 기척을 감각으로 훑어 봤어요. 그랬더니 사람이 한……700명? 800명? 정도 있더라고요.”
“800명…….”
생각했던 것보다는 많은 숫자다. 전보다 늘기도 늘었다. 레일리가 숨을 삼켰다.
“응응. 안전 구역에 있는 건물 중에선 내 건물이 함정도 없고 공격에는 강하니 제일 안전하지. 눈이 있으면 당연히 알 테지.”
라이라가 자랑스러운 기색으로 웃었다.
‘800명이라…….’
실종된 숫자에 비하면 아주 적은 숫자다. 그러나 최악의 경우 몰살이라 예상했던 것에 비하면 많은 숫자다. 인성이가 물었다.
“다음에 교감할 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아?”
“음, 모르겠어요.”
“하긴……불안정하니까.”
“네네. 불안정해서 저도 확신 못 하겠어요.”
“거울이 있는 위치는 알겠어?”
“어어, 대강…….”
라이라 위로 투명한 영상이 떠올랐다. 거울을 통해 만들어 낸 영상이다. 라이라는 북아메리카 남단을 가리켰다.
“여기쯤…?”
이내 라이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제가 성을 둔 곳은 원래 이쯤이었어요. 공간이 꼬인 거지, 위치가 달라진 게 아니에요.”
“그렇구나.”
인성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레일리가 거울 안을 바라보며 인상을 썼다.
라이라가 처음으로 거울과 교감했을 때, 거울 근처에 세 자릿수의 생존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많은 의견을 나누었다.
가장 먼저 나온 의견도, 가장 많이 나온 의견도 구하러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거점을 이루고 있는 중심인물이 란 리나라면 거울로 근근이 연락을 취하며 그 장소로 어느 정도 사람을 모은 다음 구하러 가자는 의견이 많았다. 그리고 특정한 숫자가 모일 동안 그들에게 내부를 탐색하게 한다.
그러나 문제는 언제 어떻게 탈출시키느냐다.
내 힘을 사용해도 꿈의 그물을 속일 수 있는 면적은 아직 좁다. 환각을 정교하게 연습하여 시뮬레이션하고 있지만 내가 노력하는 만큼 유클라프도 꿈마법에 능숙해지고 있다.
넓은 대륙에 잠입하려는 사람과 그것을 막는 사람, 기회는 내게 더 많다. 유클라프는 광범위한 영역을 틀어막아야 하고, 나는 조금의 틈만 노리면 된다.
현재 그곳에 있는 사람 수가 수백 명이라면, 우리가 그 장소에 모으고 싶은 인수는 5000명 정도다. 남아메리카 북단에서 실종된 사람은 약 10만 명가량이다. 라이라의 이야기를 들어본 바, 적어도 그 근처에 있는 생존자 숫자가 그 정도는 될 것이다.
그만한 인원을 모아 한 번에 탈출한다고 치자. 소수만 데리고 조금씩 탈출하는 것은 일단 제외다. 시간과 인력 소모가 너무 크다. 북아메리카에 한 번 들어가는 것만도 상당한 심력과 마력을 소모한다.
한 번에 탈출한다 치면 아예 안 들키고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하다. 여차할 때는 싸움을 각오하고 마을째로 탈출해야 한다. 마을 째로 깊은 꿈속에 들어가 그물을 교란하며 도망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그러나 들키면 어쨌거나 그다음부터는 생존자를 탈출시키기 상당히 어려워질 것이다.
실상 란 리나한테 이 사실을 전하고 내부를 탐색하게 하는 것부터 난관이다. 란 리나는 의사고, 감지형 마법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란 리나가 있는 곳은 꿈의 그물 안이다. 어줍잖은 감지능력, 혹은 정신마법 재능으로는 내부를 탐색하기는커녕 꿈속을 헤맬 뿐이다.
라이라의 말대로라면 헤맨다고 해도 다시 원래 장소로 돌아오겠지. 그러나 그렇게 헤맨다고 한들 과연 몇 사람이나 안전 구역으로 데리고 올 수 있을까.
지금 꿈의 그물 안에서 길을 찾을 수 있는 건 연맹을 통틀어 극소수다. 꿈을 보는 나, 마찬가지로 꿈을 보는 인성이, 생명을 보는 뛰어난 눈을 지닌 예리, 마법의 근원을 꿰뚫어 보는 성진, 규율마법으로 법칙을 통제할 수 있는 레일리, 특이 케이스지만 주사위를 던져 행운으로 길을 찾을 수 있는 레녹, 영혼을 통해 꿈을 보는 첸, 분노로 탄생한 도깨비의 힘으로 사상과 감정을 통제하는 라스, 다양한 사람의 마법과 인생을 수집한 라이라, 책을 통해 마법을 예지하는 하인리히, 용안을 지닌 이청우, 자연의 소리를 따라 길을 찾는 김준영.
하나같이 특수하며, 김준영을 제외하고는 강한 힘을 지닌 자들뿐이다. 그러나 이중에서 꿈의 그물 내지 트라던트의 힘을 느끼고 그 안에 완벽하게 녹아들 수 있는 건, 즉 안정적으로 숨어 다닐 수 있는 건 나, 인성이, 라이라, 첸, 이렇게 넷뿐이다.
생존자를 어떻게 구출하든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우선은 사전 조사부터다. 여러 대륙의 끄트머리, 혹은 중심부로 들어가 꿈을 보고 대륙 내부의 법칙을 찾아야 한다. 구출할 방법을 모색하고 결정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가 직접 잠입해 피난민을 한곳으로 유도해야 한다. 유도하여 잠입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면, 적어도 몇 달은 시간을 들여 움직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물 안에 있을 동안 여기, 새블레와 최소한이나마 연락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멤버 역시 신중하게 결정할 필요가 있다. 잠입할 수 있는 자가 하나같이 연방국의 핵심 전력이니만큼.
그러나 시간이 걸리는 문제임은 틀림없지만 너무 시간을 들여서도 안 된다. 꿈의 그물 안에서 생존자들이 얼마나 많이 죽을지, 얼마나 안 좋은 일을 겪을지 모르는 일이다.
고민하고 있는 내게 첸이 말을 꺼냈다.
“슬슬 팀을 나눠서 조사해도 괜찮지 않을는지요.”
“그렇네요. 다들 꿈의 그물을 경험해 봤으니…….”
“저와 라스가 두 번째 조를 이루어 중동 지역을 탐색해 볼까 합니다. 중동은 저희 영역이라 설치해 둔 마법 장치가 많습니다. 대부분은 꿈의 그물에 휩쓸려 사라졌지만, 레녹의 특수능력에 감싸여 완전히 흩어지지 않은 것도 드물게 있는 듯하더군요. 최근에야 겨우 느낀 모양입니다.”
“레녹과 하무라도. 하무라한테, 무기.”
라스의 말은 핵심 단어 몇 개뿐이라 웬만한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말’이기 때문이라 그런지 단어 밑의 문장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레녹과 하무라도 함께 간다. 하무라에게 특수한 무기를 만들 재료를 주라는 건가.
“안전 구역이 있을 만한 곳도 몇 가지 짐작이 갑니다.”
“그런가요. 그럼 중동은 여러분께 맡길게요.”
나는 아까 떠올린 피난 방법을 다시 한번 고민했다. 각 대륙의 안전 구역에 최대한 생존자를 모아, 한꺼번에 이동시킨다라…….
‘유도하는 것부터 문제야. 사람의 움직임이 갑자기 바뀌면 들키겠지? 안전 구역을 찾아가는 사람 수가 갑자기 는다면…….’
아무리 우리가 은밀하게 움직여도 들킬 것이다. 허나 갇혀 버린 사람들을 그대로 두고 볼 수만도 없다. 최소한 안전 구역에라도 옮겨야지…….
그래도 역시 빼내기 직전까지 만이라도 들키지 않는 게 좋다. 나는 열심히 방법을 모색했다. 안전 구역을 전부 확인하여 사람을 모을 안전 구역을 다섯 곳 정도로 정해 두고 사람을 모은 다음, 구역마다 결계를 펼쳐 꿈의 그물을 일그러뜨리고 사람을 빼온다. 그림자나 환각으로 사람의 기척을 남겨두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할 수는……없을 것이다. 아직 반경 50m도 못 속이는 주제에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이람. 범위를 숨기는 것과 사람을 흉내 내는 것은 다르고, 타인의 꿈을 복사하여 흉내 내는 게 더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만, 어차피 빼내려 하는 단계에서 들킬 것이다. 꿈의 그물도 몽마 시나도 대규모마법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나와 마법 레벨이 차이 나지는 않다.
“최소한 사람들을 안전 구역으로 유도시키고 싶은데, 사람들이 갑자기 안전 구역을 잘 찾아내면 유클라프가 수상하다고 생각하겠죠? 이번 작전은 들킬 걸 염두에 두고 해야 할까요?”
“그럴 것 같기도 한데, 음……순차적으로 조금씩 하면 괜찮지 않을까요? 트라베리아는 원래 안전 구역에 사람을 모을 생각이었어요. 완전히 흩어져 있는 것보단 좀 모여 있는 게 관리하기 편하니까요! 그러니까 리더 님들이 움직이지 않아도 모이게 됐을 거예요. 그물 안에 들어온 사람이 모이는 속도를 빠르게 만드는 것도 예상했을 거고요! 지금도 계속 모이고 있잖아요.”
그 말도 일리가 있다. 그럼 그물의 흐름을 따라 사람을 가까이 있는 안전 구역으로 유도시키면 당장 들키지는 않으려나. 하지만 분명 유클라프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움직이는 흐름을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나’를 경계하고 있으니까. 소니아의 유산을 망치고 싶지 않을 테니까.
꿈의 그물을 ‘열’ 방법은 이미 강구해 두었다. 확실하게 열 수 있도록 강화와 연습이 필요하지만. 사람을 어떻게 옮길지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할 게 많다.
레일리가 끙 신음을 내뱉었다.
“팀을 나누더라도 세 팀 이상 나누기는 어려워. 안 그래도 장기전이 될 가능성이 높은데, 전력을 많이 분산할 수는 없어.”
“세 팀이나 나눌 수 있습니까?”
로일이 되물었다. 고민하던 레일리가 고개를 저었다.
“으음……그러네. 중동과 북아메리카, 두 팀으로 만족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설령 결행 날까지 들키지 않는다고 해도 탈출할 때는 반드시 들킨다. 들킬 걸 알고, 다음에 어떤 일이 생길지 예상하고, 결론을 내리고, 결행하고, 싸워야 한다.
“은하야, 장기 잠입을 해야 한다면 누구를 팀원으로 데려갈래?”
“…….”
최근 우리는 레일리와 말을 놓았다. 나는 레일리의 말을 듣고 고민했다. 장기전이 된다면 북아메리카 잠입을 맡을 이는 나밖에 없다. 그렇게 된다면…….
“인성이.”
조금 떨어진 자리에 있던 인성이가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길을 찾는 것만이라면 인성이가 나보다 더 빨라.”
걱정되는 것이 있다면 그동안 이곳의 꿈 방어력이 꿈의 그물 쪽보다 약해질 거라는 점이다. 새블레의 가디언 레미는 현재 내가 붙인 작은 별의 고래를 길들여 온갖 마법을 흡수하는 것으로 상당히 힘을 키웠지만, 유클라프와 꿈의 힘으로 대결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괜찮을 것 같다. 결국 현재 트라베리아에 레미와 대적할 만큼 꿈을 다룰 수 있는 건 유클라프와 시나 뿐이고, 둘이 움직이면 꿈의 그물이 약해진다. 내가 그 순간을 놓칠 리 없다는 것을 유클라프는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인성이를 데려가도 괜찮다.
“거기다 아직 나랑 오래 떨어지는 건 좀 불안하거든.”
최인성의 몸에 스며든 트라던트는 꿈의 힘, 따라서 힘이 폭주하거나 깊어졌을 때 조정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인성이가 눈동자가 한순간 씁쓸한 빛을 띠며 장갑에 감싸져 있는 제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저 안에 있는 손은 여전히 온기가 낮은 보석 재질 상태다.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이 움찔 반응했다. 손을 잡아 주고 싶다. 반쯤 돌로 변해 온기가 낮아진 손을 꽉 감싸 온기를 더해 주고 싶다.
반사적인 감정이었다. 생명이 빠져나간 듯한 인성이의 오른손을 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불안해진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인성이가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경 쓰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주 인성이의 손을 잡게 되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서, 확인받고 싶어서.
나와 비슷한 기분이었는지 인성이의 바로 옆에 있던 성진이 인성이의 오른손을 꽉 쥐었다.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힘 있게 꽉 감싸 쥔다.
후우웅
그때 인성이의 그림자를 따라 작은 털뭉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끼 여우의 모습을 한 전 트라던트의 가디언이 인성이의 어깨 위에 올라탔다.
“너무 날 나쁜 놈으로 모는 거 아닌가? 이래 봬도 난 주인님 일편단심인데.”
그러며 보라색 털을 인성이에게 비빈다.
“……들어가, 가연.”
“주인님, 매정해.”
“중요한 이야기 중이잖아.”
“꿈의 그물에 관해서라면 나도 할 수 있는 게 많아.”
“그래그래, 알아.”
인성이가 어딘지 포기한 듯한 표정으로 성진의 손을 잡지 않은 왼손을 사용해 과거 트라던트의 가디언이었던 ‘가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인성이의 몸 안에 자리잡은 트라던트는 인성이의 몸을 해치는 독이다. 그러나 인성이의 그림자가 되기를 자처한 가디언은 유난히 인성이를 많이 따랐다. 트라던트가 인성이의 몸을 해치는 걸 두고 못 보며 슬퍼할 정도로.
그때 보라색 가디언의 뒤로 어렴풋이 분홍빛을 띈 검은 고양이가 나타나 여우의 머리를 내리쳤다.
“작작하라옹. 시도 때도 없이 나오지 마라옹.”
이번에는 인성이의 머리 위로 작은 강아지가 나타나 주저앉았다. 강아지, 고양이 같지만 사실 늑대와 표범이다.
“아……울렁거려. 네가 바깥으로 나올 때마다 기분이 더럽거든? 자중해라.”
인성이의 어깨와 머리 위에서 늑대와 여우와 표범이 조잘댔다. 잠시 후 표범 유이가 두 사역마들을 데리고 그림자로 잠수했다. 소영이가 인성이의 어깨를 툭툭 쳤다.
“고생한다.”
“아니, 생각보다 얘들이 있어서 편해.”
“……고생한다.”
영과 유이, 가연은 악령의 속삭임이나 과도하게 흘러넘치는 그림자를 제어하고 있다. 저들의 목소리가 차라리 낫다니, ……정말로 고생한다.
레일리도 그렇게 생각했던지 인성이를 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많이 힘들어 보인다. 그럼, 팀원은 인성이랑…….”
성진은 장기 잠입에는 맞지 않는다. 예리는 현재 연맹에서 가장 뛰어난 의사다. 북아메리카에 예리 다음으로 뛰어난 의사가 있으니 그녀를 구출하며 도움을 받는 편이 좋겠지.
“준영이는 어때?”
“준영이는 안 돼.”
인하의 제안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