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444
“응?”
무심코 꺼낸 말에 소영이가 나를 돌아보았다.
“신경 쓸 만한 일이 아니란 건 알고 있는데, 그래도 가끔 짜증이 나더라고.”
아……. 인성이는 내가 무엇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인지 바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정말 쓸데없는 이야기였네.”
“그러니까, 뭐가? 쓸데없는 거라도 신경 쓰이면 말해 봐. 궁금하잖아.”
소영이가 나를 재촉했다. 모처럼 친구들과 함께, 그러니까 인하, 소영이, 인성이, 성진이랑 함께 휴게실에서 쉬고 있던 참이었다. 이렇게 다섯 명이 다 같이 모여 쉬는 건 참 오랜만이라 드물게도 들떴다. 그래서 안 좋은 생각은 다 잊어버릴 생각이었는데, 무심코 입밖으로 나와 버리고 말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한 사람의 이름을 꺼냈다.
“렉스.”
“아.”
소영이와 인하, 성진이 바로 인상을 찌푸렸다. 렉스와 내가 얽혔던 과거를 알고 있는 만큼 그들도 렉스가 내게 보내는 감정을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해 보니까 우습더라고. 기억도 성격도 다른데 또 나를 좋아한다는 게…….”
나는 꺼림칙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말로 표현하는 것도 기분 나빴다.
“어릴 때 그 녀석이 날 좋아한다기에, 난 그냥 그놈이 어린애를 좋아하는 범죄자인 줄 알았지.”
인하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어릴 때 인하는 그런 놈들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
“그런데 그 녀석은 기억을 잃었고, 난 다 컸고……. 아냐. 이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자. 기분만 나빠져.”
“그래그래, 신경 쓰지 마. 그런 놈의 마음은 생각할 필요도 없어.”
소영이가 혀를 차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 불쾌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던 성진이 어떤 이야기를 꺼냈다.
“……이상형이라. 그 말 들으니까 생각나는 게 있는데.”
“응?”
우리는 의아한 눈으로 성진을 보았다. 이럴 때의 이성진은 생각해 본 적 없는 특이하고 신기한 사실을 알려 주고는 했다.
“마법사가 마법사에게 반하는 요소에는 어떤 것이 있을 거라 생각해?”
“어?”
소영이가 고민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서 손에 들고 있는 작은 접시 위 타르트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는다.
“음, 그야 많지. 얼굴, 성격, 목소리, 스타일, 실력, 그리고…….”
“만났을 때의 상황도 중요할 테고, 같이 있다 보니 좋아지는 일도 있을 거고. 아니면 마법을 보고 반한다던가?”
“그래. 그렇지. 반할 요소는 아주 많지. 하지만 가끔 있잖아.”
성진의 보랏빛 눈동자가 어쩐지 신비롭게 가라앉았다. 나는 노을빛을 닮은 눈동자를 조금 홀릴 듯 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첫눈에 반하는 일 말이야. 이유 없이 끌리거나, 이유 없이 시선이 가거나. 그 경우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상당히 큰 비율을 차지하는 원인이.”
곧이어 이성진이 단언했다.
“나는 마력일거라 본다.”
“마력?”
소영이가 또 한 번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허공을 보던 성진의 눈동자가 정확히 나를 향했다. 익숙한 시선임에도 어째선지 한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마력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니, 이해가 안 가는 걸. 보통은 은하나 성진이 너처럼 마력을 세세하게 보고 구분할 수 없잖아. 상대가 마법을 쓰면 싫어도 보이지만.”
“그래. 우리처럼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겠지.”
“응응.”
간식을 우물우물 씹으며 소영이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력은 마법사에게 있어 떼어 낼 수 없는 일부야. 영혼과 육체에서 비롯되고, 마법이 성장하며 달라져. 하지만 고유의 힘만은 쉽게 바뀌지 않아. 마력은 어찌 보면 마법사의 본체야. 성장하든, 성장하지 않든, 마력은 마법사의 안에 녹아 어우러지며 마법사의 존재성을 구축해. 마법사가 마법사에게서 느끼는 존재감이나 분위기는 마력의 존재감이나 분위기와 거의 일치한다고 하지.”
“아, 그거 알 것 같아!”
소영이가 탄성을 질렀다. 나와 인성이, 인하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마법사의 분위기와 마력은 닮았다. 아니, 성진의 말대로 마법사의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게 마력일 것이다.
“사람이 사람한테 반할 때 꼭 뚜렷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잖아. 그냥, 어쩐지. 그런 경우가 더 많아. 외모가 취향이든, 성격이 취향이든, 결과적으로 끌리면 좋아하게 되고 말아.”
“그럼……마법사는 본능적으로 마력에 끌린다는 거야?”
성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마법사는 마력에 이끌림이나 거리낌을 느껴. 사람의 외면이나 성격에 취향이 있는 것처럼 마력에도 취향이 있기 마련이야. 그걸 자각하는 사람이 적을 뿐. 감지계가 아닌 사람은 실감하기 어렵겠지만.”
“확실히 실감하긴 어렵지만……알 것 같아.”
인성이가 무언가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은 마법사의 모든 것이니, 끌리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겠네.”
“딱히 마법사만은 아니야.”
이어진 말에 우리는 다시 성진을 보았다.
“‘분위기’에 반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아. 비마법사도 사람의 인상을 보고 분위기를 파악하잖아.”
“그것도 그렇네.”
나는 조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니까…….
“내 마력이 그 사람의 취향이었다는 건가.”
“마력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으음……여전히 기분이 좋진 않지만 그래도 다른 걸 보고 반했다는 것보다는 기분이 낫네. 거기다 내가 생각해도 내 마력은 예쁜걸.”
“아름답다 못해 신비롭지.”
성진의 진지하고 직설적인 칭찬에 그만 낯이 뜨거워졌다. 나는 당황하며 몸을 조금 물렸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 의견은 사실이다. 사람마다 취향이 있긴 하겠지만 그것을 포함해 생각해도 내 마력은 아름답고 신비롭다.
“하지만 사실 ‘내 취향의 마력이다.’ 생각하는 것도 단순히 느낌이나 외관만으로 결정되는 건 아닐걸? 상성도 중요할 거라 봐.”
소영이가 작게 손뼉을 부딪쳤다.
“그러네. 마력끼리 사용해도 상성이 잘 맞는 거랑 안 맞는 건 다르니까. 상성이 잘 맞는 마력에는 본능적으로 친근감을 느낀다던가?”
“그렇지. 상성에 이끌리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아.”
성진이 피식 웃었다. 인성이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끌리는 마력이라……. 뭔가 재미있네.”
“잘 볼 수 있는, 우리 같은 사람에겐 특히 그래.”
성진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아, 너무 어릴 때는 별개야. 근원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을 때는 마력보다 겉모습에 더 영향을 많이 받으니까.”
우리는 수긍했다. 갓 마력을 느끼거나 마법을 만든 어린아이의 마력은 안정되어 있지 않다. 마력의 분위기가 형성되기엔 이른 시기다. 거기에서 또 우리는 별개다. 우리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마법을 만들었다.
“상성으로 보면 한수도 예외야. 마력만 두고 보면 너희 두 사람의 마력은 딱히 서로에게 끌리는 성향이 아니거든.”
“…….”
“한수가 일방적으로 끌릴 수는……있을 지도. 태양은 식물에게 반드시 필요한 영양소니까. 하지만 너희……어릴 땐 사이 안 좋았다며?”
인하의 눈동자가 추억으로 가라앉았다.
한수가 마지막으로 남긴 씨앗은 지금은 에펠로나에게 있다. 에펠로나의 안은 어디보다 안전하다. 정령 역시 죽을 수 있지만, 사람에 비하면 불사신에 가깝다. 인하는 그 씨앗을 복수가 끝난 후 심겠다고 했다.
이어 인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인하와 한수는 같이 있는 동안 정이 쌓여 서로를 좋아하게 된 케이스였다. 마력에 이끌린 것과는 많이 다르다.
“뭐, 마력의 영향이 크긴 해도 그게 다는 아니란 소리지.”
그 말이 무척 가슴에 와닿았다. 나는 이유 없이 끌리는 관계보다는 시간과 함께 쌓이는 관계를 좋아한다. 나와 인하가 오랫동안 친구였던 것처럼. 한수와 인하의 사이는 내게 있어 이상적인 사이였다. 그걸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응.”
고개를 끄덕인 인하가 얼핏 웃었다.
“그리고 같이 있는 사람의 마력에 따라 마력에서 흘러나오는 고유한 분위기나 느낌이 달라지거나 숨기도 하는 모양이더라.”
우리는 어느새 성진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어 있었다. 이번에 성진이 꺼낸 이야기도 우리는 별로 생각해 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소영이가 옆에 있던 인성이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럼 인성이도 그것 때문인가? 마력 분위기가 독특해서 마성인가?”
“어? 나?”
인성이가 당황하며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인성이 너 생각보다 특이한 사람한테 사랑을 많이 받잖아. 성진이도 그렇고, 가연도 그렇고.”
“글쎄다. 나는 인식하는 만큼 다른 사람보단 마력에 덜 끌리는 편이라.”
자기가 인성이한테 끌린 건 마력 때문이 아닐 것이라는 성진의 말을 듣고 소영이가 코웃음을 쳤다. ‘과연 어떨까’란 표정이다. 인성이를 바라보던 성진이 곧 수긍했다.
“하지만 그 말도 맞을지 몰라. 인성이 네 마력은 늪 같아.”
“늪…….”
“한 번 빠진 사람은 다시 나오기 힘들 테지.”
“으음…….”
나는 흘끔 인성이를 곁눈질했다. 알 것 같다. 인성이의 마력은 확실히 독특한 매력이 있다.
‘하지만 그 어떤 마력도 저 녀석 것만큼 독특하지는 않을 거야.’
마법사가 본능적으로 마법사의 마력을 보고 반한다면, 이성진의 마력처럼 매력적인 마력이 또 있을까.
그의 노을색 마력은 무척 아름답다. 가슴까지 불을 지피는 주황색과 깊이 빠져들 것 같은 보라색.
죽음은 사람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진을 무서워하면서도 빠질 땐 헤어 나올 수 없을 정도로 푹 빠지고 만다. 아주 많은 사람이 그랬다.
‘전생에도 그랬을까. 그래서 빠진걸까.’
하지만 전생의 나는 죽음을 미워하고 싫어했을 텐데…….
머릿속에 노이즈가 끼며 떠올랐던 풍경이 사라졌다.
머지않아 휴식 시간이 끝난 소영이가 테온과 함께 도시 보안을 도우러 갔다. 웃으며 손을 흔드는 소영이에게 마주 손을 흔들던 성진은 소영이가 사라지자마자 툭 내뱉었다.
“뭐, 실상 우리 중에 가장 마성이라고 하면 소영이지만.”
“뭐?”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와 인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인성이는 긴가민가하는 듯했다.
“사랑이 아니라, 물론 사랑도 있긴 한데, 주로 우정 쪽으로 마성이야.”
“아….”
“이소영 쟤, 알고는 있겠지만 사교성이나 친화력이 많이 높진 않아. 그냥 보통 보다는 괜찮은 수준이지.”
안다. 처음 만났을 때 이소영은 수줍어했고 망설이며 간격을 쟀다. 참극 이후로는 상황 때문에 가리지 않게 되었지만, 본래는 약간 소심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성향과는 달리 사람과 쉽게 친해져. 어떤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친해지기 힘들어 보이는 사람과도 어느 순간 보면 친해져 있더라고. 저 녀석의 마력은 어딘지 친근감이 있어.”
“아…….”
그것도 알 것 같다. 나는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인데, 소영이는 어딘지 첫인상부터 좋았다.
“성격이 좋으니까 더 그래. 캘리만 해도 그래. 제일 낯을 많이 가리는 테온과 가장 먼저 친해졌잖아.”
“그건……그렇지.”
확실히 소영이는 금세 사람과 어울린다. 어느 날 보면 생각치도 못한 사람과 친해져 있다. 아닌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발이 넓다. 어릴 때는 성진이와 인성이 때문에 시샘을 많이 당했다고 했지만……어릴 때는 별개라고 했으니.
머릿속에서 이런 저런 경우를 조합하던 나는 조금 편안한 기분으로 소파에 등을 기댔다.
“마력의 매력이란……미묘하네.”
성진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원래 마력부터 그렇잖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각을 지닌 게 훨씬 많으니.”
“그런가.”
이어 나는 고개만 움직여 성진에게 귓속말을 했다.
“고마워.”
“음?”
“네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줘서 기분이 좋아졌어.”
“그래. 다행이네.”
나는 성진의 미소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어뜨리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마력이 눈꺼풀 안으로 투과된다.
‘종말’이란 성질과는 별개로 성진의 마력은 무척 아름답다. 그리고 나는 원래 하늘을 사랑한다. 성진은 노을이다. 지는 저녁 하늘이다.
마력에 반했다고 생각하니 더 납득이 갔다. 여러모로 마음이 편해졌다.
성진의 마력은 그토록 깊고 아름다우니까.
성진의 마력에 대한 이야기는 무척 흥미롭고 인상 깊었다. 그날 하루 드물게도 아이템 및 마법석 제작에 집중하지 못하고 감상에 빠질 만큼. 아주 오랜만에 성진에게 반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설레고, 아파하고, 미안해했던 모든 순간들. 여러 번 생각해 보니 확실히 알겠다. 나는 성진의 마력에 이끌렸구나. 제대로 보이지 않아도 찰나 모든 풍경을 감싸 안는 그 아름다움에 빠져 버렸다.
문이는 쉴 날이 없는 내가 감상에 빠진 것을 기꺼워하며 나 대신 마력석을 많이 만들어 냈다. 연맹과 함께하는 공적인 일이 없더라도 나는 항상 다음 싸움을 대비하여 아이템이나 마력석을 비축해 두고 있었다. 문이는 라라 혹은 동료들에게 휘말려 내가 쉬거나 노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마법한테까지 걱정을 사다니, 나도 참 나다.
집중하지 않았다고 해도 만든 마법석이 수십 개는 넘는다. 바깥으로 나가니 조금 소란스러웠다. 이유가 뭔가 했더니 무르시엘이 와 있었다. 특히 라이라, 첸, 라스, 듀크, 키메라는 전부 와 있다. 와서……야외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다. 가지고 오는 음료 종류가 죄다 술인 것으로 보아 술이 주역인 파티 같다.
“앗! 리더님~! 오늘 쉰다면서요? 자리 준비하고 부르러 가려고 했답니다!”
“라이라가…….”
첸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야외 술 파티를 해 보고 싶다고 하더군요. 여러 사람이랑 같이요.”
“갑자기요?”
“아, 사실 라이라와 캐티아에서 만났는데.”
비앙카가 잔과 그릇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내게 다가왔다.
“내가 술을 좀 좋아하잖아. 리더가 마력을 강화하기 위해 물처럼 마법석을 먹는다면 나는 마력주를 마시고 다닐 정도로.”
이 세계의 술은 강한 마법사도 취할 수 있도록 마력을 섞어 만든다. 마력 중에 ‘취하는 마력’이 있다. 그러한 마력을 증류해 음료에 섞는 것이다. 그렇게 만든 술의 랭크가 D랭크를 넘길 때부터 ‘마력주’라 취급하는데, 마력주는 마법석처럼 마신 이의 마법을 충전하거나 증강시킨다.
“캐티아에 유명한 마력주 장인이 있거든. 이번에 걸작이 만들어졌다기에 그걸 살 겸 술을 대량으로 사들이는 길에 라이라를 만났어. 그랬더니 라이라가 술이 어떤 맛인지 궁금하다 하더라고.”
“그리고 저 꼭 한 번 많은 사람이랑 술 파티를 해 보고 싶었어요! 트라베리아 밑에 있을 때는 불가능했거든요! 많은 사람들이랑 왁자지껄 떠드는 거!”
“그래서 우리가 좀 맛보여 주기로 했지.”
“리더님과도 꼭 같이 하고 싶어요! 오늘 쉬니까 괜찮으시죠? 네? 네?”
나도 비앙카한테서 강한 마력주를 몇 번 받아 먹어 봤다. 이제 나는 딱히 음식 맛에는 감흥을 느끼지 않지만, 마법의 맛은 아니다. 그러므로 마력을 정제한 마력주는 내게 드물게도 마음에 와 닿는 ‘맛있다’를 느끼게 하는 음식이었다.
“네. 오늘은 쉬는 날이라 괜찮아요.”
“와!”
소란을 듣고 다른 이들도 하나둘 나왔다. 케일은 어째선지 내가 먹는다는 이야기만 들으면 기합이 들어갔다. 곧이어 인하와 성진, 인성이도 나왔다. 우리 중에 오늘 파티에 참가 못하는 건 소영이랑 테온뿐인가. 이렇게 동료들이 많이 쉬는 날은 드문데, 라이라도 날을 참 잘 잡았다. 소영이는 많이 불만스러워하겠지만.
테이블이 점점 늘어났다. 나, 인하, 인성이, 성진이는 당연히 한 테이블이다. 막 바깥에 나온 예리가 인성이한테 경고했다.
“아, 인성 오빠는 순도 높은 마력주는 마시면 안 돼요. B랭크 이하로만 드세요. A랭크는……한두 잔 까지만 괜찮아요.”
취하는 마력은 아주 많은 악의를 제어하고 있는 인성이에게 악영향을 주기 쉬웠다. 인성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요리가 나오며 앉을 사람은 대부분 앉았다. 비앙카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자! 본격적으로 놀고 마시기 전에 리더가 한 말씀 해 줘야지?”
“음?”
인하가 주는 것을 받아먹고 있던 나는 고민하다가 술잔을 들었다. 그래, 나는 몰라도 즐기고 싶은 사람은 즐기게 해야지. 친구들과 앉아 있던 라이라가 눈을 반짝였다.
“그럼……오늘은 다들 즐겁기를 바라며.”
“예엡! 감사합니다!”
별거 없는 짧은 말에도 다들 즐거워했다. 테이블에 맞게 술이 나왔다. 마력주는 실력에 맞게 먹어야 한다. 예를 들어 B랭크 마법사가 A랭크 마력주를 먹으면 한 방에 취하기 십상이다. 잘못하면 위험할 수도 있다. 우리한테 오는 술은 전부 A랭크 이상이었다. 비앙카와 케일, 에이온은 자신들은 위험해서 마실 수 없었던 비장의 술을 꺼내 우리한테 따랐다. S랭크 상위만이 마실 수 있는 진하고 강한 마력주다.
라이라는 조금 낯선 표정을 짓다가 금방 익숙해졌고, 라스는 인상을 쓰며 조금씩만 마셨다. 첸과 듀크는 점잖게 즐겼다. 하무라는 그가 가지고 있는 비장의 술을 가지고 오다가 동료들에게 들켜 파티 참가원을 더 늘렸다.
초월자쯤 되면 알콜은 물론이고 웬만한 마력에도 취하지 않는다. 인성이는 순도 높은 술을 마시지 못하기에 취하지 못했다. S랭크 마력주는 딱 한 번 마셨는데, 머리에 오는지 이마를 한 번 짚은 뒤엔 마시지 않았다. 나는 술을 물처럼 들이켰다. 정화마법을 지닌 나는 보통 술이든 마력주든 취하지 않는다. 인하는 마력주가 꽤 몸에 잘 드는 모양이었다. 뺨이 약간 붉어졌다. 성진은……성진이 취할 리가 없지 않은가.
미영 할머니도 조금 취한 듯했다. 형일 아저씨는 마력주가 잘 안 드는 편인지 멀쩡했다. 그래도 신나게 떠들며 술을 마셨다.
성후 오빠는 조금 마시다 말았다. 예리는 멀쩡했고, 예슬이는 취했으며, 시하는 적당히 마셨는지 그럭저럭 멀쩡했다. 그리고 아르델은……엎드려서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세필리오가 웃으며 아르델을 달랬다. 취해서 우나보다 짐작하나 본데, 아니었다.
아르델은 그 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왁자지껄 떠드는 친구들 사이에서 바래 버린 추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몇 년 전이었더라. 적어도 랭크 시험을 치른 뒤였다. 청소년 마법 대회가 있었다. 인하가 우승했다. 그 뒤 친구들과 함께 유명한 가게에서 술을 마셨다. 거기에는 아르델도 있었다. 아르델도 그 대회에 나왔었으니까.
인하도 그때를 떠올리고 있는 듯했다.
한 시간, 두 시간, 밤이 깊어질수록 취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 무렵 나는 마력주의 마력패턴을 전부 파악하고 직접 마력주를 만들어 보고 있었다. 기왕 만드는 김에 아주 독하게 만들어 봤다. 다른 재료를 섞지 않은, 순수하게 마력만으로 이루어진 마력 증류주였다. 컵에 담긴 마력주를 보며 인성이가 고민했다.
“이거……내가 마시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한 방에 훅 가니까 먹지 마세요.”
예리가 손으로 엑스자 표시를 했다. 인성이가 긴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먹어 봐도 돼?”
“희석해서 드세요!”
예리가 적절한 비율을 일러 줬다. 과실주에 내가 만든 마력주를 딱 한 방울 섞었다. 비앙카는 그걸 마시고……뻗었다.
“주, 죽은 건가?”
한재일이 식은땀을 흘리며 비앙카를 손가락으로 찔렀다. 비앙카가 힘없이 한재일의 손을 쳐냈다.
“아, 뭐야 이거……. 느낌 엄청 이상한데……기분 좋아. 맛있어…….”
여러 사람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내가 만든 마력주를 시험했다. 라이라는 탄성을 지르며 좋아했고, 형일 아저씨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몇 모금 더 마시다가 폭 취해 버렸다. 첸은 몇 모금 마시다 당황하며 멀리했다. 맛은 있는데 몸이 감당하지 못하는 듯했다. 라스는 마음에 든 듯 많이 마셨다. 듀크는 조금 마시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보통? 내 마력이라서 그런지 취하지 않았다. 그사이 인하가 잔에 술 반 마력주 반을 섞어 성진이 앞에 내놓았다. 인하는 내 마력주를 마시고 이미 꽤 취해 있었다.
“마셔. 이거라면 너도 취하겠지. 너만 안 취하는 건 불공평해.”
성진이 헛웃음을 지었다.
“은하도 안 취했는데.”
“은하한테 취할 만큼 무리시키고 싶지는 않지만……취한 모습은 보고 싶어.”
“맞아! 보고 싶어!”
“저두요~!”
뒤에서 취한 동료들이 동의했다. 인하가 손가락으로 성진이를 찔렀다.
“너 뭐 없어? 뭐, 그러니까, 뭐 없어?”
“뭘 말하는 거냐…….”
“그러니까, 그거 있잖아. 넌 다 가지고 있잖아.”
“인하가 많이 취했나봐.”
인성이가 신기하다는 눈으로 인하를 살폈다. 같이 지낸 세월이 긴 만큼 성진은 금방 인하가 뭘 말하는지 알아차렸다.
“나랑 은하가 취할 만한 술이 하나 있긴 한데…….”
“꺼내.”
인하가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쳤다. 나는 약간 호기심이 생겼다. 내가 취할만한 술이 있다고?
“당장 꺼내.”
인하가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취한 상태라 그런지 전혀 무섭지 않다.
성진은 드물게도 고민하며 아공간에서 술을 꺼냈다. 길쭉하고 둥근 크리스털 유리 술병에 술이 가득히 담겨 찰랑거렸다. 병 주둥이에 마법석이 엮인 금색 장식 술이 달려 있다.
술병을 살피던 나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마력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과는 별개로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신주(神酒)야.”
“푸웁!”
인성이가 헛숨을 내뱉으며 마른기침을 토했다. 입안에 아무것도 넣고 있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나도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인하가 몽롱한 눈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니까……너도 취할 수 있는 술이란 거지?”
…인하 진짜 많이 취했다.
“아마?”
“잠깐! 그거 엄청 귀한 술 아냐?”
성진이 꺼낼 술을 기대하던 덜 취한 사람들도 경악하며 입을 벌렸다. 성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나랑 은하가 취할 만한 술이 안 귀하겠어?”
“아니, 그런 걸 막 먹어도 돼?”
“신주라고 해도 신물로 만들어진 술일 뿐이지 특별히 대단한 효과가 있는 건 아냐. 그냥 마력이 조금 증폭되고, 치유력이 좋아지는 정도? 취하기 위한 술이야. 몇 병 더 있으니까 이건 마셔도 돼.”
“대체 그런 게 어디서 난 거야?”
“저번에 아는 놈이 줬어.”
성진이 술병 뚜껑을 열고 내 잔에 술을 따랐다. 신주라서 그런가.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어렴풋이 ‘신의 기운’이 느껴졌다.
“자칫하면 내가 취할 정도로 아주아주 독해. 그건 알고 마시도록.”
“나 마실 거야.”
취한 인하가 설명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자기 잔에 술을 받았다. 그리고 마시자마자 쓰러졌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인성이가 인하의 이마가 테이블에 쿵 하고 떨어지지 않도록 받쳤다. 성진이가 인성이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어? 나도 마셔?”
“이건 괜찮아.”
인성이가 흘끔 예리의 눈치를 보았다.
“성진 오빠가 괜찮다면 괜찮을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