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455
어느 통로에서는 짐승형 키메라가 나타났으며, 어느 통로에서는 트라던트 줄기가 머리를 비집고 나왔고, 어느 통로에서는 에리카가 만들었음이 틀림없는 마법 병기가 나왔다.
쿠─과과과과과!!!
도시 한복판에서 마력 집속포가 터졌다. 레미가 재빨리 결계를 쳐 이공간으로 보냈지만 그래도 도시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에리카…….”
윌리엄이 에리카의 힘이 느껴지는 방향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말릴 틈도 없이 윌리엄이 이동했다. 그 뒤를 같은 경찰 소속 마법사들이 따랐다. 거울에 신경을 집중하던 첸이 다급히 어딘가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먼 하늘에서 밤하늘이 넘쳐흘렀다.
쿠구구구구궁!
기둥을 이룬 밤이 분수처럼 하늘로 올라갔다가 땅으로 흩뿌려진다. 틀림없이 유은하의 마력이었다. 유은하의 힘과 함께 익숙한 마력이 별하늘 주위로 퍼졌다가 사라졌다.
““베로니카!””
첸이 시린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군요. 리더님은 거울을 통해 바로 라이라에게 이동한 모양입니다.”
첸의 머리에 짐승 귀가 솟아오르며 주위로 은색 덩어리가 나타났다. 라스의 주위에 흩뿌려지던 독이 더 짙어졌다.
인형들을 향해 보석으로 이루어진 레미의 꽃덩굴이 쏟아졌다. 강인하가 태양의 검을 휘둘러 인형에게 붙은 카인의 실을 떼어냈다. 소속마법 덕분에 강인하는 조종하는 힘을 쉽사리 떨쳐 낼 수 있게 됐다. 마무리는 이청우가 했다. 바람과 천둥의 힘에 의해 인형 열 대가 산산 조각나 부서졌다.
첸은 소환한 하얀 덩어리를 삼켰다. 강한 자들에게서 받은 정기와 제 영혼, 불꽃을 뭉쳐 만든 것이다. 부상을 입었을 때를 대비한 즉효성 회복약이었다.
영혼을 삼키자마자 첸의 몸과 마력, 영혼까지 빠르게 재생되었다.
“레녹, 당신은 치료부터 받도록 하세요. 하무라, 당신은 여기 일을 도우십시오. 라이라를 돕는 건 정신과 관련된 마법이 있지 않는 한 어렵습니다. 인하 님, 저희는 라이라에게 가 보겠습니다.”
“알았어.”
베로니카한테는 지금 도착한 유은하를 제외하고도 호위 팀과 정예리가 붙어 있다. 그러나 라스와 첸 역시 라이라에게서 베로니카를 떨궈내기에 적합한 힘을 가지고 있고, 무엇보다 라이라와 절친한 친구이며 동료다. 거기다 두 사람은 절대 교체할 수 없는 전력이 아니다.
강인하가 허락하자마자 두 사람의 신형이 사라졌다.
“당신들은 다친 데 치료 받고 사람들이 피난하는 걸 도와줘.”
“오케이.”
어느새 하인리히의 힘이 안전 구역 전부를 감싸고 있었다. 안전 구역 안에 있는 사람들을 보호해 피난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들과 함께 있는 키메라와 뱀을 처리하는 등 빠르게 조치하고 있다.
강인하는 동료들과 함께 에리카의 마력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날아갔다.
공간을 따라 움직이는 느낌이 평소와는 너무 달랐다. 짓눌리고, 이끌리면서도,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계속해서 구역질이 났다.
모든 공간이 연결된 순간, 우리는 유클라프의 마력에 의해 파도처럼 밀려났다. 그러나 우리는 밀려나면서도 라이라의 안을 벗어나지 않도록 버티며 길을 찾았다. 거울의 빛을 찾아, 베로니카의 힘을 따라, 손을 뻗었다.
‘여기에서……꺼져!’
제 아무리 베로니카라도 꿈속에서는 나와 인성이를 이길 수 없다. 나는 청보라색으로 빛나는 베로니카의 정신을 잡아채 거울 바깥으로 끄집어냈다.
파지지직!
당장 라이라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베로니카의 정신을 거울 안에서 없애면 라이라의 거울에도 무리가 간다. 그래서 통째로 거울에서 잡아 뺐다.
“우웩! 쿨럭!”
나는 구역질을 하면서도 『책갈피』를 꺼내 베로니카의 정신을 표본처럼 고정했다. 베로니카의 정신체로부터 라이라의 연결이 끊겼다.
「난폭하네.」
그럼 곱게 다루게 생겼어? 베로니카가 빠져나오자마자 라이라가 거울이 되어 떨어졌다. 바닥에 닿기 전에 오시언이 안전하게 잡아채 품에 감쌌다.
색이 바랜 라이라를 돌아보며 나는 일순 절망감을 느꼈다. 트라베리아의 문장이 라이라의 안에 자리 잡고 말았다. 저주의 뿌리가 라이라의 생명에 연결되어 있다!
영혼, 마법, 생명.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라이라는 최근 자신만의 마법을 구상하고 있던 참이었다. ‘추억 상자’라고 하는데, 장군 시리즈가 사용하는 마법이라기에는 아주 소소한 마법이다. 추억과 감정을 담아 보관하는 마법으로 일부러 만들지 않아도 거울로 표현할 수 있는 마법이었다. 그러나 라이라는 트라베리아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것을 갖고 싶어 했고, 그 마법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장난칠 생각으로 가득한 기술을 구상하며 아주……아주 즐거워했다.
함께 빠져나온 인성이와 오시언 역시 곧바로 라이라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인성이가 그림자에서 이런 때를 대비해 만들어 두었던 ‘봉인석’을 꺼내 라이라를 봉인했다.
저 봉인석은 루카의 마법을 통해 만든 물건이다. 앞으로 첸 일행과 동료가 될 키메라가 문장을 없애기 전에 잘못될 경우를 대비해서 만든 것으로, 갇힌 사람의 시간까지 꼼꼼히 봉인하는 봉인석이다. 베로니카가 봉인을 보며 웃었다.
“라이라는 죽을 거야.”
“닥쳐요.”
“저 아이는 내 측근이었어. 그러니 책임지고 내가 죽여야지.”
“닥쳐.”
“저 아이가 살 방법은 다시 우리 손으로 돌아와 얌전한 인형이 되는 것뿐이야. 이제 우리도 문장만 제거하는 짓은 못해. 엘리 언니라도 못할걸?”
“닥치라고!”
나는 베로니카의 멱살을 잡은 채 마법을 펼쳤다.
“『아멜다의 기둥!!!』”
일부지만 베로니카다. 언령이 담기지 않은 기술로는 없앨 수 없다. 기둥에 갇힌 베로니카의 파편이 산산이 분해되었다.
나는 기둥을 뒤로하고 라이라에게 다가갔다. 생명에 융합되고야 만 트라베리아의 문장. 봉인 수정 안에 갇힌 얼굴보다 조금 큰 크기의 화려한 거울.
라이라의 본체는 몇 백 년은 된 호화로운 명문가의 보물이다. 트라베리아의 마법사가 우연히 발견하고 소지하던 거울인데 사람의 마음과 죽음이 녹아들어 특별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을 사용하여 만들어진 것이 라이라다.
그러므로 라이라의 첫 기억은 거울 안에 힘이 스며든 순간이다. 마지막으로 라이라를 소유했던 인간은 죽을 때까지 라이라를 소중히 여겼으며, 라이라의 곁에서 눈을 감았다.
인간을 사랑하며 많은 인간을 지켜본 거울, 라이라. 살고 싶다며 울먹이던 모습이 무섭도록 선명하게 가슴에 사무쳤다.
‘아직 늦지 않았어.’
나는 이를 악물었다.
‘쓸 수 있는 방법이 남아 있을 거야. 아직!’
봉인석을 향해 손을 뻗었을 때였다. 익숙한 기척이 우리 옆으로 내려섰다.
“라이라! 리더님!”
“은하 씨!”
오른쪽으로는 첸과 라스가, 왼쪽으로는 성진, 예리, 듀크, 레일리, 로일, 아멜리아가.
첸의 옷은 평소와 달리 너덜너덜했다. 얼굴이나 몸에 마른 피가 말라붙어 있다. 첸이 봉인에 갇힌 라이라를 보고 이를 드러내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라이라…….”
성진이와 예리 역시 봉인 안을 확인하고는 안색을 바꾸었다.
그들이라면 라이라의 상태를 정확히 알아보았을 것이다. 문장에 영혼이 사로잡혔다. ……일부는 조각나 떨어졌다.
“……!”
예리가 창백한 얼굴로 입을 가렸다. 예리는 새블레에서 가장 뛰어난 의사다. 우리와는 달리 영혼까지 보지는 못하지만, 그녀가 보는 생명력은 영혼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예리야, 어때?”
내 물음에 예리는 차마 대답하지 못한 채 거울의 상태를 샅샅이 살폈다. 예리가 고치지 못하면 라이라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불가능에 한없이 가까워진다. 인성이가 첸을 돌아보았다.
“이그니는?”
“라이라와 같은 상태입니다. 아니요, 처음부터 융합되어 있는 상태였어서 그런지 더 심각합니다.”
“…….”
예리는 참혹한 심정을 삼키며 대답했다.
“……불가능해요.”
예리가 창백한 얼굴로 딱딱하게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지금의 제 실력으로는……살려 낼 수, 없어요.”
이어 예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문장이 완전히 몸에 동화되어 버린 데다……진화했지만, 원래는 문장으로 생명과 영혼을 연결했었기 때문인가? 문장이 생명이랑 영혼에 제대로 자리 잡았어요. 아니, 시간이 몇 분만 더 흘러도 제대로 자리 잡을 거예요.”
떨리는 눈으로 봉인을 바라보던 예리가 입술을 깨물었다.
“봉인도 오래가지 않을 거예요. 억지로 멈춰진 저주는 머지않아 문장의 주인인 베로니카의 시간을 따라 봉인을 깨고 흐르겠죠.”
봉인석의 기틀은 루카가 잡았지만, 트라베리아의 문장이 지닌 힘은 ‘저주’에 가깝기 때문에 안에 정화마법을 섞었다. 시간마법을 건 것은 이성진이다. 종말의 힘은 정화에 조정되어 사라졌다.
‘하지만 이미 문장이 생명과 동화되었어. 정화마법으로도 저 저주를 오래 막을 수 없어.’
예리가 떨리는 손으로 봉인석을 쓰다듬었다.
“시간이 완전히 멈춘 채로 버틸 수 있는 건 아마 일주일……. 문장이 완벽하게 육체에 동화되기 까지는 한 달 반 정도 걸릴 거라고 생각해요. 그 안에 방법을 찾아야 해요.”
어떤 방법을 쓰면 되지? 다양한 것이 머릿속을 스쳤다 사라졌다. 정화, 생명력.
“가장 가능성이 높은 방법은…….”
침음을 삼키던 예리가 첸을 돌아봤다.
“……스스로 이겨 내게 하는 거예요. 당신들이 진화했던 것처럼.”
나는 첸을 돌아보았다. 감정에 넘치는 은빛 눈동자가 불안으로 초조하게 떨렸다. 착잡한 감정을 흩뿌리며 라이라를 올려다보는 듀크가 시야에 스쳤다. 듀크의 진화 과정은 아슬아슬했다. 그는 아슬아슬하게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
나는 입술을 조금 열었다가 닫았다. ‘진화’는 불확실한 것이다. 인간에게도, 키메라에게도 마찬가지다. 불안 요소가 넘칠 정도로 많다. 더군다나 트라베리아의 저주를 이겨 낼 정도의 진화라니.
게다가 라이라는 이미 한 번 스스로의 힘으로 진화 한 적이 있다. 마법의 진화도 아니고 종(種)으로서의 진화다. 한 번 진화하는 것도 기적에 가까운 힘이 필요한데 두 번이나 진화한다니. 정말로 그게 가능할까?
그러나 그것을 입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모두 알고 있는 불안을 말로 하여 더 부추길 수는 없지 않은가. 예지몽을 다룰 때와 비슷한 느낌으로 말을 삼켰다.
그러나 진화하든 어쨌든 키메라 개인의 힘으로 트라베리아의 저주를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 당연히 나나 예리처럼 특수한 힘을 지닌 마법사가 옆에서 보조할 것이다. 그리고 ‘진화’할 방법 말인데…….
“언니. 라이라 씨를 살리려면 한국으로 가야 할 것 같아요.”
“…….”
“그분의 힘이 필요해요.”
‘디나 심포니’의 힘이 필요하다.
주위 사람들의 얼굴이 심각하게 가라앉았다. 나도 예리도, 연맹의 그 누구도 생명을 진화시킬 정도로 무시무시하게 특별한 힘은 가지고 있지 않다. 가장 가능성이 있는 게 예리인데 그녀는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레일리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한국에 ‘진화’라. 단순히 트라베리아의 문장만 제거하고 이들을 데려온 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레일리, 로일, 아멜리아, 오시언은 ‘디나’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 모른다. 그건 우리 새벽별무리만 알고 있는 사항이다. 레일리가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다기엔 첸 씨, 라스 씨, 라이라 씨, 듀크 씨는 다른 키메라와 느낌이 많이 다른걸. 아무리 그래도 트라베리아가 만든 핵인데 트라베리아의 힘이, 엘리시아의 힘이 아예 느껴지지 않잖아. 어떻게 한 거야? 아니, 아니다. 지금은 그걸 물을 상황이 아니지.”
레일리가 고개를 한 번 저었다.
“어쨌거나 한국에 있는 어떤 사람한테 도움을 구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단 말이구나? 누구인지는 비밀이야?”
“상대방이 원하지 않거든.”
“그래? 하지만 한국에 있다니, 어렵게 됐네.”
그러자 인성이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번엔 들키지 않고 한국에 숨어들 수 있으려나? 그 사람의 행적은 들키지 않는 게 좋은데.”
“해내야지.”
“언니…….”
“해내지 않으면 안 돼.”
다짐하듯이 내뱉었다. 클라인 남매의 청각과 감성은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경지에 있다. 그러나 이번에야말로 들키지 않고 그들이 지배하는 지금의 한국에 잠입해야 한다. 인성이는 라이라가 갇힌 봉인석을 그림자 안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그 전에 이번 전쟁을 어떻게든 무사히 끝내야겠지. 가자.”
모두가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각기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소영 일행은 간발의 차이로 알토의 뒤를 따라 미로를 벗어났다. 직후 알토가 설치해 두었던 마법이 발동하며 그들이 있던 미로가 산산조각 났다. 조금만 더 늦게 나왔어도 온몸이 으스러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김준영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반면 이소영과 테온은 침착하게 주위를 살폈다.
“여긴…….”
알토와 이소영 힘이 섞인 미로에서 벗어났더니 또다시 알토의 영역이다. 그러나 처음 갇혔을 때와는 달리 현실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현실 안에 들키지 않도록 비밀 통로를 만들어 놨다는 느낌이다. 일행은 여기가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
“리브리 아냐?”
리브리는 본래 하늘을 날며 전 세계의 정보와 지식을 수집하던 조직이다. 리브리 기지는 나라 급의 요새이며, 수백 채의 건물이 군집되어 있다. 외곽에서는 사람들이 생활하고 여가를 보내며, 중앙은 정보가 저장되어 있는 도서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심부로 갈수록 중요한 서적과 지식이 가득 차 있다. 하여 리브리를 가리켜 ‘천공 도서관’이라 부른다.
연맹에 가입하고 새블레가 세워진 후 이소영 일행은 자주 리브리에 들렀다. 새벽별무리에게는 리브리의 기밀 정보를 제외한 모든 책이 공개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여기는 리브리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장소다. ‘파샤’의 지위로는 올 수 없는 장소이건만…….
‘꼼꼼하게 퍼즐로 둘러싸여 있는 것 좀 봐. 아주 견고하게 잘 만들어져 있네.’
이소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리브리에 있는 동안 조금씩 조금씩 영역을 넓혔던 거겠지. 나에게 그랬듯이, 손닿는 것에 문양과 퍼즐을 심고 옮겨서.’
새블레에 과연 ‘파샤’의 손에 닿은 것이 얼마나 많을까. 몇십 년간 사용했던 가짜 신분이다. 책만 해도 수천만 권이 넘을 것이고, 물건도 수천 개는 가볍게 넘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퍼즐들의 중심은 바로 그가 10년간 몸담았던 여기 리브리였다.
“준영아, 나갈 수 있겠어?”
“아직 안 될 것 같아요. 좀 더 안으로 들어가야겠어요.”
“진미(眞美)의 창.”
진미의 창은 유은하가 쓴 에서 따온 무기로, 원하는 것에 닿는 창이다. 유은하의 문장이 담긴 창은 ‘길’을 이루는 퍼즐을 넘어 실체를 가진 벽에 닿았으나, 완전히 닿기 전에 흔적이 순식간에 지워졌다. 알토가 그들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길이 넓어지며 퍼즐에 새로운 문양이 새겨진다. 마법을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기술이다. 유은하의 상상력도 강하지만 이곳은 알토의 영역이기에, 알토의 힘을 더 받아들였다. 이소영은 알토의 힘에 막혀 바깥에 흔적을 남기지 못하는 진미의 창을 계속 퍼즐에 박은 채 콰곽콰곽 긁으며 달려갔다.
“너희 두 사람은 출구를 찾아.”
“알겠어요!”
“드리겠습니다.”
테온이 가지고 있던 예비 아이템 중 가장 강력한 방어 아이템과 더불어 마법석 몇 개를 골라 김준영의 손에 쥐였다.
“호위 아이템의 마력이 부족해지면 쓰도록 하십시오. 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김준영이 짧게 목례했다. 곧 네 사람은 서로를 향한 걱정을 남기고 헤어졌다.
테온과 이소영은 퍼즐의 길을 따라 날았다. 바람과 희미하게 남은 족쇄의 흔적. 이소영은 김준영과 마법을 교감했을 때를 떠올리며 주위의 퍼즐들에 집중했다. 한 번 자각하니 이제 훤히 보인다. 어쩌면 알토와 자신의 마법은 상성이 좋은 걸지도 모르겠다.
길은 점점 리브리의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S랭크 금서실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읽는 것만으로 마법이 발동하고 몸이 위험해지는 책 혹은 물건이 산재해 있었다.
S랭크 금서실 가까이에 있는 넓은 홀. 여기는 리브리의 역사 보관소이다. 리브리의 역사와 사건에 관련된 정보를 담은 마법 아이템이 전시되어 있다.
이소영이 바람과 공간을 끌어 모았다.
“거기서 멈춰, 새끼야!!”
폭풍처럼 쏘아진 이소영이 진미의 창과 바람이 둘러진 단검을 합쳐 휘둘렀다. 세리(하늘)와 시스(계절)가 반짝반짝 빛을 낸 순간 폭풍의 밀도가 짙어졌다. 테온의 대지마법이 알토를 향해 뻗었다. 대지를 따라 마력을 분해하는 창이 자라났다.
알토의 주위로 나타난 무수히 많은 검은 육각형 방패들이 이소영의 폭풍과 테온의 창을 겨우 막아 냈다. 손이 떨리고 있는 주제에 알토는 여유롭게 생긋 웃었다.
“아하하, 벌써 붙잡히다니 아쉽네. 조금만 더 늦게 오지.”
허공에 새까만 모래가 흩날렸다. 노이즈가 끼듯 주위에서 색이 사라진다. 테온의 분해마법을 위한 환경, ‘흑백세계’. 모래가 흩날리며 이소영의 폭풍에 섞였다. 알토의 방패와 마법이 분해되기 시작한다. 알토가 한숨을 내쉬며 방패로 바람을 밀어냈다.
“네 목표가 뭔지는 몰라도.”
세리(하늘)와 시스(계절)에 이어 리브(힘)와 엘린(속성)이 빛을 낸다. 별하늘의 어둠과 고대의 얼음이 폭풍에 섞였다.
“이루게 놔둘 것 같아?”
쩡─!
결국 방패가 깨졌다. 사라지는 육각형 방패 사이를 바람이 파고들려는 순간, 머리 뒤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마력에 이소영이 테온을 이끌고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허공에서 퍼즐을 조합해 만들어진 금창이 조금 전 이소영과 테온이 있던 자리의 바람을 찢어발겼다. 그러나 금창에 찢기지 않고 먼저 쏘아져나간 바람 일부가 알토를 밀어냈다.
“곤란하네.”
벽에 등이 닿을 정도로 밀려난 알토가 전혀 곤란하지 않은 얼굴로 상처가 난 손을 털었다.
“베로니카한테 잔소리 들은 참이거든. 새벽별무리와 싸우지 말라고 하더라.”
“다 자라기 전에 짓밟으려니 그야 아까우시겠지.”
“그게 이유면 차라리 나았지. 조절하면 되니까.”
알토의 주위로 다시금 거울이 늘어섰다. 거울 안에 문양이 비치더니 만화경처럼 문양이 움직이며 합쳐지길 반복했다.
“나는 너희 인간이 밉지만, 목적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살의를 조절할 수 있어. 너희도 그렇잖아?”
“…….”
“너희가 위험하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알토는 어쩐지 즐거운 기색이었다.
“싸우지 말라더라.”
“그것 참 영광이네.”
“으음, 하지만 목표를 달성할 때까진 물러날 수 없는데, 어떡하지?”
알토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가증스러움에 이소영과 테온이 이를 갈거나 인상을 찌푸리며 주위로 바람과 모래를 슬금슬금 퍼트렸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여기서 사생결단을 내는 거지.”
이소영이 테온의 모래를 이끌고 다시 한번 달려들었다.
“테온의 모래 폭풍!”
“하하.”
알토가 웃으며 퍼즐을 던졌다. 바람과 퍼즐이 합쳐지며 공간이 퍼즐로 변해 폭발했다. 완벽하게 폭발한 것은 아니었지만, 알토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얍!”
흩어진 퍼즐이 알토의 마력과 합쳐지며 성벽을 만들어 냈다. 그때 하늘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일었다.
“이안! 크리스(결정)!”
날개와 보석, 대지가 방패를 이루는 것보다 빠르게 하늘에서 주포가 떨어졌다. 쏘아진 주포가 이소영과 테온의 마법을 퍼즐처럼 분해하여 꽃잎 그림 조각으로 만들었다.
“큭!”
폭풍을 일으키는 것처럼 거세게 흩어진 퍼즐이 이소영과 테온의 마법을 묶었다. 알토가 성벽 위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웃고 있는 알토의 얼굴에는 살기 따위는 한 조각도 보이지 않았다.
“사생결단도 재미있겠지만 싸우는 건 시간이 너무 걸리니까 안 돼. 나 먼저 간다.”
그러더니 성벽과 마력을 묶는 꽃잎만 남기고 혼자 쏙 사라져 버렸다. 이소영과 테온이 이를 갈며 굳어진 마법을 억지로 움직여 성벽과 꽃잎을 산산이 분해했다.
“너 거기 안 서?”
“누가 서란다고 서~.”
어느새 알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여간 도망치는 데는 천재적인 실력을 가졌다. 이소영과 테온은 머리에 오른 열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알토를 뒤쫓았다. 진정한 술래잡기가 지금 시작되었다.
##30. 비틀림의 시작
아프리카의 사이라가 습격을 받았을 때, 다른 대륙도 힘은 약할지언정 공간 기둥이 몇 개 나타났다. 호주의 마법사들은 그럭저럭 큰 위험 없이 그림자 도시 혹은 대륙과 바다를 따라 공간 기둥의 영향이 적은 스틸라로 대피했지만, 사람이 반도 대피하기 전에 ‘진짜’ 공간 회로가 나타나고, 꿈의 그물과 연결되었다.
그에 따라 그림자 도시로 대피한 사람도 위험해졌다. 땅 위에 있는 사람보다는 낫겠지만, 나타난 공간 회로는 공간은 물론 꿈에도 영향을 끼친다. 유클라프가 마음먹고 공간을 부수려 하면 그림자 도시라고 한들 완전히 무사하기는 어렵다. 유클라프는 감지하든 못하든 모든 공간을 통째로 부술 수 있는 공간 전문 마법사다.
안전을 대비해 호주의 그림자 도시에 스틸라의 그림자 도시로 향하는 길이 형성되었으나, 호주의 공간이 북아메리카, 중동의 공간과 합쳐지면서 다른 대륙과 통하는 공간과 꿈의 길이 꽤 좁아졌다. 그 탓에 피난이 그리 순탄치 않았다.
마법사들은 어찌 되었건 비교적 안전한 그림자 도시에 들어간 사람들보다는 대륙에 남은 자들을 스틸라로 피난시키는 걸 우선했다. 그런 와중 레미가 설치한 결계를 뚫고 호주 수도 캔버라 한복판에 에리카가 나타났다.
검은 공간에서 빠져나온 것은 에리카와 에리카의 측근들, 더해 키메라와 로봇이었다.
레미가 하늘 곳곳에 스크린 지도를 펼쳤다. 커다란 지도에는 공간이 열린 장소, 공간이 일그러진 장소, 시민들, 아군의 위치, 적의 위치 등이 실시간으로 상세히 표시되고 있었다.
에리카의 앞으로 윌리엄이 내려섰다. 윌리엄이 휘두른 차원포가 허공을 찢어발기며 주위를 묵중하게 내리눌렀다.
에리카의 측근은 밝혀진바 죽은 자까지 포함하여 총 11명이다. 트라베리아 소속 마법사인 하멜, 실비아, 벨다. 온몸을 기계 갑옷으로 덮은 안드로이드 레카, 드라이어드 하미아, 세쌍둥이 케르베로스 케이, 루이, 베이, 땅의 정령 놈을 모델로 한 비잔, 모델이 있다고 말하기엔 미묘한 책벌레 릴리아나, 바다 괴물 카리브디스 오리아.
이번에 에리카와 함께 선 것은 장군 시리즈 케르베로스 삼형제였다.
“에리카…….”
에리카는 유리알같이 무감정한 눈동자를 굴려 분노를 억누르는 윌리엄을 흘끗 보았다. 하늘에서 별꽃이 얽혔다. 레미가 결계를 강화하며 에리카를 견제하는 공격을 떨어뜨렸다.
그때 통로에서 나온 새카만 나뭇가지가 에리카 주위를 둘러쌌다. 파지직. 나뭇가지는 레미의 공격을 막아 냈으나, 동시에 꿈의 힘에 의해 짓눌러졌다. 에리카가 입술 끝을 끌어올렸다.
“연방국 새블레라. 확실히 조사하는 보람이 있을 것 같아.”
“배짱도 좋네.”
철컥, 화르륵.
에리카 주위를 둘러싼 마법사가 각기 마법을 겨누었다. 윌리엄과 SR의 알리사, 제레미, 울비스의 시온, 거기에 더해 새벽별무리의 강인하, 아르델이 왔다.
“우리 전력이 아직 너희 전력에 비해 부족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하지만 설마 너 혼자 여기에 올 줄이야. 설마 혼자 우리를 상대하고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강인하의 눈동자가 차가운 한기를 품으며 가늘어졌다. 에리카가 몇 번 눈을 깜빡이고는 검지를 흔들어 부정을 표했다.
“흠……그 말에는 어폐가 있어. 나는 혼자가 아니니까.”
레미의 힘에 일그러지면서도 아직 유지되고 있던 통로에서 트라던트 가지가 좀 더 빠져나왔다.
가지가 넓힌 길을 따라 더 많은 공간 통로가 생겨났다. 통로에서 수십이 넘는 시커먼 인형들이 빠져나왔다. 머리, 팔다리, 몸통. 표정 따윈 없고 사람을 닮은 형체만 가지고 있는 인형이었다. 그림자를 뽑아낸 것 같기도 했다.
“인간은 별로지만, 토게인은 도움이 돼. 탐구심을 채워 주거든. 데리고 온 측근도 제법 강해.”
에리카가 바로 옆에 있던 케르베로스 3형제 중 막내 베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베이가 작게 울었다.
“커븐 로드는 당신 혼자잖아?”
“나는 준비하는 자가 이긴다고 생각한다.”
동문서답이다. 그러나 에리카는 본래 그런 성격이다. 자신이 흥미 있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남의 말이나 생각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나 머지않아 에리카의 말은 대답으로 변했다.
“과연 누가 더 많이 대비했을까? 내가 설마 아무 준비 없이 여기에 왔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강인하의 눈동자가 금빛으로 번뜩였다.
빛이 번뜩였다 생각했을 때 강인하의 공격은 이미 적중한 후였다. 빛이 새까만 인형을 태운다. 그러나 태워진 부분부터 이상한 마력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태양을 쬔 검은 인형이 거품으로 변해 흩어졌다. 거품이 분열하고, 또 분열했다.
강인하의 공격에 케르베로스 형제가 이를 드러냈다.
“가만히 있거라.”
에리카의 속삭임에 케르베로스가 으르렁 거리던 소리를 멈췄다. 에리카를 지키고 있던 가지가 공간 통로에서 더 빠져나오며 자라나듯 새블레를 향해 가지를 넓혔다. 에리카가 거품을 향해 총구를 들이밀었다.
“걱정하지 마. 심심하게 하지는 않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