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456
레미가 힘이 닿는 모든 곳에 사이렌을 울렸다.
여기저기에서 전투가 일어나고 있다. 캔버라 대도시에 나타난 에리카, 에리카의 명령으로 따라온 토게인.
토게인은 필요에 따라 팀을 이루어 흩어졌다.
공간 회로가 막 열렸을 때 전자 집속포를 쏜 것은 에리카가 아니었다. 토게인이 만들어 낸 특수한 은신 기능이 있는 거대 로봇 피아다. 피아의 육체는 지정되지 않은 것은 통과하며, 모습 역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실체화한 공격은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내부는 아군을 보호하는 방공호이며, 내장된 마력석은 에리카가 직접 개발했다.
피아 안에서 로봇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이 바로 에리카와 같은 미치광이 마법 학자이자 토게인 연구 원장 셀가 에브게니아다.
토게인은 전투 조직이지만 지금은 합쳐진 알카무라나 연맹 편으로 돌아선 무르시엘, 캐티아와 달리 학자 집단이다. 그것도 ‘금기’에 집착하며 선과 악을 가리지 않고 진실만을 탐구하는 미치광이 학자 집단이다. 알카무라와 더불어 참극이 일어나기 전부터 트라베리아와 손을 잡았던 조직이기도 했다.
그런 미치광이 학자 집단이기에 토게인에 소속된 학자의 숫자는 생각보다 적다. 30명 남짓의 마법사들이 제각기 다른 방법으로 미쳐 마법을 연구하고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그런 그들에게 트라베리아의 광기는 가히 최고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은 트라베리아의 목적이 밝혀지고 나서 더 열광했다. ‘사자 소생’, ‘시간 회귀’, ‘세계 재구성’, 하나같이 금기 중의 금기이며, 마법의 극의 극에 달하지 않으면 시도조차 해 볼 수 없는 것들이다. 토게인이 트라베리아를 따르는 것은 탐구의 끝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그들은 무엇이든 할 것이고,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이다.
그렇기에 에리카는 토게인을 자신의 실험실로 삼았다. 에리카와 닮은 30명의 학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트라베리아가 일으키는 사건은 언제나 성가시고 위험천만했던 것이다.
학자들은 누구보다 뛰어난 마법사는 아니다. 그러나 뛰어난 응용력과 지식을 가지고 있다. 토게인은 언제나 최고의 실험을 목표로 한다. ‘생명’과 관계된 것을 탐구하기 때문에 잔인무도하고 극악한 실험을 많이 하지만, 사람 실험체 중에는 진심으로 토게인을 따르는 전력도 많다. 토게인은 유용한 인재를 납치하여 실험하는 것보다는 지원자를 뽑는 쪽을 선호한다. 그들은 수많은 실험 경험을 통해 실험체의 마음가짐에 따라 실험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험체 중에는 그들을 극악무도한 구원자라고 부르는 이도 있다. 그들도 진심으로 따라와 주는 실험체는 자식처럼 아끼며 정을 준다. 그래서 토게인은 제법 단결력이 좋다.
토게인의 학자들은 안전과 자유로운 연구를 중요시한다. 에리카도 계약과 유용함에 근거해 그들의 목숨을 지켜 주고 있다.
이번에 이 장소에 온 토게인의 멤버는 셀가를 비롯해 뛰어난 실력을 지닌 학자 3명과 S랭크 이상의 귀중한 작품 100개체다. 토게인은 이번 목적을 위해 많은 무기와 트라던트 씨앗을 챙겼다. 그들의 주목적은 실험, 기록, 탐색, 탐지. 그것을 위해 에리카 측 기술과 유클라프 측 기술을 합쳐 몰래 숨어들어 온 팀이 두 팀 있다. 참고로 멤버 중에는 알카무라의 로봇이나 장군 시리즈도 포함되어 있다.
다행스럽게도 라이라와 알토를 통해 새블레의 정보를 필요한 만큼 확보할 수 있었다. 은신 탐색 팀을 제외한 나머지 팀은 목적을 위한 밑밥을 뿌리며 원 없이 무기를 시험하기 위해 날뛸 것이다.
‘자아, 시작해야지. 원동력이 될 물건도 한 개, 혹은 두 개나 있으니.’
에리카가 검은 거품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검은 구멍이 네모나게 조각나며 분열했다. 여기 있는 모두가 저 모습을 알고 있다.
“알토의 퍼즐!”
공간이 연결되었다고 해서 퍼즐의 번식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증식된 퍼즐은 호주에 퍼진 공간 회로의 증폭제가 되고 있다.
에리카의 퍼즐 탄환 역시 공간마법의 증폭제였다.
에리카가 총을 휘둘렀다. 그러자 검고 네모난 조각 퍼즐 안에서 새까만 창이 나타나 일행을 향해 흩뿌려졌다.
파지지직!
“라이트닝 체인!”
강인하의 명령을 듣고 나타난 빛의 사슬 무더기가 창을 분쇄했다. 그러나 창과 사슬이 닿은 순간 비처럼 뿌려지던 새까만 창이 폭발하며 블랙홀을 만들었다. 에리카가 블랙홀로 변한 공간마저 활활 불태우는 빛을 보며 흥미로운 듯 눈을 빛냈다.
“뛰어나고 강력한 ‘태양’. 좋은 힘이군. 하지만 지금은 필요하지 않아.”
에리카가 이번에는 블랙홀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두 번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블랙홀이 분산하며 흩어졌다. 블랙홀을 향해 검은 인형 수십 대가 빨려 들어갔다. 이번엔 윌리엄이 ‘무게마법’이 각인된 총을 겨눴다. 우주처럼 밀려오는 검은 덩어리들을 보며 에리카가 미소 지었다.
“역시 네 힘이 딱 좋아.”
에리카가 윌리엄의 마법을 향해 총구를 당긴 순간 에리카를 중심으로 ‘조합 영역’이 펼쳐졌다.
이 영역이야말로 에리카가 라 불리는 이유이며, 그가 가진 가장 성가신 기술이었다. 영역 경계에는 에리카 내지 마법에 민감한 사람만 보고 느낄 수 있는 테두리가 있고, 그 테두리 안쪽으로 다각형 고리 두 개가 초현실적으로 천천히 돌아가며 영역을 강화한다.
에리카의 조합 영역은 특수하여 웬만한 공격마법으로는 부술 수 없다. 허락받지 않은 자가 영역에 갇히면 그 사람은 시간 감각부터 둔해진다. 지난 북아메리카의 싸움에서 샐레나와 안토니오가 에리카를 찾아낸 족족이 그를 쓰러뜨리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 조합 영역 때문이었다.
윌리엄과 윌리엄의 마법이 그 조합 영역에 갇혔다. 윌리엄의 몸과 마법이 정지한다. 그 즉시 제레미와 강인하가 마법을 사용했고, 강인하의 마법이 먼저 도달했다. 강인하는 가면의 시야공유마법을 통해 조합 영역의 경계를 좀 더 확실하게 확인했다.
그러나 강인하와 제레미의 마법은 영역 안으로 파고들지 못했다. 조합 영역이 더 견고했기 때문이다. 강인하는 가면 너머로 조합마법의 약한 부분을 찾으면서 소속마법에 기감을 집중했다. 하지만 윌리엄에게 연결된 실은 고작해야 레미가 연결한 실이다. 에리카의 영역이 너무 견고한 것도 있어 실의 기척이 평소보다 더 느껴지지 않으니, 연결하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한편 SR의 보안과 부장 알리사는 도형마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도형으로 이루어진 에리카의 조합 영역을 볼 수 있었다. 더군다나 알리사는 미국에서 에리카와 여러 번 대면했던 만큼 저 조합 영역이 익숙하다. 그래서 알리사의 힘으로는 부술 수 없는 것도 안다. 하지만 약하게 만들 수는 있다.
알리사의 손에 마법봉이 나타났다. 크리스털 하트에 날개가 달린 아동만화에 나올법한 다소 유치한 마법봉이다. 알리사가 쥔 마법봉 주위로 다각형 링이 수십 개 생겨났다. 에리카를 향해 다각형 링이 날아갔다.
그러나 에리카는 그보다 빨리 마법을 조합했다. 윌리엄의 공간마법이 고스란히 블랙홀과 합쳐졌다.
“조합. 재구성.”
에리카의 목소리와 함께 주위로 흩어졌던 블랙홀이 에리카의 손 안으로 모여든다. 하나, 둘, 영역 위로 새로운 다각형 링이 펼쳐졌다. 남은 인형마저 거품이 되어 허공에 솟아올랐다. 알리사가 만든 도형이 에리카의 영역을 향해 다가선 바로 그때였다. 알리사가 만든 동그란 링이 정확히 조합 영역 경계선 코앞에서 멈췄다.
“여러분! 링을 통과해 공격해 주세요!”
“연결.”
강인하가 알리사의 마법을 자신의 마법에 연결하여 강화하며 공명했다. 알리사는 짜릿한 감각을 느끼며 도형으로 에리카의 영역을 직접 공격했다. 도형이 에리카의 링에 겹쳐지며 영역의 경계선이 아주 조금 흐릿해졌다. 마법사들이 링을 겨누었다.
“라이트닝 소드.”
“「타오르는 태양에, 빛에 소망을 담는다.」”
아르델의 언령을 따라 강인하의 빛이 더 뜨겁게 타오른다. 불의 언령을 따라 시온이 목소리를 내질렀다.
“「───!」”
시온의 음파는 보통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시온의 음파가 링이 옅어진 부분을 파고들어 흔들었다. 제레미의 옆으로 하얗고 거대한 총이 조립되었다.
휘둘러진 빛의 검이 가장 먼저 링을 통과하여 테두리를 꿰뚫었다. 다른 링 안으로 탄환과 새로운 도형이 꽂혔다.
“재조합.”
에리카의 목소리와 함께 영역 위로 보다 지름이 넓은 링이 두 개 생겨났다.
“추출, 정렬.”
에리카의 영역 안에서 모든 마법은 ‘재료’로 변한다. 샐레나의 마법도 그러했고, 안토니오의 마법도 그러했다. 조금 전 도형을 따라 에리카의 영역에 영향을 미쳤던 마법들이 모두 에리카 옆에 늘어선 네모난 스크린, ‘조합 창’ 안으로 빨려들었다.
허나 마법사들의 마법은 어찌되었거나 에리카의 영역을 한 번 흔들었다. 그리고 이곳에는 어쩌면 샐레나와 안토니오보다 특수한 힘을 지닌 마법사가 두 명 있다. 강인하와 아르델, 두 사람의 빛과 불꽃이 얽히며 또 한 번 링 안으로 내리꽂혔다. 이번에는 마법이 에리카의 영역 안을 파고들었다.
공간은 닫히지 않고, 가지는 계속 뻗어진다. 에리카의 뒤에서 뻗어진 트라던트 가지가 에리카를 감싸 안았다. 에리카가 읊조렸다.
“정지.”
강인하의 마법이 불완전하게 느려졌다. 에리카가 고개를 슥 움직여 빛을 피했다.
“포식.”
공중에서 나타난 커다란 철 상자의 문이 열렸다. 강인하와 아르델의 마법이 철 상자 안으로 사라졌다.
“분해.”
강인하의 실력은 이제 에리카와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재능으로 겨우겨우 어떻게든 맞붙을 수 있을 정도이며, 빛에 깃든 자연의 힘으로 격차를 더 메울 수 있다. 그래도 저곳은 에리카의 영역 안. 강인하의 마법이 느릿느릿 분해됐다.
““「연결」.””
강인하의 소속마법과 아르델의 언령이 합쳐졌다. 그러나 에리카의 ‘쓰레기통’ 안에서 강인하와 연결되어야 할 마법이 픽 꺼졌다.
“차단.”
에리카가 손을 휘두른 순간, 에리카를 중심으로 다각형 링이 커지며 새까만 바람이 휘몰아쳤다.
일행이 자리에서 버티지 못하고 뒤로 밀려났다. 처음부터 영역 안에 있던 윌리엄은 밀려나지 않았다. 밀려나지 ‘못’했다.
영역 안에서 윌리엄의 마력이 꾸역꾸역 빠져나와 결정으로 변했다. 모두 안색이 창백해졌다.
“윌리엄 씨!”
에리카를 둘러싼 트라던트 나무가 점점 커지고, 나무에서 나뭇잎이 생겨나며 꽃이 피었다. 강인하는 가면 너머로 트라던트의 색과 밀도를 확인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저 ‘나무’는 꿈의 그물과 이곳을 잇는 연결다리다. 구멍에서 시작된 나무가 이제 가지를 통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우선 윌리엄부터 구하자.’
“…쐐기.”
강인하는 칼날 달린 사슬을 에리카의 조합 영역에 박아 넣었다. 아까와는 달리 빛이 조합 영역에 금을 일으키며 파고들었다. 조금 전 마법사들이 조합 영역을 한 번 뒤흔든 덕분이다. 강인하가 오른팔을 옆으로 뻗었다.
“태양의 창이여.”
강인하가 한글로 마법 기술을 외울 때는 정령과 동화하거나 신물 ‘태양의 검’을 구현할 때다. 한가운데를 뚫는다면 검보다는 창이 좋다. 강인하가 가볍게 날아올랐다. 아르델이 강인하의 움직임에 맞춰 언령을 외웠다.
“「하늘의 불꽃이여, 날개가 되소서. 떨어지는 태양의 심판에는,」”
“──!”
“「한줌의 자비조차 없으니!」”
빛이 일직선으로 추락했다. 딱 빛이 지나간 자리만 꿰뚫렸다.
강인하의 몸이 에리카의 조합 영역 안으로 떨어졌다. 강인하는 윌리엄을 영역 바깥으로 밀어내고는 빛으로 몸을 감싸 육체와 마력의 둔화를 약화시키며 아직 힘이 남아 있는 창을 휘둘렀다. 에리카가 자신의 뒤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성장.”
이번에도 탄환이 쏘아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화악──!
에리카를 중심으로 새까만 폭풍이 휘몰아쳤다. 강인하는 온몸을 찌르는 것 같은 날카로운 감각을 피해 일행들 옆으로 돌아왔다.
“윌리엄, 정신 차리십시오!”
“헉……크윽…….”
휘몰아치던 폭풍이 이내 에리카를 중심으로 정지했다. 폭풍의 영향을 받고 트라던트 가지가 아까보다 훨씬 커졌다.에리카와 케르베로스 3형제는 보석으로 된 나뭇가지 위에 서 있었다. 강인하는 가면 너머로 마력을 확인하며 숨을 삼켰다.
나무뿌리를 통해 검은 마력이 순식간에 퍼지고 있다. 트라던트와 같은 검은색이지만 에리카의 코럴 색이 섞이며 힘이 증폭된다. 에리카의 손 위로 새까만 공간석이 떠올랐다.
“제법 잘 만들어졌군.”
바닥에서부터 몽글몽글한 검은 방울이 올라왔다. 검은 방울이 합쳐지며 아까 보았던 검은 인형, 겉이 코팅되어 내부 마력을 측정하기 어려운 검은 인형이 순식간에 불어났다.
“서로의 영지에 경계선이 그어지고 난 후 첫 번째 전면전이로군. 실험할 수 있는 건 다 실험해 봐야지 않겠어? 그러려면 요새는 필수 불가결하지.”
쩌저저저정!
레미가 마법을 펼쳤다. 에리카의 영역 바깥으로 이랜서가 무수히 많이 나타났다. 정화하는 분홍빛 수정을 훑어보며 에리카가 자신의 앞에 투명한 마법석을 소환했다.
쨍!
투명한 마법석을 중심으로 검은 덩어리가 생기는가 싶더니 덩어리 양 옆으로 사슬이 이어지며 사슬을 따라 검은 덩어리가 증식했다. 둥그렇게 이어진 사슬고리 사이사이에 동그란 마법 생물이 10마리. 네 개의 짧은 팔다리를 가지고 있고, 날기 어렵게 여겨질 정도로 작은 피막 날개를 두 개 지니고 있다. 사슬이 분리되며 마법 생물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조합 영역 외곽으로 달려간 마법 생물들이 레미의 수정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첫 번째 수정을 먹고 열 마리 중 세 마리가 죽었다. 5번째 수정을 먹었을 무렵에는 한 마리만 살아남았다. 마지막 한 마리에서 다시 열 마리의 짐승이 나타나 수정을 향해 달려든다.
“흠, 역시 유은하와 루카의 마법은 특수하군. 생각보다 효과가 낮아.”
그동안 마법사들은 열심히 검은 인형을 처리하고 있었다. 강인하가 태양의 창을 휘둘렀다. 많은 인형이 강인하의 창에 베여 쓰러졌으나, 반드시 한두 개 정도는 살아남아 다시 증식했다.
에리카의 앞에 5개의 새카만 보석이 떠올랐다. 에리카는 그 보석들을 향해 한 번씩 총을 발사했다.
그러자 바깥에서 응전하던 인형 중 수십 개체가 마법석을 향해 몰려들었다. 이윽고 마법석을 중심으로 검은 거신이 다섯 마리 탄생했다.
“에리카 님, 이제 싸워도 되나요?”
“그래, 좋아. 다만 강인하와 아르델의 마법만은 피하도록.”
“크릉.”
케르베로스가 작게 웃었다. 에리카는 창을 휘두르는 강인하를 보며 작게 코웃음 쳤다.
“내가 혼자라. 큰 착각이군. 이 구멍이 열려 있는 한 나는 혼자일 수가 없어. 유클라프는 당장 저 너머에서 움직이지 못하지만,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로도 너희들 정도는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
에리카가 자신의 뒤에 뚫린 커다란 구멍을 가리켰다.
“이 비틀림이 사라지지 않는 한 여기 있는 나의 힘은 고갈되지 않아.”
강인하가 이를 갈며 나뭇가지가 튀어나온 커다란 구멍을 살폈다. 가면의 힘을 조정해 보다 멀리, 보다 넓게 보았다. 공간 회로는 알토의 퍼즐과 공간이 합쳐진 부분을 따라 지금도 곳곳에 계속 생겨나고 있다. 그렇게 생겨난 공간 회로도 꿈의 그물과 새블레를 융합시킨 공간의 교차점에 합쳐지고 있다.
에리카 뒤로 펼쳐진 공간 회로는 마치 은하수 같았다. 눈에 보이는 구멍이 다가 아니었다. 공간 사이로 완전히 뚫리지 않고 보통 마법사에게는 보이지 않는 크고 작은 구멍들이 있으며, 그 주위를 안개 같은 마력이 감싸고 있다. 그 모습이 은하수를 닮았다.
“웬만하면……그래. 이번엔 웬만하면 길게 싸우고 싶다.”
문득 강인하의 얼굴 옆에 어딘가에서 증식되어 나타난 알토의 퍼즐이 스쳤다. 강인하는 창으로 조각을 찔러 태우며 이를 드러냈다.
“기분 더럽네….”
퍼즐 조각이 빛으로 이루어진 창날 아래에서 불타 재로 변했다.
화악─.
강인하의 몸에서 빛이 뿜어졌다. 레미의 꽃과 수정이 일행을 비호하며 강인하의 마법을 증폭했다. 아르델도 또 한 번 언령을 준비했다.
그러나 강인하가 움직이기도 전에 하늘에서 묵중한 소리가 들렸다.
콰앙─!
우주를 담은 커다란 공, 틀림없이 유은하의 마법이다.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공간 회로를 공격하는 마법이 평소와는 달리 공간을 정화하지 못하고 일그러진다.
하늘을 가르며 깊고 섬뜩한 심해가 추락했다. 심해는 똑바로 에리카가 만든 영역 위로 떨어졌다.
쿠구구구궁!
강인하가 안색을 굳혔다.
“부서지지 않다니.”
여태까지 강인하는 이성진의 공격을 아무런 피해 없이 받아 내는 상대를 별로 보지 못했다. 심지어는 그 벨라와 엘리시아조차 이성진에게는 한 방 얻어맞았다. 두 번 쓸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니 다시는 통하지 않겠지만…….
현재 이성진은 그때보다 훨씬 강해졌다. 전투능력만 본다면 연맹 전체에서 가장 강할 것이다.
‘완전히 막은 건 아냐. 반은 막았고, 반은…….’
강인하는 마력색을 구분하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이성진의 마법에 반응한 것처럼 에리카의 조합 영역 위로 새까만 사슬이 생겨나 있었다. 이성진의 힘은 종말, 그것이 어떤 것이라고 한들 ‘죽인다’. 생물도, 물건도, 마법도, 공간도, 시간도, 영혼도, 정신도.
그런 이성진의 힘을 막은 검은 사슬, 강인하는 섬뜩한 느낌에 팔뚝을 쓸었다. ‘벨라’의 마법이다. 그러나 벨라가 사용한 마법이 아니기에 반밖에 못 막았다. 나머지 반은 에리카가 만든 네모난 카드 같은 것에 빨려들었다. 제레미가 별꽃을 향해 물었다.
“레미 씨, 저게 무엇인지 알겠습니까?”
「사슬은 벨라 트리저의 마법과 유클라프의 마법을 융합한 무기입니다. 카드는 라이라 님의 마법과 포츈의 마법을 융합한 무기입니다. ‘저주’ 부류 입니다.」
“저주?”
마력을 모으던 강인하의 눈이 시리게 빛났다.
“그 녀석한테 저주가 통한다고?”
포츈 역시 저주의 대가(大家)다. 이성진의 마법이 ‘거울’ 카드 안에 빨려 들어갔다.
“다행히 이건 통했군.”
에리카가 심해의 마법을 하늘로 되받아쳤다. 저주를 불어넣은 되받아치기. 저주에서 흔히 알려진 기술이나, 보통 저주를 건 상대보다 강한 힘과 의지가 있지 않고서야 해내기 힘든 기술이다.
마법이 이성진에게 되돌아갔다. 그러나 이성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저주를 똑같이 저주로 되받아쳤다.
에리카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에리카는 다시 한번 이성진의 마법 반을 사슬로 분해하고, 나머지 반은 카드로 흡수하여 보관고 안에 집어넣었다.
“소멸의 태양.”
강인하가 아래로 겨눈 창이 은청색 불꽃을 일으키며 강인하의 주위에 녹아들었다. 소멸의 은청색. 강인하를 중심으로 커져간 에펠로나의 태양이 천지를 뒤덮었다.
“윽…!”
마법에서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마력과 열기, 더불어 알 수 없는 미지의 위압감에 태양의 안에서 가호를 받고 있는 아군마저 숨이 막히고 몸이 떨렸다.
“윽……. 「먼 우주, 이계에서 찾아온 태양은……원하는 모든 것을 기필코 태워 버리리라.」”
“태워 버려, 에펠로나.”
강인하의 손짓과 함께 태양이 날아갔다. 커다란 태양 바깥으로 은푸른 불꽃이 휘몰아쳤다.
에리카는 이성진의 공격보다 강인하의 공격에 더 타격을 받았다. 소멸의 은청색은 에리카를 넘어 트라던트와 가까이에 잠복해 있는 공간 회로마저 태워 녹여 버렸다. 태워 녹였음에도 상처가 아물듯이 공간이 메워졌다. 드문드문 빛이 튕겨 나갔다.
강인하는 태양의 힘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태양의 영역이 점점 넓어졌다. 그러나 영역은 오래가지 않았다. 에리카가 총의 탄창을 교체한 순간, 태양에 무수히 많은 공간이 뚫리며 잡아먹혔다.
쾅!
그 위로 새까만 거신의 창이 내리꽂혔다. 강인하를 제외한 일행이 조급한 기색으로 검은 거신, 혹은 에리카를 노려보았다.
강인하가 아직 제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푸른 태양의 빛을 휘두르려 했을 때, 이성진이 거신 위로 파도와 함께 떨어져 내렸다.
이성진은 거신 위에 직접 검을 꽂아 넣었다. 대부분의 마법은 그것만으로도 존재성을 잃고 흐트러졌을 것이다. 그러나 거신은 약간 흔들릴 뿐 바로 죽지 않았다.
이성진은 검을 더 찔러 넣어 거신을 베려다 말고 멈칫했다. 그러고는 얌전히 검을 뽑아 강인하의 옆으로 돌아왔다. 강인하가 의문을 표했다.
“왜 안 부쉈어?”
“……과연 미치광이 학자라고 해야 할까.”
이성진이 혀를 찼다. 에리카가 흥미롭다는 눈으로 웃었다.
“흐음. 바로 눈치채다니 나야말로 과연 사신이라 감탄해야겠군.”
“설명.”
강인하가 이성진을 재촉했다.
“강인하, 너 저 괴물 소멸시켰냐?”
“소멸?”
단순히 ‘쓰러뜨렸냐’는 의미는 아닌 듯했다. 생각에 잠긴 강인하를 대신해 레미가 대답했다.
「아니요. 소멸시키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인형으로 공간의 힘이 순환되었습니다.」
“윌리엄, 봤나?”
이성진이 거신 안에 검을 찔러 넣었을 때, 거신이 진정으로 타격을 받을 뻔했을 때……. 윌리엄이 창백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소리입니까? 무얼 본 건가요?”
제레미가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윌리엄이 거신을 노려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공간이……연결되어 있어.”
이성진이 검으로 거신을 베려고 했을 때, 공간 회로가 부자연스럽게 일렁거리며 출렁거렸다. 그냥 공간 회로가 아니라 알 수 없게 비틀어진 하늘의 공간이, 새블레와 꿈의 그물 사이에 있는 다양한 차원을 고정하고 있는 공간이 반응했다. 거신을 벤 순간 함께 베어질 것처럼. 이성진이 거신을 노려보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약간 슬라임과 닮았어.”
슬라임, 한때 아프리카 우림을 전부 먹어 치운 장군 시리즈 드라이어드의 진화 전 모습이다.
“겉으로 힘이 드러나지 않는 점이?”
“마력이나 마법을 흡수하는 점도 그렇지.”
이성진의 시선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이성진이 검으로 거신을 가리켰다.
“그리고 저 거신의 몸은……그래, 층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표피는 현실에 접해 있어 마력을 받아들이거나 튕겨내고, 안쪽은 다양한 공간이 섞여 있는데……층을 열어 마력을 보관하거나 연결된 공간으로 보내 버리기도 하고, 연결된 공간에서 힘을 끌어오기도 해. 그리고 아주 깊숙한 곳에 핵 같은 무언가가 있는 것 같은데, 이건 잘 모르겠네.”
휘둘러진 검격이 다시 한번 에리카의 영역을 베었다. 에리카와 주위에 빼곡히 늘어선 새까만 인형들을. 인형 병사들은 이성진의 검에도 무너지지 않았고, 사라지지 않았다. 공격을 막아 낸 것은 이번에도 벨라의 사슬이었다. 벨라와 이성진의 힘은 약간 닮았다. 에리카가 조합한 벨라의 사슬은 어느새 이성진의 마력에 아주 조금, 약간이나마 익숙해졌다. 트라던트가 새겨진 저것은 유은하가 만든 무기만큼은 아니더라도 적의 마법에 맞춰 ‘성장하는 무기’다. 강인하는 평소처럼 냉정한 이성진의 눈빛에서 곤란한 감정을 읽었다.
“…왜 그래?”
“난감해서.”
“……!”
강인하는 흠칫했다. 전투 중 이성진이 이런 말을 하는 일은 아주 드물다. 거기다 상대는 결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적’이 아니다.
“거신들이 다른 공간과 연결되어 있다고 했지? 저 거신들과 연결된 건 유클라프가 비틀어 버린 공간. 즉, 중동, 북아메리카, 새블레와 연결되어 있는, 하늘을 뒤덮은 은하수 회로야. 그냥 연결된 것도 아니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여기 있는 인형과 거신은 저 은하수 회로에서 비롯된 실체를 가진 분신이야. 거신을 소멸시킨다는 건 은하수 회로를 여기에서 더 비튼다는 뜻…….”
“…….”
“저 거신을 평소처럼 베었다간 새블레의 결계는 물론 ‘차원’이 균형을 잃는다.”
「…….」
레미와 연결된 통신에 노이즈가 들렸다. 생각도 못 했던 말인 듯 무척 당황한, 혹은 곤혹스러운 기색이었다.
「질문드립니다. 차원이 균형을 잃는다는 건 어떤 의미입니까?」
“뭐라고 해야 할까, 지금 중동, 꿈의 그물, 새블레의 공간이 융합된 건 알겠지? 은하수 회로는 이미 ‘세계’ 차원에서 비틀려 있어. 내가 아까 말한 ‘차원’은 우리가 사는 ‘세계’야. 세계가 균형을 잃는다는 건, 우리가 있는 세상, 그 모든 공간이 원래의 법칙을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질 거라는 소리야. 자칫 잘못하면 우리가 살던 세상의 일부가 소멸되겠지.”
「아직 감이 잘 잡히지 않습니다만……이해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런데 공간이, 세상이? 소멸할 수 있는 겁니까? 무너진 공간도 결국에는 복구되지 않습니까?」
“있고말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언젠가 소멸돼. 차원이 소멸한다는 건 공간이 복구되는 자연적인 힘조차 기능할 수 없도록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는 걸 의미한다.”
이어 윌리엄도 두려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세상이란 게 완전히 소멸할 수도 있는 모양입니다. 저도 인식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만…….”
윌리엄은 공간 전문 마법사. 누구보다도 공간을 잘 느낀다. 윌리엄이 공간을 파악하려 하면 경계선과 흐름을 따라 공간이 공감각적인 형상으로 떠오른다고 한다.
“우리는 ‘세계’라는 공간, 차원 안에 존재합니다. 세계를 이루는 복잡하며 광대한 틀은 언제나 원래의 형상과 법칙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 힘은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공간과 시간을 조종한다 한들 어떻게든 흐름을 유지합니다. 그 흐름이 무너지면 세계는 균형을 잃고 기울어지며, 공간의 힘이 범람하게 됩니다. 범람이 시작되면 당연히 인접한 공간에도 크게 영향이 갑니다. 지구 하나쯤은 간단히…….”
윌리엄이 그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삼켰다. 다른 이들도 진중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이곳에 있는 자들은 모두 수많은 전투와 마법을 경험한 최상위 마법사다. 그러한 일은 공간 관련이 아니더라도 제법 많이 일어난다. 마법사들은 경험을 통해 제 나름대로 윌리엄의 이야기를 이해했다.
넓은 세계, 우주에서 보면 지구 따윈 먼지 조각에 불과하다. 공간이 범람하면 지구 하나쯤은 가볍게 삼켜진다는 것인가.
“……그런데 유클라프의 마법은 세계를 이루는 ‘기본 틀’을 비틀고 있습니다. 그것도 세계가 붕괴되지 않는 형태로.”
초월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볼 때 기적이라고 말할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지만, 마법에는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한다. 아니, 벽이 아니다. 불가능한 일이다. 결코 불가능한 일. 그 불가능함이 가능해진다면 그건 기적이 아니라 재앙이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신성하고 기쁜 일이 될지라도 예외는 없다.
비틀 수 없는 어떠한 흐름, 그것은 세계를 유지하는 당연한 법칙이다.
삶과 죽음, 흘러가는 시간, 세계를 이루는 틀. 모든 것에는 수명이 있다. 마법도, 물건도,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노쇠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언젠가 무너지고, 별은 빛을 전부 불태운 후 사라진다.
트라베리아가 하려는 것은 바로 그러한 흐름을 무너뜨리는 짓이다.
꿈과 현실의 경계를 일그러뜨린 데 그치지 않고, 세계의 틀을 비틀기 시작했다. 재앙이 시작되었다. 사람의 삶에 그치지 않는, ‘세계’를 건 재앙이.
강인하의 안에서 에펠로나가 벌벌 떨었다. 덕분에 강인하는 머리보다 먼저 감정으로 그 위험성을 직감할 수 있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아주 위험하다는 건 알겠어요. 그럼 저 검은 인형은 건드리면 안 되는 거야?”
이성진이 강인하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그냥 건드려. 보통 마법으로는 건드려도 소멸시킬 수 없어. 특수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해도, 유클라프를 뛰어 넘을 정도가 아니면 무리야.”
강인하가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강인하는 특수하고 강하다. 그러나 유은하와 이성진 처럼 거대한 실력차를 뒤엎어 버릴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그럭저럭 보이기도 하고, 웬만해서는 내가 잘 조정해서 거신을 소멸시키고 싶지만…….”
“후…….”
이성진이 곤란한 눈으로 에리카를 흘겼다. 검은 인형들을 출격시키지 않고 그들의 대화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 주던 에리카가 미소 지었다. 비웃음이 아닌 즐거움과 흥미로움에서 우러난 미소였다. 바로 달려들려던 케르베로스 형제도 에리카의 감정을 의식하고 눈치를 보며 대기하는 중이었다.
“역시 바로 눈치채는군.”
에리카가 손바닥을 앞으로 드러내며 아까 전 이성진의 힘을 흡수했던 카드를 보여 줬다. ‘거울’의 힘을 지니고 있는 카드는 빛 한 점 반사하지 않았다. 이성진이 이를 갈았다.
“포츈의 저주, 완전히 상쇄할 수 없을 것 같아.”
“뭐?”
강인하가 눈을 크게 떴다. 커븐 로드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마법사, 포츈 베어는 점술과 저주를 전문으로 다루는 마법사다. 여왕 엘리시아를 비롯하여 트라베리아 출신 마법사의 스승답게 유클라프 다음가는 실력자로 꼽히고 있다.
실력만 따지고 보면 당연히 지금의 이성진보다 강하다. 허나 이성진의 힘이 특수하니 만큼 아무리 포츈이라 해도 저주를 걸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성진의 특수성은 특히 저주에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아무래도 당장은 해지하지 못할 것 같아. 저 안에 내 마력이 갇혀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힘은 제한될 거야. 적어도 정교하게 힘을 제어하는 건 무리야.”
“당장은……이라. 그럼 깨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사흘……. 아니다, 이틀.”
“악! 미치겠네!”
옆에서 아르델이 머리를 에워쌌다. 즉 이번 싸움에 한해서는, 저 거신과 에리카에 한해서는 이성진의 특수성이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