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464
“폭풍의 보석, 개방.”
단검에 새겨져 있던 보석이 힘을 ‘개방’했다. 이소영의 주위를 감도는 폭풍이 더 날카로워졌다.
알토가 키득 웃었다. 맞다. 이제 멸망의 편린 정도로는 이소영의 기감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 거울, 가호, 퍼즐로 모습을 숨겨도 이소영의 기감이, 환각 아이템이, 가면에 걸린 시야공유마법이 알토를 쫓는다.
“솟아올라라.”
폭풍을 따라 대지가 깨지며 중력장이 솟아오른다. 폭풍의 압력이 깊어졌다. 그러나 알토는 이미 폭풍 속에 없었다.
“거울…….”
“멀리 흩어줘서 고마워.”
흩어졌던 안개는 사실 작은 돌조각 무리였다. 돌조각이 커지며 거울로 변했다. 순식간에 그들 주위를 검푸른 거울 무리가 둘러쌌다. 알토의 곁에 있던 거울과 테온 가까이에 있던 거울이 날아와 맞부딪치더니 새까만 공으로 변했다. 강력한 중력을 흩뿌리는 공. 이소영이 가면을 통해 색을 확인하고는 기겁했다.
“유클라…!”
“그렇게 강한 건 전부 부서질까 겁나서 여기선 못 쓰지! 나름대로 가공한 거야!”
공이 무시무시한 중력을 뿌리며 폭발했다. 알토는 거울 반과 악마 반을 두 사람을 방해하는 용으로 남기고 나머지와 함께 멀리 날았다. 알토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거울과 악마가 드넓은 공간을 파악하며 빠르게 알토에게 정보를 제공했다.
알토는 정보를 따라 움직이며 여러 물건을 삼켰다. 반짝이는 보석, 허공을 떠다니는 책, 혹은 책이 빼곡히 꽂힌 책꽂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과 희미한 안개.
이곳은 중심으로 향하는 마지막 페이지답게 복잡했다. 이 안에 있는 책들은 적어도 전부 실체를 지닌 물건이다. 마법인 것도 있고, 아이템이 형태를 바꾼 것도 있고, 힘을 지닌 책도 있다.
알토의 거울 눈이 이 장소의 실체를 꿰뚫어 봤다. 페이지와 페이지가 무수히 얽혀 있다. 공간을 뚫는다 쳐도 알맞은 곳을 뚫어야 한다. 아무렇게나 공간마법을 사용해서 페이지를 부쉈다간 기록서가 휘말리거나, 기록서가 보관서에서 쏙 빠져나갈 위험성이 있다. 적어도 아까처럼 페이지를 뚫는 짓은 결코 못하리라.
‘그런데 여기, 루키아가 만들었다기에는 좁고 단조로운걸.’
루키아는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누구보다 세계의 미지를 확인하는 일에 힘썼다. 가장 먼저 우주에 도달한 마법사도 루키아다.
‘하인리히가 가공했는데도 이 정도 수준에 머문다는 건……원래 이것보다 낮은 난이도로 만들어졌다는 거겠지. 하지만 난이도에 비해 세계의 구성이 정밀해. 그걸 포함해도 루키아가 만들었다기엔 좀 약하지만.’
페이지마다 있는 세계는 루키아의 기록서에서 흘러나온 파편일까?
알토는 머지않아 그럴듯한 이유를 추론했다. 이 세상은 루키아가 하인리히에게 남긴 것이다. 아마 하인리히가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게끔 만든 훈련용 세계가 아닐까. 그래서 구조는 단단한데 시련은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은 거다.
‘루키아가 제자에게 남긴 책이라. 그럼 기록서도 그런 용도이려나? 제자를 위해, 성장시키기 위해 남긴 기록서라. 역시 흥미 깊어. 기록서를 보호하는 이 보관서도 아마 세트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에 하인리히 이외의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건 아니란 말이지. 어쩌면 둘 다 제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 공간에 흥미를 가진 모든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건가?’
그동안에도 알토의 거울은 증식하거나 부서지고 있었다. 거울이 산산조각 나는 광경이 거울을 통해 알토의 시야 안에 선명히 되살아났다. 무수히 많은 깃털과 바람의 검, 보석, 솟아오르는 용암 비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거울 무리를 깨부순다. 이번에 만든 거울도 꽤 오랫동안 거울 안에 있던 조각들이다. 쉽게 부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힘겨운 것도 아닌 듯했다. 이 장소의 가호를 받으며 빠른 속도로 알토를 뒤쫓고 있다.
알토는 거울로 ‘출구’일 지도 모르는 것들을 삼키며 거울로 이소영과 테온의 상황을 엿봤다. 이소영은 바람을 통해 거울의 강약을 판단하고 비교적 약한 거울은 원거리에서, 강한 거울은 단검으로 직접 깨부수고 있다. 거울이 빠르게 움직이며 이소영 일행을 막는다. 거울이 합쳐지고, 교감하여 방어벽을 만든다. 이소영 일행이 깨부순다. 하나, 둘, 셋…….
‘이야. 깨닫고 나니 정말 무시무시하네. 처음엔 부수지 못했던 거울을 공격 10번 안에 금이 가게 만들고, 20번 안에 갈라버리니. 오, 이번엔 9번? 잠깐, 거울 두세 개 부술 때마다 공격 숫자가 하나씩 줄어드네? 진짜 미친 거 아냐?’
이어 알토는 테온의 기척이 아까에 비해 선명해진 것을 알았다. 거울 사이로 테온을 이루는 퍼즐 조각이 좀 더 모인다. 알토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저 녀석, 알고 보니 셰린 세비어랑 비슷한 타입이었잖아?’
중력과 불꽃을 이용한 대지마법, 온갖 환경을 구현하는 환경마법, 마력으로 마력을 분쇄하는 분해마법. 마법 특성과 이름만 보면 파괴적인 마법을 사용할 것 같은데 그렇지만도 않다. 파괴적인 것은 맞으나 거기에 더해 서포트에도 탁월하다.
그에게 있어 대지와 환경은 그가 만드는 마법과 자연뿐만 아니라 적의 힘과 마법, 더해서는 파트너의 마법이다. 즉 테온은 파트너의 실력과 향상 속도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파트너가 강할수록 그가 만드는 환경은 강해지고, 파트너가 옆에서 성장하면 그의 힘도 파트너에게 이끌려 성장한다.
혼자서는 흐릿한 행성. 그의 마법은 반드시 누군가와 함께 싸우는 걸 전제로 존재한다.
“세상에. 이제 보니 완전 사기 페어 아냐!”
알토는 그만 기가 막혔다. 시련이 없어도 꾸준히 강해지는 마법사에 적과 파트너에게 이끌려 성장하는 마법사가 팀이라니.
“역시 몸으로 직접 부딪쳐야만 알 수 있는 것도 있는 법이라니까.”
이 역시 바로 눈치채기는 어렵다. 오랜 시간 싸우며 이소영이 강해진 정도를 확실하게 구분했기에 알 수 있었다.
“별무리도 특수한 감지능력을 썩히지 않고 동료를 잘 보고 있는 모양이야. 저거라면 웬만큼 강한 마법사도 결국에는 이기겠어. 와, 진짜 사기다.”
그때 알토는 이소영 일행이 있는 곳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거울이 깨진 것을 느끼고 멈칫했다. 허공에서 나타난 보석으로 이루어진 용이 알토의 거울을 부수고 있었다. 공간에 본래부터 존재하던 가디언이다.
알토는 거울을 조종하며 조금 버거움을 느꼈다. 이곳에 있는 물건은 대부분 알토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때문에 알토는 거울로 비추는 것으로는 정체를 확인할 수 없는 것만 삼키고, 삼키고 나서도 책을 자극하지 않도록 스캔만 하고 뱉고 있다. 끝까지 알토에게 저항할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완전히 삼켜 흡수한다. 여러모로 피로한 작업이었다.
다음 문을 찾는 한편으로 알토는 이소영과 테온의 행동을 주시했다. 두 사람은 다음 통로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한편, 이소영과 테온은 예상대로 출구와 다음 통로가 어디인지 예측하고 있었다. 이 장소는 이전 페이지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무엇보다 조금 전과는 달리 책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정보가 정확하지 않다. 이소영과 테온은 가면의 시야공유마법을 사용하여 세계를 파악했다.
이 공간은 다음 통로는 여전히 하나뿐인데 출구는 다섯 개나 된다. 다음 통로는 고정되어 있지만 출구는 고정되어 있지 않아 계속 움직인다. 더군다나 둘 다 정확한 장소는 알 수 없고 대강 위치가 표시될 뿐이다.
“저 자식 진짜 잘 도망가네!”
“이번엔 출구로 몰아넣기가 제법 어렵겠군요. 5개가 있어서 그나마 낫긴 하지만, 이렇게 넓어서야.”
이소영은 시야와 마법을 일그러뜨리는 거울을 부수며 반짝이는 물건을 하나 둘 집어 들었다. 반짝인다는 건 자신을 사용하라는 의미다. 이런 물건들은 손에 드는 순간 무슨 효과를 지녔는지 알 수 있다. 이소영은 책을 열자 나온 금빛 모래를 바람에 둘러 거울을 향해 내리쳤다. 가까이에 있던 거울이 산산조각 났다. 남은 거울 가루는 바람이 산산이 분해해 삼켰다.
“몰아넣기는 어렵겠지. 직접 던져 넣어야지.”
‘통로’는 전부 어떤 물건이다. 이건 공간이 그들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니 틀림없다. 이소영은 단검 하나를 꺼내 테온의 손에 건넸다.
“둘로 갈라지자. 알토는 내가 쫓을게. 너는 출구를 찾아 단검으로 표시해. 그럼 내가 알토의 틈을 노리고 출구를 소환할게.”
“가능하겠습니까?”
테온이 조금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페이지 안의 공간은 고정되어 있어 공간 이동을 하기 어렵다. 알토처럼 매개를 이용해 하는 단거리 이동 정도만 가능하다. 특히 고정되어 있는 통로를 움직이는 건 무척 어렵다.
“글쎄다. 해 보지 않으면 모를 것 같은데? 아님 알토를 데리고 너희를 향해 역소환하지, 뭐. 이건 가디언의 권한을 사용하면 반드시 가능할 거야. 그러니까 너는 출구만 찾아줘. 그 전에 내가 알토를 쓰러뜨릴 수도 있고.”
드물게도 테온이 웃었다.
“오늘은 왠지 컨디션이 좋습니다.”
“나도 그래. 한 명과 싸우면서 이렇게 질질 끄는 건 처음이라 짜증나는데, 평소보다 마법이 잘 따라오는 것 같아.”
“알겠습니다. 늦기 전에 빨리 출구를 찾아 신호를 보내겠습니다.”
“알토가 나타나도 날 불러.”
“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는 테온이 더 강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소영이 훨씬 더 강하다. 테온도 새벽별무리와 함께하며 많이 성장했으나, 이소영만큼은 아니다.
테온이 책의 부름을 통해 느껴지는 제일 가까운 출구를 향해 달려갔다. 이소영은 단검을 허리에 꽂아 넣고 주위를 슥 훑었다.
“후읍.”
이소영의 몸이 살짝 흐려지며 갈은색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일정한 간격으로 퍼져 있는 거울이 환상을 반사하며 이소영이 가는 곳마다 가로막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안의 바람은 마법을 통과한다. 알토의 마법이 특수한 탓에 지금까진 못했지만, 이제는 통과할 수 있다.
이소영은 바람의 기척과 보관서의 가호, 시야공유마법을 통해 알토의 흔적을 쫓았다. 이소영의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까지 길어졌다. 이안 및 요정과 동화했을 때, 동화가 깊어졌을 때,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안이 이소영의 머리카락을 하나로 올려 묶었다.
이소영은 요정 갑옷의 상태를 한 번 확인하고 자리를 박찼다. 이소영의 등에 달린 이안의 날개가 이소영을 이끌었다. 이소영은 거울 모퉁이를 발로 박차 또 한 번 도약했다. 발판이 되었던 거울이 산산조각 났다.
“짜증나는 거울들! 다 부서져 버려라!”
이소영은 날아다니며 발이 닿는 곳마다 거울을 작살내고, 앞을 가로막는 거울은 갑옷으로 둘러싸인 주먹을 휘둘러 산산조각 냈다. 바람이 퍼지며 남은 거울 조각을 부스러뜨렸다. 거울 조각이 붙어 다시 재생하는 일은 없었다. 알토의 원거리 제어력보다 이소영의 바람이 지닌 풍화능력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역시 난 주먹이 제일 편해!”
거울을 통해 이동하는 알토의 속도도 제법 빠르지만, 속도만 따지고 보면 바람이 훨씬 빠르다. 마침내 이소영은 알토를 가로막았다.
촤악!
이소영의 허리에서 빠져나온 단검이 바람의 가호를 두르고 날아가 알토의 앞에 꽂혔다. 이소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슬아슬했다~!”
알토는 벌써 다음 문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이소영은 곧바로 알토를 직접 가로막기 위해 날았다. 알토가 이소영에에게 악마 몇 마리와 큐브 모양의 거대한 퍼즐을 보냈다. 악마는 계속 데리고 있던 멸망의 악마고, 큐브는 물질을 통과하여 파고드는 구속용 퍼즐이다. 사람이나 벽 등에 파고들어 마력과 공간과 물질을 굽힌다. 다만 굽히는 원리는 오로지 공간 왜곡 하나다.
“소환! 주민희의 무속성 탄환!”
이소영의 소환마법은 정보를 자세히 말할수록 강해진다. 무수히 쏘아진 탄환이 악마의 구성을 파괴했고, 큐브의 힘을 무효화하며 비틀었다. 힘과 힘이 부딪치며 큐브에 살짝 금이 갔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소환! 폭풍의 블랙홀!”
이소영은 주먹을 휘둘러 큐브를 깨트리고, 주먹에서 비롯된 폭풍에 바람의 칼날을 섞어 악마들까지 부쉈다. 그러나 그 사이 알토는 이소영이 던진 단검을 넘어서고 있었다. 깃털 탄환이 알토를 저격했다. 악마 혹은 알토의 퍼즐이 탄환을 막는다.
‘보자. 남은 악마는 이제 10마리…….’
이소영이 손을 뻗는 순간 바람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알토와 악마를 베거나 밀어냈다. 이소영이 바닥에 꽂힌 단검을 향해 명령했다.
“소환! 창공의 보석! 소환! 그림자 거울!”
이소영의 전투복과 요정의 보석은 어느새 제 빛을 되찾은 상태였다. 단검 위로는 보석이, 아래로는 그림자가 요동치며 주위를 비췄다.
“바람의 미로!”
창공의 보석이 깨지며 폭풍으로 이루어진 미로가 나타났다. 거센 바람 속에서 알토는 양 검지와 엄지를 교차해 긴 사각형을 만들었다. 그러자 알토 곁에 남아 있던 악마와 가까이에 있던 거울 조각이 모여 공간에 커다란 거울이 생겨났다. 거울 안에 단검과 폭풍이 갇혔다. 갇힌 단검과 폭풍 위로 이번에는 액자가 만들어졌다. 한 번에 부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잠깐 동안 억누를 수는 있다. 알토의 뒤로 새카만 금속 창이 수백 개 생겨났다. 전부 멸망의 힘을 가진 창이다.
날아오는 창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림자로 상황을 살핀 이소영은 갇힌 폭풍에 단검을 한 자루 던져 넣었다.
“소환!!!”
그 말 한마디에 바람이 액자를 뚫었다. 폭풍이 알토를 덮쳤다. 알토가 퍼즐로 바람이 저를 직접 찌르는 걸 막아 내며 무심코 헛웃음을 삼켰다.
‘진짜 간단히 부숴 버리네.’
알토는 퍼즐로 방어를 보강하며 재빨리 바람의 미로를 살폈다. 바람이 얽히고 얽힌 탓에 잘 보이지 않았다. 강한 바람줄기와 약한 바람 줄기를 어지럽게 얽혀서 만든, 실로 미로에 걸맞은 폭풍이다. 알토가 미로에 갇힌 틈을 타 이소영이 등을 돌려 날았다.
‘하지만 아직은 내가 좀 더 강해.’
알토는 거울 안에서 바람을 상대하기에 걸맞은 도구를 구상했다. 바람과 공간을 먹는 늑대와 바람을 삼키며 폭발하는 박쥐. 늑대와 박쥐에 이어 거울 조각이 바람을 갈가리 분해하며 쏘아졌다.
이소영은 날아가다 말고 팔을 휘둘러 방벽을 펼쳤다. 거울조각을 깃털과 손, 검으로 튕겨내고, 이안의 분신인 바람 매가 늑대를 향해 발톱을 휘둘렀으며, 폭발하는 박쥐는 바람으로 상쇄한다. 이소영은 오래 버티지 않고 뒤로 빠르게 물러났다. 박쥐가 이소영을 쫓아왔다.
“윽!”
알토의 기술에서 흘러나온 멸망의 힘이 폭풍에 파고들었다. 이소영은 몸을 바람으로 흩어 멸망의 힘을 최대한 피했다.
폭풍의 미로는 아직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이소영은 폭풍과 관련된 요정의 보석을 마구 마구 뿌렸다. 알토의 거울에서 이번엔 커다란 액자 틀이 나왔다.
“소환! 최인성의 그림자 벽!”
솟아오른 그림자 벽은 상대의 사념과 마법을 제 몸에 비추고 그 모습대로 마법을 반사한다. 알토는 액자 너머에 퍼즐 조각을 뿌려 그림자 벽에 비춘 그림자가 액자를 완벽하게 비추지 못하게끔 했다. 액자가 꼭 이소영에게 닿을 필요는 없다. 지금 거리에서도 알토에게는 이소영이 액자에 갇힌 것처럼 보인다.
알토는 한쪽 눈을 감고 눈의 거리감을 애매하게 만들어 망치를 허공에 내질렀다.
“레미의 별꽃!”
아슬아슬하게 대가 대상 마법을 소환했으나 이 역시 완벽하지 않았다. 이소영의 어깨에서 마력이 터지며 바람이 뭉그러졌다.
“후우…….”
알토는 액자 안에 이소영을 위협하는 조각을 끼워 넣었다. 이소영이 이를 사리물며 단검을 던졌다.
“소환! 세리(하늘)! 유은하의 별 조각!”
공허가 열리며 폭풍이 쏟아졌다. 하늘의 보석이 액자를 가리고 있던 퍼즐을 부수고, 꿈의 힘을 담은 별 조각이 사념 저주에 가까운 이안의 액자에 파고들었다. 별이 파고든 틈 사이로 폭풍까지 스며들자 액자가 산산이 부서졌다.
알토가 조각난 액자 파편을 몇 개 가공해 이소영을 향해 날려 보냈다. 액자 조각이 이소영의 영역을 침범하고, 이소영은 바람을 통해, 혹은 마법을 소환해 액자 조각을 부쉈다.
이소영은 일정 거리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알토는 힘껏 이소영에게 가까워졌다. 이소영이 또 한 번 넓게 방벽을 쳤다. 이소영의 등 뒤에는 커다란 책꽂이와 책, 책상, 의자, 티세트가 있었다. 그 옆에는 금으로 장식된 커다란 창문인지 옷장인지가 있는데, 통로와는 무관해 보였다.
“다음 문은 거기구나?”
“거기? 뭘 말하는 거야?”
“에이, 알면서.”
“알기는 개뿔이.”
이소영은 싱긋 웃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곤란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지키고 서 있는 물건 중에 다음 문이 있는 건 틀림없는데, 저 중 어느 것인지 알 수 없었다.그러한 사정은 알토도 마찬가지였다. 알토 역시 저 중에 문이 있다는 건 느꼈으나 정확히 어느 물건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소영은 내심 식은땀을 흘렸다.
‘일단 저 장롱은 아니고. 티세트도……아니고. 책꽂이에 있는 것 중 하나야.’
‘하인리히랑 루키아의 공간이니 책이려나?’
‘아직 단검에 출구가 연결된 기척은 없고……. 테온 걔 내가 소환하기 전에 출구를 찾을 수 있으려나? 나랑 비슷한 상황인 거 아냐?’
이소영은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다음 문은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아. 그렇다면 싸우면서 움직이지 않는, 움직일 수 없는 물건을 찾을 수밖에. 아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 이번에야 말로 도망가지 못하게 막으면서.’
이소영이 차가운 눈으로 알토를 노려보았다.
‘알토를 이 자리에서 쓰러뜨리면 돼.’
알토가 이소영을 파악했듯이, 이소영도 알토를 파악했다. 당장 저를 죽일 생각이 없는 자를 앞에 두고 이기지 못하리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하지만 문을 지키면서 싸우려면 이 모습으로는 부족해. 알토에게 많이 파악당하기도 했고.’
적어도 다시 한번 망치로 액자를 분쇄할 만큼은 파악했을 것이다. 이소영은 바람을 벽을 친 채 읊조렸다.
“얘들아, 분단하자.”
바람 소리와 함께 이안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테온이 있을 때는 그가 방어를 맡아 주기에 공격에만 집중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혼자 둘 다 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 숫자를 나누고, 요정 개개인과 정령의 힘을 새롭게 강화한다. 또한 이것은 알토가 본 적 없는 새로운 형태다. 인간이 아닌 마법이 정령과 동화하는 기술. 다만 익숙하지 않아 초반에 소모하는 마력이 크다.
이안이 대답한 즉시 이소영의 모습이 변했다. 세리(하늘)만 남기고 요정들이 무기화를 풀었다. 날갯죽지를 감싸는 갑옷에 박혀 있던 세리의 보석이 가슴으로 옮겨오며 세리의 바람이 이소영의 몸 전체를 감싼다. 목에서 가슴을 감싸는 갑옷을 중심으로 하늘하늘한 천이 내려와 이소영의 몸을 둘러쌌다. 손목이나 발목에는 얇은 링 장식이 생겼고, 링 장식 주위로 천이 날개 모양을 이루고 있다.
등 뒤에 있던 날개는 사라졌다. 대신 이소영의 발밑에서 날개가 올라왔다. 매를 닮은 정령, 이안이 거대화하여 이소영을 태웠다.
이안 주위로 6명의 요정이 새끼 매 모습으로 파닥파닥 날갯짓한다. 이안의 발목과 날개에 요정들의 보석으로 이루어진 날개 장식이 달려 있고, 새끼 매의 이마에 보석이 빛난다. 요정과 정령이 서로의 힘을 증폭시키는 형태다. 그리고 계약한 정령과 마법 기술인 요정이 강해지면 당연히 주인인 이소영의 힘도 강해진다.
이소영이 몸에서 마력을 방출했다. 그러자 등 뒤에서 날개 갑옷을 따라 아까보다 훨씬 투명한 날개가 솟아올랐다. 파괴력이나 밀도보다 속도와 방어력 날카로움, 서포트를 중시한 모습이다.
이소영은 한 손에 단검을 쥔 채 알토를 노려보았다. 단검 위로 뾰족뾰족 갈라진 보이지 않는 바람의 칼날이 나무 같은 모양을 이루고 있다. 알토는 미소 지으면서도 긴장했다. 또 한 번 퍼즐 그림이 변했다. 다시 한번 이소영의 실력이 뛰어 올랐다. 이소영이 알토를 향해 단검을 겨누며 속삭였다.
“바람의 길.”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 한순간 길이 생겼다. 바람을 다루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기의 흐름으로 이루어진 길이다. 알토의 거울에 한순간 바람의 형태가 비쳤다. 그러나 알토는 길을 파악하기보다 일단 움직였다.
“악마의 큐브.”
콰과……각!
이소영이 날아올랐다고 생각한 순간, 그녀의 공격은 어느새 알토의 바로 앞에 도착해 있었다. 네모난 큐브가 이소영을 막아 냈다. 이소영의 단검이 부딪치자 큐브 조각에 날카로운 구멍이 수십 개 뚫렸다. 그러나 구멍 안에 흘러들어간 폭풍의 칼날은 이내 큐브 안에 꽉꽉 고여 있던 마력에 의해 튕겨났다. 큐브에서 새까만 마력이 콸콸 넘쳐흘렀다. 악마들에게서 느껴졌던 것과 같은 멸망의 힘이다.
큐브를 이루고 있던 부품이 한 조각 두 조각 떨어지며 새까만 폭풍이 휘몰아쳤다. 알토의 마력이 크게 팽창했다. 떨어진 큐브 조각에서 온갖 마법이 튀어나와 이소영의 바람을 유린했다. 폭풍을 따라 비명 지르는 악몽의 절규, 반경 수십 킬로미터를 부식시키는 파멸의 주문, 랜덤으로 마법이 튀어나오는 파멸의 상자.
바람을 휘둘러 공격을 막았으나 멸망의 힘이 너무 강했다. 이번에는 이소영이 뒤로 밀렸다. 이소영의 곁으로 리브(힘)와 시스(계절)가 달려왔다.
남은 요정들과 함께 뒤로 물러나 책꽂이를 지키고 있던 이안이 바람포를 쏘았다. 이소영은 멸망의 힘을 피하며 알토를 향해 날카로운 바람 칼날을 흩뿌렸다.
강력한 마법이기에 더 조심해야 한다. 여태까지 알토가 그래왔듯 저 악마의 큐브도 이소영을 따돌리기 위한 기술이다. 실제로 알토는 마법이 터지는 사이 몇 번이고 이소영을 넘으려 했고, 이소영 혹은 이안이 알토를 막아섰다.
이소영은 바짝 긴장했다. 여기가 최후의 보루다. 출구는 아직 닿지 않았고, 다음 문은 코앞이다. 더군다나 알토는 은신마법의 귀재다. 이소영은 숨겨진 알토의 퍼즐을 생생하게 감지해 내지만, 그 이상으로 은밀한 마법이 없으리라고는 결코 단언할 수 없다.
세리(하늘)의 강점은 존재가 ‘영역’을 뜻한다는 점이다. 세리를 두른 이소영의 주위는 자연스럽게 하늘로 변한다. 마법사에게는 어울리는 장소가 있다. 유은하는 새벽, 이성진은 석양, 강인하는 태양과 불꽃의 힘이 강한 한낮이나 화산지대, 최인성은 구조물이 많은 장소, 이소영은 바람뿐인 하늘이다.
세리의 존재가 이소영을 강하게 했고, 그럴수록 돌아다니는 폭풍이 더 견고하고 강해졌다. 리브(힘)가 바람을 연결하고, 시스(계절)가 폭풍을 소환하고, 스피나(공간)가 영역을 견고히 하고, 엘렌(속성)이 바람의 자연적 특성을 강화하고, 크리스(결정)는 알토의 마법을 가두거나 보관해두었던 마법을 소환하고, 솜(꿈)은 환상을 가늠한다.
멸망의 힘과 폭풍이 부딪치며 싸움은 영역전으로 접어들었다. 공격이 서로에게 막히고 깨진다. 이소영의 공격이 강해지는 만큼 알토의 공격도 강해졌다. 알토는 악마의 큐브에 맞춰 거울에서 멸망의 힘을 내보냈고, 멸망의 파편에서 나온 마법, 악마, 무기는 부서지며 작든 크든 보석을 남겼으며, 그 보석은 깨부숴지거나, 큐브의 일부로 되돌아가거나, 알토의 무기가 되었다. 멸망의 파편이 부서지는 숫자가 늘어날수록 알토는 오히려 더 강해지는 것 같았다.
‘무언가 준비하고 있는 건 틀림없는데.’
알토는 유은하와 마찬가지로 상황에 맞춰 수많은 기술을 구사하는 마법사다. 이소영과 달리 하나의 소재로 기술을 갈고닦을 필요가 없다. 유은하처럼 비축하고 있는 마법이 많을 테지. 물론 그런 마법사도 주요 기술은 정해 둔다. 가장 강한 마법, 가장 강한 공격기.
‘저게 가장 강한 공격 기술일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랬더라면 좀 더 마력을 집중시켰을 거야.
이소영은 바람을 내지르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 순간 어째서인지 발밑이 휘청했다.
짤깍
이소영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번엔 정말로 당황했다.
“……!”
한순간 시계(視界)가 이상해졌다. 세계가 멈춘 것처럼 흑백으로 물든다. 발 아래, 이소영은 알 수 없는 검은 조각을 밟고 있었다.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조각이다. ……아니, 큐브 조각이다. 이소영이 부순 멸망의 조각.
세계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고, 이소영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알토의 공격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윽…!”
이소영은 다급히 바람으로 공격을 튕겨 냈다. 튕겨 내고 나서야 그게 어떠한 건물의 일부임을 알았다. 진즉에 알토의 기술로 변해 사라졌던 악마의 은신처가 이전보다 더 거대해져 하늘에 떠 있었다.
“거울로 새로 구성한 건가? 이제 참 별 게…….”
시야에 지지직 노이즈가 끼며 다시금 흑백 세계가 나타났다. 솜이 희미하게 이소영에게 의지를 전달했다.
「소영 님…….」
이소영은 인상을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 흑백세계는 이소영의 착각이거나 망상이 아니다.
그러나 저 모습은 환상임과 동시에 환상이 아니다. 꿈의 힘에 해당하는 사념을 짙게 가지고 있지만 정신마법과는 거리가 멀다.
“뭐야, 이건?”
“아, 이제 보여?”
알토가 피식 웃었다. 그가 지니고 있던 멸망의 창이 거대해졌다. 창이 휘둘러진 순간, 꼬챙이처럼 생긴 검은 마력 더미가 이소영의 바람을 갉아먹으며 이소영을 노렸다. 이소영이 몸을 피해 꼬챙이와 창대를 반 쯤 잘라 냈고, 요정들이 나머지 반을 튕겨 내고, 그러고도 남은 창은 이안이 튕겨 냈다.
마법 한 조각이 이안의 날개에 박혔다. 이안의 감각이 이소영에게 전달되며 어깨가 찌릿찌릿 소름끼치게 아파 왔다.
“이안…!”
“환상은 아냐.”
알토가 신이 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저주에 가깝지만 저주는 아니야. 퍼즐이지만 퍼즐이 아니고, 공간마법이지만 공간마법이 아니야.”
“뭐가 그리 섞였어?”
“맞아. 잡기술이야.”
알토는 정말로 들떠 보였다.
“멸망에 다가갈수록 멸망에 물들리라. 멸망은 이미 부수어지는 세계니, 더 부수어 봤자 멸망에 가까워질 뿐인걸. 저주에 가깝지만 저주보다는 환상마법에 가깝고, 환상이지만 그보다는 구현마법에 가깝고, 거울 세계를 소환하는 공간마법이지만 사념으로 물들이는 마법이기에 저주와 환상에 가깝지.”
이소영은 다급히 제 몸을 살폈다. ‘멸망에 물들었다’라? 적어도 제 몸에 퍼즐은 박혀 있지 않다. 주위에 멸망의 힘이 짙어진 게 문제인가? 그렇다면 지금도 멸망의 힘을 증폭하고 있는 저 큐브, ‘멸망의 파편’을 없애면 되나?
알토가 휘두르는 멸망의 힘과 이소영의 바람이 다시 한번 부딪쳤다. 그러나 그 공간은 치지직 노이즈를 내며 점점 이소영에게로 가까워지기만 했다.
“우리는 마음속에 독을 품은 이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어. 우리가 그 산증인이잖아. 세상에 영원한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 언젠가는 우리의 왕이나 루키아보다 강한 인간이 나타나겠지. 틀림없이 내 자연의 가호를 꿰뚫어 퍼즐을 간파하는 사람이 나타날 거야. 때문에 나는 내 기술을 파헤칠 수 있는 자와 대면했을 때 어떻게 상대할 지도 생각해 놨어. 몇 번이나 쓸 수 있는 기술이 아니라서 지금까지 아꼈지만.”
알토의 기술은 보통 하나의 ‘그림’에서 비롯된다. 책을 보고, 그림을 보고, 기억 속을 뒤지며 찾아낸 장면 장면들이 거울 회랑 안에 무수히 많은 그림 퍼즐로 보관되어 있다. 그 안에는 알토가 꾼 꿈도 있고, 알토가 만들어 낸 세상도 있다.
“내 눈에는 온 세상이 퍼즐이나 다름없어. 그래서 이번엔 진짜 세상을 물들여 퍼즐로 바꾸어 봤어. 세상, 이라기보다는 당신이지. 세상도 변했지만, 가장 변한 건 당신이야.”
“그게 무슨…….”
“이해하기 어려운가? 음……는 내가 거울 안에 구상해 만들어 두었던 세계야. 악마든, 창이든, 건물이든, 당신은 그 세계를 부수었어. 그렇게 해서 당신은 멸망의 그림에 한 발 한 발 다가갔고, 멸망의 그림 역시 당신을 인식했지. 멸망의 그림이 당신을 인식하면 어떻게 될까? 바로 당신도 멸망의 일부가 되는 거야. 그림의 주민이 되는 거지. 그래, 당신은 지금 내 퍼즐의 ‘조각’으로 변했어.”
“큭…….”
“만일의 경우 유은하와 이성진을 막을 수 있게끔 저주가 아니게 개량한 거긴 한데……역시 두 사람한텐 통하지 않을 것 같지? 공간과 꿈을 조합한 거기도 하니까. 그 두 사람을 상대하려면 진짜 웬만한 특수기로는 불가능하다니까. 그렇다고 몇 배 강한 힘으로 때려 부순다고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잡기술’이라는 표현 그대로 이 기술은 다양한 요소가 퍼즐처럼 합쳐져 완성된다.
지금 점점 이소영에게 가까워지고 있는 세계, 에는 주인이 있다. 이소영이 ‘멸망’을 부술수록 악마는 이소영의 마법을 자각할 뿐 아니라 점점 강해진다. 부술수록 얽매인다는 점에서 이 마법은 저주이다.
그러면서 멸망의 조각은 이소영의 정신과 마법에 각인된다. 사고 속 하나의 이념에, 마법의 감촉에. 부서진 멸망 조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세계에 쌓인다. 그러나 그것은 실체가 아니라 알토의 거울이 비추는 그림자다. 그러므로 이 마법은 저주이며 환상마법이다.
알토의 거울이 비춘 그림자, 멸망의 파편 속에 담겨 있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멸망의 세계다. 알토의 그림 회랑 안에 있는 , 알토가 만들어 낸 이차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공간마법이다.
에는 의도적인 빈 부분이 있다. 바로 악마의 희생자 혹은 대적자가 서 있어야 하는 곳이다. 지금 악마의 대적자는 이소영으로 변했다. 완벽하게 갖춰진 퍼즐이 이소영을 부르고, 퍼즐 조각이 되어버린 이소영이 멸망의 세계를 느낀다.
그리하여 세계가 소환된다.
아니, 이소영과 알토가 세계를 불렀다.
공간마법이며, 구현마법이며, 환상마법이며, 소환마법이며, 저주마법. 알토의 말 그대로 잡기술이다.
하지만 다양한 힘이 얽혔기에 의식이 진행되기 시작하면 인식하기도 어렵고, 빠져나가기도 어렵다.
「소영 님!」
이안이 이소영을 불렀다. 멸망의 세계가 점점 다가온다. 이소영은 알토가 말한 대로 자신이 점점 액자 속 등장인물이 되는 기분을 맛봤다. 귀에 이명이 들리고, 흑백 세계가 점점 다가온다. 감각이 일그러지며 속이 울렁거렸다.
“세리…!”
이소영은 가슴에 손을 올리고 집중했다.
이소영은 가슴에 달린 하늘의 보석으로부터 ‘하늘’을 이끌어 냈다. 하늘을 중심으로 다른 요정의 여섯 가지 힘이 모여들었다.
정령과 동화를 풀었어도 이소영과 이안은 연결되어 있다. 이안의 바람이 이소영의 안에 차올랐다.
“소환, 윌리엄의 탄환.”
“흐음. 유클라프 님의 측근인 나한테 네 것도 아닌 공간마법으로 덤비시겠다?”
“너 유클라프의 측근이었어? 그건 또 처음 알았네. 하지만 못 할 것도 없지!”
이소영의 바람 위로 공간의 힘을 담은 번개가 번뜩였다. 알토가 그에 맞춰 멸망을 담은 공간 퍼즐 조각을 소환했다. 이소영이 큐브를 향해 기술을 날렸다. 두 사람의 마법이 부딪쳤다.
콰과과과광!
공간의 힘에는 공간으로 대항하는 게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공간의 힘을 통해 오히려 멸망의 세계가 더 가까워졌다. 악마의 모습을 따라 일부가 주위에 선명하게 구현된다.
“망할!”
이소영이 이번엔 윌리엄의 공간마법에 바람과 하늘의 힘을 집어넣었다. 이소영의 소환마법은 공간마법의 일종, 당연히 이소영은 어느 정도 공간마법에 조예가 있다.
“최인성의 그림자!”
이소영은 울렁거림을 느끼며 외쳤다. 알토 역시 지지 않고 공간에 퍼즐을 섞었다. 공간이 섞이고 섞이며 커졌다. 그런데 갑자기 두 사람의 마법과 움직임이 한순간 멈추었다.
파직!
허공에 커다란 책이 나타나며, 책 안에서 기계로 이루어진 은색 용이 소환되었다. 번뜩이는 번개가 이소영과 알토의 마법을 먹고 커진 구덩이를 산산이 부쉈다. 억지로 와해된 것 치고는 타격을 입지는 않았지만, 이소영은 당황해 소리쳤다.
“뭐야! 뭐 하는 짓이야?”
책 위에 글자가 떠올랐다.
『마지막 공간은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끝내지 못한다.』
“뭐? 무슨 규칙?”
“아, 미안. 내 탓이야.”
“뭐라고?”
이소영이 눈을 치켜떴다.
“두 번은 안 된다는 건가. 다음 문으로 가기 전에 혹시나 싶어 구멍을 뚫어 보려 했는데 안 되네. 그럴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불가능하겠어. 응.”
이소영은 열을 내는 한편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말하며 알토는 어린아이처럼 눈동자를 반짝거리고 있었다.
“멋있다…….”
“뭐?”
이소영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감상이었다. 그러나 알토는 감동한 얼굴로 몸을 부들부들 떨며 감상을 이었다.
“방금 마력에는 아무 영향도 주지 않고 공간만 조각조각 해체해서 없앴어. 거기에 남은 기술이나 마력 외 에너지까지 깔끔하게 우리한테 되돌려 줬다고. 내가 보는 세계까지 완벽하게 되돌아와 있어. 와, 미쳤다. 역시 랭킹 1위야. 차원이 달라. 이건 하인리히는 못 건드려. 허락받았을 테니까 그럭저럭 구조는 바꿀 수 있었을 테지만, 핵심은 못 건드려. 누구도 못 건드려. 나도, 너도, 커븐 로드 씨들도, 분하지만 유클라프 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