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468
“있으면 좋지. 새벽과 관련된 제단은 있어?”
“새벽은……없네. 있는 제단은 ‘밤’, ‘달’, ‘태양’, ‘황금’, ‘숲’, ‘호수’가 끝일세.”
하인리히가 이성진에게 제단이 봉인된 책을 건넸다. 이성진은 내용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걸론 안 돼. 오히려 방해야. 예리, 네가 힘을 좀 써야겠다.”
“네!”
“신물이랑 정령, 필요해?”
“신물은 필요할 수도 있어. 인하 넌 저기쯤에 서 있어. 나머지는 물러나.”
성진이 바쁘게 장소를 꾸몄다.
곧 오를레아와 리앙이 함선에 남아 있던 장착용 아이템을 전부 가지고 왔다. 에이온이 영역 아이템을 사용해 새벽의 제단을 만들었다. 나는 힘을 거의 잃은 전투복과 아이템을 교환했다. 성장하는 아이템이지만 복구하는 데 이렇게 시간이 걸릴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대비용 아이템은 항상 갖춰 두고 있다.
꿈, 정화, 새벽. 마력을 강화하기보다는 내 본연의 힘을 살릴 수 있는 아이템 위주로 장비했다.
3분이 지났다. 봉인은 이제 반도 남지 않았다. 바닥에 봉인의 잔해가 무성했다. 하인리히가 성진의 지시를 따라 인성이의 몸을 영역 아이템으로 만든 내 꿈속, 호수 위에 띄웠다. 나는 짧게 심호흡한 후 호수 바깥에서부터 인성이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
“『란스의 검』.”
나는 호수 위를 거닐며 붉은 보석이 박힌 황금색 검으로 망설이지 않고 내 심장을 찔렀다.
푹!
칼날을 따라 피가 뚝뚝 떨어졌다.
“『란스의 성배』.”
칼날의 빛이 아래로 모이며 검이 빛을 잃었다. 금색 빛 위로 피가 고이자 빛을 따라 보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황금 잔이 나타났다. 나는 황금 잔을 쥐었다. 이미 색을 잃은 검을 따라 피가 계속해서 떨어졌다.
란스의 성배는 내 소설에서 따온 무기로 성물이나 신물을 모방한 무기는 아니다. 신물과 성물을 그럭저럭 접한 이후로는 어느 정도 신물의 설정을 더하고 있지만, 예상대로 모방할 수 없었다. 비슷한 느낌을 조금 낼 수 있게 됐을 뿐이다.
그러나 실제 성물이나 신물과는 다르다 해도 란스의 성배는 신물이고, 의식에 쓰는 도구다. 몸의 재생력과는 상관없이 나의 의지를 따라 피가 계속 흘러내렸다.
피가 잔의 반을 채웠다. 나는 성진에게 들은 대로 했다. 피로 물든 검을 호수 위, 내 꿈속에 버리고 인성이의 웃옷을 열어 트라던트에 물들어 가고 있는 심장 근처에 피로 마법진을 그렸다. 나는 피를 입에 한 모금 머금고, 그대로 인성이에게 입을 맞췄다.
입안에 머금은 피를 입을 통해 흘려보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온 마음으로 인성이의 생명을 의식하고 소망하는 것이다. 아직 그럭저럭 유지되고 있던 봉인이 생명의 호흡에 반응하여 산산조각 났다.
‘인성아, 일어나.’
피와 호흡을 직접 불어넣는 것은 상대에게 내 생명을 나누어 주겠다는 뜻. 오랜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피의 맹약도 이를 닮았다. 그때는 서로의 피를 나눴다. 지금만큼 본격적이지 않았음에도, 맹약은 이루어졌다.
그러니 이번에도 틀림없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인성이의 안에 스며든 트라던트의 힘은 너무 강력하여, 이제 동화율 같은 수치를 넘어서 인성이의 육체와 생명을 넘보고 있다. 무력하게 죽어 가고 있는 몸. 대부분의 마법사는 지금의 인성이를 그렇게 표현하리라. 그러나 우리는 인성이가 지금도 죽음과 싸우고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고, 믿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세계를 부순 적에게 복수하기로 각오했다. 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죽음과 호흡을 나누고 있는 시련을 이겨 내 살아남는 것이다. 최후의 순간이 찾아올 때까지 우리는 기필코 살아남을 것이다.
처음 다섯 명뿐이었을 때 우리는 그렇게 맹세했다.
그리고 지금의 인성이에게는 되찾아야 할 것이 있다. 인성이는 그걸 우리에게 맡기고 죽을 정도로 무책임하지 않다.
그럼에도 인성이가 이번 싸움에서 이렇게까지 트라던트와 동화하고 트라던트를 흡수한 것은 살기 위해서였다. 그 터져 나온 공간의 파도 속에서 유일하게 마지막까지 정신을 차리고 있었던 게 인성이다. 아마 에리카와 유클라프는 처음부터 우리를 죽일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강하고 특수한 라스는 그렇다 치고, 시온이나 제레미는 어땠을까. 애초에 트라베리아는 죽이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손대중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므로 인성이가 이런 몸이 될 때까지 유클라프의 힘을 제어한 건 살기 위해서고, 더해서 살리기 위해서다. 공간 안에 휩쓸린 우리와, 공간 회로가 터진 순간 휩쓸릴지도 모르는 연맹의 동료와, 민간인을.
그런 위험천만한 짓을 벌이며 그는 믿었을 것이다. 자신이 살아날 거라 믿었고, 우리가 그를 살려 낼 것이라 믿었다. 믿고 온 힘을 다했다.
‘내 생명이 느껴져? 일어나…….’
입에 머금고 있던 피가 인성이의 목 너머로 전부 넘어갔다. 나는 내 안에 있는 생명의 힘을 분명히 의식하며 차가운 몸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윽…….’
불이 붙은 것처럼 가슴이 뜨거웠다. 들끓는 숨마저 인성이 안으로 넘어갔다.
평소와는 달리 어둠뿐이던 시야 안에 서서히 빛이 스며들었다. 가슴이 미치도록 뜨겁다. 열기에서 새어나온 고통이 금처럼 이어지며 몸에 새겨졌다. 인성이의 고통이다. 눈꺼풀 안에서, 가슴 안에서 인성이의 기척이 점점 선명해졌다.
인성이의 가슴속에서 겨우 형태를 유지하던 근원과 희미하게 빛을 점멸하던 ‘생명’ 위로 익숙한 빛이 떨어졌다. 떨어져 근원을 감싸 안는 빛이 무언가 문양을 만들어내는 듯했다. 내 마력이다. 그럴수록 가슴이 뜨거워졌다. 아니, 고통스러워졌다.
이것이 바로 ‘가호’다.
인성이의 생명이 내게 연결되었다.
나는 호흡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인성이의 가슴과 내 가슴에서 형태가 명확하지 않은 ‘가호’가 빛난다. 변화가 일어난 것은 분명한데, 고통을 제외하면 이상하게 고요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인성이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인성아…?”
인성이의 뺨에 손을 뻗는 순간, 가슴 안에서 무언가가 울컥 솟아올랐다. 나는 뻗었던 손으로 입을 가리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쿨럭쿨럭 기침했다. 그러자 썩은 피가 떨어졌다. 기침이 구역질로 변했다.
“욱! 우웩…!”
“은하 언니!”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괜찮아. 거의 성공했어.”
성진이 달려오려고 하는 사람들을 막아섰다. 느껴지는 고통이나 떨어지는 피는 내 게 아니라 인성이의 것이다. 생명이 공유되고 있다는 증거다.
“다가가지 마. 아직 가호가 완전하지 않아.”
내 가슴과 인성이의 가슴에서 동시에 빛이 피어오른다. 생명과 융화되던 트라던트의 힘을 가슴 안에서 피어오른 생명의 힘이 물리친다. 죽음을 생명으로 밀어낸 것이다.
인성이의 안에서 생명의 힘이 강해지고, 근원의 제어력이 조금이나마 돌아왔다. 하지만 성진의 말대로 아직 불완전하다. 나는 인성이의 안에서 파도치는 원혼의 힘이 또다시 인성이를 덮치기 전에 다시 한번 인성이의 몸 안에 직접 숨을 불어넣었다.
‘유이, 도와줘. 가연, 영!’
『깨어나!!!』
마음이 언령으로 변해 인성이의 그림자에 파고들었다. 서로의 가슴에 새겨진 빛이 보다 선명해 졌다. 나는 얼굴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가호가 ‘완성’되었다.
‘아…….’
가슴 위에 새겨진 남색과 은빛의 덩어리가 사람의 근원에 생명력을 전달한다. 스스로의 가호를 깨닫지 못했기에 문장이 확실하지 않고 불완전하지만, 의식을 통해 가호로서는 완벽하게 기능하고 있다.
기분이 이상했다. 가슴이 벅차고, 몸이, 근원이, 영혼이 떨린다. 영혼이 날개를 펼치며 주위로 넓게 퍼지는 것 같다. 그 순간, 연결된 가호를 통해 생명의 떨림이 느껴졌다.
“욱! 콜록!”
호흡이 없던 몸이 숨을 뱉어 냈다. 힘을 펼치며 요동치던 트라던트의 힘이 보석처럼 굳으며 울타리를 만들었다. ‘제어되고 있다’. 눈꼬리를 따라 떨어지는 눈물과 함께 인성이가 눈을 떴다.
“윽! 헉…!”
“인성아!”
영역 너머에서 소영이가 외쳤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인성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괜찮아? 윽…쿨럭!”
다시 한번 목 안에서 피가 넘어왔다. ……괜찮지는 않군. 내가 피를 토하는 것과 동시에 인성이도 기침하며 피를 토했다. 그러나 이젠 죽을 정도는 아니다. 내가 이 가호를 통해 생명력을 불어넣는 이상, 인성이의 생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피를 토해 내고 인성이를 내려다보았다. 인성이는 나보다 조금 더 오래 피를 토했다. 트라던트의 마력이 여전히 거칠게 몸 안에서 휘몰아치는 와중, 인성이는 손바닥으로 입을 막은 채 어쩐지 벅찬 눈으로 몸을 떨었다. 인성이의 눈꼬리를 따라 눈물이 흘러내렸다.
“왜 그래? 많이 아파?”
인성이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하긴, 인성이의 눈에 맺힌 감정은 고통과는 거리가 멀었다. 감탄에 가까웠다. 아마도 살아난 것에 대한 감탄이겠지. 나는 손을 뻗어 인성이의 손을 잡으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살아났다, 그렇지?”
“아하하…….”
그제야 인성이가 입을 열었다.
“그러네. 이번엔 진짜 죽다 살아났네. 걱정 끼쳐서 미안해. 그래서 그런가……. 지금, 좀, 기분이 벅차. 눈이 부셔……. 이상하지. 죽다 살아난 게 이번이 처음인 것도 아닌데.”
그러나 죽음에 잠겨 호흡이 멈춘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안도하는 나에게 인성이가 배시시 웃었다.
“예쁘다, 네 마력. 너무 예뻐…….”
인성이가 보는 것은 그림자이고, 그 감지능력은 마법에서 왔다. 그림자가 예쁘다는 것인지, 혹은 가호를 통해 무언가를 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인성이가 아직 제정신이 아닌 건 잘 알겠다. 제정신일 리가 없다. 저번보다 더 심하게 온몸이 잠식당했는데, 이만한 악의와 죽음에 휩쓸렸는데……. 나는 인성이의 손을 통해 그림자들에게 목소리를 보냈다.
“울타리를 제거해 줄 수 있어?”
요동치는 울타리는 가연이 만들었다. 힘이 더 이상 폭주하지 못하도록, 폭주하더라도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세워 굳혔다. 그러나 아주 잠시 울타리에 걸려 멈출 뿐 트라던트의 힘은 여전히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다.
그림자의 근원에 결합된 가연의 심연을 통해 내 생명력이 트라던트로 조금씩 옮겨진다. 인성이의 몸에서 또 한 번 폭주하듯이 공간의 힘이 뻗어졌다. 유클라프의 마법과 무척 닮았고, 에리카의 마법도 섞여 있다. 그러나 퍼져나간 트라던트의 힘은 호수나 풀 등 내 꿈에 닿는 순간 흐려졌다.
공간의 힘이 점점 깊어졌다. 아이템에 의해 영역이 펼쳐진 순간부터 이미 다른 세계였지만, 울타리가 쳐졌을 때 더 깊은 공간에 빠져들었다. 그림자 일부가 마주 잡은 손을 통해 내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트라던트의 힘이 섞여 닿는 순간 조금 정화되었으나 안에 담긴 가연의 의지만은 분명히 전해졌다.
「조금 도와줘.」
인성이가 다시금 기침했다. 눈이 멍한 것이 의식이 다시 흐려지는 것 같다. 그게 좋은 건지 안 좋은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익숙하게 가연과 교감했다.
‘윽.’
속에서 올라오는 썩은 피를 다시 한번 토해 냈다. 내 의식을 느낀 트라던트가 주춤했다. 그래, 죽음의 악의가 얼마나 강하든 그들은 내 영혼이 지닌 정화의 힘을 이겨 내지 못한다.
가연의 의지를 따라 인성이에게 영향이 가지 않을 정도로 아주 미약하게 ‘조정’했다. 울타리가 사라지며 일렁이던 공간이 약간 잦아들었다. 그 사이를 틈타 예리, 첸, 리나, 시드 프로제, 레일리 등 치료와 서포트에 뛰어난 사람들이 뛰어 들어왔다. 울타리를 옆으로 밀어 영역 바깥과 안을 연결하면서 성진이 물었다.
“생명은 확실히 붙잡았어. 은하야, 가호의 힘을 조종할 수 있겠어?”
“욱, 콜록…! 할 수 있어…….”
“지금 인성이의 생명은 마법의 근원을 통해 은하랑 공유되고 있어. 알고 있겠지만 무작정 정화하면 인성이의 존재까지 소멸돼. 은하 넌 계속 생명을 불어넣으면서 인성이의 그림자를 불러내. 가연과 유이, 영, 셋이 다 목소리를 전할 수 있을 정도만 되어도 어떻게든 될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연. 유이랑 영과 연결할 수 있어?”
「두 사람은 아직 주인님의 생명을 보호하는 데 힘쓰고 있어.」
“보자……괜찮아요!”
이번에 인성이가 흡수한 힘은 가연이 지녔던 ‘심연’보다 훨씬 더 격렬하고 파괴적이다. 예리는 내 가호와 인성이의 상태를 보며 확언했다.
“이따위 트라던트보다 은하 언니의 생명력이 더 강해요. 그런데 영 씨는 원래부터 그림자니까 근원에서도 힘을 쓸 수 있지 않나요?”
“그렇다기보다, 영은 원래 그림자의 근원이야.”
“그럼 영 씨는 안에 있는 게 더 낫겠네요. 유이 씨는 나와 주셔도 돼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림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유이』.”
가호의 빛이 좀 더 강해졌다.
“『유이』, 『영』, 『가연』, 도와줘.”
언령이 세 그림자에게 힘과 생명력을 부여했다. 가연과 교감하는 것에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역시 나와 가장 잘 맞는 것은 본래 내가 만든 물건인 유이다.
인성이의 근원을 보호하는 힘이 강해졌다. 그림자가 파도치며 트라던트의 힘을 한 번 눌러 삼킨다. 잠시 후 유이와 가연이 그림자의 표층으로 빠져나왔다. 모습을 실체화한 것은 아니지만 트라던트의 힘 바깥으로 가연과 유이의 의지가 드러났다.
“우리가 어떻게 도우면 될까?”
“실키! 아리엘!”
예리가 천사를 불렀다. 하늘에서 방패와 사슬이 떨어진다. 유이가 목소리를 전했다.
「트라던트는 다른 사람이 건드려 봤자 소용 없다옹. 주인님의 생명력과 정신력, 영혼의 힘을 될 수 있는 한 강화해 달라옹. 나머지는 우리가 하겠다옹. 정화도 내가 할 수 있다옹. 가연, 똑바로 해!」
「하고 있거든요…….」
아직 목소리가 조금 불확실했다. 생명력과 정신력은 나와 예리가, 영혼의 힘은 첸이 더해줄 수 있다.
그 이후로는 긴긴 싸움의 연속이었다.
트라던트의 힘은 죽음의 힘에 한없이 가깝고, 인성이는 사람이다. 생명과 죽음을 융화한다니, 당연히 보통 기술로는 불가능하다. 지금까지는 오른손과 그림자에 트라던트의 힘을 봉인하고 움직였다.
앞으로는 트라던트의 힘이 육체의 일부보다는 마법에 가까워져야 한다. 저주보다는 체질에 가까워져야 한다. 어차피 이제 트라던트는 인성이의 일부다. 익숙해 질수밖에, 다뤄 낼 수밖에 없다.
그사이 성진은 성배에 마력약을 붓는 것으로 피를 희석해 셰린에게 건넸다. 우리의 피는 힘이 너무 강해 의식이나 특별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타인에게 주어서는 안 되지만, 마법으로 희석하면 조금 정도는 치료제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준영이에게 내 피가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
초반에는 나를 포함해 10명 가까이 되는 마법사가 트라던트의 힘을 조정하기 위해 달라붙었다. 그러나 치료는 길어졌고, 치료받아야 할 사람은 아직 많았다. 공간 회로도 감시해야 하고, 결계도 복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다른 마법사들은 영이 근원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무렵 몇 명을 제외하고는 다른 뒤처리를 하기 위해 물러났다. 나, 예리, 레비, 첸만 진득하게 자리에 붙어 인성이를 도왔다.
나는 가호를 통해 계속 인성이와 생명력을 주고받았다. 공유하는 생명력은 차오르는 에너지이지 빼앗기면 손쓸 수 없는 수명은 아니다. 거기다 예리와 첸의 말에 의하면 나는 마력과 생명력이 넘치는 편이라 수명을 주더라도 회복될 확률이 높다고 한다.
몸에 스며든 트라던트를 다스리는 건 인성이 스스로 어떻게 해야만 한다. 그러나 옆에서 힘을 유도해 주는 것만으로 쓸데없는 폭주를 피할 수 있다. 몸이 다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 인성이가 흡수한 마력은 너무 짙고 강하여 의식을 통해 부여한 내 가호가 있더라도 회복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듯했다.
우리는 하루 동안 인성이의 곁에 붙어 있었다. 그사이 인성이는 깨고 잠들기를 반복했다. 폭주할 위험이 어느 정도 줄어들었을 때 우리는 다른 책임을 지기 위해 움직였다.
떠나기 전, 나는 가호를 조정했다. 마법을 전력으로 사용하기 위해 생명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인성이의 생명을 지키도록. 영이 신호를 보냈을 때만 생명을 공유하도록 했다.
마지막 죽은 피를 뱉고 나는 자리를 떠났다. 적어도 인성이는 죽음의 위협에선 벗어났다. 그에 따라 생명보다는 마력과 기력을 회복하는 쪽으로 영역을 바꾼 상태다. 그림자들의 의견에 맞추어 꾸민 그림자 세계에 나와 예리의 상징을 몇 개 내려다 놓았다.
나를 마지막으로, 인성이의 방은 텅 비었다.
우리가 나갔을 때 부상자들은 특수한 경우에 빠진 두 명만 제외하고 치료가 끝난 상태였다. 그 두 명 중 한 명은 인성이고, 또 한 명은 준영이다.
준영이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나는 사망자부터 눈에 담았다. 사망자의 대다수는 공간 회로와 알토의 퍼즐 폭탄에 휘말려 죽었다. 때문에 만일을 위해 소영이가 한 번 더 알토의 퍼즐을 살폈다고 한다. 사람에게 남은 퍼즐은 없고, 물건에 남은 퍼즐은 있다. 우리가 인성이의 옆에 붙어 있는 사이 소영이는 모든 퍼즐 제거를 마쳤다.
사망자를 확인하면서 복구 등 새블레의 전체적인 상황 정보를 훑어보고 있을 때 레미가 한 가지 사실을 알렸다.
「급박한 상황이 이어졌기에 유은하 님께 미처 바로 알리지 못했습니다만, 키메라와 관련된 일로 약간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아…….”
나는 흠칫했다. 라이라는 아니지만 첸, 라스, 듀크는 제법 얼굴이 알려진 장군 시리즈이다. 공간 회로가 커지고 에리카와 직접 부딪치기 전까지는 환각 아이템으로 그럭저럭 모습을 숨길 수 있었으나, 에리카와 부딪치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아니었다.
장군 시리즈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은 연맹 대표 조직들의 3인자 정도까지였다. 별무리와 무르시엘을 제외하더라도 그럭저럭 20명이 넘었다.
피난과 전투가 이어지며, 공간 회로를 부수며, 소식이 전달되며, 피난을 주도하는 강한 마법사부터 하나둘 장군 시리즈의 존재를 눈치챘다. 마지막에는 공간 파도에 마법이 전부 휩쓸려 나가면서 모습이 공공연하게 밝혀졌다고 한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루카 님, 레일리 님, 인하 님이 나서 장군 시리즈가 아군임을 공인하셨습니다.」
“반응은 어땠어?”
우리는 꽤 전부터 국민들에게 장군 시리즈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고 있었다. 트라베리아의 부하인 키메라들의 특성, 그들을 만들어 낸 실험의 잔혹성. 자아와 핵, 그들의 처지. 정보 공유의 일환이기도 했지만, 언젠가 이런 날이 왔을 때 사람들이 그들을 좀 더 원활하게 받아들였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좋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들 지금 상황을 이해하고 있고, 무르시엘을 받아들인 선례가 있는 데다, 연맹의 대표분들이 공인하였기 때문에 감정과는 별개로 받아들였습니다.」
나는 약간 씁쓸함을 삼켰다. 그래, 약한 사람들은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지켜 주는 우리가 공인하였다니 받아들일 수밖에. 기댈 곳은 이 도시밖에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생자는 점점 늘어 간다.
“다들 불안이 크겠지…….”
긍정을 표하듯 레미의 스크린 안으로 사각형이 빙그르르 돌다 사라졌다.
좀 더 힘내야겠다. 좀 더…….
나라의 복구를 돕고 방어를 단단히 구축하기 위해서는 확인해야 할 것이 몇 가지 더 있다. 나는 이번엔 부서진 그림자 도시를 확인하러 갔다. 문이는 피난 도시를 복구하면서 공간 회로의 영향으로 부서진 부분을 따로 옮겨 놨다. 이유는 감지 마법사인 우리에게 공간의 흔적을 보여 주기 위해서다.
유클라프는 이번에 우리가 닿지 못하는 공간을 펼쳤다. 그 공간으로 우리 세계를 조각내고 비틀었다. 감지 마법사, 혹은 해석 마법사는 마법의 남은 흔적만 봐도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내 꿈을 인식했다면 이렇게 삐죽빼죽하게 조각나지는 않았을 거야. 공간에 휘말려 파도에 밀려났겠지.’
유클라프의 공간 파도에 갇혔을 때의 기억은 선명하지 않다. 오래 버티지 못하고 한 번 기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도에 밀려나던 느낌과 기둥이 하늘을 잇던 순간만은 꽤 생생하게 기억한다. 머리보다도, 몸이.
유클라프는 내 꿈을 완벽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인식했다면 파편처럼 조각나는 것이 아니라 가루가 되어 공간에 흡수되었을 것이다. 흔적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꿈에 관련해서는 여전히 내 깊이가 더 위라는 소리다.
‘하지만 공간에선 반대지. 거기다 마력도 내가 훨씬 약해.’
유클라프의 마법을 흡수한 인성이가 보면 혹여 무언가 다른 모습이 보일까? 좀 더 유클라프의 마법을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기면 좋을 텐데.
그림자 도시를 확인한 후에는 호주를 전부 집어 삼키고 솟아오른 거대한 기둥, 공간 회로를 보러 갔다. 안에서 바깥을 봤을 때는 기둥도 세계도 층층이 나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여기서 보면 불투명하고 새카맣다.
레미에게 공간이 넘쳐흘렀을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전해 들었다. 허공에서 내 영역을 잡아 삼킨 채 웅덩이를 이루고 있던 공간 물결에서 파도가 흘러넘쳤다. 흩어졌던 공간 회로가 순식간에 공간을 갉아먹으며 파도와 합쳐졌다. 한 점에서 비롯되어 사방으로 쏟아지는 파도는 사람을 삼키는 게 아니라 ‘공간의 근원’을 물들였다.
기둥이 완전히 솟아오르기 전에 성진이 기둥의 시간을 한 번 멈췄다고 한다. 부수거나 위치를 바꿀 수는 없었다는 모양이다. 기둥의 변화가 멈춘 틈을 타 마법사들은 기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최대한 많이 공간의 힘에서 떨어뜨렸다.
멈출 수 있던 것은 고작해야 몇 초, 그 이후에는 S랭크 A랭크 할 것 없이 기둥과 함께 휩쓸렸다.
레미도 파도가 터지자마자 재빨리 그림자 세계를 비틀었다. 죽은 사람은 산산조각 났으나, 웬만한 사람은 상처 하나 없이 무사히 공간 파도에 밀려났다.
우리와 함께 공간 물결 안에 있던 인하, 아르델, 라스, 시온, 제레미 역시 무사히 파도에 밀려났다. 나와 인성이만 공간 회로 안에 갇혔다.
파도에 밀려난 일행과 바깥에 있던 동료들은 당연히 우리부터 찾았다. 나와 인성이가 회로에 갇힌 것을 바로 눈치챈 성진이 회로를 공격했지만, 조금 전에 들은 대로 부수는 건 무리였다. 거기다 나와 인성이 외의 다른 마법사도 공간의 힘에 당해 마법을 제대로 낼 수 없는 상태였다. 심지어는 이성진조차도.
공간 회로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의 도움을 받아 마력독을 없애고, 내 반지에만 미세하게 남아 있는 가호를 통해 공간 회로를 뛰어넘을 방법을 찾는 중에 우리가 나타났다고 한다. 인성이의 총에 걸렸던 가호는 탑의 마법에 휩쓸리며 갈가리 부서졌다.
그리하여 결국 세워지고 만 공간 회로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저것이 우리 세계와 꿈의 그물을 연결하는 통로라는 것, 우리도 통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 통로 이외의 길을 통한 꿈의 그물 진입이 이전보다 훨씬 힘들어졌다는 것, 회로의 영향으로 지금도 계속 세계가 비틀리고 있다는 것……. 그 정도다.
이제 연맹의 모든 마법사가 함께 힘을 합해도 저 공간 회로는 부술 수 없다. 저 회로는 세계의 깊숙한 ‘축’에 연결되어 세계를 비틀고 있다. 우리에게는 그 비틀림을 제어하며 회로를 부술 힘도, 기술도 없다.
다음에 적이 나타날 때는 저 회로를 통해서 나타나겠지. 나는 거대한 공간 회로를 올려다보며 꿈의 풍경을 떠올렸다. 비틀리는 공간을 처음 느꼈을 때 본 예지몽. 몇 달 전에 꾸었을 때보다 훨씬 확연해진 예지몽의 풍경을.
가까워진 우주, 별자리와 마법장치를 이룬 무수히 많은 트라던트, 벨라의 웃음소리.
그 꿈은 결국 현실이 될 것이다.
그런 예감이 들어 속이 안 좋아졌다.
저 공간 회로 역시 결국에는 우리가 전혀 닿을 수 없는 이치에 존재한다. 겉보기에는 생생한 기둥 안에 우리 힘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공간이 상자 속의 상자처럼 겹겹이 있을 것이다.
때문에 레미와 새블레의 마법사는 공간 회로를 피해 결계를 설치했다. 사실 그것 외에는 공간 회로를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 후에도 결계의 상태 등 필요한 마법 정보를 확인한 나는 늦게나마 결계 보강을 도우러 갔다. 공간 회로가 움직였을 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중심으로 생각했다.
유클라프만큼 공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가 유클라프의 마법을 막으려면 공간 이외의 특수한 힘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중 가장 특수한 것이 내 환몽마법이다. 인성이가 깨어나면 트라던트를 통해 흡수한 마법으로 저것들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나, 인성이는 꽤 오랜 시간 깨어나지 않았다. 의식을 통해 발현된 내 가호는 그동안 계속 유지되었다.
결계를 업그레이드하는 데 시간이 제법 많이 걸렸다. 본래 우리와 함께 오세아니아를 지키던 울비스는 우리가 있는 스틸라로 진영을 옮겼다. 생존자는 생존자의 의지에 따라 여러 대륙으로 흩어졌다.
또한 키메라 일행은 무르시엘이 아닌 우리 직속으로 소속을 옮겼다. 지금까지와 크게 달라질 일은 없겠지만, 어쨌든 연맹의 대표 조직이 직접 관리한다는 인상을 남기는 쪽이 사람들이 안심하기 쉽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장군 시리즈가 지낼 건물도 새벽별무리 본부 옆에 새로 만들어졌다.
결계의 보강이 어느 정도 끝난 후에는 곧바로 비틀린 공간을 파악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비틀린 공간을 넘어 한국에 가서 디나 심포니를 데려와야 한다. 그리고 한국에 있는 다른 동지를 데려올 준비도 해야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들이 계속 한국에 있어 봤자 이제 위험하기만 할뿐이다. 어린 마법사를 보호하고 교육시킬 수는 있겠지만, 한국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이상 갇힌 몸, 인질과 다를 바가 없다.
지금 귀중한 전력인 동시에 목숨이 위험한 자는 세 사람.
장군 시리즈, 윌 오 더 위스프 이그니.
장군 시리즈, 거울 요괴 라이라.
인간, 대현 소속 김준영.
이그니와 라이라를 가둔 봉인은 앞으로 한 달도 버티지 못한다. 준영이는 상태가 점점 악화되고 있다.
한 번 뜯어 먹힌 정신, 육체, 영혼. 성물이 뒤늦게 김준영에게 가호를 내렸고, 최상위 마법사의 치료를 받았다. 상처는 분명 치료되었다. 근원도, 영혼도, 정신도, 육체도, 분명 회복되었다. 자연은 준영이를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몰려든다. 그런데 몸의 균형이 자꾸 무너진다. 마치 신물을 구하기 전의 샐레나를 보는 듯하다.
희석한 내 피를 준영이는 삼키지 못하고 토해 냈다.
몇 번의 재검사 끝에 예리가 이유를 알아냈다. 뛰어난 마법사들의 마법으로 복원된 부분에 비해 그가 본래 지녔던 그릇과 육체가 너무 약하다. 그를 향해 휘말려드는 운명이나 자연의 힘을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단순히 하나가 불균형한 것이라면 우리의 힘으로 어떻게든 균형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약한 육체가 경험한 죽음에 가까운 붕괴, 강한 힘으로 복원된 영혼, 마법의 근원, 육체, 거기에 얽히는 성물의 가호와 자연의 힘. 많은 원인이 한꺼번에, 복합적으로 얽혀 균형을 잃는 바람에 악화되는 상태의 중심을 바로잡을 수 없었다.
생명이라는 게 그렇다. 치료라는 것이 그렇다. 하나만 비뚤어져도 우르르 무너진다.
인성이는 본래부터 뛰어난 마법사였다. 뛰어난 그릇을 가지고 있던 인성이는 트라던트의 악의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준영이는 뛰어나도 보통 사람 기준의 뛰어남이다. 초월자와 비교하면 미약한 그릇과 육체로, 본래라면 티끌도 얻을 수 없는 커다란 힘을 반복해서 받아들였다. 설령 자연을 매개로 했다고 해도 그건 준영이의 몸에 큰 부담이었으리라. 그 결과가 이런 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김준영은 현재 우리에게 사라져선 안 될 전력이다. 준영이만큼 자연의 가호를 파악할 수 있는 마법사는 세상에 트라베리아밖에 없다. 시카와 포츈 정도밖에 없다.
본격적으로 세계가 멸망하고 있는 와중에 시카가 언제까지 자연의 사랑을 끌어 모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저 변해 버린 공간을 헤치고 바다 일족 ‘트라베리아’를 발견해 낼 수 있는 건 준영이밖에 없다. 이번만 해도 준영이가 아니었다면 알토의 생물 폭탄을 발견하지 못하고 수만 명이 더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준영이의 상태가 악화되는 게 약한 육체에서 오는 불균형이라면, 분명 디나의 힘이 도움이 되리라. 그녀는 키메라를 진화시킬 만큼 뛰어난 생명의 힘을 지니고 있으니까.
세 사람을 살리려면 어쨌거나 디나를 만나야 한다. 목표가 정해졌다. 우리는 연맹과 함께 어떻게 꿈의 그물을 넘을지 고민했다. 공간 회로를 넘을 것인가, 예전처럼 꿈의 그물과 새블레의 접합점을 통해 움직일 것인가.
인성이가 눈을 뜬 것은 거대한 공간 회로가 생기고 일주일이 지나고서였다.
최인성은 공간 물결 안에서 가장 오래 깨어 있었고, 유일하게 그 안에서 에리카와 유클라프를 찾아냈다.
가연도 유이도 영도 최인성의 몸을 다스리는 것에 급해 미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으나, 다른 마법사들의 짐작과 달리 최인성은 단순히 스스로의 의지로 트라던트와 깊게 동화하였기에 폭주한 것이 아니었다.
세계의 근원에 그어진 금 안쪽에서 흘러나온 공간 물결이 함께 싸우던 이들을 삼켰을 때, 최인성은 가연으로 그림자를 연결하고 그림자 영역을 만들어 동료들을 찾고 지켰다. 상당히 많은 트라던트를 흡수하고 그 힘에 깊게 동화하기는 했으나, 그때까지만 해도 버틸 만했다.
그래, 버틸 만했다.
처음에는 유은하를 깨우고 함께 공간 물결에 맞설 생각이었다. 그런데 균열 너머에서 아주 커다란 구멍이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형태를 이루고 있던 거신이 깨어지며 그 안에서 유클라프가 나타났다.
그 순간 최인성은 온몸에서 소름을 닮은 전율을 느꼈다. 그의 몸 안에 있는 트라던트가 반응했다. 오른손에 봉인되어 있던 원한의 조각이 싹을 틔우고 자라났다. 유클라프는 가연을 만든 자이며, 가연의 근원이며, 트라던트에 삼켜진 자들에게는 원한하고 증오하는 대상이다. 물론, 새벽별무리에게도.
소름끼치도록 깊은 마력을 느끼며 최인성은 생각을 바꾸었다. 당장 이곳을 탈출해야 한다. 최인성 혼자서, 하물며 기절한 동료들을 감싸고 있는 상태에서 유클라프와 에리카 두 사람을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최인성은 다급히 주위를 둘렀다. 출구는 ‘없다’. 본디 출구가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가연이 없었더라면 최인성도 어떻게 나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출구는 없어도 출구로 만들 수 있는, 벽이 얇은 공간을 구분할 수 있었다.
최인성의 그림자가 숲을 만들며 움직였다. 그렇지만 아무리 가연의 힘이 강해도 그 힘은 유클라프와 소니아로부터 비롯된 것. 유이의 꿈이 합쳐져도 유클라프의 영역 안에서 그와 에리카를 속이기에는 부족하다. 가연의 움직임이 공간에 붙잡혀 멈췄고, 그림자 숲을 찢으며 에리카가 다가왔다.
“사람의 몸으로 또다시 그만큼의 악의를 받아들이고 진정시킬 줄이야. 과연 네 몸은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참 궁금해.”
공간에 묶여 움직이지 못하는 최인성의 몸을 거대한 보석창이 꿰뚫었다. 창으로부터 감정과 기억이 전해져 왔다. 최인성을 꿰뚫은 창은 혼돈과 파괴를 상징하는 ‘연옥의 탑’ 일부를 다듬어 만든 강력한 무기였다.
“……!”
단순히 연옥의 일부일 뿐이었다면 가연이 조종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이 무기에는 유클라프와 에리카가 연옥의 파괴력을 폭주시키기 위해 만든 마법이 섞여 있었다.
“아……윽…….”
“버티는군.”
폭주하는 연옥의 힘을 최인성이 어떻게든 억지로 억눌렀다. 유클라프가 손을 뻗어 지금껏 에리카가 보호하고 에리카에 의해 강화된 트라던트 가지를 붙잡았다.
“그렇다면 끝까지 억눌러 보아라. 아직 이 물결 속에 갇혀 있는 네 동료가 죽는 걸 막고 싶다면.”
에리카와 유클라프가 나무에 힘을 불어넣었다. 트라던트가 무섭게 자라나며 주인 외의 생명을 향해 달려든다. 최인성의 몸이 꿰뚫렸다. 상처를 통해 무수히 많은 힘이 밀려드는 것을 느끼면서도 최인성은 버텼다. 꿰뚫린 몸의 구멍은 나무가 흡수되면서 어둡게 반짝이는 보석에 의해 메워졌다.
“네가 그 힘마저 견뎌 내고 받아들였을 때, 너는 분명 더 성가신 적이 되어 있겠지. 하지만 그걸로 좋아. 우리에게 좀 더 많은 가능성을 보여 봐. 그렇지만 단언하지. 네가 살아남았을 때, 그 힘은 더 큰 저주가 되어 네 수명을 갉아먹을 거다.”
에리카는 그 말을 남기고 유클라프와 함께 자리에서 사라졌다.
「주인님!!!」
정신이 아득해지는 와중에도 최인성은 몸으로 나무가 뻗어지는 걸 막았다. 이 공간 속에 존재하는 생명은 최인성만이 아니다. 유은하, 강인하, 라스, 제레미, 시온. 그들에게 가도록 둘 수 없다.
그러나 밀려들어 오는 사념 때문에 점점 정신이 희미해졌다. 몸의 마력이 거세게 요동치는 것을 느끼며 최인성은 이를 악물었다. ……도움을 청해야 한다. 하지만 누구에게?
수많은 악의와 힘에 휩쓸려 마력이 폭주한다. 아니, 심장을 꿰뚫는다. 그의 온몸을 갉아먹는다.
힘이 점점 최인성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최인성의 몸을 꿰뚫고 있던 연옥의 창이 어느새 최인성의 몸에 완벽히 흡수되어 모습을 감췄다. 최인성의 몸을 휘감는 나뭇가지가 점점 늘어났다. 가지 몇 개는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