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476
『연주회는 짧으면 4분, 길면 몇 시간이고…….』
로카의 글을 보며 우리는 한숨을 삼켰다. 11시 41분이 지났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50분, 12시, 12시 20분……드디어 릴리가 거리에서 연주를 끝내고 떠났다. 30분, 1시, 문은 나타나지 않았다.
『유리병을 다시 보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초조해졌다. 라이라와 이그니가 봉인되고 이제 3주째다. 다음 답장까지 기다리면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입술을 깨물며 화구점 옆을 응시하던 나는 문득 눈을 크게 떴다.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힘이 전혀 드러나지 않은 성물 및 신물을 볼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평범했던 가게 벽에 문이 나타났다. 마치 원래 있었는데 지금까지 미처 보지 못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서서히 선명해지는 방식까지 말이다.
은녹색 보석이 걸린 이름 없는 간판, 틀림없이 디나의 가게다.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나 우리가 문을 열기도 전에 누군가가 문을 열었다. 문을 열까 통과할까 고민했는데 마침 잘됐다. 우리는 모습을 감춘 채 그 사람을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꿈이 넓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곳의 꿈은 한국보다 더 현실에 가깝게끔 겹쳐져 있다. 시선을 움직여 기척을 찾았다. 카운터에 베일을 쓴 여자가 서 있었다.
『맞아요. 제가 본 사람도 저 사람이에요.』
『저 사람이 디나 심포니……힘이 안 느껴지네.』
나는 꿈 안에 서서 디나를 살폈다. 머리카락 반과 눈가를 가리는 베일을 쓰고 연두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 하지만 베일이 반투명하기 때문에 눈동자 색까지 전부 볼 수 있다.
디나의 머리카락은 녹은색이라는데, 여자는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였다. 하지만 그건 별 문제가 아니다. 머리 색과 눈 색쯤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으니까.
나는 겉으로 드러나는 색보다는 마력을 주시했다.
가게 안은 그녀의 것으로 분명한 마력이 가득 차 있었다. 가득 차 있는데 ‘색’이 잘 보이지 않는다. 무색무취라서 그런 게 아니다. 뭐라고 해야 하나, 마력 안에 통째로 삼켜져서 구분이 안 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마력 느낌도 마력이라기보다는 자연의 힘에 가까워 보였다.
나는 시선을 가늘게 좁혔다. 그래도 디나 본인의 힘은 보인다. 거대한 무언가에 보호받고 있지만 가늠할 수 있다. 저 정도 마력이면 최소한 랭킹 50위권……. 가디언은 아예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
우리보다 먼저 들어온 손님은 아무래도 론체르타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인 듯했다. 그는 약 설명을 보고 회복약 몇 개와 체력 회복약, 정신 회복약을 사 갔다. 사람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디나가 머리에 쓰고 있던 베일을 벗었다.
스륵…….
그와 동시에 그녀의 머리색과 눈동자 색이 바뀌며 가려져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베일이 디나의 마력을 가리는 역할도 하고 있었는지 베일을 벗는 순간 힘이 더 선명해졌다. 길게 뻗은 녹은색 머리카락에 녹은색 눈동자, 녹은색 마력을 지닌 이명 , 디나 심포니. 염사 속에서 묘사된 모습 그대로 루키아를 썩 닮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예상보다는 마력이 예리와 닮지 않았다.
비슷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마력만 봤을 때는 같은 갈래에서 나왔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하긴, 예리의 마력은 학생 시절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그렇다고 근본부터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니다. 본래의 힘이 여전히 남아 있다.
‘거기다 만들었다고는 해도 디나는 루키아를 모태로 만들어졌으니, 어쩌면 하르펜보다는 루키아와 마력이 닮았을 지도 모르지.’
베일을 벗은 디나가 우리가 있는 방향을 정확히 돌아보았다.
“가게 문은 닫았어요. 이제 나와도 괜찮아요, 유은하 님.”
조금 놀랐으나 나는 꿈에서 현실로 내려섰다. 디나가 우리의 얼굴을 한 명 한 명 확인했다. 로카가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어떻게 우리가 있다는 걸 알았어?”
“영혼이 보였거든요. 아, 가게 안이고 첸 씨가 옆에 있어서 볼 수 있었던 거지만요.”
“그것도 놀랍지만요, 어떻게 은하 언니란 걸 알았어요? 은하 언니를 본 적 없으니 영혼을 볼 수 있어도 구분을 못 하잖아요?”
“이 시국에 몰래 한국에 숨어들다니, 그런 일은 유은하 님 외에는 불가능하지 않나요?”
“아…….”
납득할 수밖에 없는 설명이었다.
그때 디나의 어깨 위로 초록빛이 반짝였다. 잘 보니 보석……아니, 문양 이었다. 보석을 잘라 붙인 것 같은 새 문양, 아무래도 첸에게 전해 들은 디나의 가디언 같다. 그리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날카로운 발톱과 긴 꼬리를 가진 건 분명했다.
나는 가디언을 눈으로 훑으며 숨을 삼켰다. 힘이……정말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무지막지하게 강대하고 특수하다는 것만은 어렴풋이 알겠다.
몸의 부위가 선명하지 않은데도 나는 문득 가디언과 눈이 마주쳤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그 시선은 이내 그의 모습과 함께 스르륵 사라졌다.
“여기까지 찾아오시느라 고생했어요. 첸, 트라베리아에서 벗어난 걸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덕분에 라스와 듀크도 무사합니다.”
“세 분 다 성공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첸과 디나가 온화한 분위기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곧 디나가 나와 예리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만나고 싶었습니다. 유은하 님, 정예리 님.”
“저도 꼭 만나고 싶었어요, 디나 님!”
예리의 눈동자가 호기심과 기대로 반짝반짝 빛났다. 장군 시리즈를 삶으로 이끈 마법사를 나 역시 만나고 싶었다. 나는 디나를 향해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새벽별무리의 유은하입니다. 실례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디나 씨의 전반적인 사정에 대해서는 첸 씨께 전해 들었습니다.”
“아, 괜찮아요. 제가 새벽별무리에는, 유은하 님께는 전해도 된다고 미리 말해 두었거든요. 누가 뭐래도 키메라 분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 하는 분이시잖아요.”
“그건…….”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말을 흐렸다.
“정말로 만나고 싶었어요. 아, 예리 님과는 이미 한 번 만났지만요. 가게에서 마주쳤던 거 기억하시나요?”
“물론이죠! 그때는 디나 님이신 줄 몰랐지만요.”
예리가 약간 민망해하며 머리카락 끄트머리를 매만졌다.
“그런데……저란 걸 알고 계셨나요? 그때는 변장하고 있었는데…….”
“하르펜 선생님의 기척이 났거든요. ‘이 사람이 마법석의 주인이구나!’ 싶어서 기억해 두고 있었어요. 나중에 바깥에서 들어온 정보를 통해 마법석의 주인이 새벽별무리이며 예리 님이란 것을 알았고요. 자, 서서 이야기하는 것도 그러니 안으로 들어오세요.”
디나가 우리를 카운터 너머로 안내했다. 짧은 계단을 올라가자 나뭇잎 무늬가 새겨진 현관문이 나타났다.
벌컥.
“얘들아, 나 왔어!”
현관문 안은 평범한 집이었다. 각기 다른 종류의 동물 무리와 함께 소파에 앉아 있던 주황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벌떡 일어났다.
“첸! 첸이잖아! 거기에 유은하, 정예리, 이소영, 로카! 와! 글로만 본 사람들이다!”
긴 하얀 티에 반바지를 입은 양갈래 머리 소녀가 방방 뛰며 기뻐했다. 자고 있던 동물……아니, 키메라가 깨어나며 놀라거나 반가운 얼굴로 우리를 보았다. 고양이, 개, 새, 여우, 뱀, 사자……가 아니라 스핑크스? 아마 스핑크스 인 것 같다. 새가 포르륵 날아 첸의 어깨에 내려섰다. 첸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오랜만입니다, 여러분. 건강해 보이는군요.”
“너도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야.”
동물형 키메라들이 입을 열어 속삭였다. 아……그러고 보니 자아를 깨웠다고 그랬지. 쟈넷과는 달리……디나의 힘에 의해 정상적으로 자아를 깨운 키메라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마력과 영혼이 제법 깨끗했다.
“우린 항상 건강해! 한국이라 바깥에 잘 못 나가서 조금 심심하긴 하지만, 그래도 전보단 훨씬 나아. 몸도 이젠 안 아프고.”
그리고 양갈래 머리의 저 여자가 바로 혼돈속성을 지닌 루니라다. 나와 예리는 루니라의 마력을 확인하고는 감탄했다. 섞이지 않고 선명하게 나뉜 빛과 어둠이 규칙적으로 빙빙 돌고 있었다. 본래 섞이지 않은 빛과 어둠은 충돌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루니라는 지금 그 법칙을 깨고 있었다. 첸과 인사를 나누던 루니라가 키메라 몇 마리를 어깨에 데리고 나에게 달려왔다.
“유은하, 정예리 만나고 싶었어! 이렇게 만나서 너무 기뻐!”
옆에서 키메라들이 동물 울음소리로 호응했다. 루니라가 배시시 웃었다.
“나는 루니라야! 모델은 고양이 수인. 고양이 반, 사람 반이야. 반반이라 혼돈 속성인 걸까? 사실 왜 수인으로 태어난 건지 잘 모르겠어. 짐승형이 기본인 애들도 인간 모습 짐승 모습으로 따로 변신할 수 있는데 말이야. 첸도 그렇고! 아, 얘들은 우리 동료! 여기서부터 차례대로 루피, 바인, 하울, 퀴리, 밀, 루지야. 모델은 뫼비우스, 솔개, 호랑이, 스핑크스, 늑대, 사막 여우야.”
키메라가 소형화하면 고양잇과는 다 고양이로, 개과는 다 개로 보이는 단점이 있다. 자세히 보면 다르지만 얼핏 보면 그렇다. 루니라의 호명을 따라 키메라가 몸 일부를 흔들거나 작게 우는 등 반응을 보였다.
“우리를 괴물이 아니라고 봐 주는 사람이라니 너무너무 희귀하잖아! 더군다나 너는 처음으로 그렇게 봐 준 사람인걸! 그리고 첸이랑 라스를 동료로 받아 줘서 고마워! 나랑 첸이 엄청 친한 건 아니지만……그래도 같은 키메라로서 동료가 인간과 같은 편이 되었다는 게 무척 기뻐. 하르펜 선생님의 마법석에 걸맞은 사람이라니 또 얼마나 신기해? 그런 사람이 정말 존재한다니 너무 놀라워! 디나도 하르펜 선생님이 마법석을 만들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것의 주인이 될 사람이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대! 아, 손잡아도 돼?”
루니라가 신난 얼굴로 나와 예리의 손을 잡고 아래위로 흔들었다. 부끄러움과 어색함에 나와 예리는 다른 곳을 보며 눈을 굴렸다. 디나가 루니라의 이야기 뒷부분에서 쓴웃음을 지었다.
“선생님이 후대를 위해 남긴 물건이고, 전 어디에 있는 지도 몰랐지만, 솔직히 주인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하르펜 선생님의 마력에 적성을 가진 마법사라니, 그런 사람이 세계에 한 사람이 더 나타날 거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하르펜 선생님의 마법석이 주인을 찾았다는 반응이 하리에게 나타났을 땐 정말 놀랐어요. 주인이 누군지 정말 궁금했고요. 그러다가 예리 님이 저희 가게에 들렀을 땐 이런 우연이 다 있구나 싶어서 진짜 엄청 놀랐지 뭐예요. 아, 하리는 하르펜 선생님이 제게 붙여주신 가디언의 이름이에요!”
“그럼 제가 마법석을 흡수했을 때 바로 눈치채셨던 거예요?”
“마법석이 주인을 찾았다는 것만요.”
예리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특수한 마법석이긴 했어요. 저 이전에 접촉했던 사람은 다들 마법석의 주인이 되는데 실패했다고 들었고요.”
“그럼요. 그게 어떤 물건인데. 그래서 정말 놀랐다니까요. 하르펜 선생님도 참, 유산을 남길 거면 좀 사용하기 쉽게 남길 것이지.”
“선생님…….”
로카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장군 시리즈를 진화시킨 키메라의 첫 번째 인간 협력자가 디나 심포니이고, 그녀를 한국에서 데려올 것이라고 전하기는 했으나, 그녀의 자세한 사정에 대해서는 연맹에 밝히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밝혀도 상관없다고 디나가 미리 말을 전해뒀다고는 하지만, 연맹에까지 통용되는 일인지는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인사라는 생각에 전할 필요가 없다 판단한 것도 있어, 이 사실을 아는 건 현재 우리 새벽별무리뿐이다.
첸이 디나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몇 번 깜빡이던 디나가 웃었다.
“아, 트라베리아에게 전해지지 않을 정도로 소수의 사람에게 알리는 정도는 괜찮아요. 다른 사람이 제 사정을 믿기 어려워 할 뿐이지, 저는 제 존재를 자랑스럽게 여긴답니다. 다만 트라베리아의 표적이 되는 건 아무래도 귀찮을 것 같네요.”
그제야 우리는 로카에게 디나의 정체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전했다. 이야기를 전해 듣고 로카는 경악한 채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예리가 의아해하며 디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건가요? 아버지잖아요?”
디나는 약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호칭에 대해 설명했다.
“그건, 음……. 확실히 저는 하르펜 선생님의 손에 탄생했지만, 저희는 서로를 가족이라 생각하진 않았어요. 가족이라기엔 좀 거리감이 있었다고나 할까……. 개발자도 자기가 만든 무기를 자식이라고 생각하진 않잖아요. 그거랑 비슷해요. 저한테 하르펜 선생님은……말 그대로 선생님이에요. 저에게 지식과 마법을 가르쳐 준 선생님이요.”
“으음…….”
예리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멍하니 있던 로카가 이어지는 이야기에 정신을 차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딸 앞에서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런데, 하르펜 님 별로네. 만들어 낸 인간이라고 해서 막 태어난 디나 씨가 세상 물정이나 감정적 교류를 알았던 건 아니었잖아? 필요한 지식을 제외하면 잘해 봐야 유소년기 아이 수준이었겠지. 그러니 거리감을 둔 것도, 아니, 만든 것도 하르펜 님 아니겠어? 그리고 로봇이랑 인간이랑 같아? 거기다 많은 제작자는 자기가 만든 작품을 자식처럼 여겨. ‘초아 님’도 그렇지?”
“네.”
작품의 세계관, 작품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 의심할 여지도 없이 모두 내 자식이다. 전부……모두 다…….
“서로 납득하고 있다면 더 이상 할 말 없지만, 난 하르펜 님의 행동을 좋게 보기 어려워. 정말 괜찮아?”
조금 놀라는가 싶던 디나가 부드럽게 웃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르펜 선생님은 나름대로 저를 책임졌어요. 제게 마법을 비롯한 지식을 알려 주었고, 그럭저럭 마법을 쓸 수 있을 때까지 옆에 있어 주었고, 선생님이 사라진 후에도 생활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준 데다, 가디언을 붙여 주었어요. 그리고 하르펜 선생님을 보통 사람 선상에서 생각하면 안 돼요. 하르펜 선생님은 원래 성격이 별로 좋지 않거든요.”
세계 최고의 의사 하면 사람들은 모두 하르펜을 떠올린다. 업적도 뛰어난 데다, 그만큼 이미지가 좋다. 하지만 디나는 웃으며 당연하다는 듯이 제 아버지를 평가 절하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인간을 흉내 내는 로봇 같다고나 할까? 그분은 사실 사람의 감정을 잘 몰라요. 다른 사람들은 하르펜 선생님이 항상 웃고 다니는 친절한 분이라고들 하는데, 그건 그냥 경험으로 평범한 사람의 습성에 맞췄을 뿐이에요. 그리고 다들 하르펜 님을 사랑에, 루키아 님에게 미쳤다고 하잖아요? 맞아요. 정말로 그랬어요. 정말로 하르펜 선생님에겐 루키아 님밖에 없어요. 좋아하는 것, 집착하는 것, 살아가는 의미, 이유, 애정, 증오. 하르펜 님의 모든 감정은 전부 루키아 님에 의해서 탄생했고, 루키아 님한테만 향했어요. 그러니 루키아 님이 없는, 아니요, 루키아 님을 모르는 하르펜 선생님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허상과 다름없어요.”
디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누구에게나 부드럽게 웃던 친절한 하르펜은 연기였다. 디나는 하르펜의 팬들이 뒤집어질 만한 이야기를 간단히 말해 버렸다.
“그러니 그 사람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저를 책임진 거예요. 그걸 알기에 저는 하르펜 선생님을 원망하지 않아요. 저는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답게 살았어요. 하르펜 선생님이 준 마법으로 스스로를 지켰고, 그분이 남긴 돈으로 여행을 하고, 커다란 집을 사고, 자유롭게 살았어요. 많은 사람을 만났고, 친구와 동료가 생겼어요. 내키는 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을 가진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저는 충분히 행복해요.”
로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정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애정 없이 채워지는 것도 있다. 또 사람에게 애정을 퍼부어 줄 수 있는 것이 부모뿐인 것은 아니다. 디나는 적어도 하르펜과 달리 텅 빈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많은 사람을 치료하고 돌아다니며 누군가를 가엽게 여기고, 나아갈 길이 없는 장군 시리즈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이 텅 빈 사람일 리 없다.
“첸, 디나에게 볼일이 있어 한국에 온 거지? 무슨 일 있어?”
스핑크스가 두 다리로 서 첸의 무릎을 손으로 짚었다. 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심상찮음을 느꼈는지 디나도 표정에서 웃음을 지웠다. 안 그래도 상황이 그리 여유롭지는 않기에 나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저희가 당신을 찾아온 건 치료해 주셨으면 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연맹에는 뛰어난 의사가 많죠. 그런데도 제가 아니면 치료하기 어렵다는 건……키메라 분인가요?”
“한 명은 사람이고, 두 명은 키메라입니다.”
루니라가 식탁을 세게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메라? 누구? 라스는……아닐 테고. 라스랑 듀크는 성공했잖아?”
다른 키메라들도 불안해했다.
“누구, 아파?”
“동료가 아프대. 히잉.”
“부상이라면 연맹의 마법사로도 고칠 수 있을 테니, 키메라의 핵에 걸린 저주가 발동한 건가?”
“첸! 누구야?”
“라이라와 이그니입니다.”
루니라와 동물 키메라 일동의 눈이 크게 뜨였다. 놀람, 경악, 걱정. 의외라고 여기는 감정도 섞였다.
“두 사람은 지금 문장의 저주 때문에 죽어 가고 있어요. 저주가 너무 깊숙해서 저희 힘으로는 건드리기 힘듭니다. 생명력에 직접 닿는 디나 씨의 기술이 필요해요.”
“라이라? 라이라가……. 그렇지. 라이라는 속내를 숨기기 딱 좋은 능력자니까. 하지만 이그니가 트라베리아에서 벗어나려 할 줄은 몰랐어. 이그니는 겁이 많으니까……. 아니, 그렇구나. 너희는 이그니를 따르니까…….”
동료들이 곧 라이라와 이그니의 사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라이라가 한 번 스스로의 힘으로 진화했다는 이야기에선 다들 깜짝 놀랐다.
“다른 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그 분을 포함해 모두의 상태를 좀 더 자세히 말해 주셨으면 해요.”
말로 설명할 것 없이 문이를 통해 세 사람의 염사를 띄웠다. 내 염사는 마력, 영혼, 생명력 등 보통 사람은 보지 못하는 에너지까지 그대로 재현한다. 디나가 심각한 눈으로 이그니, 라이라, 준영이를 번갈아 살폈다. 저주에 당한 채 봉인에 갇힌 이그니와 라이라를 보며 루니라가 발을 동동 굴렀다. 동물들도 루니라의 옆에서 안절부절못했다.
“아주 뛰어난 봉인이네요. 루카 님의 마법인가요?”
“네.”
“루카 님은 대단하다는 말도 부족한 마법사지만……트라베리아의 저주는 더 무시무시하죠. 봉인을 겹쳐서 펼쳐도 저 상태에서 2주 정도밖에는 못 버티겠네요.”
“네. 이제 제한 시간까지 열흘 정도 남았어요.”
디나가 아득 이를 갈았다.
“종족 진화는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인간으로 예를 들자면 A랭크 마법사에서 초월자가 되는 것과 같아요. 마법사도 초월하면 아예 종이 다르다고 표현하잖아요?”
본래부터 쉬운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런 말을 들으니 상상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게 실감 갔다.
“그런 상태에서 한 번 더 진화한다? 아주……아주 어려워요. 그리고 키메라에게 트라베리아의 문장은 ‘정체성’이에요. 스스로를 구속하고 존재하게 하는 정체성을 뿌리치고 진화하기란 아주 어렵죠. 그래도 라이라 님은 한 번 진화했고, 저 문장은 새로 내려진 문장이니까……. 이그니 님은 그래도 진화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꽉 손을 모은 채 고민하는 디나의 표정이 점점 초조함에 물들었다. 나는 흐린 눈으로 물었다.
“둘 다 확률이 많이 낮나요?”
“네. 솔직히 여태까지 중 제일……어려워요. 거기다 제가 만든 약은 원래 문장이 발동되지 않았을 경우를 상정해 쓰는 약이에요.”
“디나…….”
“그래도…….”
디나가 모은 손에 좀 더 힘을 줬다.
“가능성이 있는 한 최선을 다하겠어요. 제 모든 마법을 바쳐서요.”
그렇게 속삭이는 디나의 눈이 선연하게 빛났다.
“키메라로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저주를 안고 살아간다니 말도 안 돼요. 그래서는 안 돼요.”
단단한 목소리에 짙은 분노와 함께 어렴풋이 한탄이 묻어났다. ……디나도 마법사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생명체, 동질감에서 오는 한탄일까. 이어 디나의 눈이 준영이를 향했다.
“이 분도 어렵고 복잡한 상태네요. 육체와 마력과 그릇의 균형이 무너져 있어요. 실력과 재능에 비해 자연에 사랑받는다고 했던가요? 제가 보기엔 힘의 개성이 적어 자연에 융화되기 쉬운 걸로 보여요. 투명하고 물들기 쉬운 마력과 영혼……특이한 체질이네요.”
“육체가 가진 그릇이 너무 약해요. 그래서 디나 님의 힘이 필요해요.”
“음……이 분은 보기만 해서는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한 번 만져서 확인해 봐야 알 것 같아요. 생명력은 당연히 강화해야겠고, 육체를 전체적으로 보강하는 게 좋겠어요. 하지만 말씀하신 대로 그릇의 문제라면 한두 군데 마법의 힘으로 강화해서 어떻게 될 문제가 아니에요. 장기적으로 문제가 없으려면 이 분 스스로의 힘으로 성장해야 해요. 상황이 상황이니 1년만 있어도 훌쩍 강해져 있겠지만……결국 시간이 약이에요. 필요한 조치를 해도 몸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오려면 시간이 걸릴 거예요.”
디나의 눈이 화면 너머를 샅샅이 훑었다. 조금 눈치를 살피던 소영이가 손을 들었다.
“사실 또 한 사람 상태를 봐 줬으면 하는데요……. 일단 앞서 보여 준 사람들에 비하면 당장 목숨에 지장은 없는데……그럭저럭 적응하긴 했는데……상태만 따지면 굉장히 안 좋거든요.”
“네, 몇 사람이든 괜찮아요. 어떤 상태인가요?”
소영이가 가리키는 사람은 당연히 인성이였다. 나는 인성이의 염사를 허공에 띄웠다. 상태를 확인하자마자 디나의 눈이 당황으로 굳었다.
“무슨, 이런, 미친……! 어떻게 이런 일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죠…? 세상에…….”
디나가 기겁하며 머리카락을 손으로 잡아 뜯었다.
“이 상태로 목숨에 지장이 없다고요? 아, 당장 죽을 상태는 아니라 하셨죠……. 아프진……아프겠네요. 이건 진짜, 정말, 살아남은 게, 기적……. 아니……아니…….”
라이라, 이그니, 준영이를 보았을 때와는 달리 디나는 쉽게 평정을 찾지 못했다. 세 사람의 일은 그럭저럭 이해 범위 내에 있던 일이었나 보다.
“그릇이 크고 유연하네요. 그래요. 뭐든지 대화하고, 설득하고, 부수고, 마지막에는 받아넘길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밀려든 힘도 너무 커요. 정말, 정말……대단하네요. 어떻게 저 상태로 움직이는 거지? 세상에……. 그래도 나름대로 안정된 상태인 거죠?”
“네. 나름대로. 무리하면 무리할수록 몸이 잡아먹히겠지만요.”
“하지만 적당히 무리하면 힘을 더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안정되어 있네요. 제가 저걸 어떻게 더 안정시킬 수 있을지는 솔직히 모르겠어요. 죽음의 힘을 받아들인 생자라니. 생명과 죽음의 비율이 조금이라도 틀어졌다간 전부 무너질 것 같아서 무서워요. 아니, 그래도, 저 분은 그렇게 약하신 분은 아니죠. 김준영 님과는 다르게 약간의 불균형 정도는 스스로 견뎌 내실 분이죠.”
진중한 눈으로 염사 안의 인물들을 살피던 디나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기에서 계속 살피기엔 시간이 촉박해서 안 되겠네요. 여러분, 아직 한국에서 할 일이 남아 있나요?”
“아뇨. 당신을 설득해서 새블레에 함께 가는 것만 남았어요.”
“설득하실 필요 없어요. 루니라, 첸, 라스, 제 친구들에게 소중한 사람들의 목숨이 걸린 일이에요. 지금 바로 나갈 준비할게요.”
“나도 갈 거야!”
디나에 이어 루니라가 몸을 일으켰다. 동물 키메라도 대부분 루니라와 디나의 행동에 동조했다.
“둘 다 가면 나도 갈래.”
“집을 지킬 사람이 필요하니까 난 남을게.”
“디나랑 루니라 둘 다 나가는 마당에 집을 지키긴 무슨. 치료에 몇 주가 걸릴지 모르잖아. 거기에 퀴리 너 이그니랑 동기지? 가는 게 어때?”
“…….”
스핑크스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결국 전부 함께 가기로 했다. 디나가 얼마나 새블레에 머물지 알 수 없었던 데다, 디나 없이 다른 키메라들이 한국에서 계속 숨어 사는 것이 가능할지도 확실치 않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디나도 슬슬 한국에서 숨어 지내는 데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나는 굳건하게 반짝이는 디나의 눈을 보며 라이라를 떠올렸다. 울면서 살고 싶다고 말했던 라이라를. 나는 설움을 참으며 디나의 손을 잡아 감쌌다.
“잘 부탁드립니다. 도울 일이 있다면 저희 새벽별무리를 비롯해 연맹의 일원은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겁니다.”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던 디나가 이내 잡히지 않은 왼손을 내 손 위에 올렸다.
“은하 님은 진심으로 라이라 님과 이그니 님을 걱정해 주시는군요. 반과 데미안이 당신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당신이 살아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저는 정말 진심으로 당신을 만나고 싶었어요.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꼭 대화를 나눠 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제 힘으로는 당신을 찾을 수 없었지만요.”
속삭이며 디나는 활짝 웃어 보였다.
“은하 님이 저희가 생각한 것처럼 상냥한 사람이라 기뻐요!”
우리는 디나 일행과 함께 한국을 빠져나왔다. 꿈의 그물을 거닐며 디나에게 한국에서 어떻게 숨어 다녔는지 물었다.
마녀의 가게, 힘을 지우는 약병. 직접 마주치기라도 하지 않는 한 클라인 남매의 귀로도 그녀를 찾지 못한다.
“몸 위에 가짜 생명을 덧씌우고 좀 조작했어요. 생명력이란 즉 존재성이에요. 생명력을 왜곡하고 저의 존재를 일정 이상 흐리게 만든 상태로 세계에 인식시켰어요. 자연의 가호를 반대로 이용하는 거죠. ‘없는 존재’ 혹은 ‘불확실한 존재’가 되는 거니까 다른 사람은 소리를 들을 수도 없고, 찾을 수도 없어요. 거기에 더해서 생명의 가호로 생명력을 감추고, 생명력을 왜곡해서 퍼트려 공간이나 존재를 조금 다른, 자연으로 인식하게 하고…….”
그 후로도 많은 설명이 이어졌으나 대부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것을 알았는지 디나는 곧 그 모습을 직접 보여줬다. 디나의 안에서 생명의 힘이 퍼지며 디나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모습만이 아니라 마력, 꿈, 영혼, 그녀의 존재를 이루는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전부 모습을 감췄다.
그러나 내가 조정하는 꿈 안이었기 때문에 흔적이 남았다. 꿈이 아니었으면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디나가 조금 당황하며 속삭였다.
“어라? 평소와는 느낌이 다르네?”
그때 디나의 어깨 위에서 가디언이 힘을 빛냈다. 그 순간 디나의 모습이 완벽하게 사라졌다. 다양하게 꿈을 실험했으나 끝끝내 내 힘으로는 디나를 찾을 수 없었다.
잠시 후 디나가 원래대로 돌아와 모습을 보였다.
“은하 님의 영역 안에서는 숨기가 어렵네요. 고유 특성이랑 잘 맞기도 해서 숨는 건 정말 잘하는데……. 꿈속은 이런 느낌이군요.”
고개를 갸웃거리던 디나가 잠시 쑥스러운 기색으로 웃었다.
“한국은 은하 님의 꿈속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점점 숨기 어려울정도로 견고해지고 있어요. 그렇다고 계속 가디언의 도움을 받기는……규율상 좀 어렵거든요. 때마침 여러분이 찾아온 거죠, 뭐. 한국의 마법사들이 좀 많이 걱정되긴 하지만요. 하지만 그건 연맹 분들도 마찬가지겠지요.”
우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블레로 돌아오는 데만 한나절이 걸렸다. 꿈의 그물을 지나며 질색하고 경악했던 디나와 루니라는 한나절 만에 나타난 새블레의 결계를 보고선 감탄했다. 나는 결계 안에 들어선 후에야 현실로 내려섰다. 곧장 레미가 우리에게 통신을 연결했다.
“우리가 자리를 비운 동안 특별한 일은 없었어?”
「없었습니다.」
“인성이는?”
이번엔 소영이가 물었다.
「여러분이 나간 사이 한 번 돌아왔다 다시 나간 후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팀원은 인성 님, 코린 님, 오시언 님, 윌리엄 님입니다.」
“은하 님, 라이라 님과 이그니 님께 먼저 안내해 주셨으면 해요. 상태에 맞춰서 약을 만들어야 하는데, 며칠 정도 시간이 걸려서 빨리 시작하고 싶어요.”
“알겠어요.”
우리는 곧바로 ‘봉인의 방’으로 이동했다.
봉인의 방은 원래부터 있던 장소로, 본래 루카 전용 방이다. 봉인의 힘이 차오른 방에는 봉인석에 갇혀 있는 라이라와 이그니가 있었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디나와 키메라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특히 루니라와 퀴리(스핑크스)가 많이 동요했다.
안절부절못한 표정으로 슬쩍 디나를 돌아봤던 루니라는 디나가 심각한 표정이자 말을 걸지 않고 다시 라이라와 이그니를 바라보았다. 퀴리는 루니라의 어깨 위에서 묵묵히 봉인을 지켜봤다. 그때 마침 우리가 디나를 데리고 왔다는 사실을 들었는지 라스와 듀크가 봉인의 방에 찾아왔다. 루니라가 반색하며 손을 흔들었다.
“라스! 듀크!”
라스는 짧게 손을 흔들고는 평소와는 달리 조급한 기색으로 다가와 첸의 어깨를 짚었다.
“어때?”
“아직 검사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진정하세요.”
“응….”
듀크는 말없이 다가와 루니라와 퀴리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렸다.
디나는 봉인을 바라보며 입 안에서 무어라 웅얼거렸다. 혼잣말인가 싶었는데 디나의 어깨 위에서 가디언이 기척이 안개가 움직이는 것처럼 천천히 점멸했다. 차마 정확하게 감지할 수 없는 힘이 시야 끝에서 몽실몽실 흐트러진다. 잠깐 시선이 느껴진 것도 같았다.
잠시 후 봉인의 방으로 사람이 더 찾아왔다. 본래 루카가 사용하던 중요한 장소인 만큼 들어온 사람은 소수였다. 성진, 하무라, 제니, 테온. 들어오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아 선별하느라 조금 늦었다고 한다.
나와 소영이는 반가운 얼굴로 성진이를 손짓했다. 볼 수 있는 눈은 많을수록 좋다.
그가 어쩐지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나는 문득 그의 신경이 나와 소영이를 비껴나가 있다는 걸 눈치챘다.
“……!”
키잉─.
디나의 가디언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던 마력이 한순간 이상하게 비틀렸다. 디나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성진과 디나의 눈이 맞았다. 성진은 어쩐지 떨떠름한 기색이었고, 디나는 창백해졌다.
“아, 하리……그, 저 사람…….”
얼굴이 창백해지다 못해 몸이 떨리고 있다. 루니라가 의아한 눈으로 성진을 경계했다. 나와 예리는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성진의 양 손목을 붙잡았다.
“혹시 상성이 안 맞아서 무서운 거라면…….”
“네? 아, 아뇨. 마력이 너무 무시무시해서 깜짝 놀란 것뿐이에요. 너무 가까이만 다가오지 않으면 괜찮아요. 실례했습니다. 정말 깜짝 놀라서……. 전해 들은 것 이상이시네요.”
성진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동료를 치료해 줄 사람이기 때문인지 처음 만나는 사람을 대하는 것치고는 꽤 누그러진 태도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