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477
디나가 흠칫했다. 아까부터 조금씩 모습을 보이던 가디언이 결국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문양 같은 초록색 보석 조각 그리핀. 그리핀이 반짝반짝 빛나며 성진에게 다가갔다.
성진이 어쩐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가디언에게 손을 내민다.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 대화가 오가는 것 같지만 우리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동물 키메라들이 의아한 눈으로 디나에게 몰려들고, 루니라가 당황한 기색으로 디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저거 괜찮은 거야? 하리가 다른 사람이랑 접촉하는 건 처음 보는데.”
“아……괜찮아. 그냥 신기해하는 것 같아.”
“그렇게 특이한 마력이야?”
“응. 인간은 결코 가질 수 없는 느낌……이 있달까?”
우리는 성진을 잘 아는 만큼 디나의 말에 전면적으로 동의했다.
반짝반짝 빛나던 가디언이 곧 아까처럼 모습을 흐리고 디나의 곁에 돌아갔다. 디나는 꽤 오랫동안 봉인석을 보며 가디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사이 나는 봉인의 방에서 잠시 나가 새블레의 현 상황에 대해 보고받았다. 필요한 마법 및 마법석 목록을 건네받고, 가지고 있는 마법석을 전달하고, 당장 봉인의 방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받지 못한 동료들과 대화를 나눴다. 질문을 받을 사람이 나 한 사람인만큼 글자 기록이 남는 문자 채팅으로 대화를 나눴다.
대화를 나누던 도중 제니와 로카, 성진이 안에서 나왔다. 제니와 로카가 우리에게 인사했다.
“저희는 치료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듯하니 먼저 가 보겠습니다.”
“한국에서 모은 정보 정리하고 올게.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네.”
제니와 로카가 휙 사라졌다. 내 옆에 다가온 성진이 벽에 기대섰다.
“한국은 어땠어?”
“예상보다 더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 분위기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고, 론체르타에서 활동한다고 행동이 일일이 제한되는 건 아닌데……알고 보니 우리가 모르는 제약이 있었어. 이사장님, 주창민 씨, 지석철 씨, 무하의 김태원, 안종길, 손지윤이 클라인 남매와 계약으로 묶여 있어. 한국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데다, 계약의 여파로 생명력이 많이 약해졌어.”
성진의 얼굴이 굳었다.
“계약……이라고? 그런 낌새는 못 느꼈는데.”
“최근에 그나마 형상을 갖추게 된 게 아닐까 싶어. 전에 만났을 때는 생명력이 오히려 넘쳤잖아.”
“어떤 계약이야?”
“소리.”
이곳이 새블레이기에, 내가 감정을 다루는 마법사이기에 그나마 내뱉어도 괜찮은 것이다. 꿈의 그물 안에서는 한국이 아니라 할지라도 함부로 내뱉으면 안 된다. 로카에게도 계약 내용은 최대한 빙 둘러 설명했다. 동료들에게도 지금 비슷하게 설명하는 중이었다.
“소리를, ‘말’을 각인하는 계약이야.”
잠시 의미를 가늠하는 듯하던 성진의 표정이 굳었다. 이 한마디로 심각함을 눈치채다니 과연 대단하다.
“자세히.”
“말로 계약하고 소리를 각인으로 만들어서 심장에 새기는 거야. 계약 내용 중에 그 내용을 발설할 수 없다는 항목이 있어. 계약 항목에 해당하는 말을 하면 계약 위반으로 확인되어 계약자의 목숨을 붙잡아. 계약에 붙잡힌 사람은 어차피 발설하지 못하지만……예를 들어 다른 사람이, 나 같은 사람이 계약을 확인하고 내용을 발설해도…….”
“계약이 위반 된다는 건가.”
“응. ‘소리’라는 자연의 가호를 적용한 무시무시한 각인이야.”
“자연이 계약을 감시하는 건가.”
성진이 혀를 찼다.
“성가시기 짝이 없군.”
“내 말이. 뭐, 나머지는 로카 씨가 업데이트 할 정보를 확인하도록 해. 내 눈으로 보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고.”
“그래.”
아, 그러고 보니 정보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맞다. 이번에 인호 오빠한테 들은 건데, 인호 오빠랑 유정 언니 드디어 사귄대.”
“언제부터?”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놀란 기색이었다. 사실 인하한테 맨 먼저 말해 줘야 하는데. 새벽별무리에서 두 사람과 많이 친했던 건 나, 인하, 시하다. 하지만 한 번 떠오르니 당장 누구한테 이야기하지 않고는 못 참겠다.
“반년 전부터라고 하더라. 사실 우리가 1년 전 한국에 갔을 때부터 약간 낌새가 있었다나 봐. 그러니까……유정 언니가 인호 오빠의 감정을 눈치챘던 모양이더라고. 뭔가 특별한 행동을 보인 건 아닌데, 그냥 눈치챘다더라. 인호 오빠는 적극적으로 공세했던 학생 시절이 아니라 연애에선 아예 손 놓고 있던 때에 눈치챈 게 좀 허탈했다는 것 같아. 어쨌거나 유정 언니도 어느 순간부터 인호 오빠한테 마음이 갔고, 그래도 말마따나 연애할 상황이 아니라 서로 그 감정을 모른 척하고 있었는데,”
무심코 입가가 느슨해졌다. 두 사람이 드디어 사귄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장 기뻐할 사람은……역시 민희와 현호겠지. 민 선생님도 호들갑을 떨며 축하하지 않았을까. 준휘 선생님이랑 스승님은 날뛰는 민 선생님을 적당히 제지했으려나.
“유정 언니가 못 참고 고백했대. 상황이 상황인 만큼 여전히 연애에는 신경을 별로 못 쓰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그 이야기를 하는 인호 오빠, 즐거워 보였어.”
“인하가 들으면 좋아하겠군.”
“응.”
성진이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나는 다시 채팅에 집중했다.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 어느 정도 끝났을 무렵 봉인의 방에서 디나가 나왔다. 디나는 성진과 시선이 마주치곤 주눅 든 표정으로 몸을 움츠렸다. 나는 성큼성큼 걸어 성진과 디나 사이를 가로막았다. 보호 차원이었다.
나는 걱정을 담아 디나에게 물었다.
“저……마력이 많이 안 맞나요?”
“아뇨. 그게 아니라, 위압감 때문에 그래요…….”
“아…….”
확실히 이 녀석의 위압감은 익숙해지기 어렵다. 아무래도 당분간 성진과 디나가 마주칠 때는 좀 신경 쓰는 게 좋겠다. 디나는 흘끔 성진을 보고는 약간 어두운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라이라 님과 이그니 님의 확인이 끝났어요. 이제 김준영 님을 보러 가요.”
“알겠습니다.”
새블레 대현 지부에는 이미 연락해 두었다. 준영이에게는 나, 예리, 디나, 소영이, 첸, 이렇게 다섯이서만 가기로 했다. 루니라와 동물 키메라 일행은 동료의 안내를 받아 미리 키메라 전용 건물에 가 있을 예정이다.
현재 준영이는 새블레 중앙 병원에 있으며, 셰린과 란 리나에게 교대로 집중 치료를 받고 있다. 우리는 곧 준영이의 병실로 이동했다.
“은하 씨, 어서 오세요!”
셰린은 우리를 보고 한 번, 디나를 보고 또 한 번 반색했다. 그런데 기대 어린 표정으로 디나를 살피던 셰린의 눈동자에 문득 의문이 섞였다. 예리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왜 그러세요?”
“아, 그게, 느낌이, 뭐랄까……음, 사람인데 사람 같지 않다고 해야 할까……. 자연에 사랑받지만 배제 받는…? 음……. 아, 그래요! 성진 님과 비슷한 느낌이……. 앗! 죄송합니다. 초면에 이상한 말을 했네요. 나쁜 의미로 한 말이 아니에요. 그만큼 특수하고 특이한 마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뜻이었어요. 아 참, 인사부터 해야죠. 저는 셰린이라고 해요. 유펠르시아 소속 의사지만 대현에서 활동하고 있답니다. 지금은 리브리의 란 리나 씨와 교대로 김준영 환자를 돌보고 있어요.”
“저는 디나 심포니, 마찬가지로 의사예요. 감이 좋으시네요.”
“하하……. 갑자기 탐색부터 해서 정말로 죄송해요.”
셰린이 민망한 기색으로 얼굴을 붉혔다. 예리가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성진 오빠랑 닮았다고요? 마력이 이렇게 다른데도요? 거의 정반대 아닌가…?”
“확실히 마력은 정반대이지만……자연의 느낌이……. 그렇다고 꼭 닮은 건 아니고요, 비교하자면 그렇다는 거였어요.”
“으음…….”
감이 날카로운 건 분명한데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사람 같지 않다’는 말에는 무심코 뜨끔했으니까. 하지만 성진과 닮았다고?
반면 디나는 의아한 기색 하나 없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대응한 다음 셰린의 뒤에 서 있는 준영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요. 저희 힘으로는 이 아이를 어떻게 도울 수 없더군요. 디나 씨, 부디 준영이를 잘 부탁드려요.”
“네. 최선을 다할게요.”
디나는 굳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빠르게 준영이 앞으로 다가갔다.
나는 무심코 표정이 일그러지려는 것을 참았다. 안 보는 사이 준영이의 상태가 전보다 악화됐다.
저건 정신세계에서 손을 써도 소용없다. 육체, 정신, 마력, 전부가 조금씩,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무너져 내리고 있다. 영혼만이 어떻게든 버티고 서 있다. 생명은 무너지다 회복하기를 반복한다.
예리와 첸이 몸과 힘의 균형이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정기적으로 생명력이나 정기를 넣어 줬고, 그에 해당하는 약이나 구슬을 남기고 갔지만, 준영이의 상태를 유지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모양이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디나는 안도하며 눈을 빛냈다.
“영상으로 본 것보다 훨씬 상태가 괜찮네요.”
“괜찮은 상태라고요? 정말요?”
“네. 이렇게 끈질기게 버티고 있는걸요. 생명력과 그릇이 너무 약해서 견디기 힘들어하고 있지만, 성물의 가호도 있고, 이 정도면 제가 크게 힘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이렇게 상태가 안 좋은데…….”
셰린과 예리가 납득하지 못한 얼굴로 인상을 썼다. 그때 디나의 어깨에서 가디언이 작게 빛나며 천천히 움직였다. 디나가 흘끔 가디언을 바라보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건 일종의 성장열이에요. 준영 님의 상태가 악화되는 이유 중 하나로 자연과의 교감 실력이 뛰어나다고는 하나 실력에는 과분하다 못해 넘치고 거대하고 초월적인 마법을 받아들인 게 부담이 된 것 아닐까 하고 꼽아 주셨는데……그건 큰 관련이 없나 봐요.”
“그런가요?”
“자연과 교감하는 건 본래 사람 몸에 크게 부담이 가는 일이 아니고, 거대한 마력은 자연이 대신 받아줬잖아요. 제아무리 사람에게 거대한 마력이라고 해도 광대한 자연에 비할 수는 없지요. 오히려……저 성물의 가호가 더 부담스러웠을 거라고…….”
“어? 왜요?”
“아…!”
영문을 모르는 예리와 달리 셰린은 디나의 말을 통해 금방 이유를 유추해 냈다. 디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주위의 자연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과 이름을 지닌 거대한 자연이 직접 의지를 지니고 육체에 힘을 부여하는 건 달라요. 하물며 저 성물은 다른 성물에 비해서 거대한 마력을 지니고 있는걸요.”
“그건 디나 씨의 말씀이 맞아요. 하지만 반대로 성물이 준영이의 목숨을 붙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준영이는 한 번 이상 숨이 멈췄을 거예요.”
“네. 말씀하신 대로예요. 저도 가호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 건 아니에요. 다만 현재 상태의 원인을 설명하려다 보니 원인 중 하나로 꼽게 된 거죠.”
두 사람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첫 번째이자 가장 큰 원인은……생명이 받은 근원적인 충격이에요.”
“근원적인 충격…….”
“생명도 자연의 일부이고 이치예요. 때문에 마법적인 치료만으로는 메워질 수 없는 것이 가끔 있어요.”
“불치병 같은 것 말인가요?”
마법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현대의 불치병 같은 것은 셰린보다 예리가 훨씬 잘 안다. 디나는 준영이의 머리 위로 손을 짚으며 대답했다.
“음, 불치병은……그건 좀 더 복잡한 사정이 많이 얽혀 있지요. 방금 제가 말한 건……전투로 인한 죽음이에요. 가끔 뛰어난 마법사의 치료를 받아도 죽음을 맞이하는 약한 마법사가 있지요.”
“네. 보통은 때가 늦었거나, 상대의 마법이 너무 강하거나, 혹은 육체가 너무 약해서……. 하지만 준영이는 그 정도로 육체가 약하진 않아요. 약하다 약하다 하지만 그건 초월자 기준이고, B랭크인걸요.”
“네. 초월자 기준으로 약하죠. 그리고 트라베리아의 습격에 당한 것이니, 준영 님을 공격한 적은 아주 강했겠죠? B랭크 수준 마법사는 그야말로 눈앞에서 대치하는 것만으로 목숨이 짓눌릴 정도로.”
준영이를 공격한 적은 카리브디스가 모델인 오리아. 오리아의 실력은 S랭크 상위이며, 에리카의 옆에 있으면서 계속 강해지고 있다.
“강대한 S랭크 마법사의 마력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B랭크 마법사는 죽을 수 있어요. 그런데 그런 이의 공격을 직접 몸에 받았어요. 제가 보기에 준영 님의 그릇은……B랭크가 한계였던 것 같아요. 설령 마법으로 치유해도, 복원되었어도, 종의 한계에서 오는 그 절대적인 차이의 절망감은 메울 수 없…어요.”
셰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생명을 자연의 이치로 생각하라는 게……그런 뜻이군요. 마력으로 힘을 불어넣어도 한 번 죽음을 경험한 생명은 쉽사리 다시 빛나지 못한다는……건가요.”
“네. 그리고 예리 씨가 예상한 것처럼 복원된 육체의 문제도 있는데……. 아, 생명력…….”
말을 이으며 인상을 찌푸리던 디나가 또 한 번 가디언의 눈치를 보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복원된 육체와 ‘생명’에는 초월자의 생명력이 들어가 있어요. 초월자의 힘에 삼켜지고 망가진 그릇이 그 생명력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너지고 있는 것 같…아요.”
예리가 양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준영이를 삼킨 것은 카리브디스, 예리가 아니었다면 복원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초월자의 생명력이 녹아 있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버티는 거예요. 초월자의 마법에 의해 얻은 충격을 초월자가 전해 준 생명력으로 보충하고 있는 거죠. 그러다 보니 본래의 몸이 쉽게 견디지 못해서 이렇게 무너지고 있지만, 괜찮아요. 자연의 가호도 있고, 조금만 더 체력과 생명력을 이끌어 내 주면 버틸 거예요. 그래도 시간이 제법 걸릴 거예요. 짧아도 3주 정도?”
이야기를 들으며 입술을 짓씹던 예리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S랭크 마법에 당한 B랭크 이하 마법사의 몸을 복원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에요.”
“네. 저도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의 몸을 복원한 적이 여러 번 있어요. 보통 이런 부작용은 나타나지 않아요. 이건 웬만한 사람한텐 일어나지 않는 극히 희박한 특수 케이스예요. 처음에 성장열……이라고 했듯이, 부자연스럽게 성장한 계기를 얻은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성물의 가호나, 공격한 적의 특수능력이나, 본인의 특수한 체질이 결합되어 나타난……몇만 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특수한 케이스……예요.”
눈치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디나는 가디언의 보충을 받으며 설명하고 있는 모양이다. 자신이 아는 것도 중간중간 있었던 것 같지만, 설명을 듣지 않고서는 모르는 게 더 많았던 것 같다.
하르펜이 만든 가디언 안에는 대체 얼마나 많은 지식이 쌓여 있는 것일까. 디나는 보면 볼수록 평범한 ‘인간’ 같고, 하리는 보면 볼수록 정체를 알 수 없어서, 대체 하르펜은 어떤 사람이었던 건가 생각하게 된다. 그런 하르펜보다 강했으며 하르펜이 일생 좋아했던 루키아는 또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래서, 음, 보자, 이 상태에 맞는 약이…….”
디나는 조금씩 드러내놓고 하리와 대화를 주고받았다. 하리의 목소리는 여전히 들리지 않았으나 마력이나 감정 상태를 통해 의지를 주고받고 있다는 건 알 수 있다.
“……좋아. 그렇게 할까? 예리 씨, 혹시 저를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쓰는 방식은 아무래도 저와 마법의 원리가 비슷한 예리 씨 외에는 따라오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요.”
“물론이죠. 뭘 하면 되나요?”
“저도 옆에서 지켜봐도 될까요? 생명력에 직접 접촉하는 치료 방식에 관심이 있어요.”
셰린이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묻자 디나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디나는 곧바로 치료를 위한 설명을 시작했다.
“상태에 맞는 약을 만들긴 할 건데, 이분은 약도 약이지만 정기적으로 생명력을 조정하고 몸 전체를 구석구석 회복시켜야 해요. 저는 이후 며칠 동안은 약을 만드는 데 매달릴 예정이라 그 동안은 예리 님을 비롯한 다른 분들께서 그 일을 대신해 주셨으면 해요. 어떻게 하느냐면…….”
“와아…….”
두 사람의 마력이 준영이의 몸에 퍼져나가는 것을 우리는 뒤에서 한동안 지켜보았다. 슬금슬금 흘러들어 가는 마력의 움직임은 무척 조심스럽고 세세했다. 눈동자를 굴리며 흘러넘치는 생명력과 마력을 찬찬히 살폈다.
예리는 디나의 지시를 따라 마력의 흐름을 조금씩 바꾸며 치료를 유지했다. 긴 시간에 걸쳐 차츰차츰 치료해야 한다는 모양이다. 한 방울 적시듯이 생명력을 뿌려 준영이의 생명력을 유도하고 회복시킨다. 그렇게 조금 나아진 생명력이 온몸을 고루고루 타고 돌 수 있도록 도우며, 전체적으로 체력을 회복시킨다. 이걸 최소 일주일은 반복해야 한다.
진득한 치료를 한 번 마친 후 디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촉박하지만 않으면 대화를 나누면서 예리 님의 마법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데, 아쉽네요.”
“저도요. 디나 님의 마법이나 하르펜 님의 마법에 대해 궁금한 게 너무 많아요. 하지만 그건 당장 급한 게 아니니 나중으로 미뤄요!”
디나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 분량의 약을 만드는 데 한 사흘 정도 걸릴 거예요. 출입을 통제할 수 있는 제조실을 알려 주셨으면 좋겠어요.”
옆에서 치료를 지켜보며 감탄하던 셰린이 퍼뜩 대답했다.
“아, 그럼 여기 병원에 있는 제조실을 쓰세요. 9번이랑 10번은 현재 쓰지 않거든요.”
“안내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디나는 보다 넓은 제10 제조실을 선택한 뒤 필요한 도구를 제조실에 채웠다. 가장 뛰어난 마법석과 약이 있는 곳을 묻기에 본부 엘디나에 있는 약방과 보관고로 안내했다. 여기에는 새블레의 뛰어난 마법석과 약이 종류 별로 모여 있다. 우리가 만든 마법석과 마법약도 몇 개 있다.
디나는 허락을 맡고 도움이 되는 약과 마법석을 전부 챙겼다. 그러고는 몇몇 마법사에게 특정한 약 혹은 마법석을 부탁했다. 내게서 진화 보조석을 건네받고는 신기하다며 눈을 반짝이기도 했다.
필요한 재료를 갖춘 디나는 제10 제조실에 들어가 약 제조를 시작했다. 우리는 디나의 부탁에 따라 제조실을 봉쇄했다.
디나가 제10제조실에 들어간지 하루가 지난 날 공간 회로를 살피러 갔던 인성이 일행이 돌아왔다. 그들은 우리가 디나와 함께 무사히 돌아온 것을 알고 안도했다.
“나중에 네 상태도 한 번 봐 줄 거야.”
인성이는 웃음기 어린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 없이 호기심뿐인 눈동자에 가슴이 조금 아팠다.
트라던트의 힘은 이미 인성이의 안에 융화되었다. 조금 상태를 완화할 수는 있을지 모른다. 효과적으로 트라던트를 제어할 방법이 하나 정도는 더 생길지도 모르지. 하지만 한 번 완성된 지금의 몸이 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인성이가 돌아오고 하루가 지났을 때, 경천동지할 일이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기적이라고 외쳤다.
특수한 병에 의해 50년 이상 잠들어 있던 랭킹 3위, 이명 로타가 눈을 뜬 것이다. 이 놀라운 소식에 새블레 전역이 들썩였다.
로타는 제가 이끄는 부족과 친한 지인만이 아는 자신의 별장에서 부족들의 도움을 받아 잠들었다. 그러나 참극이 일어나며 하인리히가 로타의 부족 사람과 함께 로타를 리브리로 옮겼다. 하인리히, 제니, 앤서니는 루키아와 친분이 있고, 그런 만큼 로타와도 교류를 나누는 사이였다.
놀란 것도 잠시 ‘어쩌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로타는 디나가 새블레에 찾아왔기에 억지로 눈을 뜬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만큼 타이밍이 절묘했다. 디나가 로타를 치료한 것……은 아니다. 디나는 계속 제조실 안에 틀어박혀 있고, 로타는 깨어났을 뿐이지 병이 치료된 건 아니다.
다만 하인리히 일행은 이번에 우리가 말하기 전까지 디나의 정체를 몰랐다. 그런 만큼 로타가 디나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 디나와 친분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디나가 나타난 것이 로타가 잠들기 전이었고, 로타가 루키아 및 하르펜과 친분이 두터웠던 만큼 알고 있을 확률이 더 높긴 하지만…….
호기심이 일었으나 우리는 로타와 아는 사이가 아니다. 또한 로타는 현재 몸이 많이 쇠약해져 있다. 500살이 넘은 만큼 병에 걸린 것을 제외하고도 많이 노쇠한 상태다. 뛰어난 의사가 붙더라도 하루 정도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며, 치료를 받더라도 이제 쇠약해진 몸이 나아지긴 어렵다.
우리 중에 로타와 접촉한 것은 의사로서 간 예리뿐이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생각보다 많이 쇠약해져 있다고 한다. 작은 마법 정도는 괜찮지만, 실력에 걸맞은 마법을 쓰면 몸에 무리가 갈 정도란다.
그다음 날 오전에 디나가 제조실에서 나왔다. 그녀는 나오자마자 나를 찾아왔다.
“약을 다 만들었어요. 하지만 약을 써도 확률이 너무 낮아서……은하 님께서 저를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어떻게 도우면 되죠?”
“은하 님께서 주셨던 진화 보조석이 많이 도움 됐어요. 진화석과 정화석 위주로 마법석을 많이 준비해 주시고, 상황에 따라 마법을 사용해 서포트해 주셨으면 해요. 그리고 첸과 예리 님께도 도움을 구할 생각이에요. 예리 님 안에 있는 힘은 무척 강대해요. 제게 주어진 힘은 ‘생명’을 만드는 데 많이 쓰여서 하르펜 선생님이 심열을 기울여 만든 것 치고는 약한 편이에요. 하지만 예리 님 안에 있는 마법석은 달라요. 저보다 더 생명의 근원에 닿아 있을 거예요. 머지않아 예리 님은 그걸 몸소 깨닫겠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만큼은 아니더라도, 예리 역시 무서운 속도로 강해지고 있다.
“우선 손발을 맞춰 본 후에 치료를 시작하도록 하죠. 그리고 혹시 도움이 될 만한 능력자가 있다면 한두 명 정도 추천해주세요. 웬만한 사람과 다 상성이 잘 맞아야 하고, 아, 의사면 금상첨화예요. 생명력, 영혼, 정신세계, 근원, 넷 중 하나라도 느끼거나 볼 수 있어야 해요.”
“알았어요. 잠깐만요, 추려 볼게요.”
걸맞은 마법사를 추리기 위해 문이를 열었을 때였다. 기지 내로 익숙한 기척이 찾아왔다. 리브리의 제니, 디나도 바로 방문을 눈치챘다.
“손님이 온 모양이네요. 나가 보셔야 하나요?”
“제니 씨가 직접 왔을 정도면 로타 씨에 관한 일일지도 몰라요. 잠깐 실례할게요.”
“로타 님……?”
생각도 못했는지 디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무래도 정말 제조실에만 있다가 바로 나에게 왔나 보다.
“네. 어제 깨어나셨어요.”
“깨어…….”
멍하니 입술을 움직이던 디나의 눈동자가 물기를 담고 일렁거렸다. 기쁨의 눈물이 아니라 슬픔과 안타까움의 눈물에 가까웠다. 왜 그런 감정을 보이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역시 디나는 로타와 아는 사이다.
“깨어, 나셨군요…….”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대답하고 잠시 머뭇거리던 디나가 곧 고개를 들었다.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네, 물론이죠.”
나와 함께 제니를 맞던 말던 그건 디나의 자유다. 나는 디나의 손을 잡고 이동했다. 제니가 온 것을 눈치챈 다른 동료들도 몇 명 중앙 정원으로 나왔다.
“무슨 일이신가요, 제니 씨?”
“로타 씨의 부탁을 듣고 왔습니다. 별무리와 정예리 씨, 디나 심포니 씨를 만나 보고 싶다 하십니다. 혹시 지금 시간 괜찮으십니까?”
우리의 팀명은 새벽별무리. 별무리는 그중에서 중심 멤버 다섯 명을 일컫는다.
“저는 괜찮습니다만, 다른 동료들이 시간이 될지는 지금 확인해 봐야 압니다. 그리고 디나 씨는…….”
나는 소영이에 이어 흘끔 디나의 눈치를 살폈다. 어쩐지 멍한 빛으로 제니를 바라보던 디나의 눈동자가 포기에 가까운 수긍의 감정을 띠며 가라앉았다.
“괜찮아요. 갈게요.”
나는 곧바로 여기에 없는 멤버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인하, 인성이, 성진이, 예리, 네 사람 다 오겠다고 했다.
연락을 듣고 온 동료들과 함께 제니 씨를 따랐다. 집중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라지만 로타는 중앙 병원이 아니라 리브리에 옮겨진 본인의 별장에 있다.
나무로 된 집 안, 앤티크한 무늬의 침대 위에 피곤한 얼굴을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갈색 피부, 약간 굽어 있는 짧은 검은 머리칼에 순진한 눈망울. 어딜 봐도 500세를 넘은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의 내부에 갈무리 된 강대하고 짙은, 그러면서도 노쇠한 마력이 그녀의 힘과 나이를 어렴풋이 짐작케 한다.
제니가 우리에게 짧게 인사하곤 바깥으로 나갔다. 로타가 금색 눈동자를 깜빡이며 우리를 한 명 한 명 확인했다. 로타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그려졌다.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새벽별무리 여러분. 그리고 디나,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이에요, 로타 할머니.”
외모도 젊어 보이지만, 목소리는 아예 앳되었다. 디나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역시 로타와 디나는 아는 사이였나 보다.
“마지막으로 만난 지 70년이 넘었으니 정말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잘 지냈나요?”
“그럼요. 혼자가 아닌걸요.”
“다행이에요.”
잔잔히 미소 지은 로타가 우리를 돌아보았다.
“실례인 줄은 아나 침대에서 맞는 것을 부디 너그러이 봐주시길. 아직 몸이 정상이 아니라 일어나지 말라고 의사에게 경고를 받았습니다.”
“로타 님의 몸 상태에 대해서는 알고 있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로타가 주위를 조금 둘러보더니 마법으로 방을 넓히며 의자를 소환했다. 우리는 인사하며 의자에 앉았다.
“이렇게 여러분을 부른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여러분을 꼭 한 번 만나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 이야기를 여러분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사실 여러분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설마 ‘예언’ 속에서요?”
“네.”
로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는 한편 나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로타의 얼굴은 돌아다니는 사진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마주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어딘지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단편적인 장면들 속에서 아주 많은 사람이 스쳐지나갔지만, 그중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단연코 여러분이었습니다.”
“와……. 그럼 로타 님은 이 두 사람의 미래도 읽을 수 있는 건가요? 트라베리아의 포츈도 예언 능력이 있는데, 이 두 사람은 읽을 수 없거든요.”
소영이가 신기한 눈으로 나와 성진이를 가리켰다. 잠시 고민하던 로타가 고개를 저었다.
“저도 두 분의 미래를 정확히 보지는 못합니다. 제가 본 것은 ‘사람’이라는 하나의 개체가 아니라 미래에 탄생할 찬란한 영혼이었습니다. 그리고 세계와 그 영혼들이 만드는 길……이 어렴풋이 보이는 겁니다.”
말을 잇다 말고 로타가 민망한 기색으로 손을 꼼지락거렸다.
“항상 그렇지만 보는 것을 말만으로 설명하자니 힘드네요. 하지만 예언은 직접 감각을 공유하거나 보여 줄 수 없는 종류의 능력이기에 이해해 주세요.”
“그럼 혹시 염사도 못하나요?”
“네. 어려워요. 저만이 아니라 예언은 보통 다 그렇답니다.”
소영이가 흘끔 나를 보았다. 나도 예지몽을 꾸었을 때 환각으로 공감하게 하거나 염사로 보여 주기 어렵다. 이건 내 예지몽만의 특징이 아니라 모든 예언의 특징이었구나.
“예언가라 불리고 있지만 제가 지닌 예언의 힘은 마법에서 부가적으로 따라온 것에 불과해요. 제 마법은 천지마법, 하늘의 힘과 땅의 힘을 불러오는 마법이죠. 이름만 들으면 대단히 광활한 마법 같지만 본래는 날씨를 읽거나 식량이 부족할 때 식량을 찾을 수 있도록 대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등 자연과 교감하기 위한 마법에 불과했어요.”
로타의 마법에 대해선 지금 처음 알았다. 하인리히 일행이나 같은 유목민, 혹은 랭크 시험을 맡았던 샐레나라면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세간에 밝혀진 바는 없다.
‘불과했다’는 부분에서 나는 깊은 간극을 읽었다. 이전에는 불과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라는 뜻이다. 어쩌면 유클라프에 의해 불완전해진 지금의 이 천지마저 뒤엎어 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로타는 몸만 멀쩡했다면 3강도 능히 쓰러뜨릴 수 있을지 모르는 실력자다.
“저는 천지의 흐름을 따라 예언을 해요. 천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세월을 따라 과거와 미래를 봅니다. 세계의 꿈을 통해.”
로타가 미래를 보는 방법도 ‘꿈’에 가깝구나. 그걸 알자 무언가가 떠오를 듯도 했다.
“세상의 기억을 더듬다 보면 ‘길’이 나와요. 관념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길입니다. 길을 떠돌다 보면 아주 많은 풍경이 머릿속을 스쳐요. 스치는 풍경이 전부 있었던 과거나 미래의 영상인 것은 아니에요. ‘가능성 있는 미래’이거나 ‘어쩌면 있었을지 모르는 미래’이거나……. 미래는 완벽히 고정되어 있지 않아요. 미래로 향하는 길은 항상 수천 수만 갈래로 나뉘어 있어 꽤 어지럽답니다.”
로타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 길을 눈꺼풀 안에서 떠올리고 있는 것일까.
“비단 미래로 향하는 길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천지의 길은 일일이 세어보면 무수히 많아 셀 수가 없어요.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영혼의 숫자만큼, 모든 시대의 숫자만큼 있다고 표현하면 감이 오실지 모르겠군요. 그러니 중요한 흐름을 보려면 세세히 나뉜 갈림길을 따라갈 것이 아니라 앞으로 쭉 뻗어진 커다란 줄기를 주시해야 합니다. 중요 줄기는 그것 하나가 세계의 모든 것으로 느껴질 정도로 아주 넓답니다.”
모두가 호기심 혹은 감탄이 어린 눈으로 로타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나 외의 사람이 어떻게 예언하는지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물며 이것은 로 유명한 랭킹 3위 로타의 이야기다.
“커다란 줄기를 걷다 보면 아주 다양한 빛 덩어리가 나타납니다. 이 빛 덩어리는 영혼이에요. 세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자들의 영혼이죠. 꼭 사람의 영혼만 있는 것은 아니에요. 나무이거나, 동물이거나, 혹은 대지이거나, 물이거나, 바람일 때도 있어요.”
목소리에 섞인 감정을 따라 로타의 앞뒤로 빛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길이 펼쳐지는 듯했다. 어렴풋이 보이는 이것이 로타의 ‘꿈’인가.
“길과 영혼을 통해 여러분을 보았습니다. 세계의 미래를 보았고, 단편적으로 여러분의 미래를 만났어요. 여러분이 태어났을 무렵의 시간부터 이어진 큰길 중 어느 길을 보아도 당신들의 모습이 있었지요. 그래서 꼭 이렇게 만나 보고 싶었습니다. ……끝나기 전에, 꼭 한 번.”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로타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 손을 마주 잡고 악수했다. 미지근한 온기가 손을 감쌌다.
“특히 유은하 님과는 꼭 한 번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큰 줄기 맨 앞에는 항상 당신이 있었어요. 운명을 읽을 수 없는 자, 운명을 만들며 이끄는 자. 포츈 님은 참 잘 읽으신 편이에요. 점술과 예지 정도로는 보통 이렇게 큰 운명을 읽지 못하거든요.”
……운명을 읽을 수 없는 자. 그러고 보면 성진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운명의 중심이라 믿고 있다고 했지.
하지만 이렇게 들으니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걸 넘어서 불쾌했다. 알 수 없는 괴로운 감정에 속이 울렁거렸다. 커다란 운명이란 게 이 모든 상황을 만든 것 같다는 불쾌감일까. 살고, 죽고, 분노하고, 증오하고, 달려간 그 모든 것이 모두 운명을 따라서라니…….
그때 로타의 얼굴이 조금 가까워졌다.
“은하 님, 이건 제가 드릴 수 있는 유일한 힌트이자 충고예요.”
“로타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