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481
“…….”
“루키아 폴라리스, 하르펜 라우드, 로타, 이노키언. 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마법의 극의에 달한 자들이지. 우리와는 다르게 스스로의 힘으로, 일부러 만든 희생 없이. 마법의 경지에는 정말 끝이 없나 봐. 그만한 마법을 볼 수 있어 무척 기쁘군. 베로니카도 그렇게 생각할 테지.”
에리카의 목소리에는 내가 느낀 것과 닮은 ‘경이’가 담겨 있었다. 말을 이으며 트라던트 탑을 조율하던 에리카가 하늘을 향해 눈짓했다.
“왔군.”
하늘에서 검은 마력이 번개처럼 떨어졌다. 번개가 사라진 자리에 인성이가 서 있었다. 힘을 꽤 많이 썼는지 피부에 트라던트의 마력이 번져 있다. 우리는 재빨리 인성이에게 달려갔다. 내가 뭘 하기도 전에 성진이 인성이의 오른 손목을 붙잡고 곧바로 소매를 걷어붙였다.
“괜찮아?”
“괜찮아, 이 정도는.”
“어때?”
“…괜찮은 것 같네.”
성진이 안심한 얼굴로 속삭였다. 그걸 보고 나도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인성이가 쓴웃음을 지었다.
“내 말은 못 믿는 거야?”
“네 괜찮다는 말을 누가 믿어.”
“은하 너한테 들으니까 정말 뼈아프다. 아니, 그보다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공간이 진정되던데…….”
“그건…….”
나는 표정을 흐렸다. 그러나 상황을 설명하기 전에 에리카가 우리에게 경고했다.
“이제 돌아가. 머지않아 파도가 쏟아질 거다. 길을 잃고 싶지는 않을 테지?”
우리의 앞에 또다시 검은 통로가 나타났다. 전언은 에리카가 했지만 통로를 연 것은 유클라프다. 이번에는 새블레의 공간 회로와 연결 되어 있다. 심지어 공간이 어느 정도 안정되어 있는지를 걸으면서 찬찬히 살펴보고 안심이라도 하라는 건지 길이 이어져 있다. 아주 친절하기도 하지.
우리는 통로를 거닐며 세계를 살폈다. 에리카의 경고대로 세상은 아직 완전히 진정되지 않았다. 다만 새로운 고정대 덕분에 균형이 무너진 부위를 오래 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상처 한두 개 정도로는 세계가 꿈쩍도 하지 않게 된 거다.
하지만 세계의 축은 계속 움직이고 있으니 머지않아 로타가 남긴 고정대도 소용없는 물건이 되겠지.
새블레의 결계를 넘으며 우리는 인성이에게 로타의 죽음을 전했다. 인성이의 표정의 흐려졌다.
“그래도……원하는 곳으로 갔다니 다행이네.”
그래, 로타의 영혼이 트라던트에 이용당하지 않고 원하는 곳으로 향했다는 게 그나마의 위안이다. 영혼이 갈 길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언젠가 나처럼, 다만 기억을 잃고 어딘가에 환생하지 않을까.
거기다 로타는 트라베리아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트라베리아 때문에 수명이 조금 앞당겨지긴 했지만, 그래 봐야 몇 시간 차이, 로타는 자신이 원하던 삶을 살다 수명이 다해 죽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그때 인성이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성진의 어깨를 붙잡았다.
“몇 개 떨어질 것 같아.”
“그렇군.”
성진이 검대를 잡으며 갈무리했던 마력을 풀었다. 떨어지는 공간을 순시에 판단해서 적절히 처리할 수 있는 건 현재 연맹에서 성진밖에 없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감지마법사는 판단 능력이 부족하고, 인성이와 윌리엄은 힘이 부족하다.
“옆에서 봐도 돼? 네가 공간을 되돌리는 모습이 굉장히 신기하더라고. 원리를 알 수 없더라. 또 이런 일이 생겼을 때 방어를 너한테만 맡길 수는 없잖아.”
말투를 보아 하니 이번에는 조금만 떨어지다 말 모양이다. 인성이의 의견에 동의하며 나도 두 사람을 따라갔다.
하늘에서 유성이 몇 개 떨어져 내렸다. 이번엔 중요한 조각이 아니었던지 성진은 전부 산산이 부숴 버렸다.
우박의 압력은 결계 너머로 느꼈을 때보다 상당히 강했다. 중요한 조각이 아니라고는 하나 세계에서 떨어져 나온 일부분이다. 자그마한 조각 하나도 무시무시한 힘을 품고 있다. 자연의 근원적인 힘을…….
문득 준영이가 깨어나 있었다면 좋았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랬다면 공간을 더 읽을 수 있었을 텐데.
떨어지는 우박을 처리하고 나서야 결계 안으로 들어섰다. 로타의 사망이 알려진 탓인지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았다.
결계를 보강하기 위해서 엘디나로 향했다. 다른 최고 전력들도 대륙을 수호할 소수를 제외하면 엘디나로 모이고 있었다.
결계의 중심은 여전히 루카와 레일리다. 하인리히는 자리에 없었다. 남극을 지키기 위해서도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로타의 죽음을 지키고 싶어서이리라.
“여러분 수고하셨어요! 다친 데는 없나요?”
“멀쩡해요.”
우리는 결계 상태와 피해 규모에 대해 확인했다. 제니, 이청우, 레녹, 단탈리온이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우박 대부분은 성진이 베어 버렸지만, 숫자가 많았던 만큼 완벽할 수 없었고, 땅에서도 균열이 일어났다. 네 사람이 다친 것은 그 힘을 앞서서 막아 냈기 때문이다.
“윌리엄에게 이야기를 들어 보니 제법 안정된 상태라고 합니다만, 과연 이 안정된 상태가 얼마나 가리라 보십니까?”
고심이 어린 루카의 질문에 인성이가 하늘을 흘끗 올려다보았다.
“로타 씨가 남긴 마법이 제 기능을 발휘하는 한, 점점 더 안정될 거예요. 위험한 건 공간의 구조가 다시 바뀔 때인데……그쪽도 충분한 준비를 한 뒤 비틀 테니 적어도 일주일 정도는 괜찮을 거라 봅니다.”
“일주일이라…….”
“하지만 안정되었다는 게 위험이 없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한동안 세계의 균형이 일그러진 여파에 의해 공간의 잔여물로 이루어진 파도가 밀어닥칠 겁니다. 결계를 좀 더 보강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더 보강? 정말 끝이 없네요.”
레일리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공간 여파 대책이기 때문에 이번 결계 보강은 인성이와 윌리엄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마법사를 부르거나 되돌려 보내 일단 본래 있던 결계부터 복구시켰다. 공간을 막아 내는 동안 결계가 상당히 부서지거나 소모된 탓이다.
새블레 전체를 살펴보는 마법석은 엘디나에 있지만, 각 대륙이나 도시를 지키는 마법석은 또 해당하는 지역에 따로 있다. 거기의 담당자들이 직접 복구하는 게 더 효율적이다. 그림자 도시의 결계도 살펴봐야겠지. 참고로 부상자는 한창 의사에게 치료받는 중이다.
하나둘 결계를 살펴보던 순간이었다. 또다시 생겨난 이변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역시 인성이였다.
“……어?”
두 번째로 반응한 것은 드물게도 나였다.
다만 나는 공간의 이변을 감지한 것이 아니라 꿈의 그물과 교감한 것이었다. 내 안에 희미하게 남은 ‘시나’의 마력이, 소니아의 꿈이 내게 이변을 알렸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키이잉─….
소리가 들렸다. ‘시나’의 감각을 통해 들려 왔다.
세계가 다시 한번 일그러지는 소리다.
──파도가, 온다.
쾅!
“…이 미친 새끼들이!”
인성이가 기겁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가슴의 불길함을 따라 자리를 박찼다.
결계를 증축하기 위해 새블레의 중심에 있었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나는 다급히 새블레의 중심 마법석 위에 손을 얹었다.
“『전개!!!』”
자리에 있던 마법사들이 모두 당황하며 나와 인성이를 돌아보았다.
“뭐야?”
“무슨 일입니까?”
마법석을 중심으로 내 마력이 순식간에 새블레에 퍼지며 기존의 결계를 따라 더 단단한 결계가 생성됐다. 레미가 별꽃잎과 함께 어깨 위로 내려섰다.
「문제가 있습니까?」
“파도가…….”
“파도가 옵니다!”
우리 다음으로는 성진과 윌리엄이 눈치챘다. 윌리엄이 재빨리 내 손등 위에 손을 겹치며 마법석에 마력을 퍼부었다. 중심 마법석과 레미의 명령을 따라 각 대륙의 결계 기둥과 마법석이 가동됐다.
“그것도 보통 파도가 아닙니다! 이건…….”
“공간의 흐름이 변했어.”
다양한 결계가 덧씌워지고, 결계 맨 위를 인성이의 그림자 단층이 덮는다. 성진이 새블레의 결계와는 부딪치지 않게 마법을 쓸 수 있는 전용 마법석을 따로 소환했다. 곧 인성이도 중심 마법석 위에 손을 겹쳤다. 레일리가 당황해 물었다.
“뭐? 아니, 좀 자세히 말해 봐!”
윌리엄이 사납게 대답했다.
“유클라프가 공간의 흐름을 바꿨어! 공간의 잔여물이 아니라, 큰 파도가, 격류가 올 거야!”
“뭐야, 이건. 기둥……을 따라, 검은 원, 흔들리는…….”
시나의 목소리가 아직도 머릿속에 윙윙 울렸다. 어렴풋이 그려지는 형태를 따라 입술을 움직이던 중, 시나의 감각이 갑자기 ‘팍!’ 하고 끊겼다.
인성이는 고심하며 마력을 움직였다. 본래부터 있던 그림자석을 이용해 만들어진 그림자 단층을 따라 새로운 마력장이 펼쳐진다. 핵에 새겨진 결계와는 다른 길을 따라 그림자의 마력이 짙어진다. 레미가 인성이를 위해 낸 길이다.
성진이 레미를 통해 도시를 수호하는 전 지부에 통신을 연결했다. 다행히 사람들은 아직 그림자 세계에 피난해 있고, 파손되었던 결계는 거의 복구된 상태였다. 결계 안임에도 통신이 파직파직 흩어진다. 불완전한 통신을 시공간마법의 힘으로 열어젖히며 성진이 경고했다.
“파도가 온다. 전원 전력으로 방어마법을 펼쳐!”
우리에 이어 레일리와 루카도 온 힘을 다해 마력을 내질렀다. ─성진의 경고가 채 끝나기도 전에 파도가 밀어닥쳤다.
콰과과광!
새카만 미지의 힘이 모든 것을 가려 삼키는 듯한 감각에 두려움부터 몰려왔다. 나는 온몸에서 마력을 짜내며 숨을 삼켰다.
“윽……!”
공간의 격류를 가장 먼저 부딪쳐 막아 내는 건 인성이가 결계 바깥에 설치한 공간 방해 장이다. 격류가 생겨난 원인은 유클라프가 공간을 비틀었기 때문이지만, 우리를 덮쳐온 격류는 유클라프의 힘이 아니라 세계의 흐름을 따라 밀려들어 온 파도다. 그 순간 에리카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머지않아 파도가 쏟아질 거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건 이런 뜻이었나. 아주……친절하기도 해라.
‘이 미친 새끼들! 제정신이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진짜 확 돌아 버린 거 아냐? 공간이 진정되고 얼마나 지났다고!’
방해 장을 거쳐 힘이 약해진 파편조차 결계에 닿을 때면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성진이 전용 마법석을 통해 다른 마법에는 영향을 주지 않게끔 마법을 사용했다. 결계를 일그러뜨리며 들어온 세계의 파편을 부수고, 공간 장 바깥에도 힘을 써서 파도의 궤도를 약간 비껴나가게 한다.
그러나 많이 비껴나가게 할 수는 없었다. 궤도를 완전히 바꿨다간 불완전한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거기다 결계 안에 흘러들어온 파편을 처리하려면 성진이라도 상당한 힘을 가해야 한다. 스치는 것만으로 타인의 마법을 산산조각 낼 정도의 힘을 말이다. 어쩔 수 없이 성진은 공간 장 바깥의 힘을 거두고 흘러들어오는 파편을 처리하는데 힘썼다. 이제 공간의 격류를 직접 받아내는 것은 인성이에게 맡겨졌다.
나는 이를 악물며 인성이의 마력을 살폈다. 인성이는 식은땀을 흘리며 곤란한 눈으로 중심 마법석을 주시했다. 인성이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력은 무시무시하지만, 전력을 다하고 있지는 않다. 다할 수 없는 거다. 트라던트 독이 몸을 헤집는 것도 문제지만…….
“인성아, 괜찮아. 전력을 다해. 그로 인한 여파는 내가 막을게.”
공간 방해 장은 자칫 새블레의 결계도 일그러뜨릴 수 있다. 인성이의 공간마법은 유클라프에게서 비롯된 것이니, 그만한 공간마법의 소양과 상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막기 어렵다.
루카와 레일리는 공간 전문 마법사가 아니고, 윌리엄과 내가 지닌 공간마법 소양은 지금의 인성이에 비하면 부족하다. 새블레의 결계가 방해 장의 일그러짐에 더하여 공간 파도의 충격까지 버티기는 힘든 것을 알기에 인성이는 마력장이 새블레의 결계에 부딪치지 않도록 힘을 조절하고 있었다.
인성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겠어?”
“응. 네 마법에도 방해되지 않도록 할 테니까 걱정 마.”
하지만 상성은 여전히 내 속성이 우위다. 새블레의 결계가 인성이의 마법에 일그러지지 않도록, 인성이의 마법이 제 힘을 낼 수 있도록, 나라면 두 마법 사이에서 조율할 수 있다.
“레미! 결계 서포트 부탁해! 문이, 평소처럼 미세 조정은 맡긴다!”
「「알겠습니다.」」
“여러분……. 에잇, 성진아! 연결 좀!”
레일리가 공간 파도 때문에 통신이 잘 연결되지 않자 열을 냈다. 새블레의 결계를 유지하는 건 레일리와 루카의 힘이 크지만, 그림자 도시 위의 텅 빈 허공을 채우고 있는 건 파편을 받아내기 위한 성진의 마력이다. 성진이 억지로 시공간을 연결했다.
“서포트 마법사 여러분! 방어마법 유지하느라 힘들 건 알지만 가능하신 분은 엘디나에 증폭마법 부탁드립니다! 특히 유은하랑 최인성의 마법을 많이 도와주세요!”
여기저기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후…….”
짧은 심호흡 소리와 함께 인성이의 기세가 변했다.
트라던트의 힘이 피부로 드러나며 양 눈동자에 각기 어렴풋이 검녹색과 검붉은 색이 새겨졌다. 가연을 불러낼 때마다 어중간하게 길어져 턱 아래 길이를 유지하게 된 머리카락이 나풀거렸다. 머리카락을 반 정도 묶은 검은색 리본도 함께 나풀거렸다. 흘러나온 그림자가 인성이의 몸 주위로 불꽃처럼 너울거렸다.
나는 긴장하는 루카, 레일리, 윌리엄을 향해 눈짓했다.
“여러분은 결계 강화에만 집중해 주세요.”
“정말 혼자서 조율할 수 있겠어? 인성이의 공간마법은 이제 은하 너보다 몇 단계 높잖아.”
레일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인성이는 몇 개의 트라던트와 소니아의 마법에 그치지 않고 유클라프의 마법마저 삼켰다.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 몸에 담고 말았다.
원해서 담은 것이 아니다. 살 방법이 그것뿐이기에 삼키고 말았다.
인성이는 유클라프의 마법을 통해 공간을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림자에 덧씌워진 공간마법 레벨이 훌쩍 뛰어올랐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 아직 내가 인성이보다 더 강해.”
“말 잘하는데?”
이제 인성이의 실력은 나와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그래도 아직은 내가 한 발 더 강하다. 나는 장난스럽게 웃는 인성이를 향해 살짝 마주 웃고는, 다시 진지한 눈으로 중심 마법석을 주시했다.
“그러니 전력을 다해.”
“걱정 마. 반드시 막을게.”
우리의 마력이 동시에 새블레의 중심으로 쏟아졌다.
‘문이.’
「길을 만들겠습니다, 마스터.」
문이가 레미와 접촉해 중심 마법석 안으로 들어갔다. 중심 마법석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새블레의 결계와 방어 시스템 등 새블레에 걸린 마법 전체를 본다는 뜻. 중심 마법석은 새블레의 모든 마법식을 압축해 놓은 작은 새블레다.
여기에서는 내가 떠올리는 새블레의 모든 곳과, 보다 정확히는 새블레의 모든 마법과 정교하게 교감할 수 있다.
문이가 그 교감을 유도하여 인성이의 방해 장과 새블레의 결계 사이 간격을 약간 떨어뜨렸다. 공간 방해 장은 움직이기 어려우므로 결계를 좀 더 새블레와 가까워지도록 압축했다.
결계와 방해 장 사이에 공간의 힘을 거르는 그물형 결계를 펼쳤다. 인성이의 힘에 일그러지지 않지만, 인성이의 방해 장을 방해하지도 않는 결계다. 더하여 그물에 걸러진 인성이의 힘은 새블레의 결계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이다.
다만 그러려면 지금의 간격이 잘 지켜져야 한다. 인성이의 결계는 공간의 격류를 막느라 위치와 크기를 조절할 수 없지만, 새블레의 본래 결계는 여기에서 더 커지면 안 된다.
레미를 통해 지시를 내렸다. 루카 일행은 내 의도를 쉽게 따라와 줬다.
그 상태로 우리는 온 힘을 다했다. 인성이가 공간의 격류를 앞서 막아 주고 있다고는 하지만 격류의 충격은 인성이 혼자 전부 견딜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인성이가 1차로 공간의 힘을 방해하고, 내가 공간의 힘을 2차로 거르고, 남은 충격은 새블레의 결계가 견디고, 그래도 힘이 흘러들어온다면 성진이 전부 죽인다. 그로 인한 여파는 각 대륙의 마법사들이 막아 낸다.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순간순간이 꽤 길게 지속됐다. 우리가 지쳐 쓰러질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격류가 멈췄다.
아니, 멈춘 건 아니다. 아까까지는 파도에 깎였다면 지금은 해류에 갇혔다. 거센 힘에 잠겼을 뿐 우리는 여전히 물결 안에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마력을 거의 소진한 상태에서도 세 종류의 결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파도가 약해진 것 같긴, 한데……지금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레일리가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들었다. 적어도 이제 결계 안까지 큰 충격이 흘러들어 오진 않는다. 한 숨 놓은 사이 라이라, 알리사, 예리 등 서포트에 뛰어난 마법사들이 찾아와 우리에게 회복마법을 걸어 주었다.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아까 전까지는 밀려드는 해일 사이에 있었고, 지금은 심해 속에 들어왔다고 할 수 있겠지. 우리가 파도와 물결에 갇혔다기보다는 모든 우주가 물결로 바뀌었어. 유클라프가 우주의 구조를 바꾸었고, 파도는 그로 인해 밀려든 변화고, 지금은 그 변화에 물든 거야. 물결인 만큼 아직 바뀌고 있는 중이지만 그럭저럭 공간이 안정된 셈이니 일단 고비는 넘겼다고 보면 돼.”
윌리엄이 고개를 끄덕이며 첨언했다.
“그래도 공간이 계속 움직이는 중이니 결계는 지금처럼 인성 씨의 마법을 중심으로 유지하는 게 좋습니다. 파도처럼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아직 거칩니다.”
마법사들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구에서……안 벗어났을까?”
꿈속의 풍경을 떠올리자 두려워졌다. 인성이의 표정도 흐려졌다.
“글쎄. 위치까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하겠어. 우주로 떠밀려 왔을 수도 있겠고……지구나, 아니다. 태양계 형태가 안 남았을 가능성도 있겠네.”
“……그럴 지도 모르겠다.”
주위에서 불안함에 가득 찬 침음이 연이어 들렸다. 순식간에 우주의 구조를 바꿔 버리는 힘. 로타가 한 번 무너지는 세계를 유지시켜 주었다고 하나, 이 세계를 뒤바꾼 건 오롯이 트라베리아의 힘이다. 몇 번이고 느꼈던 전율과 중압감이 온몸을 무겁게 짓눌렀다.
“진짜, 미친 놈들…….”
나는 결계로 향하는 마력을 유지하며 고개를 들었다. 이미 시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결계 바깥을 감싸는 공간 물살이나 새블레 사이로 따라온 ‘공간 회로’는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깊이와 위압감에 생리적으로 눈시울이 아파 왔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을 억누르며 나는 계속해서 마력을 쥐어짰다.
##32. 행동의 의미
세계의 흐름이 실체화하여 만들어진 공간 물살은 비교적 안정된 상태였으나 때때로 거세졌다. 인성이의 공간 방해 장, 내가 만든 공간 그물, 기존 방어 결계. 세 종류의 결계를 고정 상태로 만들고 공간의 상태를 살피며 술식과 효과를 추가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
레일리와 루카는 그나마 교대할 사람이 있었지만 나와 인성이는 교대하지 못하고 버텼다. 때문에 공간 방해 결계가 우리 없이도 장기적으로 돌아갈 수 있게끔 설정이 완료되었을 때 나와 인성이는 기진맥진해서 자리에 늘어졌다.
“죽겠다, 진짜.”
나는 숨을 고르면서도 등을 기댄 인성이의 마력을 살폈다. 다행히 제어가 많이 흐트러지지는 않았다. 하긴, 이번 작업은 근원적인 힘을 계속 끌어 썼다기보다는 장기적으로 마력이 많이 든 것이었다.
겨우 찾아온 휴식 시간이었으나 오래 쉬지 못했다. 바깥이 어떤 상태인지 보다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우리가 지금 우주의 어디까지 떠밀렸는지 확인해야 한다.
예지몽에서 지구는 본래의 형태를 잃은 상태였다. 구체가 해체되어 바다가 안개나 알갱이로 분열되고, 대지는 흩어져 우주를 섬처럼 떠다녔다. 아니, 다른 행성과 합쳐졌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가 사라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태양계를 따라 넓게 분산되었을 뿐 중심은 확고하게 유지되고 있었다고나 할까. 언제든지 다시 원래 형태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으음, 예지몽이라서 풍경 하나하나가 자세히 떠오르진 않네. 그래, 사실 흔적만 남아 있다면 지구를 복원하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니.’
다만 공간 회로가 함께하고 있으니 아주 먼 곳까지는 떠밀리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트라베리아는 우리를 지구에서 죽이고 싶을 것이다.
소중한 이가 죽은 지구를 마법의 중심으로 삼았는데, 필요한 힘을 충족시키기 위해 당연히 그렇게 하지 않겠나. 중심과 먼 곳에서 잃기에 우리가 가진 힘은 강대하다.
하지만 당장 바깥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직접 깎아내리는 파도보다는 약해도 물살 역시 힘이 무시무시하다. 공간의 흐름이 격해 지금 우리가 어디까지 떠밀렸는지도 전혀 알 수 없다. 태양의 위치조차 알 수 없는 실정이다.
인성이와 윌리엄의 해석에 따르면 우리는 꽤나 깊은 공간으로 가라앉은 모양이다. 그리고 공간이 다시 굳으려면 약 한 달 정도 소요될 것 같다고 한다. 정확한 조사는 그때부터다.
방어가 어느 정도 안정되었을 무렵 로타와 이그니의 장례식이 열렸다. 리브리도 키메라 일행도 주위가 그럭저럭 안정 된 틈에 빨리 장례를 치르는 게 낫겠다 판단한 모양이었다.
두 사람의 장례식은 따로따로 치러졌다. 아직 키메라에 대해 불안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비교되지 않길 원했다. 장례식은 둘 다 화장이었다. 트라베리아의 왕이 네크로맨서이니만큼 시체는 남기지 않는 게 좋다.
나는 로타와 이그니의 장례식 둘 다 한 번씩 들렀다. 로타보다는 키메라와 친분이 더 깊었기 때문에 이그니의 장례식에 조금 더 오랜 시간 머물렀다. 상황이 좋지 않은 만큼 식은 둘 다 간소하게 끝났다. 죽은 시신 혹은 유품에 인사를 하고 지인이 보내는 저승 선물과 함께 시신과 유품을 태웠다.
이그니의 호박 위로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키메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슬퍼했다. 루니라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훌쩍였고, 동물 키메라 대부분은 루니라의 주변에 모여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라스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 얼굴을 들지 않았으며, 라이라는 불꽃을 보며 말없이 울었고, 듀크는 침묵했다. 첸이나 스핑크스 퀴리는 보이는 곳에선 울지 않았으나, 표정을 물들이는 슬픔을 숨기지 못했다.
키메라와 로타, 두 그룹과 다 깊은 친분이 있던 디나는 두 장례식에 참석한 이후 한동안 방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했다.
그러나 이틀 후 준영이와 인성이를 살피기 위해 다시 얼굴을 보였다. 약간 초췌해 보였지만 그녀는 평소처럼 열의를 가지고 진료했다. 다만 역시 인성이의 상태는 디나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대충 예상하고 있었기에 우리는 크게 실망하지 않고 디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던 디나가 잠시 후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참, 인성 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언젠가 첸, 라스, 듀크 님이 찾아왔을 때 전해 달라고 부탁받았던 건데 이제야 전해 드리네요. 최근 최상헌 님의 심경에 조금 변화가 있는 모양이에요.”
“아버지요? 어떤, 아니, 누가…….”
“반과 데미안에게 부탁받았어요.”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 디나에게 이야기를 전할 만한 사람은 반과 데미안 정도밖에 없다.
“전언을 받은 지 반년쯤 되었으니……꽤 예전 일이에요.”
“반년이라. 저번에 청와대에서 직접 살펴보았지만 변화를 발견하지 못했는데…….”
“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정신세계까지 살펴보지는 못하셨던 거죠? 최상헌 님의 그림자마법도 정신마법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해요. 떨어진 곳에서, 하물며 클라인 남매의 영역에서 최상헌 님의 감정을 정확히 읽어 내는 건 은하 님이라 해도 어렵지 않을까요?”
“그 말은 최상헌 씨의 변화가 감정적인 변화라는 뜻이군요.”
“네. 대단한 변화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어떤 변화인가요?”
디나가 잠시 머뭇거렸다.
“아무래도 최상헌 님이 여러분을 신경 쓰고 있다나 봐요. 희망적인 의미로요.”
우리의 눈이 조금 커졌다.
“……어떤 식으로요?”
“아닌 척하지만 여러분의 이야기를 궁금해하고, 은하 님께 답례로 받았다던 오르골을 가끔씩……듣는다고 하더군요. 데미안의 말로는 본능적으로 인성 님께 끌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고 하네요.”
“…….”
“아닌 척하지만, 인성 님께 호감이랑 관심을 보이고 있대요.”
인성이의 시선이 초조함과 기대로 떨렸다. 저번에 갔을 때 최상헌을 좀 더 가까이에서 관찰하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클라인 남매가 곁에 있었으니 그 이상 가까이 다가가기는 어려웠을 테지만, 그래도…….
급박한 상황이었으니 지나간 일을 후회해 봤자 어쩔 수 없다. 입술을 한 번 깨물고 최상헌의 상황이나 감정을 유추해 보았다.
최상헌에게 최인성은 성이 같고, 마법이 비슷하고, 얼굴이 닮은 적이다. 자신을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적.
결국 최상헌의 정신세계를 자세히 살펴볼 기회는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반이 캐티아에서 최인성에게 해 준 이야기에 의하면 데리고 온 인간들의 기억을 바꾼 건 소니아라고 하는데, 정신세계를 자세히 본 게 아니라서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다. 클라인 남매도 얼마든지 인간의 기억을 바꿀 수 있으니까.
다만 누가 했든 간에 최상헌의 기억 조작은 완벽하지 않다. 기억을 죄다 지우고 부순 다음 새로운 기억을 집어넣은 게 아니란 소리다. 기억에는 상식과 지식, 기술, 무엇보다 마력과 마법이 포함된다. 쓸모가 있어 데려온 것인데 그런 걸 다 지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최상헌은 생각보다 정신마법과 상성이 좋다. 마력의 기억이라는 것이 있다. 머릿속의 기억을 지워도 꿈의 파편, 감정의 조각 등은 몸과 마법에 남는다. 기억이 지워져도 몸이 본능적으로 과거에 알았던 자에게 상응하는 감정을 보이는 것이다. 정신마법과 상성이 깊은 사람일수록 잔여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안다.
최상헌은 이미 잔여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나와 만났을 때도 오르골의 노래를 듣고 무심코 ‘자장가’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클라인 남매가 옆에 있으니 기억을 되찾았을 확률은……없지만.’
인성이가 한 말 때문이든, 마력의 기억 때문이든, 인성이를 신경 쓴다는 것은 확실히 희망적인 전조였다.
인성이가 초조한 눈빛으로 물었다.
“……클라인 남매도 그걸 알고 있겠죠?”
함께 있던 소영이, 성진, 인하, 예리의 표정에도 걱정이 서렸다.
“알고 있겠죠. 최상헌도 두 사람의 능력을 알고 있겠지만……무의식적으로 손이 가는 모양이더라고요. 그렇다고 클라인 남매가 굳이 말을 꺼내 막는 것도 아니고요.”
“신경 쓰지 않는 걸까요? 아니면…….”
“클라인 남매는 그냥 그런 성격이에요. 거기다 클라인 남매는 최상헌의 기술과 능력을 아껴요. 심경에 변화가 생겼다고는 하지만 최상헌은 두 분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어요. 클라인 남매는 슬럼프든 심경의 변화로든 실력이 뒤떨어지지 않으면 깊게 상관하지 않아요. 아니……기술은 더 늘었다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오히려 최성헌 님에게 일어난 심경의 변화를 즐기는 것도 같다더라고요.”
“개새끼들…….”
남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자들을 떠올리며 우리는 분을 삭였다.
“그리고……여차할 땐 인질로 잡을 생각도 있는 것 같다는 게, 데미안의 의견이에요.”
그렇겠지. 그들이 손아귀에 있는 패를 쓰지 않을 리 없다.
나는 표정을 구기며 벨라를 떠올렸다. 인질로 잡는다고 해도 그들에게 정상적인 상황을 기대해선 안 된다.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보다는 우리를 더 위험한 상황에 빠트리기 위해서, 변해가는 세계에 가속도를 붙이기 위하여 인질을 잡겠지. 나는 입술을 아득 깨물었다.
“그래서 반과 데미안이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본래 협력하는 키메라 분들께 전하라 한 거지만, 여러분 귀에 들어가길 원하며 전언한 것이니 여러분께 먼저 말씀드려도 괜찮겠죠. 최상헌 님이 기억을 되찾고 싶어 하거나 클라인 남매님께 반감을 느낀다면, 최대한 보호 및 협력하겠다고 하네요.”
우리는 각기 놀라움을 드러냈다. 클라인 남매의 감각을 지척에 두고, 제 한 몸 지키기에도 벅찬 상황일진데 보호하겠다고?
“데미안 말로는 클라인 남매 분들의 곁을 떠나고 난 후 여러분 곁에서 입지를 다지기 위한 ‘빚’이래요. ……클라인 남매의 눈을 피해 도울 수 있다는 가정 하의 이야기지만요.”
인성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돕겠다는 말을 남겼다고는 하나, 바로 옆에서 클라인 남매의 의향을 배신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결국 큰 도움은 기대하지 못한다. 우리의 희망은 그들의 도움보다는 최상헌의 심경에 변화가 있다는 것과, 기분이 더럽긴 하지만 클라인 남매가 그것마저 즐긴다는 부분이다.
“그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모양이었어요. 저한테 직접 찾아와 약을 받아 갔을 정도니까요. 마음을 나누는 약이랑, 기억을 보존하는 양이랑, 클라인 남매 전용 마음 방어 약도 있었네요.”
“그런가요…….”
디나가 조금 고민하며 말을 이었다.
“너무 기대를 버리진 말아 주세요. 반은 최상헌 님에게 정이 든 모양이니까요.”
소영이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정이 들었다고요?”
“반은 무심한 것처럼 보여도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 같은 면이 있어서, 궁금한 게 생기면 꼭 확인해야 직성이 풀려요. 반의 호기심에 제일 진지하게 대답해 준 게 최상헌 님이라나 봐요. 데미안은 아닌 것처럼 보여도 반을 친구로서 많이 아껴요. 반이 최선을 다하는 이상 데미안도 최선을 다할 테니, 조금은 기대해볼 만하지 않을까요?”
나는 두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뭐라 말할 수 없는 심정이 되었다. 키메라나 디나를 통해 전해 듣는 반과 데미안은 참 온화하다. 그래, 청와대에서 마주했던 반과 데미안은 분명 온화했다. 하지만 내가 가진 반과 데미안의 인상은 학생 시절 트라베리아의 저주받은 세계에서 만났던 그 좀비와 드래곤이다. 그래서 그런지 두 사람의 평온한 부분이 어색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