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487
현재 공간을 가장 많이, 가장 근원적으로 볼 수 있는 두 사람의 의견이 한 방향을 가리켰다. 무엇보다 두 사람의 감각은 믿을 만 했다. 첫 번째로 향할 길이 정해졌다. 슬슬 공간 회로였던 것이 위험 신호를 내고 있다.
“얼마나 휘말릴 것 같아?”
“음……블랙홀이라고 해도 이름만 블랙홀이지 법칙은 달라. 공간을 접으면서 잡아먹는 방식이고, 높이와 지름도 지금 상태보다 10배는 커지겠지. 일단 터진 순간 반경 5000km는 잡아먹으려나. 명령에 맞춰 계속 잡아먹을 테고.”
공간을 잡아먹는 검은 나무. 우주의 흐름과 중력을 무시하고 트라베리아가 필요 없다고 판단한 공간을 통째로 잡아먹을 것이다. 공간이 부서지는 힘에 휘말리면 새블레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다.
방향이 정해진 이상 우리는 망설이지 않았다. 새블레가 빠르게 공간을 넘었다. 생각보다 풍경이 바뀌는 속도가 빠르다. 공간과 거리가 예상보다 더 압축되어 있다는 뜻이다. 어지러운 우주에서 인성이와 성진이는 망설이지 않고 길을 지시했다.
어느 기점을 통과했을 때 결계 밑에서 요상한 감촉이 느껴졌다. 마치 물……같은 감촉이다.
그 느낌은 착각이 아니었다. 우주가 반으로 나뉘어 있다. 아래는 수면처럼 일렁거렸고, 하늘은 평범했다. 그때 하늘 너머에서 무언가가 반짝이며 가까워졌다.
[떨어집니다!]윌리엄이 다급하게 경고했다. 나는 스틸라를 관리하는 마법석을 붙잡으며 마력을 불어넣었다. 결계가 강화된 순간 하늘에서 공간과 먼지가 섞인 유성이 비처럼 무수히 떨어져 내렸다.
[아래가 더 안정되어 보이는군요. 잠수하시겠습니까?] [안전해 보이지만, 아래는 트라던트와 연결되어 있어요. 그것도 별자리를 이루고 있는 거대한 트라던트가 있지요.] [우리가 있는 위치는 들키겠지만, 트라던트에 다가가는 게 더 낫지 않아? 별자리를 이룰 만큼 중요한 트라던트라면 지표로 삼을 수 있잖아! 인성이 너도 있고.] [어떻습니까, 인성 씨.] [글쎄요…….]급하게 안전한 길을 따라 움직이긴 했지만 꼬인 공간 속에서 어느 곳이 지구와 통하는 길일지 우리는 아직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지구와 커븐 로드의 위치는 대강 안다. 나는 사람의 꿈을 보고 기억한다. 한 번 본 정신세계를 통해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말했듯이 방향만 알뿐 길은 모른다. 공간을 넘어섰을 때, 멀어졌는지 가까워졌는지를 판가름할 수 있을 따름이다.
‘……조금 멀어졌어.’
레일리의 말대로 트라던트는 ‘지표’가 될 수 있다.
트라던트에는 많은 공간과 꿈이 쌓여있고, 트라던트의 힘은 트라베리아와, 지구와 연동하고 있다. 거기에 많은 영혼이 담긴 만큼 보다 큰 꿈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저는 찬성이에요. 꿈길을 찾고 연결하기 쉬워질 테니…….”
빠직….
말을 하다 말고 균열이 이는 소리에 흠칫했다. 그 소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온 길을 따라 들려오고 있었다.
[아직 블랙홀 범위 내인 것 같은데요?] [잠수합시다! 트라던트에 영향이 미치게끔 블랙홀을 장치해 뒀을 리가 없습니다!]모두의 의견이 일치했다. 새블레가 순식간에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물살 안으로 내려서며 우리는 눈을 크게 떴다. 조금 전보다 더욱 공간이 압축된, 광대한 우주가 우리를 맞았다. 무수히 많은 별, 무수히 많은 은하. 본 적도 없는 빛이 멀리에서 소리 없이 터졌다 사라졌다. 꿈같은 광경이다.
수면을 닮은 공간 아래는 무척 고요했다. 고요한 만큼 묵직했다. 강력한 인력이 모든 흐름을 심저를 향해 이끈다.
우리는 깊디깊은 심해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가장 깊고 무거운 곳에 별자리를 이루는 트라던트가 있었다.
너무도 짙고 웅장한 모습에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 트라던트는 행성계를 지배하는 태양을 집어삼킨 채 군락을 유지하고 있었다. 행성계 하나를 집어삼키고, 별자리를 이루어, 성단, 은하까지도 지배한다. 그럴 수 있을 만한 지식과 법칙을 트라베리아는 몇 백 년에 걸쳐 손에 넣었다.
모든 우주를 직접 조종하는 건 그 어떤 인간이라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커다란 공간의 한 점, 한 축을 지배하면 모든 공간의 흐름이 서서히 그곳을 향해 이끌린다. 그러니 지배하는 것이 세계선의 가장 중요한 하나의 축이라면, 결과적으로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
우주 곳곳에 있는 트라던트는 두 번째 중심축이다. 축을 세우고, 바꾸고, 비틀며 트라던트 한 점이 그 우주의 중심이 되게끔 단계적으로 설정했겠지.
그 하나의 가장 중요한 축을 발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마법과 영혼을 바쳤을까. 혹은 그 하나의 축을 향해 모든 법칙이 몰려들게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부와 조사를 했을까. 이 얼마나 거대한 힘과, 지식과, 시간과, 세계의 근원에 대한, 시공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한 일인가.
그리고 우주를 조정하기 위해선 어찌되었건 우주를 보아야 한다. 그것은 우주마다 존재하는 다양한 시간선을 본다는 의미다.
유클라프는 얼마나 긴 시간을 보고 있었을까.
육체로든, 꿈으로든, 아주 긴 시간을 보고 있을 것이다.
또 한 번 미쳐도 이상하지 않은 무게다. 유클라프는 아마……소니아를 되살리고 싶겠지? 결코 이루게 둘 수 없는 소망은 많은 사람이 모든 것을 바치게 만든다.
새블레가 트라던트계에서 일정 거리를 두고 멈췄다.
이 자리에서 트라던트계가 전부 보인다. 별을 대신하는 것, 행성을 대신하는 것, 위성을 대신하는 것은 물론이고 트라던트계가 자전하고 공전하는 궤도와 전체적인 모습이 전부 보인다.
본래 궤도가 전부 보일 정도로 멀리 있다면 위성의 모습까지 확실히 보일 리가 없고, 위성까지 보일 정도로 가깝다면 행성계의 전체 모습을 확인하기 어렵다. 그만큼 공간이 비틀리고 압축되어 있다는 뜻이다.
조사할 대상이 트라던트이므로 인성이는 당연히 나섰다. 나는 첫 교대 타자로 단탈리온을 불렀다. 스틸라의 결계를 지지하는 교대 마법사는 인하, 소영이, 단탈리온, 첸, 오시언으로 정해져 있다.
“교대 부탁드릴게요.”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나도 갈래.”
라스가 내 소매를 붙잡았다. 나는 이야기해 보겠다 말했다.
꿈을 살피고 먼 꿈길을 잇기 위해서는 트라던트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편이 좋다. 트라던트는 어쩌면 현재 직접적인 연결 없이 자동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트라베리아가 만들고 유클라프 혹은 베로니카가 관리하던 것. 단서가 존재할 것이다.
트라던트 탐사 팀은 나, 인성이, 레일리, 라스, 예리, 오시언으로 정해졌다. 만일을 위해 인하의 도움을 받아 나와 인성이 간의 연결을 강화했다. 거기에 인하는 만일을 대비해서 소속마법으로 연결 사슬을 만들어 나와 인성이에게 연결했다.
“위험하면 끌어당길게.”
우리는 걱정 어린 시선을 받으며 우주로 뛰어들었다. 인성이는 망설임 한 번 없이 공간을 걸었다. 넓고 광대한 우주의 풍경이 빠르게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트라던트 본체가 코앞이었다.
별을 집어삼킨 트라던트는 가연과는 사뭇 다른 검보라색으로, 무시무시하게 거대했고, 도라지꽃을 닮은 보라색 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우주와 그 안에 있던 생명을 흡수해 자라난 이것은 ‘인간’을 흡수하지 않은 건지 아니면 별의 힘에 묻힌 건지 악의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강한 에너지와 인력을 뿌리고 있는 트라던트를 따라 꿈 조각을 보았다. 이곳의 꿈길은 무척 단조로웠으며 조각조각 끊겨 있었다.
꿈길은 보통 ‘생물의 의지’로 이루어진다. 환각으로 의지를 각인시키거나 흐름을 따라 인위적인 꿈을 만들 수 있기는 하지만, 생물의 의지가 아니고서야 꿈길의 기초 요소인 ‘감정’은 묻어나지 않는다.
이 행성계에는 지적생명체가 별로 살지 않았던 모양이다. 머지않아 나는 의지를 가진 조각을 하나 발견했다.
‘……어라?’
그런데 어쩐지 느낌이 이상했다. 뭐랄까, 평소보다 더 꿈에 끌려가는 듯한……? 새카만 우주 안에서 별처럼 빛나는 꿈 조각이 유독 잘 보였다.
감정이 담긴 꿈 조각을 몇 개 발견하기는 했지만 길을 찾을 단서로 이어지는 것은 없었다. 이곳의 꿈 조각은 오로지 이곳을 위해서만 이루어졌다.
‘이런. 이러면 좀 곤란해지는데.’
검보라빛 트라던트가 지배하는 행성계는 넓디넓고 다른 공간으로 향하는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어느 정도냐면 별자리 선을 따라 걸어 다니며 길을 찾아야 할 판이다.
“으음……. 아무래도 우주의 트라던트는 지구의 트라던트와는 법칙이 다른가봐. 의지도 별로 없고, 읽기가 어렵네. 저번에 갔던 트라던트는 아니었는데……. 에펠로나계가 지적 생명체가 많은 행성계라서 그랬나.”
우리는 가장 커다란 레벨3 트라던트가 있는 곳을 벗어나 꽤 오래 행성계를 탐색했다. 그러나 지구는커녕 다른 우주와 관련된 꿈 조각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이것으로 우리는 한 가지 알 수 있었다. 별자리 우주끼리는 서로 독립되어 있다. 연결된 선 사이에서만 힘을 공유하며, 다른 우주와의 연결은 미미하다.
‘아직은’ 말이다. 언젠가는 지구에 끌려 갈 테니까.
우리는 한 차례 탐색을 마치고 새블레로 돌아갔다. 이어 두 번째 탐사 팀이 내려갔다. 세 번째까지 조사를 마친 뒤에 우리는 결론을 내렸다.
에펠로나계가 지구와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모든 별자리 트라던트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현재 많은 별자리 트라던트는 독립된 세계를 유지하고 있노라고. 즉 트라던트의 태반은 지표는커녕 부평초다. 우주가 넓긴 넓었다.
우리는 공간을 되짚어 다시 수면 위로 올라갔다. 트라던트가 발하는 인력 때문에 우주의 단층 위로 올라가는 것에는 상당히 시간이 필요했다. 문득 초조해졌다. 지금 지구가 있는 태양계와 우리가 있는 우주의 시간은 얼마나 차이가 날 것인가.
수면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에는 성공했으나 문제가 생겼다. 공간의 끝, 혹은 접합점이 아까 있던 장소에 없다. 수면 위의 세계가 사라졌다. 여기부터는 길이 없다.
다른 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있는 수면은 층과 공간이 나뉘어 있어, 같은 심해여도 이곳은 별자리의 영역이 아니다. 우리는 의견을 나누며 새블레와 함께 묵직한 공간속을 헤엄쳤다.
넓고 광대한 우주에서 길을 찾는 데는 어떤 방법이 좋을까. 예지, 감, 분석능력, 누군가의 부름?
열심히 길을 찾은 끝에 우리는 새로운 세계에 다다랐다.
그런데 이번엔 정상적인 우주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공간의 축이 비틀리고 달라지면서 생긴 차원의 단층 같은 장소랄까. 주위는 분홍빛으로 가득하고, 공간에는 출입구가 무수히 많다. 말 그대로 ‘미로’였다.
인성이가 길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고심했다.
“일종의 교차로이려나? 출입구는 많지만, 중요한 곳과 연결되었을지는 모르겠는걸.”
“아, 머리 아파. 공간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일투성이인데 이 많은 공간을 트라베리아가 제어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정말……무섭다, 무서워.”
레일리의 말에 공감하며 나는 고민했다. 맘만 같아선 육체를 여기다 두고 꿈을 따라 멀리 날아 우주를 살펴보고 싶다. 정신체는 보다 꿈에 이끌리기 쉽고, 육체적 공간적 제약을 덜 받는다. 그렇게 꿈 조각을 긁어모으다 보면 좀 더 빨리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방법은 정신적으로나 영혼적으로나 나와 인성이 모두에게 부담이 너무 크다.
수많은 의식은 아니라도 수많은 공간의 접합점이니 공간의 의지와 특성을 모은 꿈길을 어느 정도 구현할 수 있지만, 이 많은 공간의 꿈을 전부 해석하는 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이 공간은 무너지기까지 얼마 시간이 남지 않은 죽어 가는 공간, 빨리 길을 골라야 한다.
연맹에서 ‘운’과 닿은 마법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그럭저럭 두 자릿수다. 그러나 이 드넓은 공간에서도 써먹을 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 마법사는 세 명밖에 없다.
바로 무르시엘의 레녹, 구 트라베리아의 오시언, 우리 팀의 아르델이다.
그리고 나는 꿈속에서 ‘운’과 ‘의지’를 증폭할 수 있다. 꿈은 내 세계,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공간이니까.
나는 우주의 흐름에 나의 의지를 인식시켜 구현한 이 우주의 꿈속세계에 세 사람을 초대했다.
“시작해 볼까.”
레녹이 꿈속에 ‘확률마법’의 세계를 겹쳐 펼쳤다. 나는 꿈을 따라 다양한 정보, 공간의 파편을 긁어 와 오시언에게 전달했다.
그러면서 나는 또 한 번 기이한 감각을 받았다.
……꿈속이라 공간의 흐름이 선명해졌다고 하지만 어쩐지 평소보다 공간의 감각이 생생했다. 수많은 길이 느껴지고, 그리고……조금 더 감각을 기울이면…….
신비로운 느낌이 깊어질 때쯤 오시언이 실체를 가진 카드를 한 장 골라 들었다. 아르델이 오시언에게서 건네받은 카드에 언령을 불어넣었다.
“「부탁해. 돌아갈 길을 찾아줘!」”
간단하지만 간절한 마음을 담은 언령이다. 꿈과 공간과 마법이 반응했다. 오시언의 카드에서 금홍빛으로 빛나는 새가 튀어나왔다. 아르델이 씩 웃었다.
“좋아! 성공했어!”
그때 분홍빛 꿈 끄트머리가 우르르 무너지며 사라졌다. 어딘가에서 번개가 일고, 불꽃이 튀었다. 공간이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나는 그림자를 통해 유이를 불렀다.
“이제부터 길을 찾을 거야. 인성이한테 잘 전해 줄 수 있지?”
「문제 없다옹!」
내 꿈은 가연보다 유이가 더 잘 살핀다. 지금부터 새블레는 인성이가 조종할 것이다. 꿈속에 있는 우리를 가장 잘 쫓아올 수 있는 것이 인성이이기 때문이다.
“자, 가자!”
만일을 위해 소속마법 페어링에 마법을 불어넣어 연결을 강화했다. 금빛으로 빛나는 새가 우리를 태우고 첫 번째 길을 골랐다. 꿈과 현실에 공간의 균열을 알리는 번개가 쳤다.
‘금이 공간 대부분에 퍼졌어. 이제 10분이나 버틸까.’
이 공간은 부서져야 한다. 부서져야 세계가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그걸 왜 알고 있지?
공간이 위험해짐에 따라 새블레의 꿈속세계에서 동요가 느껴졌다. 그러나 우리는 새블레를 지키는 마법사들의 실력을 믿고 멈추지 않았다.
“이번엔 오른쪽인가? 좋아, 잘한다!”
“어라. 고민하네. 잠깐만, 점쳐 볼게.”
“밑에서 세 번째다.”
“어어? 여긴 문이 없잖아?”
“기다려 봐. 지금 보여 줄게.”
마법사들의 행운을 따라 길을 선택하고 얼마 후 텅 빈 공간이 나타났다. 여기는 공간마법에 뛰어난 수양을 지니고 있는 자만이 길을 고를 수 있다. 나는 웬만한 마법사에게도 보이지 않는 선택지를 꿈으로 구현했다.
점점 길을 찾기가 골치 아파졌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길을 골랐다. 공간의 끝으로 향할수록 공간이 거칠어지며 허무가 늘어났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나타난 공간에는 정말로 선택지가 없었다. 길은 없고 지금까지 지나온 우주가 거울처럼 비치는 벽과 허무뿐이었다.
“헉! 어떡해! 잘못 왔나?”
그때 우리를 태우고 날아온 새가 차원 벽에 몸을 부딪쳤다. 그것을 보고 나는 우리가 도착하기 직전에 바깥으로 나가는 길이 닫혔음을 알았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부수고 나가면 된다. 그림자를 통해 부른 가연이 벽을 살피더니 적절한 부위를 부숴 출구를 열었다.
공간이 부서질 때, 어쩐지 또 기분이 이상했다. 울렁거림을 따라 손가락 끝이 찌릿 저려 왔다.
미로 같은 공간을 지나자 이번에는 또 무식하게 넓은 우주가 나타났다. 무시무시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 아무래도 트라던트가 있나 보다. 다행히 이번에는 좀 더 꿈이 많아 보인다. 그러나 공간이 너무 넓어 방향을 잡으려면 꽤 조사가 필요할 것 같다. 안정된 곳이라 다행이지만 시간을 오래 소모할 수는 없다. 우리는 곧바로 다음 탐색대를 꾸렸다.
트라던트 레벨3 디포르부터는 트라던트의 생김새가 다양하다. 우주의 트라던트는 더 그렇다.
우리가 이번에 조우한 트라던트는 간단히 설명하면 ‘호수 나무’였다. 호수 같은 하단부는 넓게 우주를 집어삼키고, 나무 형태의 상단부는 별을 열매로 삼은 것처럼 우주에 얽혀 있다. 그 상태로 천천히 공전하고 있다.
넓은 만큼 조사할 곳이 많기 때문에 능력별로 팀을 여럿 만들어 수색했다. 예를 들어 오시언과 레녹, 아르델로 행운 팀을 만들고, 나와 인성이로 꿈 팀을 결성하고, 성진이와 윌리엄, 라이라로 공간 팀을 결성한다. 그 외에도 몇 개의 팀이 더 결성되었다.
행운 팀의 힘은 이곳에서는 별로 도움이 안 될 모양이었다. 행운으로 무언가를 찾기에는 우주가 너무 광활했다. 거기다 이곳의 공간은 아까보다 훨씬 깊어, 그들의 힘으로는 단서가 있어도 잡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건 그렇고 정말 넓었다. 유클라프가 세계의 축을 바꾼 것에 의해 우주가 압축되어 전보다 넓이가 작아졌을 텐데도 그랬다.
넓어서 조사하는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지금까지보단 할 만하다. 이번 트라던트는 저번보다 악의가 섞여 있다. 누군가가 남긴 감정과 꿈이 우주를 떠돌고 있다.
나와 인성이는 꿈속으로 들어와 꿈길을 이루고 우주를 발아래에 두었다. 좀 더 멀리 보자. 좀 더 꿈을 끌어오고, 풍경을 축소하고, 현실을 각자의 컴퓨터로 해석하고…….
머지않아 공간을 꿰뚫어보는 자들이 지구가 있는 ‘방향’을 특정했다.
확인해 보니 이곳은 상당히 중요한 공간이었다. 성진은 꿰뚫는 눈으로, 인성이는 유클라프를 통해 얻은 감각으로, 두 사람은 비틀리는 차원의 힘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확인했다.
공간은 꼬이고 꼬였고, 길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현재 우주의 중심은 지구. 태양계의 위치는 변하지 않으며, 거대한 우주 공간은 점점 한 점을 향해 압축되고 있다.
나는 마법사들이 가리킨 방향에 있는 꿈을 가져왔다. 길이 점점 넓어졌다. 꿈길을 통해 정보를 가져오는 때때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깊고 무거운 공간과 계속 접촉하고 있어서일까. 다만 어지러울 때마다 낯익은 익숙함과 함께 더 많은 감각이 몸 안에 휘말려 들어왔다.
나는 이 익숙함이 어떤 의미인지 지난 경험을 통해 잘 알았다.
“생각보다 우주 공간은 나한테 잘 맞나 봐.”
「마스터의 세계도 우주니까요.」
“그렇지. 너의 세계이자 이름이잖아.”
나의 이름은 은하(銀河). 우주에 속한 이름이며, 우주에 관련된 꿈을 만들어왔다. 내가 처음으로 불러낸 진짜 자연도 우주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잘 맞는 걸까.
나는 점점 등 뒤로 가까워지는 예지몽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트라베리아에 의해 변해 버린 이 세계는 나에게 유리할지도 모르겠다.
「마스터, 마스터의 말을 듣고 생각난 것입니다만, 마스터가 최근 느끼는 감각은 자연과 교감하는 것을 닮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과?”
「네. 무언가를 알 것 같고, 무언가에 닿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존재는 마력과는 다르고, 꿈과는 더 다릅니다. 자연과 교감하는 마법사들에게 들은 감각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곧바로 준영이를 떠올렸다.
구 트라베리아 일행의 도움을 받아 여러 번 자연과 교류하려 노력해 봤으나,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주는 내가 한 번 소환해 낸 세계다. 그러니 확실히 교감이 좀 더 편하지 않을까?
준영이는 현재 새블레 안에서 자연과 교감하고 있다. 우주를 통해 오시언과 함께 자연에게 길을 묻고 있지만, 쉽지 않은 모양이다.
“한 번 해 볼까? 꿈……에서라면 충분히 준영이를 지킬 수 있어.”
“바로? 준영이한테 얼마나 부담이 갈지 모르니까 우리끼리 먼저 시도해 보는 게 어때?”
타당한 의견이었기 때문에 나는 인성이와 감각을 공유하던 그대로 자연과의 교감을 시도했다.
자연과 교감하는 자세와 마음가짐은 셰린 일행에게 여러 번 배웠다. 인하는 에펠로나를 통해서만 자연과 교감할 수 있지만, 자연의 고유 느낌만은 몸에 착실히 경험으로써 새겨 두고 있다. 성진은 우리와 함께 자연과 교감하는 방법을 몇 번 배우긴 했으나, 자연의 4대 속성을 마법으로 사용하는 것치고는 아무런 내색도 보이지 않는다.
거기다 셰린과 히스의 말에 따르면 자연마저 성진을 두려워한다고 한다. 대체 성진의 마력과 영혼은 어떻게 되먹은 건지 모르겠다.
세상을 향해 말을 거는 기분으로 우주를 향해 의식을 뻗고, 우주를 소환할 때의 감각으로 우주의 마력을 이끌었다.
어렴풋이, 아주 희미하긴 하지만 평소보다 감각이 넓어……졌다.
감각이 넓어지는 순간 먼저 내 가슴을 치고 들어온 것은 트라던트의 오싹한 힘이었다. 저 트라던트가 지금은 이 성단을 유지하는 중심이며 법칙이다.
평소보다 우주와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 들긴 하는데, 이게 교감이 제대로 되는 건지 아닌 건지 잘 모르겠다.
‘어떻게 보여?’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마스터의 마력이 좀 더……우주의 마력과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 듭니다.」
우주의 마력이라. 고민하는 순간 인성이가 속삭였다.
“은하야, 들려? 지금 은하 네 기척이 흐려졌어. 뭐랄까, 주위의 마력에 동화되었다는 느낌? 준영이가 자연과 교감할 때의 느낌과 약간 비슷해. 준영이의 도움을 많이 받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내 생각엔 성공한 것 같아.”
좋아. 일단은 성공했다고 여기자.
준영이나 오래 자연과 교감해 온 마법사, 혹은 정령과 성물, 신물과 계약한 마법사만큼은 아니겠지만, 희미하게나마 교류하고 있다고. 나는 광활한 자연을 향해 부탁했다.
“『좀 더 많이 보여 줘. 내가 더 많은 꿈을 볼 수 있게 도와줘.』”
나는 감각을 따라 내 안에서 내 꿈을, 은하수를 불러냈다. 은하의 꿈으로 우주의 꿈을 불러들인다. 우리는 한층 더 깊은 우주와 꿈속으로 가라앉았다.
“『좀 더 꿈이 많은 방향, 많은 의지가 모여 있는 방향은 어디야?』”
언령을 읊을수록 몸을 감싼 고양감이 점점 커지고, 꿈길과 공간의 동화가 깊어졌다. 나를 둘러싼 세상 모든 것이 내 의지를 따르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발밑에 흐르는 은빛 강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꿈 조각이 별빛처럼 반짝이며 안개같이 분해되어 흐드러졌다.
“『지구로 가는 길을 알아?』”
꿈길을 따라 연결된 우주로부터 작은 술렁거림이 일었다.
가까이에 있는 꿈은 ‘지구’를 모른다. 드넓은 우주에 행성은 많고 많으며, 우주는 원래 계속 넓어지고 있었고, 이곳은 지구와 직접적으로 닿아있지 않은 장소였다.
“『트라던트, 혹은 다운피스를 만든 마녀(Witch)가 어디 있는지 알아?』”
술렁거리던 우주가 이내 침묵했다. 나는 한숨을 삼켰다. 그래, 지금 이 세계는 트라베리아의 것이지.
공간을 지배하는 것은 유클라프, 그 초석인 트라던트를 만들어 낸 것은 엘리시아와 시카, 그리고 자연은 시카의 편이다. 핵심적인 것은 직접 찾아낼 수밖에 없다.
“좀 더 깊게 가 보자.”
광대한 자연과 교감하며 인성이와 함께 꿈길을 걷고 또 거닐었다. 어느새 우리는 호수 나무 트라던트 영역을 벗어나 새로운 공간에 들어서 있었다. 은하가 눈앞에 스치고, 별똥별이 쏟아졌다. 행성과 별이 폭발하고, 가스가 시야를 뒤덮었다.
트라던트 영역과 접해 있는 많은 우주. 그 안에서 그나마 ‘지구’의 조각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님! 은하 님! 먕! 끄아옹!」
인성이의 손을 마주잡은 채 감각에 집중하던 나는 울먹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인성이가 창백한 안색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왜 그래?”
“머…….”
걱정스럽게 묻자 인성이가 구역질을 하며 허리를 더 숙였다.
“우욱, 멀미 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초월자가, 초월자 중에서도 최상위에 위치한 마법사가 괜히 멀미를 일으킬 리 없다. 그만큼 우리가 있는 우주 혹은 우리가 지나왔던 꿈길이 복잡하고, 깊고, 강하다는 뜻이다. 그림자로 인해 꿈에 익숙해진 인성이가 그렇게 느낄 정도라니. 나는 주위를 확인하며 시선을 가라앉혔다.
‘여긴……유클라프도 쉽게 돌아다니지 못하겠군.’
애초에 나 이외의 사람이 발견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지만. 나는 인성이의 손이 떨리는 것을 확인하고는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인성이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거기다, 추워…….”
나는 흠칫했다. 초월자는 더위나 추위에 연연하지 않는 육체를 지닌다. 마법사에게 진정으로 추위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은 그만한 고위의 공격과 힘뿐이다.
“물리적인 추위라기보다는, 으음, 뭐랄까, 빛이나……존재를 빼앗기는 느낌이랄까? 너무 광대하고 넓은 공간에서 ‘나’라는 존재가 작디작게 깎여 나가는 느낌이 들어. 빛을 잃고, 흐려지는…….”
나는 인성이의 몸을 자세히 살폈다. 확실히 평소에는 소란스럽게 인성이의 안에서 자아 표현을 할 그림자들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고 흐렸다. 유이도 방금 날 부른 것을 빼고는 침묵하고 있다. 아니, 덜덜 떨고 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인성이의 몸을 별조각이 감싸고 있어, 그가 위험할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저 빛은……내 꿈 조각이다.
“그래도 네가 빛나고 있어서 어떻게든 정신을 유지할 수 있지만. 여기서 보니까 너, 마치……별처럼 눈부셔. 아, 이번엔 감정적으로 말하는 게 아닌 거 알지?”
“알아.”
인성이의 눈엔 지금 내가 물리적으로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거다. 스스로 빛을 뿌리는 별처럼.
“별이라…….”
내 꿈은 우주와 은하수. 별 역시 ‘나’다.
“내가 멀미할 정도니, 준영이는 절대 이 길로 다니면 안 되겠다. 어차피 트라베리아는 지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거야. 예상이지만.”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우리는 폐쇄 국가, 트라베리아의 전력을 아직 알지 못한다.
현재까지 모습을 드러낸 트라베리아의 마법사는 29명. 한두 번 얼굴을 보이고 모습을 감춘 마법사도 많다. 엘리시아와 커븐 로드를 제외하고 지속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마법사는 제르간, 리피트, 실비아, 벨다, 하멜, 라리마, 지스, 나탈리, 아넬라, 로베르트, 이렇게 10명 정도다.
여기에서 하멜, 나탈리, 아넬라, 로베르트는 죽었다. 나탈리는 홍링의 작전을 돕다 죽었고, 아넬라와 로베르트는 캐밀의 측근으로 캐밀과 함께 죽었다. 또한 4명의 마법사가 참극이 일어났을 무렵, 전쟁이 지속되면서 연맹의 최정상 마법사의 손에 죽었다. 한 명은 방위부의 마법사와 함께 공멸했다.
나머지 마법사는 한두 번 모습을 드러낸 정도로, 구 트라베리아를 통해 이름이나 실력을 확인했다. 구 트라베리아가 봉인되지 않았을 무렵부터 전원 초월자였다.
구 트라베리아 일행이 아는 한 트라베리아의 S랭크 마법사는 총 34명, 이것만으로도 보통 수위는 넘었다. 물론 모두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S랭크 마법사가 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300세를 넘었다고 한다.
트라베리아에는 마녀 사냥 당시 선천 마법사로 각성할 정도의 뛰어난 재능을 가진 마법사들이 모이고 모였다. 그들은 증오를 삼키고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지금은 괴로움과 광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죽은 자의 부활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
또한 초월자 수준은 아니어도 A랭크는 되는 마법사가 수십 명 더 있다.
전체 인구수는 구 트라베리아가 봉인 된 100년 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고 가정했을 때, 약 200명 정도다.
다시 생각해 보면 겨우 200명밖에는 되지 않는 것이다. 세월이 지나며 누군가는 수명이 다하고 누군가는 싸움에 패배해 스러지면서 겨우 그만큼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므로 트라베리아는 싸우지 못하는 국민을 새로이 만든 세계에 보내기 위해서도, 세계의 중심인 지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마스터, 시계가 멈췄습니다!」
상태가 안 좋은 인성이를 도와주기 위해 꿈 조각을 넘겨 주고 있을 때 문이가 다급하게 우리에게 현실을 일깨웠다. 꿈과 현실의 시간은 다르다. 공간과 공간의 시간은 다르다. 다급히 확인해 본 항주용 시계는 체감 시간마저 돌아가지 않고 멈춰 있었다. 우리는 당황하며 시계를 두드렸다.
“꿈에서도 움직일 수 있도록 개조했는데?”
“잠깐, 그럼 지금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야? 얼마나 멀리 온 거야? 끄응, 그래도 페어링의 부름은 없었으니 괜찮으려나?”
인성이가 순간 막막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끝이 없어 보이는 별의 길을.
“괜찮아. 돌아가는 건 금방이야.”
“하긴, 꿈이니까…….”
그러나 돌아가는 길에서도 인성이는 멀미를 했다. 나와 많이 접촉할수록 괜찮아지는 모양이기에 나는 중간에 인성이를 업었다. 그렇게 트라던트 영역으로 돌아와 꿈에서 빠져나온 순간 우리 손목에 페어링이 빛나며 사슬이 연결되었다.
“어.”
사슬이 잡아당겨지고, 우리는 어느새 새블레 안에 있었다. 인하가 지닌 소속마법이 우리를 이동시킨 것이다. 사슬을 쥔 인하가 화 난 얼굴로 우리를 노려보았다.
“너희…!”
쾅!
거센 소리와 함께 엘디나 마법 중심 제어실의 문이 열렸다.
“유은하! 최인성!”
성진이었다. 여유 없는 얼굴로 달려오던 성진은 내가 인성이를 업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굳었다. 다른 마법사들의 기색도 어쩐지 심상치 않다. 나는 일단 인성이를 등 뒤에서 내리며 가장 중요한 것부터 말했다.
“다친 건 아니야.”
“응. 괜찮아. 약간 멀미가 났을 뿐이야.”
인하가 화를 참듯 입술을 깨물며 사슬을 없앴다.
“너희, 괜찮아? 어딜 갔던 거야?”
“아, 그렇구나. 돌아다니는 동안 우리를 감지하지 못했던 거구나.”
“아…….”
우리는 드디어 이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았다. 자연과 교감하는 동안 그들은 우리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항주용 시계는 망가졌고, 트라던트 영역을 벗어나 머나먼 우주까지 넘볼 정도로 멀리 나갔고, 보았다. 진작 눈치챘어야 했다.
인성이가 약간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우리가 사라지고 얼마나 지났어?”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