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498
콰과과쾅!
그래도 벨라의 칼날에 비하면 훨씬 느린 공격이다. 나는 준영이를 끌어안은 채 차분하게 번개의 궤도를 살폈다.
포츈의 번개는 보이는 것보다 공격 범위가 훨씬 넓었다. 포츈의 마력은 안쪽은 불꽃을 닮았으나 가장자리는 거미줄을 닮았다. 불꽃에 무수히 많은 거미의 실이 연결되어 있는 듯한 모습이다.
마법도 마력의 모양새에 영향을 받은 모양이다. 떨어지는 번개 주위로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거미줄 같은 잔 번개가 넓게 퍼지고 있다. 큰 번개는 닿는 것을 부수고, 잔 번개는 마력을 비튼다.
떨어지는 번개를 성진이 똑바로 베었다. 포츈의 손 주위를 돌던 보석 하나가 포츈의 손 안에 내려서더니 이번엔 카드로 변했다.
쿠웅….
정신과 공간마저 일그러뜨리는 왜곡이 생겨났다. 왜곡 안쪽에 어렴풋이 무언가가 보이는데 비틀어져 있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저것은 카드와 연결되어 있으며, 왜곡의 주체이다.
재빨리 마법을 파악하며 나는 바닥에 지팡이를 내리쳤다.
빠지직!
현실과 꿈의 경계가 무너지며 꿈이 현실을 향해 쏟아져 내릴 준비를 한다.
그사이 성진은 포츈이 만든 왜곡을 베어버린 상태였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날카롭게 베이지 않았다. 왜곡이 걷히고 나타난 힘은 또다시 왜곡이었다. 그것도 성진이의 ‘종말’이 흔들릴 정도의 왜곡이다. 뭐라고 해야 할까……그래, 성진이와는 상극의 힘이다. 상극의 마력이라기보다는……상극의 사념, 상극의 ‘자연’?
종말의 힘과 포츈의 왜곡이 부딪치며 두 사람의 마력에 주위에 무시무시한 기세로 튀었다. 포츈이 카드 안에 보석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곳곳에서 왜곡마법이 동시 다발적으로 터졌다.
──그 위로 꿈의 파도가 쏟아졌다. 나는 지팡이를 쥔 채 다시금 언령을 외웠다.
“『별의 왕관!』『별들의 편린!!!』”
『별의 왕관─별과 꿈을 지배하는 왕관.
별들의 편린─별이 있는 세계를 가둔 조각』
왕관이 머리에 씌워지며 몸에 둘러져 있는 오라가 공간을 침식했다. 주위를 향한 지배가 시작되었다. 쏟아진 꿈을 따라 세계가 유리처럼 조각났다.
세계에서 떨어진 새까만 조각은 별빛을 비추고 있는 거울 같기도 했고, 보석 같기도 했다. 어느 것은 중력장을 만들고, 어느 것은 빛을 틔우고, 어느 것은 무시무시한 우주를 소환해 포츈의 힘을 집어삼켰다.
참고로 편린 속에 어떤 힘을 집어넣고 발동할 지는 문이가 정한다. 상대의 공격에 맞춰 다양한 꿈을 터트려줄 것이다. 벨라가 상대일 땐 기술에 온 마음을 집어넣는 데만도 벅차다.
라이라가 나와 준영이를 지키며 거울을 퍼트렸다. 편린을 비춘 거울이 조각나며 더 많은 편린이 만들어졌다. 우주의 힘이 순식간에 늘어났다.
꿈의 힘이 내 몸을 중심으로 짙어졌다. 이대로 보다 깊은 꿈속에 내려설 작정이다. 준영이의 몸은 이 마력 속을 버티지 못한다. 마법 하나만 스쳐도 즉사할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가만히 낫을 쥐고 주위에 시커먼 영역을 유지하고 있던 벨라가 바닥에 대고 있던 낫을 들어 올렸다.
“눈 먼 검이 제일 무섭다는 말, 경험해 봤으려나?”
벨라의 눈동자가 광기로 일그러졌다.
“그러지 마…….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조절할 수가 없게 되거든? 보이지 않는 걸 베는 데 과연 조절을 할 수 있을까…? 분명 통째로 베어 넘길걸? 네가 품에 끌어안고 있는 그 아이, 정말로 죽을 거야!”
“……!”
벨라는 꿈을 벨 수 있다.
공간을 벨 수 있다. 영혼을 벨 수 있다. 정신, 생명, 마법, 무생물,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나 사상, 벨라의 베는 힘은 그 무엇도 가리지 않는다. 그녀가 벤다고 마음먹으면, 벤다!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레녹의 옆에서 포츈의 힘을 막으며 버티던 디나가 빛 같은 은녹색 힘을 흩뿌리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럼 내보내 주세요.”
“흐음?”
“김준영 님은 너무 약하고, 저는 시험해 봤자 소용이 없어요. 포츈 님이라면 그 이유를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알지~! 알고말고!”
벨라가 신이 난 얼굴로 팔을 휘저었다. 무슨 소리지? 시험해 봤자 소용이 없다니? 그 순간 벨라의 낫에 깃든 적의가 짙어졌다.
“…그러니까 시험해 보겠다는 거잖아.”
휘둘러질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러나 미리 눈치챘음에도 내가 방어마법을 발동하는 속도보다 벨라의 낫이 움직이는 속도가 훨씬 더 빨랐다.
파지지직!
벨라의 칼날이 편린을 베며 지나갔다. 편린에서 새어나온 힘이 미약하게나마 벨라의 마력을 빼앗는다.
『연쇄』
『파괴』 『흡수』
별의 편린이 문이의 명령을 따라 연쇄 폭발했다. 나는 뒤늦게나마 외쳤다.
“『새벽이여, 침식해라!』”
부딪쳐 깨질 각오로 책을 가슴에 넣기는 했지만, 벨라의 베는 힘은 장난이 아니다. 제대로 버틸 수 있을지 이 몸으로 시험해보지 않는 한 확신할 수 없다. 거기다 내 뒤에는 준영이가 있으니 만에 하나라도 칼날을 보낼 수 없다.
나는 다급히 성진이의 앞에 ‘벨라의 마법을 잡아먹는’ 방어벽을 만들었다. 어찌되었거나 벨라의 힘은 죽음의 힘, 그것도 사람의 피를 흡수하며 강해지는 일그러진 힘, 내 힘은 벨라의 힘을 정화할 수 있다. 다만 정화하는 속도보다 벨라가 베는 속도가 훨씬 빠를 뿐이다.
결국 이번에도 벨라의 낫을 막아 낸 건 성진이의 검이었다.
카칵!
“아, 하하!”
벨라의 칼날이 지나갔던 자리의 새벽빛이 좀 먹힌 듯이 파헤쳐져 있었다. 안 그래도 작았던 편린이 갈리고 갈려 가루 같아졌다.
증오를 품은 『새벽의 침식』을 벨수록 상대는 디버프를 받는다. 그에 따라 벨라의 칼날에는 구멍이 뚫렸고, 낫에는 남색과 은색 마력이 점멸하고 있다.
그러나 그 상태로도 벨라는 성진의 칼날을 반이나 베어 냈다. 종말의 마력이 벨라의 낫을 튕겨내며 무너뜨렸으나, 동시에 성진의 검도 윗부분이 부러지고 말았다.
내가 성진의 앞에 펼친 방어막이 잘리지 않은 것은 아예 칼날이 지나간 다음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뒤늦은 게’ 문제였다. 편린이 한꺼번에 터지지 않았다면 성진이의 칼이 벨라의 공격을 막지 못한 채 잘려나가고 말았으리라.
“윽…!”
준영이와 디나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옆에서 성진이와 함께 포츈의 마법을 상대하던 라이라의 표정도 창백해졌다. 벨라와 우리 사이에는 라이라의 거울이 수십 개는 있었는데, 그 거울이 전부 저항 하나 없이 동강나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며 벨라를 노려보았다. 반쯤 부서진 벨라의 칼날에 여전히 침식해 있는 새벽에게 명령했다.
“『깨…뜨려!』”
별의 편린을 따라, 나의 정신세계를 따라 모습을 숨기고 있던 새벽이 현실을 침식했다. 벨라의 마법에 쌓인 편린과 새벽의 힘도 한꺼번에 터졌다.
꿈을 현실로, 현실을 꿈으로.
벨라의 마법을 중심으로 나타난 금이 벨라의 몸에 상처를 새겼다. 가까이에 있던 편린도 함께 터졌다. 나와 문이가 동시에 터트리니, 꿈이 실체화되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벨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어떡하지? 너무 재미있어! 어디서 나타나는 건지 모르겠어!”
벨라의 마력을 꿈으로 바꾸고, 꿈을 몸과 마법에 실체화 하여 그 몸에 직접 상처를 낸다. 벨라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마법사는 별로 없다. 이게 가능한 건 내 마력이 정화속성인 덕분도 있다.
나는 벨라의 공격을 완벽히 막을 수 없고, 이로써 벨라도 내 공격을 완벽히 막을 수 없다! 나와 벨라의 싸움은 상처투성이의 격전이다. 우리는 몸을 지키지 않고 서로를 베어 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성진이가 있다. 나보다 벨라의 공격을 확실하게 막아 낼 수 있는 이성진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온 수 십 개의 검격을 성진이가 검을 들어 막아 냈다. 위쪽이 잘려나간 성진의 검이 결국 날밑까지 산산조각 났다.
벨라가 상대일 때는 성진이의 검이라 한들 계속 무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 벨라를 상대할 경우를 상정하여 미리 검을 세 자루 허리에 꽂아 두고 있었다.
성진이가 허리에서 새로운 검을 꺼냈다. 그와 동시에 벨라의 낫이 휘둘러졌다. 나는 다급히 성진이의 검에 지팡이를 부딪쳤다.
“『새벽의…,”
언령을 외치는 것보다 검과 지팡이에 칼날이 부딪치는 게 더 빨랐다. 지팡이에서 별무리와 편린이 무시무시하게 반짝이며, 남색과 은색의 오라를 따라 물고기 무리가 나타났다.
“심해.”
마지막 언령을 외운 것은 성진이였다. 검과 지팡이를 중심으로 심해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나의 살의와 성진이의 종말에 걸맞게 날카로운 칼날 같은 소용돌이다.
“꺄하하하하!”
벨라가 웃으며 다가오는 파도를 베어 냈다. 파도를 헤엄치던 물고기무리가 벨라와 포츈을 둘러싸고, 현실을 침식하는 ‘금’으로 변한다.
파지지직!
번개 같은 금이 벨라와 포츈에게 상처를 새겼다. 새겨지기는 했으나 얕았다. 벨라가 꿈이 제 몸까지 미치기 전에 마력을 대신 희생하여 뿌리쳤기 때문이다. 벨라의 몸 대신 마법이 깨졌다.
‘젠장. 상처를 입히는 것까지는 해냈지만, 치명상을 입힐 수가 없어! 벨라가 너무 강해!’
하지만, 종말의 심해라 할지라도 ‘바다’는 나의 영역이다. 그리고 종말의 힘은 벨라조차 완벽히 베어 낼 수 없다. 파도에 깃든 마력이 점점 깊어졌다. 저, 칼날을 따라, 꿈을…….
“이건 좀 위험하네. 할머니, 몸 잘 지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내 근원에 닿을 정도는 아니야.”
“하핫!”
벨라는 낫 머리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천천히 움직이며 잠시 우리의 마력을 가늠했다. 섬뜩한 기분에 파도를 향해 마력을 더 집어넣은 순간, 벨라가 크게 낫을 휘둘렀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하나, 둘……그 이상은 정확히 셀 수 없었다. 가슴에 품은 책의 힘과 오라로 막아 내긴 했지만 팔에 큰 상처가 생겼고, 심해의 폭풍은 수십 개로 조각났다.
“하하!”
문이가 내 팔의 상처에 붕대를 감으며 벨라에게 새롭게 걸린 디버프를 실체화했다. 그러나 별의 편린이 터지는 것보다 빨리, 벨라는 낫에서 마력을 방출시키는 것으로 낫에 스며든 새벽의 침식을 대부분 떨쳐 냈다.
「……!」
그로 인한 여파가 칼날로 변해 파도와 편린을 또 한 번 베어 냈다.
“꺄하하하! 좋아, 좋아! 유은하, 이성진, 너희는 역시 합격점이야!”
“큭….”
“거기다 저번에 만났을 때보다 훨~씬 강해졌고! 하긴. 하멜, 소니아, 캐밀, 로베르……이렇게 많이 잡아먹고 조금밖에 강해지지 못했다면 섭섭했을 거야!”
몸 주위에 왜곡장을 만드는 것으로 우리의 마법을 막아 낸 포츈이 허공에서 지팡이를 꺼냈다. 내가 쓰는 것처럼 장식이 달린 스태프(staff) 지팡이가 아니라 가늘고 길쭉한 완드(wand)였다. 완드 끝에 보석이 피어나더니 주위로 나무 덩굴 같은 문양이 그려졌다.
그것을 보고 디나가 숨을 삼키며 뒤로 물러났다. 창백한 얼굴에 드러난 감정은 아까와는 달리 공포보다 혼란과 경악에 가까웠다.
포츈이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아직 무엇을 시험할지 제대로 이야기 하지 않았었지. 우리가 시험할 것은 너희가 지닌 특수성이란다.”
그야 그들의 입에서 듣지는 않았지만 대충 예상하고는 있었다.
“너희를 마지막 제물로 지정한 것은 우리가 원하는 특수성을 너희가 가졌기 때문이란다. 행운을 불러오는 힘, 절대적인 죽음, 별의 꿈, 모든 것에 물드는 투명한 유리잔, 운명을 벗어난, 운명이 비틀어진 삶, 진화하는 생명.”
“행운은……페일린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페일린의 목숨을 대신하고 싶지는 않거든? 유펠라의 핏줄을 잡아 삼킬 수는 없잖아. 그리고, 운명을 벗어난 너…….”
벨라가 손가락으로 디나를 가리켰다.
“우리도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아. 오래 살고 금기를 저지르며 온갖 정보를 모으다 보니 알게 됐어. 운명에서 비켜나간 자는 세계의 의지에 직접 간섭 받아. 운명의 흐름에 뛰어들 수 없고, 거기에 엮여 있는 상대를 직접 죽일 수 없어. 반대로 우리도 너를 단숨에 죽일 수 없어. 죽이려면 조건이 갖춰져야 해. 다 함께 사이좋게 죽는 세계 멸망 같은 거 말이야.”
“윽…….”
허를 찔린 듯 숨을 삼키는 디나의 반응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니 그 힘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확인해 보아야 하지 않겠니. 그리고 김준영은 어떤 마법사의 힘도 자연의 가호로 증폭할 수 있다고 들었단다. 여기는 아직 반쯤 너희의 세계란다. 자, 너희 ‘모두’의 재능을 증명해 보렴?”
“나, 운명을 몇 번 자른 적 있는데.”
쩔그럭.
벨라의 낫에 매달린 사슬이 작게 울었다.
“‘운명에 벗어난 자’를 베는 건 과연 어떤 느낌일까…?”
“……아직은 못 죽일걸요?”
디나가 긴장한 얼굴로 양손을 꽉 모아 쥐었다.
“아직은.”
아무래도 ‘운명에서 벗어난 자’는 우리가 모르는 법칙이나 제약을 많이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나중에 자세히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벨라와 포츈을 노려보았다. 왕관을 통해 별의 힘이 많이 쌓였지만, 그만큼 많이 베여 사라지기도 했다. 아직 치명상을 입힐 수 없는 이상 보다 고위의 책과 ‘살의’는 아끼자. 그래, 씨발, 죽이지 않는다잖아.
그 순간 또 한 번 공간이 베였다.
쫓을 수, 없었던 것 같다. 내 육체보다 꿈이 더 빠르게 반응했다. 내 옆을 스쳐 지나간 칼날에 베인 새벽의 오라가 칼날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베이지 않은 것은 벨라가 의도적으로 우리를 피하여 칼날을 그었기 때문이다.
“커븐 로드 중에 내 전력을 막을 수 있는 건 세 명뿐이야. 유클라프, 시카, 엘리시아. 그런데 라프는 절대 날 못 이겨. 시카랑 싸우면 무승부려나? 내 칼날이 베는 속도가 더 빠르겠지만, 시카의 마법이 더 단단하고 순도가 높거든. 죽고 죽이거나, 내가 먼저 죽이고 살아남겠지.”
지금 상황과 관계가 있나 싶은 화제였지만, 4강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을만한 이야기였기에 우리는 귀를 기울였다.
“엘리랑 싸우면……6:4로 엘리가 이겨.”
“…….”
“상성이 안 좋거든. 반대로 엘리랑 시카가 싸우면 6:4로 시카가 이겨. 흠, 이렇게 보면 우리 중 제일 뛰어난 마법 실력을 가지고 있는 건 시카인 것 같다. 키킥, 싸움에서 가장 강한 건 당연히 나고!”
벨라가 즐거운 듯이 팔을 벌리며 자리에서 한 바퀴 빙 돌았다.
“그렇다 보니 내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적은 아주 오랜만이야. 아, 즐거워~!”
“…….”
“그런데, 부족한 거 알지?”
붕대가 감기지 않은 손에 꽉 힘을 줬다.
“그 정도로는 내가 전력을 다하기에도 부족해. 날 죽이고 싶은 거잖아? 그래서야 피투성이가 되어 서로를 물어뜯기 전에 너희 팔다리가 무너져 버린다고.”
성진이가 팍 인상을 썼다.
“취향 참 더럽군.”
“죽고 죽이는 싸움이란 게 그런 거지, 뭘 바래? 꺄하하하! 그래도 나쁘진 않은데……힘껏 싸울 정도도 아니니까…….”
벨라가 답지 않게 고민하는 기색으로 낫 머리를 움직였다.
“유은하, 이성진, 그 꼬맹이 잘 지켜라?”
벨라가 가리킨 것은 디나와 함께 서 있는 준영이었다. 나는 흠칫하며 조금 뒤로 물러나 준영이와 거리를 좁혔다.
“이번에 내 칼날이 노리는 건 너희가 아닐 테니까, 잘 보고, 잘 지키고, 잘 막아! 실수로라도 약한 꼬맹이를 베게 하지 말라고!”
성물과 전투복, 호위 아이템, 전부 더해도 벨라의 전력으로부터 준영이의 몸을 지킬 수 없다. 하물며 이런 코앞에서는! 다른 사람도 창백한 얼굴로 준영이를 가로막았다. 디나가 준영이의 손을 꽉 쥐었다. 포츈이 짧게 혀를 찼다.
“벨라, 조절해야지.”
“그건 아는데, 맨 앞에 선 유은하와 이성진을 피해 다른 놈들을 공격하려면 조금 더 진심을 내야겠더라고. 시험하는 데 아예 피를 안 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이렇게 경고라도 해야 쟤 앞에서 안 떨어지지. 나 참, 저 꼬마는 내가 시험하기엔 너무 약하다고.”
“너무 조바심 내지 마렴. 유은하와 이성진은 먼저 지켜야 할 게 누구인지 잘 알고 있어. 네 칼날에도 제법 대응하고 있지. 그리고 저들을 시험하기에는 너보다 내가 잘 맞는단다. 잠시 쓸데없는 공격만 베어 주겠니?”
“마음대로. 그런데 너희, 그렇다고 안심하지 마. 그럼 재미없잖아. 만에 하나라도 우리가 상냥하다고 착각하진 말라고. 기준치를 넘지 못한다면 그냥 죽일 뿐이니까.”
당연한 소리, 안심은 무슨.
“자, 그럼 디나 양. 이걸 한 번 막아 보겠니?”
기분은 구역질나도록 더럽지만, 시험에 맞게 기술을 쓰고 시험을 통과하여 이 상황을 빨리 끝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시험이든 뭐든 트라베리아는 우리를 곱게 다뤄 줄 놈들이 아니다. 그놈의 ‘각개격파’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라도 여기에서 우리의 팔다리 하나씩은 잘라 쓰러뜨려 둘 놈이다.
여기에 있는 자들을 진심으로 죽이기 위해 달려들진 않겠다. 이 대륙의 약한 국민을 노리지는 않겠다. 우리의 위안은 그것이다.
그 증거로 시험하겠다고 한 포츈의 마법에서 살의와 함께 알 수 없는 위압감이 풀풀 풍기고 있다. 위압감의 중심은 완드를 따라 자라나고 있는 덩굴이다.
디나가 침을 삼켰다. 강한 건 알겠지만 자세히 해석할 수는 없는 마법, 즉 자연의 가호를 기초로 한 마법이다. 덩굴 모양을 띠고 있지만 식물속성의 마법은 아니며, 디나의 표정을 보아하니 디나에게 치명적인 마법인 것 같다.
정말 골치 아프네. 벨라든 포츈이든 한 명만 있어도 뼈가 깎여 나갈 판에…….
지팡이를 중심으로 영역을 넓히며 쏟아지는 덩굴을 향해 성진이가 검을 들었다. 그러나 성진이의 검이 움직이기 전에 벨라가 칼날을 성진이에게 드러낸다. 성진이는 다시금 반토막이 난 칼을 움직여 가까스로 벨라의 공격을 막고 버텼다. 저 덩굴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자연의 힘이라면…….
‘조정한다.’
정화할 수 있는 마법이 아니더라도, 공격 범위를 조정할 수는 있을 것이다. 저건 아마 무언가를 ‘비트는’ 기술이다. 광대한 범위를 정화하고 조정한다면, 역시…….
“『프리즈마 헥사그램!!!』”
나와 문이가 동시에 언령을 외쳤다. 요정 여왕은 자연의 강대한 조율자다. 흘러넘치는 새벽 사이, 지팡이의 보석에서 오색빛깔 파동이 넘쳐흘렀다.
‘무거워!’
덩굴에 지팡이를 부딪치며 나는 입술을 악물었다.
‘내 마법을 파괴하지 않고 일그러뜨리고 있어. 이래서는 침식(디버프) 할 수 없어!’
포츈은 4강 다음으로 강하다 알려져 있고, 그 이상의 능력과 지식을 겸비했다.
역시 이 덩굴은 자연을 이용한 마법이다. 하물며 버거운 강제력을 지니고 있다. 나는 몸으로 준영이를 가린 채 지팡이를 쥔 손에 더 힘을 줬다.
하지만, 벨라의 칼날과 달리, 포츈의 마법은……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종류다! 나와 상성이 나쁘지 않고, 대응할 시간도 충분하다.
“유은하!”
그러나 프리즘이 포츈의 마법을 조정하기도 전에 벨라의 칼날이 성진이를 지나쳐 나에게 부딪쳤다. 칼날이 지팡이에 부딪치며 프리즘이 갈기갈기 잘려 나갔다.
지팡이에서 새벽의 오라가 자라나며 벨라의 칼날에 잘리지 않으려 버텼다. 지팡……이는, 가장 많은 자연과, 책 다음으로 꿈을 많이 간직한……나의 무기이며 열쇄.
왕관 아래로 흘러내린 베일 같은 별빛 몇 개가 터졌다.
“『깨져라!!!』”
꿈이 현실을 침식하며 벨라의 칼날 위에 공격을 실체화했다. 지팡이가 베이기 전에 벨라의 칼날이 산산조각 났다.
나는 다급히 마력을 움직였다. 벨라는 다시 성진이를 상대하고 있었고, 포츈의 덩굴은 그 사이 나를 지나쳤다. 지팡이에서 다시 『프리즈마 헥사그램』의 빛이 흘러 나왔다.
성진이의 칼날에서 튕긴 벨라의 칼날이 또 한 번 빛을 베어 냈다. 프리즘이 또다시 갈기갈기 잘리기 전에 라이라가 거울로 『프리즈마 헥사그램』의 빛을 여기저기로 반사시켰다. 그러나 사실 라이라와 레녹은 벨라와 포츈의 마법에서 제 몸을 지키는 데만도 벅차다.
덩굴이 완전하지 않은 빛과 우리의 마법을 일그러뜨리며 꽃망울을 터트렸다. 그 순간 마법이 분해되어 사라졌다.
“윽, 이거 뭐야! 느낌 이상해…….”
라이라가 구역질을 했다. 디나가 방어벽을 펼치며 준영이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디나의 마법은 덩굴에 쉽사리 일그러졌고, 꽃망울이 터지자 피부까지 분해되었다.
다만 사람의 생살이 상처 입었다기에는 모양새가 기이했다. 가상현실 세계에서 데이터가 분해되는 모습과 닮았다. 디나의 몸은 틀림없는 사람의 몸이니, 저것은 포츈의 덩굴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겠지.
“큭!”
그런데 이 느낌은 뭘까. 이……유클라프가 공간을 비틀 때와 조금 닮은……기이한 감각은.
준영이가 디나에게 끌어안긴 채 디나의 힘을 증폭했다. 성물의 힘과 함께, 포츈의 덩굴이 준영이의 자연을 따라 비껴 나간다.
나는 프리즘의 빛이 어느 정도 덩굴을 비추고 있는 걸 확인하고 지팡이를 휘둘렀다.
『프리즈마 헥사그램』은 정화마법을 쓰기 좋은 조정마법이지만, 동시에 강력한 공격마법이다.
“『파괴하라!!』”
쏟아지는 빛의 입자가 덩굴의 마력을 조정하며, 흡수하며, 조각냈다.
준영이와 프리즘에 의해 덩굴이 디나의 몸에서 떨어졌을 때, 디나가 다급히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승인 허가를 요청합니다.”
키잉──.
나는 흠칫했다. 디나가 그렇게 읊조린 순간, 디나의 어깨에 있던 가디언에게서 자연과 교감하는 마법사조차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어떠한 힘이 느껴졌다.
……약간은 자연과 닮았다. 하지만 신의 힘과 더 닮았다. 그렇지만 신물보다는, 보다 근원에 가까운……어쩐지 생명에 가까운…….
‘그래. 마치, 시간의 틈새를 통해 느꼈던 세계의 축에서 흘러나온 에너지를 닮았어.’
디나가 준영이를 끌어안은 채 휙 뒤로 몸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범위는 두 명, 나를 지키기 위해서.”
포츈의 눈이 가늘어졌다. 디나의 손 위로 모인 하얀 빛 덩어리가 곧 형상을 이루었다.
디나의 손에 나타난 것은 그녀의 키보다 높은 아주 기다란 지팡이였다. 새하얀 지팡이 위쪽은 갈라져 덩굴처럼 엮였고, 하얀 덩굴 사이에 녹색 보석이 담겨 있다.
디나가 큰 지팡이를 천천히 휘두르자 남아 있던 포츈의 덩굴이 시간이 되감기듯 소멸되었다. 줄기가 작아지고, 씨앗으로 되돌아가듯 작게 뭉쳐,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하아, 하아…….”
디나가 작게 숨을 고르며 준영이의 등을 두드렸다.
“은하 님, 준영이는 제가 보호할게요. 이게 있으면 괜찮아요. ……부작용은 조금 크겠지만요.”
덜덜 떨리던 준영이의 몸이 디나에게 기대어졌다. 벨라가 씩 웃었다
“그게 널 ‘운명에서 벗어난 자’로 만든 힘인가?”
포츈이 지팡이를 쥔 채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어쩐지 낯이 익은 것 같은데……그런 것치고는 느껴본 적 없는 마력이구나. 마력……. 아니, 마력과는 거리가 멀어. 자연의 힘인가?”
“할머니가 점치지 못하다니 드문 일이네! 이번엔 내가 시험해 봐도 되지? 저 정도면 저 꼬맹이도 쉽게 안 죽을 것 같고?”
“괜찮을 것 같구나.”
곧바로 벨라의 낫이 휘둘러졌다. 이번에는 확실히 보였다.
“『비틀려라!』”
아직 남아 있던 편린과 물고기들이 칼날을 막아서며 동시 다발적으로 터졌다. 공간이 비틀리고 현실을 물드는 상흔이 터지는데도 벨라는 똑바로 베어 냈다.
첫 번째 공격은 그나마 도중에 편린과 물고기의 디버프에 상쇄되어 멈췄으나, 곧바로 두 번째 칼날이 날아왔다. 조금 전과는 비교하기도 어려운 힘이다. 숨을 삼킬 틈조차 없이 칼날이 지나갔다. 새벽의 금을 베고 지나간 칼날은 이번엔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
“이런…!”
우리는 창백한 얼굴로 뒤를 돌았다. 칼날은 정확히 디나를 향해 날아갔다. 디나는 굳은 얼굴로 지팡이를 앞에 세우고 있었다. 디나의 품에 끌어안긴 준영이도 창백한 표정이기는 했지만 멀쩡했다.
벨라가 고개를 기울였다.
“빗나갔네? 이상하다….”
지팡이에서 일렁거리는 하얀 빛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포츈이 빙그레 눈을 휘었다.
“생각났다. 지팡이에서 나오는 흐름, 하르펜과 닮았어. 하르펜의 관계자였나.”
디나가 숨을 고르다 말고 흠칫했다.
“……저야말로 놀랍네요. 이걸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뭐야. 그럼 얘가 운명에서 벗어난 건 하르펜 때문인가?”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