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499
나는 디나가 무사한 걸 확인하고 안도하면서도 이를 악물었다.
막을 수 있고, 공격할 수 있지만, 어중간하기 그지없다.
아직 마력이 부족하다. 아직 마음이 부족하다.
조금 더 확실하게 막고, 조금 더 확실하게 공격해야 한다.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되새기자. 벨라가 움직이는 속도를 생각하면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게 좋다. 좀 더, 좀 더 꿈을 압축하자. 압축된 꿈이, 내게 지배당하는 세계가 그 존재만으로 벨라의 칼날을 방해하고 막아 낼 수 있도록. 내 세계에서는 저들이 숨쉬기조차 어렵도록.
시야 안에서 나한테밖에 보이지 않는 꿈이 휘몰아쳤다. 현실의 한 겹 너머에 있는 무수히 많은 별, 무수히 많은 편린, 무수히 많은 우주, 무수히 많은 꿈.
칼날을 가둬라.
심장을 꿰뚫어라.
모든 움직임을 감지해라.
책을 몸 안에 집어넣은 의미를 의식해라. 책 한 권만으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몸을 덮칠 칼날을 보다 확실하게 막기 위해 『새벽의 침식』과 나의 근원을 합쳤다.
그사이 성진이는 심해의 힘을 끌어올렸다. 이 녀석이 이렇게 집중해서 힘을 모으는 건 오랜만에 본다. 보통은 벨라처럼 속공으로 베어 내니까.
하지만 성진이가 이렇게 힘을 모은 후 발휘하는 마법은 무시무시하다.
나도 그 힘에 맞춰 마력을 끌어냈다. 심연과 시간, 생명과 공간. 그의 심해는 격렬하면서도 고요한 죽음이고, 나의 별은 하늘 저편에서 눈부시게 타오르는 생명이다.
나와 성진이의 마력이 익숙하게 맞물렸다. 뒤에서 작은 돌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육면체 주사위가 세 개. 익숙한 감각 위에 조금 낯선 감각이 뒤덮였다. 마법이 평소보다 더 무시무시한 기세로 증폭되었다. 힘이 맞물리는 정도도 ‘운’으로 조절할 수 있단 말이지.
“『별의 영역!!!』”
파도와 별하늘이 벨라와 포츈을 향해 쏟아졌다. 심해는 마법을 격렬하게 덮쳐 고요히 잠들게 하고, 별빛은 눈부시게 빛나며 자신만의 생명을 만들어 낸다.
지팡이와 왕관도 계속 주위에서 흡수해 쌓아두었던 마력을 별빛으로 바꿔 쏟아 냈다. 몸 주위로 별이 빛나며 꿈에 물든 육체가 생생하게 고양되었다. 성진의 마법마저 꿈으로 물들었다. 벨라가 낫을 긋는다. 크게 휘두…….
‘…아니, 아니야.’
나는 보이는 광경을 머릿속에서 수정했다. 나의 눈에만 보이는 무수히 많은 꿈의 편린, 꿈의 심해. ‘현실’을 수정할 재료는 얼마든지 있다.
‘꿈을 통해 보이지 않는 공간의 층이 펼쳐져 있으니까, 두 사람의 공격은 한 번 막히고.’
벨라의 낫이 약간 멈칫했다. 내 생각을 문이가 글자로 옮겼다.
『두 사람의 공격이 막힌 틈에 심해의 파도가 벨라와 포츈을 꿰뚫는다.』
카카칵!
언령이 깨졌다. 벨라는 낫으로, 포츈이 완드로 우리가 만든 파도를 막았다. 허나 제 아무리 벨라라도 성진이의 힘은 쉽게 깨부수지 못한다. 종말이 두 사람을 잡아먹고, 새벽이,
“『꿰뚫어』.”
새벽과 종말은 확실히 포츈과 벨라를 파고들었다. 특히 종말의 힘은 벨라의 마력을 많이 죽였다. 벨라의 낫이 반쯤 사라졌다.
침식한 새벽은 낫에 하얀 빛을 남기며 벨라의 몸에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깊게 파고들지 못하고 다시 베어졌다.
그러나 이번엔 울분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가슴과 마력이 고조되었다. 주위로 새벽의 힘이 거칠게 일렁거렸다.
벨라가 떨어지는 자신의 피를 낫으로 가볍게 베며 음산하게 웃었다.
“후흐……킥킥킥킥!”
아직 조금 더, 파고들 수 있다. 가슴의 고조감과 함께 모습을 숨기고 있던 꿈이 조금 더 실체화되었다. 정신세계와 육체가 보다 일체화되고, 온몸이 새벽빛을 뿜으며 주위를 내 꿈으로 침식시키고 있다. 존재하는 현실마저 꿈으로 슬금슬금 삼켜지며, 슬슬 현실과 꿈의 구별이 무의미해졌다.
“아주 볼 만한데?”
벨라의 베는 힘은 너무 강해서, 내 영역을 만들기 위해 채워 놓은 꿈의 힘마저 전부 베어버린다. 그래서 벨라 앞에서는 영역을 만들기가 매우 어렵다. 만들어도 바로 베어 버리는 게 벨라 아닌가.
비축해 둔 마력과 성진이의 공격, 『별의 영역』, 겨우 조금 더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문이, 방금.’
「네. 보였습니다.」
지팡이를 쥔 손이 조금 떨렸다.
지금까지 벨라는 단 한 번도 진심을 낸 적이 없다. 유펠르시아에서 성진이에게 힘을 봉인 당했을 때도 강제로 힘을 다 끌어 쓸 수 없게 된 상태였기에 결국 진심은 보지 못했다.
벨라의 마력은 살의와 악의로 둘러싸여 있어 나조차 근원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성진이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마법도 마력도 전부 베는 성질이라, 너무 자세히 보면 시력에 금이 간다. 정말 하나부터 끝까지 무시무시하기 그지없는 놈이다, 벨라는.
방금 그것도 진심을 낸 건 아니었다. 하지만 쌓이고 쌓인 침식과 우리의 공격을 떨치기 위해 평소보다 많은 마력을 썼다.
마력이 낫으로 모이며, 살의 안에서 벨라의 근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차원이 달라 확인할 수 없던 실력의 한계가 나의 눈에 얼핏 보였다.
아직 까마득하게 멀었지만, 그래도 보였다.
보인다면 노릴 수 있다. ──부술 수 있다.
“윽…….”
다음 공격을 준비하던 나는 불현듯 느껴진 감각에 흠칫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천둥 번개가 치는 하늘은 겉으로는 조금 전과 다름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우주와 교감하는 지금의 나는 알 수 있다.
공간이 변하려고 하고 있다. 세계의 중심에서 유클라프가 힘을 퍼트려 공간을 움직이고 있다. 알아본 건 나와 성진뿐이었다. 아니, 준영이도 얼핏 눈치챘나?
허리에서 카드를 꺼내 무언가를 확인한 포츈이 벨라를 불렀다.
“타임아웃. 노는 건 여기까지다, 벨라.”
“아, 벌써? 아직 거울의 힘은 보지 못했는데.”
“아니.”
포츈이 고개를 저었다.
“보았단다.”
“아하, 그래?”
라이라가 흠칫 몸을 떨었다. 하늘의 일그러짐이 이제 다른 사람 눈에도 보일 만큼 선명해졌다. 은하가 얼핏 내게 경고를 보냈다. 저것은 지구의 영역이 보다 힘을 늘리고 견고해지기 위한 변화. 변화가 시작되면 공간 이동을 하는 것은 물론 공간 사이를 오가기도 어려워질 것이다. 그렇다면…….
“미안한데,”
“……!”
가늘게 웃은 벨라가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양손으로 낫을 쥐었다.
“너희한텐 선택권이 없어!”
……….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낫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던가, 보지 못했던가?
시야가 새카매져서 의식을 잃은 것이리라 생각했다.
다행히 의식을 잃지는 않았다. 대신 깨달았을 때는 하나의 공격이 끝나 있었다.
“큭!”
“아……악…!”
“젠장.”
“선배들!”
“은하 님! 성진 님!!”
어깨가 가벼워졌다. 뒤늦게 피가 떨어졌다.
베인 자리에서 새벽빛 마력이 파직파직 점멸했다.
은하의 지팡이도 함께 부서졌다. 이번엔 반격할 틈도 없이 부서지고 말았다.
“선택할 수 없게 만들 거야, 우리가!”
그런 우리의 모습을 벨라가 비웃었다.
“씨…….”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쿨럭쿨럭 기침했다. 입안에서 피가 떨어졌다. 성진이의 상태도 성치 않았다. 어깨부터 덜렁덜렁하다.
라이라와 레녹도 팔다리 하나씩은 잘렸다. 멀쩡한 사람은 디나와 준영이뿐이다. 그래도 그건 무엇보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괜찮아. …괜찮아. 팔 하나쯤이야.’
거기다 이 정도면 양호한 수준이다.
벨라는 제법 진심으로 낫을 휘둘렀을 것이다. 나는 몰라도 성진이가 대처하지 못했다.
하지만 팔이 하나 잘렸을 뿐이다.
이내 나는 재생하기 위해 별빛을 뿌리는 『은하의 지팡이』를 보았다.
지팡이는 날카롭게 베인 것이 아니라 조각조각 부서져 빛을 발하고 있었다. 지팡이만이 아니라 머리에 있는 왕관도 별을 뿌리며 빛났다. 베어진 마법과 내 몸을 꿈을 통해 수복하려 하고 있다.
무엇보다 잘린 팔에서 벨라의 마력이 묻어나지 않는다. 책이 벨라의 마력을 곧바로 정화했다는 뜻이다.
‘문제없어.’
그보다는 공격이 보이지 않은 게 문제다. 나는 떨어진 팔을 어깨에 갖다 붙였다. 그러자 문이가 곧바로 팔에 예리가 준 치료용 붕대를 감았다. 칼날의 마력은 정화되었으니, 바로 붙…….
“아하, 팔 하나로는 안 되겠네.”
목소리가 코앞에서 들렸다. 다급히 고개를 든 순간, 눈앞에 새카만 선이 지나갔다.
“리더님!”
다급히 내 앞을 가로막은 성진의 손목이 잘려 나가고, 가슴이 길게 베였다. 터지는 피와 함께 가슴 위에서 남색 마력과 은색 마력이 점멸했다.
찰나의 순간,『새벽의 침식』이, 『책』이 가슴 위로 모습을 드러내 벨라의 공격을 막아섰다. 『별의 고래』에 심어져 있는 대상 대가 마법이 발동한 것이다. 하지만 공격이 워낙 빨라 전부 막지 못했고, 책이 반 이상 뜯겨 나갔다.
책이 뜯겨진 순간 뜯겨진 페이지에 있는 모든 마법이 저주가 되어 벨라에게 쏟아졌다. 그러나 벨라는 평소보다 느린 속도로 낫을 그어 상처 입으면서도 저주를 대부분 베어 내고, 내 가슴 위에 모습을 드러낸 책 앞에 날을 올렸다.
“리더님한테서 떨어져!”
쏟아지는 동료의 공격을 벨라는 낫을 휘두르지 않고 몸에서 뿜어낸 검은 칼날 같은 마력만으로 전부 튕겨 냈다.
“좋은 거 알려 줄게. 네 마법, 그래 봬도 나한테 제대로 통한단다.”
“쿨럭!”
“꺄하하하! 전력으로 싸울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리지! 좋아, 아주 좋아! 이래야 재미있지! 기왕 싸운다면 이래야지! 시체 더미를 베어 넘기는 것도, 피를 밟는 것도 재미있지만, 저항 없이 순순히 죽기만 한다면 뭐가 즐겁겠어!”
“안……!”
푹!
벨라의 낫이 책을 꿰뚫고 내 가슴에 꽂혔다.
칼날이 심장을 일부 잘라내고 지나갔다.
성진이 완전히 베이지 않은 쪽의 팔로 새 검을 꺼내 휘두르는 게 얼핏 보였으나, 벨라의 사슬과 포츈의 보석에 의해 막혔다. 거기다 벨라가 내 가슴을 찌르는 게 더 빨랐다.
“큭!”
벨라가 낫을 쥐지 않은 손을 뻗어 내 뺨을 쓰다듬었다. 벨라에 손에 묻은 내 피가 뺨을 질척하게 적셨다.
“너라면 이 정도로는 죽지 않겠지…? 죽기는커녕 금방 회복하려나? 괜히 무리하게 몸을 이끌지 말고 여기에서 푹 쉬고 있어. 알았지?”
주위를 둘러쌌던 사슬이 하나둘 걷혔다. 벨라가 포츈의 옆으로 몸을 물렸다.
“리더, 리더님!”
“은하 선배!”
사슬이 사라지자마자 라이라가 자기 몸을 치료하는 것도 잊고 다급히 내 몸 위에 불꽃을 퍼부었다. 이그니의 치유하는 불꽃이다. 디나가 준영이를 한 팔로 끌어안은 채 나에게 달려왔다.
걱정 가득한 동료들의 얼굴 너머로 기이한 광경이 보였다.
하늘에서 공간이 쏟아져 내렸다.
말 그대로, 그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하겠다. 하늘에서 유성우처럼 응축되어 있던 공간이 쏟아져 내렸다. 새까만 우주의 힘이 쏟아지며, 넓어지며, 퍼진다. 하늘이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그물, 파도, 공간, 다시 그물. 그물은 끈끈하게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며 주위의 힘을 끌어 모았다. 다양한 층의 공간을 끌어모아 섞는 모습이 참 장관이다.
포츈의 카드에서 유클라프의 공간마법이 새어나왔다. 그와 함께 벨라의 미친 음성이 울려 퍼졌다.
“하하, 꺄하하! 이렇게 즐거운 건 정말 오랜만이야. 피가 튀는 모습, 너무 짜릿했어! 이래서 싸움을 그만둘 수 없다니까! 그래. 역시 기왕 싸운다면 피투성이가 되는 게 좋아. 나도, 상대도 다 피투성이가 되는 거지. 고통을 느끼고 싶어! 죽고 죽이는 스릴을 즐기고 싶다고! 꺄하하하! 일방적으로 죽이기만 하는 싸움은 재미없어! 그리고 죽는다면, 화려하게 죽고 싶어! 가장 마음에 드는 상대와 싸우거나, 죽고 죽이거나, 전부 죽이거나…….”
벨라의 웃음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나는 성진이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켰다. 쏟아지는 공간 사이에서 벨라가 속삭였다.
“다음에 보자. 이제 얼마 안 남았어….”
검은 보석, 검은 덩굴 날개와 함께, 포츈과 벨라의 모습이 우리의 영역에서 사라졌다. 나는 라이라와 성진이의 품에서 숨을 고르며 이를 악물었다.
생각보다 공간이 고정되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쏟아지는 공간은 실체가 있는 것을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그저 공간을 긴밀히 연결하고 응축했다.
큰 변화는 아니었지만, 곤란한 변화였다. 하늘에 새겨진 금 같은 선은 트라던트의 힘을 우주를 널리 전달시키는 통로다. 그리고 저것 탓에 공간의 법칙이 고정되어 우주를 오가기가 많이 불편해졌다. 선마다 공간 층이 다르다. 선 근처는 분명 앞을 보기도 힘들 거다.
디나와 라이라가 우리 몸을 치료했다. 라이라는 디나의 말에 따라 자신의 몸을 붙이는 걸 우선시했다. 나는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검은색 안개를 환각마법으로 굳혀 모았다. 악의와 적의가 느껴지는 벨라의 마력을 입안에 넣어 씹어 삼켰다.
“은하 님!”
“윽…….”
디나가 기겁했다. 벨라의 마력은 짙고 질척했다. 매캐하고 쓰고 깊었다. 그런데 기이하리만큼 달콤했다.
내부가 잘게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실제로 목 안에서 피가 올라온 것을 보면 베인 것 같다. 라이라가 기겁하며 물었다.
“맛있어요?”
“기분은 더럽지만요, 괜찮아요.”
고민하던 라이라가 거울을 꺼냈다.
“으음. 이거……거울에 오래 두면 위험할 것 같은데, 혹시 이것도 리더 님이 드실래요?”
깨어진 거울 조각이 불완전하게 합쳐지며 시커먼 칼날로 변했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로 벨라의 기술을 거울로 복사했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거울에서 꺼내자마자 날뛰려 드는 벨라의 거울 그림자를 씹어 삼켰다.
주인에게서 떨어진 마력이라면, 거울로 비춘 그림자의 마력이라면, 이제 벨라의 마력이라 할지라도 환각마법으로 정제해 먹을 수 있다.
먹은 마력에서 벨라의 꿈이 느껴진다. 피와 고통으로 점철된 기분 나쁘게 슬픈 마력이었다. 나는 크게 기침하며 피를 토했다. 디나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만류했다.
“은하 님, 심장을 다친 상태란 걸 자각하시고, 제발 이제 무리하지 마세요.”
“괜찮아요. 심장은 곧 치료될 것 같고……팔만 떨어지지 않게 붙여 주세요.”
“내 팔은 이제 됐어. 곧 알아서 붙을 거야. 은하의 부상부터 빨리 회복시켜 줘.”
“두 사람 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얌전히 치료받으세요!”
디나가 부상에 무심한 나와 성진이를 향해 화를 냈다. 내게 벨라의 파편을 건네주었던 라이라는 자기 몸을 치료하며 치유의 불꽃을 모두에게 나눠 주다 말고 디나의 이글거리는 눈총에 움찔 시선을 피했다.
“다른 대륙이 어디 있는지 알겠나? 그보다, 이걸 이끌고 갈 수 있어?”
레녹의 질문에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보다 좀 무거워져서 그렇지, 이끌고 갈 수 있어요. 이를테면……양손으로 들고 가기 무거운 짐을 줄로 매달고 바닥에 질질 끌고 가는 느낌이랄까요.”
“끄응.”
“당장 모든 대륙이 어디 있는지는 알지 못하겠지만, 두 개는 찾았어요. 가장 가까운 곳부터 가요.”
“혹시 오른쪽인가요?”
라이라도 어렴풋이 갈라진 대륙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는가 보다. 대륙보다는 거울을 지니고 있는 동료의 위치겠지만.
“응. 오른쪽.”
“오른쪽에는 소영 님이 있어요!”
나는 가슴과 팔이 아무는 것을 확인하며 선뜩한 감정을 눌러 참았다. 죽음 없는 종결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벨라가, 트라베리아가 말했다. 항상 수많은 죽음을 몰고 다니는 트라베리아가.
“지혈이 되는대로, 방어를 굳히면서 움직이자.”
불길한 상상이 멈추지 않는다. 나는 금이 간 것 같은 하늘을 노려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35. 나아가는 자
한편, 벨라의 힘에 의해 갈라진 다른 대륙도 트라베리아에 의해 공격받고 있었다. 유은하 일행과는 달리 인사 따위는 없었다. 벨라로 인해 파헤쳐진 피난 도시가 복구되기 전에 공격이 떨어졌다.
그림자 도시는 꿈의 이면에 있는 만큼 보통은 볼 수 없다. 그런데 벨라는 루카의 봉인을 베어 냈을 뿐만이 아니라 그림자 도시가 ‘공간’에 속한다는 것 하나만으로 전부 파헤쳐 버리고, 파헤치는 것으로 인해 그림자 도시의 실체를 바깥에 드러내 버렸다.
대륙에 공격을 내리는 방식은 마법사마다 다양했다. 아프리카 반쪽 외 6개로 갈라진 대륙 혹은 섬에 커븐 로드가 한 명씩 내려섰다.
아프리카와 비슷하게 두 동강이 난 남극 중 하나에내려선 것은 카인이었다. 카인의 옆에 측근이 두 명 동행했다. 트라베리아 소속 마법사, 라리마 유디프, 장군 시리즈 메리(인형 악령).
테온과 이소영은 채 복구되지 못한 그림자 도시를 향해 떨어지는 인형과 실 폭격을 최대한 막으며 걱정을 삼켰다.
“저흰 분명 새벽별무리에 있었는데…….”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속 쓰리네. 봉인은 반파 수준에, 지키던 대륙도 3분의 1이 사라졌고,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흩어졌으니. 그나마 하인리히 씨랑 같이 떨어져서 다행이야.”
“그건 확실히 다행입니다만……저희 본부와 동료들이 걱정입니다.”
“그건, 나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무수히 많은 인형 폭탄은 라리마의 마법이다. 라리마도 트라베리아 소속이란 말에 걸맞은 S랭크 상위 마법사였다.
현재 남극에서 커븐 로드를 상대할 수 있는 마법사는 리브리의 하인리히, 앤서니, 란 리나, 구 트라베리아의 오시언, 새벽별무리 일원인 이소영, 테온이다.
리브리의 대처는 빨랐다. 그림자 도시가 헤집어진 걸 확인한 순간 하인리히는 미리 그림자 도시로 옮겨 두었던 ‘천공 도시 리브리’를 발동시켜 그림자 도시 곳곳을 리브리의 방범 시스템으로 삼켰다. 헤집어진 상처에 비교적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손목에 찬 호신 아이템을 발동시키며 리브리의 시스템과 레미의 안내를 따라 좀 더 안전한 장소로 피난을 시작했다.
문제는 커븐 로드도 만만치 않아 그림자의 틈새에 이미 카인의 실이 침범했다는 것과, 그림자 도시가 헤집어지며 상당수의 사람이 도시 바깥으로 흩어졌다는 것이다. 넓게 퍼진 실을 따라 공간이 일그러져 호신구를 통한 이동이 제한되는 장소가 생겼으며, 호신구는 실의 공격을 몇 번 버티지 못하고, 호신구가 깨지면 실에 닿은 자는 목숨을 잃는다.
리브리는 그런 장소에 책을 보냈다. 리브리가 지니고 있는 책은 대부분 특별한 힘이 있다. 또한 책에는 귀환 기능이 있어 책을 쥔 사람과 함께 리브리 안으로 이동시킬 수 있다. 카인의 실 때문에 바로 이동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호신구만 있는 것보다는 몸을 오래 지킬 수 있다.
사람들을 지키고 더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면서 리브리는 떨어지는 카인의 실을 떨구고, 그림자 도시를 수복하고, 봉인 벽을 덧씌웠다.
카인 일행이 그걸 두고 보진 않았다. 카인은 주위의 실을 넓히며 그림자의 틈새로 실과 작은 인형들을 계속 던져 넣었다. 그 탓에 국민들의 보호가 더 늦어지고 있다.
이소영은 이를 악물며 카인의 실과 인형을 파괴했다.
“더럽게 안 끊어지네!”
카인의 실은 강하고 단단하다. 카인의 메인마법인 인형마법의 핵심이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여기에서 카인의 실을 제대로 끊을 수 있는 건 이소영, 테온, 하인리히 정도다. 다만 테온은 이소영의 힘을 빌려야만 가능하다. 란 리나, 앤서니, 오시언도 어느 정도 실을 끊을 수 있지만 급박한 상황에서는 안 하는 것과 별다를 것 없을 정도로 시간이 걸린다.
거기다 카인의 실은 특수하여 어디에서든 제 힘을 발휘한다. 그림자 도시의 입구를 쉽게 닫지 못하는 건 그래서다. 그림자 도시 바깥으로 튕겨나간 국민들이 보다 안전한 그림자 도시로 피난할 때까지 하인리히를 제외한 일행은 카인의 실을 끊고 마법을 방어하는 데 온 힘을 다할 것이다.
“두 명 모자란걸.”
앤서니의 눈이 가늘어졌다. 키메라 일행의 이야기에 따르면 카인의 측근은 총 4명이다.
한 명은 지금 카인의 옆에 서 있는 라리마 유디프. 라리마는 랭킹 30위 부근에 해당하는 트라베리아의 마법사로 꽤나 사건을 일으켰다. 인형 메리는 오늘까진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키메라로 특수한 이동 기술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 없는 측근은 전쟁 때 자주 카인의 옆에서 모습을 보였던 로기아(고스트), 아직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셰이드(도플갱어)다.
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트라베리아는 결코 새블레를 얕보지 않는다. 당장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쳐들어온 전력이 더 있을 가능성이 크다.
“소환! 라이라의 거울!”
“거울의 환경.”
이소영과 테온이 동시에 마법을 사용했다. 이소영이 라이라에게 받은 거울을 통해 라이라의 거울을 소환하고, 테온이 거울을 이용하여 거울 환경을 만들었다.
“소환! 진실의 그림자!”
거울 환경이 최인성의 그림자 도시를 파고들고, 이소영이 그림자 도시에서 최인성의 그림자를 소환해 거울 안에 집어넣었다. 카인의 측근인 로기아(고스트)와 셰이드(도플갱어)는 변신과 위장의 귀재다. 그리고 새블레에서 키메라들의 마법을 제일 잘 아는 건 틀림없이 라이라다. 거울에 얼핏 그림자가 비쳤다.
“역시! 둘 다 있어! 민간인 사이에 섞여 들었나? 하지만 어디에 모습을 숨기고 있는지는 모르겠어!”
「사망자의 정보와 호신 아이템의 정보를 대조해 본 결과, 미심쩍은 인물은 없습니다.」
“그야 국민 한 명 한 명 파악하고 있다는 것쯤 생각하고 숨어들었겠지? 리브리의 영역에서 아직 들키지 않았다니, 라이라의 말대로 그 둘은 확실히 변신과 은신의 귀재네.”
이소영은 혀를 차면서도 계속해서 실과 인형을 베었다. 앤서니가 거울을 향해 공을 닮은 마력을 던지며 외쳤다.
“리나 양은 전투엔 좀 약해서 피난을 돕는 게 나을 것 같아. 너희 둘은 나랑 저놈들 좀 막으러 가자!”
앤서니가 이소영과 테온을 가리켰다. 이소영이 바람을 통해 외쳤다.
“안에 섞여든 놈들은 어떡하죠?”
“괜찮아.”
이소영의 옆에서 방어마법을 펼치고 있던 오시언이 카드를 펼치며 말했다.
“넌 전투에 집중해. 수색은 내 전문. 최선을 다해 지킬게.”
“…….”
이소영의 눈이 조금 가라앉았다. 오시언은 아마 진심으로 카인과 싸울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카인보다 훨씬 약한데도 진심으로 카인을 공격할 수 없다. 앤서니가 씩 웃으며 오시언의 제안을 반겼다.
“그럼 바깥에 튕겨 나간 사람들을 부탁할게. 그림자 도시 안쪽은 우리 애들한테 맡기면 돼.”
“그래?”
“어. 리나 양, 로카 군, 하인리히 셋 다 수색 특화야. 영혼이든 꿈이든 리브리 안에선 문제없이 볼 수 있어. 자연의 가호는 당신이 좀 조정해 주면 좋겠지만……. 거기다 리브리의 대원은 리브리 안에선 죽지 않아. 카인이나 라리마를 상대하는 게 아니고서야 문제없다고. 그러니 지금 문제는 카인을 막을 수 있을까 없을까인데…….”
여기에서 카인과 대등한 실력자는 하인리히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인리히는 마법 도시 ‘리브리’의 주인, 현재 대규모의 도시를 지키고 카인으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마법사 역시 하인리히밖에 없다.
이소영은 자연과 바람의 극의를 하나 깨우친 이후로 또 한 번 무서운 속도로 강해졌지만, 아직 카인을 상대하기엔 조금 모자라다.
다른 사람에겐 많이, 그러나 새벽별무리에게는 ‘조금’이다. 적당한 실력 차라고 생각하며 이소영은 카인을 노려보았다. 이소영의 목표는 시카이므로, 고작 여기에서 멈춰 설 수 없다.
“약한 소리는 금물이에요. 막을 수 있을지 어떨지가 아니라, 반드시 막아 내야죠. 그리고 사람들이 모두 리브리의 보호 안에 들어가면 그땐 카인을 쓰러뜨리기 위해 전력을 다할 거예요.”
이소영이 그림자 상흔에 걸쳐진 실을 끊고 그림자 도시 안에 들어간 인형을 파괴하기 위해 조금 멀리 보냈던 이안과 요정들이 돌아왔다. 앤서니와 테온이 이소영을 신뢰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뭐, 지금은 지키는 게 우선이지만요.”
“그렇지. 오시언 씨! 외곽에 날아간 사람들부터 보호 부탁해!”
“알았어.”
“역소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이소영이 재빨리 오시언에게 역소환을 걸었다. 사람들의 보호를 굳히려는 걸 방해하기 위해 막 카인과 라리마가 실타래와 인형 더미를 던졌기 때문이다.
테온과 앤서니가 마법으로 방어했으나 하인리히의 힘과 레미의 결계가 발동된 새블레의 영역임에도, 그들은 떨어지는 카인의 실을 거의 파괴하지 못했다.
뒤이어 이안과 요정이 폭풍을 내뿜어 카인의 실을 튕겨 냈다. 그러나 역시 다 튕겨 내지는 못했다.
이소영은 겨우 오시언을 실의 영역 바깥으로 튕겨 낸 뒤 손을 휘둘렀다. 이소영에게서 일어난 폭풍에 인형 폭탄이 부딪치며 크게 폭발했다. 타오른 불씨가 주위를 불꽃 천지로 만들었다.
이소영은 자신에게 떨어지는 실을 바람으로 끊어내며 이를 갈았다. 단순히 끊어 내는 정도로는 다시 잇고 만다. 끊고, 끊고, 종내에는 산산조각 내 가루로 만들어 버려야 한다.
“망할! 누가 커븐 로드 아니랄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