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501
“응. 쓰러뜨릴 거야. 그러기 위해 여기에 있는 거야.”
“제작가님, 저희를 제대로 써 주십시오. 저 건방진 입을 다물게 하겠습니다.”
페니 역시 불만을 표했다. 부서진 인형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라리마가 분해되어 다시 이소영에게로 돌아가는 바람 가시를 긴 칼로 슥 그어 조형했다.
“글쎄다. 나는 이렇게 시간을 끄는 것도 아주 나쁘진 않은데. 너흴 쓰러뜨리기엔 부족하겠지만 괜찮은 인형들이 꽤 남아 있거든. 이렇게 너희의 마력을 소모시키고 해석하는 것도 괜찮지. 아무리 그래도 날 여기에 내버려 두고 리브리로 가진 못할 거잖아?”
“그러니까 네 역할은 강한 마법사 몇 명 묶어 두는 걸로 끝이다 이거야?”
“그렇지. 제니는 여기에 없는 모양이니까, 가장 성가신 세 명 정도……. 으음, 안타깝게도 앤서니를 놓쳤지만. 내가 좀 하는 건 사실이지만 자랑스러운 친구에 비하면 별 볼일 없는 실력이거든요. 하물며 하인리히의 영역 안에서 하인리히랑 싸우는 건 좀…….”
테온이 인상을 썼다. 테온으로써는 소모전이 가장 달갑지 않다. 라리마의 말대로, 가장 위협적인 것은 카인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라리마를 지키는 인형과 기둥은 무척 성가시다.
“아, 그래?”
하지만 이소영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소모전을 노린 기술’은 적을 깨부수기 위한 마법에 비하면 위력이 부족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각오가 약하다. 그렇다면 전심전력을 다해 깨부수면 그만이다.
이소영이 아직 조형되지 않은 바람을 불러들였다. 움직이는 바람을 또 한 번 칼로 베어 자신의 편으로 조정한 라리마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하지만 널 그런 소모전 각오로 상대했다간 제대로 대비도 못하고 지고 말겠지. 그래선 카인한테 면목이 안 서.”
라리마가 칼을 들며 이소영과 테온에게 물었다.
“내 마법에 대해선 이미 그 녀석들한테 들었지?”
“그래. 너희 옛 동료들한테 자세히 들었어. 특히 레이크 씨가 많이 알더라.”
“레이크? 좋은 녀석이지. 착하고 마음이 여려. 처음 우리가 트라베리아에 왔을 때 많이 신경 써 준 놈이야. 기초마법은 그 녀석한테 배웠어.”
라리마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네가 확실히 강하긴 많이 강해. 너한텐 소모전용으로 딱 좋은 ‘인형 저주’가 안 먹힐 것 같네. 너한테 안 먹히면 네 환경을 삼키는 저 남자한테 써도 금방 풀리겠고.”
“당연히 안 먹히지. 난 바람이니까.”
“거 참, 시카가 좋아할 만한 타입인걸?”
“그거 기분 좋네. 같은 정령의 계약자라서 그런지 시카와는 꼭 한 번 싸워 보고 싶거든.”
“역시 새벽별무리답게 무서움을 모르네~. 아니다, 모르니까 할 수 있는 소리겠지. 너는 시카에게 절대 이길 수 없는 조건이란 조건은 다 갖추었거든.”
“뭐?”
이소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라리마가 제 어깨에 있는 인형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네 말대로 페니와 라움 둘의 힘으로도 너흴 상대로는 오래 버티지 못하겠지.”
“제작가님…!”
“너도 그래.”
이소영은 도발하는 눈빛으로 라리마를 마주 보며 생긋 웃었다.
“너도 오래 버티지 못할걸. 너와 페니는 실력이 비슷하잖아. 네가 좀 더 약한가?”
“저것이 제작가님께…!”
화를 내는 인형들과 달리 라리마는 긴 갈색 앞머리 사이로 동요 없이 이소영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라리마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렇게 생각해?”
목소리에 섞인 섬뜩한 기색에 이소영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우리가 친우들을 봉인하고 100년. 사람은 변해. 성장하거나, 노쇠하거나, 죽음을 맞이하지. 너희도 알겠지만 사람은 미치면 별짓을 다해. 쓸 수 있는 수는 파헤쳐서라도 더 발견해 내고 말아.”
라리마가 어깨 위 봉제 인형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인형을 통과한 라리마의 손이 시계방향으로 조금 돌아간 순간, 인형 안에서 새빨간 빛이 새어 나왔다.
째…깍
오래된 태엽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라리마의 발밑을 따라 기둥을 둘러싼 장식과 닮은 마법진이 퍼졌다.
쿠구구궁…….
“카인이 내게 내린 명령은 강한 놈 몇 명을 막아 두는 게 맞지만, 사실 그게 우리의 이번 목표인 건 아니야. 우리의 이번 목적은 사람을 ‘적당히’ 죽이는 것. 카인은 하인리히 때문에 고생하고 있을 테니 이번엔 나도 힘내야겠다. 너흴 상대로 소모전 따윌 했다간 사람을 죽일 기회가 더 줄어들 테니까.”
「소영 님!」
이안이 이소영을 부르며 주위에 풍화의 바람을 퍼트렸다. 라리마의 마법이 그림자 도시에 닿는 일만은 없어야 했다.
인형 안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빛은 봉인을 해제한 증거. 라리마의 안에 갇혀 있던 카인의 마력이 지금 풀려났다.
“그러니 이제 아끼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이제 정말로 얼마 안 남았으니까.”
무섭게 들끓는 마력을 향해 이소영과 테온은 눈을 부릅떴다.
카인은 그림자 도시 안에 숨어 아직 모습을 들키지 않았던 고스트의 분신과 몸을 바꿔치기 했다. 자연의 힘으로 모습을 숨긴 실을 뿜는 영체 인형을 설치해 그림자 도시의 출입구가 폐쇄되지 않게 조치하고, 공간을 뚫기 위한 인형 무리를 은밀하게 퍼트렸다. 그러면서 카인은 실, 인형의 부품, 바꿔치기한 분신의 기억을 통해 그림자 도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확인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카인이라 할지라도 실을 뻗지 않고서는 정신세계에 가까운 그림자 도시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었다. 카인은 무생물에 영혼을 불어넣거나 제작할 수 있고, 영혼을 통해 인격이나 정신을 조작할 수 있지만, 정신세계 등의 이차원을 깊게 감지하는 타입은 아니다.
카인은 그림자 도시의 상흔을 가로막은 실을 넓히며 그것을 통해 좀 더 흐름을 읽었다. 최인성이 만든 그림자 도시만 해도 미로인데, 하인리히의 도서관이 영역을 차지하니 더 미로 같아 졌다. 상흔이 있는 공간과 연결되어 있던 도시를 움직여 출입구와 연결된 길을 끊고, 사람들은 더 깊은 공간이나, 하인리히의 책 안으로 피난한다.
“그렇군. 길이 끊긴 이상 사람들이 있는 공간에 가려면 공간의 중심인 리브리에서 접근하는 게 가장 가까운가. 좋군, 원하는 바다.”
카인은 이번엔 리브리 안에 피난한 국민인 척 있던 도플갱어 셰이드와 몸을 바꿨다. 피난민 치고는 그럭저럭 강한 몸을 잡아먹은 도플갱어는 카인의 명령을 따라 바꿔치기 되기 전까지는 정체를 들키지 않고 있었다.
고스트 로기아는 안타깝게도 본체를 들켰지만, 그래도 영체 상태로 꽤 많은 분신을 퍼트렸다. 언제든지 바꿔치기 할 수 있는 상태다.
“리브리 몰래 용케 이렇게 많이 퍼트렸구나. 이제 부숴도 된다. 최대한 많이 영혼을 새겨라.”
고스트와 도플갱어에게 내리는 명령이었다. 고스트와 도플갱어가 몰래 설치해 두었던 마법 혹은 분신을 하나 둘 터트렸다. 두 측근을 통해 카인에게 폭발음이 전달되었다.
카인은 그림자 도시에 두고 온 인형을 기동시키며 실을 뻗었다. 리브리는 넓다. 자신의 영역이 아닌 곳을 활보하기 위해서는 탐색이 최우선이다.
있는 곳을 들키더라도 말이다. 어차피 리브리에서 들키지 않고 실을 퍼트릴 방법은 아주 적다. 거기다 이 도시에는 오시언과 이소영이 있기에 시카의 정령석을 사용하지 않으면 자연의 가호를 쓰는 것조차 여의치 않다.
가까운 곳에서 고스트 본체를 상대하고 있던 리브리의 S랭크 마법사 토루카가 카인의 실을 발견하고는 다급히 책을 열었다.
도서관 리브리는 하인리히의 마법공간이며, 리브리 대원들의 영역이다. 리브리의 수많은 책속에는 침입자를 격퇴하는 지킴이가 살며, 지킴이는 오래된 책의 괴물일수록 강하다.
“나와라, 별자리의 수호자여!”
마침 토루카 옆에 있던 책은 별자리 책이었다. 용, 사자, 고래, 사수 등 반짝이는 별을 담은 괴물이 카인을 덮쳤다. 그러나 카인은 너무도 간단히 실로 괴물들의 사지를 봉쇄했다.
“나와라, 마누엘.”
카인의 뒤로 대검을 쥔 검은 갑옷 전사가 나타났다. 마누엘이 대검을 휘두르자 별자리의 괴물들은 모두 소멸되었다. 카인의 뒤에서 날아간 은푸른 검이 토루카를 꿰뚫었다.
“윽……!”
토루카의 모습이 지지직 흔들리며 사라졌다. 카인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렇군. 리브리 안에선 아군이 죽지 않게끔 만들어 둔 건가. 제법 애를 쓰고 있군, 하인리히.”
마누엘이 다시 한번 검을 그었다. 카인이 있던 서가가 순식간에 엉망진창으로 무너졌다.
카인이 발을 디디고 있던 공간이 변했다. 공간이 일그러지며 사물이 휘었다. 가볍게 검을 긋자 아무것도 닿지 않는다.
“제법이군. 도서관 안에선 사람을 죽이는 게 꽤 힘들겠어.”
그나마 마누엘의 검이 닿은 것은 마누엘이 공간과 어둠을 다루는 인형이기 때문이다.
리브리의 피난 속도는 빠르고, 그림자 도시의 힘은 뛰어나다. 그러니 사람이 많은 곳에 가려면 리브리를 움직이거나 리브리 안의 사람을 습격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데, 이 안에서는 또 사람을 죽이기 힘들다. 역시 오랜 시간 세계를 지킨 연맹의 핵심 마법사는 명불허전이었다.
“카인 님, 제 어깨에 올라타십시오. 공간을 베겠습니다.”
“그래, 빌리겠다.”
마누엘의 어깨에 올라타며 카인은 다시금 실을 뻗었다. 이번에는 마누엘의 공간속성이 섞여 있었다. 리브리는 하인리히가 만든 마법이며 영역이다. 그러나 카인은 조종하는 데에는 통달했다. 카인에게서 뻗어져나간 무수히 많은 실이 닿는 것을 잡아먹으며 파고든다.
카인은 영혼을 보고 마음을 본다. 특수능력이 사이코메트리일 정도다. 실에 닿는 물건의 기억을 볼 수 있으며, 마법에 직접 닿아 정보를 모을 수 있고, 사람의 영혼에 실을 내릴 수 있다.
허나 리브리와 그림자 도시의 특수함이 대단해 생각보다 보이지 않았다. 그림자에서 흘러들어오는 트라베리아를 향한 악의에 카인은 드물게도 불쾌함과 피곤함을 느꼈다.
실이 닿는 범위에서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우연일 수도 있고, 리브리가 카인의 출현을 확인하고 공간의 구조를 바꾸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때 카인의 가슴이 어렴풋이 빛났다. 카인은 바깥에서 싸우는 친구의 이름을 읊조리며 실에 힘을 더했다.
트라베리아는 참극을 일으켰을 때부터 세계를 멸망시킬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트라베리아보다 월등히 강한 루키아는 죽었다. 세계를 탐색해 보았으나 하르펜과 이노키언은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고, 로타는 수명이 다해 본래의 힘을 다 발휘할 수 없다.
더해 트라베리아보다 강한 마법사들은 죄다 ‘세상의 흐름에서 벗어난 마법사’였다. 흐름에서 벗어난 마법사는 세상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모든 힘을 발휘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트라베리아는 루키아 이외의 마법사가 상대라면 힘을 합쳐 어떻게든 쓰러뜨릴 수 있다고 판단을 내렸다.
어느 쪽이었든 트라베리아의 판단은 틀리지 않아, 세상이 이 꼴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르펜과 이노키언은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는다. 죽었거나, 아니면…….
그럼에도 트라베리아가 처음부터 세계를 멸망시키지 않았던 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재료’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랭킹 1위에서 4위의 영혼은 트라베리아가 다룰 수 없다. 세상을 벗어난 영혼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벗어나지 않았더라고 해도 트라베리아가 다룰 수 있었을지는 사실 의문이었다. 그들은 살아 있을 때부터 트라베리아보다 강했으니까.
부족한 힘을 짜내고 증폭시키기 위해 온갖 수를 다했다. 새벽별무리란 원석이 나타나 다듬어지고 있는 지금에도 아직 에너지가 부족했다.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한 대마법은 이제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그러니 적당히 죽이자.
기왕이면 마지막에 강한 적들을 편하게 죽일 수 있도록 이 기회에 그들의 힘을 잘 파악해 두자.
카인이 구태여 불리함을 감수하고 리브리 안에 직접 들어온 것은 그런 이유가 가장 컸다.
거기다 이번에 이 도시는 ‘표적’이 아니었다.
표적으로 삼고 전력으로 부딪치기에 이 도시는 당장 죽이면 곤란한 사람이 산재해 있다. 하인리히, 오시언, 이소영. 말하자면 이번에 카인의 부대는 탐색 부대였다. 또한 그것은 트라베리아가 그만큼 연맹의 실력을 높게 치고 있다는 뜻이었다.
카인이 생각하기에도 지금의 세계 수호 연맹, 수호 연방국 새블레는 강하다. 원래도 상당한 강함을 겸비하고 있었지만 새벽별무리가 더해지면서 훨씬 튼튼해졌다. 하물며 트라베리아가 만들어 낸 무기, 키메라를 같은 편으로 받아들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마누엘은 카인을 어깨에 짊어진 채 실을 따라 몇 번 몸을 이동했다. 이동에 방해되는 공간과 책은 전부 마누엘이 베어 냈다.
카인의 실은 조종이자 연결, 카인은 자신의 실이 연결되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다. 주위가 무너지건 말건 실을 잡아당기고 조종하던 카인은 실 끝에서 묘한 감촉을 느끼고 잠시 멈칫했다.
카인은 지금 마누엘의 눈을 통해 주위의 공간을 보고 있다. 허나 그림자에 포함된 꿈의 힘 때문에 중간중간 일그러져 보인다.
예상은 했지만, 지금의 새블레는 카인에게 잘 맞지 않았다. 마누엘은 공간을 감지한다. 카인은 감지에 실을 더해 탐색한다.
그러나 그림자 도시가 더해진 지금의 리브리는 영혼, 공간, 정신, 모두 카인의 상극이었다. 사념 투성이인 사악한 영혼과 정신에, 무수히 모습을 바꾸는 꿈의 공간.
지금 상태로는 리브리를 탐색하기엔 부족한 것을 자각하고, 카인은 ‘동력고’를 열었다.
“동력 교체.”
카인의 옆에 어린아이만한 작은 목조 인형이 나타났다. 그 인형은 팔다리는 있었지만 표정도 머리카락도 없었으며, 머리 위로 카인과 닮은 로브가 펄럭거리고 있었다.
인형의 가슴이 열리며 나타난 어둠 안쪽에서 보석이 반짝였다. 카인이 열린 가슴에 손을 넣었다 빼자, 카인의 손가락에 조금 전까지는 없었던 반지가 끼워졌다.
반지만이 아니다. 귀에 걸린 귀걸이의 색은 물론 왼쪽 눈동자도 색이 바뀌었다.
반지는 검은색과 은녹색, 눈동자는 은녹색, 귀걸이는 검은색. 그래, 명백히 꿈의 그물의 중심 탑, ‘알피스’의 마법이다.
‘알피스’와 눈을 바꾸니 카인에게 이 세계의 구조가 좀 더 보였다.
그래, 리브리의 책과 그림자의 힘으로 일그러져 캄캄했던 부분까지 잘 보였다. 카인은 분명 사람이 있는 공간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지만, 어느 샌가 카인이 지나다니는 공간 주위를 리브리의 책장이 둘러싸듯 다가오고 있었다. 카인의 실이 사람에게 닿지 못하도록 무수히 많은 책과 깊은 공간으로 그를 가두려는 것이다.
카인을 향해 리브리의 마법이, 그림자 도시의 악의가 몰려들고 있다.
“여기에 갇히면 하인리히와 직접 부딪치게 되는 건가. 목표를 이루기 전에 갇히면 귀찮아지겠군.”
뻗어진 실의 색이 변했다. 은녹색과 검은색, 소니아와 유클라프의 색이다.
공간과 꿈의 실이 책장과 함께 일그러지는 공간을 관통했다. 검은 실 중간 중간에 공간을 뛰어 넘는 공이 생기고, 은녹색 실 중간에는 수정이 생겨나며 실이 수 갈래로 갈라졌다.
카인의 실은 하인리히의 공간 안에서도 본래의 힘을 발휘했다. 그러나 하인리히는 자신의 공간 안에서 평소보다 훨씬 강하다. 카인은 몇 번 공간을 뚫고 좀 더 깊은 차원을 잡아당겨 사람들이 있는 그림자 도시에 가까워졌지만, 리브리 안에 있는 피난소에는 가까워지지 못했다. 더하여 카인과 마누엘을 뒤쫓는 공간 벽은 점점 두꺼워졌다.
카인의 위로 우수수 책이 쏟아졌다. 책에서 나타난 그림자가 카인을 공격하며 주위를 더 일그러뜨렸다. 하인리히의 목적은 카인을 이곳에 격리시키는 것.
카인의 실이 영향력을 넓히며 피난민이 있는 그림자 도시의 통로에 파고들었을 때, 실 끝에서 모래시계가 나타났다.
모래시계가 역행하며 실의 시간을 억지로 돌린다. 실이 물러나며 카인의 조종하는 힘이 조금 약해졌다.
“루인.”
카인은 이번엔 인형이 아니라 인형의 힘만 불러왔다. 실 너머에 분홍색 빛 가루가 떨어졌다. 루인의 빛 가루는 시간의 힘, 모래시계가 멈추며 공간이 억지로 열린다.
끼긱─.
그때 실 너머의 공간과 카인이 있는 곳이 분리되는 느낌이 났다. 하인리히가 카인의 실과 함께 공간을 자른 것이다. 카인과 하인리히의 힘은 대등, 이대로 격리되면 바깥에 나가기까지 상당히 고생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 안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을 때 카인을 보다 분노하게 하는 것은 주어진 역할을 조금도 수행하지 못했다는 책임감일 것이다.
‘실이 끊겼다. 허나 끊겼을 뿐 아직 남아 있다.’
공간 너머에 닿은 실은 알피스의 실. 공간을 잇기에 아주 걸맞은 실이다.
“나와라, 루인.”
이번에는 힘이 아니라 본체를 부르며 카인이 실을 움직였다. 카인의 의지를 따라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실이 ‘영혼’으로 연결되었다. 검은 실이 공으로 변하며 공간이 열리고, 녹은색 실이 연보라색으로 변해 주위에 회로 같은 문양을 새겼다.
그 사이를 파고든 모래 같은 마력이 하인리히의 모래시계를 잡아먹고 더 큰 분홍색 모래시계로 변했다. 카인의 뒤로 커다란 인형, ‘루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간을 다루는 인형 루인. 하얀 머리카락에 분홍색 눈동자를 지닌 여자 인형이며, 등에는 날개가 달려 있고, 시계의 부품을 배경처럼 주위에 두르고 있다. 또한 손에는 금과 분홍색 무늬로 장식된 긴 검이 들려 있었다.
카인의 주위를 둘러싼 공간의 일그러짐이 짙어졌다. 카인이 실을 손가락에 엮고 꽉 잡아당기며 마누엘의 어깨에서 내려갔다.
“통째로 베어라.”
루인과 마누엘의 검이 동시에 공간을 향해 떨어졌다.
인형의 안에 있는 태엽이 돌아가며 라리마의 가슴에 봉인된 카인의 마력고가 열렸다. 그 순간 라리마는 진화했다. 은푸른 마력이 라리마의 황갈색 마력을 덮어 씌웠으며, 라리마의 몸에 은푸른 실이 휘감겼다.
“미친!”
라리마의 가슴 안에서 은푸른 ‘심장’이 진동했다. 요정들과 이안이 속삭였다.
「이제 보니 저거 단순히 마력 저장 장치가 아닌 것 같은데?」
「카인이랑 연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마력을 공유하고 있다는 거야?」
「그 정도가 아니라, 저 저장 장치, 라리마의 마력을 조종해서 마법을 진화시키고 있어!」
이소영이 헛웃음을 지었다.
“미친 거 아냐? 동료를 인형으로 만들어?”
라리마 유디프.
마녀 사냥에 쫓겨 카인과 함께 트라베리아로 간 카인의 절친한 친구.
인간에게 복수를 맹세한 트라베리아의 마법사.
그리고 그는 카인의 ‘인형’이다.
남자가 얼굴에 호전적인 미소를 띠웠다.
“알잖아? 우리가 자기 것에 대한 집착이 대단해.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미친 짓을 저지르겠어.”
그러며 라리마는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카인과 공유하는 마력 심장 위에 손을 올렸다.
“그 녀석은 내가 죽는 걸 자기가 죽기보다 싫어해. 먼저 죽게 할 바에야 자기 심장을 내놓고 나를 대신 살게 하겠지. 그래서 난 속박되기로 했어. 그로써 지금보다 더 강한 힘을 얻을 수 있다면, 마지막에 함께 죽을 수 있다면, 그만큼 멋진 일은 없잖아.”
“미친놈들.”
“말했잖아. 미치지 않고서 어떻게 여기에 서 있겠어.”
라리마의 눈동자가 푸르게 빛났다.
“너희도 비슷하지 않나? 응? 우리한테 미쳤잖아?”
심장의 진동과 함께 라리마의 안에서 마력이 쏟아진다. 라리마의 주위를 둘러싼 마법진과 기둥을 따라 흐르는 푸른 불꽃.
“다들! 전력 방어!”
라리마가 세모꼴 칼을 들었다. 이소영이 바람을 통해 소리를 날려 그림자 도시에도 경고했다. 소리를 날리기 위해 흩어졌던 요정과 이안이 진형을 그리며 바람을 두텁게 쌓는다.
오시언과 리브리가 힘을 다했지만 아직 카인의 실을 전부 끊지 못했다. 라리마를 따라 흐르는 카인의 마력에 반응해 그림자 도시까지 꿰뚫은 실이 더 두껍고 강해졌다.
은푸른 힘과 황갈색 힘이 라리마의 주위에 남아 있는 인형들 혹은 인형들이 부서지고 생긴 잔해에 옮겨 붙었다. 그러자 부서져 산산조각 났던 인형들의 몸마저 복구된다.
제작 영역을 이루는 기둥 위에 거대한 나무 손이 나타났다. 라리마의 가슴에서 시작된 실이 나무 손에 이어지고, 다시 라리마와 인형들에게 연결된다. 카인의 손을 대신하는 인형가의 손이다.
인형들이 각자 무기를 겨누었다. 그래, 라리마 역시.
‘이 마력 느낌, 자연의 고양감. 범위가 넓다!’
이소영은 테온을 이끌고 다급히 아래로 내려갔다. 저 마력을 보다 단단하게 방어하기 좋은 위치로.
“환경, 유펠르시아의 하늘.”
테온의 속삭임을 따라 주위의 공기가 변했다. 이안과 요정들은 오랫동안 유펠르시아를 지켰다. 그러니 유펠르시아의 하늘은 이안이 가장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하늘이었다.
“세리(하늘)!”
세리가 일시적으로 이소영의 단검에 융합했다. 단검은 모습을 바꿔 창으로 변화했다. 이소영이 단검을 창으로 변화시킨 이유는 별 것 없다. 기장이 긴만큼 공격 범위가 넓고 날이 날카롭기 때문이다.
“실의 공명이 강해지고 있어. 방어벽이 뚫리면 실을 통해 마법이 그림자 도시까지 미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야 돼.”
“명심하겠습니다.”
「리브리에도 전달했습니다. 레미도 인지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공명이 강해지자 그림자 아래 곳곳에서 카인이 미리 설치해두었던 새로운 실이 그림자와 봉인을 뚫고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벨라로 인한 상흔은 컸고, 이곳에 걸린 루카의 봉인은 아직 반파 상태였다. 벨라의 마력을 정화하며 봉인을 복구시키고 있기는 하지만 바깥에 튕겨 나간 사람들을 위한 출입구 문제도 있고, 카인의 실이 남아 있는 것도 있어 복구가 느리다.
리브리의 방어력이 있더라도 카인의 인형이 된 라리마의 공격을 맞으면 도시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라리마는 그 정도로 무시무시하다.
“제작가의 이름 아래, 마법을 폐기한다.”
라리마의 가장 강력한 기술 두 번째, ‘폐기’. 라리마의 주위에 휘몰아치는 황갈색 불꽃을 보고 테온과 이소영이 다급히 마법을 합쳤다.
“환경 조작, 천공의 폭풍.”
“소환, 유펠라의 천공마법!”
트라베리아의 마법사에게는 익숙할 수밖에 없는 이름에 라리마의 얼굴이 한순간 찌푸려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라리마와 이소영 일행의 표정은 역전되었다.
그림자 도시와 루카의 봉인 한복판에서 은푸른 마력에 휩싸인 모래 산 같은 마법 기둥이 솟아올랐다. 공간의 힘과 시간의 힘이 섞인 그 마법은 틀림없이 카인의 마력, 카인의 인형이 휘두른 마법이었다.
“저긴, 피난소……!”
테온이 이소영의 왼손을 꽉 감싸 쥐었다. 이소영이 다급히 라리마를 돌아보았다. 그와 거의 동시에 도시를 향해 ‘파괴’의 힘이 떨어졌다.
“윽…! 분쇄의……폭풍!”
그림자 도시의 피난소 중 하나가 뚫렸다! 봉인 안쪽에서 솟아난 힘인 만큼 진짜 마법 범위는 보이는 것보다 훨씬 넓을 지도 모른다. 사람이 죽었을까? 죽었다면 몇 명이나 죽었을까. 천 명? 만 명?
그러나 이소영은 반사적으로 냉정을 되찾았다. 테온의 덕도 컸으나, 지난 시간 동안 동료가 수도 없이 해 준 충고와 그를 위한 훈련 덕분이기도 했다.
전투 때는 항상 냉정을 유지해라. 언제 어느 때라도, 죽고 싶지 않다면. 더 잃고 싶지 않다면!
‘그래. 내가 여기서 막아 내지 못하면 더 많이 사라질 거야!’
이소영과 테온의 합동마법이 완성되었다. 유펠라의 천공마법은 자연의 힘을, ‘하늘의 힘’을 빌린 바람. 이안과 세리를 제외한 요정이 폭풍 속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자연의 힘과 심혼의 힘이 부딪쳤다.
의 고유 기술 ‘폐기’는 지정한 것을 산산이 부수는 파괴마법이다. 마법의 근원은 물론 사람의 영혼까지 가리지 않는다.
콰직, 콰지직!
두꺼운 하늘벽이 썩은 나무 조각처럼 부서졌다. 광범위한 ‘폐기’ 공격 사이로, 라리마를 통해 ‘폐기’의 힘을 받아들인 인형들이 무기를 들고 바람을 부쉈다. 다들 아까보다 훨씬 힘이 강해져 있었다.
특히 관통하는 힘을 지닌 페니의 기술은 성가셨다. 이소영은 벽을 빠져나갈 뻔한 페니의 마법 몇 개를 제 몸(바람)으로 받아들여 부쉈다. 테온은 페니 다음으로 성가신 라움의 우주마법을 중력마법과 분해마법으로 상쇄했다.
어느 순간 바람에 오시언의 가호가 더해졌다.
콰직!
라리마의 칼날이 이소영을 베었다. 크리스(결정)의 마법으로 소환된 보석이 바람을 뿜어내며 라리마의 칼날을 튕겨냈다. 그 사이로 본 적 있는 카드와 보석이 끼어들었다.
‘오시언 씨의 마법.’
크리스가 오시언의 도움을 받아 폐기의 힘을 조금 더 밀어냈다. 이소영은 집중하며 바람을 조작했다. 부수는, 힘. 파괴하는, 이 힘에도, 익숙해진다. 익숙해질 수 있다. 이소영은 안간힘을 다해 버텼다.
그때 이소영의 등 뒤로 거대한 질량의 바람이 몰아닥쳤다.
이소영의 마법 순도, 즉 바람의 깊이는 자연의 오의에 도달하면서 이미 최대치다. 이 이상 자연에 가까워지기는 힘들다. 어떤 바람속성 마법사의 바람도 이소영만큼 바람답지는 못할 것이다.
허나 그래도 이소영은 아직 커븐 로드와 정면으로 싸우기에는 힘이 부족했다. 가장 부족한 건 마력이다. 마력이 부족하고, 마법을 다루기 위한 깨달음이 부족했다.
부족한 힘이 조금 더해졌다. 하인리히의 도서관에서 나온 역사 속 신(神)의 바람. 이 힘이 있다면 이소영은 조금 더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직후, 이번엔 카인의 실이 등 뒤에서 이소영을 꿰뚫었다.
“……!”
──이소영과 테온이 만든 방어벽은 결국 산산이 부서졌다.
고작 고통 정도로 마법에서 손을 놓을 만큼 이소영은 나약하게 성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카인은 마법의 중심을, 사람의 영혼을 꿰뚫어 본다. 그렇기에 카인의 실은 이안과 함께 완벽히 바람으로 녹아 있는 이소영의 진짜 심장과 정신을 꿰뚫었다.
실에 꿰뚫린 부근부터 이소영의 마법이 풀려 나갔다. 이소영의 실체가 드러나고, 바람이 갈기갈기 해체되며, 실을 따라 이소영과 테온의 마력이 강제로 이끌렸다.
라리마와 카인의 공격이 결국 두 사람의 방어를 넘어서 도시에 떨어졌다. 하인리히의 분신이 펼친 책이 겨우 라리마의 ‘폐기’를 막아 냈으나, 실의 공명은 완벽히 막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도시를 꿰뚫은 실 근처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망할!’
이소영은 흩어진 바람을 삼키며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소영의 바람은 멈추지 않는다. 그렇기에 쉽게 조종당하지도 않는다. 조종이 전문인 카인이 아니었다면 마법이 풀릴 일은 없었을 것이다.
“욱…!”
“이런 방식으로 마법을 쓰고 싶지는 않았는데 말이지.”
“소영 님!”
마법이 풀리면서 상처를 입은 것은 테온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직접 공격당한 이소영보다는 타격이 적었다.
이소영의 육체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몸이 제멋대로 바람으로 변했다가 돌아오거나, 몸 일부가 일그러졌다. 이안과 요정들의 상태도 비슷했다. 어떤 요정은 반쯤 빛을 잃었다.
“사람의 혼을 직접 공격하는 건 재미가 없다. 마법과 육신에 비하면 너무도 간단히 부서져 버리기 때문이다.”
“카인.”
라리마가 상공에서 카인을 불렀다. 이소영은 숨을 고르며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았다. 그러나 그 손마저 일그러지며 뭉개지는 탓에 차라리 바람을 사용하여 흩어 버렸다.
“나와 주다니 고맙네. 아주……잘도 해 주셨어…….”
“소영 씨…!”
도시 한쪽을 지키고 있던 오시언이 달려왔다. 그 앞으로 카인의 실이 날카롭게 박혔다.
“아니, 생각보다 결과가 좋지 않다.”
카인이 습관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이며 이소영에게 답했다.
“고작 1000명밖에 못 삼켰다. 거기에 리브리의 가호 때문에 루인의 마법에 삼켜지고도 수백 명이 살아 있군.”
“살아……있다고?”
이소영과 테온이 눈을 크게 떴다.
“심지어 하인리히 때문에 공간 안에 격리당할 뻔했지. 공간이 닫히면 인형과 연결해도 쉽게 나올 수 없겠더군. 그래서 일단 나온 거다. 노릴 만한 공간의 위치도 확인했고, 실이 연결되었다면 안에서 조종하나 바깥에서 조종하나 별 다를 게 없거든. 리브리가 상대라면 오히려 바깥이 더 편하다.”
카인이 인형의 마법에 연결된 실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봉인을 부수며 솟아오르던 모래 같은 마력 기둥이 순식간에 나무 덩굴로 변해 굳었다.
은녹색이 섞인 검은색 마법석. 의심할 여지도 없이 알피스의 트라던트다!
“하인리히 씨…!”